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는 모든 논란이 해소되었다고 여기고 다시 의사 - 황제라는 본분으로 돌아갔지만, 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기까지는 이후에도 수백 년에 걸쳐 몇 차례의 공의회가 더 필요했다. 아리우스는 죽었어도 그의 논리는 살아남았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논리는 단성론單性論으로 옷을 갈아입고 여전히 적지 않은 지지자들을 거느렸다.
단성론의 위세를 우려한 교회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이단으로 몰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밀어붙여야 했다. 결국 이런 입장은 성부(신)와 성자(그리스도)가 동등한 지위이고 양자 사이를 성령이 이어주며 이 세 가지 위격의 본질은 하나라고 보는 삼위일체론으로 정비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성부 - 성자 - 성령의 삼위가 '따로 또 같이'라면 다소 억지스러운 타협안이지만 애초에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이라고 말하 데서 비롯된 문제였으므로 어차피 그런 정도의 해결책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사안의 본질이 모호한 만큼 그 파문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서방교회는 로마제국이 476년에 멸망한 이후 황제가 없는 대신 교황이 있었지만 비교적 교세가 약했으므로 -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총대주교가 있는 도시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였는데, 로마를 제외한 네 교구가 동방제국에 속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서방교회의 힘은 동방에 밀렸다 - 그 문제가 크게 대두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삼위일체론이 확립된 이후에도 내내 격렬한 논쟁에 시달렸다.
그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대단히 중대한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텃밭을 빼앗기면 새 땅을 개간하려 들게 마련인데, 아리우스가 바로 그랬다. 비록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고 이단의 판결을 받았지만 아리우스파는 오히려 로마제국의 변방에서 더욱 세를 부풀렸다.
제국의 변방이라면 북쪽과 동쪽, 다시 말해 게르만족이 사는 유럽의 심장부와 사막 유목민들이 고향인 아라비아다. 두 지역에는 나름의 전통 종교도 있었으나 그리스도교라면 아리우스파 하나밖에 없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지금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땅은 게르만족의 몇 개 분파가 분점한 상태였다. 무주공산의 상태가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얼마 안 가 갈리아에서는 클로비스가 지배하는 프랑크족이 발언권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남서부의 아키텐에 자리 잡은 서고트족의 툴루즈 왕국이었다. 정면 대결은 만만치 않다고 본 클로비스는 특단의 방책을 구상했다. 세속의 힘 대신 신성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496년에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고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서고트족의 지배층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게르만족이 이미 이단으로 판정받은 아리우스파였다는 사실이다.
클로비스의 모험은 멋지게 성공했다. 툴루즈 왕국의 지배층이 갈리아 원주민들과 분열되었고 여기에 주교들이 가세하면서 클로비스는 서고트족을 이베리아 반도로 말끔하게 축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반석에 오른 프랑크 왕국은 이후 로마 교황청과 찰떡궁합을 이루어 일약 로마제국의 계승자로 발돋움했다.
이 시너지 효과의 절정은 800년 크리스마스에 프랑크의 왕 샤를마뉴가 로마로 가서 교황이 집전하는 대관식을 치른 일이다. 비록 완전한 로마제국의 부활은 아니지만 이로써 서방황제가 다시 탄생했고 이는 나중에 생겨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원형이 된다.
한편 동쪽 변방에서도 아리우스파는 그에 못지않은 세계사적 역할을 담당했다. 철학적으로 신플라톤주의에다 종교적으로 단성론인 아리우스파가 유대교의 고향이 가까운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철저한 유일신앙이면서(신플라톤주의+유대교) 예수 그리스도를 신으로 간주하지 않는 입장(아리우스파)일 것이다.
물론 그 세 가지 사상이 곧바로 종교화되지는 않았지만 7세기에 이 지역에서도 또 하나의 세계종교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그 종교란 바로 이슬람교다.
아랍 - 이스라엘 분쟁이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않았고 2001년에는 9·11 사태까지 발생한 탓에 흔히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배타적이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원래의 배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잉태를 알린 대천사 가브리엘은 이슬람교에서도 마호메트에게 계시를 내려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아라비아식 이름은 지브릴이다).
아리우스파의 영향력을 더 확실히 보여주는 사실은 이슬람교에서 그리스도를 마호메트와 동급인 예언자로 본다는 점이다. 비록 신의 아들은 아니지만 이슬람교에서도 그리스도는 마호메트처럼 신의 강림을 예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렇듯 아리우스파와 단성론은 동방정교에서 수세기 동안 치열한 쟁점이 되었고, 서방교회의 로마가톨릭을 위해서는 교회가 세속의 힘을 얻는 배경으로 작용했으며, 이슬람교의 탄생에도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다면 종교적으로 실패한 것이 오히려 세계사적으로는 더 막중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더 거시적으로 보면 동방제국(동로마제국)은 이후에도 내내 종교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국력이 크게 약화되어 11세기에는 서방의 십자군에게 수모를 당하고 결국 15세기에는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1천여 년에 걸친 역사의 문을 닫게 된다.
종교도 철학의 일부라고 볼 수 있고, 특히 서양의 중세는 그리스도교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교리에 관련된 역사와 지성사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다시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본격적인 철학적 논의로 되돌아가자.
남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