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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6. 30 오순절 후 여섯 번째 주일
예배로부름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 99:5, 9)
예배기원 I
할렐루야! 에벤에셀의 하나님, 지금 여기까지 저희들을 인도해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날마다 숨을 쉬는 순간마다 주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고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난 한 주간을 지내다가 오늘은 거룩한 주일을 맞이하여 성전으로 올라와 기쁨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확신과 하늘의 평안으로 가득하게 채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주 우리 하나님(14장)/ 예수 나를 위하여(144장)/내 주의 나라와(208장)/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441장)/ 생명 진리 은혜 되신(462장)/ 교회의 참된 터는(600장)
고백의 기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다가 멸망해 갈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저희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의롭다 인정하여 주시고,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베풀어주신 이 모든 은혜를 잊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여정 속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여전히 원망과 탄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도 저희들의 생각은 불의하였고, 말은 누추하며, 행동은 비루했습니다. 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의 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부터는 구원받은 성도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바르고 온전한 믿음을 지키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0b, 22)
제목: 행복이라는 우상
본문: 신명기 10:12- 13
☞ 마음 문을 열고
두 개의 질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행복하고 싶습니까?”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문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긍정의 대답을 할 게 뻔합니다.
사람이 행복을 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안에 행복의 갈망을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행복하고 싶다는 대답은 인간이 현재의 상태에 그리 만족하지 못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해질까요?”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첫 번째 질문을 전제로 두 번째 질문을 주로 다루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와 행복
사랑하는 배우자, 순종적인 자녀, 높은 연봉, 건강, 성공적인 사역,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휴가. 이런 조건들이 만족되면 우리는 행복할까요? 힘들어하는 자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나중에 행복하라고 하는 거란 말이지요. 오늘 본문을 우리말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가 잘되라고 주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 아니냐?”
물론 일반적으로 부모가 말하는 행복과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은 차이가 있지만, 그 뉘앙스는 비슷하게 들립니다.
솔로몬은 역사상 가장 많은 것을 누렸던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누렸던 사람이 바라던 행복은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틴 로이드 존스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론상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의문이 들고 반박하고 싶으십니까?
그는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을 했을까요? 그리고 이 말은 성경적으로 옳습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아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세 위격의 영광스러운 교제 속에서 흘러넘치는 완전한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주시려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하나님과 쌍방 소통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람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동기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명이 이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행복은 그의 아들을 즐거워하시는 데 있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인간 영혼의 최상의 기쁨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려고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을 먼저 창조하셨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남자와 여자, 공동체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하나님은 무한히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천지 창조의 목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얻습니다. 인간은 본래 관계적 존재로 창조됐으며, 행복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듯이 하나님은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죄는 모든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범죄 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적 영광에 미치지 못하게 됐고, 인간관계에서도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난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목적은 이 깨어진 관계의 행복을 회복하게 함으로써 본래의 창조 목적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진리는, 주님이 죽으심으로써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사람의 성숙함은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측정될 수 있습니다. 물론 행복도 그 관계 속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행복하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고, 바라는 인생을 허락하심으로써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2. 두 가지 행복: 부차적 행복과 일차적 행복
행복을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래리 크랩은 부차적 행복과 일차적 행복을 말합니다. 부차적 행복은 삶이 우리를 속이지 않을 때, 삶이 우리를 선대할 때에만 주어집니다.
부차적 행복에 대한 욕구는 좋은 기분 그리고 부차적 행복을 즐기는 데 몰두하는 삶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환경과 즐거운 감정을 공급해 주시고,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셔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부차적 행복은 본질상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행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행복이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이 범죄 한 인간이 추구하는 부차적 행복의 한계입니다. 부차적 행복의 길은 넓은 길입니다(마 7:13).
그러나 본래의 행복, 일차적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때,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을 때 찾아오는 행복입니다. 일차적 행복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만이 아니라 엄청난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때 주어집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은혜를 알고 그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차적 행복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확장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안에서 쉼을 누릴수록, 복음 안에서 자유 함을 누릴수록 하나님의 성령은 그분의 시간에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더욱 드러내게 하시고, 우리는 더 큰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일차적 행복은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자라갑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일차적 행복은 하찮은 즐거움이나 부차적 행복을 요구하는 자세와 권리를 내려놓기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 길은 좁은 길입니다(마 7:14).
일차적 행복의 주된 장애물은 부차적 행복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 갈망이 부차적 행복을 우상으로 만듭니다. 우리 삶에서 행복이 우상이 되는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성도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성도들의 사랑과 인정이 부차적 행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갈망이 너무 커 성도를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도에 대한 사랑은 성령님이 일으키시는 갈망인데, 부차적 행복에 대한 갈망 때문에 성령님이 주신 일차적 갈망이 질식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부차적 행복을 느끼지 못해서 받고 있는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더옳고 바람직하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 고통에서 건져 내가 원하는 바를 만족시키는 일을 하셔야 한다고 느낍니다.
결국 진리가 아닌 감정에 이끌려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래도’라며 고집스럽게 저항합니다. 그의 기도는 부차적 행복을 향한 갈망 표출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이 우상이 된 경우입니다.
이런 태도를 형성하는 전제는 좋은 기분을 느끼고 싶은 마음, 행복을 향한 내 욕망은 정당하고 당연한 권리라는 느낌입니다. 성공, 음식, 재산, 마약, 술, 성, 인정, 돈 등은 다른 방식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만족감을 주는데, 나는 이런 것들을 요구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만족을 원하는 것은 나쁜 것이나 죄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전제가 마음을 장악하면 그는 일차적 행복의 자리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와 성령님이 일으키시는 갈망을 무시하게 됩니다. 결국 그 일생은 제자리에서 맴돌게 됩니다.
3. 일차적 행복을 보장하는 율법
말씀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해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을 안고 본문을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3).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이 자유를 앗아간다고 생각하고 느낍니다. 행복과 율법을 연결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서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네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6:24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창조 때부터 변함없이 동일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큰지 물었습니다.
주님의 답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두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신명기에 있는 본문과 주님의 이 말씀을 연결 지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대답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더 사랑할수록 그리고 이웃을 더 사랑할수록 더 행복할 거야”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일차적 행복입니다.
성경은 일차적 행복과 부차적 행복을 구분해 말씀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요한이 사랑하는 장로 가이오를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이 짧은 기도의 내용에는 영혼의 잘됨과 범사에 잘됨(강건함을 포함해)이 있습니다. 영혼의 잘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된 행복이지만, 범사에 잘됨은 보장된 것은 아닌 요한의 바람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말씀은 죽음과 고난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차적 행복을 보장한다는 약속도 아닙니다. 하지만 보장된 약속은 있습니다. 일차적 행복과 연결돼 있는 ‘영혼의 잘됨’입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시 23:1–2). 얼마나 멋진 고백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어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고 말합니다(시 23:4a). 여기에 부차적 행복이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해(받음)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b)라고 이어집니다. 이것은 일차적 행복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보장된 약속입니다.
4. 확장성이 있는 일차적 행복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보장하는 행복은 확장되는 성질이 있습니다. 부차적 행복은 개인적이고 때론 다른 사람을 시기와 질투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일차적 행복은 언제나 주변의 관계들을 더 깊이 사랑하는 관계로 확장시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은혜를 누리는 행복은 누군가를 더욱 사랑하게 함으로써 더 깊은 만족과 기쁨과 참된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일정한 조건이 만족돼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랑으로 관계를 응답이 없을지라도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분투할 때 일차적 행복이 자라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조차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죄인들을 사랑하심으로 행복하셨다고 감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 또한 그러할 수 있습니다.
5. 교훈과 적용
1) 우상을 자백하고 버려야합니다.
오늘 ‘행복’이라는 우상을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배우자, 말 잘 듣는 자녀, 힘이 되는 가족, 월급을 많이 주는 좋은 직장, 건강, 성공적인 사역,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휴가…. 이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이런 하나님의 선물들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은 가이오가 범사에 잘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나쁘고 더럽고 악한 것들만 우리의 우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우상은 술이나 도박, 무분별한 성적 일탈과 같은 것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라고 허락하신 모든 좋은 선물들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누리십시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마십시오. 그것이 행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 그것을 위해 분투하는 자리에서 누리는 행복에 대해 말합니다.
부차적 행복의 조건들이 채워졌거나 채워지지 않아서 일차적 행복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차적 행복의 충족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행복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오랫동안 믿어 왔던 것들이 있습니까? 항상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든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상 숭배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해 우상을 내려놓겠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내게는 이 조건이 채워져야 한다며 고집스럽게 그 우상을 붙들고 살겠습니까?
2) 더 깊은 갈망이 필요합니다.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짜 행복에 이르고 누리는 여정은 쉽지 않습니다. 아니, 이 여정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해도 극복할 수 없는 자기중심적 죄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는 자유함 우리의 실력과 상관없이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과 용기가 솟아납니다. 좁은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쇠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 즉 영혼의 목마름과 영적 배고픔에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당 안에 앉아 있으면서 내 안에 있는 기쁨을 깨우고 자극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너무 피상적이거나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제게 사랑에 빠진 사람을 주십시오. 그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입니다.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 배고픈 사람, 사막 속에서 목말라 하며 영원한 나라의 샘을 찾아 한숨짓는 사람을 제게 주십시오. 그런 사람을 제게 주십시오. 그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입니다. 그러나 냉랭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행복을 누리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까? 꺼지지 않는 깊은 갈망을 하나님께 구할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돌보려는 갈망이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자기 방어적이 되지 않고 자기희생적으로 사랑할 때, 우리 안에서 일차적 행복이 주어지고 자라날 것입니다.
이 사랑을 위해 분투하십시오. 그것을 갈망하십시오. 그 갈망을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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