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7. 7 맥추감사주일
예배로 부름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4-15)
예배 기원
해가 돋는 데서부터 해가 지는 데까지 온 땅의 백성들에게 영광을 받으실 하나닙!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저희가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은혜를 사모하는 심정을 헤아려 충만한 은총을 내려 주옵소서. 지친 몸에 안식을 주시며, 상처 난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주옵소서. 오만한 자들은 주님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 하셨으니 저희로 더욱 겸손하고 낮아진 마음으로 이 예배에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큰 영화로신 주(35장) / 427-429장
고백의 기도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심으로 저희들은 일 만 달란트 빚을 팅감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큰 용서와 사랑을 받은 저희건만 우리는 동시에 일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허물에 대해서는 목을 잡고 위협하며 용서하지 않는 잔인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기도할 때마다 무조건적인 용서를 기대하고 으면서도, 이웃을 용서할 때에는 너무나도 많은 조건을 요구하는 모순 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희는 돌아온 둘째 아들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존재이건만 다른 교우들이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올 때에는 큰 아들처럼 불평하고 화를 내며 기득권을 주장하였습니다. 주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여 이웃에게 아픔을 주며 살고 있는 저희의 미련함을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신 5:33)
제목: 감사는 나눔입니다.
본문: 눅12:13-21
☞ 마음 문을 열며
사막의 수도사 에바그리우스는 탐욕의 원인이 “자신을 지키고 삶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탐욕이라는 마귀는 “남은 긴 노년기, 일할 수 없는 상황, 예측할 수 없는 흉년, 병, 빈곤의 쓰라린 현실, 필요한 것을 남에게 의지하게 되는 처참함”에 대한 근심을 조장한다고 했습니다.
1. 탐심, 행복 사기꾼 & 나눔의 방해자
에바그리우스의 관점에서 볼 때 어리석은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재물로 내일을 보장받으려 한 것입니다. 물론 내일 필요한 재물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는 밭의 풍성한 소출로 우선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하나님을 의지해 제물을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재물의 소유자라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그의 생명의 소유자셨기에 그날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셨습니다(눅 12:20).
둘째, 그의 어리석음은 이웃을 생각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추수와 더불어 요구되는 것은 절기를 통한 하나님과 이웃의 기억과 드림이었습니다.
유월절을 비롯한 주요 3대 절기인 칠칠절과 초막절을 지킬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헤아리고, 힘을 헤아려 예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신 16:10) 같은 성에 거하는 레위인, 객, 고아, 과부, 노비까지 기억해 즐겁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했습니다(신 16:11, 14).
매년 이어지는 소출과 타작은 반드시 하나님과 사람을 기억하며 ‘함께’ 즐거워하는 행위와 긴밀하게 연결됐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처음 거둔 곡식과 처음 깎은 양털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하나님이 택하신 레위인 제사장들에게 주게 하셨습니다(신 18:1-5).
더 근본적인 것은 추수가 끝나기 전, 추수를 하는 과정에서조차 이스라엘 자손은 이미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어야 했습니다.
감람나무를 떨고서도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도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집주인의 소유가 아니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어야 했으며, 남은 것은 그들의 소유였습니다(신 24:19-22).
이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약속의 땅에서 탐욕 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길은 하나님과 이웃을 기억해 소유를 구별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서 수확할 때마다 절기에 따라 정기적으로 하나님을 잊지 않고 구별해서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난한 이웃들을 잊지 않고 나누며 공급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오늘날 노후 빈곤을 두려워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정확히 간파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에 따르면, 은퇴 후 20년을 생각한다면 6억 4천만 원의 자금을 준비해야 하고, 은퇴 후 30년을 살아야 한다면 9억 6천만 원의 노후 자금을 준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 벌리지 않고 그나마 떳떳하게 노후를 맞이하는 것은 품위 있는 노년 생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경쟁적인 노후 준비에는 온통 생존을 위한 경쟁적인 축적이 있을 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도, 감사의 마음도, 나눔으로써 더 받게 된다는 진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중심적인 축적과 탐욕만이 자신의 노후를 보장할 수 있다는 완고한 마음, 다른 무엇도 믿을 수 없어 오직 자신의 현재 노력에만 값어치를 두고, 자기 노력으로 얻은 것은 전적으로 자기 뜻대로 쓸 수 있다는 자기 소유의 철학이 현대인들의 마음에 암묵적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사람들이 원하는 한 가지는 행복이라 했으며, 부를 창출하면 그들은 행복해질 것이라는 착각이 지속되는 한 경제 발전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대인들의 믿음과 달리 물질적 풍요는 반드시 인간 개개인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으며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지도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있을 뿐입니다.
행복심리학자인 미국의 소냐 류보머스키에 따르면, 1940년대에 미국가정의 약 30%는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집에서 살았으나 그들의 행복 수치는 온갖 최신의 전자 제품들을 완비한 현대의 행복 수치보다 높았습니다.
영국의 BBC보고에 따르면, 영국은 1950년대 52%의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했던 것에 비해, 오늘날 1년 수입이 세 배나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36%의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응답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가져오는 행복의 정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미미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가난이 불행을 일으킨다는 핑계 역시 의심받아 마땅합니다.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소유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 그것은 행복의 경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행복과학자들의 결론입니다.
현대 과학자들의 연구 역시 이 같은 결론을 뒷받침합니다.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친절한 마음을 동반한 너그러운 나눔이야말로 한 사람이 장기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지름길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크고 작은 행동들을 통해 다른 사람을 배려할 때 인간의 뇌에서는 도파민이 생성되고 뇌의 보상 회로가 활성화된다”. 즉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 커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는 이런 면에서 세 번째 오류를 범합니다: 즉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라는 그의 마음은, 현대 행복과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쉬고 마실 수는 있어도 즐거움까지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참된 즐거움은 이웃 사람들에 대한 나눔에서 비롯되는데, 그는 그것을 착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는 대신,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큰 재산을 둘러싸고 상속 싸움을 시작하는 것과, 여러 해 쌓아 둔 그의 곡식들은 더운 날씨에 상하고 벌레가 일었을 것과, 그의 건강이 쇠함에 따라 인생의 낙이 줄어들었을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즐거움은 마땅히 그리고 오직 자신에게 재물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볼 때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2. 자족(自足)과 지족(知足), 나눔의 시작
나누어 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약 시대의 희생제사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나누어 주는 제사가 가능한 것은 풍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장은 나눔의 제사를 권면하면서 동시에 현재 소유한 바를 ‘족한 줄로 알라’라고 명합니다(히 13:5). 그것이 나눔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은 쉬워도 실천은 어려운 것이 나눔입니다.
여기서 나눔을 방해하고, 만족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인간의 두 가지 감정이 명시됩니다.
첫째는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 13:5). 둘째는 돈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히 13:6).
돈은 한편으로 인간의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기에 아까워 나누지 못하게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돈에 궁핍하면 남에게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 두려워함으로 자기 지갑을 닫게 만듭니다.
현재의 재산과 소유에 대해 만족하는 마음은 나눔의 시작이 되며, 그것을 만족하게 여기는 마음은 나를 도우시는 주께서 모든 소유와 만물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돕는다는 믿음과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득은 만족에서 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외와 사랑, 순종을 포함하는 참된 경건은 현재의 모습에 만족한 데서 온다고 말합니다.
만족하는 사람은 현재 자신이 받아 소유한 것이 충분하다고 여기며 타인의 몫을 넘보거나 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그 외의 모든 것에 무관심한 마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족에 대해서 ‘먹을 것과 (주거를 포함한)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딤전 6:8)이라고 연이어 부가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입을 것’을 뜻하는 헬라어 ‘스케파스마타’(σκεπασματα)는 의복만 아니라 주거를 함께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만족과 감사의 기준은 먹을 양식, 주거, 의복이며, 나눔의 출발점이 되는 만족도 바로 이 지점에서 일어납니다. 만일 이 지점에서 나눔을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재산과 돈을 소유하려는 것은 시험, 올무, 해로운 욕심을 부르고, 돈을 사랑함으로 미혹을 받아 많은 근심으로 자신을 찌르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딤전 6:9-10).
이 불만족의 미혹은 첫째, 현재 상태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과, 둘째, 미래에 더욱 부하게 되려는 욕망을 포함합니다. 현재의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사랑했던 바리새인들과 같이(눅 16:14) 믿음에서 떠나는 방황자가 됩니다.
미래에 적극적으로 더 부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이처럼 돈에 대한 사랑과 부에 대한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섬김과 나눔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3. 돈을 사랑하는 자의 특징은 완고함입니다.
그는 나눔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현재에 대한 만족조차 거부합니다. 심히 큰 부를 소유하고 있던 마온 사람 나발은 돈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양털 깎는 잔치의 떡과 고기를 나누어 주기를 거절하며 조금도 나누려 하지 않은 완고한사람이었습니다(삼상 25:10-11).
그는 자신이 지정한 양털 깎는 자들 외의 사람들에게는 조금의 음식도 나누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그네를 영접하라’는 신명기의 말씀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탐욕이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자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나발은 많이 가졌지만 더 지켜야 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밤낮 나발의 종들을 선대하며 그의 재산을 지키는 담이 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 나발은 조금도 만족함과 감사함이 없이 맹목적으로 자신의 재산과 부를 지키려 했습니다.
결국 그는 다윗이 무장하고 온다는 소식에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죽고 말았습니다(삼상 25:37-38). 나눔이 없는 완고함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사안입니다.
한편, 동시대의 사울 왕은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더욱 부해지려는 욕망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집안은 이미 큰 재산을 가진 자산가 집안이었습니다(삼상 9: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전쟁을 통해 더 많은 이득을 얻으려 한 탐욕과 완고한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불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아말렉 정복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했습니다(삼상15:9).
선별적인 순종은 계산된 불순종입니다. 계산된 불순종은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탐욕과 혼합시키는 죄입니다. 자기 속의 탐욕을 감추기 위해 마치 하나님의 명령에 더 잘 순종하는 것처럼 명분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비록 사울 왕은 여호와께 제사하려 한 것이라 핑계했지만, 사실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해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삼상 15:19).
그는 결국 탐욕으로 인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점치는 것과 같은 죄를 저지르고, 완고함으로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고, 하나님은 그를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삼상 15:23).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 모두가 풍족하게 누리고도 남을 자원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누리는 자원의 차이는 큽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자원이 넉넉하고 풍족해지면 재물의 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듯 마음이 높아질 위험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 6:17).
여기서 사도 바울의 묘사는 영적으로 매우 날카롭습니다. 그는 부자들을 가리켜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이라 구별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저 세상의 부한 자들’과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이 땅에서만 부자였으며, 하나님께는 인색해서 다음 세대에는 빈곤한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끝나게 될 이 세대에 사는 부자들은 소유의 많음이 때로 신속하게 사라질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재빠르게 스쳐가는 재물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많은 재물에 시선을 머무르며 만족하는 순간,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높거나 더 낫다는 교만한 마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와 탐욕을 가진 모든 인간 중에 남보다 많은 자기 재물의 소유를 확인하는 순간 마음을 높이지 않을 만큼 겸손하고 순수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순종해야 할 주님의 명령이 필요합니다.
오는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소유나 돈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딤전 6:17). 빈손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얼마만큼이든 재물이 주어져 있다면, 그것은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람은 받은 것을 즐거워하며 누리되, 자신의 애정과 신뢰를 전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는 것은 주어진 분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자들은 또 다른 즐거움, 즉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돼야 합니다(딤전 6:18b).
너그러운 사람은 나눔을 거부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누어 주는 청지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하게 돈을 벌고, 그것을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베푸는 것을 ‘공’(功)이라 하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덕’(德)이라 하며 공덕 사상을 말합니다.
공덕이란 선을 행해 보배로운 결과를 얻는 것을 말하며, 선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푸는 모든 행위, 혹은 마음 씀씀이가 공덕이 돼 자신에게 이익을 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그 베풂에 반드시 돈이 들지는 않으며 얼굴의 화색, 사랑과 칭찬의 말, 따뜻한 마음, 호의가득한 눈, 무거운 짐을 들어 줌, 자리를 양보함, 마음을 헤아려 도움 등등이 공덕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무형화된 배려를 공덕이라 말한 것은 매우 세련되고 고상한 도덕적 덕목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석가는, 하는 일마다 안 되는 현재의 불행과 실패의 고통이 공덕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 말하며 이 땅에서 보상을 얻고 불행을 피하기 위해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 갈무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나눔과 베풂이 공을 세우거나 구원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지 않습니다. 구제와 나눔이 선한 일이며 칭찬받을 덕목이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은혜와 본질적으로 연결돼야만 합니다.
모든 선행은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받으시되,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요 나눔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흔적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선물을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기는 선한그리스도인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