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어릴때 국민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말단공무원이셨고 제가 2학년때 막내동생이 태어났다
가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서 필요한물품은 등교전에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타가곤했지만
타이밍을 잡지못하거나 집안분위기로 학교준비물조차 챙기지 못했다 수업시간이면 담임께
혼나고 그냥 밖을 내다보는 말없는 아이가 되었다 사실상 중고등학교다닐때까지 버스비를
제외하고는 용돈을 받은 기억이 나지않는다 용돈은 설날 세배돈이 전부였고 친척집에 가서도
세배해서 받는 돈 저의 주수입원이고 간혹 이발비를 받아서 좀 더 싼곳에 가서 나머지를 챙겼다
중학교는 시험을 쳐서 들어갔는데 공부를 잘하는편이 아니라서 사립중학교를 들어갔다
장로교재단의 학교이다 앞집이 학교교사가 있어서 제가 중학교에 들어갈때 꼴지로
턱걸이로 들어갔다 매일 수업전에 성경말씀도 읽고 기도로 시작했다 일년에 봄가을로
일주일간 학교에서 부흥회를 가졌다 수업없이 그런시간을 보내는것이 너무 좋아했으나
저는 이상하리만큼 교회는다니지않았다 학교에서 공부잘하는 학생은 경북대학의과대학이
목포였고 저도 집에서도 그곳을 가는것으로 생각했다
영어를 워낙 잘못하기에 주요과목을 칠때보다는 전과목을 칠때에좋은석차를 받았다
남들보다 수학성적이 월등히높았던것이다 원래 수학도 잘못했는데 중3때 담임이 건강이
나빠서 수업시간에 자습으로 문제를 많이 풀은덕을 본것이다 그리고 대구학원에서 유명한
수학선생에게 배운탓도 컸었다 영어는 정말 못했다 대학교1~2학년은 교양은 필수였다
1학년때 출석도나쁘고 숙제도 잘안하다보니까 F학점을 받고 여름보강도 하고도 학점을
따지못하다가 4학년1학기에 간신히 최하점수로 받았다 사실 졸업학년에 그점수를 준것은
학점안준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가 취업에 전산을 택한것은 이런이유였다
그러나 처음들어간 기아자동차에서 간단한 영어면접점수가 좋았다고 먼저 들어온
선배로부터 들었다 학교다닐때 영어성적이 나쁜데요 직장에서 친 토익점수는
다른직원에 비해 높았다 이상하게 생각하고있다 삼성전자에서 처음 맡은일은
HP컴퓨터고객에게 교육을 시키는일이었다 부서에 오십여명이 근무하는데 몇명을
제외하고는 과학원이나 서울대출신이었다 그로 인하여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
제가전공한것을 활용하기위해서는 매탄동에 있는 공장에 근무해야했고 본부장도
이를 권했지만 서울에 사는 형님집에 다녀야했기에 명동사무실에 근무를 원해서
컴퓨터사업부를 택하였고 상대적으로 학럭도 낮고 전산실무경험도 없어서
일년도 넘기지못하고 대구 제일모직 공장으로 내려왔다
대학다닐적에 하숙집의 영향으로 학교근처에 있는 성당에서 예비자교리를 받았지만
중도에 그만두고 오랫동안 이일을 잊고 살았다. 서울에서 처음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떄에는
저의 나이는 25세였다. 그당시 형님은 목동에 사셨다 지금은 목동이 대단지아파트로 걔발되
었지만 그당시는 완전 변두리였다. 지대가 한강다리보다 아래에 있어서 장마가 지면
항시 동네는 침수되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형님이 사는 집은 야산 바로아레에 있는 2층집
이어서 산에서 물이 내랴오면 길거리는 온통 물바다가 되어서 밤에 사람들이 내려와서
길에 모래주머니를 쌓기도 하였다. 회사를 갈때에는 골목길에서 걸어나와서 목동 도시가스
길건너편에서 김포공항에서 오는 버스를 타고 다녔다.
아버지가 걱정이 되셨는지 대구로 내려오라고 하셔서 계열사인 제일모직에 지원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보니까요 저도 딜레마에 빠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한때 그렇게 생각
했고 주위사람들도 생각했는데 공장근무보다는 사무실관리직으로 근무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았다. 그러나 대구공장에서 5년간은 저에게는 시련의 시기이었지만 뜻 깉은기간이었다
제가 천주교인으로 세례를 받게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셨다. 공장 총무과장이 말씀하시기를
관리자가 되기위해서는 현장을 알아야 하신다면 저를 방적과 현장에 발령을 내셨던 것입니다
공장은 24시간 3교대로 운영되었다. 대부분이 어린 여공으로 이우러졌고 여자반장과
남자보조원 그리고 담당은 2명의 남자 그리고 과장이 계셨다. 회사후문에는 관사가 있었다
과장님이 관사에 사셨기에 다른 일반직사원이 퇴근하고 나면 잠시 관사가 가셨다가 다시
회사로 돌아오시곤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똑똑하신 분이셨다 서울대학 섬유과를 나오신
분이셨다.
섬유공장에서는 대부분이 여공들이 기계여러대를 맡아서 작업하기에 이를이 필요한 자재나
아니면 생산된 제품을 운반하는 사람외에는 별로 할일이 뚜렷하지 않았다 저는 일종의
견습생이 되멌다 그러나 역할을 하나 받았다. 우리부서의 역할은 양털뭉치를 가느다란 실로
뽑아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기계의 역할은 솜을 양쪽으로 길게 잡아댕겨서 다시 감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겨지도록 양쪽에 조그마한 접시가 달려있어서 힘을 받게 하는데 접수가 여러장
붙어있어서 그것으로 힘을 조잘하는데 저는 기계사이를 다니면서 그 접수를 조절하고 있었다
여자반장이며 그곳에 근무하는 여자조장에게는 저는 아주 신기한 존재였지요
그래서 저에게 오셔서 저를 안내도 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요 그러다보니
그들이 창고로 자재나 제품을 운반할 때에 따라가기도 하고 도와주는 일이 생겼지요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으로 가게되는데 식당에 갈때마다 그많은 여공들이 저를 안다고
인사를 했었지요 그당시는 여공들에게 인기가 많았지요 지금처럼 뚱뚱하지도 않았고
키도 커고 대학나오고 총각이라는 점이 그들에게는 큰 관심사였지요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은 대부분이 대구사람이 아니고 그룹충수의 고향출신들이 많았어요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들어온것이고요 여기에서는 기숙사생활을 하였지요
그래서 그들의 희망은 좋은 남자만나서 결혼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되었지요
어느정도 여자반장과 친해지자 저에게 부탁을 하러 오셨지요
며칠이후 공단내에 있는 어느공동체를 찾아갈려고 하는데 같이 갈수가 있냐고 하셨습니다
저도 집에 가면 별로 할일도 없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간곳이 일반주택에서 이루어진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인 수도공동체였다.
사실 저희부서는 건물이 2동이 있는데 하나는 작업동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창고를 겸한
준비작업하는 곳이었는데 이두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몇몇이는 제외하고는 왕래를 거의 하지
않았다. 작업자들은 모두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했다 혹시 머리카락이라도 기계안에 들어가면
안되기때문이었다. 그때에 처음 낫선장면을 본것이다. 머리에 스카프를 하였지만 청자켓 원피스에
가슴에 커다란 십자가를 달고 계셨던 한 여자를 보게됩니다. 저는 그때에는 이상한 종교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요 그리고 찾아간곳이 수도원도 아니고 가정집같은 생각도 들었지요
다른사람들은 미사를 드리는 곳을 경당이라고 불럿는데 저는 자주 그방에서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고집이 많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저를 주님이 부르셨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저는 방적과에서 일하는 것 자체를 아주 싫어했지요
작업장내에는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뜨거운수증기를 뿜어되었지요 저처럼 안경을
끼고 들어가면 먼저 앞이 안보였지요 안경을 닦고 다시 들어가게 됩니다.
저는 방적과에 근무한것은 불과 1~2당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방적과에 적을 두면서
경영개선팀에서 차출되어서 3개월동안 주일도 없이 열심히 다른일을 하였지요 그러면서도
매달 여자반장과는 그 공동체에는 같이 다녔지요 그 덕분에 세례를 받게되었고요
그리고 파견일이 끝나자 저는 방적과로 복귀하지않고 전산과로 이동해갔었지요
파견근무시에 저의 업무를 정리해주는 여직원이 한분있었는데 그 친구분을 소개해준다고 해서
만났어요 천주교인이었지요 소개받은 여성은 오라비가 울등도성당신부이셨다고 하였지요
저는 그때에 사실 여자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관심꺼리도 안되었지요 사실그녀들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 듧니다. 잘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 여자반장은
이름이 최분다였습니다. 1980년도 대구주교좌성당인 계산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방적과있을때 선배이신 분이 천주교인이셨는데 저의 관면혼때에 신랑측 증인으로 서셨지요
저는 대구에 있을동안 천주교회에 관련해서 특별한 활동을 한기억은 없습니다
자신이 살고있는 지역인본당이라는 개념도 없었지요 그리고 공단내에 있는 수도회 수녀님과 같이
다니던 곳이기에 그곳에서 예비자교리를시작합니다.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저보다들 나이들이 많았지만 20대젊은 남성은 저뿐이었지요 그래서 교리를 가르치는 수녀님이
저네 대한 많은 가대를 하셨던 모양이고 그리고 세례를 받고 나면 그팀을 모아서 레지오팀을
만들생각을 하셨나봅니다. 저는 사실 한동안 레지오를 하기가 어려운것은 처음부터 지루하게 하는
묵주기도였습니다. 그래도 세례를 받았지만 레지오팀에는 들어갈수 없다고 나중에 수녀님께
말씀드리고 저는 제가살고 있는 본당으로 돌아왔는데요 그래도 미사는 세례받은 서당으로 다녔지요
어느날 본당신부님을 찾아갔었습니다. 누가 본당신부님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가서 부탁을 드리니
신부님은 당황해하셨습니다 조그마한 성당이기에 신부님으 누가 미사에 참석하는지 다 알고 계셨지요
처음 보는 남자가 와서 부탁을 하니말입니다. 그러나 부탁을 들어볼수밖에 없었는지 이것저것을 물어보
시지요.. 교육을 받았는지..아니 뭔교율을 말입니까?
저는 하루빨리 결혼을 해야 안정이 된다고 하시면 선을 여러번 봤는데 제가 관시밍없자
시골여자와 몇번보는중에 아버지가 신랑측에서는 허럭한다고 편지를 쓰가지고 양쪽 부모가 만난자리에
상대편쪽으로 보내는 바람에 저는 얼뜰결에 혼인승낙을 한셈이 되었지요
그래서 혼인날짜를 잡게되었는데요 경상도풍습음 결혼을 한달정도 앞두고 신랑측에서 예물을 갖고
신부집에 방문해서 갖다주는 품습이 있었지요 그래서 사촌형을 앞세워서 찾아가셨습니다 그집안 친척들
모두가 나와서 반가이 맞이해주셨지요 특히 처고모가 제일 반가이해주셨는데 그분이 천주교인이셨는데
신앙때문에 시집와서 고생한 애기를 하셨지요.. 이이야기는 나중에 하셨고요 그날은 다 정리하고 돌아갈
려고 하니까 처고모님은 저에게 혼배준비는 잘되고 있내고 하셨지요.. 저는 거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지요.. 처고모님은 당장 성당에 가서 신부님을 뵙고 상의를 하라고 하셔서 찾아갔더니만
혼배교육을 받았느냐고 하셔서 안받았다고 하니까? 지금 일정이 바쁘니까 혼배이후에 꼭 받으라는 단서를
달고 혼배일정을 잡았지요 훈배일자는 결혼날짜 바로전날을 정해서 신부측 학교친구와 저의 직장선배가
증인이 되는 조촐한 혼배를 했던 것입니다 저는 직장에서 잘적응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짦은 신앙심으로
그리고 불교신자인 어머니의 강한만류로 그만 냉담시기로 들어서게 되었다.
참으로 저에게는 시련의 시기에 천주교에 입문하였고 그당시에는 이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만 그러나 지금와서는 그런일이 없었더라면 제가 감히
천주교에 입문할수가 있느냐를 생각해볼때에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어려운시기에 저의의도와는 달리 아네와 천주교의 입문이라는 것을 얻게 되었으니
이 또한 주님이 하신 일이 아닐수가 없었다고 여깁니다
제가 세상물정을 잘읽고 직장에서 잘 적용하였더라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큰도움이 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삼성과 대우에서 일하면서 미국의 가장 큰 컴퓨터회사인 HP와 UNISYS의 일을 하게되고
제가 지원한 서울농대교수의 손을 잡았더라면 저는 아마도 지금쯤 서울농대교수가 되었고 지금은
농업전문가가 되었을수가 있었을것인데.. 실력도 없는 제가 교수님의 제안은 거절했다
아마도 그일로 풀렸다면 저의 인생은 순조로울수가 있었겠지만 저는 그길을 택하지 않고 다른길로
들어섬으로해서 다소 험난한 길을 거침으로서 주님의 부르싱에 응답했던 것 같았습니다
서울의 가난한 동네인 시등동과 안산의 가난한 동네인 원곡동에서의 삶을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시흥동에서 살면서도 서울 가난한동네인 난곡에서 빈민사목을 하던 부부를 만나게해주셨고
그곳에서 빈민사목을 하시던 담당신부님과 빈민운동을 하시는 사라아줌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족: 너무 장황하게 쓰다보니 저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쓰기가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