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흔 생사기(生死痕 生死記) 제1권 (전3권)
지은이: 고월·상관월
- 차 례 -
들어가기에 앞서
제 1 장 나천의 운명
제 2 장 낭인시장
제 3 장 나천이라는 사나이
제 4 장 시험
제 5 장 강소혜
제 6 장 총공세
제 7 장 어떤 죽음
제 8 장 음모의 조짐
제 9 장 고난
제 10 장 탈출
들어가기에 앞서
벌써 십수 년도 더된 옛날 이야기지만, 무협소설이 열풍처럼 전국을 휩쓸던 때가 있었다.
수많은 기라성같은 작가들이 쉴새없이 걸작들을 뽑아내던 그 시절.
당시 무협에는 재미있는 분류 명칭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정통무협과 기정무협이라는 어휘였다.
정통무협이란 무(武)와 협(俠)을 중심으로 하는 전형적인 무협을 말함이요, 기정무협이란 애
정이나 괴기 등의 다소 이단적인 내용을 다룬 무협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분류는 다분히 광고를 위한 조어(造語)의 색채가 짙은 게 사실이었다. 즉, 실
질적으로는 두 부류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저 어느 쪽으로 방향이 치
우쳤느냐의 미미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또다른 무협의 부흥기가 다가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두 개의 분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은 십수 년 전의 그것과는 자뭇 양상이 다르다.
서로 다른 두 부류에 분명한 선이 그어진 것이다.
기성작가의 재판을 중심으로 한 무협과, 새로운 신진 작가군의 창작품들.
이렇듯 새롭게 생겨난 두 부류는 사뭇 상이한 양상을 보이며 각자의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
다.
글의 전개 방식이나, 모티브의 설정, 무술의 묘사 등에 이르기까지……. 세월의 힘을 증명이
라도 하듯 두 부류는 선명한 색깔의 차이를 가지고 나타난다.
물론 어떤 것이 더 옳거나, 흥미롭다는 식의 표현은 내리기 어렵다. 각 분야별로 특유의 색
채와 재미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사흔 생사기〉라는 다소 특이한 제목의 본 작품.
엄밀히 말해서 본 작품은 세 사람이 공동 집필한 형태이다.
번뜩이는 재치의 신인 작가 도지산.
빠르고 풍성한 내용 전개의 중견 작가 상관월.
한국 무협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 고월.
아마도 눈썰미가 날카로운 독자라면 위 세 사람의 특징이 곳곳에 녹아 있음을 알아챌 수 있
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신인 작가 도지산의 이름이 표지에서 빠지고 말았다.
작가의 지명도가 판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무협 소설계의 고질적 병폐 때문이다.
물론 작가 본인에게 양해는 구했지만, 자신의 흔적을 증명할 수 없는 무협 소설계의 현실이
가슴 아프기만 하다.
이야기의 방향이 다소 빗나간 듯 하다.
각설하고, 본 주제로 돌아가 본다.
그렇다면 과연 본 작품 〈생사흔 생사기〉는 상기에서 열거한 두 부류 중 어디에 속하는 것
일까?
일단은 재판이 아닌 창작품임으로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옛날의 전통적인 방식을 완전히 무시했다고는 볼 수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두
가지 부류의 중간을 걷고 있다 해야 할까? 시점을 달리한 세 작가의 입김이 녹아 있으니 어
쩌면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모른다.
물론 흥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이 시점에서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독자
여러분만이 갖는 고유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다만 본 씨알기획이 자신감을 갖고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만 밝히기로 한다. 그 외
의 비판이나 칭찬은 오직 독자 여러분의 몫이며, 또한 권한이기도 하다.
점점 더위가 기세를 떨치는 요즈음, 독자 여러분들의 끝없는 건승과 무운을 비는 바이다.
97년 6월 씨알가족 일동.
제 1 장. 나천의 운명
"이 빌어먹을 놈의 새끼! 빨리 다리 안 내밀어?"
가릉(加凌)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나천의 다리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미쳤어요? 왜 멀쩡한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아악! 이것 놔요!"
나천은 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그럴수록 가릉은 어떻게든 나천의 다리를 제압하려 끙
끙거렸다.
"아악! 놔요! 멀쩡한 팔도 부러뜨리더니 이제 다리 병신까지 되란 말예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란 말이다. 어차피 병신인 몸뚱이, 하나 더 부러진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
잡으려는 자와 벗어나려는 자.
두 사람의 실랑이는 아예 필사적이었다.
그러다 문득 버둥거리던 나천의 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우연인지 그 발은 가릉의 오른쪽
눈에 박혀들었다.
퍼억!
"아악! 내 눈! 이 자식이 내 눈을… 아이고!"
순간 가릉은 머리가 텅 비며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 이놈의 새끼!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가릉은 옆구리에 차고 있던 밥벌이의 도구인 쪽박을 치켜들고는 나천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
치기 시작했다.
퍽! 퍼억!
무자비한 쪽박이 콧등을 때렸다.
"아악!"
콧대가 무너지며 주르륵 두 줄기 코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가릉은 절룩거리는 다리로 거칠게 나천의 가슴을 걷어찼다.
"커억!"
외마디 신음을 토하며 나천은 가슴을 움켜쥐고 그대로 푹 쓰러졌다. 명치를 얻어맞는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어 거칠게 헉헉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릉은 상관없다는 듯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나천을 두들겨 팼다.
"죽어! 이 새끼야! 그냥 죽어버려!"
앞뒤도, 전후좌우도 없었다.
가릉은 그저 손이 가는 대로 발길이 나가는 대로 나천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으으… 크윽……."
가릉의 무자비한 발길질을 피하려 나천은 다리를 움켜쥐고 새우처럼 몸을 둘둘 말았다.
"쌍놈의 새끼! 기껏 키워 동냥질 좀 하랬더니… 헉헉! 야, 이 새끼야! 어떤 골빈 놈이 멀쩡
한 거지에게 적선을 하냐? 헉! 헉! 다 죽어가던 놈을 거두어 키워줬으면 고마운 줄을 알아
야지."
거의 일각 동안 숨도 안 쉬고 두들기던 가릉은 지쳤는지 매질을 포기했다.
그러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뱉는 욕설은 변함이 없었다.
"헉! 헉! 그깟 다리 하나 부러뜨리자고 했더니… 애비 얼굴을 걷어차? 쌍놈의 새끼……."
가릉은 절룩거리며 한쪽 구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친 숨이 턱끝까지 차 올랐다.
"헉… 헉……!"
그는 아직도 몸을 둘둘 말고 있는 나천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의 새끼! 카악, ㅌ!"
누런 가래침이 철퍽 움막에 늘어붙었다.
가릉은 자신의 쪽박을 내려다봤다. 어찌나 세게 휘둘렀던지 이미 쪽박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콰직!
그는 신경질적으로 부서진 쪽박을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야! 이 새끼야! 나가서 쪽박이나 하나 구해 와!"
여전히 죽일 듯한 으르렁거림이었으나 매질을 할 여력은 없어 보였다.
부스럭…….
나천은 부스스 일어나 코피를 쓰윽 닦았다. 그리고는 비칠비칠 움막 밖으로 걸어나갔다.
어쨌든 다리 병신이 되는 것만은 넘긴 모양이었다.
눈물인지 핏물인지 주르륵 흘러내렸다.
움막 위로 핏빛 같은 노을이 길게 걸렸다.
* * *
가릉은 시도 때도 없이 발작했다.
나천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
그는 그 일에 목숨을 건 것만 같았다. 아니, 가릉은 이미 목숨을 걸었다고 해야 옳았다.
잠자고 있을 때 덤벼드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밥 먹고 있을 때나, 심지어는 뒤돌아서 오줌
누고 있을 때에도 살금살금 다가와 몽둥이로 후려쳤다.
처음에는 피하는 것만도 아슬아슬했다.
한순간 방심하면 그대로 다리 병신이 되고 말 아찔한 순간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마침내 팔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천은 몽둥
이가 날아드는 것을 보지 않고도 피할 수가 있었다.
상황은 이미 그가 어렸을 때와는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가릉은 나천의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했다가 도리어 자신의 하나 남은 멀쩡한 다리가 부러질
뻔했다.
그 이후로 가릉은 나천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그러나 가릉의 발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
럼…….
"처… 천아! 배… 고프지 않니?"
가릉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적인 음성을 발했다.
순간 움막 구석에 다리를 펴고 누워 있던 나천의 얼굴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 사이로 야수 같은 눈빛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그 눈빛을 접한 가릉의 전신이 흠칫했다.
"아… 아니다. 적선은… 내가 갔다올 테니… 너는 그냥 누워 있으렴."
가릉은 슬금슬금 나천의 눈치를 살피며 때가 줄줄 흐르는 쪽박을 집어 들었다.
절룩거리며 움막을 나서는 그의 목구멍에 본능적으로 욕지거리가 걸렸다.
'지미랄 놈의 것! 에잇! 퉤! 더럽다… 쌍놈의 새끼, 지금까지 키워준 게 얼만데…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긴.'
욕설이 슬금슬금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지만 그것을 내뱉을 용기는 없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천의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천의 상대가 아닌 사람은 비단 그 혼자가 아니었다. 인근의 거지들 중에서는 감히 나천을
건드리려는 자가 없었다. 지난 달 미친개라고 소문난 광팔(狂八)이 가릉의 부탁으로 나천의
다리를 부러뜨리려다가 죽사발이 난 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자라서 지 부모를 잡아먹는 살무사 같은 놈! 하지만… 언젠가는 내 손으로 네놈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말겠다!'
가릉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내심 굳게 다졌다.
그러자 유난히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그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절룩절룩 밖으로 나갔다.
가릉이 사라지고 나서 나천은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누워 있는 일만이 그의 유
일한 낙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부스럭!
나천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것은 가릉이 나가고 한 시진여가 지나서였다.
"늙은이가 늦는 걸 보니 오늘도 허탕이로군."
나직한 음성은 상당히 특이한 어조였다. 마치 모든 인생을 포기하고 자살에 임하려는 사람
같았다.
쓰윽!
그는 힘겹게 움막의 입구로 몸을 돌렸다.
이런 날 가릉을 믿고 기다린다는 것은 그냥 굶겠다는 의지표명과 마찬가지다.
나천은 그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직접 음식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쓰윽!
그는 구석에 놓인 팔뚝만한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왼팔을 허름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지난번 부러진 뼈도 제대로 안 붙었을 텐데… 쳇! 무능력한 늙은이 덕분에 생지랄을 떠는
군."
그는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사정없이 몽둥이를 내려쳤다.
휘익! 파직!
섬칫한 파열음과 함께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으음… 제, 제길!"
나천은 몽둥이를 집어던졌다.
목구멍을 넘어오려는 구역질을 억지로 억눌렀다.
이 개같은 일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세상은 정말 더러운 것이었다.
팔이라도 부러져야 동냥질을 할 수 있는 세상이라니.
그러고 보면 세상살이란 정말 쉬운 게 없는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지옥 같은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는 만성이 되어
서인지 회복도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었다.
"오부자 집에 생일 음식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팔까지 부러뜨렸으니 오늘은 큼직하게 얻어먹어야만 하는 운명이다. 짜기로 소문난 오부자
네 집이지만, 팔 부러진 거지까지 박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터덜터덜…….
나천은 천천히 움막을 걸어 나섰다.
나천은 특이한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특이하다기보다는 황당한 걸음이었다.
그는 걸을 때 앞을 보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세상을 바로 보기 싫다는 양, 그는 늘 비스듬
하게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물론 그 때문에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것은 대체로 마주 오는 남과 부딪치는 것인데, 오늘은 유달리 재수가 더러운 날이었다.
쿵!
나천의 몸이 썩은 짚단처럼 뒤로 날려 거칠게 땅위로 쓰러졌다.
그러나 나천은 몸에 묻은 흙을 털며 느릿하게 일어섰다.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니 당황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상대의 반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순간 앞에서 한 마디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자식! 어딜 보고 다니는 거야?"
나천은 본능적으로 슬쩍 얼굴을 들었다.
상대는 오각(吳覺)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였다. 땅 좀 있다고 어깨를 거들먹거리는 졸부의 아
들이기도 한 자였다.
그는 지금 어깨를 움켜쥔 채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물론 그러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를 갈던 오각이 나천의 멱살을 덥석 움켜쥐었다.
"이 거지새끼가 죽을려고 환장을 했나!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지랄을 떨어!"
고함과 함께 오각의 주먹이 거칠게 나천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우욱!"
한마디 답답한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천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개도 들지 않았으며 저항의 눈길 한
번 던지지 않았다.
그 점이 오각을 더욱 분노하게 했음은 물론이었다.
"이 자식이 지금 반항을 하는 거야, 뭐야?"
오각은 한 손으로 멱살을 움켜쥔 채 사정없이 나천의 복부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퍽! 퍼퍼퍽!
그래도 나천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운명인 양 무자비한 오각의 주먹에 몸을 내맡기고 있
었다.
"새끼! 안 그래도 취한루의 앵화라는 계집이 말을 안 들어 열받던 참인데… 너 정말 잘 걸
렸다!"
오각은 정신없이 무방비 상태의 나천을 두들겨 팼다.
그러다 문득 기형적으로 자그마한 나천의 오른손이 눈에 들어왔다.
주먹을 날리던 오각의 입가에 얄팍한 조소가 매달렸다.
"이게 뭐야? 이제 보니 팔병신 아니야?"
팔병신…….
순간 나천의 어깨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그러나 오각은 그런 변화까지 알아채야 할 의무가 없었다.
"이런 쓰벌! 여태 팔병신 데리고 이 지랄을 했단 말야? 에잇! 재수 없어!"
그는 나천의 몸뚱이를 힘껏 집어던졌다.
털썩!
나천은 맞을 때와 마찬가지로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앞으로는 두 눈 똑바로 뜨고 다녀. 알겠어?"
오각은 한차례 엄포를 친 뒤 사납게 몸을 돌렸다.
등을 돌린 탓에 오각은 벌떡 일어서는 나천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크크큭! 지금… 팔병신이라고 했나?"
살기가 가득한 음성이었다.
오각은 본능적으로 우뚝 멈추어 섰다.
'이 자식이?'
어이가 없었다.
'이 자식이 기껏 봐주니 헛소리를 씨부렁거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몸을 홱 돌려세웠다.
순간 오각의 전신이 벼락에 맞은 듯 흠칫했다. 부러진 팔을 흔들거리며 그에게 다가오는 나
천의 눈빛 때문이었다.
'으으… 저, 저놈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인생 중에서 그보다 무서운 눈빛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서야 했다.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무서운 눈빛을 한 거지새끼 역시 지옥의 사자 마냥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크크큭… 팔병신이라고?"
팔병신이라는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냥 두들겨 맞아 줄 수도 있어. 어차피 네가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은 다르
기에.
하지만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해.
먹고살기 위해 일부러 팔을 부러뜨리는 인간에게는 절대 그런 말을 말아야 해. 알아?
나천이 한 걸음 다가오면 오각은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너… 내… 내 아버지가… 누… 누군지 모르나?"
혀가 오그라들어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얼굴은 비오듯이 흘러내린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허, 허튼 짓을 하면… 내 아버지가 가만있지… 크억!"
오각은 배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러댔다. 나천의 주먹이 정통으로 복부를 질렀기 때문이다.
"크크큭… 내가 너더러 부러진 팔을 고쳐달라고 했나?"
나천은 오각의 배에 박힌 주먹을 천천히 빼냈다.
그러나 빼낼 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다시 한 번 오각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쐐애액!
"커억!"
오각은 짐승의 울부짖음을 토하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배를 움켜쥔 그의 입에서는 연신 '우우'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나천의 태도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니면… 난 다쳤으니 한 푼이라도 도와달라고 했던가?"
그의 오른발이 슬쩍 움직이는가 싶더니 섬전처럼 오각의 입술을 걷어찼다.
빠각!
뼈라도 부러진 것 같은 기이한 소리가 났다.
"크아악! 사, 살려 줘……."
오각은 한 움큼 핏물을 입에 넣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나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 그의 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지 멀쩡하고 애비 잘 만났으면… 하늘에 감사를 올리며 주는 밥이나 잘 처먹을 것이
지……."
나천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더욱 섬칫한 빛을 발했다.
오각은 공포에 질려 주춤거리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천의 발길질은 그보다 적어도 몇 배는 빨랐다.
쐐애액― 퍽!
이번에는 턱이었다.
오각은 고개가 완전히 꺾어져 벌러덩 드러누워야 했다.
"네놈 따위가 뭘 안다고? 동냥질을 위해 팔을 부러뜨려야 하는 인생을 어떻게 안다고?"
나천의 음성 마디마디에는 시퍼런 한(恨)들이 비수처럼 번뜩였다.
"으으으… 제발……."
오각은 정신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미… 미안해! 제… 제발. 내가 자… 잘못했어. 그러니 제발 사… 살려줘!"
오각은 두 손에서 연기가 나도록 빌었다.
그 순간 나천의 입가에 새하얀 웃음이 쓰윽 떠올랐다.
"아니야… 물과 말이란 본시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는 것이야. 부잣집 외동아들이 그런 것
도 모르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나천의 오른발이 허공을 섬전처럼 갈랐다.
쐐애― 액! 빠직!
'큭!' 하는 단말마의 신음이 격하게 튀어나왔다. 턱이 부서지고 입이 찢어져 피가 튀고 이빨
이 부러져 나갔다.
오각의 턱을 부수며 올라갔던 나천의 오른발이 그대로 오각의 얼굴을 짓밟았다.
와지직!
"끄르륵……!"
기괴하게 신음하는 오각의 얼굴을 나천의 발이 잔인하게 짓뭉갰다.
오각의 얼굴은 어디가 입술이고 코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참하게 뭉개졌다.
"아, 안돼… 그만……."
일순 오각은 두 손으로 나천의 발을 움켜쥐며 사력을 다해 얼굴에서 떼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자 나천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오각의 얼굴에서 발이 한 치 가량 떨어졌다.
"이 자식이?"
순간 나천의 왼발이 오각의 옆구리를 인정 사정 없이 걷어찼다.
다시 한 번 '빠직!' 하는 섬칫한 괴음이 들렸다.
늑골이 부러진 것 같았다.
오각의 두 손에서 힘이 빠지며 나천의 오른발이 다시금 오각의 얼굴을 밟았다.
"크억… 꾸륵… 꾸르륵……."
오각은 숨도 쉴 수 없는 고통으로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늑골이 부러진 곳으로 다시금 나천의 왼발이 잔인하게 작렬했다.
"우웩!"
오각의 입으로 뜨거운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은 비명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각은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천은 아직까지 오각의 얼굴을 밟고 있던 오른발을 느릿하게 떼어냈다.
나천은 잠시 헐떡거리는 오각을 뒤돌아보며 천천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천천히 사라져가는 나천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는 한 쌍의 냉막한 눈길이 있었다.
"전신에 한과 독기만이 가득 차 있는 놈이라… 들판에 풀어놓은 야수 같은 놈이로군."
길가에 자리한 기정루(奇情樓)의 이 층.
적건(赤巾)을 두르고 푸른 수실이 달린 장도를 등뒤로 비껴 맨 냉막한 인상의 이십대 사내.
그는 한 잔의 죽엽청을 그대로 털어 넣으며, 싸늘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후후… 그러고 보니 궁사(芎射). 너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않느냐?'
스스로를 궁사라 칭하는 사내.
그는 나천의 모습에서 독 오른 살무사 같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그의 어머니는 창녀였다.
여인들의 지분 내음. 구역질나는 살 부딪는 소리. 교태를 부리는 어머니의 웃음소리…….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뿐인 어머니였다. 언제나 자신의 손을 꼬옥 쥐어주던 따뜻한 온기(溫
氣)를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그의 어머니를 창녀라고 불렀던 모든 녀석들에게 궁사는 눈을 뒤집으며 달려들었다.
수없이 입술이 터지고 이빨이 부러졌다.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궁사는 자신의 어머니를 창녀라고 부르던 모든 녀석들에게 미친 소처럼 달려들었다.
그의 어머니가 죽던 아홉 살이 되었을 때까지 그 일은 늘 반복되는 일과였다.
'후후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네가 왜 그렇게 잔인할 수밖에 없는지…….'
궁사의 눈길이 나천이 사라진 곳을 향했다.
'어설프게 건드리면 언젠가는 내가 당한다. 그렇기에 손을 댈 바엔 아예 잔인하게 짓밟아야
만 하지… 너의 잔인함은 생존이라는 것… 어쩔 수 없는 생존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더욱 진한 웃음이 칼날처럼 깔렸다.
'어쩌면 너 또한 운명적으로 칼을 잡아야만 할지도 모르겠구나, 후후후!'
궁사는 파랗게 출렁거리는 죽엽청을 다시금 한 입에 털어 넣으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
다.
나천이 사라진 곳을 또다시 돌아보는 궁사의 눈에 길게 늘어진 황혼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 * *
"이 늙은 거렁뱅이! 그 녀석이 어떤 아들인지 알아? 오대독자야, 오대독자! 헌데 비천한 거
지 주제에 내 아들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놔?"
오진(吳震).
나천에게 얻어맞은 오각의 부친이라는 자.
그는 어버이의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걸음에 나천의 움막을 찾았다.
그러나 움막에는 자칭 애비라는 절름발이 늙은이뿐이었다.
당연히 분노가 머리끝까지 타고 올랐다.
"여봐라! 저 거지새끼를 당장 작살내지 않고 무엇들을 하는 게냐!"
그는 몽둥이를 꼬나 쥐고 흉흉한 기세로 서 있는 하인들을 돌아보며 악을 내질렀다.
하인들은 핏발선 주인의 명령에 인정 사정 없이 가릉을 몽둥이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퍽! 퍼억! 퍽!
금새 피가 튀고 살점이 튀었다.
늙은 가릉에게는 비명조차 지르기 힘든 모진 매질이었다.
"크흐으……!"
하인들은 거의 반 시진 동안 두들겨댔다.
결국 가릉의 뼈란 뼈는 모두 부서지고, 사람인지 핏덩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졌을 때에야 비
로소 매질이 거두어졌다.
"퉤!"
오진은 혼절한 가릉의 몸뚱이에 침을 뱉었다.
"나천이라는 놈이 돌아오면 준비하고 있으라고 해! 다음 차례는 제놈이라고. 돌아가자!"
그는 싸늘하게 일갈을 한 뒤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으… 좋다!"
취한루에서 제법 두둑하게 밥을 얻어먹은 나천은 기분 좋게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릉의 몫까지 챙겨왔기에 발걸음은 더욱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움막에 거의 다다라서는 별안간 기분이 달라져야 했다. 움막 안에서 난데없이 신음
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이, 이런……."
지은 죄에 대한 육감일까?
낮에 있었던 오각과의 일이 떠오르며, 본능적인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툭!
쪽박이 깨지며 그 안에 담긴 밥이며 반찬이 땅바닥에 널브러지며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나천은 거칠게 움막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그의 눈에 핏덩이가 크게 확산되어 들어왔다.
"병신같이!"
나천의 입술을 벌어지며 비틀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음성을 들었음인가?
한껏 부풀어오른 가릉의 눈까풀이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누, 누구……? 천이냐?"
나천은 대답 대신 신경질적인 으르렁거림을 토해냈다.
"누가 그랬어?"
그는 부르르 떨리는 가릉의 눈길을 마주하며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오각, 그놈이지?"
비록 물음이었지만 확신이나 다름없는 음성이었다. 그 이외는 이렇게 피곤죽이 되도록 두들
겨 맞을 일이 없는 가릉이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야… 그저 술을 먹고… 시비가 좀……."
가릉은 결사적으로 말꼬리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나천을 속이기에는 상황이 너무도 명백했다.
나천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부서져라 말아 쥐었다.
"오각―!"
나천은 일갈을 내지르며 신형을 홱 돌렸다.
가릉은 나천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두 줄기 굵은 눈물을 분명히 보았다.
'저… 저놈이 눈물을?'
믿을 수 없었다.
천하의 독종 나천이 눈물을 흘린다? 그것도 내가 두들겨 맞았다고 해서?
'자식… 병신같이 눈물은…….'
순간 가릉의 눈에서도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피로 물든 얼굴을 씻어 내렸다.
나천은 더러운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쓰윽 훔쳤다.
"오각… 이 더러운 새끼!"
그는 두 눈에서 줄기줄기 싸늘한 살광을 흘려내며 성큼성큼 움막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나천의 모습을 보며 가릉은 한 가닥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안돼! 가… 가… 가면 안돼!"
가릉의 음성은 고통으로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나천의 모습은 빠르게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멍청한 녀석… 가면… 너는 죽어… 안돼……."
가릉은 덜걱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오각은 기분이 좋았다.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부서진 상태였지만 기분마저 울상은 아니었다.
"미친 거지새끼. 아버님이 직접 가셨으니 네놈은 이제 끝장이 날 거다."
그는 한껏 들뜬 기분으로 술잔을 집어 들었다.
"크으… 빌어먹을! 입안이 헐어서 맛도 모르겠군."
퉁퉁 부어오른 입술에 깨어진 턱.
그 몰골로도 술을 털어 넣는 정신력을 칭찬해야 할까?
어쨌든 그는 연신 술을 들이켰다. 잔뜩 기분이 좋아지는 마당에 술 한잔을 마다할 수는 없
는 탓이었다.
"새끼… 아버님이 직접 잡아다 주신다고 했으니, 어디 잡혀 오기만 해봐라. 내 그냥……."
그러나 그의 뒷말은 사납게 부서지는 문짝 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와장창!
"이 더러운 자식! 그래, 네가 기다리던 거지새끼 여기 대령했다. 어쩔래?"
나천이었다.
우렁찬 일갈과 함께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그의 신형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어… 어?"
가슴과 얼굴을 백포(白布)로 둘둘 만 오각이었다.
그 불쌍한 몰골에 다짜고짜 나천의 오른발이 작렬했다.
"커억!"
어제 맞추어 놓은 늑골이 또다시 부러지며 엄청난 고통이 엄습했다.
오각은 배를 움켜쥐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저앉는 오각의 머리를 움켜쥐며 나천의 무릎이 도끼처럼 사정없이 날아갔다.
"으어억! 사… 사암 사아려어!"
혀가 잘린 것 같았다. 때문에 오각은 있는 힘껏 비명을 내질렀지만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
었다.
"아으… 아아… 아……."
오각은 얼굴을 움켜쥐며 사력을 다해 땅바닥을 기었다.
무슨 수를 쓰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순간 나천이 오각의 팔을 들어올리며 발로 장작 패듯 내리찍었다.
빠직!
뼈가 살점을 찢으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간 오각은 엄청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피거품을 물었다.
"내가 잡혀 오기만 하면 어쩐다고? 어디 한 번 네 마음대로 해봐! 이 새끼야!"
나천은 다른 한쪽 팔을 잡아갔다.
빠직!
핏물이 분수처럼 흘러나왔다.
오각은 멀쩡한 두 다리를 미친 듯이 버둥거렸다.
나천의 핏발이 곤두선 두 눈이 사방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 머리만한 돌덩이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오각의 다리를 내리찍었다.
"어디 너도 한번 병신이 되어 봐라!"
지옥에서 울리는 듯한 나천의 저주성이 들리는 순간, 오각은 아득히 정신을 잃었다.
'다… 다행이다. 붙잡히진 않았구나.'
가릉은 내심 부러진 가슴을 내리쓸었다.
그러나 이 순간 나천이 오각을 작살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가릉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그… 그 아이를… 용서해 주시오. 제발!"
부러진 손을 비비며 오진에게 애원했다.
물에 떠내려오는 핏덩이를 주워 다리를 부러뜨린다, 동냥을 시킨다 아웅다웅하며 살아온 세
월이다. 당연히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자(父子)다.
하지만 그 세월은 보이지 않는 끈끈한 정을 두 사람 사이에 묶어놓았던 것이다. 그것은 어
떤 면에서 친부자의 정보다 더욱 끈끈한 것이었다.
가릉의 손에서 핏물과 살점이 뒤섞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줄곧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오진의 인상이 다소 펴지기 시작했다.
"거지 주제에 그래도 자식 사랑은……."
조금 누그러진 음성이 조용하게 흘러나왔다.
그도 사람인 이상 가릉의 애절한 자식 사랑에 분노가 조금 누그러진 것이었다.
'아… 잘하면 나천이 놈을 살릴 수도 있겠구나.'
가릉은 일말의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크… 큰일났습니다요! 도… 도련님이……!"
순간 오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이냐?"
오진이 다급하게 묻는 순간 가릉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순간 핏덩이를 등에 업은 하인 한 녀석이 미친 듯이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이럴 수가!"
오진의 입에서 신음 비슷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핏덩이의 주인은 그의 외동아들 오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몰골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관절은 모두 부러져 허연 뼈가 섬뜩하게 튀어나
왔고, 푸줏간에 내걸린 고깃덩이처럼 다져진 몸뚱이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오진은 정신없이 달려 내려갔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핏덩이가 된 자신의 오대독자뿐이었다.
"아… 버… 지……."
오각의 입술에서 본능적인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래… 애비 여기 있다. 애비 여기 있어."
오진은 아들의 손이라고 생각되는 물체를 부여잡으며 절규하듯 말했다.
그때였다.
오각의 몸뚱이가 감전된 것처럼 한차례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무겁게 늘어졌다.
죽음이었다.
"각, 각아……."
오진의 눈에 절망이 그려졌다.
"각아… 눈을 떠봐라. 애비가 여기 있잖니… 어서 눈을 떠봐……."
그러나 죽은 오각이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오진은 아들이 어떠한 방법으로도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났음을 알 수 있었다.
"크아아아―!"
발악적인 노성이 메마른 입술을 뚫고 나왔다.
그렇게 노성을 내지르던 오진은 돌연 독사 같은 눈빛으로 가릉을 홱 돌아보았다.
"주… 죽여버려! 저 거지새끼를 당장 죽여버려! 빨리!"
그의 두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죽여! 죽여버리란 말이야!"
오진은 입에 거품을 물며 악을 질렀다.
순간 사방에서 몽둥이를 꼬나 쥔 하인들이 가릉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퍽!
몽둥이 하나가 가릉의 머리를 후려쳤다. 피하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이 제대로 맞은 일격이
었다.
"커억……!"
가릉은 눈앞이 어지럽게 도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앞으로 꼬꾸라졌다.
머리가 부서지며 진득한 뇌수가 흘러나왔다.
가릉의 육신은 썩은 짚단처럼 아주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크크큭! 이게… 죽음이란… 건가?'
이미 고통은 느낄 수가 없었다.
가릉은 그의 몸으로 폭우처럼 쏟아지는 몽둥이가 환상처럼 아주 느릿하게 움직인다고 생각
했다.
따스한 백광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절름발이로… 곰보로… 거지로 살아온 한많은 세월이었다.
* * *
툭!
거적에 둘둘 말린 가릉의 시신은 힘없이 땅바닥을 굴렀다.
다른 거지들에게 소식을 들은 나천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야 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거적 뭉치.
그 안에 누가 어떤 모습으로 누워 있을지는 너무도 명백한 일이었다.
"아버지!"
나천은 목이 터져라 가릉을 불렀다.
십사 년. 자그마치 십사 년이었다.
그 많은 세월 동안 자신의 아버지였던 사람.
얼굴을 타고 뜨거운 피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나천의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저놈이다."
"저놈이 도련님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순간 싸늘하게 식어가는 가릉의 주검을 던져놓고 가던 하인들이 벌떼처럼 나천에게 달려들
었다.
쉭!
공기를 찢으며 몽둥이 하나가 나천의 얼굴을 향해 무식하게 날아왔다.
나천은 터럭만큼의 차이로 몸뚱이를 흘려냈다. 동시에 그는 성난 황소처럼 앞으로 치달았다.
쉭! 쉭! 쉬익!
그러자 이번에는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세 개의 몽둥이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나천은 고개를 젖혀 머리로 날아오는 몽둥이를 피해냈다. 이어 허리를 뒤틀며 뛰어올라 나
머지 몽둥이들을 피해냈다.
그것은 보법도 신법도 아니었다.
나천은 단지 본능적으로 피해냈을 뿐이었다. 마치 다리를 부러뜨리려는 가릉의 몽둥이를 피
하듯 그렇게 움직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조금만 더 가면 가릉의 주검이 있었다. 푸줏간의 고기처럼 잘 다져진 처참한 육체가 있었다.
퍽!
돌연 오른쪽 어깨가 부서지며 격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급기야 몽둥이를 한 대 얻어맞은
것이었다.
'으윽!'
나천은 신음을 삼키며 턱밑까지 치밀어 오른 핏물을 억지로 밀어 내렸다.
그러나 어깨가 부서지는 순간에도 그의 신형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짓이겨진
가릉의 신형이 발밑에 다가든 순간 나천은 그대로 오열하며 가릉을 부둥켜안았다.
"아버지! 끄윽!"
그러나 사람들은 나천이 오열하도록 기다려주지 않았다.
가릉을 끌어안은 나천의 등으로 수많은 몽둥이들이 장작 패듯 떨어져 내렸다.
퍽! 퍽!
둔중한 타격음이 가득 울려나왔다.
'크헉!'
나천은 신음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도망가야 한다! 이대로 있다가는 개죽음밖에 없어!'
나천은 온몸이 욱신거리는 고통을 참으며 벌떡 일어섰다.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그는 가릉의 주검을 번쩍 들쳐업었다.
"비켜! 죽고 싶지 않으면!"
나천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부러지고 찢긴 몸으로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가릉의 주검을 들쳐업은 나천의 형상은 악귀
였다.
"으으… 지독한 놈……."
그 모습에 하인들은 기가 질려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잠시의 시간을 놓치지 않고 나천의 신형이 빠르게 치달리기 시작했다.
휘익!
그러나 하인들도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나천이 곁을 스치자마자 그들은 미친 듯이 몽둥이를 퍼붓기 시작했다.
퍽! 퍽!
이미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가릉의 주검 위로 또다시 몽둥이가 떨어져 내렸다. 등을 통해 전
달되는 둔탁한 감촉이 유달리 고통스러웠다.
'개… 개자식들!'
나천은 피눈물을 삼켰다.
그러나 나천은 멈출 수가 없었다.
가릉의 몸이 처참하게 뭉개지는 순간에도 나천은 미친 듯이 내달려갈 뿐이었다.
피눈물이 눈앞을 가려 온 세상이 시뻘겋게 변했다.
"잡아라!"
"저 자식을 잡아! 당장 죽여 버려!"
오진의 하인들은 결사적이었다.
이제는 명령 때문이 아니라 흥분 때문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릴 때 느끼는 기묘한 쾌감.
하인들은 그 악마적인 본능을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뒤를 힐끗 쳐다보던 나천은 절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추적하는 하인들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는 탓이었다.
문득 그의 시야 속에 객잔 하나가 들어왔다.
'그래. 저기로 들어가자. 놈들이 사람들에 부대끼는 사이에 뒷문으로 도망가면 쉽사리 못 쫓
아 올 거야.'
나천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판단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였다.
벌컥! 우당탕탕!
문이 열리자마자 탁자가 뒤집어지고 의자가 부서졌다.
그리고 수많은 파편들이 부서져나가는 사이로 두 개의 핏덩이가 뛰어 들어왔다.
문득 술잔을 들어올리던 궁사의 눈빛이 핏덩이를 향했다.
'저놈은 어제의 그 어린아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머리 하나는 더 큰 청년을 박살내던 어린아이가 생각났다.
후다다닥!
그 아이는 핏덩이 하나를 짊어진 채 탁자 사이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이 자식! 거기 안 서!"
순간 십여 개의 인영이 거칠게 주루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며 쫓
아가고 있었다.
궁사는 한눈에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필경 어제 두들겨 맞았던 놈이 저 녀석에게 보복한 것일 테고… 저 녀석은 그대로 앉아만
있을 놈이 아니지.'
궁사는 여전히 독사 같은 나천의 눈에 말라붙은 핏물 자국을 발견했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눈물?'
그가 알기로 저렇게 눈물을 흘릴 녀석은 아니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눈물은 보이지 않을
게 틀림없는 성격이었다.
그토록 독한 녀석이 눈물을 흘린다?
궁사는 궁금함을 추스르며 하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나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도주할 곳을 찾던 나천은 사냥개에 몰린 토끼 마냥 헤매이고
있었다. 이리저리 쫓기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험악한 손길에 잡힐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안되겠군.'
궁사는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 그만들 하시지."
궁사의 나직한 음성이 하인들의 심혼을 흔들었다.
그러나 살기로 미쳐버린 하인들은 다시금 시뻘건 눈빛을 뿜어내며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
"상관없는 일에 왜 나서! 죽고 싶어 환장했냐?"
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자였다.
순간 새하얀 은광이 허공을 갈랐다.
쉬쉭!
"끄윽!"
방금 전 궁사에게 욕설을 퍼부었던 하인 녀석이 자신의 손을 움켜쥐며 짤막한 신음을 흘렸
다.
"이 자식이?"
욕설과 함께 달려들던 하인의 신형이 무언가에 놀란 듯 흠칫 물러섰다. 그의 면전에 궁사가
새하얀 장도를 꺼내 들고 조용히 서 있었다.
"이, 이런… 제길, 이제 보니 무림인이었군."
장내의 하인들은 그제야 궁사가 강호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상대의 정체를 알자 하인들의 살기가 점차 스러져갔다. 궁사의 더 큰 살기에 눌려버린
것이다.
"무슨 일인가?"
궁사는 천천히 도를 집어넣으며 다시금 물었다.
무인 특유의 잔잔한 살기가 깔리는 분위기였다.
"저… 저 자식이 우리 소주인을 죽였습니다."
한 녀석이 앞으로 나서 천천히 일어서는 나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주인이라면 어제 그 건달 같은 녀석일 것이다.
궁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아이가 매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그… 그건……."
하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순간 궁사의 싸늘한 안광이 하인들을 쓸어보았다.
하인들은 마치 살무사 앞의 개구리처럼 오금을 절며 떠듬떠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 저 녀석의 아비되는 자입니다."
궁사는 천천히 나천을 돌아보았다.
거의 절망적인 순간에도 나천의 눈빛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은 채 싸늘하게 궁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궁사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의 아비가 죽었으니 어차피 대가를 치른 셈 아닌가… 허니 이제 그만두는 것이 어
떻겠나?"
정중한 권고의 말이었으나, 기분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하인들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주인이 광분해서 죽이라 했던 녀석을 살려준다는 것이
영 께름칙한 것이다.
궁사는 하인들의 모습에서 그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만약 너희들의 주인이 뭐라 한다면, 죽여 땅에 묻어놓고 왔다고 얘기해. 설마 시체를 가져
오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
궁사가 마지막 방법을 제시했다.
말은 정중하나, 거의 강압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하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 무식한 무림인의 병장기에 재수 없이 죽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하인들은 머리를 긁적거리다 하나 둘씩 돌아갔다.
"제기랄, 할 수 없지 뭐."
"거지새끼 너! 다시 이 동네에서 눈에 뜨이면 그대로 황천길 가는 줄 알아?"
성질 급한 몇몇은 끝내 험악한 외침을 남겨두었다.
하인들이 모두 사라지자 궁사는 천천히 나천에게 다가갔다.
"몸은 움직일 수 있겠느냐?"
궁사는 조용히 나천에게 물었다.
나천은 대답 대신 꿈틀꿈틀 흐느적거리듯 몸을 움직였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이한 동류 의식이 두 사람 사이를 교차하고 있었다.
오량산에 새로운 무덤 하나가 생겼다.
비석도 없이 그저 그런 돌덩이 하나를 세워놓은 초라한 무덤이었다.
무덤가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궁사와 나천이었다.
나천은 처참한 몸으로 가릉을 짊어지고 손으로 땅을 판 뒤 가릉의 무덤을 만들었다.
일을 하는 동안 궁사의 도움을 원하지도 않았고, 궁사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무덤가에 앉아 말없이 남해성(南海城)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은 침묵처럼 소리 없이 흘러갔다.
한참 동안 남해성을 내려다보던 궁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테냐?"
나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궁사는 그런 나천의 옆모습을 흘깃 바라본 뒤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세상은 힘있는 자의 것이다. 돈의 힘이든, 아니면 권력의 힘이든… 그것도 아니면 나처럼
무력이라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천의 눈빛에 기광이 떠올랐다.
"너는 혹 운명과 숙명의 차이점을 아느냐? 숙명이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움직이는
손이고, 운명이란 자신이 움직여야 할 손이다."
나천의 눈가가 슬며시 찌푸려졌다.
그는 궁사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꺼내는 건지 언뜻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궁사의 얼굴이 나천을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지금까지 너를 움직여 왔던 것은 너의 숙명이지만, 이제부터는 네가 운명을 만들어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당신의 운명은……."
나천의 입에서 흘러나온 최초의 말이었다.
그는 궁사를 만난 뒤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궁사의 얼굴에 얇은 웃음이 바람처럼 매달렸다.
"나는 무사의 길을 택했다."
"당신의 이름은?"
궁사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궁사! 네 이름은?"
"내 이름……."
나천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가 왠지 껄끄러웠다.
나천(拏淺).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주웠다는 뜻이다.
그런 나천의 모습을 궁사는 한참 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일각 정도 흘렀을 때 궁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천은 화들짝 놀라 궁사를 바라보았다.
궁사의 얼굴에 웃음자락이 흐드러지게 피어올랐다.
"이제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나천의 눈빛이 조금 아쉬운 빛을 띨 때 궁사는 부스럭거리며 자신의 전낭을 뒤졌다.
"이것으로 너의 운명을 찾아보도록 해라."
궁사의 투박한 손에는 금화 한 냥이 들려 있었다.
나천이 다소 놀란 눈빛으로 궁사의 손을 바라보자, 궁사는 천천히 나천의 작은 손에 금화를
쥐어주었다.
"꼬마 친구!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갚으라고 빌려주는 것이다."
궁사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나천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나천의 손을 쥔 채 서 있던 궁사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꼬마친구……!'
나천은 탄탄한 궁사의 등이 아득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며 궁사가 했던 말들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날 남해성 외곽에 위치한 전노인(全老人)이 운영하는 철병무고(鐵兵武庫)에서는 잔뜩 녹
이 슨 거무튀튀한 검 한 자루가 팔렸다.
값은 은자 두 냥이었다.
그리고 철병무고 옆의 남해서옥(南海書屋)에서는 십이철검경(十二鐵劍經)이라는 검경이 팔
렸다.
값은 은자 두 냥 다섯 푼이었다.
두 가지 물건의 주인공은 꾀죄죄한 몰골의 한 소년이었다.
그는 한 냥짜리 금화로 물건을 산 후, 다시는 그 두 가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은 장강의 깊은 물살처럼 소리 없이 흘렀다.
마을에서 나천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섯 번의 가을이…….
첫댓글 기대됩니다.
잼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