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문학관 아카데미 7기 12차 습작품 종합(2017년 11월 13일)
1. 친구의 이야기
8개월 전 어느 날 밤에 딸이 전화를 했고, 아이가 가출을 했는데 전화도 받지 않는다 했다. 엄마가 전화 해 보시고 집으로 오라고 하셔요라 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더니 좀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전화를 해 왔고, 다급해서 너 가출했다면서 어디냐? 했더니, 어떻게 아시느냐? 내가 할머니 댁으로 가도 되겠느냐? 하더라 했다. 그렇게 아이는 외갓집으로 왔고, 외할아버지께서는 마주 앉으셔서 이유 불문으로 야단을 호되게 쳤다고 했다.
할머니와 둘이가 되니, 아빠한테 맞았는데 도저히 같이 살수가 없어서 집을 나왔고, 폭력으로 고발을 할려 했는데 지금 참고 있습니다. 내가 외갓집에 오래 있어도 되느냐? 해서 얼마든지 있어도 된다고 했고, 어언 8개월이 되었다 했다.
중학교 배정을 받기 전 우리 도시에서 제일 학군이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갔고, 중학생이 되고 제일 좋다는 학원을 골라서 들어 갔다 했다. 초등학교 때 학원이라고 전혀 가본 적이 없이 그렇다고 공부를 하라고 종용한 적도 없이 자유롭게 두었다 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고 간 학원의 아이들은 달랐고, 학원 강의를 따라 갈 수가 없어서 이내 그만 두었다 했다. 첫 중간고사에서 성적이 아주 하위로 나왔고, 그 성적표를 앞에 두고 아버지와 마주 앉았더라 했다. 아버지는 아이 말도 듣지 않고, 몰아 부쳤고 아이는 또박또박 말대꾸를 했고, 그러다 아버지가 때렸다 했다. 때리니 대들고 더 때리고 아이는 책가방 챙겨서 가출을 했던 것이라 했다.
아빠는 학부형이 상담을 청하면 상담자가 되어 주어야 하는 고등학교 교사이라 했다. 외갓집과 학교는 멀었고, 아이 맘에 분노가 좀 갈아 앉고, 아이 엄마와 의논해서 제 실력에 맞추어서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1학기 때는 중간고사가 있었어도 2학기는 시험도 없었지만 학원에서 하는 평가 시험에서는 점차로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한다. 성적이 점차로 올라서 학원 평가에서 상위 성적이 되었고, 공부란 것에 재미가 붙고 목표가 생겼다 했다.
3달이 지나고 아이 아빠가 와서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는데, 조리 정연한 말로 아빠를 몰아 부치는지 깜짝 놀랐다 했다.
더 이상의 우리들이 생각하는 아이들이 아니고, 그야말로 신세대인 청소년들인 것이다. 부당하게 맞았다 싶으니 아빠를 고발할까? 할 정도로 개인주의가 팽배한 세대이다. 이젠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서 잠을 자고, 학교 갔다가는 외갓집으로 오고, 저녁밥을 먹고 다시 학원으로 가고 주말에는 다시 외갓집으로 오고, 안정 되었다 한다. 그래도 밤에 즈그 집에서 잠만 자는 것이고, 거주지는 외갓집인채로 이다 했다.
외할머니는 헌신적이다. 언제나 내가 학원에서 돌아 오는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을 나왔고, 라면으로 끼를 먹은 적도 먹고, 늘 따뜻한 밥을 주셨다.한 번도 나를 귀찮아 하시지 않았다. 내가 크면 할머니께 잘 해드릴 것이라 한다고 했다.
우리 외할머니는 남에게 주는 것을 좋아 해서 들어 오는 것도 별별것이 다 들어 온다고 즈그 에미한테 말하더라 했다. 우리 외할머니는 친구들도 참 많으시다고 하더라 했다고.
우리 친할머니는 친구도 없으신 것 같다고 했다. 14살 중학생이 외갓집에 자주 놀러 왔을 때 야 이뚱뚱이들아 살 않 뺄래?라 하면, 듣는 사람 입장도 생각하시야지요. 우리 친할머니께서는 걱정마라 크면 다 키가 될거다 맘껏 먹어라 하셨는데라 비교를 하기도 했다 한다. 외할머니 밑에서 어언8개월을 있으면서 직설적으로 말을 해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해 주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과 진심으로 잘 지내는 것은 내가 먼저라는 것도 배웠을 것이다. 아직도 립스틱을 바르고 검은마스크를 하고 학원에 간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보기 싫어서 저 조디에 쳐 발라가지고 하면(정말 진한색을 진하게 바르고 있어) 웃으면서, 할머니 보기 싫어도 참으셔요. 이거 한다고 내가 이렇게 되는 것(손을 아래로 가르키면서)은 아닙니다. 단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입니다라 하고, 즈그 집에서 자고 주말에 우리 집으로 오는 날에는 전체 화장까지 하고,검은 마스크를 쓰고 에미와 함께 온다 했다.
같이 온 에미가 아무 말라고 눈짓을 하고는 여기 올 때만 하지 어디를 이 모습으로 가겠습니까?라 한다고,
내 친구는 교사였던 친할머니가 못하는 일을, 공부 많이 한 즈그 에미, 아빠도 못한 일을 비록 뚱딩이라 하고, 조디라 해도 우리 외할머니는 나에게 진심이고 헌신적이라는 그 속내를 같이 있으면서 알아 진 것이다. 그런 따뜻한 마음만이 아이들의 가슴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2. 다비식 /장은재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스님의 다비식에 참석할 수 있는지 물었다. 엊그제 조문도 하였으므로 슬픔만 가중될 것 같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는데, 불현듯 다비식이 궁금했다. 다비는 불교에서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화장하는 일을 뜻하는 말임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보지는 못했다.
땅을 파고 그 속에 운구를 묻고 봉분을 만드는 매장은 부모님 돌아가실 때 직접 경험했다. 상주로서 슬픔을 참고 지관과 장례집도사 지시에 그저 묵묵히 따랐다. 그 날은 삼복더위 여름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온몸에 땀이 흘러내렸다. 나이 많으신 동네 어르신이 “시신이 빨리 썩어서 좋겠다.”고 하셨다.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섭섭하게 들렸다. 요즘에는 매장보다 화장하여 유골함을 납골당에 안치하거나 묻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당시에 두 번 죽는 것이라고 화장하는 것을 꺼렸다. 평소에 사용하는 부모님 옷가지를 태울 때는 저 밑바닥에 눌려있던 감정이 북받쳐 오열까지 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도 죽고, 기어 다닐 때도 죽으며, 뛰어다닐 때도 죽는다. 어린 사람, 젊은 사람, 늙은 사람 모두 죽음으로 향하여 가는데 누가 먼저 죽음의 문턱에 들어설지 아무도 모른다. 익은 과일이 먼저 땅에 떨어지지만, 태풍이 불고, 병충해가 오면 예측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나 역시 위로 형이 둘 있었는데 기억은 없지만 어릴 때 한 명은 먼저 죽었다고 들었다. 아무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부모님을 떠나보내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청명한 가을 하늘 흰 구름은 움직임도 없는데 가을바람은 들판을 물결치며 누비고 따뜻한 햇볕은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대추를 말리고 있다. 사찰 앞 저수지 물은 바람 빠진 바퀴처럼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쭉 빠졌다. 방생한 거북이는 저수지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며 놀고 있는데 내 마음은 물 빠진 저수지처럼 텅 빈다.
다비식이 시작되었다. 집행위원장의 영결사, 생전 육성 녹음한 법어, 지인 스님의 추도사, 조사, 헌화, 문도대표인사, 사홍서원 순으로 긴 의식행사는 끝이 났다. 장작더미에 시신을 옮기고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마치 스님의 영혼이 불꽃을 타고 맑은 가을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만 같다. “빈 허공에 코를 걸고 살아가는 욕심 많은 인간은 번뇌의 고통에 허덕이고 있지, 그 고통을 없애려면 욕심을 버리고 본래의 빈공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스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이제 다시 들을 수 없는 유언이 되었다.
타들어 가는 장작더미 불꽃을 바라보면서 상좌 성종 스님은 얼굴이 상기된 채 장례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도에는 마지막 인생을 출가하여 살면서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신의강인 갠지스강에 목욕하러 몰려들어와요. 그곳에서 죽으면 화장할 때 수중에 있는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시체를 태우는 장작 수가 결정되고 있어요. 그렇다고 돈을 벌려고 하지 않습니다. 외국 관광객은 잘못알고 거지로 오인하기도 하지요. 인연에 따라 살아가는 거지요. 장작이 적어 시체가 일부 타지 않고 남아있으면 강에 던져 버립니다. 그러면 물고기의 밥이 되지요” 돈은 죽어서도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척도가 되는 모양이다. 돈이 적어 물고기 밥이 되어 줄 것인지 돈이 많아 재가 되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것인지 이 모두가 자연 순환의 원리에 따른다.
“어떤 나라는 조장(鳥葬)의 풍습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 등에 칼질하고 배는 갈라서 산 위에 갖다 놓습니다. 그러면 독수리가 달려들어 10여 분만에 사람의 시체 살점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고 뼈만 남습니다. 기다렸다가 유골을 수습하여 갈아서 주먹밥을 만들어 던져주면 독수리들이 받아 삼킵니다. 남은 해골은 가져와 바가지로 사용합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에 나는 적이 놀랐다.
“어떤 지역에는 개장(犬葬)의 풍습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사찰 주변에 시신을 던져놓으면 수십 마리의 개들이 달려들어 시체를 먹어치웁니다. 유골을 개들이 물고 가서 밤새도록 물어뜯어 먹습니다. 외국 관광객이 이들 개에 물리어 항의하자 사찰 주변의 개들을 모두 사살한 사실도 있지요. 그러나 아직도 개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시신 훼손과 같은 이 같은 장례는 죽은 사람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이 밖에도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양한 장례문화가 있다고 했다. 장례절차가 다른 것은 기후의 영향과 돈 때문이라고 했다. 땅에 묻으면 시체가 썩지 아니하는 지역에는 매장은 곤란하다고 했다. 절차야 어떻든 간에 모두가 죽음에 대하여 애도하는 마음은 똑같을 것이다. 그리고 보면 장례문화를 가지고 선진국이니 미개국이니 구분하고 차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스님이 잠깐 이야기를 멈추고 자리를 떴다. 뒷좌석에 앉은 세분의 신도들이 불경을 암송하고 있었다. 계속 듣고 있다 보니 어느새 무감각해지고 성주 큰스님과 생전에 나누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죽음은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여쭈어보았을 때 “어제 보았던 사람을 오늘은 볼 수 없고, 오늘 보았던 사람을 내일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에 해를 끼치는 것이 무수히 많아 바람이 일으킨 물거품보다 더 무상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평소 죽음을 준비하고 살아가야지요.”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하고 또 여쭈었다. “사람은 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는 그 누구도 어떤 것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무력하기만 한 우리는 죽음을 회피하기보다 준비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모두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자비심으로 살아가야지요.” 나는 맺힌 것은 풀고 막힌 것은 뚫고 이타심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큰스님은 말씀을 이어갔다. “모든 행복은 모두 남을 위하는 데서 나오고, 모든 고통은 모두 자기를 위하는 데서 나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를 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위해서 일합니다. 저쪽 산을 이쪽에서 보면 저 산이라는 마음이 생기지만, 만일 저 산에 이르렀다면 이 산에서 일으켰던 느낌을 똑같이 일으킵니다.” 그래서 살면서 상대편의 입장에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라고 하셨다. 역지사지를 말씀하시는구나 생각하면서 마음속에 새겼다. 죽음이 영원히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지은 업력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라, 복을 지어야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큰스님은 굳게 믿고 있었다.
생전의 큰스님 모습이 뚜렷이 생각난다. 80을 훌쩍 넘기 연세이지만 눈만큼은 신기할 정도로 어린아이처럼 맑고 초롱초롱했다. 기억력이 남달리 뛰어나고 옛날 전해오는 이야기를 귀에 쏘옥 들어오게 재미있게 하셨다. ‘백암록’이라는 당송 때 고승들의 선문답을 모아 엮은 책을 주시면서 읽어보라고 하셨다. 이해도 할 수 없는 이 책을 무언가에 이끌려 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어보았지만 10%도 이해할 수 없었다. 괜히 시간만 낭비한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서재에 소장한 책을 보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모두 가져가라고 하셨다. 그때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상좌 스님이 돌아왔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내일 오후에 유골을 수습하여 사십구제(2017년 11월 4일)를 지내고 길일을 택하여 사찰 입구 어디에다 부도를 만들에 안장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다비식에서 영원히 스님을 떠나보냈다. 그러나 스님의 모습과 말씀은 내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만날 것이다.
3. 석류나무를 보면서 /정길자
아파트 화단 나무 가지치기를 하는지 많은 인원이 보였다. 봄이 왔다고 겨우내 잠들어 있던 가지를 흔들고 화초를 심으려나 싶어 궁금하였다. 아파트 세대수가 많아 며칠 걸리겠지. 출근시간이 바빠 발걸음을 서둘렀다. 오후 네 시경 퇴근 후 시장에서 시장보따리 들고 뒷문으로 들어왔다. 내가 사는 동 앞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석류나무를 쳐다보았다.
순간 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이게 무슨 조화인지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건 윗 둥을 댕강 자르고 그 많은 나뭇가지가 사라졌다. 순간 주위의 나무란 나무는 모두 윗부분이 전부 잘려 나갔다. 잔가지와 썩은 가지만 정리하지 왜 너무 많이 잘랐을까?
내가 자라온 대구 변두리 동네는 앞산을 끼고서 앞산 도랑이 흘러내렸다. 봄이면 지천으로 피어나던 개나리 진달래와 벗 삼아 놀던 그 자리에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고산골 가던 방향 입구에서 큰 소나무가 보였다. 바로 앞에는 시냇물이 흘러내리고 집 앞은 논밭이었다. 학교 들어간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었다. 골목 안쪽에 있는 마당 넓은 집으로 이사 하였다. 어린 마음에 집이 엄청 크게 느껴졌었다.
큰 기와집은 기역형의 남향이며 마당 우측엔 우물과 등나무가 심겨 있었다.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우물물로 등목하시던 아버님의 기억이 남아 간혹 그리울 때가 있다. 마당에는 유실수 중에 감나무와 복숭아나무 그리고 석류나무 등 몇 종류가 심겨 있었다. 앞쪽에는 키 작은 봉숭아꽃과 이름 모를 보라색 꽃이 봄이면 피었다. 봄이면 매실나무에 열매가 달리고 가을이 되면 석류열매의 입이 쩍 갈라져 어린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노랗게 익은 감, 빨갛게 익은 석류. 등나무 옆에 매달린 이름을 알 수 없던 과일들. 울타리에는 노랗게 피어난 호박꽃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처음 맛본 석류는 알갱이를 한 입 넣고 톡톡 튀는 그 맛이 입맛을 끌어당겼다. 석류나무는 한 해에는 가지에 꽃이 많이 피었다. 그다음 해는 꽃이 많이 피어나지 않았다. 가을이면 늘어진 가지에 수많은 석류가 주렁주렁 달리면 어머니의 손길은 바빠진다. 익은 석류를 기대하는 나의 바람도 한몫으로 알싸한 맛을 느껴보고 싶었다. 지금도 알싸하게 입안에서 톡 느껴지는 그 맛은 아이스크림 같은 청량제였다.
중년의 나이에 갱년기를 만나고 나서 인터넷에서 주문해 사 먹은 적이 있다. 하지만 어릴 적 그 맛은 아니었다. 간혹 시장에서 만난 석류를 한 통에 삼천 원 주고 사 먹은 적이 수차례다. 외국에서 석류가 수입되어 시장에 파는 걸 보고 구매해 맛보았지만, 우리나라 석류 맛을 느껴 본다는 건 어려웠다. 지방에 사는 친구가 집에 석류나무가 있다는 걸 듣고 한번 맛보고 싶어 팔아 보라는 내 제의에 싫은 눈치를 준다. 본인도 아껴 먹는다는 말에 당황했던 난, 여자의 마음은 다 그런가 싶어 섭섭했던 기억이 있었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 석류나무를 발견하고 난 후부터는 새삼 나의 시선을 붙들었다. 오월에 꽃이 피어나 벌들의 축복 속에 꽃망울이 어여쁘게 피어난다. 가을이면 축 늘어진 나뭇가지에는 열매가 탐스럽게 물들어간다. 핸드폰 사진에 담아 즐기던 나는 이 가을엔 꽃구경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보고 싶어진다.
4. 고향의 어느 모임 / 이원희
일천구백오십구 년 어느 추운 겨울날이다. 마당에 나오니 눈까지 펄펄 날리는데 어디서 평소와 다른 사람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몇 개의 돌담을 넘고 긴 골목길을 울리고 와서 그런지 귀를 쫑긋 세워도 소리는 가끔 들리나 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내용에 호기심을 가지고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좁은 골목길을 지나 나는 서당 앞에 서성거렸다. 작은 키에 몇 번 까치발을 해봐도 담 안은 볼 수 없고 가끔 넘어오는 크고 작은 소리만 들릴 뿐이다. 초등학교 오학년 어린애지만 내 마음은 대문을 크게 열고 서당 안채 큰방에 들어가 마을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얘기도 듣고 싶었다.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그만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맞은 눈을 대충 털고 큰방에 들어가니 마침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고 게셨다. 오메, 어디서 싸우는 듯 소리가 나길래 가보니 서당까지 갔어. 대문 앞에서 그냥 소리만 들었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여쭈었다. 그래 오늘 네 아버지가 서당에 가신다 하시드라. 매년 연말에 열리는 마을 대동회에서 의논하고 문서 닦을 일이 많은 모양이다 하셨다. 나는 그것으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다시 작은방으로 가서 서당에 갔다온 얘기를 하면서 할머니에게 물었다. 조금 걱정하는 표정을 지어시면서 동내에 화투치는 사람이 많아 시끄럽다 하셨다. 마을 어른들이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들에게 큰소리를 낸 것 같다 말씀하셨다.
때는 육이오 전쟁이 끝나고 오 육 년 되던 해였다. 나라는 무너진 사회질서를 다시 바로 세우고 농산물 증산정책을 펴고 있었으나 도농에서 어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내 고향에는 일백다섯 집에 남녀 합하여 육백오십 여명이 살았는데 담배와 사탕, 빵 등을 파는 가게가 대여섯 곳 있었고 도박판과 겸하여 돈놀이와 두부를 만들어 파는 집도 몇 집 있었다.
그뿐 아니다. 술을 파는 집이 두 집 있었는데 그 중 한 집은 젊은 기생 한두 명을 두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래하고 그에 맞춰 상판을 두드리고 춤도 추었다.
그기에 더하여 청장년은 화투를 가지고 도박하는 이가 많았고 노인과 소년은 화투노리를 하여 닭 내기를 하거나 두부내기를 하면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과거 열심히 농사 지어 자식 공부시키고 부모에 효도하면서 재산을 늘려가던 아름다운 분위기는 사라져 가고 우선 편하게 먹고 놀고 즐기자는 사람이 늘어났었다. 어떤 집은 도박으로 전답을 잃었다 하고 누구는 일 년 동안 남의 집에 뼈아프게 일해주고 벌어들인 새경을 하루 밤에 날리고 부부간에 크게 싸우거나 그것을 참지 못한 아내가 못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그당시 이웃 마을도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런 가운데 청년층에서 농촌의 크고 작은 퇴패풍조를 없애고 건전한 농촌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우선 뜻을 같이하는 여섯 명이 서당에 모여 도박 퇴치를 위한 모임을 만들기로 했다. 뜻을 같이하고 몇달 만에 가칭 도박금지 창립총회를 열었다. 총회에 참석한 사람은 이십일 명이었다. 마을의 청장년이 대부분이고 지역의 유지들도 있었다. 그날 발기인 대표는 모임의 취지를 이야기하고 그 자리에 참석한 지서 주임에게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고 단속다짐도 받아 냈다.
이어 모임의 명칭은 설송회라 정하고 창립취지문도 쓰고 회칙도 만들었다. 눈은 결백을 뜻하고 소나무는 사람의 굳은 절개를 뜻한다.
창립취지문에는 우리나라는 전후 폐습으로 인한 농촌질서의 문란과 구미문화의 내습으로 민족고유의 순풍미속과 인륜도의가 왜곡되어 도박꾼. 불효자. 불량자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으니 이들에게 먼저 근로정신을 불어넣어 살기 좋은 농촌을 만들자는 내용이다.
회칙에는 도박과 불효자를 예방하고 단속하는 범위와 벌칙을 정하여 농촌의 미풍양속을 보존하고 발전시킨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
모임의 내용을 이렇게 갖추면서 그해 사월 십삼 일에 도박 범을 다섯 명 잡아 지서에 고발조치하고 벌칙으로 일인당 백미 한 말씩을 자진 납부하도록 조치하였다. 자주 회의도 열고 계속 단속하여도 근절되지 않아 화투놀이 장소를 제공한 집을 적발하여 벌칙에 따라 훈계와 백미 반말을 납부토록 했다. 서당에 여론함을 설치하여 동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벌칙을 유연성 있게 고쳐가면서 활동한 그 결과를 정기적으로 경로회에 알렸다. 그 외 면사무소에 협조를 얻어 삼십일 개 자연부락의 리장들에게 공문을 보내 도박행위을 예방하고 지도단속을 철저히 해달라는 요구도 했었다.이러한 퇴패행위 금지 노력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오면서 마을이 달라졌다. 도박만 했던 사람이 농사일을 열심히 하게 되었고, 주정뱅이는 술을 끓게 되었고, 싸움질만 일삼던 사람은 온순하고 착실하게 되었고, 노름 뒷전에서 돈놀이 하던 게으런 사람도 부지런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마을에 질서가 잡히고 근로정신이 살아나면서 농가소득도 높아졌다. 소득이 높아지면서 교육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다. 내 고향의 주업이 농업인데도 다른 마을에 비해 과거에는 한학자가, 최근에는 학교 선생이 많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제는 설송회 때문인지 가르치는 직업 보다 생산적이고 전문성을 가진 후손이 다양하게 나오고 마을에 사는 남자와 여자가 오래 사는 마을이 되었다.
5. 무공해 풀밭/ 김치주
텃밭에 새싹들이 파릇파릇하게 움을 틔웠다. 기다리든 봄비가 내리자 하루가 다르게 텃밭은 초록빛으로 어울렸다. 채소를 무공해로 키워 식탁에 올릴 상상 하며 호미를 잡고, 쪼그리고 앉았다.
잡초를 긁어내고, 흙을 뒤집어 북을 돋운다. 그 작은 잎사귀에 조그만 애벌레들이 상처를 내고 있다. 나비가 무공해로 키우는 텃밭인 줄 알고 알을 낳았나 보다. 하지만 가족이 먹을 귀한 채소를 애벌레한테 내어 줄 수는 없다. 호미 위에 애벌레를 얹어 텃밭 가에 자리 잡은 풀밭에 던졌다. 애벌레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친다. 그 모습이 어떻게나 애잔한지, 젊은 시절 나를 보는듯하다.
혼인하면서 고난에 부딪혔다. 남편을 만난 것은 어른들 뜻이었다. 이미 혼사를 정하고 나에게 통보했다. 신혼의 설렘도 잠시 남편에게 지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눈물을 훔치며 친정에 갔으나 남편과 함께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부님은 대문을 열어주지 않아 선걸음에 되돌아와야 했다.
시댁에서 얻어준 셋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아픈 몸으로 남편이 돈을 벌어오면. 아버님이 가지고 갔다. 그리고는 어머님 오시어 손에 쥐어준 적은 돈으로 생활했다. 남편의 약값을 대고 나면 생활비는 턱없이 모자랐다. 배고픈 설움을 겪는 중에 첫째가 태어나자 옆으로 눈을 돌릴 용기가 생겼다.
주인집 아저씨가 건축 일을 했다. 집을 지어서 팔면 차액이 솔솔 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를 업고 아저씨가 일하는 현장에 따라다니며 일을 익혔다. 땅만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붙었다. 당장 친정에 가서 땅 살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 조부님은 가당치도 않다며 단번에 잘랐다.
세상천지 돈 빌릴 만 한곳이 없어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그때 은행에 다니고, 있는. 집안 아제가 떠올랐다. 그분은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었다. 적금 드는 방식으로 담보로 잡아 돈을 빌리고, 그것으로 당을 사서 저당 잡혀 돈을 갚는 형식으로 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용기가 생겼다.
비록 빌린 돈이지만, 고치에서 막 우화(羽化)하는 나비처럼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그때부터 밤낮이 따로 없는 생활을 했다. 아이를 업고 땅을 사기 위해 돌아다녔다. 지적등본을 때며 용도를 확인했다. 건폐율에 맞게 건물을 짓기 위해 교재를 펼쳐보고, 땅 지형에 따라 일조건과 문을 뽑는 공식을 필독했다. 땅의 모양에 가로세로를 보고 평면도를 그려서 구청 건축과를 찾았다.
텃밭에 애벌레처럼 간신히 일을 시작했는데 어머님이 오시어 풀밭으로 내치려 했다. 여자가 간 크게 빚을 내어 집을 짓는다며 이혼하지 않으면 멈추어라 했다. 등에 업혀 있는 아이가 어머님 목소리에 놀라 울었다. 아이의 울음에 석여 내 볼에도 눈물이 타고 흘렀다.
“어머님 지켜봐 주이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지만, 역정을 멈추지 않으시며 나갔다. 어머님이 대문을 나가자 남편이 우는 아이를 안아서 달래주었다. 그의 행동에 적잖이 놀랬다. 그동안 말은 없었지만, 남편이 나를 응원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비는 알만 까놓으면, 뒤에 일은 자연에 맡기면 된다. 하지만 나는 혼신을 다해 집을 지어야 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는 조그만 실수라도 하면. 안 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집안에 목수 일을 하는 아제를 찾아갔다. 기저귀 가방에서 돌돌 말아둔 평면도를 꺼내어 보여주며 일을 부탁했다. 아저씨는 여건이 어렵지만 한번 해보자고 힘이 되어 주었다.
일꾼들이 일하는 새참을 준비하기 위해 매일 시장에 갔다. 국수와 파를 사서 찜통에 끓였다. 보잘것없는 국수 한 그릇이지만, 현장에 가져다주면 일꾼들은 단번에 먹었다. 나는 일꾼들이 남기면 먹기를 기다렸지만, 국물도 남김없이 비워 배고픔을 참을 때가 잦았다.
하루는 현장에서 돌아오면서 소고기 반 근을 사서 반은 이유식을 만들었다. 남긴 반으로 소고깃국을 끓였다. 침샘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러 한 그릇 먹고 싶지만 참자고 다짐을 하는 순간,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몇 년이 흐르자 은행 빚을 상환하고도 우리 집이 남았다. 남편이 응원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나비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텃밭에서 내쳐진 애벌레가 억센 풀을 먹고, 자라겠지만, 얼마지 않아 나비로 우화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나 역시 부드러운 채소는 남편을 만나고부터 먹지 못했다. 하지만 무공해 풀밭 같은 남편이 있었기에 나비가 되어 날 수 있었다.
6. 바꾸면 살 수 있다 /임성희
룰랄라, 현관문을 막 들어서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남편이 서 있다.
“내일 서울 올라가야 되겠어, 형님형수 두 분이 모두 입원 하셨데”. 기분 좋은 내 얘기보다 선수 친 형제일은 룰 랄 라 보다 언제나 먼저이다.
남편은 위로 형님이 두 분 계셨다. 큰 형님은 돌아가시고 지금 형님이 유일하시다. 몇 일전에도 자주 드리는 안부전화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수 십 년 들어온 한결같은 말. 어떠시냐는 말로 시작해서, 붓글씨만 쓰지 마시고 밖에 나가 운동도 하시라는 당부의 말과 좋아하는 술은 조금 씩 하셔도 됩니다”. 라는 기분 좋은 말 을 끝내면, 평생 팔다리허리가 아픈 형수에겐 힘든 일 위험한 일은 절대 하지 마시라며 도움 안 되는 부탁의 말로 통화를 마무리 짖는다. 두 사람의 주고받음이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안도의 대화라 밉지는 않다.
딸만 둘인 작은 형님은 사위들을 하늘처럼 생각하고 몸이 쓸어질듯 피곤해도 손자들을 거두고 먹이고 위하신다. 음식은 곧 생명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오신 형님, 지금도 그 연세에 재래시장을 찾아 신선한 재료를 사다놓고는 내 집에 오는 사람, 오겠다고 전화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이 후시간은 음식을 만드는데 모두 활 애 하신다. 딸이 건강을 생각해서 시장출입을 극구 말려보지만 ‘나는 오직 나만의 길을 가 겠 다’ 는 고집이시다.
딸만 둘을 낳았다고 몸조리를 못해 평생을 허리와 팔다리가 아프시다 면서 음식재료를 사러갈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 고집이 끝내는 이렇게 형님 몸의 반을 마비시키고 요양원신세를 지게 한 것 인 데. 교육도 받은 형님이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또 느끼기도 하고 체험하면서도 딸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수 십 년 해 오던 습관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게 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 생각이 무섭다.
추석에도 배낭가득 시장에 다녀오셨다는 엄마, 사고가 난 날도 시장에서 사온 물건으로 아버지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에 나가던 참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딸은 또 아연해 한다. 못 먹고 못쓰던 시대에 태어나서 살아온 엄마는 지금도 그때의 연장이고 연속일 뿐이라며 안쓰러워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옛 어른들의 생각을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늘같은 사위가 그날 처가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떤 상황일까. 당신의 무조건적 사랑이 넘쳐 사위를 보내주신 구세주 최 서방. 그 날 보니 어찌 그리도 환한 안도의 표정을 짓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웃음 띤 얼굴이 나중에는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답답하다고 해서 형님을 휠체어에 앉혀서 햇살 가득한 한낮을 산책했다. 눈이 부셔 하늘은 볼 수 없고 우리는 형님의 모습을 보고, 형님은 딸 사위와 족하 우리를 자세히 번 갈 아 보신다. ‘형님, 왜 그러셨어요?’ 하고 으스러지도록 안아드리고 싶었다. 그 동안 형님을 보고 배운 많은 예절과 인간애, 저를 위해서, “수술 후, 회복에는 그 음식이 최고야” 하시면서 대구까지 내려오셔서 그이와 함깨 재료를 직접구입하고 거의 하루가 걸려 만들어 주신 x장국. 제 식성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만 형님의 열성과 정성이 결국 나를 변화시킨 엄청난 결과를 주셨으니까요. 믿고 따를 수 있는 형님이 있어 항상 든든했습니다.
지난번에 부탁한 승우(우리 큰손자)사진을 거실에 걸어 놓고 매일 보시며 오는 사람마다 잘 생긴 우리 집안에 맡상주라며 자랑하신다면서요. 형님의 마음 충분히 읽고 또 읽고 있답니다.
“형님, 너무도 많이 달라진 세상에서 형님과 제가 살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많은 일을 하면서 세상을 움직이고 바꿔나가고 있어요. 그러니 아이들 말을 들어주어야지요. 그래야 이렇게 병원신세도 안지고 건강하게 살다 갈 수 있어요. 이젠 딸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딸도 편하고 형님도 편하답니다.” 분명히 내 얘기를 다 들으신 것 같은데 허공을 향한 시선을 떨 구 시 더니, 다시 모두를 쳐 다 보 신다. 웃음 반 찡그림 반의 얼굴로 “ 변해지나?”
7. 재활용의 변신 / 서 기 순
새 아파트에 입주한 지 1주일 되던 날이었다. 처음 입주하는 아파트라서 버리는 물건이 엄청나게 많았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물건들이 곳곳에 널브러져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덮개에 싸여있었는데, 보얗게 먼지가 소복소복 앉아 있었다. 쌓인 먼지가 사람손길이 떠난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아파트 재활용물건 버리는 장소 귀퉁이에 숨어 내 눈과 마주보며 무언의 마음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저 물건을 사용할 수 있을까? 아니면 고장 난 물건인가? 미동조차 하지 않는 채 혼자 바라보았다. 자주색을 뛴, 가마솥처럼 큼직하게 생겼다. 집에 것과 똑같은 메이커에 디자인도 똑 같아 보였다. 그 기구를 사용해본 나는 가정에 꼭 필요한 물건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관리실 직원이었다. 마음에 들면 가져가라고 했다. 두 번 밖에 사용 안한 물건이라고 했다. 조금 전에 103동에 사시는 분이 버렸다고 했다. 그것은 홍삼 다리는 기구였다. 정말 두 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물건이면 다른 사람이라도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지만 출근시간이라 머릿속에서 누구한테 먼저 물어 볼까하는 조바심이 일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친구한테 통화를 했다. 혹시 홍삼다리는 기구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런 기구 필요 없다며 “뭘 힘들게 다려먹어 사먹으면 되는데”하며 싫다는 응답을 받았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내 가슴은 콩닥거렸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혼자 야단법석을 떨었다. 다른 친구가 생각나 따르릉, “한약 달이는 기구 줄까”하며 바로 설명을 했더니 즉각 당첨이 되었다.
얼른 현관 앞에 가져다놓고, 설마 누가 가져갈까 혼자 안달하는 동안 출근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다. 저녁에 가져가라고 했지만 친구는 금방 달려오겠다고 했다. 왠지 새집에 들여 놓으려니까 마음이 찝찝했다. 모든 물건은 임자가 따로 있다고 하던데 두 번의 전화로 주인이 생겼으니까 잘됐다 싶었다.
딩동 소리와 함께 친구가 들어왔다. 새로운 주인은 자기 가족을 찾은 듯 알뜰하게 물행주로 겉을 닦아서 열어보려고 했다, ‘잘 될까?’ 하며 보석 상자를 여는 듯 살며시 뚜껑을 열어보았다. 내부의 물건은 윤기가 반들반들한 것이 주인 잘 만났다는 듯 미소를 머금으며 방긋 웃고 있었다. 그것은 친구 아니었으면 쭈그려지고 해체되어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주인 잘 만난 그것은 자기 본연의 할 일인 계란을 삶았다. 친구는 너스레를 떨었다. 삶은 계란은 쫀득쫀득한 맛이 그냥 솥에 삶은 것 보다 훨씬 맛있다고 했다. 감동이었다. 그냥 주방에 놓아두는 것만으로도 눈과 몸이 호강 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엄청 고맙다고 했다.
새집 증후군인지 잠에서 깨면 머리는 지끈거리고 어깨도 뻐근하다. 창밖을 내다보니 구름이 낮게 깔려 잔뜩 흐려 있다. 무엇부터 정리를 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집안을 돌아보는데 서서히 밝아지는 햇살과 함께 눈에 들어오는 것들, 그것은 곳곳에 쌓인 먼지들이었다. 불현듯 잊고 있었던 과제라도 찾은 양 몸놀림은 빨라지고 가라앉았던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종종걸음으로 이곳저곳 뒤져서 정리를 했다. 청소도구도 찾아내고 서둘러 창문을 모두 열고 털어내고 닦기 시작했다.
불현듯 시선은 반려식물로 다가갔다. 화분을 받히고 있는 화분대가 눈에 띄었다. 경비아저씨 생각이 났다. 엊그제 손녀랑 아파트 마당을 한 바퀴 돌 때였다. 재활용 수거 장소에 유행 지난 침실용 스탠드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물건을 새롭게 변신해 하나의 작품이 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위엣 부분을 들어내고 스탠드 등을 화분대로 탈바꿈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기능을 하는 제품으로 만들기에 도전했다.
아이디어는 반짝반짝 떠오르는데 어디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에 취해있는데 경비아저씨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여자로서 힘도 부족하지만 각종 도구가 전혀 없었다. 경비 아저씨 손을 빌려 함께 작품에 매진했다. 윗부분은 손이 닿으면 바스러질 것 같은 얇은 소재였다. 마른 찻잎을 다관에 넣을 때처럼 내손은 미세하게 떨리는 듯 했다. 밀고 당기고 분주하게 움직여 하나의 화분대가 완성되었다. 작은 아이디어로 버려진 물건을 새로운 제품으로 탄생시켰다. 화분대를 바라보니 윤기가 반들반들한 꽃 기린이 따뜻한 햇볕을 한품에 안아 활짝 피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 보였다.
손녀랑 손을 잡고 이웃아파트에 산책 겸 동네구경을 갔다. 아파트 근처에 산책을 자주 나가다 보니 경비하시는 분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날도 경비아저씨가 여행용 가방 두개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혼자 말로 ‘이렇게 깨끗한데 버리다니.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버리고 새로운 물건에 관심을 가져요.’ 하며 싫증을 내 듯, ‘아무리 물자 만능시대이지만 깨끗한 물건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고 투덜거렸다. 지퍼를 열어 속을 살펴보았다. 눈으로 보았을 때는 충분히 재활용이 가능한 상태였다. 어제 산 듯 아주 깨끗하고 디자인도 멋지고 쓸 만한 물건이었다.
“아저씨, 이런 여행용가방을 장보기 짐수레로 만든 것을 보았는데”하며 한번 만들어 보라고 권유를 했다. 한 개는 가져와서 친한 지인에게 주었더니 엄청 고마워했다. 큼직한 가방을 해부해서 멋진 짐수레용으로 변신시키기로 아저씨랑 약속을 했다. 참신한 아이디어라고 했다. 최선을 다해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작품이 완성되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비용은 충분히 지불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보름 후에 찾아 갔더니 “왜 이렇게 늦게 찾으러 왔습니까.” 야단을 치는 듯 했다. 잘 만들어 예쁘게 치장해서 잠시 밖에 두었는데 그만 누가 가져가버렸다고 미안해했다. 잘 만들어진 물건이 밖에 있으니 탐이 난 모양이었다며 무척 아쉬워했다.
그는 그런 물건은 자주 나온다며 기다려 보자고 했다. 첫 경험으로 작품을 만들었으니까 두 번째는 더 잘 만들어서 연락하겠다고 했다. 버려진 물건이 새로운 이름표를 달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물건이 되면 사랑하는 아이를 안아주듯 덥석 안아주고 싶어진다. 모든 물건들은 인간이 생존하는 이상 함께 동행 할 것이다. 모든 도구들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처음에는 엄청 귀족대우를 받지만 낡고 병들면 소외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깨끗한 물건들은 아쉬움이 남는다.
‘무용지용(無用之用)’이란 말이 있다. 옛날, 장자가 산길을 가는데 잎이 무성한 큰 나무가 있었다. 나무꾼이 그 나무를 베려고 하지 않자 장자가 까닭을 물으니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대답했다. 장자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나무는 좋지 못하기 때문에 타고난 수명을 다하게 되는구나.’ 무용지물이란 아무 데도 쓸모없는 물건을 말한다. 그 무용지물이 오히려 유익한 물건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 여행용 가방을 쓸모없다고 버렸지만, 아이디어에 따라 값진 진주가 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쓸모가 있는 물건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분리수거를 하지 않고 아무 데나 함부로 버리는 쓰레기들은 다시 태어날 기회를 잃고, 생활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는 물품들은 우리의 상상을 넘고 있다. 아낌없이 버려지는 폐품들을 또 다른 이름으로 탄생시키기 위한 노력이 실용적인 작품으로 재탄생 시키는 것 같다. 고장 난 물건은 다시 고쳐 쓰기도 하고, 부서진 부분은 다른 물건의 재료로 다시 고쳐 쓰면 좋겠다. 재활용을 통해 버려지는 쓰레기를 줄여 환경을 보호할 수 있으면 좋겠다.
7. 찢어진 청바지를 입다/ 변미순
지난해 여고동창들의 모임은 동해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강릉 선교장의 초록 잔디를 배경으로 빨강색 옷을 입은 레드코드가 발령되었고 그 화려한 여고동창회는 두고두고 이야기꺼리가 되어 우리를 행복하게 하였다. 그 열기가 채 식기전에 만나자는 올해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보자는 모임은 고도 경주로 정하고 10명이 모였다. 드레스 코드는 원피스, 교복, 찢어진 청바지(찢청)였고, 1박2일의 일정은 타이트하게 짜여 있었다.
서울서 내려오는 친구를 동대구역으로 마중가면서부터 출발된 친구들은 경주 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맛집에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우물회라는 특별한 음식을 먹고 한마디씩 하랬더니 모두가 첫경험, 시원함, 특별함, 칼칼함으로 표현하고 경상도 50대 아줌마들에게 딱 안정맞춤이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칭찬들에 1단계 맛집 선정은 대 성공이다.
첫 만남시 입은 원피스는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가장 비만인 난 항아리형 원피스를 입을 수 밖에 없었고, 그동안 헬스녀로 등극한 친구는 온몸에 딱 끼는 과히 중세시대의 여인들 허리라인처럼 그대로 들어나는 드레스는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이날을 위해 특별히 원피스를 구입했다는 친구는 열정상, 구입한 원피스가 너무 길고 두꺼워 결국은 낡은 원피스를 입고 왔다는 친구에겐 아차상 등등 어차피 허리둘레가 베둘레헴이 된 중년의 여인들은 허리가 들어나지 않는 평범한 원피스 밖엔 입을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첫날 저녁은 그렇게 이어져 갔다.
숙소의 밤은 새벽 3시까지 하하호호였고, 최고의 철학자 니체도 니체→나체→누드→알몸으로 전달하는 머리 수준은 여고생 그대로인 듯하였고, 각자의 일년간 요약 3분 스피치는 끼, 깡, 깨소금 같은 스토리들로 참 잘 살고 있는 멋진 여자들이라며 칭찬해 가면서 날밤을 새웠다. 그중 시인이 되고 있는 뇌세포 하나하나가 섹시한 한 친구의 “목련나무 아래서 I see you”의 시낭송은 모두 쓰러지게 하였다. “~~ 하루는 짧고 열흘은 더 짧은 우리의 시절인연 ~~” 그녀의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 가득한 시는 잠시 모두를 첫사랑 황홀지경에 빠지게도 하였다.
아침은 생략하고 경주에서 유명한 황남빵 집으로 향해 금방 구워낸 뜨겁고 달콤한 황남빵 3개씩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교복 대여점으로 향했다. 오픈 시간에 맞추어 가니 다른 손님도 없고 각자가 교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사이즈를 골라지는대로 하복, 춘추복, 동복의 여고생 교복으로 입어낸다. 그 시절과는 다르게 모두 치마 길이는 미니스커트이거나 말거나, 뱃살과 얼굴주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형태의 교복이거나 말거나 함께 입으니 용기백배내어 그 앞 대릉원 잔디밭으로 향한다. 지나가던 까만 승용차에서 갑자기 창문을 내리더니 “언니들 멋져요” 큰소리치면서 손을 흔들어 준다. “고마워 동상” 화답하고는 더 으쓱으쓱 걸어간다.
빨간 소품 사각가방을 내려쥐고, 움켜쥐고, 남고생 검정색 모자를 삐뚤게 써보기도 하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별별 연출을 다하였다. 소매가 길고 옷이 커 빌빌 돌아가는 교복을 입고는 동생들에게 물려도 줘야하므로 크게 입고 다녔다는 친구. 또 1학년때 교복 맞출 때는 이렇게 크게 입어야 졸업 때까지 3년 입는다며 실제로 그렇게 크게도 입었던 기억을 같이 떠올리며 깔깔거려 보았다. 뒷태는 아직 소녀적 그대로인 친구의 실루엣은 그날의 포토제닉상이었고, 입술을 쭉 내밀어 보이는 키작은 친구는 거의 손녀뻘되는 자세로 움직이는데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을 뻔 하였다. 전교 1등하던 친구는 껄렁껄렁한 자세로 이랬다 저랬다 포즈 취하면서 “젠장, 맨날 지금 아는 것은 뭐람? 그때도 알았더라면 정말 더 알곡지게 보냈을 여고시절 아니던가?”하며 교복이 이렇게 예쁜지 지금에사 알았다 합창을 한다.
잠시후 찢어진 청바지를 모두 갈아 입었다. 지난해 찢어진 청바지 코드발령났을 때부터 유념하고 있다가 홍콩에서 눈에 들어온 찢청을 구입해 왔다는 친구, 아무리 찾아봐도, 사려 해봐도 못구해 20년된 청바지를 찢어왔다는 친구, 너무 찢어져 실, 바늘로 조금 기워왔다는 친구, 미국서 사온 청바지는 온갖 화려한 천으로 덧대어 있구만 굳이 찢어 덧댄 것이라 우기는 친구, 젊은 조카의 찢청중 가장 어울리는 것으로 골라 입은 나까지 청바지의 모습은 훌륭하였다. 화룡점정이라 우기며 청바지 속에 검정색 망사스타킹을 준비한 친구는 졸지에 마릴린 먼로 아닌 이릴린으로 등극한다.
일년을 우리의 인생나이와 비교하면 여자들의 평균연령 84세로 보고 1월부터 12월까지 비교해 보니, 내 나이, 내 친구 나이 55-56세는 이제 막 한여름 8월을 보내고, 9월 초입에 들어선 나이가 되었다. 화려하고, 뜨거운 열정을 이제 조금 식혀져 가겠지만 그러면서 앞으로 내게 닥아올 계절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 아닐까. 핫한 열기가 없다고해서 기운없이 내려앉을 필요 없으며, 한편 움직이기 좋고 세상구경하기 가장 좋은 나이가 아닐까?
내 나이와 딱 맞은 9월 그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무리지어 경주를 거닐었다. 허브차가 빨갛게 우러나오는 카페에 앉아 우리들의 찢청코드를 변명하였다. 삼라만상의 모두에게 고하니 산전수전 공중전, 우주전까지 치른 50대 후반의 여인들은 찢어질 듯한 우리의 마음대신 청바지를 찢어 코드를 만든다. 청춘들에게 유행하는 찢청이 창조요 그 특이성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대신하였다. 너희들이 찢청입고 웃고 있을 때 우리는 찢청 입고 가슴이 시퍼렇게 멍들고, 찢어짐을 논하고 있다. 그래도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우며 행복해하고 있다.
일정표는 시간 단위로, 회비 정산은 백원 단위까지 맞추어 보고하는 칼 같은 친구도 있고, 기획하는 만큼 소프트웨어적인 놀이를 기획하는 작두무당형 친구도 있고, 사진 컷컷마다 소설같은 이야기로 풀이하는 친구도 있고, 전통주 명인이 된 친구의 담금주 맛보기로 몸은 홍양홍양해 지기도 하였다. 그 시절 영어선생님 발음은 거의 콩글리쉬 수준이고 그 영어선생님 발음을 지적하여 3년 내내 힘들었다는 친구의 영어수업 기억은 모두 자지러질 정도였다. 여행사 차려 관광상품 하나 만들어도 노후보장될 만큼 대박상품이다라고 자화자찬하면서 분명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들은 내공이 향상된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고, 많이 많이 즐거웠다.
늙은 할매들이 와이카노? 지인들이 자중하라고 제동을 건다. 아니 우리의 체면들도 가끔은 그만하라고 한다. 그러나 안된다, 못한다, 체면 갖추기 등등의 잣대는 거부한다. 우리는 늙지도 않았고, 육체가 나이들어가도 마음만은 청춘임을 지켜갈 것이며, 배우기를 멈추지 않고, 웃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보람된 일을 하는 큰 자세 또한 지켜갈거야. 나날이 지혜롭고 매일매일 나아가며 삶을 꽉 채울 에너자이저들이다. 이렇게 서로를 응원하고 행복을 빌어주고, 그러면서 힘찬 추억만들기는 이어질 것이다. 다음해는 무슨 스토리가 이어질지 기대하고 기다린다.
8. 날개가 있는 것도 추락한다/김정래
D고등학교에 볼 일이 있었다. 본관 건물로 들어 가던중 건물 좌측 통로 앞에서 선생님 두분이 무언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들여다 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참새 새끼 두마리가 폴짝폴짝 날면서 통로 안쪽 유리문에 부딪히고 있었다. 점프 하듯이 날아 올라 가지고는 닫혀진 유리문에 온 몸을 부딪혀 떨어지면서 비상과 추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D고등학교는 기억자로 지은 4층 건물로 좌측 끝 부분에 식당과 2층 체육관으로 올라가는 통로가 있었다. 통로에는 높이 2미터 폭 1.5미터 가량의 출입문이 유리로 되어 있고 입구 좌측 바같과 경계가 되는 벽에는 30센치 높이에 지름2미터 가량의 둥근 창이 나 있다. 창밖에는 자자나무와 잣나무 몇거루가 서있는데 새들이 날아와 지져귀고 있었다. 어미가 둥지를 비운사이 첫 나들이 나왔다가 잘못 날아 들어와 나오는 통로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닫혀진 유리문쪽으로 게속 탈출을 시도 하고 있었다. 유리문 넘어 계단에 햇살에 반사되어 내려 깔린 풀숲을 향해 날기를 계속한다.
문득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 전설이 생각났다. 그림속의 소나무가 살아있는 듯하여 새들이 앉으려다가 부딪혀 떨어졌다는 일화를 전하는 신라 진흥왕때의 화가인 솔거의 그림을 상상하며 교무실로 향했다.
볼일을 마치고 나오면서 새끼 새의 비상이 궁금하였다. 한 마리는 무모한 비상을 계속하는데 다른 한 마리는 벽 밑에 쳐박혀 꼼짜도 하지 않았다. 그냥 두면 새끼 참새 두 마리는 긴 함정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죽음의 나락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가까이가서 날기를 계속하는 놈을 바깥 통로 쪽으로 몰아내니 홀짝 날라가 버렸다. 죽은 듯이 꼼짝하지 않는 다른 한 놈을 손으로 잡으니까 파닥거리며 최후의 항거를 하는데 가여린 가슴이 뛰면서 토하는 가쁜 숨결이 손 끝으로 따뜻하게 전해져 왔다. 어린 생명에게 고통을 더하지나 않을가 고이 잡은 몸뚱이를 건물옆 풀섶에 내려 놓으니 몇 번 꿈틀거리다가 비상을 시도했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저서 데미안에서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고 했다. 오늘의 추락을 거울삼아 노송도에 앉으려다 추락하는 신세가 되지말고 드 넓은 창공을 한 없이 비상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어린 생명에게 딸아 보냈다.
누군가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날개가 있는 것도 추락한다.
인간의 역사를 도리켜 보면 절대 권력에 편승하여 무소불위(無所不爲)로 날아 오르던 자들이 허왕된 욕망의 올가미에 걸려 시궁창으로 한 없이 추락하는 것이 수 없이 반복되었다. 그들은 아둔하게도 영원불멸의 비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솔거의 그림이 인간에게 시사하는 의미는 정관(靜觀)이다. 단지 날으는 새는 그 식별이 불가능했다, 과욕(過慾)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궁창으로 추락하는 추한 인간들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