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감사할 이유 2017년 10월 15일 / 추수감사절예배 / 마태복음 6:25-34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가을이 한창인 시점에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일한 후 그 결과를 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머지않아 맞을 새해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 수 있으리라 믿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신앙인들의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크게 감사해야 할 이유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연의 모든 생명체들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신앙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먼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을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히 11:13 /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2) 예전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도 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정 받았던 것입니다. 3)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의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압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성경에서 믿음이 식어져서 많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언제나 내 앞에서 살아가도록 하여라. 내가 항상 너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도록 하여라.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아라. 그리고 바른 길만 걷도록 하여라.”고 말씀과 더불어 “나는 너와 계약을 맺어 네 후손이 수도 없이 불어나게 하리라.”고 과거에 약속하셨던 것을 다시 말씀하시면서 재차 “내가 너와 계약을 맺는다. 이제 너는 수많은 무리의 조상이 되리라. 내가 분명히 약속하마.”라고까지 강조하셨습니다(창 17:1-3). 늘 강조하고픈 욥에 대한 이야기를 더하려 합니다. /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그에 반하여 자신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교만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의 두 번에 걸친 말씀을 들었습니다(38-41장).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만드시고 다스리고 심지어 미물에까지도 섭리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신 능력과 오묘하신 섭리를 인식한 것입니다. 인간이 다스릴 수 없는 하마와 악어까지도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반면에 동물을 하나도 마음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인식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인지 알았습니다. 욥 42:2-3 /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는 줄을 나는 잘 압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모든 일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3) 주께서는 말씀하셨지요. 알지도 못하면서 내 계획을 가리는 자 그 누구냐고 말입니다.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깨닫지도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 댔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하시는 놀라운 일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해댔습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고 못하시는 것이 없는 분으로서 무엇이든지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 분임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도무지 깨달을 수 없고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행하신 분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런 하나님께 자신이 무지함 말로 이치를 가렸다는 것입니다. 욥은 감히 그런 하나님을 판단했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욥 42:4-5 / 주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듣고만 있으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질문하실 때 대답해 보라고 말입니다. 5) 전에는 내가 소문으로만 주님에 대해서 들어 왔습니다만, 이제 이 두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뵙고 있군요. 욥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지식도 있었으나 피상적(皮相的 - 겉으로 나타난 현상에만 관계하는)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불의한 면이 있다고 단언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심으로 그 분에 대한 위대한 주권과 오묘한 섭리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한 지식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특히 자신이 견딜 수 없는 수많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듣게 되니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선한 목적을 가지고 감히 인간이 헤아릴 수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섭리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고 했습니다. ‘한하고’(히. 마엔)는 ‘거부하다 싫어하다’는 의미입니다. 욥이 자신의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싫어하며 거부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무죄한 것을 위해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어리석게 말한 과거에 대해서도 철저히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티끌’은 먼지나 흙이고, ‘재’는 타 버리고 남은 찌꺼기입니다. 슬픔과 비하를 나타내기 위해 먼지와 재를 뒤집어쓰는 것은 전통적인 습관이었습니다. 철저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알지 못하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지껄였던 과오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욥이 철저히 회개하므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목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욥에게 이전으로 회복시킬 뿐 아니라 더욱 큰 복을 주었습니다(42:7-17). 이런 측면에서 볼 때에 오늘의 설교를 ‘욥의 추수감사’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약 5:11 / 욥은 슬픔을 이기며 끝까지 주님을 믿은 사람의 모범입니다. 욥이 겪어 낸 일을 보고 우리는 주님의 계획이 축복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께서는 한없는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고난이라는 긴 시간의 아픔을 견딘 욥이 결실로 얻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보십시오. ➊ 권위를 더해 주었습니다. 권위를 회복시키되 더 견고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잘못을 책망하고 그들로 하여금 욥을 통해 속죄제사를 드리게 하고 욥을 통해 도고를 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시키는 대로 했고 욥이 그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중보기도를 하자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를 알던 모든 사람들이 욥의 집에 와서 먹으며 위로했습니다. 하나님이 욥은 당시 제사장이 되게 한 것입니다. ➋ 재물을 더해 주었습니다. 소유도 회복시키되 갑절로 더해 주었습니다. 양 14,000마리와 약대 6,000마리와 소 1,000겨리와 암나귀 1,000마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➌ 자녀를 아들 7명과 딸 3을 낳게 하고 그 딸들은 전국에서 그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습니다. ➍ 수한(壽限)을 더해 주었습니다. 140년을 질병이나 고통없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4대를 보게 했습니다. 나이가 늙어 기한이 차서 죽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봅니다. 26절에서는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하시고, 28-30절에서는 “들의 백합화를 보라!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왕도 그 꽃만큼 아름답게 옷을 입지는 못하였다. 30)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라고 하십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공중의 새들보다도 귀하고 꽃이나 들풀보다도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잘 돌보아주시리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물으시기를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하시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고 사랑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본문 25절에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고, 31절에서도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32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하시기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염려는 믿음이 작은 자들이나(30절) 이방인들이(32절) 하는 것이고 염려를 해보아도 키를 한 자도 늘릴 수 없는 헛된 염려라고(27절)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필요들을 하나님께서 다 책임지시고 충족시키시리라는 확언(確言)을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나의 등 뒤에서 / 1.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후렴)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2.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때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3.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들을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주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주시는 대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이 빈둥빈둥 노는 것 아닙니다. 쉬지 않고 날아다니며 먹이를 구합니다. 꽃들도 가만히 서서 놀고 있는 것 아닙니다. 해바라기를 보세요. 햇볕을 받기 위해 쉬지 않고 해를 좇아가며 목을 돌립니다. 바람 많은 해변의 해송(海松)을 보면 유난히 꼬불꼬불 비틀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짠 바닷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못살겠다’고 이사 가지 않고, 자기 자리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바람과 싸우며 버티느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각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지만 우리가 사는 것이 우리 자신의 염려와 노력과 수고 때문에 사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수고를 다 하고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모르면 이방인인 것입니다. ▶ 여기까지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내리시는 결론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33절이 그 결론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반절의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 말씀은 어렵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위하여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쉽고 간단한 말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설명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따라 다스려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의지와 권능과 지혜와 의와 사랑에 의해 다스려지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의”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앞에서 겸손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최우선의 가치를 지녀야한다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 6:33 /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덤) 주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first)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는 데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구하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만 하고 그 밖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만 그 다음 일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수고와 노력이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게 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수고해봐야 모든 일이 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염려 즉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우리의 목숨을 위하여 먹고 마시며 입는 데 있지 않고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데 있게 될 때 그 밖의 우리 삶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에 의해 다 해결되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뜻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요 15:5-8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내 안에 살고 내가 그 안에 살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6) 만일 누구든지 나를 떠나면 필요 없는 가지처럼 버려질 것이요, 말라서 다른 것과 함께 묶인 채 불에 태워질 것이다. 7)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 안에 살며 내 말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되거든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내 참제자가 된 사람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신 데 이어 곧바로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참으로 적절하고 깊은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기만 하고 그의 의를 구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를 바라면서 그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지 않는 것은 자기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기를 바라면서 그를 경외하지 않고 그 앞에 겸손하지 않으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게 무서운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부르는 어리석고 치명적으로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 34절은 짤막한 세 마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맡아서)할 것’이라는 말씀과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중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흔히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은 오늘 일만 염려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런 뜻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 오늘은 염려해도 좋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잘 보면 내일 일은 내가 염려할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염려할 것이 아니라 ‘내일’ 그 자체가 염려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이 문자 그대로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염려를 할 수 있는 인격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시간의 주인, 어제와 오늘과 내일과 모든 시간과 세월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내일 일도 주관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내일에 대한 염려는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님을 강조하신 것이라 봅니다. 아니 내일 일에 대한 염려뿐 아니라 오늘 일에 대한 염려조차도 우리가 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의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는 문장은 앞선 말씀들을 뒷받침하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함께 가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의 문제들에 관해 염려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오늘 하루의 일들에 관한 염려도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내일 일에 관한 염려를 할 겨를과 여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악과 내 안의 죄성과 사탄의 궤계와 맞서 오늘 하루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살기도 힘듭니다. 오늘 하루 무사하게 지내는 것도 사실은 내가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어차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면 내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면 되는 것인데, 스스로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이기도 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는 말씀은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에게 매일같이 주어지는 오늘 하루하루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내일의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우리에게 오늘도 내일도 당신께 맡기고 자유 가운데 살라고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6-7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빌 4:6-7 / 걱정에 싸여 지내지 말고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기도하십시오. 필요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남께 감사드리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7) 그러면 여러분은 인간의 이해를 훨씬 더 초월한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할 때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안정시키며 안식을 줄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게 좋아도 우리의 삶의 안전을 위한 완벽한 예상과 대비를 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 안전’이라는 것은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 그 어떤 천재적 범죄자의 의도나 계획까지도 꿰뚫어 보시며 그 어떤 천재지변도 다 그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여러분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늘 여러분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을 일일이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벧전 5:7)라고 말했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덮칠지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절대 안전을 보장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언제 어디서나 주 안에서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우리가 됩시다. ■ 가이드 포스트에 보면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고 제목을 걸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영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떠난 사람은 당초에는 146명(일설에는 153명)이었으나 대서양 횡단 중 1/3가량이 죽고, 102명이 신대륙에 도착합니다. 도착한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눈도 많이 왔습니다. 겨울을 지내는 동안 44명이나 사망했습니다. 남은 58명 중에 노동력을 가진 사람은 7명뿐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도 기아와 영양실조로 말미암아 대부분이 폐결핵을 앓을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1621년 초하루에는 하루에 세명이나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 그리고 이만큼 건강을 지킨 데 대한 감사. 이것이 첫째 감사였습니다. 또한 의복과 거처가 문제입니다. 도시 생활을 해온 지식층이었던 그들에게 온갖 농사일과 나무를 베고 땅을 파고 집짓는 일들이 상상 이상의 힘든 일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오두막, 통나무집 오두막을 일곱 채를 지었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육신적인 고통 외에 마음의 고통은 말로 표현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들을 싣고 온 메이플라워호는 바로 떠난 것이 아니라 그 이듬해 4월까지 플리머스 항구에 머물러 있었으나 혹독한 시련을 견디지 못해 돌아가자는 사람도 돌아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끝까지 감당한 그들의 믿음과 용기는 훗날 미국을 만세 반석위에 세우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 후 3년을 지내고 매사추세스 주지사 윌리엄 브래포드(William Bradford)는 감사절을 지킬 것을 선포합니다. “높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금년에 풍부한 수확을 주셨습니다. 인디언의 도움을 받아 옥수수와 밀, 콩과 호박, 여러 가지 채소를 심게 해주셨고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숲에서는 사냥을 할 수 있도록 바다에서는 생선과 조개들을 넉넉히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야만인의 습격에서, 여러 질병에서 지켜주셨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따라 자유롭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순례자(Pilgrims)들에게 선포합니다. 주후 1623년 11월 29일 목요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모두 모여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이 모든 축복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십시다.” 감사할 수 없는 험한 환경에서 감사한 것이 미국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이 정식 국경일로(11월 넷째 목요일) 선포된 것은 1864년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였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우리의 경건한 조상이 이 아메리카 땅에 감사의 씨를 뿌린 그 신앙을 만대에 계승하기 위해 이날을 국가 축제일로 정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브래드포드는 180톤 밖에 안 되는 작은 배지만 배를 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으니 감사, 평균 시속 2마일로 걷는 속도보다 느렸지만 117일 동안 계속 전진할 수 있었으니 감사, 항해 중에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1명이 태어났으니 감사, 폭풍우로 돛이 부러졌지만 파선하지 않았으니 감사, 여자들 몇 명이 파도에 떠밀렸지만 모두 구출되었으니 감사, 인디언들의 방해로 한 달이나 바다위에서 방황했으나 호의적인 원주민들을 만나 정착했으니 감사, 고통스런 3개월 간의 항해 중에도 한 사람도 원망 불평 안하고 돌아가자고 하지 않았으니 감사했습니다. 그때 포세이돈 목사는 시편 126편 5-6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는 말씀을 읽고 딱 두 마디 기도를 올렸습니다. "102명 중에 죽은 자들이 이 미국의 위대한 씨앗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저희들이 죽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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