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비교적 소통을 잘하던 시절, 개경의 박연폭포를 찾은 적이 있다. 송도 3절로 유명한 박연폭포의 절경은 소문대로 대단했다. 37미터 높이의 물을 받아내는 고모담(姑母潭) 물속에 솟은 용바위는 박연폭포의 주인공인 황진이의 전설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었다. 용바위 위에는 황진이가 머리채에 먹을 적셔 휘둘러 썼다는 이백의 시 '여산폭포를 바라보며' 중 두 구절인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락구천(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나는 듯 흘러내려 삼천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듯 하구나)"이 크고 유려한 초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황진이가 머리채로 썼을까마는, 이런 전설은 황진이가 당시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를 짐작케 해준다.
영산강이 굽이치는 나주 회진 땅에 황진이를 가슴에 품었던 사나이가 있었다. 평생을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1000여 수의 시를 남긴 백호 임제(林悌, 1549~1587)가 그다. 황진이를 가슴에 품고 살던 백호는 35세 되던 해 평안도사(종 5품)가 되어 부임길에 송도에 들른다. 그러나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술과 제문을 들고 무덤을 찾은 백호는 다음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한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고.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하노라."
그는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잃었다는 이유로 파면당한 얼마 뒤 임종을 맞는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백호 임제, 39년의 짧고 굵은 삶을 살다 간 그는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다.
백호 임제는 나주 회진에서 5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임진(林晉, 1526~1587)의 5남 중 장남으로 명종 4년(1549)에 태어났다. 백호(白湖), 겸제(謙齊), 풍강(楓江), 벽산(碧山), 소치(小痴) 등 여러 개의 호는 그의 삶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성운(成運, 1497~1579)의 제자가 된 후 27세 때 주변의 권유에 따라 성균관 학생이 되었고,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다.
그의 첫 관직은 선조 12년(1579) 그의 나이 32세에 부임한 고산찰방이었다. 34세에 흥양 현감, 35세에 평안 도사를 임명받고 그 이듬해인 36세에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史局知制敎)에 부임하지만 개성에서 황진이 무덤을 찾았던 사건이 빌미가 되어 파직된다. 관직에서 파직된 후 술과 시를 벗 삼아 명산대천을 유람하다 선조 20년(1587) 부친의 복상 중 세상을 뜬다.
● 물곡시(勿哭詩)를 남기다
그가 임종하면서 자제들을 불러놓고 남긴 유언이 다음의 '물곡시(勿哭詩)'다. 그 물곡시가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사방팔방의 오랑캐들은 저마다 다 황제라 칭하는데 오직 조선만이 중국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내가 살면 무엇하고 죽은 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 울지 말라."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고 신하를 자칭하던 시절, 백호가 아니면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는 파격적인 말이었다. 그만큼 백호는 호방하고 담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물곡시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존화주의의 늪에 빠져 자주 의식을 상실한 채 사대로 치닫는 현실을 비분강개하며 '자주의식'을 주창한, 시대를 앞선 고뇌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외손자였던 남인의 거두 허목(許穆, 1595~1682)은 그의 묘갈명(墓碣名)에서 '사회적 규범인 법도를 벗어난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한 사람'이라고 썼다.
그가 태어난 나주 회진에는 백호가 시를 짓고 친구를 사귄 영모정(永慕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122호)이 남아 있다. 영모정은 그의 조부 임붕(林鵬, 1486~?)이 중종 15년(1520)에 지으면서 자신의 호인 귀래당에서 이름을 따 '귀래정(歸來亭)'이라 이름 붙였는데, 명종 10년(1555) 다시 고쳐 지으면서 '어버이를 길이 추모한다'는 의미를 붙여 '영모정'으로 고쳐 지었다.
첫댓글 큰인물이셨군요.
귀인은 귀인을 안다고 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