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거산 →배티 성지 →죽산 성지→ 미리내 → 감곡 매괴성모 순교지
29.3Km 32.7Km 32.2Km 50.5Km
24. 배티 성지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현재 진천에서 배티를 거쳐 안성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말끔하게 포장돼 있고,
좌우의 경부 고속도로와 중부 고속도로 그리고 둘을 연결하는
평택 제천 고속도로가 성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처럼 각 지역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배티 인근의 교우촌으로는 은골,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발래기,
퉁점, 새울, 지장골, 원동, 굴티, 방축골 등 배티를 포함해 모두 15곳이나 된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위치하고 있는 배티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진천에서 18km 정도 지점에
‘삼박골 비밀 통로 순교자의 묘’라는 푯말이 나오는데
그 중간에 백곡 공소가 길 왼쪽에 서 있다.
여기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윤 바르바라와 박 바르바라의 묘가 있는데
이들은 친시누이올케 관계이다.
순례객은 여기서부터 순교선조들의 향기를 조금씩 느낄 수 있다.
‘삼박골 비밀 통로’라는 푯말을 지나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면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여기서 배티까지는 약 2km 정도로 걸어서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 길은 박해 시대에 배티로 넘어가던 비밀 통로였는데
무성한 수풀 사이로 난 좁다란 길은
믿음 하나로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던
당시 선조들의 가쁜 숨결을 느끼게 한다.
삼박골은 베르뇌 장 주교와 페롱 권 신부가 박해를 피해 은신했던 교우촌으로
현재 공소는 없어지고 순교자 이 진사의 부인과 딸의 묘소만이 남아 있다.
푯말이 서 있는 곳에서 안성 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드디어 배티 성지가 나온다.
입구 들머리에는 2012년 4월 15일 축복식을 가진 고딕 양식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이
넓은 광장과 함께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100m 정도 올라가면 왼쪽으로 1997년 6월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이 있고,
그곳에서 시작되는 오솔길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세워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처가 모두 하나씩의 커다란 맷돌에 새겨져 있어
순교자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의 육중한 무게를 보여주는 듯하다.
14처가 끝나는 곳에는 자연석 그대로의 제대와 함께
나무 밑동을 그대로 잘라 만든 야외 성당이 있고
산기슭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제대 위의 촛대 역시 14처와 마찬가지로 맷돌로 만들어져 있고
제대 앞과 주위에는 나무 등걸로 이루어진 좌석들이 늘어서 있다.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사제관과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성모상을 지나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등산로를 넘어야 한다.
이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성지 입구로 다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약 400m 정도 올라가면
길가 오른쪽에 '최양업 신부 성당터'라고 쓴 입간판이 서있는데,
이곳에서 103위 성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우측에 최양업 신부가
여름 장마철이면 머물던 성당 겸 사제관이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다.
1년에 5,000리에서 7,000리까지 걸어 다니며 심할 때에는
한 달에 겨우 나흘밖에 못 잤다는 최양업 신부는 전국을 앞마당처럼 다니다가도
장마철에는 여기에 머물며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공과(聖敎功課)”를 번역했다.
그러나 그가 기거하며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두 칸짜리 옛 초가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1999년 최양업 신부가 머물렀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에 있던 농가를 매입해 철거하고,
2001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한 후 최양업 신부 동상도 세웠다.
이 집은 이미 1849년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다음해 다블뤼 신부(후일 제5대 조선 대목구장)가 설립하여
페낭 신학교 유학생을 준비시키는 조선교구의 소신학교로 사용했었고,
최양업 신부뿐만 아니라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의 사제관과 성당으로도 활용했었다.
여기서 잘 포장된 배티 고개 길을 따라 900m 정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14인 순교자 묘역 입구’라는 푯말이 서 있다.
이곳은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는 모두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가 있다.
이 외에도 배티 성재골에 6인 무명 순교자의 묘가 있으며,
신원이 알려진 순교자 묘로 백곡 공소에 2기, 인근 교우촌에 6기가 더 있어
배티 인근에는 총 28기의 순교자 무덤이 산재해 있다.
배티를 중심으로 진천 일대에서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60여 명의 순교자가 났는데,
그 가운데 교회 순교록과 관변 기록에 그 순교 행적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현재 시복시성이 진행 중인 ‘하느님의 종’ 8명을 포함하여 모두 34명에 이른다.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이름 없는 묘소들로 산재해 있다.
2002년 12월 3일 ‘양업 영성관’(피정의 집)을 신축해 봉헌식을 거행했으며,
복원된 최양업 신부 옛 성당 입구에 103위 순교 성인 계단과 양업 영성관 입구의
시복시성 대상 순교자 묵주알 계단도 함께 조성하였다.
양업 영성관은 지상 2층 규모로 3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어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피정이 가능하다.
또한 청주교구는 2009년 교구 내의 대표적 성지인 배티와 연풍을 잇는
84.6km의 도보성지 순례길을 마련하여 순례객들을 돕고 있다.
25. 죽산 성지(竹山聖址)
조선 태종대 죽산은 광주 부사의 관할하에 ‘현감’이 다스리는 작은 고을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고려 시대 이래 삼남 지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교통 요지로,
분행역(分行驛)·좌찬역(佐贊驛)·대평원(太平院)·장항원(獐項院) 등 여러 역원(驛院)들이 있었다.
또 임진왜란 당시 도성 수호의 주요 전략지로 파악되어 1595년(선조 29)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후 인조는 1635년(인조 13) 여주(驪州)에 세웠던 수어후영진영(守禦後營鎭營)을 죽산으로 옮겨
죽산 도호부사가 수어후영장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다.
토포사란 도적을 잡는 직책이며, 영장은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우두머리이다.
따라서 병인박해 당시 죽산 도호부사는 토포사와 영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천주교인들을 체포할 수가 있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전국에서 다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작은 고을이었던 죽산에서는 22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기록은 《치명일기》와 《병인 치명사적》, 《박순집 증언록》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로 하였을 때 병인박해 당시 죽산에서 확실히 순교한 신자는 18명이며,
죽산 포교에게 체포된 것은 분명하나 어디서 죽었는지 불분명한 신자들은 4명이다.
또한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었으나 인근 수원에서 순교한 사례도 발견된다.
이들이 체포된 지역을 살펴보면, 죽산 이외에 양지·용인·성남·음성·직신 등
죽산 인근 지역에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처럼 죽산 포교들이 넓은 지역으로까지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죽산의 도호부사가 토포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산 도호부사는 토포사의 직위를 이용하여
인근 여주·이천·용인·안성의 포졸들까지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동원하여 다른 지역보다 많은 천주교인들을 체포할 수가 있었다.
죽산으로 끌려온 신자들은 진영 동헌 앞에서 심문을 받고 고문을 당하였으며,
옥에 수감되어 배교를 강요당하기도 하고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진영 동헌 앞이나 옥 터와 같은 경우도 중요한 성지(聖地)이지만
옥 터만이 현 죽산 면사무소 위치라는 것이 알려졌을 뿐
진영 동헌 앞은 위치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죽산 성지로 개발된 곳은 당시 신자들의 처형지로 알려진 곳으로,
오늘날 ‘잊은 터’라고 불리는 장소이다.
현재는 평평한 땅이지만 당시에는 노송이 우거진 숲으로
삼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큰 길가에 접해 있었다.
나라에서는 행인들이 많이 다니는 이곳에서 신자들을 죽임으로써
사람들에게 경계하는 마음을 심어 주고자 하였다.
또한 이곳은 고려 시대에 몽고군이 쳐들어와
송문주(宋文胄) 장군이 지키던 죽수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친 장소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고 하여 ‘이진 터’라고 불렸다.
이러한 유래를 지닌 이진 터는
병인박해 당시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고 하여
‘잊은 터’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산에서의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처형은
1866년에서 1869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참수형이나 교수형으로 처형당하였다.
1866년에 처형된 신자들로는
여기중, 이희서, 홍천여(洪千汝), 한치수(프란치스코) 등이 있다.
1868년에는 문 막달달레나, 여정문 일가(부인, 아들), 정덕구(바오로)가 처형되었으며,
1868년에는 방 데레사, 김 우보로시나, 조치경(혹은 조치명, 타대오), 최 안드레아,
오 마르가리타, 박 프란치스코, 최성첨과 그 아들, 이진오 등 9명이 처형을 당하였다.
이듬해에는 유 베드로, 김 도미니코, 김인권이 처형되었으며,
1871년에는 마지막으로 홍치수가 처형당하였다.
한편 이곳에서는 같은 날·같은 장소에서 한 가족이 처형된 경우가 여러 번 발견된다.
1867년 처형된 여정문 일가, 1868년의 조치경·김 우보로니시나 부부와
박 프란치스코·오 마르가리타 부부 및 최성첨과 그의 장남이 그러한 예이다.
본래 이 같은 일은 조선의 국법상 금지 사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자행된 것으로 보아, 병인박해에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 했어야 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죽산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이 있은 후
이 지역에 공소가 세워진 1932년까지 단 1명의 교우도 없었다고 알려진다.
죽산에 다시 신자들이 모이게 된 것은
안성에 본당이 설립되고 죽산 공소가 세워지면서부터였다.
26. 미리내 성지
경기도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
김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미리내는 본래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을 이루었던 곳의 하나이다.
따라서 김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비로소 본당이 설정됐을 때
이곳에는 이미 1천6백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성 김대건의 일생은 짧았다.
26세의 나이에 생을 마친 그는
그러나 '뛰어난 지식, 열렬하고 꾸밈 없는 신앙, 놀랄 만한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정든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선 이국 땅에서 선진 서구 문명에 정진하기 10개 성상.
그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최초의 방인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그는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김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그
의 빼어난 인품과 재능을 두고
"과연 그에게는 어떤 일이든지 맡길 만하였고
그의 성품이나 일하는 태도로나 지식 등
어느 모로 보든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를 잃은 것은 무엇으로도 대상(代償)하지 못할 재앙"
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조정에서조차 많은 대신들이
외국 문물에 능하고 박학 다식한 그의 재능을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굽히지 않는 신앙으로
결국 헌종에 의해 직접 그의 사형이 선고되고
이튿날인 16일엔 떠들썩한 규모로 새남터에서 처형된다.
김 신부는 형장에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敎)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보를 얻으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김 신부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묻고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 신부의 경우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 남은 신자들은 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인 이민식(1829-1921년)은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후 김 신부의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백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 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자신의 선산에 김대건 신부의 묘를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함에 따라
주교의 유언대로 그를 김 신부의 옆자리에 안장했다.
그 무렵 김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둔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집 저집으로
문전 걸식을 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던 것이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도 김대건 신부의 묘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한을 위로한다.
그리고 미리내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자신도
92세까지 장수하다가 죽어서 김 신부 곁에 묻혔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가 설치됐다가 3년 뒤인
1886년 본당으로 승격됐다.
하지만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지난 1972년부터 시작됐다.
성모 성심 수도회와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을 비롯해
주차장 시설, 김대건 신부 동상, 피정의 집 등이 완공됐다.
1980년 들어서는 경당 옆에 3만 평 규모로 광장을 확장하고
미리내 성당에서 경당까지 길 옆에 14처 조각을 세웠고
1987년부터 1989년까지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103위 성인 기념 대성전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경당에는 현재 모두 여섯 분의 묘소와 함께
김 신부의 하악골(아래턱뼈)을 모셨다.
다른 유해는 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성신 교정) 성당 안에 안치돼 있다.
성당 앞마당에서 보이는 성모상을 지나 조금 올라가다 보면
여기저기 나뒹구는 바위를 자연 그대로 이용해 게쎄마니 동산을 꾸며 놓았는데
이는 피땀을 흘리며 기도를 바치는 예수, 그와 반대로 잠에 곯아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둔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오른쪽 등성이로는 수원 교구 성직자 묘원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위편으로는 18위 무명 순교자들의 합장묘가 있다.
1976년 6월 24일 이동면 묵리에 있던 순교자의 유해를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했다가 이윤일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 성모당으로 옮겨 모시고 천묘 사적비를 세웠다.
그 후 대구대교구는 성인의 유해를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2005년 10월 25일 성모성심수도회와 천주성삼성직수도회가
29년간 관리 · 운영해온 미리내 성지가 수원교구로 이관됐다.
수원교구는 그동안 성지를 가꾸는데 수고해온 수도회의 노고를 치하하고
미리내 성지를 김대건 신부의 영성과 믿음이 살아 숨 쉬는 성지로
더욱 발전시킬 의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