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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법자 타운
강 건너편의 강북 강변도로를 달리는 차량들의 불빛만 보일 뿐 한강은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밤 11시 30분이 되자 차츰 한산해진 고수부지에 습기를 띈 바람이 지나가자 휴지조각 몇 개가 강 쪽으로 날아갔다. 이제 가을도 중턱에 다다른 10월 중순이었다.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안인석이 머리를 돌려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
박미정이 생각에서 깨어난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아무 생각도.」
「술 한 잔 더 할까? 맥주 더 사와?」
「아니, 술은 이제 그만. 맨날 만나면 술만 마신 것 같아, 우린.」
차 안에는 다시 정적이 덮였고 그들은 각기 상대방의 숨소리를 듣는다. 머리를 강 쪽으로 하고 주차한 차 안이라 발밑에서 시멘트 제방에 부딪치는 물결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오고 있었다.
머리를 의자에 기댄 안인석이 앞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평범한 놈이야. 난 내 자신을 잘 알아, 경쟁사회에서의 끌 위치를.」
「변화를 두려워하는데다가 의지도 집념도 약해 환경 탓이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워,」
「이제 그만해.」
박미정이 부드럽게 그의 말을 잘랐다.
「나는 그런 인석 씨가 편안하고 따뜻해서 좋아. 난데없이 왜 그런 소리를 해.」
「널 사랑해.」
핸들을 움켜쥔 안인석이 강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자꾸만 비교가 돼. 자신이 없어지고.」
다시 차 안에 정적이 깔렸고 차창을 통해 들어온 강바람이 그들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박미정이 한 손을 뻗어 핸들 위에 놓인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나도 인석 씨가 좋아.」
안인석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와락 끌어안았다. 박미정은 거부하지 않았다. 품안에 안긴 채 눈을 감은 박미정을 향해 안인석의 입술이 돌진하듯 부딪쳐왔다. 그런 안인석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안인석은 몹시 서둘렀다.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열고 갈증 난 사람처럼 혀를 빨아들이며 그녀의 온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겨우 입술을 뗀 박미정이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인석 씨, 이제 그만해.」
그녀가 가슴을 힘껏 밀자 안인석이 아쉬운 듯 몸을 뺐다. 그러나 아직도 호흡이 거칠다.
「늦었어. 데려다 줘.」
두 손을 뻗은 박미정은 그의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잡아주었다.
「어서.」
엔진의 시동을 걸고 후진 기어를 넣은 안인석이 아직도 초점이 없는 시선으로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비교도 하지 말고. 오늘은 너무 늦었을 뿐이니까.」
다음날 아침, 출근한지 30분도 되지 않아 방문객의 연락을 받은 안인석은 회사빌딩 지하실의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커피숍 안에는 손님이 두 사람밖에 없었는데 그들이 그를 찾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가 다가가자 그들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쁘신데 미안합니다.」
그중 나이가 젊은 30대 사내가 신분증을 내보였다.
「우린 안기부 수사관이오. 이분은 저희 상관이신 김계장님이시고.」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치고 나자 30대 사내가 대뜸 입을 열었다.
「우린 김상철 씨 문제 때문에 왔습니다.」
안인석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김상철 씨하고는 절친한 사이로 알고 있는데.」
사내가 조금 뜸을 들이고 나서 물었다.
「혹시 김상철 씨 소식 듣지 못했습니까?」
「소식이라니요? 저는 실종되었다고만 들었는데요.」
눈을 크게 뜬 안인석이 되묻자 김 계장이라는 사내가 나섰다.
「실종되었지요. 하지만 아직 시체를 찾지도 못한데다 그 사람은 살인혐의자라서요.」
「만일의 경우도 대비해야지요. 예를 들면 살아서 안 형한테 도움을 청한다든가 하는 경우 말이오.」
「그럴 가능성은 있습니까?」
「만일의 경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경우에 안 형이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지는 알고 계시지요?」
「‥‥‥」
「우리한테 즉시 신고하지 않으면 곤란하게 되십니다. 우정 때문에 안 형도 인생을 망치게 된단 말이오,」
「나한테 협박하시는 겁니까?」
안인석의 얼굴이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친구를 팔아먹을 놈 같습니까? 사람 우습게 보지 말아요.」
사내들은 뜻밖이라는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눈을 부릅뜬 안인석이 다시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이 살아만 있다면 난 무슨 일이라도 할 거요. 설령 내가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을 살려낼 거요. 그러니 당신들 마음대로 해요.」
「이것 보시오, 안 형. 진정하시오.」
김 계장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그는 상반신을 굽히고는 안인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우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요, 안 형. 우리는 만일의 경우라고 했소. 그러니까 너무 흥분하지 말아요.」
「그 자식 동생도 충격을 받아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교도소에 있는 아버지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 자식이 살아 있다는 것만 해도 축복이오.」
안인석이 다그치듯 물었다.
「살아 있습니까? 살아 있으니까 이렇게 날 찾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상체를 의자에 기댄 김 계장이 안인석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실종이요. 유감스럽게도.」
「확실합니까?」
「실종이 확실하냐구? 그렇소. 확실해요.」
「하지만 그자는 살인범이란 말이야. 실종되었다고 수사를 끝낼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게지. 더구나 안기부 요원을 살해한 자란 말이야.」
「‥‥‥」
「하긴 그자는 차라리 실종된 채로 있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시베리아의 여름은 두 달이다. 트럭의 조수석에 앉은 김상철은 차체와 함께 흔들리면서 다시 눈에 덮인 겨울 평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은 구릉과 잡목림 지대를 지나는 수송단은 백여 대의 트럭으로 구성된 긴 대열이었다. 그러나 시속 20킬로의 속력이어서 길가의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도 눈에 선명하게 비쳐진다.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으나 짙은 회색하늘은 어두웠고 가끔씩 눈발이 흩날리는 것이 곧 눈이 쏟아질 기세였다.
운전석에 앉은 니콜라이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그는 10대 중반의 사내로 이 수송선단의 책임자이자 블라디보스토크 운송회사 간부였다. 엄청난 양의 화물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임차지까지 운반하는데 근대그룹 자체의 운송수단으로는 부족했으므로 러시아의 운송회사들은 지금 호황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저녁 늦게 근대시에 들어가겠군. 이번에는 전보다 하루 늦었어.」
니콜라이가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전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난 이런 곳에서는 못 살겠어.당신도 돈 좀 모으면 도시로 나오라구.」
차가 다시 심하게 흔들렸으므로 그는 말을 멈추었다.
파리야킨의 저택을 나온 그가 운송회사의 니콜라이를 만나 300달러에 임차지까지의 동승을 부탁한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이제 임차지에는 고용된 노동자들만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정식으로 가족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노동자의 가족들이 떼를 지어 임차지로 들어가는 상황이어서 유전 근처의 노동자 숙소 주변에는 이미 꽤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는 니콜라이에게 막일거리라도 찾기 위해 임차지로 들어간다고 말했으나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것저것 캐묻지도 않았으므로 그들이 일주일간 나눈 이야기는 몇 마디도 되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다시 하품을 하더니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한 달쯤 전에 2백 달러씩 받고 두 놈을 태워주었어, 그놈들은 이르쿠츠크에서 강도짓을 하다가 도망쳐 왔다더군, 임차지에 들어가서 한밑천 잡고 나온다고 떠들어 대더라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이 들어갑니까?」
「그런 놈들뿐만이 아니야. 뒤쪽 차에는 보드카가 2천병이나 실려 있어. 지난주에 들어간 수송단에는 50명이 넘는 여자가 타고 있었다네.」
「‥‥‥‥」
「숙소 근처의 마을에는 없는 것이 없어. 근대에서도 어지간한 것은 눈감아 주는 모양이야. 사내 녀석들이 3만 명이 넘게 우글대는데 할 수 없는 일이지.」
이야기하는 사이에 어느덧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눈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다.」
니콜라이가 투덜거리며 윈도우 브러시를 작동시켰다.
「마을에 가면 경비소를 조심하게. 그놈들은 신분증에 이상이 있으면 가차 없이 잡아넣어 버리니까.」
전조등을 켠 니콜라이가 김상철을 바라보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크라우프 바에서는 잡혀갈 염려가 없어. 그곳은 경비소가 봐주는 곳이야. 안나네 갈보집하고. 돈이 있으면 그곳에 죽치고 있는 것이 나아.」
「경비대 가 봐주다니요?」
「그놈들이 사람을 시켜 운영하는 곳이란 말이야. 저 뒤에 실린 술도 그곳으로 배달되는 거야. 근대 놈들은 월급준 것을 그렇게 회수해 가는 거지.」
트럭의 대열은 이제 앞이 탁 트인 평원으로 나오고 있었다. 주위는 눈보라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김상철에게는 낮 익은 곳이었다.
크라우프 바는 마치 서부 개척시대의 술집을 옮겨다 놓은 분위기로 거칠고 난잡했지만 생의 활력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목제 의자와 가구들 대신으로 플라스틱 제품이 놓여졌고 스피커에서는 러시아 노래가 흘러나왔다. 백 평쯤 되는 넓은 바에는 이미 손님들이 가득 차 있었으므로 김상철은 겨우 구석자리를 찾아 앉았다.
손님들은 러시아인과 조선족계가 반반이었는데 그중에는 근대의 마크를 붙인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도 보였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한쪽에서는 고함을 치며 말다툼을 벌리는 무리들도 있어서 바 안은 떠들썩했다.
조끼를 입은 종업원이 사람들을 헤치며 김상철에게로 다가왔다. 얼굴이 말쑥한 조선족 사내였다.
「뭘 드실 거요?」
「보드카 한 잔.」
「한 잔에 1달러, 전표를 쓸 경우 1달러 50.」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두 배나 비싼 술값이었으나 그가 잠자코 달러를 내주자 그는 돈을 나꿔채 돌아갔다.
창고로 가는 도중에 니콜라이와 작별하고 길가에서 내린 그는 겨우 마을로 간다는 트럭을 얻어 탈 수 있었다.
마을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도시계획 같은 것도 없고 근대 측의 허가도 받지 않고 지은 건물들이어서 대부분 목조건물이었지만 십자형 거리는 4면의 길이가 각각 200미터쯤 되었고 도로의 폭은 50미터 가량으로 넓었다. 거리 양쪽의 건물은 모두 술집과 오락장, 이발관, 극장, 여자들이 우글대는 술집 겸 호텔 등으로 니콜라이의 말마따나 없는 것이 없는 환락가였다.
종업원이 쟁반 위에 보드카를 받쳐 들고 다가왔다.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은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돈을 내밀었다.
돈을 받아든 김상철이 선뜻 팔을 뻗어 종업원의 허리춤을 쥐었다.
「이봐, 이건 3달러야. 1달러 더 내라.」
「1달러는 팁이야.」
종업원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경비원을 불러 올까? 밀입국자 놈아.」
김상철의 손을 뿌리친 종업원이 어깨를 펴고 몸을 돌리자 옆자리의 러시아인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분위기로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술잔을 내려놓는 김상철 앞으로 옆자리의 러시아인 한 명이 일어나 다가왔다. 파카를 걸친 수염투성이의 사내였다.
「이봐, 자네 여기 언제 왔나?」
「오늘.」
그러자 사내가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다음에는 큰돈을 주지 말아. 3달러 남겨준 것만 해도 다행이야.」
「그렇다면 강도나 다름없구만, 이놈들은.」
「여기엔 모두 그런 놈들만 모였어.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못 들었나?」
바의 한쪽에서 싸움이 일어났으므로 사내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치고받던 싸움은 우습게 끝이 났다. 종업원 두어 명이 달려들어 싸우던 사내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팬 것이다.
그들이 사내들을 끌고나가자 바 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저놈들은 경비원의 개들이지. 저놈들한테 찍히면 이곳을 떠나야 돼.」
앞에 앉은 사내가 턱으로 종업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주머니에 달러가 있으면 쫓겨날 염려는 없어. 어때? 오늘밤 잘 곳은 생각해 두었나?
「아직.」
「그렇다면 내가 좋은 곳을 소개해주지.」
「안나네 집 말인가?」
「어디서 듣기는 했구만. 그래. 그곳에는 괜찮은 여자들이 많아.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사내가 손을 들어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렀다.
「보드카 두 잔.」
다가온 종업원에게 소리치고 난 그가 김상철의 눈치를 보았다.
김상철이 주머니에서 1달러 지폐 두 장을 꺼내 내밀자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임차지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안나의 집은 북쪽변의 중간 부근에 있는 2층 목조건물이었다.
밤 10시가 넘어 있었지만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흥청거리는 분위기였다. 눈보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북쪽 20킬로 지점에 건설하고 있는 근대시가 밤에는 인적이 없는 유령의 도시가 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노동자 숙소가 1킬로 남쪽에 있는 이곳은 처음에는 회사의 눈치를 봐가면서 한 채씩 가게가 생기더니 회사가 다소 규제를 풀자 석 달 만에 이러한 환락촌이 형성되어 버린 것이다.
김상철이 안나의 집 입구로 마악 들어서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머리를 돌리자 크라우프에서 친절한 척하던 러시아인이다. 그의 뒤에는 동료 두 명이 서 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봐, 우리도 이집 단골이야. 그런데 그렇게 혼자 나가는 법이 어디 있어?」
김상철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럼 당신 먼저 가.」
「입장료가 10달러씩이야. 우린 세 사람인데 30달러만 빌려주겠나?
옆쪽 가게 앞에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떠들썩하게 다투는 중이었고 그들 옆으로 행인들이 지나갔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사내가 한 발자국 다가와 섰고 나머지 두 사내도 벌려 섰으므로 그들은 김상철을 둘러싼 모양이 되었다.
「강도들이로군.」
김상철이 텁석부리 사내를 향해 말하면서 웃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명씩 시체가 되어 버려진다고 말했군.」
그러자 텁석부리가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가 파카 주머니에 든 무엇인가를 앞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우리하고 잠깐 뒤쪽으로 가실까? 반항하면 여기서 쏘아죽일 수도 있어.」
사내가 턱으로 가리킨 곳은 안나네 집 옆쪽의 좁은 골목이다.
일단의 조선족들이 그들의 옆을 지났으나 분위기를 알 만한데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김상철은 텁석부리에게 등을 떠밀려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이라지만 그곳은 앞부분이 탁 트여 있었다. 양쪽 가게의 담을 끼고 30미터쯤 나아가자 눈앞은 허허벌판이었다.
「자, 지갑을 내 놔.」
공터에 서자 텁석부리가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그는 털썩 땅바닥에 엉덩이를 부딪치며 주저앉았는데 잠시 자신이 왜 넘어졌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김상철이 주머니에서 소음기가 끼워진 베레타를 꺼내 남은 사내들을 향해 겨누었다. 사내 한 명이 짐승 같은 외침소리를 내며 두 팔을 들고 덮쳐오자 그를 겨누던 김상철이 마음을 바꾼 듯 베레타를 내렸다. 그리고는 발을 들어 사내의 사타구니를 힘껏 차올렸다. 사타구니를 정통으로 채인 사내는 숨이 끊어지는 듯한 신음소리를 뱉으며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김상철의 발끝에 다시 턱을 찍힌 사내는 뒤로 벌렁 자빠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머지 사내 한 명은 이미 이쪽에 등을 보인 상태였다. 도망치려는 것이다.
그의 등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김상철이 문득 눈을 크게 떴다.
골목 입구에 사내 한 명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도망치는 사내를 향해 두어 걸음 다가가더니 다리를 휘둘러 사내의 옆구리를 찼다. 그리고는 연속 동작으로 사내의 머리를 주먹으로 치자 사내는 금방 땅바닥에 엎어졌다. 베레타를 주머니에 넣은 김상철이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조선족 사내로 뼈대가 굵은 체격이었지만 마른데다가 방한복 차림이었다. 나이는 김상철 또래로 보였는데 다가선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본 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사내가 턱으로 글에 쓰러진 사내를 가리켰다.
「이놈은 급소를 맞아 죽었소.」
그리고는 손을 들어 앞쪽 공터를 가리켰다.
「저 쪽도 숨을 끊어 놔야 뒤탈이 없소.」
사내는 우선 앞에 쓰러진 사내의 목덜미를 만지더니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제 주머니에 넣더니 일어서서 앞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김상철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곧 어둠 속에서 둔탁한 타격음이 들리더니 낮은 비명소리가 났다가 조용해졌다.
마을의 경비소장 고춘식은 근대건설의 창고과장 출신으로 본래 행정직 티오로 왔다가 자원해서 경비대로 옮긴 사람이었다.
건설에 있을 때에는 40대의 나이로 만년과장 노릇을 하며 창고에 박혀,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하던 고춘식이 마을의 치안을 장악하는 경비소장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변신이었다.
경비소는 십자형 도로의 남쪽 끝에 세워진 유일한 시멘트 건물로 근대직원 ~명과 10여 명의 조선족 보조원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사건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언제나 소란스러웠다. 숙소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고춘식이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에도 옆쪽 유치장에서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의 옆으로 어젯밤 당직 책임자였던 변홍근이 다가왔다.
「아침에 시체 세 구가 안나네 집 뒤쪽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모두 러시아인으로 신원을 알아낼 서류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지갑도 털렸겠지?」
소장실로 들어서며 그가 묻자 변홍근도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한 놈은 총에 맞았고 두 명은 맞아 죽었더군요.」
「점점 끔찍해지는군.」
입맛을 다신 고춘식이 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검시는 했나?」
「하는 중일 겁니다.」
「검시 끝나면 인상착의만 기록하고 묻어버려. 그리고 사건발생 현장은 다른 곳으로 적고.」
마을 인구는 3천 명이 넘는데다 강도, 도박꾼에다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쳐온 수배자들이 들끓고 있었으므로 하룻밤 사이에 살인이 다섯 번 일어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살자는 신원을 알아낼 수 있는 증명서조차 소지하지 않았다. 피살자가 증명서를 아예 가지고 다니지를 않던가 살해하고 나서 살해자가 증명서를 없앤 것이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고춘식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차라리 나았다. 시체의 신원이 확인되면 러시아 정부에 넘겨야 했고 곧 귀찮은 조사서를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참, 어제 저녁에 보드카 2천병이 들어왔습니다. 크라우프 바의 창고에 넣어 두었는데 바칼레프가 병당 15달러씩 500병을 사겠다는데요.」
변홍근이 말하자 고춘식이 코웃음을 쳤다.
「그놈, 간이 부었군. 500병이면 18달러를 내라고 해. 특별히 봐주는 것이니까.」
「그 값이면 가져갈 겁니다, 소장님.」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병당 3달러짜리 싸구려 보드카를 들여와 술집 주인들에게 20달러 가까운 가격으로 넘기고 있었다. 술뿐만이 아니다. 갖가지 일용품은 물론 마약까지 들여와 가게 주인들에게 엄청난 이윤을 받고 넘기는 것이다. 가게주인은 가끔 독자적으로 물품을 구입해오기도 했지만 만일 그것이 발각되면 경비원들의 검문으로 영업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변홍근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경비소의 부소장으로 근대건설의 현장에서 자재를 맡았던 경력이 있다. 그 경험이 이곳 근대마을에서 아주 적절하게 이용되고 개발되는 중이었다.
「어제 단장님 모신 회의 때 무슨 말씀이 없었습니까?」
「특별한 말씀은 없었어, 근대직원이 사고치게 하지 말라고만.」
「근대 근로자의 사고율은 거의 없습니다. 죽고 다치는 것은 쓰레기들이지요.」
변홍근이 의자를 당겨 다가앉았다.
「최태호가 북쪽 끝에 갈보집을 짓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둬.」
고춘식이 고급 시가를 물면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욕심이 많으면 사고가 나, 알겠나.」
「마을은 두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형편이오. 하나는 경비소장 세력, 또 하나는 북한쪽의 최태호 세력이지요.」
의자에 엉덩이 끝만을 걸친 송길수가 김상철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경비소장은 최태호를 쉽게 건드리지 못합니다. 최태호는 수십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있는데다가 근대 근로자 상당수가 지원하고 있어서.」
안나네 집의 2층 방 안이다. 그들은 어젯밤 백 달러씩을 주고 여자와 함께 잠을 잤는데 물론 김상철이 계산을 했다
어젯밤부터 토막으로 들은 송길수의 내력은 나이가 스물여섯에 유지노사할린스크 태생으로 그곳에 아직도 부모형제가 있다고 했다. 그도 트럭 뒷칸에 실려 임차지로 들어온 밀입국자 신세였는데 그렇게 된 사연은 말하지 않았다. 크라우프에 앉아 있다가 김상철을 우연히 보았고 러시아 건달들이 그를 뒤쫓아 나가는 것을 보고 도와주러 따라왔다는 것이 그를 만난 인연이다.
「경비소장이 이렇게 해먹는 것을 개척단 본부에서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혼잣말처럼 김상철이 말하자 송길수가 마른 얼굴을 펴며 웃었다.
「짐작은 하는지 모르지만 개척단 쪽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으니까요. 이런 유흥가가 있어야 일할 맛이 나는 거요. 시베리아의 마을들은 대개 이렇게 건설되었으니까.」
「송형,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요? 난 우선 그것부터 알고 싶은데.」
「우린 비슷한 처지 아닙니까? 당국에 쫓기는 신세 말이오.」
그러면서 송길수가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당신은 한국 정부로부터.」
「그렇게 보이는가?」
「금방 알아봤지요. 서울 말씨에 그 시계, 신발, 그리고 당신만큼 달러를 가진 북한 사람이나 조선족은 없지요.」
「그런가?」
「북한공작원은 당신처럼 어리숙하게 크라우프 가게에 갔다가 안나네 집으로 가지 않소. 그들은 최태호가 운영하는 코즈모프 바에 모입니다. 그리고 북한 당국에 쫓기는 자라면 이런 곳에 올 리가 없지. 당장에 잡혀갈 줄 알고 있으니까.」
「예민하군, 당신은.」
「난 유지노사할린스크의 경찰이었소, 그곳에서 상관을 죽이고 이곳으로 도망쳐 온 지 두 달이 되었습니다.」
「그놈은 경찰무기고에 있던 무기를 한 트럭이나 빼내서 마피아에 팔았소. 그때 내가 경비를 섰었는데 나한테 500달러를 주더구만.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불안했던 모양이오. 놈은 날 죽이려다 나한테 당했지.」
송길수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몸을 세웠다.
「덕분에 어젯밤 오랜만에 여자 맛을 보았습니다. 김 형은 이곳에 계실 건가요?」
「숙소를 다른 곳으로 잡을 생각이오,」
「하루에 백 달러씩 내고 이곳에 있을 바에는 하바로프스크의 특급호텔에서 생활하는 것이 낫지.」
「송 형은 어디로 가실 거요?」
「북쪽 거리에 가게 공사가 있어요. 일당 25달러니까 그것으로 하루 먹고 잘 수가 있습니다.」
창가로 다가간 그는 커튼을 젖히고 뒤쪽 벌판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경비소 직원들이 신고를 받고 나와 시체들을 치웁디다. 이곳이 그자들이 운영하는 곳이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투숙객 모두들 조사했을 거요.」
그는 머리를 돌려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같이 공사장에 갈랍니까? 내가 일자리를 소개시켜 드리겠소.」
건물 위를 헬기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마을이 변해가는군.」
헬기의 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유장석이 말하자 조성욱 이사가 소리쳐 대답했다.
「마을 인구가 3천 명이 넘었습니다, 단장님,」
「살인 사건도 많이 일어난다니 큰일이야.」
「근대직원은 건드리지 못합니다. 저희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이지요.」
조성욱은 관리담당 이사로 근로자들의 숙소와 그 주위의 시설물에다 인력까지 관리하고 있었다.
헬기는 마을을 지나 근로자의 숙소 쪽으로 날아갔다. 벌판 위로 2층 건물이 20여 동 늘어선 숙사는 장관이었다. 이곳의 근로자들은 근대시와 유전 작업장에 집중적으로 투입되고 있었으므로 북쪽의 벌목 현장이나 동쪽의 파이프라인 공사를 위한 숙사는 각각 2, 3백 킬로씩 떨어져 있다.
「이봐, 조이사. 숨어 들어온 북한 놈들이 마을에서 세력을 넓히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유장석이 조성욱을 바라보았다. 헬기 엔진의 소음이 컸으므로 그들은 소리치듯 말하고 있다.
「술집 몇 채를 차렸지만 별것 아닙니다. 모두 경비소의 통제를 받고 있으니까요. 문제가 생기면 당장이라도 추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게에 손님도 줄고 있답니다.」
조성욱이 얼굴을 바짝 대고 말했다.
「저희들은 예상했던 일이지만 북한 쪽은 당황하는 것 같습니다. 노조 활동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으니까요.」
머리를 끄덕인 유장석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헬기는 이제 유전 현장 위를 날고 있었다. 이미 거대한 원유저장 탱크가 세 개 세워진 옆으로 발전시설과 시추탑들이 건설된 현장이다.
근대는 근로자들을 받아들인 초기부터 서둘러 노조를 결성했던 것이다. 회사의 정책에 손발을 맞추는 노조가 북한 측의 기도를 사전에 저지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조선족 노동자들은 원래 북한이 기대했던 사상 바탕이 없는데다가 좋은 보수와 환경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을의 북한 쪽 세력은 아직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경비소에 협조적이고 회사의 규칙에 잘 따르는 편이니까요.」
「범죄자들이 모여들어서 걱정이야.」
「검문을 강화하면 금방 소탕이 됩니다. 조만간 검문을 실시해서 다시 정화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근대는 허가 없이 임차지에 들어온 사람이라도 경비소나 근대 측 사무소에 신고를 하면 체류할 수 있도록 했고 사업장을 만드는 것도 특별한 경우가 아닐 때에는 신고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범죄자들이 신고를 할 리는 없는 것이다. 한 달쯤 전에도 경비소에서 일제 검문을 실시해서 범죄자 20여 명을 잡아 러시아 당국에 넘겼는데 잡지 못한 인원은 그 열 배는 될 것이다.
헬기가 유전기지를 지나 옆쪽으로 기수를 틀더니 본부기지 쪽으로 날아갔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유장석이 근대시의 건설현장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기지에 내린 유장석이 단장실에 들어서자 이대각이 따라 들어 왔다.
「경공업 단지를 내년 초부터 가동시키라는 총회장님의 지시가 왔습니다.」
유장석의 앞자리에 털썩 앉으며 이대각이 말했다.
「을 겨울에도 쉴 새 없이 작업을 해야 되겠습니다.」
「공사를 완료하라는 건 아냐. 일부 공장을 가동시키면서 단지 공사를 하면 돼.」
담배를 꺼내 문 유장석이 이대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젯밤에 이실장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비밀통신으로‥‥‥」
이대각이 몸을 굳히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비밀통신이라면 암호를 사용하는 통신이다. 담배연기를 내뿜은 유장석이 말을 이었다.
「김상철이가 안기부 요원을 만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는 거야. 고태성이를 죽인 일부터 북한과의 제휴, 그리고 근대에서 이제 자신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것까지. 그래서 회장님은 안기부의 제의를 받아들이셨다는군.」
「관리직에 안기부 요원들이 정식으로 파견될 거야. 물론 근대 직원으로, 주로 경비본부에 보내져야 될 것 같아,」
「‥‥‥‥」
「회장님은 마침 잘 되었다고 하셨대. 하긴 우리도 나쁠 것이 없지 그렇지 않나?」
「그거야‥‥」
이대각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김상철이가 그랬다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럴 놈이 아닌데요, 그놈은.」
「글쎄, 막다른 길에 몰렸다고 생각했는지… 나도 조금 허무한데.」
「안기부에서 장난치는 것 아닙니까?」
「이실장은 그런 것 같지 않다고 하더군. 김상철이를 직접 만난 수사관의 말을 들었다는 거야.」
「그 자식을 그렇게 만든 것이 우리 아닙니까? 우리가 이제까지 그놈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대각이 눈을 부릅뜨고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위해서 그놈이 그랬는데요? 그리고는 내팽겨 쳐두었다가 이제 와서 배신했다고 배신자라고 한단 말이지요.」
「이봐, 어쨌든 회사가 곤경에 빠질 뻔했어. 회장님이 잘 수습 하셨지만.」
「좇같네, 정말.」
「너, 인마. 어디에 대고 욕해.」
「단장님한테 하는 소리 아닙니다.」
「어쨌든 김상철이 이야기는 잊으라는 지시다. 기억해 두란 말이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나나 단장님은 잊을 수 없어요. 목숨을 빚졌는데.」
심재택은 조금 당황한 듯 커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고는 커피숍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했다.
「이실장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니 나로서는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제가 심과장님을 찾아온 것은 아무도 몰라요.」
강미현이 다부지게 말했다.
「그러니까 과장님이 김상철 씨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이것 참 난처하군.」
입맛을 다신 심재택이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강회장의 손녀가 김상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난데없이 강미현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그녀에 대한 자료는 봐두었다. 근대그룹의 후계자중의 하나로 강회장의 총애를 받고 있는 손녀였던 것이다.
「도대체 무얼 알고 싶다는 겁니까? 우린 잠깐 만나고는 헤어졌을 뿐이고.」
「어디에서 헤어지셨어요?」
「하바로프스크.」
「실장님 말씀으로는 그 사람이 과장님을 찾아갔다는데, 맞지요?」
「그런 셈이지.」
「자신이 누명을 썼고, 모든 일은 근대에서 시켜서 한 일이라고 말했다면서요?」
「비슷한 내용이었소.」
「그렇다면 과장님께 구명을 부탁하러 찾아간 셈이군요.」
「그런데 과장님은 그 사람 말을 근거로 우리 근대에 압력을 넣으셨고, 그렇죠?」
「이봐요, 강미현 씨.」
「과장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저버리신 것 같은데요. 그 사람은 아직도 과장님을 믿고 있을까요?」
「이건 도무지.」
심재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
「우리가 바보인 줄 아세요? 이실장이나 할아버지도 직접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심과장께서 김상철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상황을 짐작하시고 계세요.」
강미현이 심재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심과장님은 납치되셨다가 도망쳐 나오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와중에 김상철 씨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었고.」
「심과장님이 김상철 씨를 만났다면 체포해 왔어야 정상인데 그냥 헤어지셨던 모양이죠? 그건 어떻게 추측해야 될까요?」
「이봐요, 강미현 씨.」
심재택이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소. 난 바쁜 사람이야.」
「이제 안기부는 목적을 이루었어요. 김상철 씨를 제물로 근대 임차지의 관리체제를 파악하게 되었으니까.」
그러자 심재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솔직히 회장 손녀라 내가 예의를 차려주었지만 더 이상 못 듣겠어.」
「그 사람을 도와주세요, 아니면 저라도.」
강미현의 얼굴을 내려다본 심재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크게 뜬 눈과 조금 벌려진 입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했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강미현이 말을 이었다.
「과장님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아실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만이라도 알려 주시면.」
심재택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제 조금 여유를 찾아가고 있었다.
「안 됐지만 찾아도 도울 방법이 없어요, 강미현 씨. 나도 솔직히‥‥‥」
「살아는 있지요?」
「살아 있지요, 물론.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니까,」
「어디에 있어요?」
입맛을 다신 심재택이 한동안 강미현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파벨이 숨겨주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떠났습니다.」
「이제 아무도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소. 말하자면 완전한 실종상태요.」
점심을 마친 안인석이 마악 자리에 돌아와 앉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 이유미야.」
예전에는 '나야' 하면 되었으나 이제는 이름을 말한다. 안인석은 의자에서 등을 떼었으나 선뜻 입이 떼어지지는 않았다
「안인석 씨 아녜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나야,」
「지금 바빠?」
「아니,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이야?」
LA에서 한 달 어물고 온다고 한 것이 석 달 전의 일이다. 그러니 석 달 만에 전화통화를 하는 셈이었다.
「별일 없나 궁금했어. 그리고 나, 지난 토요일에 약혼 했어」
조금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연말쯤에 LA로 가게 될 거야. 그곳 지사를 맡게 되어서.」
「‥‥‥」
「내가 이렇게 전화하는 거 싫어?」
「아니 , 그런 건 아니지만‥‥‥」
안인석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나한테 그런 소식 꼭 알려줄 필요가 있는 거냐? 내 축하를 받아야 마음이 놓여?」
그러자 수화기를 통해 그녀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숨기듯 하기는 싫었어. 그렇다고 축하를 받으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고.」
「당신은 좋은 남자야, 인석 씨. 내가 나빠. 나도 알아. 내 변덕과 허영심.」
「어쨌든 잘 살아라.」
「그런데 상철 씨는 아직도 실종이야?」
「그래, 나 바쁘니까 이만.」
「안 됐어, 그 사람. 그럼 안녕.」
수화기를 내려놓은 안인석은 한동안 앞쪽의 벽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봐, 안인석 씨.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옆으로 다가온 강형문의 목소리에 안인석은 머리를 들었다.
「아닙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강형문이 테이블에 두 손을 짚고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여름휴가 못간 것 이제 갈 수 있겠어. 어때? 안인석 씨도 휴가 계획을 내도록 해.」
「연말이라 바쁜데 갈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이젠 완전히‥‥‥」
강형문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하긴 나도 휴가를 반납했어. 막판에 피치를 올려야 할 것 같아서.」
「대리님, 내년에 팀장되시면 절 데려가 주십시오.」
「그거야 여부가 있나? 이제 손발이 맞기 시작하는데.」
강형문이 자리로 돌아가자 안인석은 컴퓨터의 키를 눌렀다. 그러나 금방 일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조금 일찍 회사를 나온 안인석이 박미정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7시 30분이 되어 있었다. 약속시간에 딱 맞추어 온 것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박미정이 문을 열어주었고 보험회사 중역인 아버지 박남호 씨와 어머니가 그를 맞았다. 50평의 아파트는 잘 꾸며져 있었고 주방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안인석이 저녁도 얻어먹을 겸 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가겠다고 진즉부터 졸라왔던 것이다. 인사를 마치고 응접실의 소파에 앉자 박남호 씨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근대전자에 다니고 있다고?」
반백의 머리에 부드러운 인상의 그에게서 오랜 직장생활로 단련된 품위가 풍겨 나왔다.
「예, 작년 말에 입사했습니다.」
「미정이하고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다니 서로 잘 알겠구만.」
「제가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서로 도와야지.」
과일을 깎아온 박미정이 탁자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참, 부친께서 병원을 하신다면서.」
「예, 영동에서 조그맣게.」
「문세병원이라면 나도 알아.」
과일을 집어든 박남호 씨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자네가 우리 집을 처음 방문한 미정이 남자친구야. 그래서 그런지 내가 관심이 많아.」
「영광입니다, 아버님.」
안인석은 그의 표정에서 내비치는 호감을 읽을 수 있었다. 주방에서 가끔씩 이쪽을 바라보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을 마친 안인석이 배웅하겠다는 박미정과 함께 아파트를 나온 것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11월 말이어서 밤 기는 찼고 습기를 띈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어깨를 움츠린 박미정이 그의 팔을 끼었다.
「인석 씨 알고 보니 교활해. 응큼한 데가 있어.」
그렇게 말하는 박미정의 목소리는 밝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좋아할 말만 골라서 하고 있더구만.」
안인석이 그녀의 팔을 잡고는 잠자코 옆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디로 가는 거야?」
그러나 앞쪽의 어린이 놀이터가 시선에 들어오자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들은 인적이 없는 놀이터의 나무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싸늘한 바람이 놀이터를 휩쓸고 지나가자 안인석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그리고 거침없이 얼굴에 입술이 다가왔지만 박미정은 거부하지 않았다. 두 팔로 안인석의 허리를 안은 그녀는 곧 입을 벌려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다시 바람이 그들의 피부를 할고 지나갔으나 열중한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치겠어. 널 갖고 싶어서.」
잠시 입술을 뗀 안인석이 그녀의 귀를 물며 허덕였다.
「난 너만큼 사랑한 여자가 없어,」
그의 한쪽 손은 이미 그녀의 재킷을 젖히고는 젖가슴을 거칠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다시 안인석이 그녀의 혀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이윽고 그녀의 치마를 젖힌 그의 손이 저항 없이 팬티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와 젖어 있는 부분에 닿았다. 그 순간 박미정은 허리를 틀어 그의 손을 미끌어뜨리고는 얼굴을 뒤로 젖혀 혀를 뺐다.
「이제 그만.」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민 그녀는 가쁜 숨을 가누려는 듯 잠시 어깨를 들먹이며 앉아 있었다. 안인석의 입술이 다시 귀를 물었으므로 그녀는 다시 머리를 젖혀 그의 입술을 피했다. 그러나 이제 안인석은 예전처럼 조급하게 서두르지도 민감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어깨를 안은 채 바람에 흔들리는 그네를 바라보면서 그도 호흡을 가다듬는 모양이었다.
「난 행복해. 이렇게 너하고 있는 것이.」
이윽고 그녀의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그가 말했다.
대답대신 그의 한쪽 가슴에 어깨를 묻은 박미정은 흔들리는 그네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에도 저렇게 그네가 흔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에도 이렇게 바람이 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안인석의 가슴에 안긴 채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밤, 부두 끝 쪽에 있는 화물 터미널 빌딩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항구 안에 떠 있는 수십 척의 화물선들이 제각기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하늘과 바다가 분간되지 않는 먹장 속 같은 어둠이다. 바람이 세어서 부둣가의 시멘트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소리가 컸다. 그 외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뒤쪽의 도로를 달리는 희미한 차량들의 엔진소리뿐이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파도소리와 차량들이 내는 미세한 진동뿐이었던 터미널 빌딩 앞의 정적이 깨진 것은 도로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차량의 엔진소리 때문이었다.
두 개의 라이트를 강하게 번득이며 승용차 한 대가 곧장 달려오더니 빌딩 앞의 공터에 멈췄다. 그러자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던 공터의 한쪽에서 갑자기 두 줄기의 불빛이 번쩍 뻗어 나왔다. 승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달려왔던 승용차가 다시 움직여 그쪽으로 다가가 멈춰 섰는데 긴 코트를 입은 한 사람이 내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차의 뒷좌석 문이 열리더니 사내 한 명이 내렸다. 그 긴코트를 입은 사람에게 다가가 서자 그들은 차 사이의 공간에 마주보고 있는 자세가 되었다.
「늦었습니다.」
긴코트 차림의 장인규가 말하자 40대의 사내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심을 많이 하시는군, 장 동무.」
「할 수 없지요, 살아남으려면.」
얼굴에 웃음을 띤 장인규가 힐끗 옆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옆얼굴을 보인 채 앞자리에 앉은 두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평양에서 동무의 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동무는 친지가 많은 것 같소.」
「알고 있었어요. 그 친지들이 미리 알려주어서,」
장인규가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에 기부금을 내야 한다는 조건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역은 말해주지 않더군요.」
「동무는 듣던 대로 대단히 도전적이군.」
「여자 기준으로 보지 말아요. 난 남자 이상으로 일해 왔습니다.」
「50만 달러요. 그리고 동무가 경영하는 무역회사의 소유권을 우리에게 넘기시오.」
장인규가 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회사는 아버지의 전재산리고 아직 내가 간섭할 수가 없어요. 그건 안 됩니다.」
「배신행위에 대한 보상을 이렇게 받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요, 동무. 그만큼 동무에게 관대한 결정을 내렸다는 걸 모릅니까?」
「50만 달러 현금을 만들려면 집과 모든 걸 팔아야 하고 회사까지 처분해야 해요. 그렇게 되면 우린‥‥‥」
「부자라고 소문이 난 집안이던데…· 개혁 이후로 당신 집안은 떼돈을 벌었다고 들었습니다.」
「‥‥‥‥」
「기간은 열흘이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동무의 배신으로 여러 명의 동지가 죽었고 중요한 포로를 탈취 당했소. 이렇게 결정을 내린 조국에 감사해야 될 거요.」
「회사를 넘기는 것은 내 힘으로 안 됩니다. 아버지는 아직도 평양에 친구가 많아요. 그들에게 다시 부탁할 기회를 주세요.」
그러자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부탁하는 것을 우리가 말릴 수는 없지요. 하지만 기간은 열흘로 변함이 없소.」
소리 죽여 한숨을 내쉰 장인규가 머리를 끄덕이자 사내는 몸을 돌렸다 곧 승용차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그녀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닷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면서 장인규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어두운 빌딩의 그늘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곧 사내 한 명이 다가와 섰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장신의 사내는 그녀의 아버지 장하연 씨가 보내준 경호원이다.
빌딩에 숨어 들어간 그로부터 이상이 없다는 연락을 받고나서야 이쪽으로 왔기 때문에 약속시간에 늦은 것이다.
「아냐, 어서 집으로.」
차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가 다시 평양의 친지들에게 연락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바 안에 모인 사내들은 대부분이 러시아인들로 동양인은 그들 둘뿐이었다. 동쪽 길의 끝에 세워진 이곳은 간판도 없었지만 사람들에게는 보냐네 집으로 불리우는 싸구려 술집이었다. 성한 의자가 별로 없는 술집 안은 20평 정도로 조그마한 규모였지만 손님들은 가득 차 있었고 소음으로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김상철과 송길수는 상표도 붙지 않은 보드카 한 병을 놓고 마주앉아 술을 마셨다. 술은 밀주였고 가격도 한 병에 ~달러를 받았는데 하바로프스크의 시장에 가면 1달러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지독하게 독해서 몇 잔 마시자 머리끝이 당겨왔다. 숨을 멈추고 잔에 든 술을 한 입에 삼킨 송길수가 입을 벌리고는 더운 숨을 뱉아냈다.
「얼마 전에 메틸을 먹고 두 명이 눈이 멀었지요, 서쪽 길의 싸구려 술집이었는데 눈 먼 두 놈하고 술집주인까지 세 놈이 러시아 경찰에 넘겨졌어요. 그 두 놈은 수배자들이어서‥‥」
그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에도 수송단 트럭으로 2, 30명이 이곳에 왔어요. 아마 그중에서 90% 이상이 수배자들일 거요.」
체격이 우람한 러시아인 두어 명이 그들을 훑어보고 지나갔다.
벌써 몇 번째였지만 이쪽의 받아넘기는 기세에 그냥 지나가고 있다.
「쓰레기 인생들이지. 이곳이 그래도 자유롭다고 찾아오지만 아마 살아나가는 놈은 얼마 안 될 거요.」
어깨를 늘어뜨린 그가 탁자를 노려보았다. 이제 열흘 가깝게 같이 붙어 다니고 있었는데 낮에는 술집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싸구려 술집을 찾아 술을 마시다가 하룻밤 2달러짜리 합숙소에서 잠을 자는 생활이었다. 머리를 든 송길수가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이나 나나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김상철은 그에게 자신도 한국의 기관원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근대의 직원으로 일하다가 하바로프스크에서 살인을 했다고 하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연은 제각기 길고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이야기를 제 입으로 할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들어 줄 때에는 지겹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므로 아예 묻지 않는 것이 이곳의 불문율이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김상철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김상철이 술을 입 안에 털어 넣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술집을 하나 세우자 여자도 있는 술집을 말이다.」
그러자 송길수가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돈이 어디 있다고. 형님, 지금 우리가 짓는 최태호의 술집이 얼마가 드는 줄 아시오? 5천 5백 달러나 든다고 합디다.」
「‥‥‥」
「거기에다 술 들여 놓고 이것저것 드는 비용이 3천 달러는 될 거요.」
「경비소 허가는 네가 맡아라.」
「그거야‥‥ 하지만 형님.」
「자재는 수송단에 끼어 싣고 오는 것보다 근대에서 빼내올 수가 있겠더구만, 최태호의 공사를 보니까.」
이제 송길수는 술기운이 달아난 듯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형님, 그런데 돈은‥‥」
「내게 3만 달러가 있어.」
「종업원은 수배자 중에서 너하고 내가 하나씩 골라야겠다. 내일부터.」
그러자 송길수의 어깨가 점점 펴졌다.
「형님, 정말이요?」
「이곳에서 제일 큰 술집과 색시집을 만드는 거야. 며칠간 생각한 끝에 결정한 것이다.」
「아니, 돈이 정말 있냐고 물었소.」
「내가 일당 25달러로 살아가니까 믿기지 않는 모양인데….」
김상철이 밝은 파카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쳤다.
「내일부터 시작이다, 어떠냐?」
「하지요, 형님.」
송길수가 손을 뻗어 술병을 쥐었다가 다시 오무렸다.
「나는 꼭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날 줄로 믿었소. 이제야 말하지만 말이오.」
다음날 아침, 경비소의 변홍근 부소장은 대기실에서 마주앉은 사내를 의심쩍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여러 명이 잡혀온 모양으로 옆쪽의 유치장에서는 고함소리와 꾸짖는 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 왔다. 변홍근이 입을 열었다.
「그래, 가게를 연다는 건 좋아. 우리 근대에서는 그것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아. 하지만 우선 신고를 해야지.」
「예, 그러려고 지금 찾아온 겁니다.」
송길수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규칙은 꼭 지킵니다, 소장님.」
「난 부소장이야.」
「예, 부소장님.」
「그런데 어떤 가게를 짓는다는 거야? 괜히 통나무조각이나 주워다가 거지 움막 같은 걸 만들게 할 수는 없어. 도시 미관을 해치니까.」
「2층 건물로 2백 평쯤 되는 규모로 짓고 싶은데요, 소장님.」
그러자 변홍근이 입을 쩍 벌리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마을에서 제일 크다는 크라우프 바도 백 평밖에 되지 않는다.
「뭐라고? 2백 평?」
「예, 아래층은 바로, 2층은 저 ‥‥ 색시집으로 만들고 싶습니다만.」
「돈은 있어?」
변홍근이 송길수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게 얼마나 들지 알고 하는 소리야?」
「예, 대충 압니다.」
「2만 달러 가깝게 들 거야. 모두 합쳐서.」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다시 멍한 얼굴로 송길수를 바라보던 변홍근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당신, 수배자지?」
「예, 소장님. 살인혐의 수배잡니다.」
변홍근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당한지 바보인지 아직 분간이 안 가는 표정이었다.
「경찰이었는데 부정을 감추려고 절 죽이려는 상관을 쏘고 도망쳐 온 겁니다. 그래서 이곳에 정착하려고.」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변홍근이 입을 열었다.
「돈은 충분하단 말이지?」
「예, 소장님.」
「매일밤, 그날 매출액의 10%를 낼 수 있겠지?」
「예? 10%를 말입니까?」
「싫으면 그만두고 일어서서 나가.」
그랬다가는 문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유치장에 끌려가 내일쯤이면 러시아 당국에 넘겨질 것이다.
「하지요, 소장님. 내겠습니다. 저는 처음 듣는 말씀이어서.」
「당신의 솔직한 점이 마음에 들었어.」
변홍근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을 살인범이라고 대뜸 말한 놈은 한 사람도 없었거든, 모두 금세 밝혀질 것인데도 거짓말을 한단 말이야.」
「자, 그럼 위치와 자재 이야기를 해야겠군.」
다시 의자를 당겨 앉은 변홍근이 생각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커피 한 잔 할까? 서울산 커피라 질이 아주 좋거든.」
「그 자식 덕분에 서울산 커피를 처음 마셔보았소, 아주 씁디다.」
송길수가 김상철에게 말했다. 그들은 보냐네 집의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손님이라고는 대여섯 명 뿐이었다. 그들은 일거리를 못 찾았거나 너무 취해 아직도 몸을 가눌 수 없는 사내들이었다.
「내가 살인범이라고 털어 놓았더니 안심하는 눈치였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당장에 잡아서 러시아 당국에 넘길 수가 있을 데니까요. 그렇게 되면 가게는 놈들 소유가 되지요.」
「크라우프 바도 10% 상납을 하나?」
「그건 자세히 모르지만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철저히 봐주고 있지요. 주인은 이르쿠츠크에서 온 조선족이라는데 가게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탁자 위에 보드카 병이 놓여져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손도 대지 않았다.
「자재는 모두 그 변가 놈이 대준다고 했소. 아마 근대의 자재창고에서 빼내올 모양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송길수가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 서쪽길 끝의 땅을 배정받았습니다. 이제 공사는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어요.」
이곳은 땅값이 없다. 경비소에서 마을 지도에 선을 긋고 떼어주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전 1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가게의 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들어섰다. 작달막한 키에 다 헤어진 슈바를 땅에 끌리도록 입은 조선족이었다 그는 곧장 그들에게로 다가오더니 송길수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덮여 있어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송길수의 말을 들으면 20대 후반이라는 것이다.
「인사해라, 김선생님이시고, 형님, 이 사람이 제가 말씀드린 하용준이오.」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이자 하용준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먹고 재워주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 하지요. 저를 써 주십시오.」
「북한 군대에서 탈주했다구?」
「예, 양강도 국경경비대에 있었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러시아에서 강도짓을 하다가 체포되었고 거기서 또 탈주했다면서?」
「예, 그래서 이곳으로 온 겁니다.」
힐끗 송길수를 바라본 김상철이 다시 물었다. 그로부터 대강 들은 것이다.
「특기가 무엇이야?」
「예, 몸이 빠릅니다. 싸움을 해서 져본 적이 없습니다.」
「대개 뒤에서 찌르거나 총을 쏜다면서?」
「허점을 보이는 놈이 지는 거지요.」
그러면서 하용준이 옆에 앉은 송길수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주었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쓰겠다. 하지만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 것 알지?」
그러자 하용준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압니다, 형님에 대해서는 절대로 발설하지 말 것, 길수한데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 뒤를 노리다가는 네 목을 떼어낼 테니 그것도 명심하고.」
하용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난 신세를 입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소. 두고 보시오.」
「우선 옷부터 사 입도록 해라. 사람들을 모으려면 그런 꼴로는 안 되겠다.」
김상철이 눈짓을 하자 송길수가 주머리에서 백 달러 지폐 한 장을 꺼내 하용준에게 건네주었다. 두 손으로 그것을 받은 하용준이 김상철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유지노사할린스크에서 온 수배자랍니다. 살인범이라는데요.」
코즈모프 바 안에 있는 밀실에서 최태호는 부하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부하가 말을 이었다.
「서쪽길 끝에 2백 평 규모로 술집과 색시집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최태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놈은 돈을 엄청나게 도둑질해 온 모양이다. 이곳에 그런 돈을 투자하는 걸 보면.」
그는 40대 중반으로 반쯤 횐머리칼에 가는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였다.
「어쨌든 고춘식이 그놈, 가게가 생길수록 제 수입이 늘어날 테니까 살인자건 강도건 돈만 가져 오면 영업을 하게 해주는군,」
「노동자가 올해 안에 4만 명이 넘게 될 테니 근대숙사 내부의 시설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지요. 그래서 근대 본부에서도 허락하는 모양입니다.」
사내는 코즈모프 바의 지배인이자 최태호의 보좌관인 진남일이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섰다.
「오늘 중으로 그놈을 만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최태호가 머리를 저었다.
「아니, 지금 당장 그럴 필요는 없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담배연기를 앞으로 길게 뿜었다.
「근대 측의 허가가 난 이상 가게 짓는 것을 방해한다면 문제가 시끄러워질 것이다. 경비소 놈들이 당장에 눈치를 채게 될 테니까.」
「다 짓고 나서 그놈의 가게를 송두리 채 먹어버리도록 하자. 조선족 놈들이니까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머리를 끄덕인 진남일이 말머리를 돌렸다.
「어제 수송단편에 도착한 보드카 3천병이 아직도 근대의 자재 창고에 있습니다, 사장님.」
그러자 최태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망할 자식들, 꼭 돈을 받아야 내주는군. 한두 번도 아닌데.」
「제가 지금 고춘식한테 6천 달러를 전해주고 아예 자재 창고까지 같이 가서 술을 가져오겠습니다.」
최태호가 머리를 끄덕이자 진남일은 방을 나갔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최태호는 다른 가게 주인처럼 경비소를 통해 물품을 공급받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예 수송단에 자신들의 물품을 끼워 넣고는 적당한 통과세를 주고 찾아오는 것이다. 그들이 들여온 술이나 물품들은 근대의 거대한 자재 창고에 입고되었다가 빠져나갔는데 창고 담당과 경비소가 손발을 맞춰 도둑질을 하는 것이었다. 보드카의 경우에는 병당 경비소와 창고가 각각 1달러씩 계산해서 3천병이면 3천 달러씩 한 몫에 먹는다.
「도둑놈들.」
씹어뱉듯 말한 최태호는 서랍을 열고 조그만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횐 분말이 곱게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코카인이다. 그는 아주 작은 스푼을 들더니 한 스푼을 떠서 코에 들이대고 힘껏 들이마셨다. 코카인이나 아편같이 값진 물품은 인편을 통해 들여오므로 돈은 떼이지 않는다. 다른 물품값을 경비소나 창고의 도둑놈들에게 떼인다고 해도 힘없는 다른 가게 주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5달러짜리 고급 보드카를 구입해서는 운반비와 창고, 경비소 몫을 합쳐 병당 8달러 정도에 들여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판매가격은 병 당 30달러였다. 그러나 다른 가게는 고춘식한테서 20달러 가까운 가격으로 구입해야만 했으므로 이윤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맑아지는 기분이 되었으므로 최태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방 안은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역한 술냄새가 풍겨 나왔지만 조용했다. 가끔 마룻바닥에 부딪치는 발자국 소리와 나무 의자의 삐걱이는 소리가 날 뿐이다. 그러나 20평 정도의 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3, 40명이 되었고 그들은 모두 테이블 주위에 몰려 서 있었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마주보고 앉은 두 사내였다. 한 명은 러시아인, 또 다른 한 명은 동양인이다.
갑자기 발자국 소리까지 그친 방 안에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흐르더니 러시아인이 권총을 세워들었다. 콜트에 소음기를 낀 볼품없는 모양의 총이었지만 천장에 매달린 가스등 빛을 받아 검은 총신에 윤기가 흘렀다. 그는 천천히 총을 세우더니 총구를 오른쪽 관자놀이에 가져다 댔다. 잿빛 콧수염을 기른 사내의 푸른 눈동자가 조금 초점을 잃는 것같이 보였지만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윽고 방아쇠에 걸린 검지에 힘이 주어지더니 노리쇠가 공이를 쳤다. 그러자 철컥하고 쇠가 마주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방안은 터져나갈 것 같은 소음에 휩싸였다. 내기 돈을 올리려고 악을 쓰는 사람과 돈을 넘겨주고 받으며 확인을 하는 통에 의자가 넘어졌고 종이쪽이 흩날렸다.
러시안 룰렛이다.
여섯 발들이 원형탄창에 실탄 한 발을 넣고 번갈아가며 자신의 머리에 대고 쏘는 것이다.
잠시 후 소란이 뚝 그치더니 이번에는 동양인이 권총을 쥐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얼굴이 희었으나 두 눈의 흰창이 충혈되어 있어서 섬뜩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사내는 권총의 무게를 재듯이 눕혀든 채 위아래로 흔들어 보이면서 주위에 둘러선 군중들을 둘러보았다.
김상철은 그의 시선이 스치고 지나가자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사내는 총구를 입 안으로 틀어넣고는 손잡이를 탁자 위에 대었다. 머리가 탁자를 향해 숙여진 자세로 그는 엄지손가락을 쭉 펴면서 방아쇠를 힘껏 눌렀다. 이제 떨컥 소리와 함께 노리쇠가 또 한 번 빈 공이를 쳤다. 김상철은 다시 아수라장이 된 테이블 가에서 벽 쪽으로 물러나왔다. 송길수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형님, 보기 싫으십니까?」
「저놈은 살아 나와도 쓰고 싶지 않다.」
벽에 등을 기댄 김상철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저런 식으로 제 목숨을 내놓는 놈에게 일을 맡길 수가 없어.」
「일이 없었기 때문이요, 형님. 카자흐스탄에서 고아로 자라나 같은 얼굴,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을 찾아 시베리아까지 온 놈이오.」
그 순간 다시 방 안이 조용해졌고 숨이 멈춘 순간에 다시 쇳소리가 났다. 러시아인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방 안은 다시 아우성 소리로 덮였다. 판돈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으므로 노름꾼들은 반쯤 미치광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곧 결말이 오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횟수가 늘어날수록 가능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저놈은 일거리를 준다고 했더니 마지막으로 운을 시험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게임에 이겨야 빚을 갚는다는 겁니다.」
방 안이 다시 순식간에 조용해지자 송길수를 바라보던 김상철이 서둘러 테이블로 다가갔다.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렸으므로 몇 사람이 머리를 돌려 그를 흘겨보았다.
「잠깐만 멈춰라.」
김상철의 고함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사람들을 헤친 김상철이 테이블 옆에 서자 권총의 손잡이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있던 사내가 입을 조금 벌린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김상철이 손을 뻗어 사내의 권총을 낚아챘다. 한손에 권총을 세워든 그가 거간꾼을 바라보았다.
「이자한테 걸린 돈이 모두 얼마냐?」
그러자 사내들이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김상철이 권총을 조금 눕히자 조용해졌다. 러시아인 거간꾼은 금방 눈치를 채고는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슬쩍 보았다.
「모두 855달러.」
김상철이 송길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이놈에게 돈을 줘라.」
한국말이다.
「예, 형님.」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낸 송길수가 한 뭉치의 돈을 세는 동안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것 보시오.」
침묵을 깬 것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내다. 그는 핏발 선 눈을 치켜뜨고는 김상철을 올려다보았다.
「내 운은 나쁘지 않습니다. 이 일을 끝내도록 놔두시오.」
김상철이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권총의 총구를 그의 이마에다 겨누었다가 직각으로 떨어뜨리고는 테이블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 재떨이가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졌다.
「네 목숨은 내가 산 것이다.」
눈을 부릅뜬 김상철이 그를 노려보았다.
「일어서서 따라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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