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시험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패검대군 강군악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손에 쥔 기름종이를 바
라보았다.
"음… 홍의대 제1영주와 녹의대 제2영주가 첩자였다니."
패검대군 강군악은 다시금 기름종이를 바라본 뒤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서총관, 혹 생각해 둔 방법이라도 있는가?"
그러자 면전에 서 있던 서문량이 즉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지?"
"우선 그들을 역간으로 이용하는 계책입니다. 처리는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으음, 역간이라……."
역간이라 함은 적이 심어 둔 간세에게 오히려 역정보를 흘려 적을 속이는 간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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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흔 생사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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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군악은 그 계책이 별로 탐탁지 않았다.
"쌍환문 정도를 상대로 굳이 그런 수법까지 사용해야겠는가? 천하의 우리 검왕천이 말일
세."
그러자 서문량이 즉각적으로 답을 이었다.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역간책을 이용하면 우리 검왕천의 손실을 줄일 수 있고, 더구나
자칫 놈들의 전력을 오판하였을 때에도 큰 손실은 입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흐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패검대군은 미간을 찡그리며 태사의의 끝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것은 그가 생각에 깊이 잠겼을 때의 버릇이라는 것을 서문량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짜 기습으로 쌍환문의 간세를 밝혀낸 서총관의 권고인데 그냥 내칠 수도 없
고…….'
패검대군의 미간이 더욱 깊은 주름을 그려냈다.
그의 내심대로 검왕천의 첩자를 밝혀내게 된 것은 서문량의 지혜 때문이었다.
서문량은 우선 각 영주급 이상에게 각기 다른 침투로의 기습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
영주급 이상은 검왕천에서 기다리도록 했다. 즉 첩자가 어떻게든 쌍환문에 기습을 알리도록
한 것이었다.
결과는 간단하게 드러났다.
도리어 쌍환문의 역습을 받은 공격로의 책임자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바로 그들이 홍의대와
제1영주와 녹의대 제2영주였던 것이다.
"좋네. 총관의 뜻대로 역간책을 쓰도록 하지."
강군악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서문량은 허리를 굽혀 예의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하면… 역간책은 어떻게 쓰려 하는가?"
그러자 서문량의 얼굴이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것은 자신감에 찬 미소였다.
"소신이 생각하기에 역간으로 이용하는 것은 한 명이면 충분하리라 봅니다."
"흐음… 그건 왜지?"
"둘 중 하나만 잡아 첩자 색출이 완료된 것처럼 쌍환문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럼 쌍환문은
한결 안심을 할 것입니다."
"음… 맞는 얘기로군."
강군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처치하는 첩자는 누굴 택하려 하는가?"
이번에도 서문량은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아신석을 살해한 자가 좋겠습니다."
"아신석을 살해한 자라… 그게 누구지?"
"조사한 바로는 홍의대 제1영주인 비영철검(飛影鐵劍) 위무(委茂)로 판단됩니다. 그는 평소
아신석과 친분이 꽤 있는 편이어서 기습이 용이했을 것입니다."
서문량의 대답은 물이 흐르듯 청산유수였다.
패검대군 강군악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위무를 아신석을 살해한 혐의와 정보 누설죄로 처형하도록 하라."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다음날 사시경, 전 부대가 연무장으로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 문도들이 모여들 무렵 서문량이 자의대주 등 다섯 명의 대주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문도들은 그들의 출현에 의아해 했다. 이렇듯 대주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섯 명의 대주들은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 있고 진한 살기가 뭉실뭉실 피어 오르고 있었다.
자연히 사람들 또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중대한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홍의대 제1영주 비영철검 위무는 앞으로 나오라."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사십대의 청수한 중년인이 비척비척 걸어나왔다.
스스슥!
즉각적으로 다섯 명의 대주가 각기 병기를 꺼내 들고 위무를 포위했다. 그 기세가 사뭇 살
기충천한지라 일반 문도들조차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위무는 흠칫하며 입을 열었다.
"대주! 왜 이러십니까? 제가 무슨……."
그러나 위무의 항변은 미처 끝을 보지도 못했다. 창노한 홍의대주의 일갈이 터져나왔기 때
문이었다.
"닥쳐라! 네놈 같은 첩자를 부하라 믿고 있었다니……."
홍의대주는 분노로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지며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듯 위무를 겨누고 있
었다.
순간 위무는 모든 것이 발각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걸렸군.'
그러나 그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애병인 칠홍검(七虹劍)을 꺼내 들고는 다짜고짜 홍의대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차앗! 받아랏!"
마치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벼드는 격이었다.
위무가 검을 휘두른 순간 사대주의 무기가 독사처럼 위무의 네 요혈을 노리고 빠르게 짓쳐
들었다.
슈슈슉! 파파팟!
홍의대주의 장도와 칠홍검이 부딪히는 순간, 위무의 신형에는 네 줄기의 긴 상흔이 생겨났
다.
"크아악!"
위무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서문량이 주저앉은 위무에게 다가가 혈도를 짚은 뒤 좌중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홍의대 제1영주 비영철검 위무는 이번 본문의 기습을 알려 상당수의 홍의대원을 죽도록 했
다. 게다가 본문의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그와 친하게 지내던 녹의천검(綠衣天劍) 아신석을
살해했다."
터져나오는 폭탄 같은 말에 장내는 일순 동요가 일었다.
"으음……."
"그럴 수가……."
그러나 서문량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는 마땅히 참수를 당해야 하는 중죄인 바, 바로 이곳에서 형을 시행토록 하겠다."
이어 서문량은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아울러 집행은 아신석의 장자인 천수검(千手劍) 아강(亞剛)이 맡는다."
순간 술렁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천수검 아강이 천천히 연무장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의 눈에는 짙은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당신 같은 사람을 친구로 여겼던 아버님이 불쌍하오."
천수검 아강은 싸늘한 한마디를 내뱉고는 자신의 애병인 백련검(百鍊劍)을 꼬나 쥐었다.
아강의 말에 위무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부디 지옥에서는 회개를 하도록 하시오!"
아강은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맑은 은빛 검광이 허공에 무지개를 수놓는 순간 위무의 수급이 땅으로 튕겨져 나갔다. 허공
에는 선명한 핏줄기가 분수처럼 치솟아 올랐다.
쓰윽!
아강은 위무의 수급을 주워 들고 아신석의 위패가 놓인 곳으로 사라졌다.
아강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서문량은 다시금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이번 기습은 첩자인 위무로 인해 사전에 노출되어 본문의 문도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그러
나 쌍환문 또한 많은 사상자를 냈고, 영주격인 사검 선우휘까지 잃었다. 게다가 본문은 오히
려 첩자인 위무를 처단할 수 있었다."
그의 음성은 유난히 자신감에 빛나고 있었다.
"해서 문주님께서 이번에 죽은 문도들의 가족을 위로하고, 동시에 이번 기습의 공로자를 치
하하기 위해 위로금과 홍주(紅酒) 열 말, 돼지고기 팔백 근을 하사하셨다. 지금부터 이 술과
고기로 각 대별로 잔치를 열도록 한다."
서문량의 말이 끝나자 일제히 장검을 높이 치켜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문주님 만세! 검왕천 만세!"
문도들은 곧 여기저기 흩어져 잔치 준비를 시작했다.
누구나 그렇듯 흥겨운 일에는 속도가 붙는 법이다.
금새 연무장에서는 각 대별로 모여 무예를 겨루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등 점점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서문량이 곁에 서 있던 낭객대주 건위경에게 말했다.
"건대주께서는 1향대와 3향대의 나천과 냉혼을 제게 보내 주시오."
서문량은 낭객대주인 건위경에게 일언을 던진 뒤 자부전 안으로 사라져갔다.
일각 후, 나천과 냉혼은 안내자의 뒤를 따라 자부전 안으로 들어섰다.
나천은 여전히 검을 품에 안은 자세로 한결같은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냉혼 또한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은 특유의 표정으로 따라갔다.
긴 회랑을 지나 대청에 다다르자 안내자는 곤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두 사람의 앞을 걸으니 진땀이 흘렀던 것이다.
"이곳에는 문주님이 계시니 각별히 주의하기 바라오."
안내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 때였다.
돌연 빈정거리는 듯한 냉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큭큭큭! 높으신 분이 불렀으니 말조심, 행동 조심해야죠. 암!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황공스
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정말 조심해야죠. 큭큭큭!"
삐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냉혼을 안내자는 한차례 쏘아보고 난 뒤, 뒤도 안 돌아보고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냉
혼과 더 말해봤자 이로울 게 없기 때문이었다.
안내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냉혼은 실실거리며 비웃음을 날렸다.
"뭐가 저리 급하누? 마누라 거시기에 물을 쏟다 말고 왔나보지? 낄낄낄."
그러나 냉혼은 곧 자신의 목적을 상기해냈다.
"자, 어쨌든 오라고 했으니 가 봐야지?"
두 사람은 천천히 문을 밀고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 안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바닥은 기이한 향기가 난다는 흑오목과 안남 지방에서만 난다는 청강석으로 이루어져 있었
다. 또한 천향목(天香木)으로 이루어진 기둥에는 각기 하나씩의 야명주가 달려 있었다.
"우와! 엄청나구나! 나는 언제나 이런 곳에서 살아보지?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냉혼은 마치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처럼 사방을 둘러보며 연신 입술에 침을 튀겼다.
그러나 웃고 떠드는 건 그의 입뿐이었다. 그의 시선만은 달랐다. 그것은 허무하게 허공에 고
정되어 전혀 감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한편 나천은 한 수를 더 떠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태사의에 앉은 패검대군과 옆의 서문량을 흘깃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이윽고 냉혼이 태사의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나천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앞에 걸어오는 자는 냉혼이라 하며 이번 기습 때 쌍환문 측의 흑살대 십여 명을 혼자서 해
치운 자입니다. 또한 뒤에 오는 자는 나천이라 부르는 데… 함부로 다가서기 어려운 녀석으
로 이번 기습 때 사검 선우휘를 해치운 장본인입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서문량은 은밀하게 전음을 고했다.
서문량의 전음을 들으며 패검대군은 나천과 냉혼을 뚫어질 듯 쏘아보았다. 단순히 쳐다보는
게 아니라 안광에 공력을 실은 것이었다.
흔히 고수에게서는 보통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안광이 쏘아져 나온다. 더군다나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인 패검대군의 안광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즉 패검대군은 안광으로 둘을 시험해 본 것이다.
그러나 냉혼은 여전히 허무한 시선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나천 또한 얼
굴이 보이지 않았다.
'음… 결코 내력이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군.'
패검대군은 생각을 접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기습에서 너희들로 인하여 본문이 피해를 줄이고 쌍환문의 사기를 꺾을 수가 있었다
고 들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하라. 어느 정도까지는 들어주마."
약간은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물론 패검대군의 평상시 또한 위압적인 목소리였으나, 지금은 그보다 더욱 강한 느낌을 주
고 있었다.
그때였다.
"큭큭큭! 사람을 잘 죽였다고 상을 준다 이거지… 큭큭… 좋은 세상이야… 사람 죽이고 상
을 받으니 말야… 큭큭큭… 나는 그냥 돈으로 주시면 고맙겠수다. 큭큭큭큭!"
마치 혼자말을 하듯 냉혼의 특유의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일순 서문량의 안색이 사색이 되어 힐끗 패검대군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일문의 문주답게 패검대군은 한 올의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알겠다. 그럼… 너는?"
나천은 냉혼처럼 즉각적으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잠시 시간을 둔 그는 슬쩍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난… 내 검에 맞는 검집을 원해."
나천의 말이 끝나는 순간 패검대군의 눈썹이 역팔자로 치켜 올라갔다. 감히 일문의 문주에
게 하대라니.
'놈!'
순간적인 살기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나 패검대군은 다시금 마음을 가라앉혔다.
"좋다.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자세한 것은 총관에게 물어보라."
비록 평온한 목소리였으나, 심기가 불편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패검대군은 자신이 할 말은 모두 끝났다는 듯 태사의 깊숙이 몸을 파묻고는 눈을 감았다.
서문량은 냉혼과 나천을 데리고 대청을 빠져 나왔다.
연후 냉혼에게는 은자 사십 냥을 주었고, 나천은 병기고로 안내했다.
그러나 병기고로 안내하는 서문량의 안색은 지극히 안 좋아 보였다.
"이곳에서 마음에 드는 검집을 골라보게. 없으면 내게 다시 오고……."
서문량은 말을 마친 뒤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가타부타 그 외의 첨언은 없었다. 그저 병기고의 문 앞에 나천을 던져두고 사라진 것이었다.
나천은 잠시 서문량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 곧 두께가 한 자 가량은 될 법
한 녹슨 철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안은 밖의 정경과 사뭇 달랐다.
벽에는 휘황찬란한 일곱 개의 보주를 박은 칠채보도(七彩寶刀)로부터 황홀한 빛의 값비싸
보이는 도검이 걸려 있었다.
또한 벽 밑에는 백련정강(百鍊精鋼)이 된 청강검이나, 오랜 예전에 사용된 것 같은 고철들도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러나 대개가 검과 검집이 한 쌍을 이루고 있었다. 때문에 나천은 검집을 쉽게 찾아낼 수
가 없었다.
"으응?"
문득 언뜻 병장기가 걸려 있지 않은 한쪽 벽면으로 미세한 틈새가 보였다.
아마도 또 다른 병기고로 통하는 문이 틀림없었다.
천천히 벽면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갑작스럽게 눈앞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자세히 보니 단지 하나만으로도 일개 성을 살
수 있다는 야명주가 천장에 십여 개나 박혀 있었다.
삼 면의 벽에는 교룡삭(蛟龍索), 천강삭(天剛索) 등과 철퇴, 사모(巳矛), 창, 언월도(彦越刀)
에 이르기까지 특이한 무기들이 걸려 있었다. 또한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벽면의 아래에는
수북히 쌓여 있는 무기들이 있었으나 마음에 드는 것은 발견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천은 한 번 더 석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으음!"
안으로 들어선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세 번째 석실에는 고작 세 자루의 장검과 두 자루의 도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석실 안에 가득한 예기는 오히려 이전의 석실을 능가하고 있었다.
검을 숙명으로 여기는 무림인으로서 정말 좋은 검을 본 순간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장 앞에 걸려 있는 한 자루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일순 석실 안에 온통 하얀 검광이 가득 차며 차가운 냉기와 진득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신병이로군.'
그는 생각했다.
가히 막사나 거궐, 어장검 등에 견줄 만한 명검이었다.
새하얀 검광을 뿌리고 있는 검신에는 한벽(寒碧)이라는 두 글자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손잡이를 쥐자 차가운 한기가 손아귀를 타고 가득히 밀려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더욱 냉막
해지고 차가워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천에게 필요한 것은 검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지금 지니고 있는 검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낡아 보이지만
예리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이빨이 나간 적이 없을 정도로 단단하기도 했다.
한벽을 다시금 검집에 넣고 벽에다 걸었다.
연후 주위를 살펴보자 무척 시선을 끄는 한 자루의 검이 있었다. 검집에 들어 있음에도 불
구하고 야명주에 반사되는 홍광이 기이하도록 마음을 산란케 하는 검이었다.
결국 다가가 검집을 쥐었다.
순간 이상한 기운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왔다.
이상한 기분에 휘말리며 자신도 모르게 검신을 빼내며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검신은 수정으로 만든 듯 투명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야명주의 빛을 받은 검신에서는 진한 홍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
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
갑작스럽게 살인 충동이 울컥하며 치밀어 올랐다.
나천은 화들짝 놀라며 간신히 충동을 억제한 다음 검신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투명한 검신에는 홍살(紅殺)이라는 검명이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글씨 또
한 마치 혼을 빨아들이듯 정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홍살… 검에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군.'
문득 홍살을 갖고 싶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떠오르자, 씁쓸한 생각이 흘렀다.
'요검이로군.'
그는 검을 툭툭 치며 홍살을 다시금 검집 속으로 밀어 넣었다. 석실 안에는 여전히 진득한
살기와 함께 주사빛 요기가 서려 있는 듯한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나천은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다시금 석실 밖으로 나갔다.
결국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나천은 들어왔던 석실을 벗어나려 했다.
그때였다.
문득 녹이 슨 철검들이 수북히 쌓여 있는 곳에 삐죽하게 솟아오른 뭉툭한 끝이 보였다.
나천은 나가려던 것을 멈추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저게 뭐지?'
궁금하기도 하고, 자꾸만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천은 철검들을 헤치고는 그것을 꺼냈다.
붉은 녹이 슬어 한눈에 별 볼일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검집에 채워진 검이었다. 그런데 기이
하게도 이상한 느낌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천은 검집에서 검을 천천히 빼어 든 후에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검집은 녹이
슬어 금방이라도 삭아 부러질 것 같았는데, 그에 반해 검은 새것처럼 예리한 검기를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 이 검과 검집은 제 짝이 아니야. 아마도 전 주인이 내것처럼 검집과 검을 따로따
로 얻은 모양이군.'
검을 빼내 철검들 사이에 던져 놓고는 검집을 손에 들었다.
오십 근은 족히 나갈 듯 생각보다 묵직한 느낌이 전류처럼 번져왔다.
그러나 정작 마음에 드는 것은 아무런 문양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대개의 검집에는 사군자
나 아니면 용이나 호랑이처럼 용맹을 상징하는 동물들을 새겨 놓는데 비해, 이 검집은 아무
런 무늬가 없이 그저 밋밋하고 묵직할 뿐이었다.
게다가 비록 녹이 슬어 있었지만 검집의 색이 검과 같은 거무튀튀한 흑색이었다.
"흐음……."
나천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검집이 마음에 든 것이다.
철― 컥!
검에 꽂는 순간 상쾌한 금속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자로 잰 듯 한 치의 틈도 없이 들어맞았
다.
그때였다.
검의 손잡이와 맞닿는 부분에 희미하게 두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흑… 룡. 흑룡(黑龍)이라… 마음에 드는 이름이다."
마치 야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에는 흐뭇한 느낌이 잔뜩 묻어 나왔다.
나천은 처음으로 검을 허리에 차고는 병기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움직일 때마다 허벅지에 부딪히는 검집의 느낌이 좋았다.
걸음걸이는 느릿했지만 어쩐지 경쾌하고 힘있게 느껴졌다.
철― 컥! 철― 컥!
나천의 입가에는 어색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 * *
"어떻소? 우리와 잠깐 얘기를 나누시는 게?"
막 병기고를 나서는 나천 앞에 조용히 여섯 명이 다가서며 말을 건넸다.
흔히 자부사영(紫府四英)으로 불리는 무공 높고 재기가 넘치는 검왕천의 후기지수들이었다.
그들의 부친들은 모두 검왕천의 대주나 영주에 올라 있었다. 때문에 어릴 때부터 상승의 무
공을 연마했고, 타고난 재능으로 차기 검왕천을 이끌어 갈 영재들이라 할 수 있었다.
나천에게 말을 건 사람은 그들 중 가장 왼쪽에서 멋들어지게 백삼을 차려 입은 청년이었다.
머리를 빗어 단정히 뒤쪽으로 묶어 한눈에 보기에도 지혜로워 보이는 문사 차림의 청년.
그는 제갈수(諸葛秀)라는 이름을 가진 녹의대주인 제갈헌(諸葛軒)의 장자였다. 그 지모와 학
식이 뛰어나 신기수사(神奇秀士)라는 별호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독문무공인 판관필(判官筆)을 이용한 육초의 필법은 가히 일절로 인정받고 있었다.
검왕천에서의 지위는 낭객대 제5향주에 불과하나 거의 영주에 달하는 대우를 받고 있는 인
물이었다.
그러나 나천은 상대의 신분 따위에 연연할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기분이 좋다. 그러니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순간 제갈수를 비롯한 자부사영은 순간적이나마 어안이 벙벙해졌다. 심지어 자신들이 무언
가 잘못 들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신기수사 제갈수의 오른쪽에 서 있던 핏빛보다 더 붉은 홍의를 입은 약간 마른 청년이었다.
그의 왼쪽 허리춤에는 사 척에 달하는 긴 장도가 매어져 있었다. 게다가 마른 얼굴에 눈썹
이 위로 치켜 올라가 신경질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바로 홍의대 제1향주인 살혼도협(殺魂刀俠) 낭위(郎威)가 바로 그였다. 그의 부친 또한 장도
를 사용하는 낭객대 제2영주인 살인도제 낭추승이었다.
살혼도협 낭위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친과 무공 수위가 비슷할 정도로 높았
다.
즉 무공만으로 따진다면 당연히 영주급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이가 어려 경험이 적다는 이
유로 향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니 안하무인적인 면이 상당한 자이기도 했다.
그는 팔을 걷어붙이며 나천에게 다가갔다.
"건방진 자식! 감히 낭인 주제에 어디서 돼먹지 못……."
그러나 그의 노기는 곁에 있던 누군가의 제지로 사그라들어야 했다.
"아… 낭형. 참으시오."
낭위를 말리며 앞으로 나선 사람은 팔 척에 달하는 거구로 오 척 대도를 허리에 차고 있었
다. 천생의 신력을 타고난 역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청의대주인 원척(轅擲)의 아들로 별호는 거령패도(巨靈覇刀) 원광(轅光)이었다.
그는 천생의 성품이 호탕하고 술 마시기를 즐겨 하여 검왕천 내에서도 따르는 이가 많았다.
그가 앞을 막아서자 낭위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투덜대며 뒤로 물러섰다.
"나 참, 같잖아서……."
거령패도 원광은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나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껄껄! 나형,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나형의 좋은 기분을 망치고자 한 행동은 아니니 이쯤에
서 이해하시구려."
그의 음성은 덩치만큼이나 호방한 데가 있었다. 때문인지 나천도 더 이상 적의에 찬 시선은
던지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나형을 찾게 된 것은, 이번 기습 때 사검 선우휘를 이겼다 하여 나형의 높은
무공을 견식해 보고자 함이오. 해서 우리 사영이 대표로 오게 된 것이지요."
일순 나천의 짙은 검미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호탕한 어투였지만 속에 담긴 의미만은 뻔한 것이었다.
우린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 그러니 너의 진정한 실력을 한 번 보자!
한마디로 바로 그런 뜻인 것이다.
"그러니 기분을 풀고 우리와 같이 연무장으로 가시지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형을 기다리
고 있을 것이오."
원광은 사람 좋은 미소로 말을 마무리짓고 있었다.
그러나 나천은 호탕한 원광의 말에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아, 나형. 별다른 오해는 하지 마시오. 우린 그저 나형의 솜씨를 견식 하고픈 욕심 때문일
뿐이니 말이오."
성격이 조용하고 차분하여 평소에는 자부사영과 잘 어울리지 않는 독랑일검(獨狼一劍) 유성
(柳星)이라는 자였다.
그는 타고난 위엄으로 은연중에 자부사영의 대형처럼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그 또한 자의대주인 유정의 아들이기도 했다.
"아마 지금쯤 냉형도 이미 연무장에 도착하여 나형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독랑일검 유성이 한마디 덧붙이자 비로소 나천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아마 벙어리로 여길 정도였다.
문득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예의 목소리가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가자."
그 말이 전부였다.
나천은 신형을 연무장 쪽으로 돌려 세웠다. 그리고는 거리낌없이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
다.
예측할 수 없는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자부사영은 어이가 없음을 느껴야 했다.
"이거야 원……."
독랑일검 유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천의 뒤를 따라갔다. 나머지 자부사영도 기이한
표정으로 나천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연무장 안에는 오백여 명의 향대원들이 술기운에 시끌벅적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들은 둥글게 원을 그려 놓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냉혼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역시
나천과 마찬가지로 무공시험 대상에 오른 것 같았다.
냉혼을 둘러싸고 앉은 백여 명의 향대원들은 조용히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나천의 모습이 나타나자 연무장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나천이 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썰물처럼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마침내 나천과 냉혼이 둥근 원 가운데에 앉았다.
그들을 자부사영을 비롯한 향대원들이 둥글게 에워쌌다.
"어떻소? 두 분. 이만하면 준비가 된 것 같은데……."
자부사영 중 신기수사 제갈수가 은근하게 입을 떼었다.
군웅들의 시선이 나천과 냉혼에게 집중되었다.
이번 기습에서 두 사람이 세운 신화적인 공적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실제로 보
지 못해 궁금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냉혼이 내뱉는 말에 사람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글쎄… 생기는 것도 없는 데 공연히 힘 쓸 필요가 있을까? 큭큭큭… 안 그래?"
그는 예의 이상한 표정과 함께 나천을 향해 물었다.
물론 나천은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대신 주위를 둘러싼 검왕천도들 사이에 짙은 분노가 깔렸다. 은근히 검왕천을 깔보듯 빈정
거리는 말투 때문이었다.
"그렇소? 그렇다면 나와 겨뤄 봅시다. 당신이 이긴다면 은자 열 냥을 드리지."
비위가 상해 앞으로 나선 사람은 녹의대 제2향주 혼원장(混元掌) 동릉(董陵)이었다.
은근히 나천이니 냉혼이니 하는 낭객들이 사뭇 비위에 거슬리던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고
까운데 비아냥거리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으래? 그렇다면 해야지. 암, 돈 벌어야지… 큭큭큭!"
냉혼은 여전히 빈정거리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툭툭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마치 동릉 따위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저런 건방진……."
검왕천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당연히 그들은 동릉이 저 보기 싫은 녀석을 묵사발 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군웅들은 조금씩 긴장하며 두 사람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동릉은 삼 장 가량 떨어지자 자세를 가다듬고 서서히 공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점점 긴장이 고조되어갔다.
이때만은 냉혼도 빈정거리지 않았다.
"타― 앗!"
일갈이 터지며 동릉의 신형이 마치 독수리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것처럼 멋지게 하늘로
박차 올랐다.
연후 먹이를 노리는 발톱처럼 동릉의 쌍장에서 폭음과 함께 두 가닥의 기류가 빠르게 쏘아
졌다.
"아!"
멋들어진 공격에 사람들은 일제히 감탄을 터트렸다.
기류는 순식간에 냉혼의 세 치 앞에까지 도달했다.
"흠! 제법이군."
냉혼은 싸늘한 냉갈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듯 동릉의 발밑으로 파고들었다. 동릉이 쏘아낸 장력은 아슬아슬하게 냉
혼의 머리를 스쳐갔다.
'이, 이렇게 빠르다니… 위험하다!'
사람들은 너나할것없이 동릉의 위기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냉혼의 움직임은 동릉이 막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게다가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칠
냉혼이 아니었다.
쉬쉬쉭!
냉혼의 손에서 다시금 싸늘한 은빛 도광이 허공을 갈랐다.
"킥킥킥! 내가 이긴 것 같군. 얌전히 은자 열 냥을 내놓으시지… 큭큭큭!"
냉혼의 입에서 다시금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땅위로 내려 선 동릉의 얼굴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새 생겼는지 동릉의 가슴 자락에 서너 줄기의 도흔이 길게 나 있었다.
만일 냉혼이 죽이려고 했다면 능히 동릉을 죽였을 것이었다. 장내의 누구나 그 사실을 직감
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장내의 분위기는 저절로 침울해졌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
었다.
"음… 냉형께서 깨끗하게 승리하셨소이다."
천천히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자부사영의 대형 격인 독랑일검 유성이었다.
"이제 나형의 상대는 본인이 한 번 해보겠소이다."
그는 무공이 자부사영 중 가장 고강할 뿐만 아니라, 쉽게 격동하지 않는 침착한 성격을 지
니고 있었다.
검왕천도들 사이에서는 '그래. 유성이라면…….' 하는 믿음이 생겨났다. 유성이라면 저 거만
한 낭객 녀석들의 콧대를 꺾어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랑일검 유성의 생각도 거의 대동소이했다.
'저 자의 실력으로 보건대 나천이 사검 선우휘를 이겼다는 것도 어쩌면 사실일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나섰다가는 오히려 참패를 당할 수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이었다.
"죽어도 좋은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물론 나천이었다.
일순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섬뜩할 정도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너무도 엉뚱한 이야기인지라 유성은 순간적으로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금 나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은 기분이 좋다. 피를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나천은 싸늘하게 한마디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한마디로 오백여 명의 향대원들은 얼어붙은 듯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황당하
지만 분명히 그랬다.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교차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남는 것은 오직 두려움과 부러움 두 가지 뿐이었다.
"웃기는군! 고작 말 한마디로 우리를 조롱하려는 건가? 흥! 그렇게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
각한다면 그것은 착각도 큰 착각이지."
갑자기 터져나온 카랑카랑한 음성에 갑자기 분위기가 혼미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음성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때 한 발 앞으로 나서는 인물이 있었다.
살혼도협 낭위였다.
그로서는 처음부터 나천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게다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에 욱하는 성
질로 튀어나온 것이다.
사람들이 이번엔 나천을 바라보았다. 나천이 어떻게 나올 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때 나천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연무장이 싸늘한 살기로 가득 차며 온몸에 으슬으슬 오한이 들었다.
"으음……."
문득 앞으로 나선 낭위조차 흠칫했다. 나천이 자신에게 다가올수록 그러한 느낌은 더욱 커
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나천의 신형이 한 발 한 발 다가듦에 따라 낭위의 신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비로소 나천이라는 존재를 직시하게 된 것이다. 그는 결코 남을 조롱하거나, 허튼 소리를 하
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낭위로서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으으… 이놈!"
그는 자신의 애병인 사 척 길이의 검신이 좁은 유엽장도(柳葉長刀)를 꼬나 쥐었다. 이어 전
신의 공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일촉즉발의 긴장된 순간이 닥쳐왔다.
쐐― 애― 액!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낭위의 도가 여덟 방위를 차단시키며 매서운 도풍을 터트렸다.
스윽!
그 순간 천천히 다가오던 나천의 신형이 격류를 헤쳐나가는 물고기처럼 부드럽게 도막 사이
를 빠져 나갔다. 눈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절묘한 몸놀림이었다.
그러자 낭위는 사색이 되었다.
자신의 절초인 혈응팔황(血鷹八荒)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뛰어드는 인간은 처음 보
았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적절한 반응이었다. 심지어 낭위 자신조차 '이런 방법도 있던가?' 하고
놀랄 정도였다.
"이 자식이?"
주춤 주춤 낭위는 두 걸음을 뒤로 물러서며 유엽도를 십자 모양으로 빠르게 휘둘렀다.
십자만홍(十字滿紅)!
적이 다가오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적의 사혈을 순간적으로 상하좌우로 바꾸면서 노리는 초
식이었다. 게다가 유엽도로 펼쳤을 경우에는 마치 연검과 같은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파파파팍!
초식을 따라 강맹한 기류가 십자형으로 공기를 갈랐다.
그러자 나천의 신형이 섬전처럼 좌로 움직이며 다시금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아주 미세한
차이를 뒤로하며 검기가 머리 위를 지났다.
우수수…….
수십 가닥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바로 그 사이를 뚫고 나천의 상체가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오른 주먹을 비스듬히 쳐 올렸
다.
빠― 직!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짤막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크어억!"
사람들은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휘청휘청 뒤로 물러나는 낭위의 얼굴은 완전히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땅위에 부러진 서너 개의 이빨이 뒹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아래턱이 박살이 난 듯싶
었다.
낭위의 얼굴은 두려움에 질려 안색이 까맣게 죽어 있고, 두 눈은 쉴새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자신도 나천이 어떻게 자신의 절초인 십자만홍을 파고들어 공격을 가했는지 볼 수 없었
다.
실로 낭위가 바라보는 나천은 저승사자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이… 괴, 괴물 같은……."
낭위는 비명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절초가 깨어지는 순간 자신감을 잃어버려 그 충격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렵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경
외 아니면 공포를 주기 마련인 탓이다.
"죽이지는… 않으마."
낮게 한마디 으르렁거리고는 나천은 천천히 신형을 돌려 걸어나갔다.
스스슥!
수백 명의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나천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었다.
나천은 조용히 사라져갔다.
어느 누구도 그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았다.
나천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낭위는 털썩 땅위에 주저앉았다. 어느 새 그의 바짓가랑이
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만 일어서게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독랑일검 유성이었다.
낭위는 멍한 동공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번 실패는 병가지상사라 하지 않나. 더욱 노력한다면 언젠가 다시 겨룰 날이 있겠지."
유성이 낭위의 팔을 부축하며 일으켰다.
허망한 시선으로 낭위는 나천이 사라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그런 날이… 다시 올까?"
낭위는 힘없이 혼자말을 하며 서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낭위의 마음만큼이나 착잡한 하늘.
곧이라도 굵은 빗방울을 뿌릴 것만 같이 칙칙한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분명히… 올 것이네."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어딘가 모르게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유성의 부축을 받으며 낭위는 비틀비틀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가련하게 보지는 않았다. 오백여 향대원들은 그런 낭위의 모습에 스스
로를 떠올렸다. 무시무시한 나천의 손길에 무참하게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후두둑 후두둑!
마침내 굵은 빗줄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떨어진 자리는 구멍이 패였다.
차츰 고이는 빗물을 따라 대결의 흔적마저도 희미하게 퇴색되어 갔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잼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