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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수필문학 강물 속 튼실한 줄기의 흐름 -
지연희(한국문인협회수필분과 회장/시인)
현대문학 속 수필문학은 1971년 한국수필가 협회의 결성으로부터 태동하고, 이후 한국문인협회에 문학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된 시점을 현대수필문학역사의 근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작고하신 조경희선생을 구심점으로 작가, 대학교수, 언론인, 문화예술인 등을 규합한 한국수필가협회의 태동은 오늘 한국문인협회 전체 회원 약 만 이천 여 명 중 그 두 번째로 많은 식구들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수필인구의 확대가 문학 장르의 우수성을 가늠하는 것은 아니기에 한국수필문단의 발전은 수필인들의 훌륭한 수필쓰기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 앞서야 한다. 그 일환으로 수필가의 수필집 출간은 수필문단을 살찌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경선 수필가가 이 봄날 눈부신 꽃들의 피어남 속에서 제2수필집「겹겹 기억 속에」를 선보이게 되어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첫 시집「하얀비」에 이은 3년 만의 결실이다. 2006년 격월간 한국문인을 통해 문단에 발을 딛게 된 이경선수필가의 문단이력은 이제 7여년에 이르게 되지만 게으름 없는 창작수업의 증표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 또한 한국수필문단의 문학발전을 꾀하는 일이기에 수필분과 회장직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감사한 마음이다. 수필문학을 일컬어 성찰의 문학이라 한다. 모름지기 수필가는 자신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삶의 깊이를 깨우치게 하는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한 권의 수필집에 수록된 편 편의 이야기들은 독자의 가슴을 따뜻이 감싸줄 기대로부터 감상의 문을 서슴없이 열고 있다.
거짓은 자존심과 연계성이 있다고 본다. 누가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일종의 방어벽을 쌓는 식인데 거짓말을 하는 그 자체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지, 묻고 싶다. 모 연예인의 전 연인처럼 정체성을 알 수 없으니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고 재력이 넘쳐도 인생의 동반자로는 손을 내밀 수 없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려고 꾸미려는 자체만으로도 무섭다. 남이 아닌 먼저 내 자신을 속이는 일이기에 그 얼마나 비참할까. ‘부러진 화살’ 영화 역시 거짓 판결을 내린 사법부는 진실을 알면서도 왜곡하고 있다. 권위가 한 개인의 자존감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짓 이상의 오만까지 동반한 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끈질긴 진실 찾기로 이어 질 것 같다. 알고 실행하는 행동과 모르고 하는 것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건조해진 양심에 듬뿍 물을 주자. 그리고 풀 한 포기 정성스레 심어주자.
수필「거짓은 거짓을」중에서
사소한 일에 예민해져 나를 조종하는 어떤 이가 내 안에 숨어 사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긍정의 반대 부정. 항상 그 둘의 관계 속에 우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어떤 일에 부정적인 측면이 손을 번쩍 들을 때도 있지만 이왕이면 가능하다는 쪽으로 기울이려 노력하련다. 돌아보면 지난 시간들은 힘겨웠지만 그래도 그립고 좋은 기억만 남아 있는 듯하다. 만족도를 점점 낮추다보니 현재 크게 불만이 없는걸 보면 긍정과 부정을 번갈아가며 마음고생만 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긍정적인 측면에 가장 으뜸인 자긍심이 유난히 매서운 날을 보내고 황홀지경의 새 봄을 맞는 벚꽃잔치만큼 내 안에 파고든다.
수필「그 녀석 ‘긍정이’」중에서
이경선 수필가의 수필 몇 편을 감상하면 자신만이 소유한 특별한 언술의 향취에 젖게 되는데 이는 독자의 내심을 흡인력으로 끌어당기는 신비한 마력이다. 수필「거짓은 거짓을」과 수필「그 녀석 ‘긍정이’」에도 내재되어 있지만 주어에서 서술어로 잇는 비유어의 명증하고 통쾌한 작용이 그것이다. 절묘하게 던지는 문장의 흐름은 시원한 산사의 바람 앞에 서서 듣게 되는 풍경소리와 같다. 티끌이거나 군더더기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근래, 그녀는 다른 이성을 통해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찰방지게 보이던 여성성이 산산조각 났다. 곳곳에 그녀의 이름이 빨래처럼 걸려있다. 동거한 남자의 보복이었다. 그 남자의 탄원서 같은 글이 내 눈에 꽂혔다. 늘 사람을 속인다고 한다. 거짓말을 일삼는다는 거다. 치명적인 말이다.(수필「거짓은 거짓을」중에서)’ 이 수필의 메시지는 거짓말은 거짓을 더욱 가중시킨다는 내용을 중심축으로 담고 있지만 작가의 윤기 있는 문장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수필「그 녀석 ‘긍정이’」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사고로 조바심하고 가슴 아플 만큼 예민해 하던 화자가 이제 마음의 여유를 지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풀고 있다. 직접 체험하거나 혹은 간접 체험하면서 몇 가닥의 삶의 사례를 제시하는 이 수필은 세상을 폭넓게 내다보며 긍정하는 마음의 여유가 자신 있는 삶을 만든다는 내용이다. ‘그날도 세탁물을 맡기라는 청년의 외침이 들리고 자전거를 타며 흉내 내는 아들의 음성이 들렸다. 청년이 한번 외치면 아들이 따라하고. 조금 걱정이 되었다. 청년입장에선 불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청년은 ‘세~에~타~악!!’ 외치는 톤의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아들은 - 여러 번의 반복교육을 받으며 연습 중이었다. 어찌나 웃음이 터지던지. 그러나 밝고 당당하게 자신의 일을 하는 청년의 모습이 아파트 높이만큼 커보였다’는 이 수필 속 인물의 마음 자세를 보여준다. 불쾌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을 긍정하여 대처해 내는 세탁소 청년의 삶의 지혜가 독자의 의식을 깨우는 수필이다.
누구나 살면서 자신의 그릇을 빚고 있다. 아버지처럼 이젠 우리 곁을 사라진 경우도 있고 제법 성한 모습으로 혹은 실금이 간 상태로 또는 귀퉁이가 살짝 눈에 띄지 않게 튕그러져 나간 형태로 말이다. 완벽한 인간의 모습에서 우린 되도록 더딘 몸짓으로 조각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얼마만큼 조심하며 다루어야 덜 다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틀만은 영원하리라는 이중심리로 묘하게 해묵은 감자자루처럼 버티고 있다. 누가 누구를 질타 할 수 없다는 것조차 알면서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쉽게 깨질 것 같은 작은 유리그릇도 조심스레 다루면 고유의 투명함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맑은 우주를 유지하리라. 문득, 어린 시절 마당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장독대에 반질반질한 된장 항아리, 간장독의 넉넉하고 푸짐한 엉덩이를 쓰다듬고 싶어진다.
수필「그릇」중에서
‘남이섬’을 근거리에 두고 그곳에 가면 꼭 먹어야 할 것 같은 닭갈비집에 마주앉았다. 창가 옆은 강줄기가 잔잔하게 흐르고 주변으론 꽃가지들이 어우러져 어디선가 천사들이 숨바꼭질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갑자기 우리의 여유로운 행동들이 잠시 불안하기도 했다. 봄볕만큼 소중한 시간을 감지하며 여객선에 올라 메타쉐콰이어 길에 큼직한 발자국을 남겼다. 자전거를 타는 연인들, 연인의 무릎을 베고 벤치에 누워있는 젊음. 내 몸이 근질거린다. 부럽다. 우리도 저런 적이 분명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만큼 온거야. 여긴 어딘거야. 저 짓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안타깝다. 멀리 오리배 타는 곳이 보인다.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걸 탈려구?” 마치 불온한 짓을 꾸짖기라도 하려는 음성이다. “우리 예전에 탄거 잖아 원천유원지에서. 당신 남들 안 보이는 데로 노 젓던 거 생각 안나?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 쑥스러움에 뒤로 빼려는 남자를 보이지 않는 밧줄로 힘껏 잡아 당겼다. 어느새 기억의 촉수를 더듬으며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뒤뚱 뒤뚱거리며.
수필「그림자 밟는 날」중에서
글의 주제와 소재는 씨줄과 날줄처럼 절대적 관계로 존재한다. 글의 중심축이라 말할 수 있는 주제는 명증한 소재들의 작용에 의하여 완성되며, 하여 글은 어떤 주제를 설계하고 주제를 세울 수 있는 어떤 소재들을 설치하느냐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글의 설계는 주제가 뚜렷해야 가장 훌륭한 글을 완성하게 된다는 이치이다. 수필「그릇」은 신혼 초부터 아껴오던 그릇이 하나 둘 깨어져 사라지는 존재의 사위어짐에 대한 허무를 말하고 있다. 혼수로 장만해 온 그릇이 깨어지는 일은 어머니의 손길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된다. 뿐만 아니라 납골당에 계신 아버지의 유골함을 살피며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보잘 것 없는 ‘작은 유리그릇’에 불과한 나를 세상구경 시켜준’ 아버지의 허망한 부재에 대한 아픔이 이 수필의 메시지이다. 그릇이라는 사물을 매개로 어머니의 손길이나 아버지의 사랑을 가슴으로 재는 따뜻한 수필이다.
수필「그림자 밟는 날」은 모처럼의 휴일, 남편과의 오붓한 외출로부터 시작된다. 생수와 간단한 요기꺼리를 넣고 옷을 챙겨 입고 남편도 콧노래를 부르며 점퍼를 걸쳐 입었다. 부부는 특별히 목적지를 정해 놓고 출발한 것은 아니지만 승용차는 경춘가도를 달린다. 그리고 몇 개의 톨게이트를 지나 휴게소에 머물게 되는데 차가 정차하기 무섭게 정해진 곳을 찾아 흡연의 갈증을 해갈하고 걸어오는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이 이 수필이 설계한 메시지의 시작이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로 연결된 장거리 달리기 선수마냥 앞만 보고 달린 삶, 골인지점이 어디인줄도 모르고 무작정 달린 남편의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된다. 담배꽁초를 버리고 돌아오는 남편의 모습 속에는 세월도 함께 묻어 있지만 튼실해진 몸과 연륜의 중후함이 그리 흉해 보이지 않는다는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들 부부는 자전거를 타는 연인들, 연인의 무릎을 베고 벤치에 누워있는 그들 곁을 지나 젊음의 그 어느 날처럼 ‘그림자밟기’를 시도한다. 어색한 남편을 이끌어 ‘오리배 타기’ 추억의 그림자를 밟게 된다.
괴롭히던 녀석들이 세상 누구보다 무서웠던 아이는 지금 매 맞지 않고 부모에게 거짓말하지 않아 편안할까. 정신적 맷집이라도 강했으면 좋으련만. 착한사람 바보 만들어 고립시키고 결국 가족들 곁을 떠나야만 했던 아이는 마지막으로 집을 지키기 위해 현관 도어 록 비밀 번호를 바꾸라고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또 한 번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결국 그 어머니도 교사를 내려놓고 어머니로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중벌로 다스려 줄 것을 법정에서 눈물로 호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또, 얼마 후 이 사건은 수면 아래로 사라지게 될 것이고 가족들만이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리움과 아픔을 자물쇠로 꼭 잠가 둘 것 같다. 미안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가엾은 아가야!
수필「떠나버린 아이」중에서
어젯밤, 하늘을 쪼개는 듯 거친 통증의 굉음과 물 폭탄이 내 머리맡에 놀러 와 온 밤을 설쳤다. 비 내리는 소리가 마치 기계 돌아가는 소리처럼 음률을 타고 있었다. 박자도 정확했고 성량도 풍부했다. 최명희 소설가의 ‘혼불’에서처럼 지금 내게 물 한잔 건네주고 가려는 인연을 만들어주느라 충직하게 노래를 불렀다. 이 밤비가 그치면 더 맑게 치장한 하늘을 보여주느라 무던히도 애를 쓸 것이다. 그 틈에 난 누군가에게 화가 아닌 특별한 영양제가 되기를 잠결에도 부탁하고 있었다.
수필「맛있는 비」중에서
문학은 궁극적으로 현실사회의 단면을 담는 그릇이다. 자신이 스스로 체험한 사실을 뛰어넘어 세상에 널려진 희로애락을 장르적 특성에 버무리는 언어예술이다. 때문에 작가가 살고 있는 현실반영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며 어쩌면 시대의 증인임을 자처해야 할 일이다. 수필「떠나버린 아이」는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교육현장의 매우 불행스런 슬픔인지 모른다. 나무의 파릇한 새순처럼 무한한 꿈과 희망으로 가득해야 할 아이들이 학교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짐을 말한다. ‘왕따’와 ‘갈취’라는 서슬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을 날 보도 위에 내리는 나뭇잎처럼 목숨을 버리는 안타까움을 그려내고 있다. ‘자신이 사라져야 가정이 행복할 것이란 착각으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 순간 하느님은 더 다급한 일에 출장 가셨나보다. 왜 부모에게 말해 도움 받을 용기를 주지 않으시고 내려다보면 아찔한 난간을 뛰어 넘게 하셨을까. 뒷덜미라도 독수리에게 부탁해 집안으로 낚아 채이게 하지 않으시고. 아직 자아가 형성 안 된 어린 학생의 유서가 상처부위에 소금이라도 뿌린 듯 아리다’ 는 학교폭력의 강력한 규제가 필요함을 제시하는 메시지라고 본다.
수필「맛있는 비」는 그 제목만으로도 혀끝으로 감지하는 미각적 언어의 향기에 젖게 한다. 이 수필은 비가 세상에 내려 존재하는 다양한 영향을 짚어낸다. 장마로 인해 도심과 농촌의 피해 그리고 작가 자신이 추구하던 공장건축의 기초 공사에 미치는 유해에 대한 조바심도 있다. 그러나 염려했던 비가 필요한 만큼 적당히 내려주어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던 날의 감각적 표현이 이 수필이 읽는 이에게 전하는 핵심이다. ‘기초공사를 마치고 전체 바닥 콘크리트 마무리 하던 날은 비가 조금 내려줘야 단단히 굳는다기에 혹시나 기다렸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계량컵을 쓴 듯 적당한 비가 내려 스며들고 있었다. 내가 사랑한 비가 우정이라도 건네 듯 한껏 재주를 부려주어 어찌나 달큰하던지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문학의 존재적 의미는 독자를 향한 작가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보게 하는 통로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과정의 표현적 관점은 언어라는 매개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 시는 시적 언어, 수필은 수필적 언어의 수행방법을 기조로 한다. 그러나 요즈음 문학 장르의 구조적 벽은 그 경계를 허물고 있다고 본다. 이 수필의 여러 군데에서 보여주듯 사물이 의인화 되어 의미의 가치를 드러내 주고 있다.
지금도 종종 꿈을 꾸곤 한다. 물론 나는 어린 소녀로 등장한다. 개울가가 보이고 빨래터에서 동네 여인들이 방망이질을 하는 모습과 나와 닮은 젊은 내 엄마가 나를 지켜보며 웃고 있다. 그 옆엔 가마솥을 걸어놓아 돌아가며 빨래를 삶고 부글부글 넘치기도 한다. 초등학생 여자아이인 나는 한 남자아이와 연신 뛰어다니며 물속에 들어가기도 하고 젖은 옷이 몸에 붙을까 손으로 뜯어내고 있다. 작은 몽우리가 만져지는 젖가슴을 들킬까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엄마가 뽀얀 옥양목 속옷을 헹구는 거품을 잡으러 또 다시 물로 뛰어 들어간다. 다시 그 아이가 클로즈업 된다. 그 아이의 눈동자가 뭐라 어렵게 말을 하려는데 기차가 지나간다.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고 난 객차를 하나 둘 세기 시작한다. 손가락을 꼽으며 열심히 센다. 멀리서 엄마가 나를 부르는 음성이 들린다. 놀라서 눈을 뜨니 알람소리다.
수필「사람을 찾습니다」중에서
십년이면 변한다던 강산이 요즘은 오년주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세월조차 가속이 붙었나보다. 지금까지 지나온 것처럼 그렇게 흐를 것이다. 앞으로 또 알 수 없는 십년 후를 상상해본다. 주어진 나만의 삶에 마음껏 그림을 그리자. 타임캡슐을 묻었던 예전의 진솔함을 곱씹고 자신에게 중요한 버팀목은 많은 세월이 흘러도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걸맞았으면 좋겠다. 사실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십년 후 일지도 모르겠다. 유턴 없는 삶을 인지하면서 초로의 여인으로 또 다시 다가 올 십년 후를 향해 더 바쁜 척 할 것은 분명하다. 오늘따라 하늘이 청소기를 돌렸는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수필「십년 후」중에서
아들에게 미니 팬 이야기를 했더니 어린강아지를 버릴 수가 있느냐며 모르고 집을 나온 것 같다고 실종신고센터를 뒤진다. 비슷한 얼굴들이 많았지만 전화해보니 3킬로라고 한다. 내가 분명 체중계에 올려놓는걸 보았기에 아니라고 해도 실종가족은 다시 전화로 그 동물병원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가서 확인 해보겠다고 했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그새 굶어 살이 빠졌나 싶은 마음이 들게 분명하다. 잃어버린 강아지를 주인에게 찾아 준 보람이 컸던지 아들은 나와 한 조를 이뤄 실종 견 찾아주는 센터를 운영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한다. 그렇게 가슴 덥혀지는 일만 하고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필「오지랖 두 번 째」중에서
수필문학이 독자로부터 사랑 받는 이유는 첫째 진솔한 삶의 이야기문학이라는 것일 수 있다. 내 주변에 일어나는 다양한 삶의 편린들이 작가의 사고에 투영되어 때로는 깊은 사유를 퍼내고, 때로는 깊은 지성의 칼날에 베일 듯 한 관조를 이야기로 담아내는 일인 까닭이다. 이경선 수필의 이야기 또한 보편적 수필구조 속에서 그 만이 지닌 특이성은 의미의 대상과 만나 일으켜 세우는 혹은 번뜩이는 감각적 사고이다. 그 사고를 담아내는 언어의 순발력이랄까 생생한 생명의 꿈틀거림을 느끼게 한다. 수필 「개님 만세」「이장금 출두요」「일촌사돈」「콜롬보 미스리」「당신은 몰라」등 여러 수필에서 느끼게 되는 이경선 수필의 강점을 발견할 수 있다.
수필「사람을 찾습니다」의 주제를 따라가 보면 어린시절 잠시 머물러 살던 외가의 풍경 속 어린 날의 ‘잃어버린 나’를 반추해 내는 그리움이 있다. 지난 삶의 어디에도 만날 수 없는 순하고 맑은 정서가 묻어나는 아름다움이다. ‘ 어머니의 본가에서 잠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영동은 돌아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가장 정적이고 촉촉한 시절이었다.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또 바뀌었을지 모른다. 기억 한 모퉁이에 샘물처럼 자리 잡고 있고, 가슴속에 휘파람 소리가 끊이지 않을 때 따듯하게 다독여준다’는 이 수필을 읽으면 자연의 순수가 숨 쉬는 영동은 어쩌면 이경선 수필가가 작가로서의 정서를 키워낸 그 시원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유추하게 된다. 때문에 그 순수의 맑은 나를 향한 손짓이 이 수필의 메시지이며 잃어버린 나를 찾는 징검다리가 된다.
누구나 미래의 삶을 점치기는 어려운 일이다. 코앞의 일도 내다보기 쉽지 않은 게 삶의 일이기에 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일의 나의 삶이 어떤 모습일까에 호기심을 갖는다. ‘대학시절 종로에 즐겨 다니던 카페 상호가 ‘십년 후’였다. 마주친 간판을 보는 순간 온 몸에 피가 혈관 한 바퀴를 회전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주저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현재도 알 수없는 모호한 하루하루에 십년 후란 단 한 마디의 의미는 이제 막 성인대열에 다가서는 내겐 심오하고 그 카페에 가면 십년 후의 삶을 멋지게 설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는 수필「십년 후」는 대학시절 종로거리를 거닐다가 발견한 카페이름이다. 그 이름만으로 십년 후의 나를 꿈꾸는 기대로 부풀게 된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해답을 얻을 것만 같은 그곳에서의 젊음의 한 때가 그려지고 그리고 현재의 ‘나’는 성숙한 중년의 나를 꿈꾸는 ‘십년 후’를 준비하고 있다.
수필「오지랖 두 번 째」는 개를 사랑하는 이의 오지랖이야기이다. 도로변 전봇대에 붙은 잃어버린 개를 찾는 전단지를 발견하고 주인의 아픔을 공감하던 차에 우연히 타고 가던 차량 너머로 거리를 배회하는 전단지 속의 애완견을 발견하게 된다. 오지랖 넓게 전단지를 찍어왔던 것이 주인에게 연락이 되고 유기견이 될 뻔 했던 개는 주인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수행해야 할 일정을 뒤로 하고 거리의 개를 따라가거나 주인에게 연락하는 일들 모두는 오지랖이 넓은 이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관심과 행동은 동물을 사랑하지 않고는 취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작은 애완견이지만 그들에게 느끼는 생명의 존귀한 가치가 사람의 생명과 다르지 않다는 반증임을 이 수필은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작은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 사람냄새가 나서 좋다. 방송에 가끔 나오는 학대 견들을 보면 몹시 마음 아프다. 발로 걷어차고 전기 줄로 때리는 장면을 본 날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는 작가의 마음 따뜻한 정서를 만나게 된다.
얼마 후 빗줄기가 가늘어져 멀리 보이는 화장실로 돌진작전을 실행했다. 그곳에도 물에 빠진 생쥐들이 숨어있었고 수원의 으뜸인 화장실에서 손 말리는 건조기로 강아지 머리를 말리고 휴지를 둘둘 말아 털의 물기를 제거했다. 다행히 강아지 심장소리는 클래식 산책으로 채널이 돌려있었다. 다시 온 몸을 휴지로 외과환자마냥 둘둘 싸고 안내 전단지로 머리에 고깔을 만들어 집으로 출발했다. 소나기는 말 그대로 소나기일 뿐 아까에 비하면 맞기 좋은 비가 내렸다. 안하던 짓하면 큰일 난다는 어른들 말이 생각났다. 하던 대로 해야지 갑자기 둘이 나선 걷기운동이 잘못이다. 누군 소나기를 맞고 사랑이 움튼다는데 우린 그날 이후 운도 떼지 않고 서호 천변만 바라보고 있다.
수필「이런 소나기」중에서
화장대 위에 각종 화장품이 여러 톤의‘메니큐어’까지 합쳐 연예인 뺨치게 즐비하다. 여성과 멀어지고 싶어도 결코 멀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화장의 고마움이 날이 갈수록 더할 것이다. 수술대에 오르지 않으려면 특수 화장기법을 마스터해야 하나 고민이다. 그러나 감출 수 없는 연륜이 나타나면 어쩌랴. 아무리 고가의 화장품을 발라도 들떠 버리고 마는 매정한 청춘을 탓하지 말자. 피부가 늘어지고 잡티가 번져도 마음만은 추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 더 시급한지도 모르겠다.
수필「화장」중에서
수필「이런 소나기」는 퇴근한 남편과 함께한 저녁 산책 중에 준비 없이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소나기’이야기이다. 물론 황순원의 소설「소나기」처럼 어린 소년 소녀가 소나기를 피해 찾아든 피신처에서 느끼는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이야기는 아니다. 이 수필은 중년의 부부가 모처럼 운동으로 시작한 산책길에 온몸을 적시는 불편함을 내포하고 있다. 다만 작가의 내심에는 젊은 날의 아름다운 낭만이 사라진 아쉬움 섞인 투정이 언어 속에 묻어나 추억 속 그리움을 예감하게 한다. ‘남편도 수영장에서 막 나온 사람 같다. 서로 모양새는 옷이 온 몸에 달라붙어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참 로멘틱한 상황이었겠다 싶었다. 날 좋을 때는 안 가고 하필 오늘 같은 날 서두른 남편이 미웠다. 강아지만 걱정되었다.’ 는 이야기는 허기진 시장기를 투정하는 아이처럼 남편에 기대하는 사랑의 깊이를 우회적으로 들어내는 아내의 내심이 사랑스럽게 드러난다.
여자들에게 화장은 필수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 방법은 다양하여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런 화장법이 있는가 하면 특수한 인물의 성격을 표출해 내는 개성적인 화장법으로 여성의 미를 연출해 내기도 한다. 수필「화장」은 거울 속 얼굴은 쳐다 볼 때마다 자질구레한 점이 늘어나고 군데군데 조금씩 검버섯도 자리 잡고 있는 얼굴을 감추고 싶은 여자의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얼굴에 잡티를 가리고 촘촘히 피부를 손질하고 외출하는 날은 당당하게 나설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공연히 움츠려 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화장의 목적은 피부표면을 미화시키는 수단과 여성 본능을 만족시키는 요소라고 본다. 여성에겐 기초적인 행위로 대외적인 장소에서 곱게 치장한 모습은 예를 갖추었다고 생각한다.’는 작가의 의도와 같이 여자의 본능 속에는 ‘아름답기’를 추구하는 美의 인자가 작용한다고 한다. 하여 이 수필은 여자에게 화장은 매우 자연스런 일처럼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경선 수필의 강점은 언어를 다루는 재치가 문장의 적소 적소에 순발력 있게 적용되어 글의 의미를 보다 활기차게 만드는 재능이 있다. 이경선 제2수필집의 글탑이 이처럼 튼실하게 쌓아져 이를 감상하는 독자들의 가슴에 큰 감동의 울림을 주리라 믿는다. 개인에게는 개별적인 문학역사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한국수필문학의 강물에 줄기를 잡는 오늘의 이 수필집 출간은 경이로운 일이지 싶다. 다만 앞으로 이경선 수필가가 세상 속에 놓여 진 많은 문제들 중에서 ‘무엇을 말하려 할까’라는 궁금증이 인다. 독자는 자신이 믿는 작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기 바라며 눈부신 발전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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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필집 출간을 축하합니다. 문운 더욱 빛나소서!
축하합니다!!!
다른 용도로 말씀하셔서 보내드린건데 ..혹 스치는게 있어 절대로 홍재백일장 전에는 단체문자나 카페에 올리지말라는 당부를 드렸건만..? 축하댓글주셔서 감사합니다^^
축! 축! 겹! 겹!으로 축하하옵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합니다.^^
축하와 더불어 더욱 좋은글 쓰시기를 .....
많은 축하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