4. 19개 교회를 찾아서
참변의 현장을 돌아보며
19개 교회 숫자에 대한 진실
6부 - 불탄 교회들에 대한 기록들
먼저 19개라는 숫자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건물이 소실된 것으로 나오는 통계표나 교회 이름, 기록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곳에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었는데 마을 전체가 불탔다는 기록, 국민회가 있었던 마을로서 대 참변을 당한 곳, 한 건물에 교회와 학교가 있었던 교회 등등을 여러 기록 속에서 찾아 있는 그대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김춘선 저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514쪽에 나오는 상해 임정이 발표한 “북간도지역 한인참변 조사통계표” 에 의하면 소실된 교회당이 훈춘현에 7개, 화룡현에 2개, 연길현에 10개, 왕청현에 7개이다. 4개현의 소실된 교회 수의 총계는 26개인데 총합통계표의 합계는 19개로 나온다. 교회 명단이 없으므로 어느 숫자에 착오가 있는지 이 책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2) 박은식 저 ⌜한국독립운동지혈사⌟합본, 444~450쪽에 나오는 “서∙북간도 각지에서 우리 겨레에 대한 왜적의 만행 참상 조사표”에 의하면 소실된 교회는 연길현 각지에 유수하자교회, 관도구교회, 이도구교회, 약수동교회, 대모녹교회, 남구교회 등 7개, 왕청현 각지에 라자구 대전자교회 2개, 합마당교회 1개 등 3개로 총 10개이다.
3)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1권 ⌜개척⌟ “간도학살사건” 편, 523~533쪽에 걸쳐서, 30개에 가까운 참변을 당한 지역이나 마을 이름이 나온다. 당시 토벌의 대상이었던 국민회와 관련된 대부분의 마을들에는 교회가 있었다. 당시 교회는 항일운동 중심부에 있었으며, 교회의 담임목사나 책임자가 국민회 지회장으로서 의연금 모금과 독립군 지원을 책임졌다.
4) 김동섭 저 ⌜화룡인민의 항일투쟁⌟에 나오는 <경신년대토벌피해> 26~31쪽에 의하면,
일본군 제19사단사령부의 한인마을조사표에는 일제가 승인한 학살사건지점이 연변에 도합 129개가 있었으며 그 중 화룡현에는 45개가 있었다. <경신년대토벌> 당시 화룡현에서 피살된 인수는 1,362명이고 민가가 소각된 수는 866채이며 소각된 학교 수는 10개소이며 소각된 교회당 수는 3개소이다. 다음은 대표적인 학살사건들이다.
①청산리학살사건: 독립신문 1921년 1월 27일에 청산리마을이 전멸되었다고 실렸으며 1920년 12월 18일자 <독립신문> 간도통신원의 조사 자료에는 409명이 죽었고 120채의 민가가 방화되었으며, 학교 1개가 소각되었다고 하였다. 상해에서 발행된 <진단> 1920년 11월 21일자에는 일본침략군이 삼도구 청산리에서 1천여세대의 집을 소각하고 보는 사람마다 죽이고 어린이마저 생매장하거나 총으로 쏘아 죽였다고 보도하였다. 당시 백운평 마을에는 50여세대가 살고 있었는데 2명을 제외하고 다 죽었으며 모든 가옥을 불살랐다.
화룡일대 피해통계표는 청산리에서는 409명이 학살당하였으며 가옥 120채, 학교 1곳이 소각되었고 3,760건의 물건이 약탈당하였다고 한다.
백운평과 청산리에는 교회가 1917년에 세워졌다. 양쪽의 교회가 다 소각되었을 것이나 기록 되지 않았다. 청산리에는 북로군정서의 연고지가 있었지만 국민회 지회도 있었다.
②송언동학살사건 : 송언동에는 국민회 지부가 있었다. 10월 19일, 일제는 먼저 학성동에서 국민회 강안지부 통신부장 이홍래와 6인을 살해하고 송언동으로 와서 국민회 통신원인 박룡훈등 8인을 살해하였다. 11월 9일에는 학성동에서 국민회 통신원 지계순, 장성오를 살해하였다. 화룡일대 피해통계표는 총 46명이 피살되었으며 115채의 민가가 소각되었고 3,760건의 물건이 약탈당하였다고 한다.
③학서동(초평촌)학살사건 : 회령수비대가 김희구 등 10여 인을 학살하였고 <불령선인>을 집에 재웠다는 이유로 최문칠의 집을 방화하였다.
④서래동(미전동)학살사건 : 회령수비대가 국민회 서기 이운일 총살하였고, 집 1채 소각하였다. 보병 75연대가 제2국민학교 부교장 진윤극, 교원 김영석, 광복단 통신부장 김안삼, 북로군정서간부 김명호의 외조카 김덕현, 김상렬 총살히였고, 혁성학교, 김영석와 김덕현의 집 방화하였다. <독립신문>은 서래동에서 14명이 학살당하였고 민가 3채와 학교 1개가 불에 탔다고 보도하였다.
⑤약수동학살사건 : <독립신문> 12월 18일 간도통신원의 보고에 일제 토벌대에게 학살당한 사람이 271명, 소각된 민가 57채, 학교 1개소라고 하였다. 토벌대는 이개숙의 집을 소각. 약수동에서 사람을 죽인 후, 화장해서 재를 약수강에 뿌렸다. 1,760개의 물건을 약탈해 갔다.
⑥어랑촌학살사건 : 국민회가 군사기지를 닦았던 곳으로 국민회 지회가 있었다. <독립신문> 간도통신원의 보도에 의하면 어랑촌 피살 수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소각된 가옥이 30채이며, 완루구에서는 피살당한 사람이 451명, 강간당한 여성이 20명, 소각된 가옥이 340채였다. 약탈당한 물건이 10,100건이었으며 어랑촌과 완루구에는 교회내지는 기도처가 있었다.
⑦ 화룡일대 피해통계표에 의하면 명동에서 가옥 12채, 학교 1곳, 교회당 1개가 불탔다.
⑧ 마패에서는 15명이 사살 당하였으며 학교 1곳이 불에 탔다.
⑨ 장인강에서는 4명이 피살당하였으며 가옥 57채가 소각 당하였고 950건의 물건이 약탈당하였다.
⑩ 석봉에서는 14명이 학살당하였으며 5채의 민가가 소각 당하였다.
⑪ 남하촌에서는 14명이 피살당하였으며 민가 5채가 소각 당하였다.
⑫ 동량에서는 민가 27채가 소각당하였다.
⑬ 수칠구에서는 4명이 피살당하였으며 민가 채가 소각 당하였다.
⑭지암곡에서는 10명이 학살당하였으며 민가 5채가 소각 당하였다.
⑮ 화호리에서는 29명, 렴충현에서는 20명이 학살당하였다.
이외에도 일본군은 고려왜, 류령, 삼동포, 후동, 승암촌, 대금창, 덕화평, 화룡가, 자동, 강역동, 석건평, 천수평, 정동 등에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민가, 학교, 교회를 소각하였다.
5) ⌜훈춘조선족 발전사⌟ 경신참변에 관한 항목 75~78쪽에서 양봉승은, 일제토벌군에 의하여 훈춘현에서는 1,124명이 피살 되였고 110명이 체포되었으며 민가는 1,094채, 학교는 19개, 교회당은 7개가 불에 타서 없어지고 곡물은 15,580섬이 소실되었다고 하였다. 함북노회 제7회 회의록은 금당촌교회 영수 1인, 전도사 2인, 교인 7인, 피살 되었고, 남별리교회 교인 50명 참살, 감옥에 갇힌 자, 징역선고 받은 자, 떠난 자, 실종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
① 남별리교회는 1916년에 오병묵에 의해 세워졌으며 훈춘한민회의 본부였다, 한민회 회장 이명순이 오병묵, 남별리의 나정화, 동구의 노종환, 연통라자의 황병길과 함께 훈춘한민회군을 훈련하는 장소로도 사용하였다. 남별리교회당은 이 때 불에 탔다.
② 금당촌교회는 숭신학교와 한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참변으로 소실되었다. 숭신학교는
항일투사들이 세운 학교였으며 교회 또한 항일지사들이 세웠다.
③ 리수구는 훈춘한민회의 근거지였으며 진명학교가 있었다. 항일투사 3인 살해당하였고, 항일투사들과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진명학교가 소각 당하였다. 정황상, 리수구에 교회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때 소각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④ 대황구에서는 애국지사 20명이 체포당하였고, 김남극과 양병칠이 사살 당하였으며 교원 김하정은 훈춘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생매장 당하였다. 1910년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후에 북일학교가 설립되었다. 교회당이 이 때 소각된 것으로 보인다.
⑤ 연통라자는 황병길 투사의 오랜 활동근거지로 훈춘 항일운동의 본부였다. 일제군은 황병길의 묘를 파헤쳤으며 그의 아내 김숙경을 체포하여 하다문사형장으로 압송하였다. 하다문사형장에서 하다문과 연통라자에서 체포한 37명을 총살하였으나 김숙경은 죽음을 면하였다. 연통라자에는 1912년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 때 소각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하지 않다.
다음은 연길, 왕청, 훈춘, 화룡 4개현의 항일사적지를 연구한 김철수의 저서를 살펴보자.
6) ⌜연변항일사적지 연구⌟의 <경신년대토벌> 387~460쪽에 의하면,
① 훈춘현 도표에는 소각된 교회가 하나도 없고, 왕청현 도표에는 대전자에서 2개의 교회, 화룡현에서는 명동교회 1개가 나타나는데 합계에는 2개가 소각되었다고 나오며, 연길에서는 소영자교회, 대모록교회, 허문교회, 남구교회, 류수하자교회, 관도구교회, 조양하교회 2개로 8개이나 합계에 7개로 나온다.
② 1921년 1월 27일 <독립신문>의 보충 통계에 의하면 교회당 소각이 이도구, 계림촌, 토문자(천주교회당)에서 있었다. 당시 청산리에 1917년에 세워진 교회가 있었는데도 마을 전체가 소실되었다고만 쓰여 있고 교회 소실에 대한 기록은 없다.
③ 의란구참안지에는 의란골교회가 1912년에 세워졌는데 교회의 소실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의란진 경내의 구룡평, 태양촌, 의림평, 이랑구 산속, 남양동, 동구에서 9차례에 걸쳐 참변이 일어났다. 의군부의 기지가 있었다. 구룡평에는 하마탕에서 이전해 온 국민회 본부가 있었다.
독립신문 통신원은 162명 살해, 154채 민가 소각, 3개 학교 소각, 4,620 여 건의 물건 약탈은 원 의란진 소재지에서만 종합된 것으로 보인다.
④ 장암동참안지에는 1912년 장암교회가 세워졌다. 간도국민회 제2동부지방회 제4분회가 있었으며 마을 주민 대다수가 국민회 회원이었다. <3∙13>만세시위에 교인들과 영신학교 학생들이 용정에 까지 갔다. 일제군은 마을의 남자들을 전부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불속에서 뛰어나오는 사람들은 총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간도통신원 자료에는 75명, 일제는 24명, 제창병원 원장 선교사 마딩은 36명, 현천추는 33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⑤ 백운평참안지에는 1918년에 교회가 세워졌다. 청산리란 백운평과 그 부근의 마을들을 가리킨다. 독립신문 1921년 1월 27일에 청산리마을이 전멸되었다고 실렸으며 1920년 12월 18일자 <독립신문> 간도통신원의 조사자료에는 409명이 죽었고 120채의 민가가 방화되었으며, 학교 1개가 소각되었다고 하였다. 상해에서 발행된 <진단> 1920년 11월 21일자에는 일본침략군이 삼도구 청산리에서 1천여세대의 집을 소각하고 보는 사람마다 죽이고 어린이마저 생매장하거나 총으로 쏴 죽였다고 보도하였다. 당시 백운평마을에는 50여세대가 살고 있었는데 2명을 제외하고 다 죽었으며 모든 가옥이 불타버렸다.
1917년에 청산리에 교회가, 1918년에는 백운평에 교회가 세워졌다. 두 개 교회가 참변당시 마을 전체와 함께 소각되었지만 참변 기록에 교회에 대한 언급이 없다. 두 곳 다 국민회 지회가 있었다.
⑥ 서래동참안지에는 회령수비대가 국민회 서기 이운일 총살하였고, 집 1채 소각하였다. 보병 75연대가 제2초등학교 부교장 진윤극, 교원 김영석, 광복단 통신부장 김안삼, 김덕현 (북로군정서 간부 외조카), 김상렬을 총살하고, 혁성학교와 김영석, 김덕현의 집을 방화하였다.
⑦ 송언동참안지는 용정시 삼합진 북흥촌이다. 10월 19일, 일제는 먼저 학성동에서 국민회 강안지부 통신부장 이홍래와 6인을 살해하고 송언동으로 와서 박룡훈등 8인을 살해하였다. 11월 9일에는 국민회 통신원 지계순, 장성오를 살해하였다. <독립신문> 간도통신원의 통계자료에 송언동에서 살해된 사람은 46명이고 민가는 115채 불 탔으며 강역동에서도 9명이 살해. 이는 송언동, 학성동, 강역동 등지에서 살해된 사람 숫자이다.
국민회 통신원들의 활동을 보면 송언동에 교회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⑧ 약수동참안지에 대한 기록이 일본군 기록에는 없다. <독립신문> 12월 18일 간도통신원의 보고에 토벌대에게 학살당한 사람이 271명, 소각된 민가 57채, 학교 1개소이다. 75연대는 이개숙의 집을 소각하였고 약수동에서 사람을 죽인 후, 화장해서 재를 약수강에 뿌렸다.
⑨ 팔도구참안지는 용정시 소속 팔도구진이다. 일본군이 5차례 토벌하였다. 일제의 기록에는 의군단원 산포대 수령 로우선 등 4인, 의군단원 이경찬의 살해와 박통일, 김혁 가옥 소각이 나온다. 또한 성당촌에서 북로군정서 지회장과 대원 살해, 독립군 통신원 살해만 간단하게 나온다. 그러나 <독립신문>통신원의 보도에는 44명 살해, 민가 50채 방화, 21년 1월 29일 보충보고에서는 살해된 사람이 15명이 더 있다고 하였다.
⑩ 어랑촌참안지는 국민회가 군사기지를 닦았던 곳으로 국민회 지회가 있었다. <독립신문> 간도통신원의 보도에 의하면 어랑촌 피살 수는 알려지지 않았고 소각된 가옥이 30채라고 하였다. 완루구에서는 피살당한 사람이 451명, 강간당한 여성이 20명, 소가된 가옥이 340채, 약탈당한 물건이 10,100건이라고만 정리하였는데 어랑촌과 완루구에는 교회가 있었고 참변시 소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간도국민회 소속부대들이 어랑촌 일대를 새로운 기지로 삼은 것은 한국에 가깝고 길림성과 요녕성의 경계에 있으며 산이 험악하다는 지리적 이점뿐만 아니라 그 지역이 간도국민회의 주요한 활동지대 였으며 대부분의 한인들이 기독교를 신양한다는 점을 고려하였기 때문이었다.*42
⑪ 소영자참안지는 연길시 소영향 소속으로 연길 시내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있다. <독립신문> 간도통신원의 보고에 일군은 소영자에서 166명을 사살하고 25명의 여성을 강간하고 민가는 56채, 학교 1개소, 교회당 1개소 소각, 7,750건의 물건 약탈하였다고 한다. 1910년에 세워진 소영자교회는 참변에 불에 탔다.
⑫ 하마탕참안지는 초기에 간도국민회의 본부가 있었던 곳으로 중점 토벌의 대상이었다. <독립신문> 간도통신원의 보도는 일본군이 60채 민가를 방화, 연길현 춘양 일대에서 한인 3명을 두 손을 합장하게 한 후에 못으로 뚫어 선지피가 흐르게 하였고, 철사로 그들의 코를 꿰어 두 손과 함께 얽어 놓은 후 1리를 끌고 가다가 총살하였다고 하였다. <길장일보>는 조선족 백성 3명을 체포하고 쇠못으로 그들의 손바닥에 구멍을 뚫은 후 쇠줄로 꿰어 그 줄로 또 코를 꿰어 말 뒤에 달아서 10여리를 끌고 다니다 총살하였다고 보도하였다.
하마탕에는 교회가 있었으며 당시에 불에 탔다.
⑬ 십리평참안지는 북로군정서의 근거지이다. <독립신문> 간도통신원의 보고는 서대파에서 살해당한 사람이 230명, 소각된 가옥이 100채, 학교 1개 소각, 약탈당한 물건이 2,500건이라고 하였다. 서대파는 십리평 안에 있는 주요지점이며 1918년에 교회가 세워졌고 참변 시 불에 탔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⑭ 훈춘 투도구참안지는 훈춘시 하다문향 소속이다. 일제는 토벌했다는 기록만 남겼으나 <독립신문> 간도통신원의 보고에 의하면 일제군이 주민 175명 살해. 가옥 293채 소각, 8,325 건의 물건 약탈하였다고 한다. 훈춘투도구에는 1916년에 교회가 세워졌고 참변당시 교회당이 소각 되었을 것으로 본다.
7)서굉일 저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김약연선생⌟, 314~324 쪽에 의하면,
참변당시 일제는 청장년이 발견되면 독립군이라는 죄명으로 학살하였고 특히 한인들이 세운 교회나 학교를 보면 이를 독립군의 소굴이라고 생각하여 전부 소각하였다고 한다.
일본군은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27일간 일제는 화룡현, 연길현 지역에서 교회와 학교가 있는 마을을 대상으로 만행을 계속하였다.
일제군의 학살, 방화, 약탈은 아래와 같다.
① 잠전동교회, 삼성학교, 화첨자배영학교, 이도구 보진학교, 자동 정동학교, 개산툰 구호학교, 용정촌 신촌 영신학교, 청파동 삼도구 중촌 대종교계 청일학교, 육도구 대교동 천주교계 격향학교를 소각하였다. (민가를 개조한 학교들이라서 민가도 함께 소각 당하였음)
② 장암촌의 홍동학교는 교회와 학교가 한 건물을 사용하였으며 방화를 당하여 학교와 교회가 함께 사라졌다.
③ 영암촌, 장재촌, 이수구에서는 마을, 교회, 학교가 다 함께 소각을 당하였다.
④ 하광포에서는 하광포교회와 덕성학교가 불에 탔다.
⑤ 남평동에서는 교회와 학교 불에 탔다.
⑥ 남양평 걸만동에서는 화학학교, 가옥 14채, 걸만동교회가 불에 탔고 교인 및 국민회 회원 15인 학살을 당하였다.
⑦ 배초구 및 왕청현 오지에서는 국민회 본부와 북로군정서 무관학교 병영이 토벌 당하였으며, 교회, 학교, 마을 초토화 되었다.
⑧ 서대파에서는 북로군정서 본부, 병영 무관학교가 불에 탔으며 민가도 소각 당하였다. 230명 사살이 학살을 당하였다.
⑨ 서대파 창동학교, 대황구 원동소학교, 소황구 대종교계 명동소학교, 대감자 고소학교가 불에 탔다.
⑩ 합막당은 국민회 본부였다. 합막당교회와 가옥 10채 소각되었고 20명 사살 당하였다.
⑪ 일양구 방면에서는 국민회 회원인 윤남극이 사살 되었고, 석인교회가 불에 탔다.
⑫ 풍동에서는 양민 4명이 북로군정서 교관이라는 죄목으로 학살 당하였다.
⑬ 훈춘현 전선촌, 남별리, 대황구, 동구, 두도구 등 지역과 노흑산자, 나자구, 삼분구 등 오지에서는 교회, 학교, 마을, 병영이 소각되었고 다수의 주민들이 학살당하였다.
⑭ 사도구에서는 미완성 독립군 병영이 소각 당하였고, 총기 51정, 권총 1정, 탄약 660발을 압수당하였으며, 24명이 학살당하였다.
⑮ 황구방면에서는 마을주민들이 수색당하고 학살되었다. 총기, 탄약, 독립운동문서 압수되었고, 신풍소학교도 소각되었다. 남별리가 항일마을로 지목되어 남별리교회와 학교가 포위당하였고 국민회 간부 4명이 체포당하였다. 남별리교회도 소각당하였다.
⑯ 삼도구에서 30명이 학살당하였다.
⑰ 삼도하자에서 진흥학교가 소각되고 동림학교와 민가 또한 소각을 당하였다.
⑱ 청산리, 간장암, 구세동, 명동 등 기독교 마을이 일차적인 토벌대상이 되어서 수색, 체포, 학살, 방화를 당하였다. 명동에서 10인이 학살당하였으며, 90여 명이 체포를 당하였고 명동학교가 소각되었다.
⑲ 국자가를 중심으로 하여 소영자, 와룡동, 광제촌 교회와 학교가 불에 탔으며 166명 학살당하였다.
⑳ 청산리 대랍자 민가 19호와 백운평 민가 12호가 불에 탔으며 교회들 또한 소각되었다.
이상은 7권의 책에 적혀 있는 경신참변의 피해 마을과 상황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므로 서로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 그러나 각 책마다 다른 책에 없는 피해 마을에 대한 정보가 있고, 같은 피해마을에 대한 기록도 약간씩 다름을 볼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위의 내용과 정보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몇 개의 교회가 소각 당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7부에서 계속 됩니다.
5. 소각된 교회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