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高駒驪), 유라시아(Eurasia)의 패자(霸者)였다. [13-5]
高句麗伎와 西凉伎는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에 있다. 왜?
옛 조선(朝鮮) 강역(疆域), 유라시아(Eurasia)를 넘나들다.
2022년 03월 27일
○ 조선사(朝鮮史)와 중국사(中國史)【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음악(音樂) 또는 악지(樂志)’에서 말하기를,
〈‘고구려기(高句麗伎)’는, ‘서량기(西凉伎)’와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에 있다.〉고 설명(說明)하면서, 〈“고구려기(高句麗伎)는 서량기(西凉伎)와 유사(類似)하다”〉고 말한다.
사실(事實) 「악(樂), 상례(喪禮), 혼례(婚禮), 신앙(信仰), 의복(衣服)제도(制度)등은, 인종(人種)이나 종족(種族) 또는 부족(部族)등과 관계없이 인접(隣接)한 나라끼리 오랜 세월(歲月) 함께 산다거나, 또는 병합(倂合), 정복(征服)등으로 인하여 본래(本來)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풍속(風俗)을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환경(環境)이 오면, 그것을 받아드려 동화(同化)되어 갈 수밖에 없다.」 다만 시간(時間)이 문제(問題)일 뿐인데, 오늘날도 예외(例外)는 아니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해설(解說)에 따르면,
➊ ‘고구려(高句麗)=고구려(高駒驪)’는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북(北)쪽 땅에 있었고,
➋ ‘서량(西凉)’은, ‘이고(李暠)’에 의해 “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 서부(西部)와 신강성(新疆省) 일부(一部)” 땅에 세워졌던 조그마한 왕조(王朝)로, 겨우 ‘22년’【AD400-421】동안 존재(存在)했던 왕조(王朝)였다. 【李暠 太祖 武昭王 : 400年-417年 [庚子 400年-404年 : 建初 405年-417年] / 李歆 : 417年-420年[嘉興 417年-420年] / 李恂 : 420年-421年[永建 420年-421年]】고 설명(說明)한다.
이런 왕조(王朝)가 참칭(僭稱)하여 연호(年號)를 사용(使用)했다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다. 이런 유형(類型)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이야말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이 대표적(代表的)인 것인데,
‘1’ 만리(萬里) 쯤 떨어져있던, 겨우 22년을 영위(營爲)했던 왕조(王朝)의 음악(音樂)과 수천(數千) 년(年)을 이어온 고구려(高駒驪) 음악(音樂)과 밀접(密接)하다 또는 유사(類似)하다는 말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구려(駒驪)=구려(句驪)=구려(句麗)’는 상탕(商湯) 곧 ‘은(殷)’나라 때도 있었다고 하였으니, 그 이전(以前) 하(夏) 때도 존재(存在)했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서량(西凉)이 존재(存在)했던 그 당시(當時)에도, 고구려(高駒驪)는 이미 이천(二千) 년(年) 이상(以上)을 이어오고 있었던 왕조(王朝)였다.”
“고구려(高駒驪) 음악(音樂)을 서량(西凉)이 흉내 내었다”면 모르겠지만, 어떻게 밀접(密接)하다는 할 수 있겠는가! 즉(卽),
“1” 만리(萬里)쯤 떨어져 있던 두 나라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력(强力)한 체제(體制)를 가졌던 중국(中國)의 천조(天朝)들이 있었기 때문에, 왕래(往來)조차 불가능(不可能)했다는 것이 사실(事實)이다. 그런 두 나라가 무슨 재주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음악(音樂)체제(體制)나 악기(樂器)등이 같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악(樂)과 악기(樂器)가 같았다거나 영향(影響)을 받아 유사(類似)했다거나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에 있었다고 한다면, 두 나라(國)가 하나가 되었거나, 또는 오랫동안 인접(隣接)해 있어, 서로 교통(交通)했다면 가능(可能)한 일이다. 이러한 풍속(風俗) 즉(卽) ‘악(樂)이나 악기(樂器)’등은 수십(數十)년 이상 공유(共有)하지 않는 한 같아질 수 없다. 세계(世界)가 1일 생활권(生活圈)에 든 오늘날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풍속(風俗)으로 자리 잡으려면 많은 시간(時間)이 소요(所要)된다는 뜻이다.
➌“서량(西凉)”은, ‘고구려(高駒驪)의 속국(屬國)이었다’면 가장 적절(適切)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될 것이며,
➍ 또 하나는, ‘고구려(高駒驪)가 이들을 병합(倂合)해버렸다’면 가능(可能)한 일이다.
‘AD 400 년(年) 때라면, 이때 고구려(高駒驪)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AD 375~413)과 장수왕(長壽王 : AD 394~491)의 강력(强力)한 무위(武威)로 주변국(周邊國)들을 압도(壓倒)했던 시기(時期)로, 이때 고구려(高駒驪)는 가장 강력한 영토개척(領土開拓)에 힘을 쏟았던 시기(時期)였다.
이러한 때 “서량(西凉)”이라는 소(小) 왕조(王朝)가 뭘 할 수 있었겠는가! “고구려(高駒驪)의 속국(屬國)이었으니, 그곳에 있던 음악(音樂)들이 고구려(高駒驪)로 전파(傳播)된 것이다.” 또는 “서량(西凉)이 고구려(高駒驪) 음악(音樂)을 받아들였다.”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說得力)이 있다.
이건 수서(隋書)의 악지(樂志) 기록(記錄)으로 증명(證明)된다. 즉(卽)
➎ 해동역사(海東繹史) 22권 : 《고구려(高句麗)는 후위(後魏)가 풍씨(馮氏)를 평정(平定)하면서부터 서역(西域)과 통하였다. 그로 인해 악공(樂工)을 얻게 되어 점차 그 소리가 번성해져 태악(太樂)과 구별되었다》고 하였는데,
‘수서(隋書) 원문(原文)’과 다른 것은, 앞의 2개 개 나라 즉(卽) “소륵(疏勒)”과 “안국(安國)” 등의 두 나라를 쏙 빼놓고 “高麗”만을 인용(引用), 필사(筆寫)했다는 점이다. 뺀 것과 수서(隋書) 원문(原文)과는 큰 차이(差異)가 있게 된다. 즉(卽),
➏ 수서(隋書) 원전(原典)을 찾아보면 : 《隋書卷十五 志第十 音樂下 : 疏勒,安國,高麗, 並起自後魏平馮氏及通西域,因得其伎.後漸繁會其聲,以別于太樂. : 소륵(疏勒), 안국(安國), 고려(高驪)는, 후위(後魏)가 일어나 풍씨(馮氏)를 평정하면서부터 서역(西域)과 통하였다. 그로 인해 악공(樂工)을 얻게 되어 점차 그 소리가 번성해져 태악(太樂)과 구별되었다.》고 하였다.
즉(卽) ‘후위(後魏)=북위(北魏)’가 풍씨(馮氏)를 평정하고 난 뒤부터 ‘소륵(疏勒)이나 안국(安國)’【中央亞世亞】등과 함께 ‘고려(高驪 : 高駒驪)’가 통(通)하게 되었다는 뜻인데, 수서(隋書)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풍씨(馮氏)가 서역(西域)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고 뜻과 같다. 이에 「후위(後魏)가 풍씨(馮氏)를 평정(平定)해버리니, 서역(西域)과 통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후위(後魏)=북위(北魏)’는 ‘고구려(高駒驪)’란 뜻과 같다.」
이렇게 놓고 보면 : 〈‘북위(北魏)=후위(後魏)’의 ‘수십만(數十萬) 기마(騎馬)’가 백제(百濟)의 경내(境內)로 들어갔으나, 백제(百濟)의 매복(埋伏)공격(攻擊)에 대패(大敗)했다.〉는 역사기록(歷史記錄)은, 곧 〈“고구려(高駒驪) 기마(騎馬) 수십만(數十萬)이 백제(百濟)를 쳤으나, 대패(大敗)했다”는 말로 대신(代身)할 수 있게 된다.〉
아래의 ‘고려(高驪:高駒驪)·서량(西凉)·소륵(疏勒)·안국(安國)‘의 악기(樂器)를 비교(比較)해보자.
➐ 《高麗》,歌曲有《芝棲》,舞曲有《歌芝棲》。樂器有彈箏、臥箜篌、豎箜篌、琵琶、五弦、笛、笙、‘簫、小篳篥、桃皮篳篥、腰鼓、齊鼓、擔鼓、貝等十四種,為一部。工十八人。
➑ 《西涼》者,其歌曲有《永世樂》,解曲有《萬世豐》舞,曲有《于闐佛曲》。其樂器有鐘、磬、彈箏、搊箏、臥箜篌、豎箜篌、琵琶、五弦、笙、簫、大篳篥、長笛、小篳篥、橫笛、腰鼓、齊鼓、擔鼓、銅拔、貝等十九種,為一部。工二十七人。
➒ 《疏勒》,歌曲有《亢利死讓樂》,舞曲有《遠服》,解曲有《鹽曲》。樂器有豎箜篌、琵琶、五弦、笛、簫、篳篥、答臘鼓、腰鼓、羯鼓、雞婁鼓等十種,為一部,工十二人。
➓ 《安國》,歌曲有《附薩單時》,舞曲有《末奚》,解曲有《居和祗》。樂器有箜篌、琵琶、五弦、笛、簫、篳篥、雙篳篥、正鼓、和鼓、銅拔等十種,為一部。工十二人。
➤ 이상(以上)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구려기(高句麗伎)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 있었던 여러 왕조(王朝)들의 악(樂)을 소유(所有)하고 있었던 바, 《고구려(高駒驪)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중원대륙(中原大陸)에 횡(橫)【동서(東西)】으로 길게 걸터앉아 있었다.》는 것이 증명(證明)된다.
○ 아래의 고전(古典) 원전(原典) 기록(記錄)을 살펴보자.
즉(卽) ‘고구려(高駒驪)’는 본시(本是) ‘구려호(句麗胡)’라고 불렸으며, 특히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서부(西部) 및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동구라파(東歐羅巴) 일부의 여러 나라(諸國)들을 속국(屬國)으로 지배(支配)하고 있던 ‘연연(蠕蠕)=유연(柔然)’과 ‘왕실(王室)간의 혼인(婚姻)으로 결속(結束)’되어 인접(隣接) 나라들을 위협(威脅)하고, 협박(脅迫)했으며, 특히 은밀하게 모의(謀議)하여 북(北)쪽에 있던 “지두간(地豆干)”의 땅을 빼앗아 나누어 갖자“〉고 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전한다.
(1) 연암집(燕巖集) 제2권 /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순찰사에게 답함 : 《邪學本以昇天之說。誑誘愚民。本出柔然。: 사학(邪學 : 天主敎)은 본시 천당에 올라간다는 설을 가지고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꾀었는데, 이 근본은 유연(柔然)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기독교(基督敎)의 천당(天堂) 또는 천국(天國)’이야기는, ‘연연(蠕蠕)=유연(柔然)’의 ‘샤머니즘[shamanism]’을 모방(模倣)한 것이다. 이런 종교(宗敎)를 신봉(信奉)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샤머니즘[shamanism]일 뿐이다.
‘연연(蠕蠕)=유연(柔然)’ : 《4세기(世紀) 부터 6세기를 넘어 까지의 유목민족(遊牧民族)으로 ‘연연(蠕蠕)=유연(柔然)=여여(茹茹)=예예(芮芮)’ 등으로도 불렸다. 사륜(社倫)이 가한(可汗)을 칭하면서부터 강성(强盛)해져,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서부(西部)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동구라파(東歐羅巴)’의 여러 나라(諸國)들을 속국으로 지배(支配)하기도 했으나, 북위(北魏)와 자주 충돌하였고, 5세기 말, 두륜(豆崙)이 가한(可汗)이 되고서부터 내란(內亂)등으로 돌궐(突厥)에게 소멸(消滅)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사라져버린 종족(種族)으로 구분되고 있다. 그들의 종교(宗敎)는 샤머니즘[shamanism]이 중심(中心)이었으며, 불교(佛敎)도 행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2) 역대사선(歷代史選) : 오손(烏孫) : 전한 시기에 천산북로(天山北路)의 일대에 살던 유목 민족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한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5세기 후반에 선비(鮮卑)와 유연(柔然) 등에 압박을 받아 멸망하였다고 전해진다.
(3) 五洲衍文長箋散稿天地篇, 地理類,人種, 羅禪辨證說[李圭景] : 《室韋九部在肅愼之北.今之㺚子.似是其遺種.而室韋之西千餘里.有地豆干,烏洛侯.室韋之北.有驅度寐諸種.或近或遠.要皆今之所謂㺚子也.中略. : 실위(室韋) 9부는 숙신(肅愼)의 북(北)에 있다.【숙신(肅愼)은 북(北)쪽과 서(西)쪽 사이에 있었던 나라다.】지금의 달자(㺚子)다.【달자(㺚子)는 곧 달단(韃靼:Turk)】이다. 그 유종(遺種)들은 닮았다. 실위(室韋) 서(西)쪽 천여(千餘)리에 지두간(地豆干), 오락후(烏洛侯)가 있다. 실위의 북(北)쪽에는 구도매(驅度寐)등의 여러 종류다. 혹 가깝고 혹 멀지만, 요지(要旨)는 모두 지금의 이른바 달자(㺚子)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통고(通考)를 인용(引用)한 것이다. 나선(羅禪) 역시(亦是) 유사(類似)한 종족(種族)이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달자(㺚子) 즉(卽) “달단(韃靼 : 투르크(Turk)”계열(系列)」이다.
연연(蠕蠕)=유연(柔然)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➊ 〈실위(室韋)는, 숙신(肅愼)의 북(北)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서북방(西北方) 지대(地帶)를 말하는 것이고, 서북방(西北方)에 있던 “실위(室韋)의 서(西)쪽에 있는 지두간(地豆干)을 빼앗자”는 모의(謀議)를 할 수 있었다면 ,
➋ 〈고구려(高駒驪)와 ‘연연(蠕蠕)=유연(柔然)’의 땅은, 최소한(最小限) 오늘날의 “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 : Altai)”사이에 존재했어야 한다. 그럴 때, 그곳의 북방(北方)이나 또는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던 “지두간(地豆干)”을 빼앗아 서로 나누어 갖자는 모의(謀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위(室韋) 9부는, 오늘날의 “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Altai] 북방지대(北方地帶)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지대(北方地帶)[서시베리아분지] 및 우랄산맥[Ural山脈] 서(西)쪽 일부(一部)까지를 무대(舞臺)로 활동(活動)했던 유목족(遊牧族)이다.】
(3) 해동역사(海東繹史) : 후위서(後魏書)에 의하면 : 《3년에[장수왕(長壽王) 67년] 고구려에서 몰래 연연(蠕蠕)와 더불어서 모의해 지두간(地豆干)을 취하여 나누어 가지기로 하였다. 거란(契丹)에서는 그들의 침략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부락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와서 내부(內附)하였다.》고 하였다.
(4) 北史 ‘契丹’편에서 : 《太和三年,高句麗竊與蠕蠕謀,欲取地豆干以分之.契丹舊怨其侵軼,其莫 賀弗勿干率其部落,車三千乘,眾萬餘口,驅徙雜畜求內附,止於白狼水東 : 태화 3년, 고구려(高句驪)가 몰래 연연(蠕蠕)과 모의하여 “지두간(地豆干)”국의 땅을 빼앗고 나누자고 하였다. 글란(契丹)은 옛 원한으로 그를 번갈아 침략하니, “막하불물간”은 부락 무리들을 인솔하여, 수레 삼천(三千) 승에 무리 만(萬) 여구 및 여러 가축들을 몰고 옮기면서[후위(後魏)에] 내부(來附)에 붙기를 청하였는데, 백랑수(白狼水) 동쪽에 머물렀다.》고 하였다.
(5) 북사(北史) 地豆干 : 《地豆于在室韋西千餘里.多牛羊,出名馬.皮為衣服,無五穀,唯食肉酪.後魏孝文帝延興二年,遣使朝貢. : 지두간(地豆干)은, 실위(室韋) 서쪽 1천 여리에 있다. 소(牛). 양(羊)이 많으며, 이름난 말(馬)이 나오는데, 가죽은 의복으로 사용하며, 오곡(五穀)은 없고, 유일하게 먹는 것은 고기와 유즙(우유)이다.》라고 하였다.
(6) 通鑑節要 卷之四十八 唐紀 [附契丹] : 《高句麗柔然이 謀擊之한대大酋莫弗賀勿于懼하야 率部落三千乘하고 請附于魏하고 因居白狼水東하다》
(6) 通典 / 北狄 : 鹽漠念:皆北狄種類,相與婚姻,高氏聘蠕蠕女為妻,宇文氏以突厥女為后. :모든 북적(北狄) 종류(種類)는, 서로 함께 혼인(婚姻)을 하는데, 연연(蠕蠕)의 왕녀(王女)는 고씨(高氏)의 왕비(王妃)로, 우문씨(宇文氏)는 돌궐(突厥)의 왕녀(王女)를 왕비로 하였다.》고 하였다.
○ 여러 종류(種類)의 옛 기록(記錄)을 살펴보았다. ‘고구려(高駒驪)’는, 「한반도(韓半島) 땅에 존재할 수 없다.」 특히 《‘실위(室韋)’는, “숙신씨(肅愼氏)의 북(北)쪽에 있었다.”》고 하였는바, 이에 따르면,
〈「실위(室韋)」는. 장안(長安)을 기준(基準)한다면, 서북방(西北方) 1만 3천리 이상(以上)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산해경(山海經)이나 회남자(淮南子)’등에 따르면 말이다.
근데,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은, “숙신(肅愼)은, 동북방(東北方)지대인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동북방(東北方)지대에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몰아붙여야만,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한반도(韓半島)에 있었다.”는 논리(論理)를 밀어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필사적(必死的)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한반도(韓半島) 땅으로 몰아붙이는 것일까?
사실(事實)은 이게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核心) 줄거리”다.
○ 삼국(三國) 이후(以後)의 이야기지만,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이르기를 : “고려(高麗)의 음악”편을 보면, “여기(女伎)는 ‘하악(下樂)’이라고 하는데, 모두 세 등급이 있다.”
《대악사(大樂司)는 2백 6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왕이 늘 사용하는 것이다. 다음은 관현방(管絃坊)으로 1백 7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다음은 경시사(京市司)로서 3백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석지(柘枝)와 포구(抛毬)의 기예(技藝)도 있다. 그들의 백희(百戱)는 수백 명의 사람이 하는데, 모두 대단히 민첩하다고 한다. [고려도경]》하고 하였다.
‘2백 60명’으로 구성된 대악사(大樂司)는 늘 사용(使用)하는 것이고, 관현방(管絃坊)은 ‘170명’, 경시사(京市司)는 ‘3백 여 명’으로 구성(構成)되어 있다고 하였다.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자. ‘고려왕(高麗王)’이 행차(行次)할 때마다 260명으로 구성된 대악사(大樂司)가 동원(動員)되었다면, 「봉건왕조(封建王朝) 역사상(歷史上)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이야기다.」 태왕(太王) 즉 천자(天子)였기에 가능(可能)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당시(當時)의 ‘세계적(世界的)인 악(樂)’을 소유(所有)하고, 보유(保有)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이전(以前)의 삼국(三國) 즉(卽) “삼한통일(三韓統一)를 이루고, 천하통일(天下統一)를 이뤘다.”는 것이며, 「삼한(三韓)의 영역(領域)은, ‘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중원대륙(中原大陸)’을 포함했었다.」는 이야기다.
이럴 때, 「‘서역(西域)=서토(西土)’의 악(樂)과 ‘북국(北國)’의 악(樂), ‘남만(南蠻)의 악(樂)’까지를 망라(網羅)하여 “고려(高麗) 악(樂)”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 〈거대(巨大)제국(帝國) “조선(朝鮮)”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봉건(封建) 제국(帝國)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거대(巨大) 제국(帝國)을 해체(解體)한 당사자(當事者)들이 바로 「서세(西勢)+일제(日帝)+서남(西南)인」들이다.
‘이게 탄로(綻露)난다면, 이게 밝혀진다면’, 오늘날의 「‘서세(西勢)와 서남아세아(西南亞世亞),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동남아세아(東南亞細亞), 열도(列島)’등 많은 나라들의 국경선(國境線)은, 모조리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핵심(核心)일 것이다.
○ 21세기(世紀), 우리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지정학적(地政學的) 요소(要素)가 약점(弱點)일 수 있으나, 이를 잘 활용(活用)할 수 있다면, 많은 발전(發展)을 도모(圖謀)할 수도 있다. 이는 ‘국민(國民)들의 단결(團結)과 지도자(指導者)의 역량(力量)과 능력(能力)’등이 함께했을 때의 일이다.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을 위한 권력기관(權力機關), 특히 검찰(檢察)개혁(改革)은, 기필코 이루어져야 할 오늘의 책무(責務)가 되어버렸다.
〈“일제(日帝)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 “식민지(植民地) 통치(統治) 세력(勢力)”들이 「반도인(半島人)들을 무자비(無慈悲)하게 통치(統治)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기관(權力機關), ‘검찰(檢察)’!!!!!!!」〉
「이제는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법치주의(法治主義) 대한민국(大韓民國)에 어울리는, 합당한 조직(組織)으로 다시 태어나야 되지 않을까!」
○ ‘우크라이나’ 사태(事態)에서 보듯, ‘능력(能力)과 역량(力量)이 담보(擔保)되지 않은, 초보(初步) 지도자(指導者)의 입(口)으로 인하여, 국토(國土)가 초토화(焦土化)되고, 수많은 국민들이 죽어 나가는 엄청난 피해(被害)를 당하는 걸 똑똑히 보고 있지 않은가!’
○ 우리는,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를 척결(剔抉)하고,
‘권력(權力)·권한(權限)’을 이용(利用), 남용(濫用)하는 조직(組織)들을 척결(剔抉)하며,
‘국론(國論)분열(分裂)’을 야기(惹起)하는 쓰레기 정치인(政治人)들을 퇴출(退出)시키고,
‘사대주의(事大主義)’ 망상(妄想)’을 퇴출(退出)하며,
‘부정부패(不正腐敗)’를 발본색원(拔本塞源)하며,
‘주가조작, 증빙(證憑)위조(僞造)등과 같은 파렴치(破廉恥)한 범죄(犯罪)의 일소(一掃),
‘기레기’로 대표(代表)되는 ’쓰레기 언론(言論)‘들을 과감하게 퇴출(退出)시키고,
‘국론통일(國論統一), 대동단결(大同團結)’하여, 세계(世界)속에 어울리는 경제력(經濟力)을 갖춘, 자주국방(自主國防)의 나라로 거듭나야 되지 않을까?
2022년 03월 27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비핵화!'
이미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마당에, 무슨 놈의 '비핵화!'
'비핵화의 방법은 없다.' 정치적 '쇼'는 하면 할수록 '쇼'만 늘어난 뿐.....국민들을 피곤하게 만들뿐이다.
상대적이다.
우리도 핵탄두를 보유하면 되는 일이다.
지지고 볶고, 따져본들....무슨 방법이 있겠나?
방법은 하나, "우리도 핵탄두를 개발, 보유하면 되는 일이다"
핵개발을 못하게 꽁꽁 묶어놓은 미국을 상대하는 것이 바로 '정권'의 임무다.
[선제타격! 버르장머리 고쳐 놓겠다]는 이야기는,국민들을 향한 사탕발림이며, 정치적 쇼이자,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다.
어떻게 선제타격을 하고, 버르장머리를 고칠텐가? 일부계층의 가슴만을 촉촉히 적셔줄 뿐이다.
정치행위는 감정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무슨 방법이 있나?
입(口)으로 망(亡)하는 것을,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보고 있으면서 말이다.
선생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대진"님!
안녕하세요.
관심과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조선사와 관계되는 옛 고전의 원전 내용을 차근 차근, 하나 하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정치ㆍ정책은 역사를 바로 알아야 참된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