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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30. 묵상글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 고통의 신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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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고통의 신비
고통은 신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고통을 겪고 있기에 뭔지는 어렴풋이 알지만
왜 고통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 말은 이런 뜻도 됩니다.
고통이 왜 있는지 불교가 얘기하는 이유는 명확하기에
불교에서는 고통이 신비라고 할 것이 못 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고통의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기에 신비라고 한다고.
불교의 고통은 자업자득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자기 업보라고 말하지요.
쉽게 얘기하면 다 자기가 잘못해서 고통을 겪는 것이고 누구의 탓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고통은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고 그래서 신비라고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왜 고통이 나왔는지.
다시 말해서 사랑이신 하느님이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지.
왜 착한 사람에게 고통이 있고 악한 사람보다 더 고통이 큰지.
그런데 하느님이 왜 그리하셨고, 하느님이 왜 그러신지를 알 수 없는데,
실은 고통에 대해서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신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오늘 욥기는 왜 고통이 있는지 따지는 욥에게
모든 것이 어떻게 있게 되었고, 어떻게 그리되는지 아느냐고 물으시고,
그 모든 것들은 네가 모르는 영역이며, 하느님 당신의 영역이라고 하십니다.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고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
죽음의 대문이 네게 드러난 적이 있으며 암흑의 대문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신비는 하느님의 비밀이고,
인비 곧 인간의 비밀과 다른 하느님의 비밀입니다.
인간의 비밀도 알 수 없고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데
하느님의 비밀은 더더욱 알 수 없고,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의 비밀을 인간이 알려고 하지 말고, 따지지 말라는 것이
오늘 욥기의 하느님이 욥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오늘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욥은 이제 받아들입니다.
지금까지 욥은 친구의 훈계가 아니라 주님의 답이랄까 음성을 듣고 싶었던 겁니다.
그 이유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신비이어도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고통은 신비이니 알려고 들지 말고,
다 이해하려고 들지 말며
따지는 것은 더더욱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부터 제가 연피정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혹 프란치스코 대축일에는 올리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돌아와 다음주 토요일부터 강론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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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 안에 사랑도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곧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에 대한 불행선언’(13-15절)부분과 ‘파견 받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파견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16절)는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 코라진, 벳사이다. 가파르나움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더 나아가서는 회개하지 않은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을 많이 받고도 회개하지 안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은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도 여전히 회개하는 일에는 더딘 저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 <복음>의 둘째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애태우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는 말씀을 전하는 이가 얼마나 존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고,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를 깨우쳐줍니다. 동시에 파견 받은 이는 파견 받은 분에게 메여 있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파견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말씀을 듣고도 그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는 너희를 보낸 분께 매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매달리지 말고, 보내신 분께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말씀을 품고 있어야 하고, 말씀의 영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파견하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그렇습니다. 파견 받은 우리는 아버지의 영을 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루카 10,16)
주님!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명심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하여도
언제나 저를 보내신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말씀을 품고, 당신의 영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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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개의 삶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물을 찾아가는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살았다면 말을 잘 들은 사람이요, 죽었다면 말을 듣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을 듣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죽음은 누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 언급된 코라진, 베싸이다, 지역은 가파르나움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북동 해안에 삼각대를 형성하고 있고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기적들이 특히 두드러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들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생활하는데 더뎠습니다. 많은 은총을 입은 만큼 새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경고합니다. “심판 때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루카10,15).
사실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 지역으로 유다인들은 이 동네 사람들을 세속적인 관심사에 빠져버린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기네 동네와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보다도 못하다고 꾸중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꾸중을 듣는 것이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거두고 자신의 속을 본다면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쓴 것이, 약이 된다는 말을 새삼 생각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세상의 자녀들보다도 못하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았다면 매를 맞아도 많이 맞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각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1코린4,5).하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에제18,30.로마2,6).
그러므로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듣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잘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들을 봅니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했습니다”(창세6,22). “주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또 그대로 실행하였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욥기1,22). 히즈키야는 “주님께 매달려 그분을 따르는 일에서 돌아서지 않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켰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해주셨다”(2열왕18,6).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예수님은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8).
우리도 말 잘 듣는 사람, 즉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샘을 알려주어도 찾아가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듯 회개의 삶을 살지 않는 자체가 하느님을 떠나 죽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회개할 때 자루를 뒤집어쓰고, 재 위에 앉거나 머리에 재를 뿌린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낸 행위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이나 비난까지도 감내하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진심이 담겼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진정한 회개의 삶으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행은 죄의 결과로 볼 것이 아니라 기회를 무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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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면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곳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는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던 곳에 성당이 있습니다. 지금도 오래된 올리브 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바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을 위해서 깨어 있을 것을 다짐하곤 합니다. 겟세마니 동산 위로는 주님의 눈물성당이 있고, 더 위에는 주님의 기도 성당과 주님의 승천 성당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가 있고, 성전 안에는 주님의 무덤 성당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할 때면 참회의 눈물이 나곤 했습니다. 가나에는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징을 보여 주셨던 혼인잔치 성당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부부들은 혼인갱신 예식을 하곤 합니다. 타볼 산에는 주님께서 거룩하게 변한 성당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의 경당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예언을 대표하는 엘리야의 경당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한 곳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를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빵을 많게 한 기적 성당과 참된 행복을 전한 진복팔단 성당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던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여전히 주님께서 저에게도 물어보는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너 나를 사랑하느냐?’ 저는 베드로 사도처럼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응답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풍랑을 잠재우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내 마음에 드는 욕심과 욕망의 바람이 멈출 수 있도록 기도하곤 했습니다. 물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언제나 어디서나 저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감사드리곤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나자렛에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를 순명으로 받아들였던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 마당에는 각 나라 말로 ‘성모송’기도가 벽에 붙어 있습니다. 성당 가장 깊숙한 곳에는 성모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응답하였다는 작은 경당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종이 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던 성모님의 신앙을 묵상합니다. 저 또한 제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곤 했습니다. 성모님의 성당 위에는 성 요셉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성가정을 돌보았던 요셉 성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성당입니다. 예리코에서는 착한목자 성당이 있습니다. 착한목자인 예수님을 만났던 자캐오의 회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야로 나가서 주님께서 40일간 기도하셨던 것을 묵상합니다. 요르단 강가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장소를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세례갱신 예식을 하곤 했습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만났던 ‘아인카렘’에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성당이 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만났던 곳에는 두 여인의 조각상이 있고, 아름다운 성화가 있는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 마당 벽에는 ‘마리아의 노래’가 각 나라의 말로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했던 목자들의 언덕이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의 문은 작았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기 위해서는 말을 타고 들어 올 수 없기에 문이 작다고 합니다. 베들레헴 성전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왔다면 순례자가 돼서 떠나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돼서 떠나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순례의 의미를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작은 동굴로 들어가면서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베들레헴 성전의 지하에는 평생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던 예로니모 성인의 경당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예로니모 성인이 번역했던 성경이 모태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해서 베들레헴에서 살았던 예로니모 성인의 축일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 3년 동안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제 다시 성지순례를 기다리며 예전에 갔었던 순례의 기억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했던 예로니모 성인의 축일입니다. “복된 예로니모 사제에게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맛들이게 하셨으니 저희도 하느님 말씀에서 생명의 샘을 찾고 구원의 양식을 얻어 더욱 풍요로이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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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젊었을 때부터 ‘완벽한 배우자’가 아니면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노총각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완벽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계속해서 여성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20년이 지나도 이 형제님은 결혼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였습니다.
어느 날, 이 형제님의 지인이 “아직도 완벽한 배우자를 못 찾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님께서는 만났었다고 고백합니다. 지인은 깜짝 놀라서 “그렇다면 왜 지금도 혼자예요?”라고 물었지요. 이 형제님께서는 한숨을 내쉰 뒤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딱 한 번 완벽한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완벽한 남성’을 찾고 있더군요. 그래서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완벽한 배우자만 찾고 있었지, 본인 스스로가 ‘완벽한 배우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실 자기의 완벽함을 채우는 데 먼저 집중했어야 했습니다.
우리 일상 삶 안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대방의 완벽함을 요구하면서, 조금이라도 부족한 부분에 관해서는 철저히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자기의 완벽함 정도를 먼저 봤어야 합니다.
하느님만이 완벽하시고, 그에 반해 인간은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은 기억한다면 남에게 너그럽고 관대한 모습을 늘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즉, 남에는 엄격하고, 자기에게만 관대합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도시들은 율법 학자들의 종교교육이 가장 성행하던 종교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만과 자기도취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했고,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고개를 돌렸습니다. 종교도시였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곳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말을 듣던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완벽하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는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단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히 사랑이 기초해서 했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율법도 모르고 율법을 따르지 않는 잘못된 사람이라고 단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모두는 예수님 말씀처럼 현재 폐허만 남아 있거나 아예 흔적도 없습니다.
자신의 완벽함을 생각하며 남을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본모습을 인정하면서, 다른 이에게 너그럽고 관대한 사랑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그래야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아니라,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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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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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생활화
-하느님 공부;기도와 말씀-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7.8).
꽃도 물주지 않으면 시들 듯 영혼도 그러합니다. 사람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멀어지듯 하느님도 그러합니다. 끊임없이 꽃에 물주듯 영혼에 끊임없는 물주기가 기도와 말씀 공부, 즉 하느님 공부이고, 영혼도 끊임없이 하느님을 만나야 가까워지고 건강해지니 이래서 역시 한결같은 기도와 말씀의 하느님 공부입니다.
주님을 만남과 동시에 이뤄지는 회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주님 만남을 통해 주님을 닮아 사랑과 순수,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기쁨과 평화의 사람이 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회개 은총이 너무 차고 넘칩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의 생활화, 일상화, 습관화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영혼 건강에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모든 수행이 그러하듯 끊임없는 회개 역시 의식적 영적훈련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회개 은총에 감격한 제 자작 고백 기도시가 다음 행복기도로 일명 예닮기도로 부르기도 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기도와 더불어 참 많이 나눈, 2018년 성령의 은총으로 탄생한 기도문입니다. 어제도 서교동 성당 자매님들과 나눴고 반드시 낭송하여 바치도록 합니다.
주님과 만남의 기쁨, 회개의 기쁨을 노래한 감사와 감격에 넘친 사랑 고백의 기도시입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예수성심상 앞을 지날 때, 자주 바치는 기도문입니다. 좋은 시나 기도문은 늘 읽어도 새롭고 회개를 촉발합니다. 영혼을 맑고 밝게 아름답게 향기롭게 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며 치유하십니다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새벽 기도하는 마음으로 강론에 옮겨 쓰니 감동이 새롭습니다. 이런 주님 사랑의 고백기도가 주님을 만나게 하고 회개를 촉발시켜 영혼을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오늘은 9월30일, 9월 순교자 성월의 마지막날이자 위대한 사제 학자 성 예로니모 축일입니다.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교황 대 그레고리오와 더불어 서방 4대 교부중 한 분입니다.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 9월 순교자 성월이 끝나면 내일부터는 10월 묵주기도 성월의 시작입니다. 늘 기도와 회개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에 충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모든 성인이 그러하듯 성 예로니모의 삶도 참 파란만장한 회개 여정의 삶이었습니다. 그리스어 ‘히에로니모스’의 이름 뜻대로 ‘신성한 사람’으로 시종일관한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노숙했던지 ‘태어날 때부터 노인이었다’고 말했답니다.
중병을 앓던 그는 하느님이 내린 징벌이라 생각하여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 후 병이 치유되자 온 힘을 다해 성서를 번역합니다.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란 말도 성인의 고백입니다. 340년에 태어난 420년에 선종하기 까지 80세 천수를 누린 성인이었고, 391년부터 406년까지 신구약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했고, 이 불가타판 성서는 5세기 이후 널리 보급되었으며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이후는 교회의 공식적인 성경으로 인정합니다.
장장 16년에 걸친 성서번역을 통해 얼마나 치열한 하느님 공부에 회개의 삶이었을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열렬한 사랑은 성덕의 잣대입니다. 성인은 참 까다롭고 불편하고 까칠한 분이었기에 인간 관계는 그리 원만치 못했지만 그의 항구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위대한 성서 번역의 위업은 그대로 그가 성인임을 입증합니다.
또 하나 흥미있는 것은 가시가 발에 박힌 사자의 발에서 가시를 뽑아주자 사자는 평생 성인을 떠나지 않고 성인곁에서 성인을 보호했다는 전설같은 일화입니다. 성인은 학자, 학생, 고고학자, 서적상, 사서, 번역가, 수덕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이런 회개의 여정에 충실했던 성인의 삶이 우리의 회개에, 하느님 사랑에, 하는 공부에 더욱 치열하고 열중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욥기 38장은 욥이 주님으로부터 친히 하느님을 배우는 참 치열한 공부시간에 회개시간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로 시작되는 성서는, ‘네가 누구냐?’ 물으신후, 당신이 땅의 주재자, 바다의 주재자, 빛과 어둠의 주재자 이심을 밝히시면서 욥을 단단히 공부시키며 회개에로 이끄십니다. 일단의 하느님 공부가 끝나자 곧장 이어지는 욥의 겸손한 회개도 참 아름답습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욥의 군더더기 변명없는 회개의 고백이 참 멋집니다. 하느님 공부와 더불어 하느님을 만나 회개하는 욥입니다. 오늘 복음은 숱한 기적에도 회개에 참으로 무딘,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세 고을들에 대해 불행을 선언하는 주님이십니다. 이는 저주가 아니라 탄식이며 마지막 회개에의 호소입니다.
마지막 대목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 수행에 동참한 당신 제자들인 선교사들의 직무의 중대성을 상기시키며 우리 모두 그분들의 말을 들으며 회개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사람들, 그리스도의 사람들, 교회의 사람들인 주님의 제자들이자 선교사들을 겸손히 환대하고 사랑의 회개로 응답해야 함을 배웁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139.24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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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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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르첼리노M. 2022.09.29 09:29
거룩함의 진실
나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반사해 줄 깨끗하게 닦인 내면의 거울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 거울이 내 삶의 중심이며, 하느님이라는 거울에 비춰서 얻은 앎으로 나를 통하여 반사되는 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받아들임이 없이 반사된 선은 없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연결이 없으면 하느님을 증명하거나 선을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영의 활동을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영의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의 모범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관심사와 관계 맺은 방식, 곧 측은한 마음으로 돌보시는 하느님을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와 피조물을 통해 반사된 선을 바라봄으로써 영감을 받아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나를 통해 반사되도록 도구적 존재로 인식하는 앎이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은 피조물과 너와의 관계적 대면을 통해서 일하시며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거울에 비춰봄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육화의 도구로서의 선은 항상 그렇게 관계 속에서 전달되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이 (야고보 1,25) 해방해주는 사랑과 받아들임으로 우리를 반사해 주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허용하고 놓아주는 자유로 상대방을 해방한다. 묶여 있거나 붙잡혀 있거나 단절되어 있으면 너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거룩함에 대한 앎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과정에서 참여로써 경험된 지식이 아니라 남들로부터 전해 들은 객관화된 지식에 따른 앎으로 대체 되다 보니 하느님은 하늘에만 계시게 되었다. 내 삶에 필요한 복을 받기 위한 이용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예배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잘 지키고 많이 바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복을 주실 것이리라는 막연한 믿음만이 남게 되었으며, 하느님을 매우 인색한 심판관으로 만들어 많이 바치면 많이 주고 조금 바치면 주금 주며, 안 바치면 아무것도 주지 않으시는 분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희생을 즐기시는 하느님, 절대 군주 같은 하느님으로부터 처벌을 면하고 보상을 받으려면 그에 합당한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이 늘 마음속에서 다급하게 재촉한다고 느낀다. 그러다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빠지면 희생이 모자란다고 느끼면서 더욱 많은 기도와 희생과 재물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의무감에 따라 숙제처럼 기도하거나 어떤 기도를 하면 무슨 은사를 받는다는 식으로 기도가 거래의 수단처럼 되어버렸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나로부터 출발했기에 종교심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관계 안에서 생명의 물줄기를 대주고 선을 선택하도록 깨달음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며,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이 우주 안에 모든 피조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반영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잊어버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말씀하시는 말씀을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처럼 객관화된 지식을 갖고 하느님을 알려고 했으나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직접 참여해서 얻은 지식이 아니기에 스마트 폰에 떠다니는 지식이 되고 말았다. 율법과 도덕적 성취를 가장 우선시했던 율법 교사와 바리사이의 종교적 행위처럼 외적으로 드러나는 기도의 숫자와 재물과 재능봉사와 희생을 셈하면서 그것이 거룩한 일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기도와 희생들이 겸손하게 낮추고 내려가서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거나 자유를 주기 위해 허용하고 놓아주는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관계로 만들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을 배우고 닮으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관계 안으로 흘러가도록 기쁨을 발생시키는 “자유를 주는 법”을 행하는 것이 거룩함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은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선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온 선이 관계 안에서 흘러가게 하는 것이야말로 거룩함이며 의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이를 막거나 단절시키는 것이 악이며 죄이다. 이기적인 탐욕과 지배를 위한 가치체계로 무장한 사람들은 눈앞의 이익과 즐거움과 편안함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든 관계를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손익 계산서를 손에 쥐고 있다.
거룩함의 진실과 마주하는 일상의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삶이다. 응답으로 하는 기도는 단절된 관계의 변화와 회복을 돕는 희생과 재능과 재물의 봉헌, 용서를 위한 결단과 용기 있는 대면에서 구체화 된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응답으로 하는 것이지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응답으로 하는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이 나를 도구 삼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며 일용할 양식으로 상징되는 각 개인의 모든 필요성이 하느님의 무상성 안에서 인류의 보편적 구원에 이바지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관점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이 보편적 구원에 우리는 선으로 참여한다. 그러므로 관계 안에서 실천하려는 행동하는 자비야말로 거룩함의 진실이다. 덕은 남이 성장하도록 돕는 예술이며, 내어주는 몸과 쏟아 내는 피는 우리의 일상의 관계들이다. 관계의 현장에서 우리가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일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나를 통하여 너와 피조물의 관계 안에서 분출되는 기쁨에 달려있다. 성프란치스코는 “정배가 되고 형제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 그분을 관계 안에서 낳는” 일이 회개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믿는 영혼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우리는 그분의 정배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마태 12,50)
우리가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1코린 6,20)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입니다. 거룩한 모범과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마태 5,16)
(성프란치스코가 모든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Ⅱ 51-53)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받아들이는 그 움직임이 우리 자신을 알고 받아들이게 한다. 하느님의 손에 내 자유를 맡겨드림으로써 선하고 충만한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이다. 거룩함의 진실을 우리의 관계로 만드는 일상이야말로 회개하는 인간이 할 유일한 생존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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