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수필론
수필의 일상성 벗어나기와 문학적 ‘낯설게 하기’
한 상 렬
1. 들어가는 말―수필의 일상성 벗어나기
우리 주변에는 전문문학인이 아니어도 수필 정도는 누구든 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문학인 중에도 수필을 독립된 장르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무엇 때문일까? 그 중 하나가 수필의 일상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에 수필문학의 고민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일상적 삶을 살아가고 그 삶의 이야기가 곧장 수필이 된다. 그렇기에 수필은 삶의 이야기 곧 인간학이 된다. 문제는 수필의 일상성이 그저 일상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지만, 일상성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데에 있다. 이런 수필의 일상성을 철학적으로 해명한 황필호는 일상성에 대하여 “첫째, 모든 수필은 상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둘째, 모든 수필은 관습으로부터 출발한다. 셋째, 모든 수필은 일상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1)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수필은 상식으로 상식을 극복하고, 관습을 통해 관습의 근거를 파악하고, 일상 언어를 통해 일상성 이상을 탐구하는 것이다.”2)라고 하여 수필의 일상성 극복을 역설하고 있다. 만일 수필이 그러하지 못할 경우, 신변잡기나 잡문의 경지로 타락한다고 그는 경계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수필은 작가의 일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언어미학적으로 창조한 미적 관조의 산물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일상을 소재로 하여 수필은 창조된다는 점이다. 즉 “일상 속에 숨어 있거나 묻혀 있는 삶의 진실과 본질을 미적으로 관조하여 인식과 깨달음의 언어로 들려주는”3) 문학이 수필임에는 틀림이 없다. 안성수는 이런 일성성에 대하여 그 특징으로 친숙성, 리듬성, 반복성, 역사성, 지속성, 무반성성, 은폐성, 익명성, 개별성, 불변성을 열거하고 있다. 즉 수필의 구조는 외부에 일상성의 이야기, 내부에는 일상성에서 찾아낸 삶의 철학과 진실성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담겨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수필작가는 이런 일상성 속에 묻혀 있는 삶의 진실을 철학적으로 인식하여 미학적으로 구조화하고 나아가서 문학 언어로 형상화의 과정을 거쳐야 된다.”4)는 견해다.
그런데, 인류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것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변화에 가속도가 붙어 제어의 필요성이 요구될 때는 이를 위한 조치를 취하곤 했다.”5)는 언술은 문학이 변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익숙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동시에 일성성에서의 벗어나기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하나가 김성곤이 말하듯 ‘문자매체, 전자매체의 공존과 대화’6)다. 디지털 시대에는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와해된다는 것이다. 지금 지구촌은 탈중심·다원적인 평등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으며, 멀티미디어가 의사소통의 핵심도구로, 디지털 방식에 의해 세계는 혁신적인 변화를 가속화해 가고 있다.7)
둘째는 퓨전(Fusion)시대의 개막이다. 지구촌이 탈중심적, 다원적인 평등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으며, 이어령의 말과 같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21세기는 통제 불능의 시대가 될 것”8)이라는 견해다. 여기서 문학에서의 퓨전은 이종결합, 혼합을 의미하며, 이런 이종배합, 혼성모방의 경향은 음악이 미술과 컴퓨터에 결합하고, 문학과 음악, 문학과 미술이 결합한다. 이렇게 새로운 문화 환경에 문학이 대처해야 할 길을 찾아야 하는 시대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퓨전은 이제 21세기를 움직이는 키워드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는 키치의 난무다. 키치(Kitsch)는 싸구려 물건, 이발소 그림이나 페인트 그림, 조악한 것, 이상야릇한 것을 의미한다. 19세기말 뮌헨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으로 해롤드 로젠버그는 값싸고 감성적이며 귀여운 복제품을 지칭하는 저속(低俗)과 천박(淺薄)의 대명사로 보고 있다.9) 이렇게 키치가 대량 복사되는 조야(粗野)한 대중문화 상품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면서 그 양산이 이 시대의 문화 중심에 서 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키치가 가볍지만 통쾌하다는 점이다.
최근의 광고의 카피에는 못난 사람을 자주 등장시켜 촌스럽고 모자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고전적 광고로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 어딘가 모자란 듯 어눌한 표정과 말투이지만, 감초와 같은 역할을 부여하여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그래서 때론 키치에는 ‘비꼼’의 정신까지 내재한다.10) 전통적 가치에 딴죽을 걸면서 풍자의 날을 세운다. 그래서 키치가 이제는 하위미학이 아니라, 대중미학의 주류로 자리매김하면서 당당한 미적 즐김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변화의 첨단에 서 있는 것이다.
자, 이런 변화의 와중에서 수필문학의 갈 길은 과연 어디인가? 그 답은 지극히 간명하다. 발상의 대전환, 수필쓰기의 혁신이 필요하다. 수필문학의 일상성을 뛰어넘고, 키치적 사고를 먹고 자라는 창작의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곧 수필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추구야말로 수필의 속중화에서 벗어나는 길이 될 것이다. 그 길은 문학이란 환상(幻想)의 집을 짓기보다 위대한 ‘성(城) 쌓기’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일이겠다.
2. 수필에서의 문학적 낯설게 하기
그렇다면, 수필문학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추구, 수필문학의 성 쌓기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한마디로 말해 수필작가는 새로운 변화에 민감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에서 과감히 탈피하는 길이 그 길이 될 것이다. 새로운 창조는 정체(停滯)가 아니라,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변화의 한 축을 형성하는 것이 다름 아닌 문학적 ‘낯설게 하기’ 혹은 ‘생소화’일 것이다.
문학에서의 형식주의를 표방한 슈클로프스키는 ‘낯설게 하기’를 문학성의 요체(要諦)로 보고 있다. 즉 그는 언어를 특별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즉 문학의 형식적 요소인 소리, 이미지, 리듬, 구문, 음보, 운, 서술기법과 같은 장치들이 모두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문학 언어는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이며 문학 언어를 다룬 담론(談論) 형식들과 구별해 주는 것은 그것이 일상 언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시키고 뒤틀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 장치들의 압력을 받고 변형된 일상 언어는 낯설게 되고 생소화된 언어이다.”11)라고 하였다.
수필은 그 소재를 생활 속에서 찾아낸다. 따라서 생활이 곧 수필이고, 수필이 곧 생활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너무도 낯익어서, 무심히 지나쳐 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무심한 눈에는 아무것도 띄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으려면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순간, 그 낯익은 것들이 낯설게 보이고, 그 낯설음이 자기 마음속에 어떤 느낌을 안겨 주게 된다. 이정림은 “문학은 이런 충동으로부터 출발한다.”12)고 했다. 또한 박양근은 “낯설게 하기라는 미학적 기법은 형식과 내용뿐만 아니라 수필본질에 대한 실험정신도 포함한다. 가상현실과 실제현실이 상호교차하고, 가상현실은 현실감 있는 사이버공간이라는 점에서 인터넷 시대의 수필은 문학적 형질의 변경을 감수해야 될지도 모른다.”13)라고 하였다. 그는 21세기의 한국수필이 논의해야 할 문제 중의 하나로 가상현실에 적합한 표현양식을 찾는 일로 보고 있다. 여기서 가상현실이란 IT시대의 생활공간으로 상상의 공간이자, 환상의 공간이면서 허구의 공간으로 보고 허구와 상상이 현실이라는 3차원의 현실을 거부하는 관점에서 재단한다면 ‘낯설게 하기’라는 전복적 상상은 가상현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여 준다고 보고 있다.
수필문학은 관념의 형상화를 통해 작가와 독자 사이의 정서적이며 지적인 상호소통을 이루어내는 장르로 주제와 소재 그리고 형식 사이의 결속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미래의 수필은 전통적 방법 즉 평면적 글쓰기에서 입체적인 글쓰기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낯설게 하기의 중요성이 제기된다.
말할 것도 없이 문학이나 예술은 습관적인 지각이나 인식이 당연시하는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함으로써 사물들을 더욱 깊이 있게 인식하게 한다. 즉 언어를 극적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우리의 지각이나 반응을 새롭게 갱신시켜 준다. 따라서 수필문학의 경우, 체험 그 자체만으로는 사물의 감각과 지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대상을 낯설게 하고 형식을 어렵게 하며 지각의 어려움과 지속을 증가시켜야 한다. 슈클로프스키는 이 경우 “지각 과정 그 자체가 예술의 목적이고 또 그것이 될수록 오래가도록 해야 한다.”14)고 했다. 이는 하나의 탁견(卓見)으로 시의 언어에서 이런 경향을 보게 된다.
3. 낯설게 하기와 수필미학과의 관계
수필문학에서의 문학적 ‘낯설게 하기’의 구체적인 구현 방법을 탐색하기 전에, 먼저 문학적 낯설게 하기가 수필의 미학과 어떤 상관 관련이 있는가부터 살펴봐야 할 줄 안다.
슈클로프스키의 지적과 같이 낯설게 하기는 낯익은 대상을 낯설게 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지각과 인식의 시간을 연장할 수 있게 한다. 최근 안성수는 「낯설게 하기와 수필 작법」15)에서 낯설게 하기의 창작 기법으로 소재 선택, 기법, 구조, 의미화의 차원 등으로 미적 효과를 검토한 일이 있다. 그 견해는 비교적 논리 정연하고 수필 창작에 시사하는 바 크다고 여겨진다. 그의 견해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재 선택의 차원에서 ‘낯설게 하기’는 개성 있는 글감과의 만남을 통하여 달성될 수 있다. 특이한 글감을 찾아 형상화함으로써 독자들의 감수성을 낯설게 자극하는 효과를 준다.
둘째, 기법의 차원으로 낯설게 하기의 차원에서 동원되는 모든 창작 기법은 대상을 자동화의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일탈의 전략으로 감동의 충격을 강화시킨다. 시점 바꾸기, 몽타주, 콜라주, 병렬법, 의식의 흐름, 객관적 상관물 등의 다양한 기법이 사용될 수 있다.
셋째, 구조의 차원으로 문학적 이야기 구조는 미적 감동을 목적으로 한 사건과 행동의 재구성과 재배열을 통해 조직된다. 액자를 이용한 삽입형의 이야기 구조, 패턴을 이용한 반복형 이야기 구조의 병렬구조나 몽타주와 콜라주를 이용한 파편구조가 이에 해당한다.
넷째, 언어표현의 차원에서 일상어의 자동화, 타성화, 상투화를 벗어나 낯설게 함으로써 감동의 충격을 주는 방법으로 문장의 도치, 낯선 강조의 기법, 독특한 문체가 그것이다.
다섯째, 의미화 차원에서 일상적, 상투화된 낯익은 주제 해석으로부터 낯설고 새로운 주제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이들은 한마디로 일상화되고 상투적인 수필 쓰기에서 수필문학의 본질을 찾아보자는 견해일 것이다. 이는 “슈클로프스키의 주장과 같이 자동화된 타성화로부터 벗어나 대상의 참모습과 참 감각을 되찾고, 지각의 자동화로부터 대상을 해방시켜 보여 주려는 명시(明示)의 전략에 다름없다.”16)고 하겠다.
4. 수필에서의 ‘낯설게 하기’의 구체화
문학에서의 ‘낯설게 하기(Verfremdung)’의 구조는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걸려 있는 흰색의 직사각형 그림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위르겐 링크는 그의 저서 『기호와 문학』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관찰자는 비스듬하게 걸려진 실제의 그림만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걸려 있는 모습도 상상 속에서 동시에 인지한다. 모든 낯설게 하기 구조의 이 두 가지 근본 요소를 자동적 영상과 새로운 상이라고 한다. 관찰자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비교하면서 자동적 영상(테제:These)과 새로운 상(안티테제:Antithese) 사이의 차이점을 확인한다. 우리는 이 차이점을 질적 차이라고 부른다.”17)고 했다.
여기서 관찰자는 이 모든 것을 동시에 인지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하나의 새롭고 복합적인 기호가 탄생하며, 이 기호는 낯설게 된 기호 또는 낯설게 하기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필문학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런 문학적 낯설게 하기가 응용될 수 있을까. 이제 그 구체적인 방법을 최근 발표된 작품들을 통하여 짚어 보고자 한다.
4-1. 언어적 차원의 낯설게 하기
일상어는 자동화, 타성화, 상투화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 일상어에서 벗어나 언어적 차원에서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 감동의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의 도치나, 낯선 강조의 기법, 독특한 언어나 문체의 사용으로 독자를 낯설게 하면서 미적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여송의 「세상 나누기」는 흥부네 박 하나가 두 동강이로 갈라져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상품광고를 화소로 하여 특이한 발상을 일으킨다. 작가의 창의성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안성수의 견해와 같이 “박을 두 조각, 세 조각, 네 조각, 다섯 조각으로 가를 때마다 상호 모순된 상극의 조화, 셋이 이루는 어울림, 넷이 어울리어 만들어내는 포용력과 통찰력, 다섯이 만들어내는 다층적 울림을 보여 준다.”18)고 했다.
“대박 터졌다!”
커다랗게 부푼 흥부네 박 하나가 두 동강이로 갈라져 나둥그러진다.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온다. 박을 켜던 사람들의 눈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간적으로 ‘두 쪽‘이란 생각에 잡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떤 상품광고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리저리 궁리를 한다. 어디를 배경으로 잡을까. 어떻게 스케치를 할까. 무슨 색상을 입힐까. 몇 날 며칠을 생각에 잡혀 끌려 다닌다. ‘하나인 세상을 명징하게 나눠 봐?’ 짓궂은 착상에 닻을 내린다. 옳거니! 불끈 쥔 주먹이 허공에 대고 힘을 찍는다. 기를 모은다. 포개 놓은 기왓장을 깨듯 손날을 세운다. 내리친다. 강얼음이 “쩡!”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낸다.
음양(陰陽), 선악(善惡), 명암(明暗), 흑백(黑白), 진퇴(進退), 천지(天地), 미추(美醜), 진위(眞僞), 주야(晝夜), 종횡(縱橫), 강산(江山)…….
(중간 생략)
희노욕구우(憙怒慾懼憂),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당우하은주(唐虞夏殷周), 지신인엄용(智信仁嚴勇), 황백적홍청(黃白赤紅靑),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한열풍조습(寒熱風燥濕), 시청후미촉(視聽嗅味觸),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청황흑녹적(靑黃黑綠赤),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희노애락욕(喜怒哀樂慾),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개걸윷모…….
찾아낸 보물 다섯 조각을 꾸러미에 꿴다. 다층적이고 풍부한 울림을 토해 낸다.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든다. ‘도’와 ‘모’ 사이에 ‘개’와 ‘윷’이 끼여 서자 ‘걸’이 또 그 사이를 파고들어 나란히 선다. 단어들이 늘어서서 동갑내기들 모양으로 어깨동무를 한다. 두툼하게 쌓인 하얀 눈이 고랑을 지워 나가듯 세상을 보는 눈높이가 엇비슷해진다. 나누어질수록 차이가 무너져 내리면서 어우러진다. 가까이서 보면 색종이만 있을 뿐인데 멀리서 보면 일사불란하게 변화하여 탄성을 자아내는 매스게임이듯 공동체를 이룬다.19)
‘음양(陰陽), 선악(善惡)’과 같은 2자 성어가 60개, ‘천지인(天地人), 의식주(衣食住)’와 같은 3자 성어가 32개, ‘천지일월(天地日月), 동서남북(東西南北)’과 같은 4자 성어가 32개 그리고 ‘희노욕구우(憙怒慾懼憂),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과 같은 5자 성어가 15개로 되어 있다. 이렇듯 낯선 소재지만 이를 통해 “쪼갠 조각들을 유수히 들여다본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시근이 멀쩡하고 당당하다. 그렇다고 혼자만의 비장한 구호는 내세우지 않는다. 서로 손잡고 뭉쳐야 여물고 단단해진다는 이치를 꿰뚫고 있다.” 단어의 조합생성의 원리를 통해 그 이미지를 통합함으로써 갈등과 분열을 통합하는 현실비정과 교훈이라는 주제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이다.
4-2. 이종결합의 낯설게 하기
새로운 시대에는 문학도 스스로의 아집과 패각(貝殼)을 깨고 타학문이나 장르와의 교류를 활발히 진행하는 복합예술이 될 것이다.20) 이른바 퓨전 즉 이종결합(異種結合)이다. 문학과 영상, 문학과 음악, 문학과 미술이 혼합될 뿐더러, 문학 내부에서도 장르별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장미의 이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도 21세기에는 각가지 문화가 뒤섞인 잡종적 혼합이 될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따라서 퓨전을 미래의 비전(Future Vision)으로 풀이하기까지 한다.21) 낯설게 하기는 이런 이종결합에서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구체적인 수필의 예를 최근 발표작품을 중심으로 찾아보고자 한다.
수필가 권현옥은 이런 실험정신에 충실하고 있다. 그의 수필집 『갈아타는 곳에 서다』에 발표된 수필 「감호소에 살다」를 보자.
#발단 ‘데드맨 워킹’을 보다
‘우리는 사형수다’라는 제목 아래 이탈리아의 1급 사형수의 사진과 ‘사형선고’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가 있다. 이 자극적인 광고로 베네통 회사는 재미를 톡톡히 보았고 베네통 모델 사형수는 열애에 빠졌다고 언론에서 보도한다. 상업적 각인을 위하여 잔인한 살인자를 모델로 써야 하며, 필요 이상의 관심과 호감으로 선악의 대가에 혼란을 주는 일은, 잡힐 듯한 진실을 물너울과 굴절이 방해하는 것과 같다. 착실하지만 어려운 사람에게 봉사와 경제적 도움으로 힘을 북돋아 주고 사랑을 나누어도 좋은 세상인데 말이다. 처음엔 이 생각이 나를 악다구니로 옭아맨다.
영화 ‘데드맨 워킹’ 속 주인공의 강렬한 눈빛이 심장을 관통한다. 강간, 살인, 도주, 뻔뻔한 부인, 비열한 허세, 음산한 배경 음악. 한동안 악몽 같은 화면이 되살아나고 수잔 서랜드가 열연한 수녀의 지고지선에 강한 반발이 요동한다. 죄수에게 친절을 베풀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이 그토록 보고 싶은 것일까. 나에게도 분노를 갖고 있음이다. 분노가 죄의 동기가 된다는 것을 안다. 나를 옭아매던 분노가 서서히 풀리면서 그것은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것을 이해하게 된다.
죄를 부인하고 삶을 빈정대던 주인공은 마지막 사형대에 누워, 사랑이 얼마나 따뜻한 것인가를 느끼며 수녀의 작은 속삭임에 젖은 눈을 감는다.
“사랑을 느껴 보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감정을 갖고 가세요.”22)
이 수필에서는 소재의 신변화, 발상의 정체성에서 벗어난 실험정신이 나타난다. 소설의 구성과 같이 발단-전개-절정-결말을 취하고 있다. 즉 발단(‘데드맨 워킹’을 보다)에서 1급사형수의 사진과 ‘사형선고’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를 화소로 사형대의 모습을 서두로 하고 있으며, 전개(감호소에 가다)에서는 노출된 자와 노출되지 않은 자를, 절정(죄를 짓다)에서는 종교로 위장한 인간의 행동에 대한 회한과 갈등을, 결말(감호소에 살다)은 “우리 모두는 죄가 노출되지 않았을 뿐이지 죄가 없는 자는 아니다. 죄가 노출된 자들이 감옥에 갇혀 그들의 죄를 회개한다면, 우리는 다만 노출되지 않은 죄로 자유로울 뿐이다.”라는 삶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23)
굳이 소설의 구성을 택할 필요가 없음에도 그는 이 수필에서 일반적인 수필의 구성을 벗어나고 있다. 일종의 퓨전적 발상일 것이다. 수필 속에 소설구성을 이종결합 함으로써 효과를 배가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언어가 갖는 미적 형상화의 단아한 맛을 배제시킨 실험적 기교로 볼 수 있다.
조영숙의 「혀」 역시 평범한 소재를 희곡화하여 발상의 전환을 보인다. 문학 장르의 퓨전이면서 구성상의 낯설게 하기일 것이다.
1. [우물가]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보리밭에 머물러 파도친다.
아낙1 : “어제 해질 무렵, 구장 딸 금네가 보리밭에서 기어 나오는 것을 내 눈으로 봤어.”
아낙2 : “뻔하지. 감나무 집 학상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재미 본 거지.”
아낙3 : “구장 딸이면 뭐 혀. 머리에 피도 마르기 전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디.”
이 때 발소리가 들린다.
학생4 : “그 동안 안녕하셨슈. 방학이 되어 지금 경성에서 내려오는구만요.”24)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세상인심을 경계하고 ‘혀’의 잘못을 고발하는 비판적인 수필이다. ‘우물가 두려움 간접살인 말대로 가지 많은 나무 혀는 죄가 없다’의 여섯 축으로 된 이 수필은 희곡체로 구성하여 혀의 잘못을 고발하지만, 주제는 그 혀의 ‘죄 없음’을 의미화하고 있다. 1-4까지는 희곡체이지만, 5-6은 수필 형태의 구성을 택하고 있다. 최근 연예인 X파일이 인터넷에 유포되어 시끌시끌하다. 거짓말이 많기도 한 세상이다. 이런 세태에 대한 비정(批正)의 수필일 것이다.
최이안의 수필집 『바람은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에는 수필 속에 시편 같은 「지하철」, 「위로」, 「유진박」 등이 발표되었다. 이들 작품 중에 「위로」의 전문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높은 하늘이 파랗다.
떠가는 구름이 하얗다.
흔들리는 잎들이 푸르다.
한구석 민들레꽃이 노랗다.
때로는 단순한 색이 위로가 된다.25)
이는 누가 보아도 한 편의 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수필집 속에 한 작품으로 발표하고 있다. 혼란의 와중, ‘좌와 우’, ‘흑과 백’, ‘밝음과 어두움’, ‘진실과 허위’가 혼재하여 진실이 가뭇없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그래도 단순한 색이 보여 주는 세계가 가장 위로가 되는 부조리한 현상을 주제로 한 이 글은 어쩌면 시편이라기보다 앤솔러지, 아니면 경구(警句)라고나 할까. 이를 수필로 보는 데에는 산문이냐 운문이냐 하는 수필문학의 산문성으로 인해 문제가 제기되겠지만, 일단 작가의 실험적 태도로 보아 수필어가 보여 주는 낯섦으로 인해 새롭게 다가온다.
잘 알려진 수필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은 옴니버스식 구성을 택하고 있다.
먹을 만큼 살게 되면 지난날의 가난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가 보다. 가난은 결코 환영할 만한 것이 못 되니,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생활에도 아침 이슬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회상이 있다. 여기에 적는 세 쌍의 가난한 부부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옛날이야기지만, 내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을 안겨다 주는 실화(實話)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신혼 부부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편이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였다. 남편은 실직으로 집 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을 했다.
“어떻게든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 놓을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오.”
출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어서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수저를 들려고 하다가 문득 상 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王侯)의 밥, 걸인(乞人)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낯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순간,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행복했다. 만금(萬金)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었다.26)
세 가족이 보여 주는 가난 속의 행복 찾기를 입체적이고 진솔하게 진술하면서, 전지적 서술과 1인칭의 서술을 함께 취해, 가난 속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인간애와 행복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이 수필은 소설적 구성법을 차용한 이종결합으로 퓨전적 발상에서의 구성의 낯설게 하기를 도입한 수필로 여겨진다. 잘 알려진 계용묵의 수필 「구두」나 피천득의 「은전 한 닢」도 그러하고, 안병욱의 「행복(幸福)의 메타포」 역시 세 사람의 석공(石工)의 이야기를 병렬로 구성하여 행복의 참된 의미를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다.
앞서의 수필작가 권현옥의 실험적 기교의 수필 「시트콤 아파트」를 다시 보자. 그는 13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나는 관음증 환자는 아니지만 관음증 증세는 있다.
들여다보이는 것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은 바보짓이다. 죄책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재미있다. 인생은 하나님도 즐기시는 시트콤(situation comedy)이 아닌가. 그만그만한 일상도 웃고자 하는 방청객이 있어서 코미디가 된다. 나도 가끔은 웃음 효과를 내는 방청객이 되고 싶다.
1층
가장 궁금한 집이 1층이다. 처음에 대한 관용적(慣用的)인 정서이며 눈높이에 있어서다. 불행하게도, 버티컬은 밤낮으로 완벽한 경호를 한다. 막이 오르기 전 무대의 거만함처럼,
우리는 1층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약오를 건 없다. 그들 역시 밖의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2층
남자가 골프 퍼팅 연습을 한다. 여자가 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어느 여기자는 그랬다. “여자들이여, 제발 신문이나 텔레비전 보는 남자 밑을 기어 다니면서 걸레질하지 말라.”
아는 여자가 그랬다. “아무도 없을 때 부지런히 일하지 말라.”
식구가 보는 앞에서 일하라. 가정일이 저절로 되는 건 줄 알더라.
(3-4층 생략)
5층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집만 보인다.
공간이 넓을수록 서로 숨결이 닿지 않는 곳에 있기 마련이다. 한 번도 살이 닿지 않는 넉넉한 거리. 목소리를 놓여야 들리는 거리. 돌아누우면 남자가, 돌아누우면 아기가 잠들어 있는 살 붙는 거리. 13평일 때가 따뜻했다.
[6-12층 생략]
13층
비디오로 영화를 보는지 조명이 근사하다.
여자가 재미있으면 남자가 흥미 없어 하고, 남자가 흥미 있어 하면 여자가 시큰둥하고,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면 어른들은 시시해서 돌아눕고, 어른들이 잘된 영화라 하면 아이들이 그 의미를 모른다. 한 가족이란 이런 상태가 정상적인가 보다.27)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저마다의 삶의 양상을 통해 현실적 사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파해 낸 이 수필은 그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다. 창작 기법의 변화다. 진부한 이야기를 배제하고 장면 묘사를 통해 메시지의 강렬함을 더하게 하는 기법이다.
그런가 하면, 권현옥의 수필 「비, 다섯 개의 이미지」는 시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 비는 아름답다.
둘. 비는 다소 섹시하다.
셋. 비는 혼란스럽다.
넷. 비는 기다리게 한다.
다섯. 비는 차분한 유혹이다.
이렇게 권현옥의 「비, 다섯 개의 이미지」는 담론을 다섯 개의 코드로 나누어 교묘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이를 시적 이미지로 보면 위와 같이 나타난다.28) 이는 시의 언어를 차용한 시적 이미지가 농후한 퓨전이다. “비에 대한 화자의 정서를 열거, 결합시킴으로써 일종의 시적 앤솔러지와도 같은 효과”29)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수필문학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면서 타장르와 이종결합 하는 낯설게 하기의 실험적 방법은 최이안에 이르면 신화와의 결합을 통해 절묘한 창작적 기교를 보이고 있다.
시지프스는 신의 노여움을 사 명계에서 돌덩어리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일을 거듭한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매번 혼신의 힘을 기울여 비탈길에서 돌덩이와 씨름을 한다. 시지프스가 신이 내린 벌을 감당해야 하듯, 주부는 가족에 대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아침상을 차리고, 나갈 준비를 하는 식구들을 거느리고 부산을 떨다 모두 나간 뒤에도 갖가지 일거리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싱크대에는 그릇들이 쌓여 있고, 방마다 침구와 옷가지, 물건들이 흉측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다. 세탁통은 네 식구의 일상 활동의 증거물인 땀 냄새가 밴 옷들로 가득하다.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휘저어졌던 공기 중의 먼지들은 이제야 안정을 찾았다는 듯 사뿐히 가구와 방바닥 위에 내려앉는다.
시지프스는 경련이 이는 얼굴로 바위에 뺨을 비벼대며 진흙으로 덮인 바위를 어깨로 떠받쳐 무게를 지탱하느라 애를 쓴다. 버틴 다리는 후들거리고 온몸은 흙투성이다. 노동에 몰입되어 오로지 돌을 산꼭대기로 올리는 것에만 전념하는 시간이다.
이 방 저 방 오가며 잠시라도 쉬면 바위에 밀리기라도 할 듯 숨 가쁘게 집안일을 한다. 정리가 끝나고 주위를 둘러보면 분위기가 숙연하다. 한숨 돌리는 안도감 끝자락에 기분이 약간 침체된다. 이제부터 다음 일과까지의 짧은 빈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한다. 친구와 약속을 하기에는 시간이 늦었고, 운동을 하기에는 몸이 지쳤다. 신문을 대충 읽고 나서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다. 간단히 차린 끼니를 먹으며 오전 내내 소모한 일과에 대한 회의에 사로잡힌다.30)
이 수필 역시 카뮈의 시지프스와 자신의 일상인 주부의 생활을 접목시켜 퓨전화하고 있다. 이런 수필의 퓨전은 키치라는 대중성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수필로의 변신 즉 시대 변화와 함께 수필의 영역을 새롭게 확대해 보고자 하는 작가 정신을 읽게 한다. 물론 과거와 같은 전통적 수필 쓰기에 길들여진 일반 독자의 눈에서 보면, 이는 다분히 생경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나 현대라는 시대적 시의(時宜)에 걸맞게 그 낯섦이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는 데에서 그 발상의 전환을 높이 사게 한다. 즉 이 수필은 신화와 일상의 이종결합이라는 하이브릿드로서 서로 다른 두 종류를 결합시키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문학에서의 퓨전이라 하겠다.
최이안의 수필 「일상의 바위」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일상적인 것을 벗어나는 데에서 묘미를 찾게 한다. 신의 노여움으로 돌덩어리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일을 거듭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고뇌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변함없는 일상적 주부의 일을 반복하는 삶에 비유될 수도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신화의 내용이지만, 이를 화자의 삶에 절묘하게 인유(引喩)함으로써 낯설게 한 창작적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4-3. 패러디 형식의 복합적 낯설게 하기
패러디가 성립하는 필요충분조건은 패러디 ‘된’ 작품(원전)과 패러디 ‘한’ 작품의 이중구조로 패러디는 모방의 형식이면서 해석의 형식이고, 또 비평의 형식이기도 하다.31)
언어학에서는 “문학적 낯설게 하기가 또 하나의 새로운 낯설게 하기를 만들 경우 이 문학적 낯설게 하기는 자동적 영상으로 이용되어 복합적인 문학적 낯설게 하기를 만들어낸다.”32)고 보고 있다.
기마병들의 새 복장이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다, 찬양해야 할 정도이다.
특히 그 피켈 투구, 뾰족한 창끝이
위로 나 있는 그 투구를.
그것은 그토록 기사도적이어서
지난날의 고매한 낭만주의를 생각하게 하네
(하이네의 시)
이렇게 하이네의 시구에서는 ‘제복을 찬양’하는 반어와 문맥상 암시들이 반어(Irony)를 식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반복되는 칭찬’과 같은 반어 신호로 되어 있다.
모든 문학적 낯설게 하기는 반어의 출발점으로 사용될 수 있어 두운, 모음 각운, 운 등의 기법으로 낯설게 하거나, “앞에는 왕주둥아리 / 뒤에는 왕뚜껑 / 폭스바겐 콤비는 앞에서부터 뒤까지 쓸모 있는 고급 리무진.”과 같이 일상적 표준어와 비일상적 속어를 사용하여 반어적으로 표현하는 언어 차원의 반어적 사용, 군사 문화에서 유래한 ‘위하여!’라는 문구와 같은 사회적 반어가 사용된다.
이보다 더 특정한 복합적 낯설게 하기가 패러디 형식이다. 그 밖에 문학적 몽타주(Montage)로 “모든 걸 생동감 있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네. 사랑은 잴 수 있고, / 사랑의 색은 푸르고, 사랑은 별들을, 개구리들을, / 구름을 움직이게 하네. / 그 소년이 머릿속에서 이 황홀감이 한번도 떠나지 않았다.”(엔첸스베르거의 시)에서와 같이 의미 동의체가 바탕인 텍스트에서 영화의 ‘컷’과 같이 제2의 의미 동의체를 바탕으로 한 다른 단락이 연속되는 경우 그 단절부분을 말한다. 그 밖에 개별 언어가 지닌 비유로써 낯설게 하기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옥자의 패러디 「요지경 열두 마당」은 이런 복합적 낯설게 하기의 실험으로 볼 수 있다.
요순(堯舜)의 백성들은 임금일랑 몰랐건만
한국이란 난파선에 나팔수만 대량생산
내노라는 경제통도 묘수 없는 난항(難航)인데
저마다 끼리끼리 인터내셔널 이코노미스트
신출귀몰 정객들도 천지간이 암흑인데
권력부터 잡고 보자 편법악법 동원터니
조정공론에 끈을 대고 유림마저 매수한 채
쑥덕공론 잠재우려 눈 가리고 아웅하고
한국형 일벌들의 뼈를 깎고 살을 에어
한국형 재벌들은 땅 짚고 헤엄쳤는데
폭풍 속 대설주의보에도 묵묵부답 상책이요
풍전등화 국세(國勢)에도 비대한 몸 사려댈 뿐33)
기존 수필에서 찾아볼 수 없는 3·4, 4·4조의 내재율을 선택하고 있어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 이유를 작가는 “수필은 산문이라는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싶었다. 산문도 운율을 사용할 때 전달력이 상승된다. 고전의 운율을 활용하여 ‘우리말’의 멋과 맛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34)고 했다.
이 수필은 풍자적 요소가 강한 골계적 요소인 즐거움과 야유를 동반한다. 현실비판을 행간에 깔면서 미적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기법일 것이다. 산문이란 형식적 한계에 도전한 실험적 방법이다. 산문의 대표 양식인 수필문학에서 이런 4음보의 도입은 아주 낯설다. 유종호의 언술과 같이 ‘낯설게 하기’는 “형이상학적 비전이나 사회비판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지만, 문학의 언어는 말놀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35)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여기서 놀이는 일과 권태로부터의 해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으스스한 가을날에 소식이나 알자고 한 손은 등걸 잡고, 한 손은 이마 짚어 먼 길을 바라보니 묶인 몸 묶인 두 발로 어찌 온 길을 되짚어 갈 수 있을까. 알뜰살뜰 내 맘을 헤아려 소식 전하는 이도 없으니 무심중에 원망하는 건 손씨녀 뿐이로구나. 원망 끝에 걱정이라 홀로 남은 몸이 괄시는 받지나 않을는지 가뜩이나 굼뜬 놀림에 조석 죽밥은 넉넉하게 드는지.36)
홍억선의 수필 「화령별곡」 역시 가사문학의 3·4조의 음수율과 4음보의 율격을 원용하고 있다. 백천봉의 언급과 같이 “전편을 통해 율격의 파격을 이룬 부분이 적지 않으나 이는 실험수필을 내놓으면서 기존의 수필형식에서 너무 멀리 가지 않고 먼저 독자의 반응을 떠보려는 1차적 시도의 성격이 짙다. 또한, 이 작품은 서술자의 선택에 있어서도 상식을 초월한다. 작가를 서술자로 삼지 않고 망자를 부활시켜 1인칭 주인공으로 끌어 오고 있는 점은 기존의 수필문학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예이기에 논란의 여지로 남는다.”37)라 한 말은 시사하는 바 크다.
4-4. 주제 해석의 낯설게 하기
엄현옥의 수필은 다분히 주제 해석에 있어 낯설게 하기를 실험하고 있다. 「놀이터에서」가 그것이다. 이 수필은 일상적인 수필로서의 놀이터에서의 감상을 서술하지 않고 소재와 주제구현에 있어 낯설게 한다.
긴 사각형의 나무의자에 앉아 본다. 등받이도 없다. 평평한 의자는 길이가 내 키와 비슷할 듯싶다. 한 번 재 보고 싶어 슬며시 누워 본다. 두 팔을 붙이니 전신을 눕힐 만하다. 한 몸 뉘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까스로 몸을 돌려 누워 본다. 옆으로 20층 건물이 비스듬히 보이고 밤하늘도 좁아 보인다. 평소에는 올려다보면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거대해 보이던 아파트였다. 계속 올려다보기가 버거울 정도로……. 그러나 아니었다. 누워서 바라본 건물은 높지도 거대하지도 않았다. 그 곳에서 토닥거리며 사는 수많은 사람들, 몇 년을 아니 수십 년에 걸쳐 마련했을 소시민의 안식처는 그저 아담한 시멘트 건물이었던 것이다.
어둠은 점점 시야를 좁혀 온다. 내가 누운 나무의자는 어느새 편한 요람이 된다. 마지막 내 몸을 뉠 칠성판(七星板)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북두칠성을 본 따 일곱 개의 구멍을 뚫었다던가.
마음이 평온해진다. 굳이 저 시멘트 집 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나를 둘러싼 많은 일들에서 내가 이대로 사라진다 해도 큰일은 없을 것 같다. 굳이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누구에겐가 받아야 할 큰돈도 없다. 이 달에 사용한 카드 대금이야 액수가 엇비슷한 통장 잔고에서 자동 인출될 것이다. 그러나 나만의 비밀번호로 로그인해야 하는 사이버 공간 속의 내 우편함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38)
엄현옥 수필의 발상 전환은 소재주의적 수필쓰기에서 상당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 서정적인가 하면, 지성이 내포되고 탄력 있는 구성과 정련된 수필어가 문학성 확보에 기여하고 있다.39)
이 수필은 피사체를 보는 시선이 고정관념에서 일탈하여 독자를 생소하게 한다. 허리를 굽혀 역도(逆倒)된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다. 아파트 놀이터, 등받이도 없는 나무의자, 그 의자에 누워 화자는 칠성판을 떠올린다. 삶의 무게요, 의미의 반추다. 기계적인 행동반경에서 역도된 세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사뭇 생경(生硬)하지만, 삶에 천착한 무게와 깊이가 새로운 상(Antithese)을 창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여송의 수필 「천자문」은 ‘천자문’이라는 세 글자를 이용하여 언어적 표현의 낯설게 하기로부터 종전에 우리가 보아 왔던 자동화, 타성화, 통속화로부터의 일탈을 보여 준다. 이미 ‘카실러’가 말한 바와 같은 “자세가 달라지면 지금껏 길들여 왔던 감각기능이 달라진다.”40)는 언술과 맥을 같이한다. 천자문의 머리글자로부터 시작하는 이 수필은 세 조각으로 되어 있다. 앞부분과 결미부분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千字의 글자를 갈고랑이로 긁어 모은다. 구백구십구 자도 안 되고 한 자가 덤으로 얹혀도 싫다. 반드시 千 字라야 한다. 그것을 메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나선다. 매의 눈초리가 닿지 않고 야수의 왕자도 밟지 않은 길, 거닐면서 남다른 생각을 건져 올리고 낯선 언어를 찾아내 새로운 文型을 그린다. 야물차고 익살스러우면 더없이 좋겠지.
한석봉 필 천자문. 天地玄黃에서 시작하여 言才乎也로 끝나는 그 속에는 세상의 온갖 것이 들어 있다. 해와 달과 별의 이야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규칙, 자연현상과 인간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질서와 체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내가 쓰려는 천자문은 그런 대단한 글이 못 된다. 천자문에 감히 견줄 수조차 없는 어린아이의 장난질이요, 소꿉놀이다. 하지만 쌓아 올린다. 정자든 초가든 슬래브든 빌딩이든 글자로 집을 짓는다.
(중략)
무엇이 부러우리. 무엇이 두려우리. 열 손가락으로 자판 전부를 다루니 세상이 손안에 있지 않은가. 정녕 엽기다. 가로열쇠와 세로열쇠를 풀어 가며 퍼즐게임 하듯 열 손가락은 신이 나서 뚝딱 文을 세운다. 千字文이란 현판을 내어 건다.41)
발상의 탁월함이 보인다. 언어적 낯설게 하기를 바탕으로 하여 주제표현의 낯설게 하기다. 작가의 관심은 새로움에 있다. 관습화된 신변의 노예에서 전혀 다른 세상의 모습을 본다. 천자문으로 집을 짓는다. 그러기 위해 그는 낯선 언어를 찾아낸다.42) 그리곤 이를 조합하여 새로운 문형을 찾아내고 있다. 발견의 기쁨이요, 발상의 전환이다. 그는 아주 야물차게 집을 지으려고 한다. 설령 “어린아이의 장난질이요, 소꿉놀이”라도. 천자의 글자를 갈고랑이로 긁어모아 집을 짓는 작가의 진통과 고뇌. 수필이 ‘자기 얼굴 그리기’라면 그는 낯선 언어로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같은 계열의 작가로 수필의 실험적 쓰기를 실현하고 있는 조재은의 수필도 소재의 낯섦에서부터 출발한다. 수필의 소재를 보는 작가의 ‘눈’의 변화. 관습적이고 통상적인 작가의 시선이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는 경우다. 그의 수필 「혈의 누 이야기」는 소재의 변용과 전환이 일어난다. 적혈구의 피돌기를 화자는 ‘혈의 누’라는 다소 생경한 변용과 치환을 통해 낯설게 한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흔히 보아 오던 수필의 세계와 다른 시선의 변화, 일테면 현상을 뒤틀어 보는 발상의 전환일 것이다.
오늘도 우리 집에 지진이 일어났어요. 넘어지고 깨지고 서로 부딪치고, 짧은 동안의 동요지만 수습하는 데는 시간이 걸려요. 주인의 청각 신경을 통해 어떤 소식이 들어왔거나 잠을 못 잤거나, 몸을 혹사했나 봐요. 요즈음 이런 일이 예전보다 자주 일어나요.
난리를 겪고 나면 내가 운반해야 할 산소의 양이 줄어들어요. 그러면 나와 친구들은 할 일이 적어져 열심히 움직일 필요가 없게 되고 우리 몸이 더러워집니다. 그때 노르아드레날린이 나와서 제일 좋아하는 친구는 아세티코린인데, 이 친구가 오는 날은 축제 같아요. 깨끗한 물을 마시며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런데 이 친구 만난 지가 너무 오래됐어요. 너무 오래 그를 못 만나서, 그를 만나기 위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어요. 내 상태가 어떤지 주인이 알아야 하거든요. 내가 격렬하게 움직이니까 주인이 힘들어 하더군요.
주인은 가슴에 손을 대며 간절히 기도를 했어요. 나는 정신없이 뛰어가다 맑은 종소리를 들은 듯했어요. 이 소리에 내 발길은 평정을 찾았지요. 주인의 얼굴에 안도의 엷은 미소가 떠오르네요.43)
화자는 물론 작가 자신이지만, 내포작가는 적혈구다. 내포작가의 언술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수필의 진행은 피돌기를 통해 혈액의 오염을 보여 주고 있다. 최초 생성 당시인 아기 때에는 “밝은 붉은빛”이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몸에 붙은 찌꺼기를 많이 떨어뜨려서 흑갈색으로 더러워진” 혈액이다. 이유는 도시의 매연과 연기 때문이다. 그런 적혈구가 피돌기를 계속한다. 인간의 생명이란 한마디로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부사나 형용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시원의 단어가 바로 생명이다. 결국 이 수필은 소재와 제재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주면서 주제의 의미화에 성공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 발표된 최이안의 수필집 『각트의 가벼움』은 주제 해석의 낯설게 하기를 잘 보여 주는 예일 것이다. 「크로스오버」나 「위악시대」같은 작품들이 이런 일련의 실험적 작법에 의해 창작된 작품으로 보인다.
각트는 가벼움을 추구해야 해. 다방면에서 가벼워지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해. 가벼움만이 아름다움이자 초월로 향하는 길이야.
우선은 몸이 가벼워야 해. 군살은 미련함과 게으름, 욕구불만의 증거이거든. 온갖 다이어트 식품과 운동기구, 요법과 수련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래도 살이 안 빠지는 부위는 병원에서 주사기로 지방을 뽑아내면 돼. 마른 몸매는 사회적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조건이고, 신분을 나타내는 척도야. ‘뚱뚱함’이란 표현은 ‘날씬함’의 단순한 반대 의미가 아닌 혐오와 무능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가 되었어. 몸이 가벼워야 세상을 더 흥겹게 살아갈 수 있어.
인간은 각트일 뿐이니까.44)
이 수필은 구어체의 문장으로 후렴구를 사용하여 경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각트(GACT)’란 인간의 몸을 이루는 4가지 유전자 기호인 Guanine, Adenine, Cytosine, Thymine의 첫 글자의 합성어다. 신조어의 조작으로 된 어휘상의 문제도 그러려니와 화자가 가벼움을 주장하는 것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하다. 작가의 교묘한 이중 장치일 것이다. 이 수필은 기존의 인식을 뒤엎을 만한 기상천외한 발상은 아니어도 윤재천의 말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상징적 기호인 언어를 통해 일정한 공간 위에 정착시킨”45)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세계는 의식의 파격, 현대인의 기만성에 대한 고발이겠지만, 작가의 의도와 달리 감상적인 전통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점이 지적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변화다. 철저한 작가 정신에 의해 구축된 그만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다음은 ‘2005’를 소재로 어느 고등학교 학생의 작품이다.
나에게는 남과 다른 버릇이 있다. 차 번호판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숫자들을 조합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왼쪽부터 차례대로 곱하기가 성립하는 번호판을 좋아하는데, 예를 들자면 2714라든가 4312 같은, 눈에 보이면 바로 구구단이 떠오르게 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2005라는 숫자도 마찬가지다. 비록 왼쪽부터 차례대로 곱해서 성립하는 구구단 숫자는 아니지만 앞에 있는 20을 분자로 올리면 깔끔하게 나누어 떨어지는 숫자 ‘4’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다시 20을 만들 수도 있다. 몫인 ‘4’와 분모였던 ‘5’를 재결합하여 4520이라는 새로운 번호판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번호판 숫자들인 4312나 8756, 4520 중에서도 가장 정감이 가는 것은 4520이다. 20이라는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결과물과 맨 처음, ‘사오’라고 발음되는 어감이 꽤나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46)
소재를 낯설게 본 작품의 예로 글쓴이의 시선에 따라 발상의 창의성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5. 나가는 말
수필문학의 질적 저하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다. 과연 수필문학에 대한 질시와 폄훼를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문제는 외적 요인보다 수필을 창작하는 작가 자신 즉 내적 요인이 더 크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수필 작가는 마땅히 변화에 민감해야 할 일이며, 새로운 수필쓰기에 정성을 다해야 할 줄 안다. 문학의 정체성 찾기와 실험정신은 그 길이 될 것이다. “정체성의 축이 구심력이라면 장르의 전통을 계승해 나가면서 문학적 지배 영역을 확충해 가는 실험정신은 원심력에 해당한다.”47)고 했다.
그러나 수필문학은 그 동안 이런 변화의 수용을 위한 실험정신에 민감하게 대응해 오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이는 일종의 수필쓰기에 대한 저항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저항이 수필창작에 새로움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되었음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수필쓰기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에 대한 실험적 모색이 있어야 할 것이다. 수필창작의 낯설게 하기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여기 낯설게 하기라는 다소 생경한 실험적 방법은 시대정신과 역사적 환경에 대처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 길은 미래에 대한 도전과 모색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21세기의 작가다. 21세기란 시대의 변화는 다분히 미래에 대한 예측을 불가능하게 한다. 성민엽은 이런 시대의 특징을 “문학과 관련하여 모든 것들이 극도로 불투명해져 있고, 그 불투명한 액체성의 공간 속을 오늘의 작가는 헤엄친다. 그 불투명한 액체성은 한없이 끈끈하기만 하다. 문화산업과 멀티미디어, 사이버스페이스가 이를 움직이는 후기산업사회의 자본과 권력이 강한 접착력으로 헤엄치는 동작을 옭아맨다. 그 불투명에 눈멀고 그 끈끈함에 속박되어 그의 헤엄은 너무도 힘겹다. 그러나 힘에 겨워 그가 헤엄을 멈추는 순간 그는 저 깊은 늪의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48)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변화에 민감한 작가야말로 새 시대를 이끌 것이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현대는 대량 생산의 시대다. 속중화(俗衆化) 현상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듯 예술성보다는 대중적인 키치가 더 관심을 끌고 있다. 아무리 시대가 이를 요구한다 해도 분명한 것은 예술 그 자체의 순수성일 것이다. 수필문학에서의 낯설게 하기는 바로 그 순수를 지키는 길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 길은 미래 문학으로 수필문학이 발돋움하게 되는 길이요, “문학의 위기라는 담론이 무성한 이 시대에 수필문학만의 성을 쌓는 일”49)이 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