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子出生待望記: 이학원♧
이학원 명예교수(지리교육과)의 수필 손자출생대망기(청계문학 2023년 43집: 겨울호, 원고)를 소개합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합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
손자출생을 간절히 빌고 또 빌던 이야기 입니다.
2023년12월7일
강원대명예교수회 심종섭(회장)
Tel: 010-8731-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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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문학 2023년 겨울호(43호) 원고, 2023/11/5
수필: 손자출생대망기(孫子出生待望記)/ 이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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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며느리가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다. 우리 내외는 아들 내외의 눈치만 보고, 속을 끓이며, 손자 손녀가 태어나기를 학수고대한다. 늙은 부모가 기약 없는 세월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것이다.
서른한 살에 결혼한 아들이, 결혼 5년 만인 서른여섯 나이에 첫 딸을 낳았다. 결혼 다음 해부터 손자 출생을 애타게 기다리던 필자 내외는 예쁜 손녀를 낳아준 것만 해도 얼마나 기뻤던지, 손을 잡고 기쁨의 눈물을 글썽거렸다. 건강한 예쁜 손녀를 낳아준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렇게 예쁘고 고마울 수가 없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목사의 장녀로 성장한 며느리가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유가(儒家) 풍(風)의 우리 가문에 시집오기로 마음먹은 일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쉽지 않은 대단한 결심이다. 비기독교 집안의 시집살이에서 일어날 각종 낯선 일을 생각하면,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메고 오르던 예수의 고통과 맞먹을 마음고생이 있을 것이라 각오했을 것이다. 그러나 쇠를 녹이고도 남을, 며느리의 열정적이고 크게 감동을 주는 가족 사랑이, 너무나 고맙고, 귀하고, 장하게 여겨졌다.
손녀가 태어난 지 3년이 지나도록 손자 소식이 없자, 아내가 며느리를 불러 앉히고, 손자를 낳을 여러 가지 조언과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째가 며느리의 체질을 알카리성으로 바꾸고, 아들을 산성 체질로 바꾸기 위하여 장기간에 걸친 식습관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며느리는 채식을 위주로 하고, 아들은 동물성 육식을 위주로 하는 식단으로 바꾸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손자를 보기 위한, 최적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한 명분이라 하지만, 아들 내외의 개인 식성을 무시한 반강제적이고 억압적인, 시어머니의 일방적인 처사라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마음씨 착한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친정에 다니러 가서도 채식을 계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손자를 기다리는 시부모를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일도 견딜 수 있다는, 며느리의 대범한 태도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두 번째로는 서울 차병원 산부인과 전문의를 찾아가, 배란 가능 시각을 정확하게 알아보도록 한 후, 합방을 종용하는 일이었다. 이런 사안은 격의 없고 허물적은 절친 고부간이거나, 권위주의적 시어머니만이 조언하고 강권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시아버지인 내가 손자를 보기 위해 며느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낸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가 집안의 일상생활에서 며느리의 마음을 편안하고, 기쁘게 해 주는 일이고, 두 번째가 간절한 마음으로 조상님께 손자 하나를 점지해 주십사고 청원하는 일이다. 지극정성으로 기제사와 설·추석 명절 제사를 모시는 일이 급선무라 생각했다. 외손자를 점지해 주십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는 일은, 필자보다 수백 배나 기도발이 셀 목사 사돈 내외분께 부탁할 요량이었다.
양력 10월 15일이 아버지 기일이다. 아버지 기일에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와 키워주신 어머니 두 분의 제사를 같이 모신다. 제사 중간에 합문(闔門) 시간이 있다. 지방(紙榜)으로 모신 부모님의 혼령이 제사상에 차린 음식과 잔에 올린 술을 드시는 시간이다. 방 안의 불을 끄고, 제관들이 부복한 채로 생전의 부모님 사랑과 은덕을 감사하며, 불효를 반성하는 짧은 묵상의 시간이다. 이 시간에 제주인 필자가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하는 바를 영전에 고(告) 하기로 하였다.
건강하고 예쁜 손녀가 출생한 이후, 5년 동안이나 계속 부모님 기일과 설·추석 명절 제사의 합문 시간에 지극정성의 간절한 마음으로, 부모님 영전에 간청하며 빌었다. “아버님, 어머님! 이 불효한 자식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손자 하나를 점지해 주십시오. 제 당대에 이르러 절손(絶孫)이 되는 가슴 아프고, 슬프고, 쓸쓸한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건강하고 귀한 손자 하나를 점지해 주십시오. 부모님 영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여쭙는 저의 소청을 꼭 기억하시고 들어주십시오.”
큰 며느리로서 4남 3녀의 시동생과 시누이 뒷바라지와 오랫동안 제사상을 차려온 늙은 아내가, 부모님 영전에 여쭙는 내 말끝에 느닷없이 큰 소리로 덧붙여 간청하였다. “아버님, 어머님!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올해에도 손자를 점지해 주지 않으시면, 내년부터 아버님, 어머님 기제사와 설·추석 명절 제사를 올리지 않겠습니다. 꼭 손자를 점지해 주십시오.” 손자를 기다리다 이성을 잃은 아내가, 모처럼 자식 집에 강림하신 부모님 영령을 앞에 모셔놓고, 투정하는 말투로 조용한 협박을 하고 말았다. 갑자기 덧붙인 아내의 불경한 말로, 제주였던 내가 여러 형제 남매들과 조카들 앞에서, 난처하고 당황스러운 순간을 맞았다.
아내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곧 다시 부모님 영전에 소청의 말씀을 올렸다. “아버님, 어머님! 손자를 기다리다 지쳐서 이성을 잃고 불쑥 튀어나온 큰 며느리의 말 투정이 좀 심한 것 같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태까지 부모님 제사를 잘 모시며, 형제남매간의 우애를 위해 애를 쓴 큰 며느리를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손자 하나를 점지해 주십사고 소청하는 며느리의 청을 꼭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차린 음식과 제주를 많이 드시고, 노여움을 푸시기 바랍니다.” 나는 집사람 편을 들며, 순간의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고자 애를 썼다. 남자 제관 몇 사람은 웃었고, 딸들은 큰 올케가 할 말을 했다며, 아내 편을 들었다.
손자 손녀 출생을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노인이 필자뿐만 아니다. 필자 또래의 지인들 가운데는, 자녀들이 아예 결혼을 안 하거나, 결혼을 했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자식들 때문에, 마음속을 썩히는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다. 눈 뜨고 살아있는 자기 당대에 절손이 되는 기막힌 현실을 목도하며, 가슴 아프고 쓸쓸한 여생을 보내는 노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꼰대 세대라 부르는 노인들의 자화상에 찬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종족보존의 본능을 갖고 태어난다. 이 종족보존의 본능 때문에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며 살아간다. 박토에 뿌리를 내린 식물도, 열악한 자연환경에 수없이 부대끼며 이동하는 사막이나 양극 지방의 동물들이나, 세 끼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도, 모두 이 종족보존 본능 때문에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매년 음력 10월 3일이면, 경북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의 경수당에서 신라 벽진성의 태수이셨고, 고려삼중대광개국원훈벽진장군 이셨던 벽진이씨 시조 이총언공의 추향제가 열린다. 벽진이씨 대종회가 주관하는 이 추향제에 시조할아버지 영전에 잔을 올리는 헌관에 지명될 기회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10만여 명에 가까운 벽진이씨 후손 가운데, 대종회 발전을 위하여 큰 재물을 헌성금으로 내놓았거나, 대종회 발전이나 향토 및 사회 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한 유명 인사가 아니면, 춘향제나 추향제 때 헌관으로 낙점되거나 추대되기 어렵다.
필자가 아는 어느 가문에는 재벌 정도의 큰 재물과 장관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후손으로서, 평소 가문의 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한 후손을 헌관으로 추대한다. 맨 처음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이 되려면 5백만원의 헌성금을 내놓아야 하고,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亞獻官)은 3백만원, 마지막 세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관(終獻官)은 2백만원의 성금을 내놓아야만 헌관으로 낙점·추대된다고 한다. 한국의 많은 성씨의 시조 춘향제나 추향제 때 헌관으로 봉사하는 자리가 어떤 위치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만한 일이 아닌가.
필자가 손자의 출생을 학수고대하며, 애타게 기다리던 기간에, 운 좋게도 10만여 명에 가까운 벽진이씨 후손들 가운데, 시조 할아버지의 추향제 종헌관으로 낙점받은 큰 영광을 갖게 되었다. 벽진이씨 대종회에서 발간한 “敬收”(창간호)에 투고했던 ‘시조 할아버지의 고뇌와 혁명적 결단’이라는 필자의 글, 벽진이씨서울화수회가 발간한 “碧珍” 제14호에 실린 ‘의총으로서 전해 온 고총 답사기’와, 노촌기념사업회 자유게시판에 올린 “내 피뿌리는 혁명가였다”라는 글(7,182회 방문), “어느 청백리 후손의 단상”이라는 필자의 글(92,668회 방문)을 읽어보신 대종회 어른들께서 이런 영광된 자리를 마련해 준 것 아닌가 하고 짐작할 뿐이다.
필자는 시조 할아버지를 모신 위패 앞에 꿇어 엎디어 잔을 올리며, 귀한 손자 하나를 점지해 주십사고 소청할 작정을 하였다. 내가 얼마나 기다리고 바라던 손자출생대망의 소청 기회가 아니었던가! 부산벽진이씨화수회 회장을 지내신 이우묵 대부께서 대종회 추향 집례를 맡아보시며, 종헌관인 나를 호명하였다. 마침내 대망의 기회가 왔다.
“시조 할아버지! 시조 할아버지 영전에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이 후손은 경남 고성군 구만면 효락리 낙동 823의 1번지가 고향인 35세(世) 학원입니다. 달랑 아들 하나를 둔 이 후손이, 시조 할아버지 탄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1,079년 동안이나 연년세세 대를 이어 핏줄을 이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후손의 나이가 이미 일흔다섯이 되었는데도, 아직 대를 이을 손자를 보지 못해, 절손의 집안이 될까 봐 노심초사, 가슴 시린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측은한 후손의 간절한 소청을 들어주시어, 떡두꺼비 같은 건강하고 귀한 손자 하나를 점지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청합니다. 연년세세 대를 이어오는 시조 할아버지의 영광이, 제 집안에서도 계속될 수 있도록, 이 후손이 살아있는 동안, 귀한 손자를 점지해 주십시오.” 지극정성의 간절한 마음으로 소청의 말씀을 여쭙고, 재배한 후, 뜰에 마련된 종헌관 자리로 돌아왔다.
시제의 종헌관으로 참석하여, 시조 할아버지 영전에 잔을 올리며 소원을 빈 후손은 시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며, 추향제에 참석한 종인들 간에 오랫동안 소문이 자자하다. 틀림없이 시조 할아버지께서 이번 종헌관의 소원을 꼭 들어주실 것이라며, 여러 종인들이 위로와 격려를 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시조 할아버지께 손자를 점지해 주십사고 간절히 소청했던 두 달 후에,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반갑고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또 임신 5개월 후에는, 임신한 태아가 사내아이라는 놀랍고 행복한 소식을 서울 차병원 산부인과에 태아 진찰을 갔던 며느리가 전해왔다. 부모님과 시조 할아버지의 영령께서, 이 후손의 간절한 소청을 들어주신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귀한 손자를 잉태한 며느리에게 시아버지로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온갖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다 쏟아 태아 교육에 진력하고 있는 며느리가 그저 고맙고, 감사하기만 했다. 한집에 사는 이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마음만이라도 편하게 갖도록 하여, 태아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며느리가 건강하게 손자를 순산할 수 있도록 집안 분위기를 밝고, 명랑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았다.
사돈이 목사님이시고, 장녀인 며느리가 모태 신앙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이런 며느리가 정성을 다해 태아 교육을 위해 애를 쓰는데, 온 가족이 협력하고 도와주어야만 했다. 그러자면, 나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 모두가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정신적으로 안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며느리만을 위한다면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이, 가장 쉽고 적절한 방법의 하나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의 조상을 위한 제사는 1,079년이나 이어져 내려오는 오랜 전통의 가례이다. 이 오랜 전통을 하루아침에 깨뜨리거나 중단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변화의 과정이 순조롭지 못하면, 가깝게 지낸 형제남매간에 불화를 가져올 수도 있고, 가까운 집안이나 가문으로부터도 이단자가 되어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
아내는 장모님께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셨기에, 며느리처럼 모태 기독교 신자였다. 조상께 제사를 지내는 유가 풍의 필자를 만나, 결혼 후 지금까지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필자도 초등학교 3학년 때, 고향 마을 실리 어른께서 집도하는 고뿡회의실의 동네교회에 다니며, 찬송가를 배운 경험이 있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 미국에서 보낸 구호품 중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맛 난 과자와 초콜릿이 있었다. 이 과자와 초코릿을 교회에 나온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피끼를 뽑아 간식으로 먹던 그 어려운 시절, 그 맛난 과자와 초코릿을 얻어먹으러 또래 아이들과 같이 동네교회에 들락거렸다.
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진주중앙교회 장로님 댁에 입주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장로님 댁 식구들과 같이 진주 중앙교회를 다닌 경험도 있다. 당시에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교회 성가대에서 베이스파트로 찬송가를 부르며, 기독교와 교회가 어떤 곳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던 기회도 있었다. 장로님 댁의 추도예배에도 참석하였다. 그리고 필자의 아들 내외는 미국 유학 시절, 같이 교회에 다녔다. 집안의 네 식구 모두 교회에 다닌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기독교에 귀의하거나, 추도예배를 드리더라도 별로 큰 어려움이 없는 그런 집안 상황이었다.
사회· 문화의 급격한 변화와 발전에 따라, 전통적인 가부장적 대가족공동체 문화에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부모님 기일이나 설·추석 명절 제사에, 원거리에 사는 나이 든 형제 남매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모시는 일이 점점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고령화에 따른 위험한 원거리의 자동차 주행 문제도 있었고, 결혼한 자녀와 손자 손녀들로 구성된 소가족 단위의 가족 행사와 모임이 빈번해 지면서, 소가족 중심 시대가 도래하였다. 근래에는 대가족이 자주 모이기 어렵고 번거로우니까, 집안의 모든 기제사를 하루에 모아 같이 지내며, 차례 음식과 제례의식도 간소화하는 추세이다. 그리고 대가족공동체 중심의 규모가 큰 제례 행사를 주관하던 어른들의 연세가 연만해지고, 규모가 큰 제례 행사 준비가 힘들어지면서, 소가족 중심의 간소한 제례 행사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필자는 오랜 고심 끝에, 온 식구가 며느리와 같이 교회에 나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여태까지 지내던 전통적인 제사 대신에, 기독교식 추도예배를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추도예배 차례는 목사이신 사돈께 자문과 지도를 받았다. 1,079년이나 전해온 유가 풍의 전통 제례가 추도예배로 바뀌면서, 가족들의 의식 구조와 정신적 변화가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권위주의적 사고와 말투가 좀 더 상냥한 말투로 바뀌고, 가족 상호 간을 위한 헌신과 봉사가 많아졌다. 다행이었다. 유가 풍의 재래식 제사나, 기독교식 추도예배나, 불교식 의식이거나 간에, 조상을 추모하는 방식만 조금 다를 뿐, 조상을 추모하고, 부모님 은혜에 감사하며, 추억하는 마음은 다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한평생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체념했던 아내와 며느리가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되자, 무척 좋아하며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손자를 잉태한 며느리의 마음과 몸이 얼마나 편안하고 기뻤겠는가.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란 말도 있지 않은가. 착한 며느리의 심성과 언행과 행실이 온 가족에게 힘찬 선교 활동을 한 셈이다. 며느리의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힘이, 집안의 오랜 전통을 깨고 기독교에 입문토록 하는 기적을 일으킨 셈이다. 나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집사라는 직함을 받았지만, 아직도 믿음이 약한 나이롱 기독교 신자다. 아내와 며느리가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고부간의 단합한 힘이 집안에서 무서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집안이 여강남약(女强男弱) 시대가 된 것이다.
2018년 6월 5일, 산과 들이 온통 연초록 신록으로 뒤덮인 초여름 오후 8시 30분경, 초여름 초저녁의 조용한 밤이 찾아왔다. 서울 차병원에서 아들의 출생을 기다리고 있던 애비로 부터 손자 출생의 기쁜 소식이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손자가 자연분만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며느리도 건강하다는 소식이다. 그동안 며느리가 태아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초음파검사를 몇 번 했는데, 번번이 태중의 아들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며 행복한 투정을 하였다. 어머니 애간장을 태우며,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하겠다는 태중 손자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혼자 미소짓던 일이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손자 출생 하루 만에, 손자 보러 차병원 신생아 면회실을 찾아갔다. 어머니 모태에서 자라면서도, 그 어머니에게까지 얼굴을 안 보여 주려 했던 그 대단한 손자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었다. 신생아 면회실 유리창 안으로 간호사에게 안겨 나오는 내 손자, 재희를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 왔다. 손자 얼굴을 처음 쳐다보는 순간, 너무나 기뻐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손자 얼굴을 더 쳐다보려는 욕심으로, 흐르는 눈물을 그냥 놔둔 채, 손자 얼굴만 계속 쳐다보았다. 온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이 온몸을 휩쌌다. 손자를 보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 세월 불안했던 마음이 모처럼 평정을 되찾으며, 아주 아주 편안해졌다.
기쁨의 눈물을 글썽이며, 마주 쳐다보고 서 있는 조손(祖孫) 간의 만남을 지켜본 간호사가 한참을 더 머물다가, 손자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더 가까이 다가와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멋진 간호사의 그 센스있는 배려에 감사하며, 목례를 하였다. 좋은 병원과 훌륭한 간호사는 어디가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지금도 기회 닿는 대로 서울 차병원 산부인과를 소개하고, 추천하며 다닌다.
벌써 다섯 살이 된 손자가, 춘천에서 가장 이름있는 명문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아침 8시면 유치원 버스를 타기 위해, 애비 어미의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선다. 이 할애비도 손자 뒤를 따라나선다. “재희야! 오늘 유치원에 가면, 친구들과 어울려서 잘 지내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재미있게 놀다 오너라!”, “예!”,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이 우주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그 이름을 혹시 알고 있나?” 손자가 큰 소리로 대답한다. “저, 이재희!”, “맞았다, 이재희이지! 할아버지가 하루 종일 우리 재희가 집에 올 때까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알았지?”. 버스 운전기사 뒷자리에 앉아 선생님의 도움으로 안전벨트를 매고 나면, 고사리 같은 예쁜 손으로 엄마, 아빠, 할애비, 할매를 향해 두 손을 흔들어준다. 나도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한다. “재희야! 유치원에 잘 다녀와!, 할아버지가 우리 재희를 많이 많이 사랑해!”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가는 손자 얼굴이 멀어지면, 사랑하는 손자와의 영원한 이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으며 집으로 들어오곤 한다.
오후 4시 정각이 되면, 할매 카톡에 저장된 손자의 예쁜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할머니! 데리러 올 시간이에요. 출발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침에 버스를 탔던 곳으로 손자 마중을 나간다. 버스가 가까이 오면, 할배는 운전기사께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할매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유치원 선생님이 재희 책가방을 챙기고, 덜렁 안아 차도 가에 내려준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유치원 버스 안에서 자다가 내린 손자를 내가 업는다.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내 손자, 이재희를 업는 것이 너무너무 좋다!, 오늘 친구들하고 재미있게 놀았어?, 간식도, 점심도 꼭꼭 씹어서 맛있게 먹었나?, 그리고 마스크는 잘 쓰고 지냈어?, 할아버지가 내 손자 이재희가 보고 싶어, 하루종일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어!”. 손자는 하루 동안 유치원에서 일어났던 일을 ‘쫑알쫑알’ 모두 이야기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예쁜 여자 친구도 있다고 자랑한다.
“재희야! 할아버지가 우리 재희에게 이야기해 줄 것이 하나 있어! 할아버지가 재희같이 아주 어렸을 때, 증조할머니가 나를 업고 다니시면서 가르쳐주셨어. 내가 자랑스러운 청백리 자손이라고 하셨어, 이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운 청백리 자손이면, 우리 재희도 자랑스러운 청백리 자손이 되는 거야, 알았지, 재희야! 앞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 알았지?, 내 손자 이재희, 파이팅!”
할아버지 등에 업혀 오는 동안, 조손 간에 나누던 이야기는 대문 앞에서 끝난다. 유치원생 재희는 초등학교 4학년인 지희 누나가 기다리는 큰 방으로 들어가며 큰소리로 인사한다. “누나! 안녕! 잘 다녀왔어?”, “응, 재희야! 어서 와! 우리 재희, 잘 다녀왔구나!”. 방문 앞에 멈춰선 할아버지의 짝사랑이 손자와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간다.
2023년 11월 5일.
이학원: 前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교수
(이학박사)
강원대학교 교사교육원 원장
강원대학교 중등교원연수원 원장
한국사진지리학회 회장
한국지리교육학회 부회장
대한지리학회 학술부장, 이사
한국경제지리학회 이사
서울대학교총동창회 이사
강원도 교원단체연합회 대의원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연구교수
황조근정훈장(대한민국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