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9일(일),
오늘은 제36차 마애종 슬로우답사일 입니다.
석계역에서 10시에 만나 버스를 갈아타고 서울 태릉과 강릉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번 답사는 태릉과 강릉 숲길 개방에 맞추어서 답사 일정을 잡았습니다.
숲길 개방 기간은 2024년 5월 16일(목)~6월 30일(일), 매주 월요일 휴관,
개방 시간은 9시~17시(입장마감 16시) 입니다.
종합안내도를 보면 왼쪽의 태릉과 오른쪽의 강릉 사이의 숲길이 개방구간입니다.
조선왕릉은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태릉과 강릉은 사적 제 20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입장표를 끊고 들어갑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조선왕릉전시관이 있습니다.
조선왕릉전시관(朝鮮王陵展示館)은 2009년 6월 30일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된 것을 기념하여 2009년 12월 24일에 개관하였습니다.
이 전시관에서는 조선 왕조의 500여 년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조선왕릉의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릉 전시관 앞 뜰에는 옛 완친왕 묘의 석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완친왕은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과 영보당 귀인 이씨의 아들 완친왕(1868~1880)의 옛 무덤에 있던 석물입니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갑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世界遺産 朝鮮王陵)
조선왕릉은 조선(1392~1897)의 왕과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1897~1910)의 황제와 황후 73명의 무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선왕릉은 모두 42기가 있는데, 이처럼 500년 넘게 이어 온 왕조의 모든 왕과 왕비의 능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입니다.
2009년에는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왕릉 조성과 관리에 효(孝)와 예(禮)를 갖추어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풍수 사상에 따라 최고 명당에 왕릉 자리를 정하고 주변 지형과 경관을 그대로 살려 왕릉을 만들었습니다.
조선왕릉은 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능침 공간, 산 사람들이 제향을 올리는 제향 공간, 그리고 이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진입공간으로 나뉩니다.
이 공간들은 각 목적과 원리에 따라 독특하게 지어졌으며, 건물과 석조물은 당대 가장 높은 수준의 기술과 기교로 만들어졌습니다.
왕릉을 짓고 관리하는 일을 상세하게 적은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고, 지금도 각 왕릉에서는 해마다 제향을 지내며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조선왕릉은 이처럼 '탁월한 보편적 가치(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기준)'를 지닌 세계인이 함께 누리고 보호해야 할 유산입니다.
세계의 왕릉(世界遺産 王陵˙皇陵)
● 중국 명과 청 시대의 황릉 : 2000년 둥재
● 일본 모즈·후루이치 고분군 : 2019년 등재
● 베트남 후에 역사지구에 포함된 카이딘 황제릉 : 1993년 등재
● 이집트 멤피스와 네크로폴리스-기자에서 다슈르까지의 피라미드 지역 : 1979년 등재
조선왕릉 분포도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을 말합니다.
42기의 조선 왕릉 가운데 북한에 있는 제릉(齊陵-태조 첫 번째 왕비 신의고황후)과 후릉(厚陵-2대 정종과 정안왕후)을 제외한 40기의 왕릉이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조선 왕릉은 풍수지리 사상으로 최고의 명당과, 효(孝) 사상으로 한양 도성(漢陽 都城)에서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도록 도성 십 리 밖, 백 리 이내에 조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예외로, 영월 장릉(莊陵)은 폐위된 후 유배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유배지 근처에 조성되었고,
세종의 여주 영릉(英陵)은 뱃길로 하루만에 다녀올 수 있었기 때문에 여주로 천릉(遷陵)하였으며,
사도세자와 정조의 융건릉(隆健陵)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에 정하면서 신하들이 거리상의 이유로 반대하자 '지금부터 수원은 백리다'라고 하면서 조성을 하였습니다.
조선왕릉 40기의 위치와 조성 및 천장(遷葬)의 사연을 설명하는 박석환 회장님.
조선왕실 무덤의 종류-능, 원, 묘
능(陵) :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
원(園) : 왕의 친부모, 왕세자와 왕세자빈,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무덤-무석인이 없슴,
묘(墓) : 왕족과 후궁, 폐위된 왕과 왕비의 무덤-제향공간이 없슴
조선왕릉 공간 구성
● 진입공간(進入空間) : 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 영역으로 산자들의 공간입니다.
왕릉이 시작되는 곳임을 알리고, 왕릉을 돌보고,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입니다.
● 제향공간(祭享空間) : 산자와 죽은자가 만나는 공간입니다.
인사를 드리러 오는 후손들과 신이 되신 선조가 만나서 함께 즐기는 곳입니다.
● 능침공간(陵寢空間) : 신(神)의 영역으로 능의 주인께서 쉬고 계신 공간입니다.
재실의 기능(齋室 機能)
재실은 왕릉 관리자인 능관(陵官)이 일하는 건물로, 넓게는 제향을 준비하는 공간을 뜻합니다.
제향을 준비하는 공간은 제향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 제향에 사용되는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향안청)으로 나누며, 각 공간은 행랑(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과 담장으로 구분합니다.
홍살문(紅箭門)
홍살문은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는 구실을 하며 주로 사당(祠堂)이나 관아(官衙), 향교(鄕校)나 서원(書院), 왕릉 등에 세웁니다.
대개 붉은 칠을 한 기둥 두 개 위에 가로대를 놓고 화살 모양의 나무살을 가로대 위에 꽂으며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과 삼지창 장식을 합니다.
왕릉의 일꾼들(王陵 守僕)
조선시대 왕릉을 관리하는 능관을 돕는 일꾼으로, 서원, 청직, 수복, 부목 등을 두었습니다.
수복(守僕)은 매일 능침과 정자각, 비각, 수라간을 청소하고 밤낮으로 정자각 뜰에서 능을 지켰습니다.
이들은 능관에게 매일 아침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하고 저녁에는 숙직을 보고하였습니다.
이들이 머무는 수복방(守僕房)은 수라간 맞은편에 있으며, 실내에는 온돌을 깔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수라간(水剌間)
수라간은 왕릉 제향에 필요한 음식을 만드는 건물로, 수라청 또는 신주(神廚)라고도 합니다.
수라간에서는 아궁이가 있어 밥을 짓거나 탕을 데우는 등 간단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정면 2칸 또는 3칸의 작은 건물로, 정자각 앞뜰에 수복방과 마주 보게 지었습니다.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왕릉에서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침전(寢殿)이라고도 합니다.
정자각은 제향 음식 등을 차려 놓는 정전(正殿)과 제례를 올리는 배위청(拜位廳)이 합쳐져 있는데, 건물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丁-고무래 정'자와 같아 정자각이라 불렀습니다.
왕릉에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경우에도 정자각은 하나를 세우고 제향을 함께 지냈습니다.
대한제국 때는 침전 안에 집 모양 장식인 당가(唐家)를 설치하면서 건물의 규모를 늘려, 건물의 모양이 'ㅡ'자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조선왕릉 제향 준소상(尊所床)
준소상은 준소에 놓는 상입니다.
준소란 제향을 지낼 때 신에게 올릴 술을 담은 항아리를 놓는 자리를 말하며, 왕릉 제향에서는 정자각의 배위청 동쪽에 둡니다.
왕릉에서 선왕과 왕비의 기일에 지내는 제사에서는 술잔을 세 번 올리므로 이에 맞추어 준소상에도 산뢰(山雷)라는 술항아리 3개를 둡니다.
산뢰에는 청주(쌀, 누룩, 물로 빚어 만든 맑은 술)를 담고, 멱(冪)이라는 덮개를 덮은 후 술 뜨는 국자인 작(勺)을 올려둡니다.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3잔의 청주를 담은 산뢰(山雷-술항아리)에 멱(冪)을 덮고 작(勺-국자)을 올려 두었습니다.
제수 진설(祭需 陳設) 모습
이 상차림은 봉상시에서 1873년에 펴낸 『태상지(太常誌)』에 나오는 '왕릉에서 기일에 지내는 제향 상차림 그림 [諸陵忌晨祭陳設圖]'를 재현한 것입니다.
축상(祝床) 위에 축문을 올려 놓고, 향상(香床) 위에 향로(香爐)와 향합(香盒)을 올려 놓았습니다.
안쪽에서 보면,
세 잔의 술잔(爵)과
면(麵), 잡탕(雜湯), 전증(煎蒸), 시접(匙楪),
9병(九餠-아홉 가지 떡),
6과(六果-여섯 가지 과일),
산자(饊子-찹쌀가루로 만든 유밀과) 다식 등을 진설합니다.
신도비(神道碑)와 표석(表石)
왕릉에 세워진 비석에는 신도비와 표석이 있습니다.
신도비에는 왕의 업적을 나열한 긴 글인 서문과 업적을 찬양하는 노래글을 새겨넣었습니다.
신도비는 북한에 있는 환조(桓祖-태조의 아버지) 정릉과 태조의 첫 번째 왕비인 신의왕후의 제릉(齊陵)을 시작으로 태조의 건원릉, 태종 헌릉, 세종 영릉(英陵)까지 조선 초기에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문종의 현릉을 만들 때부터 왕의 업적은 실록에 기록되니 신도비가 필요없다는 주장에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능침 공간의 구성
왕과 왕비의 봉분이 있는 곳인 능상과 침전인 정자각을 합쳐 능침(陵寢)이라고 부르며, 능상 주변만을 능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능침 공간은 3개의 단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조선왕실의 국상(國喪)
상례(喪禮)는 사람이 죽은 뒤 치르는 의례를 말하며, 국상은 왕이나 왕비가 돌아가셨을 때 치르는 상례입니다.
조선왕실의 상례는 다섯 가지 국가의례 가운데 흉례(凶禮-나라의 슬픔을 애통하고 위로하는 의례)에 속한다.
조선에서는 국왕부터 서민까지 모두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상을 치렀습니다.
국상 역시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이를 슬퍼하며 시신을 능에 모시고, 신주(神主-죽은 이의 영혼을 모시는 나무패)를 만들어 왕실 사당인 종묘에 모시는 등의 모든 절차를 치르는 데 약 27개월이 걸립니다.
이때 복잡하고 긴 국상을 빈틈없이 치르기 위해 임시 관청인 도감(都監)을 설치했습니다.
● 빈전도감(殯殿都監) : 발인 전까지 약 5개월간 왕의 시신을 모셔 놓는 곳인 빈전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 국장도감(國葬都監) : 장례를 총괄하며 발인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만들고 빈전에 모셨던 재궁을 왕릉으로 옮기기까지 모든 의례를 담당합니다.
● 산릉도감(山陵都監) : 산릉도감은 돌아가신 왕을 모신 무덤인 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입니다.
국상이 난 후 약 5개월 동안 명당을 골라 왕릉자리를 정하고, 산릉 일대의 토목공사와 정자각 등의 건축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또 각종 석물을 만들어 설치하고, 장례가 끝나면 왕릉 주변 환경을 정리하는 등 왕릉 조성에 필요한 모든 일을 맡았습니다.
왕이 돌아가시면 빈전도감을 설치하여 시신을 모십니다.
상례 때 혼령(魂靈)을 모시는 신주(神主)는 두 번 만듭니다.
산릉도감에서 5개월 동안 능(陵)을 조성하고 장례를 치른 후 뽕나무로 만든 우주(虞主-신주)를 혼전(魂殿)에 모십니다.
사후 1년째가 되는 소상 때 밤나무로 연주(練主)를 만들어 모시고 우주는 매안(埋安)을 하였습니다.
3년상을 마치고 나면 연주를 종묘(宗廟)에 봉안하였습니다.
우주를 뽕나무로 만드는 이유는 장례 후 혼령이 능에서 혼전으로 돌아올 때 뽕 잎을 먹는 누에가 실을 늘여 길을 잃지 않도록 하고,
연주를 밤나무로 만드는 것은 밤은 싹을 틔운 후에도 나무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썩지 않고 남아 있어서 후손을 보살펴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조선왕릉의 부장품
소궤(筲樻-대나무 그릇), 자기궤(瓷器樻), 변두궤(籩豆樻) 등을 무덤 안에 시신과 함께 묻었습니다.
정조 발인 행렬 중 부장품을 운반하는 가마 행렬
옥과 비단, 애도의 글을 옥에 새긴 책(옥책), 변두궤(籩豆樻)와 연갑함(硯匣函-붓, 벼루, 먹을 담는 함), 복완함(服玩函-구장복과 면류관), 자기(瓷器), 악기(樂器), 소궤(대나무 그릇)을 실은 가마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조선왕릉에 대한 기록들
정조국장도감의궤
장렬왕후 빈전도감의궤
순조인릉 산릉도감의궤
조선왕릉 조성 과정(造成過程)
조선왕릉의 보존과 관리
헌릉지
헌릉 관인
조선왕릉의 제향(祭享)
조선 초기에는 왕릉에서 삭망제(朔望祭-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제사)와 사시제(四時祭-계절마다 지내는 제사)를 지내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왕릉의 수가 많아지자 제향을 감당하기 어려워 점차 횟수를 줄였습니다.
왕릉 제향은 17세기 인조와 효종 대에 점차 간소화되어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등에 지내는 속절제와 기일에 지내는 기신제만 지내게 되었습니다.
왕릉의 참봉(參奉)
조선왕릉을 관리하는 총책임자는 왕릉마다 참봉 2명을 임명했는데, 이들을 능참봉(陵參奉)이라 불렀습니다.
태릉과 강릉의 역사와 공간
태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능이고, 강릉은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이자 조선 13대 왕인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입니다.
1565년 태릉이 조성된 후, 1567년 명종의 강릉을 태릉 동쪽 언덕에 모시면서 가까운 곳에 두 왕릉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중종비 문정왕후의 태릉
태릉(泰陵)은 조선 11대 왕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 1501~1565)의 능입니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1517년(중종 12)에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문정왕후는 1545년 아들 명종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약 8년 동안 왕을 대신하여 나랏일을 결정하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습니다.
문정왕후는 생전에 중종의 정릉에 묻히고자 했으나, 정릉이 지대가 낮아 자주 물에 잠기므로 이곳 태릉에 홀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태릉 이전의 조선왕릉에는 봉분을 감싸는 병풍석이 12면 방향에 맞취 십이지신을 조각했는데, 태릉에는 조각과 함께 글자를 함께 새겼습니다.
이후 왕릉의 병풍석에 한자로 십이간지를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태릉의 문석인과 무석인은 조선왕릉의 석인상 가운데 가장 크기가 웅장하고 조각 표현이 화려합니다.
석인상의 귓볼에 귀고리 구멍이 있는 것도 독특한 점입니다.
명종과 인선왕후의 강릉.
강릉(康陵)은 조선 13대 왕 명종(明宗, 1534~1567, 재위 1545~1567)과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 1532~1575)의 능입니다.
명종은 11대 왕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로, 이복형인 12대 왕 인종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1545년 12살에 왕위를 이었습니다.
조선왕릉 문석인과 무석인의 변화
왕릉전시관을 나와서 문정왕후가 잠들어 있는 태릉(泰陵)으로 갑니다.
태릉입구의 금천교(禁川橋) 자리에 물길은 막혀 있습니다.
홍살문 안쪽의 정자각 지붕 너머로 봉분이 살짝 보입니다.
태릉(泰陵, 조선 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능)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 1501~1565)는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 1515년 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517년(중종 12)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중종과의 사이에서 명종 등 1남 4녀를 낳았다.
1545년 아들 명종이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수렴청정이 끝난 후에도 계속 문정왕후와 외척들이 정사를 좌우하였다.
문정왕후는 또 불교에 관심을 두어 과거를 통해 승려를 뽑는 승과(僧科)를 부활시키는 등 불교를 크게 후원하였다.
65세의 나이로 창덕궁 소덕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원래 문정왕후는 남편 중종의 능인 정릉을 현재의 서울 강남으로 옮기고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그 곁에 같이 묻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옮긴 정릉이 비가 오면 침수 피해를 입은 일이 잦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그곳에 능을 쓸 수 없어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고 태릉이라고 하였다.
태릉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에는 방위에 맞게 십이지신상과 글자를 함께 새겼다.
문석인과 무석인 등의 석물은 다른 능에 비해 크기가 장대한 조선 중기의 특징을 보이며 귓볼에 귀고리 구멍이 있다.
팔각으로 된 홍살문의 주춧돌은 기둥 사이로 빗물이 들어가서 나무기둥이 썪지 않도록 아래쪽에 배수 구멍을 뚫어 놓았습니다.
홍살문 안쪽에는 제향을 드리러 온 왕이 사배(四拜)를 드리며 혼령(魂靈)을 부르는 판위(版位)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르는 길은 향(香)과 축문(祝文)을 든 제관이 다니는 향로(香路)와 제향을 드리러 온 임금이 다니는 어로(御路)로 되어 있습니다.
정자각 아래 동쪽에는 능을 지키는 수복이 머무는 수복방(守僕房)이 자리합니다.
정자각(丁字閣)의 모습
제관이 제향을 드리는 배위청(拜位廳)으로 올라가는 정면에 소맷돌을 장식한 신계(神階)와 제관들이 오르는 어계(御階)가 놓여 있습니다.
정자각으로 오르면 정전(正殿) 앞에 제수진설도가 세워져 있습니다.
태릉은 문정왕후 혼자 잠들어 있는 단릉(單陵)이어서 술잔(爵)은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을 올리는 세 개가 진설되어 있습니다.
태릉의 기신제(忌辰祭) 제향일은 양력 5월 16일 입니다.
정전(正殿)의 뒷문인 신문(神門)을 통해 바라보면 봉분(封墳)이 하나가 보입니다.
정자각의 문살은 세로살은 꽉 채우고 가로살은 위아래와 중간에 살을 댄 세살창(細箭窓) 아래에 청판(廳板)을 설치한 세살문(細箭門)입니다.
세로살과 가로살을 꽉 채운 문은 만살분합문(滿箭分閤門) 이라고 하고 정자살(井字箭)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는 유교의 영향으로 직선으로 이루어졌고, 불교에서는 빗살문을 많이 사용합니다.
배위청의 동쪽에는 계단이 두 개가 있으나 서쪽에는 하나만 조성되어 있습니다.
제향을 받은 혼령은 정전의 신문을 통해 능침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제관들만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정자각의 복서쪽에는 축문을 태우고 묻는 예감(瘗坎)이 있고,
반대쪽에는 산신석(山神石)이 놓여 있습니다.
혼령은 정자각의 북쪽문인 신문을 나와서 신교(神橋)를 건너 신로(神路)를 따라 능침으로 돌아갑니다.
태릉(泰陵)에는 봉분이 하나인 단릉(單陵)으로 문정왕후 홀로 잠들어 있습니다.
태릉의 문석인과 무석인 등 석물은 조선왕릉의 석인상 가운데 가장 크기가 웅장하고 조각 표현이 화려합니다.
조선국(朝鮮國)
문정왕후태릉(文定王后泰陵)
표석(表石)이 이곳에 문정왕후 홀로 잠들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중종의 한 가족 네 왕릉의 사연
조선 제11대 왕 중종은 세 분의 왕비가 계시지만,
· 중종 (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은 강남구 정릉(靖陵)에,
·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1487~1557)는 양주시 온릉(溫陵)에,
·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1491~1515)는 고양 서삼릉 희릉(禧陵)에,
·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1565)는 노원구 태릉(泰陵)에 각각 묻혀서 1왕 4왕릉으로 잠들어 있습니다.
단경왕후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위에 올린 반정세력에 의해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자기들의 안위를 염려하여 1주일 만에 폐비(廢妃)가 되어 세상을 떠난 후 거창 신씨 선산에 묻혔습니다.
장경왕후는 처음 태종의 헌릉 근처에 묻혀있다가 서삼릉으로 천장된 후 중종이 승하하고 옆으로 오면서 잠깐 동안 함께 하였으나,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가 중종 옆에 뭍히고 싶어서 장경왕후 곁에 모셔져 있었던 중종의 능을 강남으로 옮겨가면서 다시 혼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중종이 묻힌 정릉은 지대가 낮아 비가 많이 오면 정자각 뒤 사초지 아래까지 침수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정왕후는 정릉의 잦은 침수로 인하여 중종 옆에 묻히지 못하고 한강 건너 태릉(泰陵)에 홀로 뭍히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문정왕후는 다행스럽게 아들과 며느리가 곁에 있어서 조금은 덜 외롭습니다.
태릉의 사초지(莎草地) 아래에는 오래된 향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태릉의 모습을 둘러봅니다.
태릉, 강릉
숲길 구간은 1.8Km로 왕보 1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2024. 5. 16.(목)~6. 30.(일)
9시~17시(입장마감 16시)
숲길을 따라 강릉쪽으로 올라갑니다.
언덕의 정상에서 강릉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언덕길을 내려가면 강릉이 보입니다.
강릉(康陵)의 홍살문 안으로 들어갑니다.
홍살문 앞 소나무에서 왕릉의 기운을 받고 있는 총무님의 모습
강릉(康陵, 조선 13대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
명종(明宗, 1534~1567, 재위 1545~1567)은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로 1539년(중종 34) 경원대군(慶原大君)에 봉해졌고, 1545년 이복형인 12대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8년간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이후 직접 정사를 돌보며 외척 새력을 견제하도록 노력하였다.
34세의 나이로 경복궁 양심합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 1532~1575)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42년(중종 37) 경원대군의 부인이 되었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명종과의 사이에서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순회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후에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14대 선조)을 양자로 입양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고8개월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44세의 나이로 창경궁 통명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강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 형태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명종, 오른쪽이 인순왕후의 능이다.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향어로(香御路)를 따라 정자각으로 향합니다.
강릉의 판위는 전돌(塼)로 깔려 있습니다.
정자각의 서쪽에 제례 음식을 데우는 수라간(水剌間)이 있습니다.
어계(御階)를 따라 정자각으로 올라갑니다.
강릉의 신문 너머로는 능침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릉(康陵)은 명종과 인선왕후 두 분을 모신 쌍릉이어서 술잔이 각각 3잔씩 여섯 개가 놓여 있습니다.
강릉의 제향일은 양력 8월 12일입니다.
축문을 태우는 예감과,
혼령은 신교와 신로를 지나 능침으로 되돌아 갑니다.
산신석 등 왕릉의 구조는 비슷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표석(表石)을 보호하는 비각(碑閣)
강릉의 표석은 영조 29년(1753)에 조성하였습니다.
표석 앞면의 글씨는 홍계희(洪啓禧)의 필체이며, 뒷면의 비문은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가 썼습니다.
조선국(朝鮮國)
명종대왕강릉(明宗大王康陵)
인순왕후부좌(仁順王后祔左)
사초지 위로 쌍릉(雙陵)의 모습이 살짝 보입니다.
강릉의 모습을 둘러봅니다.
금천교(禁川橋) 안쪽으로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입니다.
강릉의 정문으로 나오면 삼육대학교가 있습니다.
강릉 정문에서 태릉 방향으로 되돌아 오면 태릉선수촌의 태릉국제스케이트장이 있습니다.
따가운 햇살 아래에 시장기를 간식으로 채우며 답사를 안내한 박석환 회장님과 함께한 선생님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36차 마애종 슬로우답사 일정을 마무리합니다.
<참고자료>
[태릉과 강릉 안내문-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해설-안양문화원 문화유산해설사회 박석환 회장]
첫댓글 와우~
강호인샘
덕분에 또 공부 됩니다
뜨거운 여름날
열공하신샘들께 존경을 보냅니다
이끄신 회장님 ~화이팅!!! 👍
강호인 포토님!!
같은 눈으로 보아도 이렇게 다를수가
있을까요? 😄
답사가기전날 눈요기 살짝 하고 가는데도
금새 잊어버리는데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오다가다 사진보며 글읽으며
덕분에 복습합니다.
회장님의 소프트웨어가 가득담긴
따뜻한 명해설 들으면서
놀멍~쉬멍~하멍(하늘보며)~자멍(자연보며)
웃음가득 행복가득 사랑가득
태릉과 강릉을 이어주는 숲길을 걸으며
너무 행복해서 회장님과 함께하신
선생님들께 감사하고 나무에게 감사하고
길에게 감사하고 하늘에게 감사하고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뿐이었습니다.
김밥, 배추속겉절이, 호박죽아이스바로
가방가득 챙겨오신 박금일 선생님🍱
달달한 약밥과 빵까지 챙겨오신 김숙희
선생님🍩
달달한 수박은 식후에 최고였고
예배드리고 오시면서 블루베리와 체리,
방울토마토,그리고 바다건너온 귀한 초코렛 한상자까지 예쁘게도 골고루 챙겨오신
아니 챙겨주신 김병호 선생님 사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시간을 이어서
다음시간에는 자연을 보며
새들과 이야기하며
행동식 식사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더도 덜도 필요없는 작품 답사기입니다.
강호인해설사님 감사합니다.
태강릉 답사길 함께해주신 해설사님들
우리가 무슨인연으로 그시간 함께했을까요.
그저 감사의 인연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