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회부터는 다분히 제5공화국 필이 날 듯.다음회가 완결이어요.
(이번회 내용 중에 성순과 진옥의 4.19 혁명 데모대 가담은 작가의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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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이정재는 드디어 자신도 정치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고향인 이천을 선거구로 해서 출마할 생각으로 이정재는 자신의 부하 이천일을 불렀다.
"네.부르셨습니까?회장님."
"그래.네가 이천에 가서 이것저것 좀 해 줘야겠다."
그리하여 이정재는 이천을 자신의 정치적 텃밭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 2월 25일....선거유세를 벌이던 민주당의 조병옥 박사가 그만 돌연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3선에 성공했지만....
문제는 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기붕이었다.
라이벌격인 민주당의 장면에 대해 국민들의 동정여론이 심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기붕 의장 각하....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선거구로는 당선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지?그럼 어디가 좋을까?"
"아,이천은 어떻습니까?"
"이천이라....그거 좋겠구먼.허허허~그렇게 처리하게."
곧 곽영주가 이정재에게 설득을 했다.
"정재 형님.형님은 기회가 또 있잖습니까?이번만 양보하시죠."
"영주 너마저 왜 이래?"
그리하여 이기붕과 이정재는 이천을 두고 경쟁하게 되면서부터 둘의 사이는 틀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기회를 재빨리 틀어쥔 이는 다름아닌 평화극장의 임화수였다.
그는 이정재가 동대문상인연합회장직을 사퇴하자 재빨리 그 자리를 낚아채 동대문사단의 최고 오야붕이 되었다.
그리고는 이승만에게 접근해서 점차적으로 권력과 손을 잡으며 마침내 이승만으로부터 수양아들 대접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정재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은거해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1960년 3월.
대대적인 정.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국민들은 진정으로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그러한 것도 잠시....
3월 15일의 선거가 부정과 비리 투성이였음이 밝혀지면서 전 국민의 분노는 폭발했으며....
이로 인해 마산을 시작으로 거의 전국에서 여러 데모가 오고갔다.
그러던 중 4월.한 학생의 시신이 개울 물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끔찍하게도 그 시신의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그 학생의 명찰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김주열'
경찰병력의 과잉진압 중 실수로 오발을 낸 최루탄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데모에 동참했던 김주열 학생의 눈을 관통해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던 것이다.
그러자 전 국민의 분노는 완전히 폭발했고....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 역시 '독재정권 물러가라'라는 피켓과 플랜카드를 제작해 데모를 벌였다.
그리고 그런 고대생들을 누군가들이 어둠 속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유지광이 이끄는 '화랑동지회'였다.
"모두 준비해."
"네.형님."
그리고....고대생들이 막 데모를 끝내고 해산하려던 찰나....
"이봐,학생들!거 쓸데없는 짓들 하지 말고 공부들이나 열심히 해!"
"당신들 누구야?"
"우리?우리 이런 사람들이다!"
이내 고려대학교 데모대 학생들을 잔인하게 구타하기 시작하는 화랑동지회.
이 사건으로 무수히 많은 고려대학생들이 크게 다쳤다.
이른바 '4.18 고대생 피습사건'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더 이상 시국은 학생들만의 데모로 끝나지 않을 기세를 보이고....
다음날인 4월 19일....
전국의 국민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 일제히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모를 벌였다.
그리하여 서울의 데모대는 군인들과 경찰들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며....
군경들의 총,최루탄 등등을 데모대는 화염병과 죽창으로 맞섰다.
그리고 성순과 진옥 역시 이 데모에 동참했다.
"독재정권 물러가라~"
"독재자 이승만은 지금 즉시 물러나라!"
"독재타도!독재타도!"
급기야 성순과 진옥이 소속된 데모대가 경무대 앞까지 치고 올라오자....
이승만은 깜짝 놀랐으며....
이에 경무대 경호실장인 곽영주가 경찰들을 데리고 데모대와 대치했다.
"물러나라!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도대체 이 나라 경찰은 누굴 위한 경찰이냐!"
"뭐야?뭣들 해!쏴 버려!"
곽영주는 이렇듯 권력을 남용해 데모대를 향해 직접 총격을 할 것을 군경들에게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거 돼먹지 못한 놈이로구만 기래!쏠 테면 쏘라우!내래 겁 안 나니끼니!"
성순도 악에 받혀 이렇게 소리를 질렀으나 다른 데모대원들의 함성에 묻혀 곽영주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4월 28일에는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아들이었던 이강석이 이기붕과 박마리아,그리고 이강욱을 총으로 쏘면서...
일가족이 모두 자살해 버렸고.....5월 29일...이승만은 망명길에 오르면서 4.19 혁명은 끝이 나게 된다.
그리하여 1960년 5월 초....장면을 부통령으로,윤보선을 대통령으로 한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이로서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61년 5월 16일.
서울 도심가로 탱크와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대거 몰려왔다.
당시 육사 2기 졸업생도였던 박정희 육군소장이 이끄는 제2군 8기생 부대가
제2공화국 장면내각에 대해 전면적인 쿠데타를 벌인 것이다.
이른바 5.16 군사정변.
제2공화국이 수립된 지 불과 1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민정독재에 이어 또다시 군부독재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군정책임자 박정희 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초헌법적인 임시기구를 만들고 의장직에 앉았다.
그리고 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구악 일소를 위한 방편으로 '깡패 소탕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바로 그 때....
군인들은 깡패 소탕령에 의거해서 은거하며 조용히 살던 이정재를 비롯,
서대문의 최창수와 소공동파의 홍영철,종로파의 심종현,
그리고 동대문파의 내노라하는 간부들을 거의 다 체포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공개수배했다.
수배자 명단에는 이석재가 끼여 있었다.
한편.....성순은 아내 진옥의 간곡한 말을 듣고 드디어 그 오랜 시간 동안 지녔던 복수심과 증오심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리하여 성순은 근처 교회로 갔다.
"목사님~내래 이성순이라요~"
"네.이성순 성도님.무슨 일이십니까?"
"회개하러 왔수다래....이거...받아주시라요...."
성순이 목사에게 꺼낸 물건이란 다름아닌 단도와 권총이었다.
곧 목사는 성순에게 안수기도를 했다.
"오 주여....부디 이 어린양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그리고 성순은 그 날 이후로부터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성순은 어느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 때 이석재가 그 찻집으로 숨어들어왔다.
그리고 석재는 성순을 발견했다.
"거 돌대가리 아니네?반갑다 야~"
"시...시라소니 형님...."
모든 것을 다 용서해줄 것만 같은 성순의 모습에 석재는 예전의 일이 부끄러워졌다.
"시라소니 형님....!!이 못난 아우를....용서해 주십시오....크흐흑~!!제가 잘못했습니다....죽을 죄를 졌습니다...흐흐흑~"
그리하여 석재는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성순에게 용서를 구했다.
"거 내래 님자들 다 용서 했어.기러니끼니 님자들도 죄책감 갖디 말고 열심히들 살라우."
"고맙습니다....형님....흐흑~"
"거 사내가 돼가지고서리 질질 짜기는!!"
그 순간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이성순 씨,이석재 씨.당신들을 깡패 소탕령에 의거해서 체포합니다."
그러나 성순은 이미 주먹계에서 은퇴한 지 오래였던 데다가 지금은 기독교에 귀의해 교회 집사일을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성순은 교회 식구들의 탄원서가 군정에 접수되면서 석방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성순은 그 동안 겪은 일생을 교회에서 모두 간증하기로 하고 교회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다시 군정에서 성순을 조사실로 데려갔다.
"이번엔 또 무슨 일입네까?"
"가 보면 알게 될 거요."
그리하여 성순이 조사실로 들어가니 뜻밖에도 죄수복을 입은 이정재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정재는 성순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때 조사관이 이렇게 질문했다.
"이성순 씨.이성순 씨가 '시라소니'로 유명한 건달이 맞습니까?"
"네.기렇습네다.하디만 지금은 건달이 아니야요."
"뭐...그럼 넘어가시고....1953년에 이정재 씨가 부하들에게 일러서 이성순 씨에게 집단 린치를 가한 적이 있지요?"
그 때 성순은 이정재의 표정을 쓱 봤다.
그는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하며 성순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죄송해하는 표정이었다.
옛말에 화무십일홍이면 권불십년이라 하였던가....
50년대 때는 정말로 승승장구하며 잘 나가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이런 정재를 성순은 힐끔 쳐다보고는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내래 기런 일 없습네다."
"뭐라구요?여보세요.이성순 씨.여긴 중앙정보부 조사실이예요.사실을 말해야 합니다."
"덩말입네다.이정재 이 친구는 내래 어려울 때 도와줬던 친구야요.절대 기런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습네다."
성순은 정재의 허물까지도 용서해 주었던 것이다.
"거 이보시라요.조사관 양반.내래 이 친구하고 할 얘기가 있으니끼니 날래 나가 주시라요."
이러한 성순의 말을 조사관은 수긍해서 조사실을 나왔다.
그 때 이정재는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흐흐흑..."
"이보라우,덩대."
"형님....이 아우를 왜 용서하셨습니까?....이 못난 아우....이 비겁하고 비열한 아우!왜 용서하셨어요?흐흐흑...."
"괜찮아....다 지난 일이지 않네?거 눈물이나 닦으라우."
그리하여 성순은 이정재를 위해 기도를 해 주고는 조사실을 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뒤.....1961년 5월 21일.
이정재,임화수,유지광 등은 목에 이런 팻말을 걸고는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그 팻말의 내용이란 이랬다.
"나는 깡패입니다,국민의 심판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8월 17일.
군사재판 선고공판.
"피고 이정재.사형."
"피고 임화수.사형."
"피고 유지광.사형."
"피고 곽영주.사형."
"피고 최인규.사형."
"피고 신정식.사형."
"피고 이석재.징역 X년 X개월."
"피고 심종현.징역 X년 X개월."
"피고 최창수.무기징역."
그리하여 한국의 도오야마 미쓰루를 꿈꿨던 이정재는....9월 19일....임화수,곽영주와 함께 사형당했다.
그러나 유지광은 사형 집행 직전에 이정재와의 의리를 보여준 점이 박정희 의장에게 호감을 사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1세대 주먹들은 모두 사라지고....
신상사,조창조 등등의 2세대 주먹들은 모두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국토건설단으로 뽑혀 징용당했다.
그리고 성순은 이후 영락교회란 곳의 장로가 되었다.
그리고 1963년.....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대변되던 군정을 마감하고 민정이양을 했다.
그런데 이 민정이양이란 게 겨우 박정희가 군복 대신 양복으로 갈아입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이 때 다시 민주당은 유진산에 의해 신민당으로 개편되었고.....
박정희의 군부 출신 정치가들이 모여 만든 정당은 '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이 되었다.
그러던 중.....삼성그룹이 합성감미료인 사카린을 대량 밀수한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이 1966년의 '사카린 밀수사건'이었다.
어느 날 밤,파고다 공원.
"좀 더 파 봐라."
누군가가 파고다공원 안에 들어와서 뭔가를 퍼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국회.
"에...오늘의 안건은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의장이 이야기를 끝내고 사회를 맡았다.
그러나 이 의장.공화당 출신들 정치인들만 대거 연설발표의 기회를 주었고 이것이 김두한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이보시오!의장!당신 사회를 똑바로 보시오!도대체 말요.공화당 의원들이 지금껏 계속해서 저 연설장을 차지하고 있지 않소?"
"아....그런가요?"
"당신 정말 이거 한 번 부서지는 꼴을 보려고 그래요?내가 당신이 힘없는 노인이라서 참지.만일 저기 누구처럼 유도깨나 썼었다면 벌써 내 주먹이 당신한테 한 방 날렸을 거요."
김두한은 곧 턱을 가리키며 의장을 협박했다.
그러자 의장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는 김두한에게 다음 발언권을 주었다.
그 때 김두한은 무슨 상자를 들고 있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나 김두한이오~나 김두한이!어려서 교동보통학교 2년 다니고 그만뒀다 이 말이오."
그 때 의장이 한 마디 했다.
"김 의원님....말씀 좀 짧게...."
"네!시간은 엄수할 테니 신경 끄세요!어쨌거나 난 그래서 여기 계신 다른 의원님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이게 뭘 뜻하느냐!여기 다른 사람이 못하는 일을 나 김두한이는 할 수 있다 이겁니다.여러분.이거 뭔지 궁금하시죠?이거 아주 소중한 선물이올시다.국민의 채찍이올시다!이게 국민의 사카린이다~바로 이 말이올시다!"
그러자 당내의 국회의원들은 모두 깜짝 놀랐으며 국회 본회의에 참석해 있던
박정희 내각의 국무총리 정일권과 부총리 장기영 역시 김두한의 이 사카린 발언에 대해 무척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언제부터 대기업이 정부와 손을 잡고 밀수를 자행했답니까?이건 정부가 국민을 기만한 거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그러니 이게 어떻게 보면 사기죄란 말이예요!그래서 저는 지금 이 시간부터 이 내각을 모두 피고로 규정하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죄를 지은 피고 말이예요!그러니까 지금부터 이 내각은 내가 주는 이 선물을 고루고루 맛을 봐야 합니다.이게 바로 일제치하 기미년 3.1운동 때 피흘려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그 분들께서 지금 이 한심한 정부한테 주는 거예요.잘들 들으시오.그리고 반성들 해요!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내 의지가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요!국민들은 날 보고 당신들에게 이렇게 전해 달라고 했소!'X이나 쳐먹어!이 새끼들아!'"
곧 김두한은 상자를 열고 있는대로 정일권과 장기영 등에게 뿌리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물의 정체란 다름아닌 오물이었다.
국회오물투척사건.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당시 김두한의 이같은 행각은 정일권 내각의 총사퇴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엄청난 진노를 사게 되었다.
"임자!김두한이 당장 구속시켜."
"네.알겠습니다.그럼....?"
"뭐가 그럼인가?이건 나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야!역모라구!역모!"
그리하여 김두한은 이 때 지독하게 고문을 당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뉴스로 접하게 된 성순.
"거 역시 두한 아우님은 종잡을 수가 없어."
이미 성순의 좋은 벗이었던 이화룡도 병으로 세상을 등진 후였다.
이제 성순의 친구라봤자 다들 국토건설단에 끌려갔거나 혹은 병으로 죽었거나 혹은....깡패소탕령에 의거해 죗값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나마 이영환 정도가 현재 성순하고 연락이 되는 친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 1966년의 명동은 국토건설단의 해체 후부터 정팔이패의 중간 보스였던 신상사가 차지하게 되었다.
첫댓글 와우!! 김두한이 한일중 가장 멋진 일은 국회오물투척사건!!! 그런데 사카린은 단맛을 나도록하는 인공 감미료인걸로 알고있는데;;;
사카린이라~ㅇㅅ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