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永川 매산고택梅山古宅과 산수정山水亭 (국가민속문화재 제24호)
문화재청 설명에 의하면 이 집은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1685/숙종11∼1757/영조 33)가 짓기 시작하여 둘째 아들 정일찬이 완성하였다고 한다. 정일찬이 완성했다고 하지만 기본적인 구조를 완성한 사람은 정중기다. 정중기는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매산고택과 오록서당悟麓書堂, 산수정山水亭까지 지었다. 기록에 의하면 정중기가 1740년에 매산고택을 짓고 1748년 오록서당을, 산수정은 4년 후인 1752년에 완공하였다. 본채를 지은 후 12년 후에 산수정이 완공됐다. 산수정은 아들인 정일찬이 돈을 대어 지은 것이라 정일찬이 완성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정중기는 본관은 영일迎日이고 자는 도옹道翁, 호는 매산梅山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후손이다. 1727년(영조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1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이어 결성현감이 됐다. 사간원정언을 거쳐 1753년 사헌부지평이 되고, 뒤에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형조참의는 정삼품 당상관으로 지금으로 치면 차관보 정도의 직위다. 이후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영남인사를 정권에서 소외시키자 연명상소를 하여 그 시정을 진정한 바 있다. 저서로 『매산집』이 있고, 편저로는 『포은속집(圃隱續集)』·『가례집요(家禮輯要)』·『주서절요집해(朱書節要集解)』가 있다. 경사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와 예제(禮制)에 밝았다.
정중기는 당시 전염병인 수두를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매산고택은 큰 길에서 한참 들어와 넓지 않은 계곡에 있는 것을 보면 그 말이 맞는 듯하다. 다른 곳에서 이곳을 ‘매단혈’이라고 부른다며 풍수적 해석을 하고 있다. 문화재청 설명에서도 “풍수지리학상 좋은 터에 자리 잡고 있는”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풍수 초보인 내가 봐도 이곳이 풍수적으로 해석하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김두규 논문에 의하면 매산집에 “이곳을 사람들이 ‘매단혈梅丹穴’이라고 부른다.”는 정도로 언급하는 정도로만 소개하고 있어 풍수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두규는 매산고택 뒷산이 주산主山이 아닌 연봉으로 흘러가는 주필산駐驆山의 모습이라고 했다. 앞산이나 뒤에 있는 배산이나 모두 전형적인 계곡을 끼고 흘러가는 산의 모습이었다. 김두규는 이렇게 산과 물이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것을 ‘산수동거山水同居’형으로 풍수적으로 좋지 않게 본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김두규는 이곳을 선택한 것은 풍수관에 의한 것이 아닌 유가적 택지관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김두규 주장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땅을 선택하는 ‘택지擇地’라는 관점이 아니라 집을 짓는 과정에서 유가적 사고를 반영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자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율곡은 고산구곡高山九曲을 조성하고 고산구곡가를 읊었고, 송시열은 화양구곡華陽九曲에서 은거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곳곳에 ‘구곡’이란 접미사가 붙은 곳이 많다. 즉 조선 후기에 와서 유교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며 집이나 경관에 유가적 해석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매산고택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한다. 풍수적 관점보다는 유교적 관점에서 당호를 짓고 그에 걸맞는 생활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매산고택과 오록서당, 산수정을 지은 이유가 정중기 문집인 <매산집梅山集>에 있다. 김두규 논문에 있는 매산고택에 대한 내용을 보면 풍수적 고찰보다는 주역에 따른 의미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산고택은 원래 정침 및 사랑채, 대문간, 아랫사랑, 고방/방앗간채, 측간, 사당/별묘로 구성됐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정침 및 사랑채, 대문간, 사당만 남아있다. 고방/방앗간채는 현재 대문주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랫사랑채 위치는 현재 상황에서 어디에 있었는지 알기 힘들다. 매산고택은 경상도 지방의 기본 형태인 'ㅁ'자 평면이다. 사랑채 누마루는 사랑방과 직각을 이루면서 덧붙어 있다. 'ㅁ'자 평면에서 사랑채를 전면에 배치하는 평면은 영천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평면이다. 그러나 사랑채 누마루를 정면에 돌출한 모습은 그리 많지 않다.
거창 정온선생 고택이 이런 모습이지만 이렇게 사랑채 누마루를 돌출시킨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대지가 넓어야 한다. 대부분 이런 넓은 대지를 가지지 못했고, 평지에서 이런 집을 지으려면 기단이 높아지기 때문에 방으로 들어가기 불편하다. 그러니 사랑채 누마루를 높게 해 돌출시키기 쉽지 않다. 그러나 누마루를 만들어 앞으로 돌출시키면 집의 무게감을 더하고 풍광을 바라보는데 유리하다. 매산종택 부지는 완만한 경사지다. 그리고 대지가 넓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누마루 설치가 가능하다. 그런 환경을 잘 살린 집이다. 누마루가 돌출되고 보니 경관을 보는데 유리하다. 매산종택은 고택 앞에 시원한 풍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풍광을 바라보려면 이렇게 누마루를 돌출시키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안채는 중정을 형성하며 ‘ㄷ’자 형태로 문간채와 사랑채를 감싸고 있다. 정침 가운데 대청을 두었다. 정침은 다른 건물보다 지붕을 한껏 높이고, 원형기둥과 초익공을 사용하여 안채 격을 높였다. 대청 왼쪽에는 큰방과 부엌을 두고, 오른쪽에는 한 칸 건넌방과 바로 앞에 한 칸 마루방을 두고 그 아래 광을 두었다. 안채 대청에는 이 집이 오래 됐음을 보여주는 것이 있다. 대청 후면 장판문 가운데 샛기둥을 설치했다. 이런 샛기둥을 설치한 집은 오래된 집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 집의 건립시기인 18세기 중반을 고려해 보면 샛기둥 설치한 늦은 예가 아닐까 한다.
몸체 전면부는 중문을 두고 왼쪽은 아랫방, 마루방, 고방을 두었고 오른쪽은 사랑방을 두었다. 사랑채는 중문 오른쪽에 배치됐다. 중문 옆으로 방이 두 칸이고 누마루 쪽을 앞뒤 세 칸으로 만들어 ‘ㅓ’자 형을 이루고 있다. 이런 배치 역시 매산고택 만의 특징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돌출된 누마루를 독립된 구조로 보이게 한다. 이것 말고 매산고택 전면부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중문좌측 첫 번째 칸에는 아랫방을 위한 부엌이 있다. 이럴 경우 벽은 장판벽이나 흙벽으로 마감이 돼야 한다. 그런데 옆에 있는 아랫방과 같이 창문을 설치했다. 밖에서 보면 방인지 부엌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이것은 정면에서 봤을 때의 모습을 의식한 것이다. 그 부분을 일반 부엌처럼 처리하면 입면의 리듬이 깨진다. 정면에서 봤을 때 중문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이 되길 이 집을 지은 정중기가 바랬던 것 같다.
산수정은 매산고택에서 상류로 400m 정도 떨어져있는데 매산종택의 건너편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산수정은 정중기 말년에 완성됐다. 산수정 구조는 가운데 대청을 두고 좌우에 방을 각각 하나씩 들였다. 산수정의 당호에도 유교적 이름 짓기가 있다. 좌측방은 ‘지급재智及齋’고 우측방은 ‘인수재仁守齋’다. 이 글은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것으로 ‘智及’은 ‘지혜를 갖춘다’는 뜻이고 ‘仁守’는 ‘인을 지킨다’는 뜻이다. 이것은 유자儒子로써 지켜야할 덕목이다.
산수정 구조는 특이하다. 가운데 대청을 두고 좌우에 방을 배치하고 앞에 그리 넓지 않은 퇴칸을 두었다. 이런 구조는 그리 익숙하지 않다. 방이 두 칸이면 대부분 모아두고 한쪽에 누마루를 둔다. 지금 배치를 보면 대칭적인 구조를 만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산수정 정면은 긴 기둥 위에 누마루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누마루는 깊지 않다. 시각적으로 누마루처럼 보이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정중기는 산수정은 <주역> 64괘중 몽괘蒙卦에 해당한다고 했고, 주변에 이름을 붙여 산수정의 품격을 높였다. 누 아래 첫 단은 청금대聽琴臺, 그 아랫단은 영귀대詠歸臺, 뒤쪽 언덕에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샘물에 설천渫泉이란 이름을, 흔적은 없지만 연못에는 군자당君子塘, 뒤쪽 언덕에는 고현사高賢社, 입구 쪽에 석문石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귀대는 증삼曾參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온다.(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에서 따온 말로 위의 이름은 모두 은거하는 군자의 모습을 상징하는 이름들이다.(전통가옥 41/50쪽)
참고문헌
한국의 전통가옥 41/문화재청/2013
문화재청 사이트/매산고택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釋紛訂誤 論語新解/金鍾武/民音社
영천 매곡 마을과 매산 정중기의 택리관에 관한 연구/김두규외/한국정원학회지/2002년 6월
블러그 매산 정중기선생 https://blog.naver.com/kula89/220936223136
첫댓글 오랫만에 좋은 답사기 올려주셨군요
근처에 선원리 철불좌상도 있는데...
요즘
다음 카페 글쓰기가 변경되어 사진 크기 편집이 애로가 있습니다
폰으로는 모르는데 컴에서는 엄청 크게 나오거든요
나중에
눈썹처마방에 옮기겠습니다
연정고택이 두번째인데, 첫번째 갈때도 선원리철불을 봤고 이번에도 친견하고 왔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20M가 한계더니 이번에는 40M까지 돼 사진용량을 줄이는 수고는 덜었는데 사진이 너무 커져 징그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