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 교육의 대안적 원리탐색 (김승오, 최석민) 2011.08.09
창의성 교육의 대안적 원리탐색
김승오, 최석민
(교육인적자원부 학교정책과 교육연구관,
대구광역시교육청 창의성교육지원단 교사)
Ⅰ. 서 론
이제 와서 창의성의 교육적 가치와 중요성을 재론하는 것은 차라리 사족(蛇足)에 가깝다. 지식기반사회의 도래, 글로벌화된 경쟁적 경제 체제, 확대된 참여 민주주의와 그에 따른 대안탐색의 중요성, 또 포스터모던적 실존적 인간 자아의 실현 등은 흔히 창의성 교육 필요성의 이론적 근거로 지적되는 사안들(Puccio, 1999)이며, 7차 교육과정의 정신이나 현재 진행중인 교육개혁의 초점이 창의성의 육성에 있다는 점(김재은, 2002: 5), 또 나아가 창의성 관련 연구가 양적으로 광범위하게 확대되어 가고 있다(강현아와 이영만, 2002)는 사실은 이미 별로 새로움을 더해주지 못하는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관상의 움직임과는 별개로, 학교 교육 혹은 수업의 실제가 학생들의 창의력을 신장시키는 방향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가의 물음에 대해서는 아직 부정적인 답변이 일반적이다. 연구자들은 그 원인으로, 현재의 교육이 너무 지식 중심의 교육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보다 집중적인 관심이 창의성에 놓여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며(조연순, 2001: 295), 창의성 교육을 직접 담당할 교사들이 창의성에 대해 이해가 부족함을 지적하기도 하고(이동원, 2004: 45, 한국교육개발원, 2001), 아직 많은 연구들이 창의성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구에 그치고 있기 때문(김명숙, 2001, Csikszentmihalyi, 1988) 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구자는 교육현장에 창의성 교육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현상에 대한 원인은 오히려 창의성 교육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그것은 창의성에 대한 개념 규정과 그에 따른 교육을 논리적 선결관계 간주함에서 나타나는 문제와 창의성 교육 혹은 수업에 지침으로 사용되는 원리의 다양함 혹은 과다 문제로서, 이 두 가지 문제들은 주로 현장 교사들이 학교, 교실에서 창의성 교육을 실천하지 못하게 만드는, 혹은 실천하더라도 확신을 갖지 못하는 최대의 요인이라고 연구자는 파악한다.
따라서 연구자는 창의성의 연구가 아니라 교육의 관점에서, 다양한 원리에서가 아니라 단일한 원리를 중심으로 창의성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며, 그 핵심 원리를 몰입의 원리로 상정한다. 이는 현재의 창의성 교육에 대한 강조가 단순히 새로운 교육 방법의 도입이나 특정 기법, 내용을 지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대안적 방향으로서 현실의 다양한 교육 문제에 대한 한 해결책이라는 점에서 도출되며, 그것도 현재의 교육에 무언가 신선한 새 빛을 던져줄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새로움과 그 내용을 창의성 교육은 가정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Ⅱ. 현행 창의성 교육의 문제
1. 창의성과 창의성 교육에 대한 선후문제
현재 출판되는 다양한 창의성 교육 관련 출판물이나 논문에서 보듯, 창의성 교육을 위해서는 우선 창의성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앎을 토대로 창의성의 교육을 하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당연한 절차로 인식되고 있다. 창의성의 개념을 알고 창의성을 교육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며, 이는 주로 분석철학의 전통을 따르는 현행 교육체재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은, 외람 되게도, 창의성의 본질이 갖는 논쟁적이고 갈등적인 속성을 간과하고 있으며 따라서 현장에서 실제적인 창의성 교육이 일어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창의성과 관련된 글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 창의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일관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Barrow & Wood, 1975: 142, Cochrane, 1975: 65). 혹자들은 창의성이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이지만 반드시 “공적 전통 안에서 적절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Sternberg, 1995, White, 1972)고 생각하며, Bailin(1994)은 창의성에 반드시 “우수함”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Torrence(1967: 73-74)는 창의성을 개인의 문제해결의 과정과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심지어 Maslow(1951: 223)는 자아실현의 과정으로 보았다.
더 나아가 독특함(Uniqueness)이 창의성에 포함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반대의 주장을 펼친 Ghiselin의 주장에 대해 Phillps(1978)는 그것을 다시 반박하기도 했으며, Torrance의 문제해결 중심의 창의성 개념이 더 창의적인 것과 덜 창의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음을 Pfeiffer(1979)는 문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창의성 개념의 논쟁적인 성격은 창의성을 교육하는데 있어 창의성의 본질을 우선 이해하고 교육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이 틀리지 않음 말해주고 있으며, Kaufmann(1993)이나 Treffinger(1993)가 말하듯 창의성 연구에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개념의 정확성 결여다라는 지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 문제에 해결방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의 해결 방식으로 널리 채택되는 것은, 「윤리학과 교육」1장에서 Peters(1966)가 예시하였듯이, 창의성을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을 갖는 통합적 개념으로 파악하고(Cochrane, 1975: 65), 그 유사성의 공통적 속성을 밝혀내는 방법이다. 창의성의 공통된 속성을 밝히고 그것에 토대한 창의성 교육을 실시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창의성의 교육 방식이 될지도 모른다.
전경원(2000: 112)은 국내ㆍ외의 다양한 창의성 개념을 분석하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창의성의 공통적 속성을 새로움(novelty)과 적절함(acceptability or appropriateness)으로 보았다. 김현정(2003: 165)은 창의성의 개념 혼란을 창의성 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하고 새로움, 가치성, 의도성을 그 중심 속성으로 분석하였고, Nickerson(1999: 392-393) 역시 많은 학자들의 창의성 개념을 인용하고, Gardener의 주장을 빌어, 새로움(initially novel)과 적절성(ultimately acceptable in a culture)을 창의성의 가장 적절한 두 가지의 공통적인 속성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일단 “새로움과 적절성”을 창의성의 준거로 가정한다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새로움을 어느 정도의 공적(public) 기준-즉 적절성-으로 파악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어떤 기준에 따라 판단하느냐에 따라 창의적인 것과 창의적이지 않은 것의 내용은 확연히 달라지게 되며, 그 교육의 방식도 분명하게 차이 날 수밖에 없어진다. 즉 보다 엄밀한 공적 준거로 판단할 경우, 학생들의 작품은 십중팔구 창의적인 것으로 판단되기 어려울 것이다. 기준의 엄밀한 정도에 따라 창의성의 기초로서 지식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할 것인가 혹은 일상적 새로움에의 도전이 갖는 교육적 중요성을 강조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사뭇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는 교육의 관점과 관련된 문제로서, 어느 정도 공적이어야 하는가의 문제는 곧 교육학의 고전적인 문제제기인 교양교육과 진보주의간의 논쟁과 정확히 일치한다. 교양교육의 관점에 가까울수록 창의성은 공적 언어적 전통에 나타나 있는 영역(domain, subject)별 기준과 논리에 의존적 특성을 보이는 것으로 파악됨으로써 사회적, 간주관적(inter-subjectivity) 기준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반면, 진보주의에 가까워질수록 개인의 자아실현과 문제해결의 본래성(authenticity)을 강조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그 대안으로 창의성 개념이 아니라 교육의 관점에서 창의성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본다. 창의성의 개념 파악하고 창의성 교육을 시작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교육의 관점에 의해 특히 창의성을 길러줄 수 있는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개념의 분석보다는 상대적으로 일반 사고교육의 관점에 익숙한 교사들은 창의성을 보다 실제적으로 교육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육관에서 창의성 교육의 내용과 방법론을 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성과 의미성은 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창의성 교육 원리의 다양성
창의성 교육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을 창의성 교육이게끔 만들어주는 작동적 원리가 존재함에도 실제 교육의 현장에서 진정한 의미의 창의력 중심 수업이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창의적 발문을 하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학습지를 사용하면서, 스캠프(SCAMPER)나 PMI 기법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그것의 실행 원리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너무나도 자주 “교사”의 문제로 한정지어 왔다. 때론 교사가 갖는 이론적 한계에 두기도 했고, 때론 교사 개개인의 역량의 문제로 귀결시켜왔다(이동원, 2004: 45, 한국교육개발원, 2001).
그러나 연구자는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하는 점은 창의성 수업의 속성으로서 드러나야 할 원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창의성 교육의 방향을 안내하고, 교육의 실제를 반성해볼 기준의 수가 과도하게 다양함으로서 잣대로서의 실용성을 확립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박성익(2004, 11)은 Cropley와 Clark의 창의성 신장 교육원리를 20개로 요약하였고, 이와는 별도로 15개의 교육지도기법을 제시하였으며, Smith(1966)는 이를 18가지로 대답하였고, 나아가 문정화와 하종덕(1999)은 12개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교사들이 이 많은 준거들을 어떻게 일일이 대비시켜 볼 것인가?
두 번째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원리 해석이 가지는 어려움이다. 창의성 교육의 원리들은 다양한 관점에 따라 해석과 한계규명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개방성의 원리는 거의 모든 저자들에게서 창의성 교육의 중요한 원리로 인용되어지곤 한다. 그러나 개방성의 원리를 창의성 교육의 한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개방성의 의미와 한계를 규명해주지는 못한다. 창의성 교육에서 개방성의 원리는 약정적 원리로 작용함으로써 그것이 사용되는 의미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적정한 이해를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방향으로의 개방이냐, 어느 정도의 개방이냐에 따라, 교육은 kneller의 교육사상 분류체계에 의해 낭만주의 교육이 되기도 하고, 항존주의에서도 주장하는 개인별 수준차 정도만을 고려한 교육(Phenix, 1988)이 될 수도 있다. 각각의 원리에 대한 자신의 의미부여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같은 원리에 대한 다른 적용이 있기 쉽상이다. 어찌 주로 이론적 검토보다는 그 교육적 실천을 주된 과업으로 삼는 교사들에게 각각의 원리에 대한 일관된 자기 의미부여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창의성 교육의 올바른 정착을 위한 최대의 걸림돌은 교사의 자질 문제가 아닌 창의성 교육의 원리가 가지는 다양성과 모호성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창의성 교육의 다양한 원리들을 공통적으로 묶어낼 수 있는 단일한 원리의 개발을 서두를 시점에 와있다. 마치 Dewey의 철학을 “경험”의 철학으로, Peters의 교육을 “입문”의 교육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듯이, 창의성 교육의 정신을 가장 적절하게 함축하면서 우리가 행하는 창의성 교육을 미뤄 비춰볼 반성의 거울, 창의성 교육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잣대이면서 창의성 교육의 방향을 안내할 하나의 원리의 개발이 필요하다. 연구자는 이를 몰입의 원리로 상정한다.
Ⅲ. 창의성 교육의 원리로서 몰입
1. 몰입의 이해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활동에 몰입되어 있다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현재 그가 진행하고 있는 무엇인가에 푹 빠져 있어서 다른 무엇을 염두에 둘 경황이 없으며, 그 일이 가져다주는 희열에 너무나도 매료된 나머지 그 무엇인가에 자신을 온통 내맡겨 버린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 일이 주는 만족감에 흠뻑 젖어있으며, 완전한 기꺼움에서 그 일을 지속한다. 이와 같이 예견 가능한 한두 가지 사례만으로도, 우리는 “몰입”이라는 낱말의 의미가 “푹빠짐” “몰두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또 그렇게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몰입은 어떤 활동에 대한, 활동자 자신의 완전한 참여(full involvement)를 의미한다.
일상적 용례에서의 몰입은, 그러나, 그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세밀하게 분석되어져야할 필요가 있다. 특히 몰입을 창의성교육의 준거로서 상정하는 본 고의 목적을 위해서는 몰입의 이면에 숨어있는 기본 가정을 도출해보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다. 우선 필자는 몰입의 일반적 조건을 분석한다.
첫째, 몰입은 무엇에 대한 몰입이다. 몰입할 대상이 없는 몰입, 모든 것에 대한 몰입은 논리적으로 모순이기에, 몰입에는 항상 몰입할 특정의 무엇이 전제되어있다. 그러므로 몰입은 몰입할 내용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몰입의 내용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활동-지적인 것이건, 미적인 것이건-내용에서 온다. 모든 활동이 곧 몰입된 활동은 아니지만, 모든 몰입은 곧 활동 중에 일어난다. 활동 따로, 몰입 따로가 아니라 몰입은 곧 활동 자체에 대한 몰입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몰입의 목적은 곧 활동의 목적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에서, 활동의 과정은 곧 활동의 목적이듯이, 몰입 역시 목적을 충실히 수행하는 과정에서 온다. 활동이 목적 자체를 함의하듯이 몰입 역시 활동의 목적을 함의한다(Egan, 1975, 25: 은용기, 길형석, 1992, 8). 이는 몰입할 때 활동이 목적에서 빗나가는 것이 아니라, 몰입되었다는 것은 활동과 목적의 완전한 결합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몰입이 목적을 가지며 혹은 몰입 자체가 목적에 대한 몰입이라면 몰입은 지적으로 활동하는 것( Dewey. 1916, 120)이라 말할 수 있다. 즉 몰입을 활동의 목적에 도달시키는 과정, 그것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 그러한 방향으로 도달하고자하는 과정이라 한다면, 몰입은 인지적인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는 말이다. 활동의 목적, 예견된 결과에 대해 적절한 방법을 찾고, 대안을 모색하며, 그것을 검증하는 과정에 몰두하는 것, 바로 그것을 몰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몰입은 몰입자, 활동자 자신의 몰입이다라는 말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몰입되었다는 것은 활동자의 활동이 적어도 남의 활동이 아니라 나의 활동,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의 것”이 아닌 활동에서 그 활동에 푹 빠져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라는 말은 어떤 말인가? 그것은 i) 문제가 “자신”의 관심세계에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관심세계가 아닌 남의 세계, 자신의 흥미의 대상이 아닌 외부로부터 부여된 무엇이라면, 그것은 아직 자신의 문제가 될 수 없다. ii) 그 문제가 자신의 “현재”적 관심사가 되었다는 말이다. 미래의 쓸모를 위해, 혹은 가치있는 무엇의 준비를 위해 학습할 때에 몰입은 일어나지 않는다. 몰입이 과거의 것도 미래의 것도 아닌 현재의 것을 의미하듯이, 몰입의 문제 역시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닌 현재적 관심사가 되었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것은 적어도 “지금” 그 문제가 생생한 자신의 문제로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몰입은 문제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몰입을 가능케할 문제란, 아동 개개인의 경험세계에 놀람과 경이를 가져다줄 수 있는 문제이어야 하며, 그 자체가 주는 내재적 쾌락만이 그 활동의 과정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는 진정한 자신의 문제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만이 몰입의 삶을 가능케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몰입이 정지의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지적탐색의 과정이며, 현재의 자신의 문제라는 말1)은 Dewey(1916, 207)적 용어로 “관심의 전체성”과 “목적의 단일성”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문제를 발견하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심전력하며, 다른 무엇이 아닌 그 문제가 주는 만족감이 활동을 지속하는 힘이 되는 삶. 이러한 몰입의 삶, 내재적인 삶을 그는 이상적 삶의 중요한 한 조건 혹은 전부로 생각했다. 이러한 이상적인 삶의 중심요소로서, 우리는 몰입의 원리가 곧 이상적 교육을 가정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2. 교육적 가치어로서 몰입
어떤 활동이든 그것이 교육적으로 가치의 활동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의 규범성을 충족해야한다는 점에서 보면, 모든 몰입활동을 곧 교육적인 활동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의 논의에서 고찰한 바처럼, 몰입을 활동을 다루는 활동자의 이상적인 태도로 규정한다면, 거기에는 아직도 활동의 규범적 측면을 의문시할 여지가 충분히 내재해있다. 즉 몰입이 이상적 삶의 면면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모든 몰입을 교육적 가치어로서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훔치는 일에 몰입한 사람의 예를 가상해볼 수 있듯이, 몰입되었다는 사실이 곧 훔치는 행위를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교육적 몰입의 첫 번째 조건은 그것이 가치 있는 활동에 대한 몰입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몰입의 가치적 준거는 교육적 상황에서 몰입을 말할 때, 그 의미가 갖는 중요성은 그리 크지 않다. 그것은 첫째, 적어도 교육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이 선택할 활동 영역에 비가치적 선택군(options)을 제시할 사람이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방식으로 논의가 전개되는데 대해 분개할 지도 모른다.(더 좋은 내용을 더 잘 가르치는 문제라면 몰라도!) 어떤 것에 대한 몰입이든 “교육적” 상황에서 일어나고 또 그것이 장려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는, 이미 그 속에 교육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가치적 성격을 기본적으로는 충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몰입의 가치는 몰입 대상의 가치와는 별개로 인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몰입의 첫 단계로서, 아동은 은행강도에 대해 흥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관한 흥미가 곧 잘못된 몰입을 가정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감옥, 은행, 금고, 자물쇠, 범죄의 원인, 개심의 가능성 등의 다양한 주제를 탐구할 수 있으며(Kohl, 1969, 55), 이러한 활동에 몰입할 수 있다. 같은 “은행강도”에 대한 몰입이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몰입방향의 올바름은 몰입의 가치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방향 안내자로서의 교사의 역할이 갖는 중요성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러한 말은 한 개념의 가치는 그 개념 구사의 윤리성과는 별개로 인정될 수 있다는 Nickerson(1985, 33)의 지적과 맥락을 같이 한다.
오히려 교육적 몰입은 몰입의 성격에 의존적이다. 즉 특정 몰입이 교육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에 대한” 몰입이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몰입이냐에 있다. 몰입 중에는 단순히 순간적인 쾌락 추구의 몰입도 있고, 현재의 경험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몰입도 있다. 현재의 산만한 활동에 대한 몰입일 수도 있고, 앞으로 다가올 활동을 출발하고, 방향을 설정하게 하는 몰입도 있다. 후속 하는 경험을 황폐화시키고 말살하는 그런 몰입도 있는 반면, 후속의 활동을 통제하고, 후속의 활동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류의 몰입도 있다. 우리는 후자의 몰입 쪽으로 갈수록, 그것을 더 교육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전자의 몰입이 몰입의 일반조건을 충족하지만, 현재만의 활동에 고립된 반면, 후자의 몰입은 현재를 토대로, 다가올 현재를 가능케 하는 지적인 과정이라는데 있다. 같은 성에 대한 몰입이지만, 성도착증 환자와 성의학자의 몰입이 다른 이유는 양자가 공히 자기목적 지향적이고, 주체적 몰입일 수는 있지만, 전자는 후자가 지닌 경험의 성장적 속성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삶의 과정에서 볼 때, 정체이거나 퇴보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이를 Dewey(1938, 27)적 경험의 연속성, 계속성의 원리를 통해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있어, 교육적 경험과 비-교육적 경험을 판단하는 핵심적 준거는 그것이 “더 많은 경험” 곧 성장을 촉진하는가에 있었다. 이는 전자와 후자의 몰입을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즉 전자는 경험에 의한, 경험의 몰입이기는 하지만, 경험을 위한 몰입은 아님으로 인해, 교육적 경험의 충분조건을 형성하지 못한다. 보수주의 교육이 경험을 위한 교육이었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이상적 경험의 충분조건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험세계에서 도출되었고, 자기 목적적이며 능동적이긴 하지만, 경험의 질적 성장을 가져오지 못하는 몰입 역시 충분한 의미의 교육적 몰입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교육적 몰입의 조건을 전자만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교육에 대한 잘못된 진보주의의 폐단을 다시 한번 반복할 위험이 있으며, 행함의 원리(learning by doing)만으로 몰입의 원리를 한정하는 것은 행함의 보다 중요한 조건인 반성의 원리(learning by reflection)를 간과하게 되는 모순을 가져온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을 과거 미국의 잘못된 진보주의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한국 교육의 실제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떤 활동에 매료되어, 그 활동을 재미있게, 실컷 즐기고 나서도, 그것이 무엇을 위한 행함이었는지, 그 행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활동이기만 하면 그것이 곧 교육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교사들의 의식 속에는 바로 이런 모순이 내재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실현장에서 “개구리”를 가르치기 위해, 개구리에 관련된 노래를 동기유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습이나, 개구리의 율동을 통해 지루함을 달래려는 모습들을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와 율동 자체가 의미하는 바는 그것 자체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그저 노래를 불러보았다는 것, 그저 움직여 보았다는 것 이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행동이 학습자체가 아닐 때, 이어질 다음 행동 혹은 학습과 밀접히 결부되지 못할 때, 즉 인지적이지 못할 때, 그것은 의미 없는 몸짓 그것 이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몰입은 다가올 활동의 출발하게 하고, 그 방향을 설정하며, 후속의 활동 통제하고, 후속의 활동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보다 교육적 몰입이라 적절히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 창의성 교육과 몰입의 원리
그렇다면 우리가 몰입의 원리를 특히 “창의성 교육”의 중요한 한 준거로서 상정할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이제 와서는 시기 적절한 문제제기인 것 같다. 그것은 이러한 문제제기가 본 논문의 목적에 대한 정당화의 요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몰입과 창의성이 같은 이상적 삶을 의미한다는 점과 몰입의 원리가 대부분의 창의성 교육원리를 포섭하는 메타원리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정당화의 근거로 제시하고자 한다.
가. 몰입과 창의성의 동일시
몰입이 이상적 문제해결의 다른 이름이며, 주로 Dewey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논의하였다. 다시 말해, Dewey(1916, 207)는 이상적 문제해결의 과정을 “관심의 전체성”과 “목적의 단일성”이라는 말로 표현했으며, 스스로의 문제를 발견하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심전력하며, 결국 문제해결의 과정이 가져다 주는 만족감이 활동을 지속하는 힘이 되는 내재적 의미 있는 삶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문제해결에서의 몰입을 Dewey는 창의성과 어떻게 관련짓는가? Dewey는 창의성 혹은 창의성 교육이라는 것을 주제로 별도의 논문을 쓴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천정미). 그러나 Dewey(1919, 158)가 이상적 문제해결의 과정을 인간의 삶을 효과적으로 진보시키는 창의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반성적 문제해결의 과정을 Dewey는 지성의 과정, 성장의 과정이라 부르고, 창의성과 동일시했다(Hallman, 1964, 275).
Dewey의 몰입이 갖는 창의성의 성격은 두 가지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우선 몰입은 활동의 자기목적 추구적 성격에서 창의적이라 할 수 있다. 자기목적 추구의 과정은 자신의 신념체계“내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뜻하며, 곧 지적탐색의 과정을 의미한다. 몰입자는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며, 만족스러운 결과가 도출될 때까지 그 노력을 중단하지 않는다. 이런 잠정적 결론 도출의 과정은 대상에 대한 자신의 의미부여의 과정, 자기 구성의 과정이기에 곧 자기 진보의 과정 즉 창의적의 과정이라 일컬을 수 있다.
두 번 째로 자기 개선적 측면의 몰입을 말할 수 있다. 이는 곧 자신의 신념체계“에 대한” 탐색을 의미하며, 곧 몰입의 대안 탐색적 측면 혹은 재구성을 일컫는다. 기존에 획득한 신념체계 혹은 경험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몰입자는 곧 새로운 가설을 설정하며, 새로운 각도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이전에 해결했던 바로 그 문제일수도 있지만,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접근 역시, 흥미를 따라 만족스러운(새로운) 결론이 형성될 때까지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결론 형성과정을 우리는 경험의 재구성(Re-construction)의 과정이라 부르고, 자기 개선 곧 창의적 과정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몰입은 Dewey적 관점에서 곧 창의성과 동치ㆍ동연(co-extensive)이거나 적어도 동일시 된다.
우리는 이러한 창의성과 활동에 대한 몰입의 관계를 최근 Csiksentmihalyi(1996)의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미국 내에서 창의적인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을 수년간 심도 있게 연구한 결과는 창의성은 자신의 일을 즐기며 그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성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창의적인 사람의 삶 속에는 창의적이고자 하는 어떤 의도적 의식도 없으며 외재적 부에 대한 갈망이나 명예욕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의미롭게 여기는 일에 대한 즐김(flow)만이 존재할 뿐이다. 곧 이들이 드러내는 창의성은 창의성 자체를 위한 어떠한 인위적 과정의 결과가 아닌 자신의 의미로움 곧 일 자체에 대한 기꺼움과 즐김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조용기(1987, 305)는 감기가 건강이 좋지 않음을 드러내는 징후이듯, 창의성은 우리가 좋은 삶을 살고 있다는 증표(symptom)라고 보았다. 창의성은 창의성 자체만을 위한 교육의 결과로서 드러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몰입(immersion)을 통해서, 삶에서 하나의 빛깔로서 드러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해결의 몰입적 차원의 창의성 개념에 대해 Gardener(1993, 29)의 creativity와 Creativity의 구별이나 Boden(1991, 32)의 심리학적(p) 창의성과 역사적(h) 창의성, 혹은 Craft(2001, 14)의 일상적, 민주적(ordinary, democratic) 창의성과 기여도가 높은(High) 창의성 창의성의 구분 범주를 사용하여 그 문제점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Bailin(1984, 319)의 주장에서 보듯, 창의적인 것은 반드시 탁월한 사고와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한다는 가정에 서면 문제해결의 몰입적 특성에서 오는 창의성은 심리적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지극히 사적인 과업으로서 그 역사적 규범적 가치를 보증하기 어렵게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창의성의 이러한 정도 차이에 대한 구분은 창의성의 본질적 구분이라기보다는 창의적 생산물의 결과적 가치 평가에 의해 도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c와C, P와 H, o와 H 사이에 그 본질이 다르다고 볼 수 없다. 현재 창의적인 인물로 불리는 수많은 인물들이 정작 그 사람이 살던 당대에는 그들의 창의로움을 인정받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음을, 또 수많은 창의적 인물 가운데 역사적 가치를 위해 자신의 탐구행위를 했던 사람은 오히려 찾기 어려움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더구나 창의성을 공교육 혁신의 내용과 방법으로 삼고자 하는 현재의 한국적 요구에 비추어 본다면 창의성과 탁월함은 결코 교육현장에서 공존하기 힘든 다른 두개의 속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이른바 빅C로서의 창의성과 역사적 창의성의 전형적 인물로 평가받는 Einstein의 다음의 고백은 이러한 측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즉 Einstein은 자신이 몰두했던 연구의 이유에 대해 “내가 한 과학적 탐구는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신비를 이해하고자하는 나의 주체할 수 없는 갈망(irresistable longing) 때문이다(Dukas & Hoffmann, 1979, 18).”라고 말하고 있고, 교육에 대한 강연회에서도 “학교에서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그 일이 주는 즐거움이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Einstein, 1982, 62).
나. 창의성 교육의 메타 원리로서 몰입
몰입의 원리가 다양한 창의성 교육의 원리의 메타 원리로 기능할 수 있다고 가정할 경우, 우리는 교육을 실제 담당하는 교사가 갖게될 단일한 원리의 실용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다양한 창의성 교육의 원리가 나의 교육에서 구현되고 있는지를 불안스럽게 되물을 필요도, 그것 때문에 혼란스러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연구자는 다양한 연구들을 검토하고 창의성 교육의 공통적 원리로 6가지로 추출한 신건권(2001) 요약을 중심으로 몰입의 메타(meta) 원리화 가능성을 검증하고자 한다.
원 리 |
중심 내용 |
a. 개방의 원리 |
학생 스스로 아이디어를 창안할 수 있는 분위기 |
b. 수용의 원리 |
학생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분위기 |
c. 자율성의 원리 |
스스로의 문제해결 존중 |
d. 사고존중의 원리 |
학생의 문제의식 심어주는 교육 |
e. 개별화의 원리 |
개개인의 존중 |
f. 다양한 경험의 원리 |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통한 교육 |
<창의성 교육의 원리와 그 중심 내용(신건권 ,2001)> |
위의 요약은 몰입이 자신의 문제에 대한 지적인 문제해결과정에 온전히 푹 빠져 있음을 의미할 때, 양자를 비교한다는 것이 오히려 중언ㆍ부언이 아닌가를 의심할 정도로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우선, a. 개방, b. 수용, c. 자율, e. 개별화의 원리는 창의성이 발휘되는 상황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논리적인 전제는 창의자가 창의적일 필요를 느낀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Amabile(1996)의 내적 동기의 중요성 지적과 그 맥락을 같이 하며, Dewey(1916, 150)적 몰입에서 진짜 문제(genuine problem)가 갖는 중요성과 논리적으로 동연을 이룬다. 다시 말해 해결하고자 하는 진짜 문제여야 한다는 말은 가) 문제가 “자신”의 관심세계에 있다는 말이며, 나) 그 문제가 자신의 “현재”적 관심사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적어도 “지금” 그 문제가 생생한 자신의 문제로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몰입이 자신의 현재적 문제이어야 함은 학생들이 자신의 문제를 가질 수 있도록 적어도 a. 개방적이어야 하고, 그것이 어떤 것이건 b. 수용해야 하며, 문제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e. 개별화2)) 인정하며, 스스로의 문제해결과정을 존중( c. 자율)해 주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d. 사고존중의 원리는 학생들이 몰입할 가능성을 높여 준다는 측면에서 문제발견(problem finding)의 중요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문제 발견의 경향성을 높이는 문제에서, 몰입 혹은 교육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전제를 Dewey(1937, 339는 교사가 학생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두고 있으며, 학생과의 활동에서 교사는 교사임과 동시에 (학생을 배우는) 학생이다( Dewey, 1916, 160)는 라는 말을 통해 지속적으로 학생의 진짜 문제를 발견하도록 조력하여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f. 다양한 경험의 원리는 학생이 몰입할 경우의 수를 높여 주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몰입을 강조하는 Dewey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의 교육론을 행함으로서의 학습, 그의 철학을 경험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고 그 원리에 따라 교육하여야 함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상에서 논의하였듯이, Dewey 교육론을 몰입의 교육할 때, 창의성은 몰입과 동연의 위치에 놓일 수 있으며, 다양한 창의성 교육의 메타 원리로서 기능할 수 있다.
Ⅳ. 결론: 몰입 교육과 교사
몰입의 원리를 통해 학생들의 삶이 보다 창의로울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교육하는 일에서 교사는 어떤 역할을 하여야 하는가? 몰입의 교육도 결국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의 손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능가할 수 없다는 당연한 논리적 전제에 토대한 개념적 참에 해당된다.
몰입 교육을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전제는 다른 교육활동에서처럼 우선 교사가 학생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Dewey, 1937: 339). 몰입이 자신의 진정한 문제를 갖는 것에서 출발한다면 학생들의 연령별 일반적인 성향에 대한 이해와 학생 개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지식은 몰입 교육의 우선 조건에 해당될 것이다. 학생들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보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학생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Dewey, 1915: 129). 학생에 대한 관찰은 학생의 요구, 욕구, 필요, 흥미를 교사가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창의적 성장을 위한 교사활동의 기본이며, 첫걸음이다. 이는 학생의 삶에 대한 탐구와 연구 행위는 교수(teaching)의 최우선적인 과제라는 Ayers(1995: 6)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즉 학생들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상황에 따라,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교사의 지속적 관찰은 학생이해의 주된 방법론을 구성한다. 물론 관찰의 방법은 별도의 관찰시간을 통해 이루어 질 수도 있다. 학생들의 활동을 관찰하고 그들의 관심사를 추출하며 그것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과정은 교사 반성(reflect on)의 중심이자 내용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Schon(1983: viii-ix)이 말하듯 교육활동 안(reflect in)에서 학생들을 관찰 할 수도 있다. 교사는 학습자의 활동에 참여하여 함께 활동하는 사람이며, 그러한 활동에서 교사는 학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안내 활동과 동시에 학생을 관찰하는 방법과 내용을, 나아가 철학을 수행평가 혹은 참평가(authentic assessment)의 개념을 통해 이미 익숙하게 접하고 있다. 참평가가 주로 학습의 과정 중에 일어나는 평가이며, 학습과정을 주로 평가대상으로 삼는다는 점, 학습을 위한, 학습에 의한 평가라는 점에서(조용기, 1996: 2-3) 이러한 관찰의 과정은 참평가의 과정과 동일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몰입 교육을 위한 안내자로서 교사는 적극적으로는 문제 발견의 상황 또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이는 직접적 모방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자극(stimulus) 환경으로서 교사의 위치를 말한다( Dewey, 1933: 159). 문제해결 과정의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문제인식의 단계가 주로 학생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때, 교사는 자극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형성한다. 이는 학교의 과업이 활동(놀이와 일)이 바람직한 지적 도덕적 성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 Dewey, 1916: 196)이라 할 때, 교사 자신이 중요한 타자(significant others)로서 하나의 사회적 환경을 형성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세 번째로 교사는 학생의 충동의 적극적 해석자로서 교육과정과 학생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한다. 교사는 학생보다 학생의 충동이 무엇이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욱더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며, 교사의 업무는 학생의 발달에서 주어진 시기에 어떤 힘이 표현되려고 하는지, 어떤 종류의 활동이 그것의 표현에 도움이 되는지를 아는 것이다( Dewey, 1915: 129-130). 즉 개방적 발문을 통해 그들의 충동이 갖는 성격을 읽어내고 그것이 교육과정의 내용적 측면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교사는 학생의 욕구, 요구 즉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생기는 문제의 해결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지만, 학생의 현재, 지금의 모든 충동이 곧 창의적 문제해결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Dewey, 1915: 13). 학생의 충동은 그 성격에 있어, 경험“의”, 경험에 “의한” 충동이긴 하지만, 아직은 경험을 “위한” 충동은 아니기에 교육이 갖는 규범성의 충분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교사는 성장의 또 하나의 조건인 성장의 연속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학생활동의 방향안내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여야만 한다. 예컨대, 학생은 은행강도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생의 흥미를 감옥, 은행, 금고, 범죄의 원인, 개심의 가능성 등의 다양한 주제에 대한 창의적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것(Kohl, 1969: 55)은 교사의 몫이다. 물론 이때에 교사는 활동의 과정이 일상 생활이 되도록 해야하며( Dewey, 1916: 163), 학생이 학습한다는 의식이 없을수록 더 훌륭한 지도에 해당된다.(ibid, 160)
네 번째로, 교사는 학생과 함께 활동하는 과정에서 상황의 판단을 통해 활동의 내용을 재조직함으로써, 학생의 활동이 몰입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절하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학생에 대한 철저한 관찰에 근거해야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학생들의 관심이 교과서의 엄격한 계열처럼 논리적인 순서로 나아가지 않으며, 과목간의 경계로 분리되지도 않는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더 어리면 어릴수록 학생의 관심사는 더 통합되고, 더 전체적이다. 물론 지금의 교과서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하는 바는 과목간 논리의 인위적 통합이 아닌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하나의 문제 혹은 주제로서의 유기적 관련성을 의미한다. 즉 학생의 명시적 혹은 암묵적 요구를 바탕으로 활동을 조직함으로써 학생의 요구가 교육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게 안내하여야 한다. 이는 교육과정이 학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학생의 요구를 비춰볼 수 있는 하나의 체계로서 일차적으로는 교사를 위한 것이라는 Dewey(1902: 31)의 말과 그 맥락이 같다.
우리가 흔히 들어온 학생의 요구를 반영한 다양한 학습 선택군(option)의 제시, 프로젝트학습, 문제중심학습(PBL), 총체적 교육(holistic education)의 교과조직원리가 이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또 창의적 사고기법이나 프로그램도 이러한 과정 속에 융합되어 재조직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학습내용 재조직의 요체는 가능한 더 자연스럽게, 더 실제적인 나의 문제로 학생들이 학습내용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럴수록 학생들이 학습내용에 몰입할 수도, 결과적으로 창의로울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생에 대한 지식과 폭넓은 교육과정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학생의 요구를 바탕으로 교육과정을 재조직할 수 있는 능력과 의욕을 지닌 교사를 의미한다( Dewey, 1937: 339).
물론 현재의 학교 교육 상황에서는 Dewey적 몰입 원리에 의한 교육이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인수 학급에서, 많은 교육 시수를 가진 우리 교사들에게 이런 말은 한낱 꿈이요, 이상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지 않은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한번이라도 더 학생들이 몰입의 삶을 경험할 수 있도록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노력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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