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자유 ( 진리의 삶 )
마음공부는 일반적으로 교육이라고 하는""
따라 배우기 방식으로 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참자유는 깨달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행은 환경에 적응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돌연변이 같은 의식혁명이다.
환경에 적응한다는 건 환경이 바뀌면 ""
그에 따라 또 바뀐다는 말이다.
이렇게 환경에 적응해 모양이 변한 것은
그 변화가 자손에게까지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돌연변이는 형질 자체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돌연변이가 일어나
세상에 물들 걱정을 안해도 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으면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을 하다 보면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된다.
사람들은
첫 번째 물드는 단계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물들지 않는 단계의 사람만 되어도 기뻐한다.
그러나
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네 번째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사법계관(四法界觀)이라 해서 모든 존재의 세계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가 사법계관(四法界觀),
두 번째가 이법계관(理法界觀),
세 번째가 이사무애법계관(理事無碍法界觀)
네 번째가 사사무애법계관(事事無碍法界觀)이다.
물처럼 바람처럼
내 수준은 지금 어디쯤일까?
나는 어떤 수준의 사람이 되고 싶은가?
두 번째 단계를 지향한다면 '''
생활하는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대단한 각오와 결단이 필요하다.
기존의 생활방식과 인간관게를 다 정리해야 한다.
세 번째 단계가 되려면 삶의 형식을 바꿀 필요는 없다.
굳은 결심만 있으면 된다.
주위 사람들이 뭘 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
자기 삶에 대한 가치 기준만 뚜렷하면 된다.
'그 사람이야 술을 마시든 말든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일 뿐이다'
하고 바라보면 된다.
두 번째 단계를 지향하는 사람은
자기 가치 기준이 뚜렷하지 않아도 현실 사회를 떠나
깨끗한 삶들과 어울려 살다보면 자기도 깨끗해 지는게 가능하다.
아침 4시에 일어나는 사람들과 같이 살면
그 시각이면 사방에서 불을 환히 밝히고
활동을 시작하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나게 된다.
환경이 나를 조절할 수 있게 한다.
반면에 세 번째 단계의 사람은
완전히 개방된 환경에서 사니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첫 번째 단계의 사람에게는 주변 조건이 아주 중요하다.
환경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 단계의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수행 장소가 중요하다.
어느 산 밑에 가면 기가 강해서 수행하기 좋다.
어떤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면 좋다,
어느 나라에 가면 수행하기 좋다 해서 수행 장소를 찾아다닌다.
첫 번째 사람이 생활의 안락함을 찾고,
마음에 드는 배우자,
마음에 드는 직장,
마음에 드는 학문 등을 찾아 헤매듯이,
두 번째 사람은 도(道)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과 장소를 찾아다닌다.
그래서 두 번째 사람도 이 사람 저 사람,
이 산 저 산,
이 절 저 절,
이 책 저 책을
찾아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첫 번째 사람은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두 번째 사람은 먹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첫 번째 사람은 시간만 있으면 잠을 자는데,
두 번째 사람은 잠도 잘 안 잔다.
첫 번째 사람은 열명의 여자도 좋다고 하는데,
두 번째 사람은 한 명의 여자도 싫다고 한다.
하지만
세 번째 수준의 사람은 이런 경계를 별로 탓하지 않는다.
수행하는 데 환경이나 조건,
장소 같은 것에 개의치 않는다.
번뇌가 다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줄 알기에 굳이 뭘 피하지도 탐하지도 않는다.
자기 인생길이 뚜렷하니 옆 집 사람이야 큰 집을 짓고 살든 말든,
남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든 말든,
무엇을 먹든 말든,
무슨 짓을 하든 말든
그건 그 사람 인생이므로 관여치 않는다.
나는 이렇게 검소하게 사는게 더 좋으니까 검소하게 살 뿐이다.
남을 따라할 것도 남을 배척할 것도 없다.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을 인격적으로 무시한다.
어리석은 놈, 미친 놈,
저러니 괴롭지 하고 비웃는다.
하지만
세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의 식성이 그렇고 그의 업식이 그러니까 하고는 그를 이해하면서
자기 일만 해 나갈 뿐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상대방이 어떻든 그건 내 마음공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네 번째 사람은 '이것이 내 마음공부' 라는 생각마저도 없는 사람이다.
내 공부가 어떻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형상 없는 물이 그릇 따라 모양을 바꾸듯이 뭘 해야 한다는
고집없이 상대와 인연에 따라 상응할 뿐이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화작(化作)이라고 한다.
보살의 마지막 경지가 화작이고,
곧 부처의 경지다.
그러니 보살은 상황 따라 인연 따라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천백억 화신으로 그 몸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면,
첫 번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하면 나도 맞대응해서 욕을 한다.
두 번째 사람은 욕하는 사람과 만나지 않는다.
세 번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욕을 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
네 번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욕하면 나도 욕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욕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사람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첫 번째 사람은 화가 치밀어서 도저히 욕을 안 할 수 없기에 욕을 한다.
그러나 네 번째 사람은 상대를 깨우치기 위해 짐짓 욕을 한다.
남에게 욕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휘말려들어 욕을 했다면 첫 번째 수준이다.
하지만 첫 번째 사람이라도 네 번째 단계의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다.
비록 감정에 휩쓸려 욕을 했더라도 그 이후에 '아하,
내가 감정에 휩쓸려 욕을 했구나'
하고 자각하고 그것을 경험으로 삼아
'내 공부가 이 정도밖에 안 되었구나'
하며 연습의 과정이라 여긴다.
이렇게 모르는 것, 틀린 것,
잘못한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모르면 물어서 알면 되고,
틀린 줄 알면 고치면 되고,
잘못한 줄 알면 참회하면 된다.
-법륜스님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자~알 봣슈... 3월달에 봐유..(날자수정 햇걸랑..)
네~ 선배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