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정분녀 여사가 바깥벽에 붙은 단조 화분대에서 거실로 화분들을 옮긴 것은 오래전이다. 그 화분들은 가끔 시장에서 사 온 작은 화분들이고, 큰 화분들은 거실에 있었다. 큰 화분들에는 산세비에리아, 앤슈리엄, 베고니아, 철쭉, 양란 등이 자라고 있다. 정분녀 여사는 그 꽃들의 이름을 다 알지 못한다.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화초가 잘 자라고 꽃이 핀 것을 보며 즐거워하고, 아침저녁으로 잎사귀를 여닫는 것을 보고 신기해할 뿐이다. 단조 화분대는 7년여 전에 이 집으로 이사 온 후 작은아들이 설치한 것이고, 양란은 작년 봄에 생일을 맞았을 때 큰아들이 선물한 것이다. 특이하게 한 작은 화분에는 큰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화초의 가지를 잘라 심어 놓은 것이 있는데, 뿌리 없이도 자라고 꽃까지 피웠다. 그 작은 화분은 양자를 들여 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정분녀 여사 입장에서 보면 모든 화분에 있는 화초들은 자신이 꽃씨를 심어 키운 것이 아니다. 남이 꽃씨를 심어 키운 것을 기르는 것이다.
시내 변두리에 있는 지하 다방에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노래가 추적추적 흐르고 있었다. 그 노래 가사에는 분녀의 일생이 어느 정도 담겨 있는 듯도 했다. 그녀는 가사의 내용 그대로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외로이 지새워 왔다. 분녀의 일생은 동백꽃 개화와 흡사하다. 분녀 자신은 그 좋은 계절들에 못 피고 한겨울에나 피어나는 동백꽃이었다. 그녀가 어릴 적 살던 시골 마을에는 한겨울이면 동백꽃이 피어났다. 새봄을 기약하며 마을을 붉게 물들인 동백꽃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으레 그렇듯이 소녀들은 학교에 새로 부임한 젊은 남자 선생님을 흠모한다. 소녀들의 눈에는 그 선생님이 핸섬해 보인다. 분녀도 새내기 남교사를 짝사랑했었다. 수업 시간에 그 선생님이 질문하면 대답을 못하고 볼이 동백꽃처럼 붉어졌었다. 그 선생님은 활달한 애들의 차지였다. 그 선생님은 불과 2년 만에 도시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분녀는 밤새워 러브레터를 썼다. 막상 그 선생님에게 다가가서 러브레터를 드리려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떨려 포기했다. 그 선생님이 떠나고 나서 하룻밤을 뜬눈으로 울기만 했었다. 어린 마음에 그 선생님처럼 멋지게 생긴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를 꿈꿨었다.
‘동백 아가씨’ 노래가 끝나 갈 무렵 한 남자가 탁자로 다가왔다. 그 남자는 그녀의 이름을 확인한 후 최영필이라고 하며 인사를 했다. 분녀가 맞인사를 하자 최영필은 소파에 앉았다. 분녀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녀는 사전에 마담뚜가 그의 얼굴이 담긴 인물 흑백 사진을 보여 주었을 때 흠칫 놀랐었다. 세월이 흘러 또렷하지는 않지만, 착각인지 몰라도 그 선생님과 닮아 보였었다. 마담뚜는 그 사진을 건네주고 준수하고 능력 있는 남자라며 입에 게 거품을 물었었다. 분녀는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이런 남자라면 그동안의 삶이 억울하지 않았다. 그 기분은 마담뚜의 그다음 말을 듣고서 사그라들었다. 그 남자는 세 자식이 딸린 사별남이었다. 그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고민 끝에 그를 만나 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요즘이야 만혼이 늘어 40대 중반의 남자나 30대 후반의 여자가 결혼하기가 어렵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어려웠었다. 특히 노처녀에게는 재취 자리가 아니면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이 통성명을 하고 나서 어색한 중에 레지가 탁자로 다가와서 분녀는 홍차를 시키고 최영필은 쌍화차를 시켰다.
최영필은 쌍화차에 있는 동근 노른자를 티스푼으로 저으며 만감이 교차하였다. 동근 노른자가 망가지듯 삶이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다. 아내를 사별한 지 불과 1년 만에 재혼하려니 죽은 아내에게 미안하고 죄스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딸자식이 하나라도 있다면 모를까 남자 혼자 돈벌이하며 아들자식 셋을 키우는 것은 무리였다. 최영필은 사전에 마담뚜로부터 여자 세 명의 인물 흑백 사진을 건네받았었다. 30대 초중반의 젊은 여자, 30대 중반의 우아한 여자, 30대 후반의 여자 사진을. 어느 남자가 젊고 예쁜 여자를 마다하랴마는, 최영필에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득하게 자식 셋을 길러 줄 여자가 필요했다. 결국 그는 30대 후반의 여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어느덧 지하 다방에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가 마음을 흔들고 홍차와 쌍화차의 향이 어우러지며 두 사람의 대화가 무르익어 갔다.
정분녀 여사는 물뿌리개에 물을 담아 화분들에 물을 주었다. 물을 자주 주어야 사는 화초가 있는 반면 물을 자주 주면 죽어 버리는 화초가 있다. 화초 각각에게 관심과 정성이 필요하다. 정 여사는 수건으로 잎사귀들도 일일이 닦아 주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지치는 일이지만 화초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지극한 정성과 사랑이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와도 같다. 정 여사는 그전에는 화초를 기르지 않았었다. 남편을 사별한 후로 슬픔에 젖어 살다가 적적하고 벗이 필요해서 기르게 된 것이었다. 재작년부터는 뒤꼍에 흙을 깔고 상추와 깻잎 등의 채소와 약초도 재배한다. 정 여사는 잎사귀의 닦음질을 마치고 화분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밖의 화초는 내버려 두어도 자라겠지만 집 안의 화초는 화분 없이 자랄 수 없다. 화분의 흙에 뿌리를 내리고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들여야 살고 자랄 수 있다. 화분은 모태와 같다. 어머니와 같다. 화분은 온몸을 다 바쳐 화초에게 터가 되고 먹여 자라게 한다. 바라지의 일생, 헌신의 일생, 희생의 일생이다. 정 여사는 화분의 일생에서 어머니의 일생, 여자의 일생을 느끼며 화분에 애착을 가졌다. 분녀의 엄마는 자식들을 먹여 키우기 위해 텃밭에서 허리가 굽도록 밭일을 하고, 장거리가 가득한 큰 대야를 머리에 이고 먼 길을 다리가 붓도록 걸어가서 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분녀는 6·25전쟁이 휴전된 이듬해에 꿈을 품고 무작정 상경했다. 홀로서기는 쉽지 않았다. 생계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온갖 잡일을 했다. 혼자 살아 나가는 것도 벅찬데 엄마는 자식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의 희생과 고결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정분녀 여사는 화분들을 바라보며 엄마와 자신의 지난 삶이 회상되어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동백꽃이 질 무렵 따사로운 햇살이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하고 있었다. 희망을 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니 세상이 밝아 보였다. 20년간의 독신 생활을 청산하고 새 출발을 하려니 긴장되기도 하지만 기대가 컸다. 빨간 기와집의 두꺼운 나무 대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서니 너른 마당이 분녀를 환하게 맞아 주었다. 최영필과 정분녀는 따로 결혼식을 치르지 않았다. 정분녀가 최영필이 세 들어 사는 집의 대문턱을 넘은 순간 혼인은 성사된 것이었다. 셋방 앞에는 반지하 부엌이 있었고, 부엌 지붕은 장독대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햇빛을 받은 장독들은 반들반들 광이 나고 있었다.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니 세 아들 모두 학교에서 돌아왔다. 최영필은 자식들을 안방으로 불러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하고 큰절을 올리게 했다. 분녀는 미소를 띠며 답례했다. 분녀는 비록 남의 자식들이지만 처음으로 “어머니” 소리를 듣고 감격스러웠다. 분녀의 새로운 가족생활이 시작되었다. 분녀의 어머니로서의 첫 역할은 저녁상을 차리는 일이었다. 반지하 부엌에 들어가 밥솥에 정부미와 보리쌀을 넣어 씻고 연탄불에 밥을 지었다. 김치찌개를 끓이고 콩나물 무침을 만들고 계란 프라이를 해서 밥상을 차렸다. 최영필 씨와 자식들이 첫술을 떴을 때는 긴장했지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안도의 숨을 쉬고 기뻐했다. 다음 날부터는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 주어야 했다. 도시락 반찬은 주로 김치와 콩자반이었고, 정부미와 보리쌀을 섞어 지은 보리밥에 계란 프라이를 얹었다. 전날 저녁에 밥을 지어 놓고 새벽밥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분녀는 자식들에게 갓 지은 따뜻한 아침밥을 맛있게 먹이고 싶었다. 그 일은 늘 어김없었다. 가끔 밥상에 젓갈을 올렸다. 분녀가 살던 마을은 염전과 젓갈로 유명하다. 그 염전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는데, 해방 이후부터 천일염을 생산했다. 그 천일염은 전국적으로 인기가 있었다. 분녀의 엄마는 소금 채취가 절정기인 5, 6월에는 염전에 가서 일을 했다. 삽으로 소금을 쓸어 손수레에 담고 그 무거운 손수레를 끌고 가서 창고에 소금을 쌓는 일은 남자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분녀의 엄마는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그 고생도 감내했다. 마을 길에는 젓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조기젓, 명란젓, 새우젓, 멸치젓, 어리굴젓, 토하젓 등 수많은 맛깔스러운 젓갈이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고 코를 찌르고 입맛을 돌게 했다. 어느 집 밥상에나 한두 가지 젓갈이 꼭 놓였고, 음식점들의 식탁에는 어김없이 다양한 젓갈이 배열되었다. 마을에는 항구가 있었다. 그 젓갈들은 주로 그 항구 앞바다에서 잡은 싱싱한 생선을 그 미네랄이 풍부한 천일염으로 절여 만들어 맛이 일품이었다. 분녀는 그 젓갈들을 먹으며 자랐고 염전과 젓갈과 항구의 정취에 휩싸여 소녀 시절을 보냈다. 분녀는 고향의 맛이 그리웠지만 시장에서 사 온 젓갈은 맛이 달라 그 젓갈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분녀는 김장철이 되면 고향 염전의 소금과 멸치액젓으로 김치를 담가 겨우내 고향의 맛을 느끼리라고 마음먹었다. 다행히 최영필 씨는 시장 젓갈을 맛있게 먹었지만, 도시에서 자란 자식들은 젓갈이 입맛에 맞지 않은 듯했다. 주말이면 주로 다섯 식구의 빨래를 했다. 자신의 빨래만 하다가 다섯 배의 빨래를 무궁화 비누를 칠하고 빨래판에 문질러 하는 일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중노동이었다. 가뜩이나 분녀는 허리가 안 좋았었다. 그러한 일들은 늘 반복되었지만, 분녀는 가정을 꾸려 나간다는 생각에 위안이 되었다. 분녀는 자식들이 등교하고 최영필 씨가 돈벌이하러 나가고 나서 적적하면 툇마루에 앉아 장독들을 바라보았다. 고향 마을에는 어느 집에나 장독대가 있었고 장독들이 즐비했었다. 그 장독들에는 맛깔스러운 고추장, 된장, 간장, 젓갈, 김치 등이 들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의 삶의 근간이었다. 분녀는 장독들을 바라보며 그런 맛깔스러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일었다.
정분녀 여사는 화분들을 걸레질하다가 한 토분에 금이 간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상처가 난 듯이 아팠다. 오래전부터 고급스럽고 보기 좋은 도자기 화분이 주를 이루고 인기가 있지만, 정 여사는 토분에 애착을 가졌다. 어릴 적 고향의 정취가 느껴졌다. 당시에 고향 마을 사람들은 토분에 화초를 키웠다. 마당 한편에 화초를 심어 키웠지만, 집 안에나 계단 등에는 토분이 한두 개씩 놓여 있었다. 분녀의 집은 허름한 기와집이었지만 마루에 화초가 자라고 있는 토분이 있었고, 마당 구석에는 화초가 시들어 말라비틀어져 있는 토분이 쓸쓸하게 놓여 있었다. 분녀의 엄마가 그 화초를 가꿀 짬이 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분녀의 엄마는 아무리 바빠도 7월이 되면 마당 울타리 앞에서 자라고 있는 봉숭아의 꽃잎을 따서 분녀와 분녀의 언니의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 주었다. 빨간 봉선화와 잎사귀와 백반을 그릇에 넣어 찧어서 손톱에 붙인 후 헝겊으로 싸고 실로 동여매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실을 풀고 헝겊을 벗기고 보면 손톱이 선명하게 물들어 있었다. 요즘에는 여자애들에게 네일 아트가 인기가 있지만 봉숭아의 꽃잎을 따서 물들이는 정취가 없다. 간단하게 잡화점에서 파는 봉선화 물로 손톱에 물들이기를 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봉숭아의 꽃잎을 따서 물들이는 것과 정취가 다르다. 아쉬운 점은 분녀가 자기 엄마처럼 봉선화 물들이기를 해 줄 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금이 간 토분은 봉숭아가 심어진 화분이었다. 봉숭아의 꽃말은 ‘소녀의 순정’이다. 정 여사는 그 화분을 보며 말 그대로 소녀 시절과 엄마를 회상하고 정감이 갔었는데 금이 간 것을 보고 아픔을 느꼈다.
마담뚜가 사전에 최영필 씨가 능력 있는 남자라고 꼬드겼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최영필은 동대문 시장, 방산 시장 등에서 물건을 떼어 상점들에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윤이 박해 근근이 살림을 꾸려 나갈 정도였다. 세 아들자식의 학비를 위해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정도였다. 경제권은 최영필이 쥐고 있었다. 빠듯한 살림이지만 그는 푼돈이나마 꾸준히 저축했다. 분녀는 찬거리 비용을 남편에게 타 써야 했다. 분녀에게 돌아올 여윳돈은 없었다. 그녀는 들었던 바와 딴판이지만 언젠가는 나은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남편이 그전에 사업을 했던 터라 수완을 발휘할 수도 있고, 비록 남의 자식들이지만 커서 보은하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분녀는 자기 자식을 갖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최영필은 예전에 정관 수술을 받았던 터였다. 분녀는 실망했지만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한여름 어느 날 막내아들이 동네 애들과 뛰어놀았는지 얼굴과 옷이 땀범벅이 된 채 돌아왔다. 분녀는 그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모성애가 자극되었다.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을 시켜 줄 테니 옷을 벗으라고 했다. 막내아들은 중학생이라 그럴 나이가 아니지만 잠시 망설였다가 발가벗었다. 친모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막내아들을 목욕을 시켜 주었기에 그는 습관적으로 발가벗었던 것이다. 분녀는 스스럼없이 자기 말을 듣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고 목욕을 시켜 주면서 모성애를 느꼈다. 그러한 환경과 상황 속에 분녀와 최영필과 세 자식 간의 관계는 원만했다.
몇 개월이 지나며 그 원만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분녀는 아무리 기대를 갖고 희망을 품었더라도 현실이 어렵다 보니 남편과 세 자식을 뒷바라지하는 데 지쳤고, 친부모와 자식 간에도 갈등이 있게 마련인데 사춘기 자식들의 행동들이 못마땅했다. 분녀는 자식들에 대한 불만을 남편에게 표출했고, 최영필은 그럴 때마다 자식들을 꾸지람했다. 그로 인해 최영필과 세 자식 간의 관계에도 금이 갔다. 이듬해에는 종교의 차이로 인해 갈등이 심화되었다. 최영필은 유교주의자이고 세 자식은 교회에 다녔는데, 최영필이 세 자식에게 전통 의식을 강제하다 보니 갈등이 심화되었다. 최영필이 자식을 매질하고 집에서 쫓아내도 소용없었다. 그럴수록 자식들의 반항심만 커졌다. 급기야 최영필은 자식들의 종교를 인정했지만, 분녀와 최영필과 자식들 간의 갈등은 해소되지 못하고 지속되었다.
그런 갈등 속에서도 최영필은 분녀의 의견으로 꾸준히 모았던 돈을 다 털어 작은 방 세 칸짜리 허름한 기와집을 샀다. 넓지는 않지만 마당이 있고, 화장실 지붕이 장독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장독대에는 빨랫줄도 설치되어 있었다. 방 두 칸은 세를 주고, 세 자식을 안방에 딸린 다락방에서 지내게 했다. 받은 셋돈이 대부분 장사 밑천으로 쓰여 살림이 빠듯하고 쌍미닫이를 사이에 두고 아들자식들과 같이 지내니 불편했지만 그래도 세입자에서 집주인이 되니 분녀는 마음이 편하고 뿌듯했다. 작은아들과 막내아들이 학교에 가고 남편과 큰아들이 돈벌이하러 나가고 나면 분녀는 집 안 청소를 했다. 마루를 얼마나 빡빡 문질러 닦았는지 반질반질 윤이 났다.
도자기 화분은 본디 반질반질하지만 걸레질하니 더욱 반질반질했다. 수건질한 앤슈리엄의 잎사귀와 육수 꽃차례를 둘러싸고 있는 불염포도 더욱 반질반질했다. 빨간 불염포는 심장 모양이라고 하지만 정분녀 여사의 눈에는 봉숭아의 꽃잎과 닮아 보였다. 봉선화 물들이기를 한 손톱같이도 보였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앤슈리엄은 봉숭아만큼이나 애착이 가는 식물이다. 앤슈리엄의 꽃말은 ‘사랑에 번민하는 마음’이다. 사랑해도 번민하지만 사랑을 못 받아도 번민한다. 꽃에게나 사람에게나 사랑이 필요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분녀네 살림도 윤택해져 갔다. 작은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 월급을 다 갖다 주어 생활 형편이 나아졌다. 여윳돈이 금 간 데를 때웠다. 분녀는 남편으로부터 전에 없던 용돈을 받았다. 분녀는 위안이 되고 얼굴이 펴졌다. 그 후에 큰아들은 분가한 뒤 군대에 갔지만, 막내아들도 학교를 졸업하고 내로라하는 직장에 취업해 월급을 다 갔다 주었다. 생활 형편은 더 나아졌고 갈등은 봉합된 듯했고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 분녀의 불만, 최영필의 잔소리, 자식들의 반항심이 가뭄에 콩 나듯했다. 최영필과 분녀의 생일날에는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전례 없는 생일 파티를 했다.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박수를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 후 입바람을 불어 촛불을 끄고 신나게 박수를 쳤다. 명절날에도 온 가족이 함께 모였다. 큰아들이 결혼한 후에는 큰며느리와 큰손자도 자리를 함께했다. 식사를 한 후 자식들은 고스톱을 했는데 최영필은 화투판을 보면 못하게 했다. 그는 도박이라면 질색하고 금기시했다. 최영필은 화투판을 윷판으로 바꿨다. 온 가족이 편을 갈라 윷을 던지며 깔깔대고 즐거워했다. 지는 편이 구멍가게에 가서 군것질거리를 사 왔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군것질하며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가을철에는 최영필과 분녀는 계 모임 회원들과 단체 관광을 갔다. 내장산으로 단풍 구경을 갔다. 최영필과 분녀로서는 처음으로 함께하는 뜻 깊은 여행이었다. 내장산은 분녀가 소녀 시절에 살던 고향 마을에서 거리가 불과 40㎞이지만 당시에는 그녀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 내장산 단풍만큼 화려하지 않아도 분녀가 살던 고향 마을 주변에 있는 산의 단풍도 아름다웠다. 봉우리와 괴석과 계곡과 폭포와 저수지와 갈대와 코스모스, 국화 등 가을꽃과 어우러져 장관이었다. 고향 마을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진 바닷가에는 기묘한 층암절벽이 있었다. 분녀는 어릴 적에 오빠들과 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그 층암절벽이 있는 바닷가에 가 본 기억이 있다. 처음으로 분녀의 눈에 들어온 그 기묘한 층암절벽과 바닷가는 신비로웠다. 해식 동굴에는 천기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바위틈에 숨은 게를 잡기도 하고 모래사장에서 맨발로 뛰어놀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놀다 보니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드넓은 수평선 위의 웅장한 붉은 해와 노을에 분녀는 입을 벌린 채 꼼짝 못 했다. 마을 포구에서 자주 일몰의 광경을 봤었지만 비교가 안 되었다. 해가 숨을 거두고 나서 귀가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큰오빠는 고된 뱃일을 마치고 먼저 돌아왔던 아빠에게 회초리로 맞으며 호되게 혼났다. 분녀는 왕복 몇 시간을 버스를 타고 나니 탈진해서 방에 들어가자마자 쓰러져 잠들었다. 꿈을 꾼 듯했다. 너무 힘들어서 그 후로 그곳에 다시 가지 않았지만 추억이 아련했다. 봄철에는 최영필과 분녀는 계 모임 회원들과 제주도로 유채꽃 구경을 갔다. 분녀는 난생처음 타 보는 비행기와 가 보는 제주도에 마음이 설렜다. 만개한 노란 유채꽃과 연분홍 벚꽃이 앙상블을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이고 예술이었다. 고향 마을에도 사월이면 유채꽃이 만개했다. 그 노란 유채꽃은 분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녀는 제주도에서 유채꽃을 보며 고향 마을에서의 소녀 시절을 회상하고 향수에 젖었다. 최영필과 분녀는 행락 철이면 그렇게 계 모임 회원들과 관광을 다니기도 하고, 가끔 몇몇 회원이 집으로 찾아오면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틀어 놓고 흥겹게 지르박을 추기도 하며 삶을 즐겼다.
어느 날 정분녀 여사는 분무기로 화초의 잎사귀들에 물을 뿌리다가 봉숭아가 심어진 토분에 금이 더 간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 토분에 애착을 가졌는데 속상했다. 그 봉숭아가 심어진 토분은 정분녀 여사 자신과 같았다. 그 토분의 일생은 자신의 일생과 같이 여겨졌다. 분녀는 소녀 시절을 고향 집 마당 울타리 앞에서 자라던 봉숭아와 마루에 놓여 있던 토분과 함께했다. 봉숭아가 심어진 금이 간 토분은 고향을 떠난 후와 또 제2의 삶을 사는 금이 간 자신과 같았다. 정 여사는 금이 갔다고 그 토분을 버릴 수 없었다. 정 여사 자신이, 자신의 인생이 버려지는 것과 같았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다가도 꽃피는 봄이 오고, 날씨가 좋다가도 태풍이 몰려오듯이 최영필과 분녀의 생활이 계속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봄이 되어 작은아들이 결혼을 해서 분가해 들어오는 돈이 푹 줄어들었다. 부풀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새기 시작했다. 최영필은 전부터 하던 일을 지속했었지만 분발할 필요가 있었다. 일을 하며 불던 휘파람이 가쁜 숨소리로 변했다. 결혼한 자식들은 자기들 먹고살기에 급급했다. 그래도 생활에 다소나마 여유가 있었는데 그 후에 막내아들이 직장을 그만두어 생활에 여유가 없어졌다. 웃음기도 가시고 계 모임 회원들과 놀러 가는 것도 뜸해졌다. 최영필은 늘 하던 일이지만 나이가 먹어 가고 희망이 사라져 힘들게 느껴졌다. 일을 하고 돌아오면 허리가 아파 아내에게 허리를 안마하게 했다. 아이러니하게 허리는 분녀가 더 아팠다. 끊어질 듯이 아팠다. 원래 허리가 안 좋았었지만 이 집안에 와서 남편과 세 자식을 뒷바라지하느라 심해졌다. 허리가 아플수록 자식들과 남편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남편에게 내가 이 집의 종이냐며 불만을 토했다. 최영필은 거리를 다니며 일하느라 차량의 배기가스를 많이 마셔 폐가 안 좋아져 가뜩이나 힘든 데다 아내의 불만을 들으면 열불이 났다. 아내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 분녀는 자식들을 감싼다며 더욱 불만을 토했고 최영필은 고성을 질렀다. 두 사람 간에 고성이 오가는 말다툼이 잦아졌다. 부부 싸움을 심하게 하고 나서 분녀는 처음으로 가출했다. 이틀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최영필은 처형 집에 가서 분녀를 구슬려 데려왔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집 안은 조용했지만 부부 싸움은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서로 말을 안 하다가 풀어지기가 예사였다. 최영필은 몸이 아파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벌이하러 나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밖에서 일하다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이 쥐어짜듯 아팠다. 간신히 일어나 일을 하다 말고 귀가했다가 다음 날에도 통증이 심해 종합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협심증이었다. 한동안은 심장약으로 버텼지만 호흡이 곤란해져 급기야 협심증 수술을 받았다. 설상가상 분녀의 허리 통증도 심해져 종합병원에 갔더니 디스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결국 그녀도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디스크 수술 후 분녀는 회복실에서 눈을 떴다. 마취에서 깨어났으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앞에 막내아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녀는 막내아들을 보자 설움이 복받쳤다. “아이고, 나는 이제 불구가 되려나 보다. 이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막내아들은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하고 안심시켜 주었다. 수술을 받고 나서 최영필과 분녀는 몸이 호전되었다. 문제는 병이 완쾌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최영필은 주치의로부터 심장약을 매일 복용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지 않으면 심장 마비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했다. 최영필은 겁이 나서 주치의의 말에 따라 심장약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복용해서 심장은 괜찮았지만 잔병치레는 끊이지 않았다. 몸이 쇠약해져도 먹고살기 위해 쉴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밖에서 일하는 시간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만큼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빠듯한 살림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명절날에나 생일날에 자식들이 용돈을 주었지만 대부분 생활비에 충당했다. 분녀도 시간이 흐르며 허리가 다시 아팠다. 디스크를 앓을 때만큼 심하지 않아도 통증이 가실 날이 없었다. 골반도 비틀어져 있었다. 분녀는 허리가 안 좋아도 급기야 처음으로 일터에 뛰어들었다. 도시락 공장에 취업해서 도시락을 싸는 일을 했다. 작업 시간 내내 서서 일해야 했다. 허리가 보통 아픈 게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2주일을 다니고서 포기했다. 허리가 아픈 그녀에게 일은 무리였다. 분녀와 최영필은 몸이 안 좋은 데다 수입이 쥐꼬리만 해 삶이 고달팠다. 그런 중에 다행히 막내아들이 다시 회사에 취직해 생활비를 보탰다. 전과 같이 내로라하는 직장은 아니어서 갖다 주는 돈이 많지 않지만 이전보다 생활 형편이 다소 나아지니 다행이었다.
정분녀 여사는 보름간 몸살감기를 앓아 화초에 신경을 못 썼다. 보름간 모과차와 쌍화차를 꾸준히 마셨더니 많이 나아진 듯하다. 쌍화차는 남편이 생전에 즐겨 마시던 차다. 정 여사는 최영필 씨를 지하 다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티스푼으로 노른자를 젓고서 쌍화차를 마시던 모습이 회상되었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45년 세월이 흘렀다. 어쩌면 그동안의 인생이 감기에 걸린 삶이 아니었나 싶었다. 정분녀 여사는 화초의 잎사귀와 화분을 닦아 주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수건과 걸레를 들고 거실로 가서 화초의 잎사귀와 화분을 닦으려다가 깜짝 놀랐다. 봉숭아가 심어진 토분에 또 다른 금이 가 있었다. 그 토분도 몸살감기를 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더욱 속이 상했다. 며칠 후 작은아들 내외가 방문했기에 작은아들에게 토분에 또 다른 금이 간 것을 얘기했더니, 작은아들은 실리콘을 사 와서 토분에 금 간 데들을 때워 주었다. 정 여사의 상한 마음은 다소 누그러들었다.
재개발을 추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주민끼리 만나면 재개발을 화두로 설왕설래했다. 허름한 집을 가진 주민은 찬성했고 요 몇 년 사이에 새로 몇 층의 집을 지은 주민은 반대했다. 허름한 집이 대다수였기에 찬성이 우세했다. 집값이 들썩들썩했다. 시내와 가까운 마지막 노른자위 땅이라고 여겨져 하루아침에 두세 배 뛰었다. 막내아들이 퇴근하고 돌아오자 최영필이 그를 안방으로 불렀다. 최영필은 막내아들에게 부동산 매매 계약서를 보여 주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이 집을 팔아 돈을 절반씩 나누어 갈라서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십여 년간 갈등이 끈질기게 옥죄고 이혼한다는 소리가 숱했지만 실행에 옮기기는 처음이었다. 집값 급등이 기폭제와 화근이 된 것이다. 막상 실행에 옮기니 최영필과 정분녀 여사는 마음이 후련한지 오히려 표정이 평온하고 입가에 미소까지 띠었다. 막내아들은 기가 막혔다. 매매 대금도 터무니없었지만 이혼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막내아들의 설득에 결국 막내아들이 위약금을 대기로 하고 사태는 무마되었다. 그 후 재개발 추진 위원회가 승인되자 집값이 다시 급등했다. 그로 인해 고질병이 도졌다. 최영필은 또 막내아들에게 부동산 매매 계약서를 보여 주며 똑같은 소리를 했다. 막내아들은 허탈했다. 매매 대금이 전보다 3배 이상이지만 그 또한 터무니없었고 이혼은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제는 막내아들이 그 계약금만큼의 위약금을 당장 대기가 어렵고 최영필과 정분녀 여사의 이혼 의지가 그토록 확고하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명절날이 되어 큰아들과 작은아들 식구들이 집을 찾아왔다. 최영필은 큰아들과 작은아들에게도 부동산 매매 계약서를 보여 주고 똑같은 소리를 했다. 명절 분위기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하루 종일 집안 분위기가 침울했다. 다행히 저녁때가 되어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설득에 최영필과 정분녀 여사는 이혼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더라도 내친김에 집은 그냥 팔고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앤슈리엄이 시들했다. 잎사귀와 불염포의 색이 바랜 듯하고, 육수 꽃차례도 생기가 없어 보였다. 물을 자주 주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앤슈리엄은 봉숭아만큼이나 애착을 가진 식물인데 속상했다. 정분녀 여사는 앤슈리엄의 잎사귀들과 불염포들을 수건질하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마트에 가서 앰플을 사 와 화분에 꽂아 주었다. 그 덕분에 앤슈리엄은 생기가 돈 듯했는데, 며칠 후 다시 시들해졌다. 밑에 있는 잎사귀는 끝이 누렇게 변하고 있었다. 문제는 화분에 있는 듯했다. 분갈이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새집은 빌라라서 전의 허름한 기와집보다는 살기가 편했지만 생활이 곤란했다. 최영필은 새집으로 온 후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나이도 칠십이 훨씬 넘고 여러 가지 병이 겹쳐 건강이 안 좋아 밖에서 돌아다니며 돈벌이하기는 어려웠다. 가뜩이나 새집으로 이사하기 전에 막내아들이 늦장가를 가서 분가해 보태 주던 생활비가 줄어들어 생활이 어려워졌다. 설상가상 몇 달 뒤에는 그 돈마저 끊겨 생활이 곤란했다. 급기야 최영필은 자신의 생일날에 세 자식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생활이 곤란하니 매달 생활비를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야 매달 통장에 금액이 찍혀 생활의 곤란을 면하고 다소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최영필은 새집으로 온 후 일주일에 몇 번씩 노인 복지관에 다녔다. 저렴하게 제공하는 점심을 사 먹고 바둑을 두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그 낙은 몇 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80세가 넘자 심신이 급격히 허약해졌다. 날이 갈수록 바깥출입이 줄어들고 누워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결국 그는 새집에 온 지 10년 만에 잠자리에 누운 채 세상을 떠났다. 정분녀 여사는 잠자다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새벽에 눈을 떴다가 숨을 쉬지 않는 최영필 씨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작은아들에게 전화해서 한 시간 뒤에 작은아들이 와서 차로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사망했던 터였다. 사망 원인은 급성 심장사로 적혔다. 정 여사는 통곡했다. 37년 전 최영필 씨를 지하 다방에서 처음 만난 뒤로 지금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었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는 그의 다정함만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장례는 삼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최영필의 사망 후 경찰서에서 계모를 색안경을 쓰고 보아 돌연사로 의심해 정분녀 여사는 조사까지 받았었는데, 검찰에서 정확한 사인을 알기 위해 부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 여사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 가뜩이나 슬픈데 비참하고 원통했다. 다행히 국과수의 부검 결과 타살 흔적이 없다는 1차 소견이 나왔지만, 최종 부검 결과는 한 달 뒤에야 나온다고 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나서, 정분녀 여사와 세 아들자식은 혹시라도 잘못된 결과가 나올까 봐 한 달간 조마조마했다. 결국에는 사인이 자연사로 최종 판명됐지만, 정분녀 여사는 억울한 일을 겪은 것이었다.
앤슈리엄을 분갈이하고 나서 앤슈리엄은 다시 생기가 돌아 보였다. 잎사귀와 불염포는 반질반질 윤이 나고 육수 꽃차례도 힘 있게 솟아 있었다. 문제는 봉숭아도 시들해진 것이었다. 밑의 잎사귀들은 누렇게 바래져 가고 있었다. 정분녀 여사는 봉숭아가 병든 모습을 보니 너무 속상했다. 며칠 동안 토분에 앰플을 계속해서 꽂아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봉숭아도 분갈이해 줄 필요가 있는 것 같았으나, 정 여사는 그 금이 간 토분을 자신과 같이 여겼기에 분갈이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분녀 여사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오랫동안 슬픔에 젖어 살았다. 그러던 중에 큰 화를 당했다. 동네 음식점에서 지인들과 생선찌개를 먹었는데 탈이 났다. 생선이 상했던지 식중독으로 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정 여사는 약국에서 피마자기름을 사 와 마셨다. 어릴 때 두드러기나 나면 엄마가 피마자기름을 먹여 씻은 듯이 나았었다. 다행히 두드러기는 말끔히 가라앉았다. 불행히 며칠 뒤에 피부병이 재발했다.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 정육점에서 사 와 요리해 먹었는데 알레르기가 발생한 것이다. 피부에 벌겋게 발진이 일어났다. 그녀는 또 피마자기름을 마셨지만 구토를 하고 설사를 했다. 날이 갈수록 증상은 심해졌다. 발진이 온몸으로 번지고 가려웠다. 계속 긁어서 피가 나고 딱지가 지고 까매졌다. 가려워서 밤에 잠도 잘 수 없었다.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잘 수 없었다. 자다가도 긁었다. 피부병 치료를 잘한다는 병원들에 다 가 보고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치는 병원에도 가 봤지만 소용없었다.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절망적인 진단까지 받았다. 주사를 너무 맞고 피부약을 너무 복용해서 내성으로 인해 약효가 저하되고 합병증까지 발생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주사를 놓아 줄 수 없다고 했다. 정 여사가 사정사정해도 통하지 않았다. 수면제도 더는 효과가 없었다. 온몸이 가렵고 잠도 잘 못 자고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소화도 잘 안 되어 심신이 허약해지고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3년 이상을 그러다 보니 삶의 의욕까지 상실했다. 그런 중에 막내아들이 천일염을 가져와 매일 물에 타서 마시고 온몸에 바르라고 권고했다. 정 여사는 어릴 적에 민간요법으로 고향 염전의 천일염을 물에 타서 치료에 사용한 기억이 났다. 그녀는 막내아들의 말에 따라 매일 그대로 했다. 그러다가 식초도 함께 타서 했다. 놀랍게도 1년쯤 지나자 피부병은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 오히려 피부가 더 고와지고 더욱 건강해졌다. 정 여사는 이제는 고향 염전의 천일염으로 수시로 그리하고 있다. 정분녀 여사는 그동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남편이 별세한 후로 세 아들자식과 더불어 잘 살고 있다. 자식들은 매달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내오고 특별한 날이면 용돈도 주고 있다. 정 여사는 남들에게 자식들이 친자식보다 더 잘해 준다고 자랑한다. 정 여사는 이제 행복을 조금씩 느끼는 것 같았다.
정분녀 여사는 시들어 가는 봉숭아를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결심했다. 분갈이하기로 작정했다. 그 금이 간 화분도 이제는 안식할 필요가 있었다.
김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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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교 경영학과, 경영대학원 석사 / 한국문인협회 회원 / 솔로몬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 / <기
독교문예>단편소설(2015년),시(2017년)신인문학상/ <미래시학>시(2022년)신인문학상 / 수도중학
교 백일장 운문부 차상(1976년) / 저서 『바지랑대 자모』외 다수
<심사평>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인생 여정
김명석의 소설 「화분」, 「스포일러」 2편을 수상 소설로 선정해 심사평을 올린다.
삶이란 가시 발길이요,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인생 여정이다.
「화분」에 등장하는 정분녀는 늦은 나이에도 어린 소녀처럼 꿈과 희망을 간직한 청순한 여인이다. 그녀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었으나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사별남에 세 아들이 있는 결손 가족과 혼인해 자신 스스로가 선택한 험로 한 인생 여정이 시작되었다. 삶의 고통에서 화분에 자라는 꽃이 자신이 사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감성을 느끼며 그녀는 토분이 파손 시는 무척 마을 아파했다.
넉넉지 않은 가정을 헌신과 정성으로 꾸려가며, 수많은 어려운 가정사를 극복하고 노후에 행복하게 삶을 누리는 사유와 성찰이 깊은 작품이다. 인생 여정에 깊은 감동을 줘서 더욱 감명 깊었다.
「스포일러」에 등장하는 문 작가는 온갖 잡일을 하며 사는 독실한 신앙인이다. 철학 사상을 응용한 글을 써서 최고의 추리 작가라 자부했다. 공상에 빠져 한때 신을 모독하는 복음 소설을 발간하고서 성취감과 희열을 느꼈으나 반대로 죄의식에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며,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무엇이 그의 정신을 이토록 황폐하게 만들었나?
자기 신앙의 정신적인 죄책감과 강박관념에 속박되어 절망에 빠진 피해 망상증은 세상을 등지는 요인으로 작용해 최후를 맞이한다.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방식과 좀 동떨어진 기인의 언행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한때 독자에게 흥미와 관심을 두게 하지만 그런 돌발 행위는 심적 부담을 줘서 어쩌면 흥행을 떨어뜨리는 주제일 수도 있다.
여기서 아쉬운 점은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류를 구원하는 가치관에 두고 있다. 새로운 시각과 발상 전환으로 기회를 줘서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유도했으면 좋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소설 부문 신인상 수상을 축하하며 앞으로 문운이 들어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이근배(시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본사 상임고문)
이복수(수필가, 한림성심대학교 교수)
성광웅(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국문학협회 이사장)
박종래(시인, 문학평론가, 한국문학협회 대표회장)
복재희(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국문학협회 작가회장)
첫댓글 선생님 그 동안 주님 안에서 잘 지내셨지요?
이 사랑방에 분녀, 여사의 꽃 향이 가득합니다.
평범한 우리네 삶 속에 이야기를 잘 이으셨습니다.
다시 읽어도 옆집이야기 처럼 친근합니다.
대화체를 사용하셨으면 더 구수하지 않았을까? ㅎㅎ
감사합니다. 인송()
샬롬!
선생님,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지요?
부족한 글을 선정해 주신 선생님 덕분입니다..
'신인문학상 당선작'에 제가 누락된 것 같아
주제넘게 올렸는데요,
지금 확인해 보니 한 분이 저 대신 중복되었네요.
지도편달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