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마애종 슬로우답사 일정을 이어갑니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을 말하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왕을 낳은 후궁 등)의 무덤을 말하며,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부릅니다.
42기의 조선 왕릉 가운데 북한에 있는 제릉(齊陵-태조의 첫 번째 왕비 신의고황후)과 후릉(厚陵-2대 정종과 정안왕후)을 제외한 40기의 왕릉이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되었습니다.
제20대 경종(景宗)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가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으로 잠들어 있는 의릉(懿陵)을 둘러보고 의릉 경내에 있는 나무에 대한 공부도 하였습니다.
구 중앙정보부 강당 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갑니다.
하얀 헛꽃을 가진 산딸나무는 산딸기를 닮은 열매를 맺습니다.
때죽나무 꽃이 바닥에 무수히 떨어져서 아래 위로 장관을 이룹니다.
때죽나무는 독성이 강해서 왕릉의 관리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성한 위토답(位土畓) 농사에 유기농 재료로도 활용되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니 나무에도 많은 꽃이 달려있습니다.
때죽나무 열매를 찧은 물로 물고기를 '떼'로 '죽'여 잡거나,
열매의 머리(종자 껍질)가 반질반질하여 마치 스님이 떼로 몰려있는 것 같은 모습에서 '떼중나무'로 부르다가 '때죽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왕의 숲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160년 된 향나무.
향나무는 바닷물에 오랫동안 담궈서 침향(沈香)을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침향(沈香)은 수컷 사향노루의 향낭에서 얻는 사향(麝香)과 수컷 향유고래의 위석에서 나오는 용연향(龍涎香)과 더불어 최고급 향으로 평가 받습니다.
박석환 회장님의 향나무 해설은 침향을 만들기 위한 매향(埋香)에서 시작하여 미륵부처에 대한 용화장생, 불교 여성단체인 사당(社堂)에서 남자들의 모임인 남사당(男寺黨)으로 이어져서 안성 칠장사의 남사당놀이패를 거쳐 동춘서커스까지 이어집니다.
회장님의 머리속을 해부해 보아야할 듯합니다.
보리수나무
모감주나무, 염주나무라고도 불려집니다.
배롱나무,
도교에서 북극성(北極星)을 기리키는 자미(紫薇)를 지칭하여 불교에서는 치성광여래인 치성목(七星木)으로 불리면서 무덤가나 사당에 많이 심었습니다.
미선(尾扇)나무
열매의 모양이 궁중에서 사용하는 둥근 부채를닮아서 미선나무라고 부릅니다.
둥근 부채 모양의 미선나무 열매는 잎사귀와 구별이 잘 안됩니다.
의릉을 나오니 한 시가 지났습니다.
오늘도 박금일 선생님표 호박죽으로 요기를 하고 점심을 먹으러 이동을 하였습니다.
의릉을 가운데 두고 한국종합예술학교 캠퍼스가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960년대에 지어진 중앙정보부 시절 건물들을 물려받아서 한예종이 되었습니다.
한예종 전통예술원을 지나갑니다.
예술학교 답게 교내에서 거문고 튕기는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학교 근처 식당들은 일요일이라서 모두 문을 닫아서,
편의점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였습니다.
박금일 선생님 가방에서 죽순 데진것을 꺼내어서 즉석 죽순무침을 만들었습니다.
죽순무침과 어묵을 곁들여서,
도시락 한 그릇을 깨끗히 비웠습니다.
삼박자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오후 답사를 시작합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하늘이 숨겨놓은 곳'을 찾아갑니다.
천장산(天藏山) 하늘길
'하늘이 숨겨놓은 곳' 천장산을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천장산 하늘길은 동대문구 청량리동, 회기동, 이문동에 위치해 있으며 지형에 맞춰 목재데크 및 계단을 설치하고 기존 임도를 활용한 숲길입니다.
회장님의 지명 유래 설명,
청량리동 : 청량사가 있었던 마을,
회기동 :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회묘가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던 곳,
이문동 : 순라꾼이 순라를 돌 때 제2문이 있었던 동네,
석관동 : 천장산의 돌(石)들이 꼬치를 꿰듯(串) 늘어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회기동 전투지
1950년 6월 28일 국군 제 8연대 제2대대(나는 8연대 3대대에서 복무하였기에 반가웠음)가 회기동 143고지(경희대 뒷산)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 싸운 곳이다.
6월 27일 국군이 서울 방어의 최후 저지선인 미아리 일대에서 고전 중일 때 제2대대는 전방에서 철수 중인 낙오병을 수습하고 피난민을 통제하면서 그들 속에 침투한 북한군 편의대 30~40명을 색출하기도 했다.
6월 28일 이른 아침에는 서울로 이동 중인 북한군 일부의 공격을 저지했다.
하지만 북한군이 이미 서울 시내로 속속 진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도 한강을 건너 찰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6.25전쟁 초기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의 긴박한 상황을 보여주는 전투지 중 하나이다.
천장산 하늘길 입구는 계단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야자 매트를 깔아 놓은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회기로로 표시된 길로 들어갑니다.
데크 계단길을 따라 오르막을 올라갑니다.
의릉(懿陵) 안내판이 세워진 곳을 지나,
저 아래쪽에 의릉 능역과 한예종 건물들이 보입니다.
중앙정보부가 들어오기 전에는 천장산 주변이 모두 왕릉 능역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동대문구와 성북구의 경계지점에서 한국과학기술원 방향으로 올라갑니다.
천장산 정상(140m)에 도착하였습니다.
홍릉수목원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숲이 우리에게 주는 12가지 선물'을 읽어보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국민 1인당 연간 249만원씩 산림 공익 기능 혜택"을 제공 받고 있습니다.
천장산(天藏山)
동대문구 청량리동, 회기동, 이문동과 성북구 석관동, 월곡동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40미터이며 풍수지리상 명당터로 손꼽히는 곳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두고 '하늘이 숨겨놓은 곳'이라 하여 천장산(天藏山)이라고 이름지었다.
이러한 연유로 천장산 일대는 조선 왕가의 묘지로 조성되었다.
홍릉터(洪陵址)
데크길을 걷다 보면 보이지는 않지만 이 표지판 아래쪽에 명성황후의 초장지(初葬地)가 있습니다.
바로 옆에는 어정(御井)터가 있습니다.
출구에서 가까운 곳에 대나무 군락에서 꽃을 피우고 대나무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천장산 숲길 입구까지 나왔습니다.
잠깐 사이에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경희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KAIST)까지 대학교 세 곳을 지나왔습니다.
천장산 하늘길 안내도.
국립산림과학원 안으로 들어갑니다.
국립산림과학원 안내도
홍릉산림과학연구시험림 내 주요 연구 현황
박석환 회장님은 오늘 답사 일정은 명성황후 초장지이므로 수목원은 빨리 통과한다고 하였는데,
숲 박사 선생님들의 눈길이 자꾸만 여기 저기를 향합니다.
메타세쿼이아와 낙우송의 차이점은?
메타세쿼이아는 글자수가 짝수라서 잎이 마주나고, 낙우송은 글자수가 홀수라서 어긋나기로 난다고 알려줍니다.
의릉 왕의 숲길과 천장산 하늘길을 지나 홍릉 수목원 숲길에서 보약을 많이 먹고 갑니다.
초본식물원을 지나서,
어정(御井)에 도착하였습니다.
어정은 홍릉에 들렀던 고종(高宗)이 잠시 쉬며 목을 축이던 곳이다.
키 작은 나무로 둘러 싸인 아늑한 어정에서 명성황후의 능에 행차했던 황제가 황후를 그리며 잠시 쉬었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사용하던 어정인데도 원형이 아닌 네모난 우물입니다.
어정을 지나 명성황후의 초장지에 도달하였습니다.
명성황후(明成皇后)
명성황후는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16세때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반대파를 규합하여 민씨 정권을 수립하고 개국정책을 주도하는 등 정치적인 활동을 활발히 했다.
일본세력을 추방하려 러시아까지 동원했으나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가 보낸 자객에 의해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 당했다.
사후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홍릉터(洪陵址)
홍릉터는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왕비 명성황후가 뭍혔던 곳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상황후가 시해된 후 이곳 천장산 산줄기 아래에 22년간 안장되었다가 1919년 고종 승하 후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 현 홍릉으로 합장되었다..
여주에서 태어난 명성황후는 8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한양으로 올라가 인현왕후가 폐위시절 생활하였던 감고당(感古堂)에서 1866년 왕비로 간택, 책봉되기 전까지 머물렀습니다.
명성황후 초장지를 나와서 세종대왕기념관으로 갑니다.
세종대왕기념관은 조선 세종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여 이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68년 10월 9일에 기공하여 1970년 11원 준공, 1973년 10월 9일. 개관하였습니다.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世宗 英陵 神道碑)
보물 제1805호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는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52년(문종 2)에 세운 비석이다.
현재 비신(碑身)이 심하게 부식되어 표면의 조각이 떨어져 나가 비문을 거의 알아볼 수가 없는 상태지만, 비문을 지은 정인지와 글씨를 쓴 이용의 이름은 확인할 수 있다.
이수(螭首)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으로 매우 정교하고 생동감이 넘치게 조각되었다.
1469년(예종 1) 영릉을 경기도 여주로 옮기면서 서울 영릉에 있었던 신도비와 석물(石物)을 묻었다.
1691년(숙종 17)과 1738년(영조 14)에 영릉 신도비가 노출되었는데, 논의 끝에 다시 묻어 두었다.
1974년 옛 영릉 터를 발굴하여 비신과 이수를 발견하였으나 비석의 받침돌은 발견하지 못했다.
1999년 2월에 받침돌을 새로 제작하여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다시 세웠고 2004년 6월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진 비각의 전면 가운데 칸에 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비각 앞에서 신도비의 해설을 합니다.
<세종대왕 신도비의 기나긴 여정>
영릉(英陵)은 1450년(문종 1)에 처음 부왕인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 서초구 내곡동) 옆에 조성되었다가 손자인 예종 1년(1469)에 현재의 여주 북성산(北城山) 언덕으로 천장(遷葬)을 하였습니다.
신도비는 피장자의 생몰(生歿)과 업적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기록하는 비석으로, 당시 조선에서는 건원릉, 헌릉, 영릉까지 왕릉 신도비를 조성하고 문종 국상 때 수양대군(세조)이 임금의 업적은 실록에 기록되니 신도비를 세우지 말자하여 그 이후 신도비는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이 비는 영릉이 여주로 천장될 때 다른 석물들과 함께 땅에 묻혔는데 숙종(肅宗) 때 장마로 자연 노출되자 순조(純祖)의 능인 인릉(仁陵) 하단의 서쪽으로 옮겨 묻혔으며 영조(英祖) 때 일시 발굴 재매장 되었다가 1974년 내곡동 구룡산 기슭에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해 최종 발굴되어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습니다.
발굴 당시만 해도 '세종영릉지비(世宗英陵之碑)' 라는 6자의 전액(篆額)과 극히 일부의 비명(碑銘) 글씨가 판별 가능했으나 현재는 각자(刻字)가 박락(剝落)되어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이다.
세종대왕신도비는 한국 왕릉의 마지막 신도비로서 현재 전액과 비명이 남아 있지 않아 서체 연구 자료와 사료로서의 가치는 반감되었으나, 비석의 석질(石質)과 제작면에서 다른 신도비에 비해 진일보한 면을 기지고 있다.
비록 비석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결과적으로 해가 되었지만 대개 청란석(靑蘭石)을 쓴 여타 신도비와 달리 대리석(大理石)으로 제작되고, 이수에는 다른 신도비에 비해 용문(龍紋)이 보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彫刻)된 점 등은 특히 주목되는 부분이다.
쌍룡(雙龍)을 조각한 이수(螭首)와 비신(碑身)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떠받치는 귀부(龜趺)는 아직 발굴되지 않아 현재는 자연석으로 만든 귀부로써 대신하고 있습니다.
구 영릉 석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호
영릉은 세종대왕과 왕비인 소헌왕후를 모신 왕릉이다.
처음에는 서울 서초구에 있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논의가 있어 예종 원년(1469)에 현재 영릉이 있는 여주로 옮겼다.
이때 능을 치장했던 석물은 운반하기 어려워 가져가지 않고 땅에 묻었는데, 1970년대에 발굴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석양, 석마, 망주석, 장명등, 혼유석, 세종대왕 신도비 등 현재 남아 있는 석물은 1974년 이곳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 옮겨왔다.
품목과 수량이 처음과 다르고 일부 부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구 영릉 석물은 조선 초기 왕릉의 규모와석물 배치 방식, 그리고 제작 기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대왕기념관 야외에 세워져 있는 구 영릉 석물들
장명등과 문석인의 모습
장명등은 화사석까지만 남아 있고 옥개석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문석인과 석마
무석인과 석마
난간석의 모습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 영휘원과 숭인원으로 이동합니다.
관리사무소 신축공사 중입니다.
사적 제361호 영휘원(숭인원 포함) 표석
입구를 들어가면 정면에 숭인원이 자리하고, 좌측에 영휘원이 있습니다.
숭인원 홍살문으로 들어갑니다.
숭인원(崇仁園)은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와 의민황태자비(懿愍皇太子妃) 이씨(李氏, 이방자)의 첫째 아들인 이진(李晋, 1921~1922)의 원(園)이다.
이진은 일본에서 태어나 1922년에 황태자와 함께 잠시 귀국하였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에 세상을 떠났다.
순종황제는 이진의 죽음을 슬퍼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숭인원은 순종 황제의 명으로 특별히 원으로 조성되었다.
영휘원의 형식과 비슷하게 조성하였으나 호석(護石, 둘레돌)과 석양(石羊)은 세우지 않았다.
한 길로 된 향로(香路) 옆에는 판위(版位)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향로가 끝나는 곳에 정자각이 있습니다.
숭인원 정자각의 기둥은 원기둥이 아닌 사각기둥으로 세웠습니다.
강(岡) 아래에 산신석이 놓여 있습니다.
비각의 용마루 양쪽을 장식한 취두(鷲頭) 중 오른쪽 취두는 사라졌습니다.
양쪽 추녀마루에는 용머리 모양의 용두(龍頭)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원손숭인원(元孫崇仁園)
사라진 취두 하나가 비각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영휘원으로 가는 길에 어정(御井)이 있습니다.
영휘원의 능침영역이보입니다.
영휘원(永徽園)은 대한제국 제1대 고종황제(高宗皇帝)의 후궁이자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 1854~1911)의 원(園)이다.
순헌황귀비는 1859년(철종 10) 궁녀로 입궁한 후 명성황후를 모시는 상궁이 되었다.
명성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1896년(고종 33) 일본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계획하였다.
1897년(광무 1)에 영친왕을 낳았고 귀인(貴人), 순빈(淳嬪), 순비(淳妃)를 거쳐 1903년(광무 7)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신교육에 관심을 두어 양정의숙과 진명 여학교, 숙명 여학교의 설립을 도왔다.
58세의 나이로 덕수궁 즉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휘원에는 조선시대 왕의 생모 무덤을 조성하던 예에 따라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호석(護石, 둘레돌)을 둘렀으며 문석인, 장명등, 석상,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원래 영휘원 근처 현재의 홍릉수목원 자리에는 1897년(광무 1)에 조성된 명성황후의 홍릉(洪陵)이 있었다.
1911년 순헌황귀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홍릉 근처에 영휘원의 자리를 정한 것이었으나, 1919년 홍릉이 현재의 자리인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옮겨져 영휘원만 남게 되었다.
향로(香路)와 어로(御路)가 조성되어 있고 어로를 따라 들어갑니다.
영휘원 기신제 진설도(陳設圖)
영휘원 정자각은 사각기둥으로 되어있고 배위청 앞으로 홍살문이 보입니다.
정자각 뒤의 신교(神橋)를 건너 강(岡)위에 석물이 살짝 보입니다.
비각(碑閣)
순헌귀비영휘원(純獻貴妃永徽園)
사초지(莎草地) 아래쪽에 산신석이 놓여 있습니다.
능을 관리하던 참봉(參奉)이 머물면서 제향(祭享)을 준비하던 재실(齋室)
오늘의 답사를 마치고 커피 한 잔으로 마무리합니다.
청량사(淸凉寺)
청량사는 천장산(天藏山) 남쪽 기슭에 자리한 비구니 사찰로 예부터 4대 비구니 사찰로 유명한 돌꽂이 승방도 이곳이다.
원래 청량사와 돌꽂이 승방은 별개의 절이었으나, 1895년 일제강점기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황후의 능인 홍릉이 조성하게 되자 홍릉 자리에 있던 청량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고, 돌꽂이 승방도 사세가 기울어 두 절이 병합되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과 불교 운동에 앞장선 만해 한용운 선생이 한때 청량사에 머물렀다고 하며, 같은 시기에 불교계 학자인 박한영(朴漢永)도 이 절에서 기거했으며 대방에 걸린 현판 글씨는 박한영의 글씨로 전해진다.
청량리동의 지명 유래가 된 청량사의 안내문을 읽고 청량리역에서 전철을 타고 안양으로 돌아옵니다.
제35차 마애종 슬로우답사는 숲길을 걸으면서 하루를 보낸 힐링의 시간이었습니다.
첫댓글 강호인해설사님 정성가득하고 훌륭한 영휘원 답사기 잘 봤습니다.
우리 해설사회의 명물기록으로 남겨질 소중한 기록물입니다.
감사합니다~~~
1차사진과 글에 감동하여
틈날때마다 보며 힐링하고 있는데
2차로 올리신 천장산 숲길은
힐링코스입니다.
산길 숲길 걸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여행길~~
어느 찻집에 갔는데 매혹적인 향으로
가득했습니다.
함께 동반한 아름다운분이 침향차
한잔을 사주신적 있어 마시는데
눈이맑아지고 가슴이 뻥뚫리는 느낌을
받아 조금만 사려다가 그 조금이 너무
고가라 못사고 왔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향이라도 맡으러 가야할것 같습니다.ㅎㅎ
찬조제일 우리박금일 선생님의 호박죽과
죽순은 최고지요. 얼마나 꿀맛이었을지^^
행복한만남은 박석환 회장님 덕분입니다.
행복한 만남뒤로 더~~행복은 사진과 글로
힐링만남은 최강 호인선생님 덕분입니다.
두분~~사랑하고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