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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說話) 모음
강감찬 금와훤(姜邯贊 禁蛙喧)전설
고려 때의 명장 강감찬(姜邯贊)이 경주 도호사로 있을 때,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너무 소란스럽게 울어 강감찬이 돌에다 명령서(命令書)를 써 개구리 왕에게 보냈더니, 그 이후부터는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는 전설이다.
거타지 설화
【출전】 삼국유사 권2 ‘진성여대왕 거타지’
진성여왕 때, 왕의 막내 아들 양패(良貝)가 당나라 사신으로 가려고 할 때, 백제의 해적들이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을 잘 쏘는 군사 50여 명을 뽑아 호위시켜 호위하도록 했다. 배가 1993년 12월 22일곡도(鵠島)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 그곳에서 10여 일을 보냈다. 양패공이 점을 치게 하였더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이곳에 신지(神池)가 있어 그곳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못위에 음식을 차려 놓으니 못물이 한 길이 넘게 치솟았다. 그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을 잘 쏘는 사람을 하나만 남겨 두면 바람을 자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일행들이 숙의한 결과, 나무조각 50개에 이름을 써 물 위에 띄우고 가라앉는 사람이 남기로 하여 거타지가 남게 되었다. 그러자 배는 순행을 하게 되었다. 거타지가 조심스럽게 섬 위에 서있었는데, 그 때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이르되 “ 나는 서해의 용신(龍神)이다. 날마다 하늘에서 요괴(어린 중)가 내려와 주문을 외우며 이 못을 세번 도는데, 그러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은 물에 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린 중은 우리 자손들의 간과 창자를 빼 먹는다. 그리하여 이제는 우리 부부와 딸만 남았다. 활로 어린 중을 쏘아 죽여 달라.”고 하였다. 거타지는 노인(龍)의 부탁대로 사미승을 쏘아 죽인다. 그러자 어린 중은 늙은 여우로 변하여 죽었다. 그리고 거타지는 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거타지는 당나라를 거쳐 귀국하여야 하므로 용은 자기의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당나라를 갔다가 귀국하여 소매 속에 감추어 온 꽃을 도로 내놓으니 어여쁜 처녀로 변하였다. 둘은 결혼하여 함께 여생을 마치게 되었다. 더불어 당나라로 가는 길에 두 마리의 용이 거타지와 사신들의 배를 호위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 이 설화와 비슷한 것으로는 「용비어천가」에도 있고, 제주도 서사 무가 「군웅본풀이」도 같은 유형이다. 또 이 설화는 인신공희(人身供犧)가 주 내용인데, 이것이 훗날 「심청전」의 근원설화(根源說話)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설화는 거타지라는 초인적인 영웅의 이야기요, 심청전은 운명에 다소곳이 순종하는 여인이라는 점은 다르다.
고구려 미천왕
【출전】삼국사기 권 17 고구려 본기 제5 미천왕
고구려의 봉산왕(烽上王)은 서천왕(西川王)의 태자로, 즉위한 이듬해, 아우 졸고가 딴 마음이 있다고 하여 죽였다. 졸고의 아들이며 왕손인 을불(乙弗, 미천왕의 아명)은 포악한 왕을 피해 신분을 감추고, 남의 머슴살이를 하며 주인을 위해 개구리가 울지 못하도록 밤새도록 연못에 돌을 던지기도 하고, 소금장수를 하다가 마음씨가 고약한 노파가 그의 소금자루에 몰래 자기 신발을 넣어 태형을 받기도 한다. 왕은 학정을 하였고, 재상 창조리(倉助利)는 여러 차례 왕의 잘못을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그 후 창조리를 비롯하여 왕의 학정에 불만을 품은 신하들이 왕이 후산(侯山)에 사냥을 가자, 그곳에 따라가 왕을 폐위하였다. 을불은 그들의 옹립을 받아 왕위에 올라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신장 시켰다.
구토설화(龜兎說話)
【출전】삼국사기 권 41 열전 ‘김유신조’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병들어 앓고 있었다. 의원이 말하기를 토끼의 간을 구해서 약을 지어 먹으면 낳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다 가운데 토끼가 없으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때 한 거북이 용왕께 자신이 구해오겠노라고 아뢰었다. 거북은 마침내 육지에 올라 토끼에게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한 섬이 있고 그곳에는 맑은 샘과 맛있는 과일이 많고 날씨도 적당하며 매나 독수리들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한 2, 3리 헤엄쳐 가다가 거북이 토끼를 돌아보며 잡아가는 진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토끼는 말하기를 “나는 신령의 후예이므로 간을 내어 씻었다가 다시 넣곤 한다. 마침 그것을 내어서 바위 위에 말려두었다. 나는 간이 없어도 사는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는냐 ?”고 했다. 거북은 토끼의 이 말을 믿고 토끼를 도로 업고 돌아서서 육지로 올라갔다. 토끼는 풀숲으로 뛰어들어가며 거북에게 말하기를 “ 어리석구나. 이 거북아. 어찌 간 없이도 사는 놈이 있단 말이냐 ?” 하였다. 거북은 가련하게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 구토지설
*이 설화는 토끼로 대표되는 평범한 인물의 지혜로운 행동과 거북, 용왕으로 대표되는 지배자의 강압과 무능함을 대비시켜 토끼의 생기발랄한 성격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후대 판소리, 소설로도 전승된다. 이 야기는 불경에도 나오며 일찍이 신라 김춘추가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러 갔다가 옥에 갇혔을 때, 고구려의 신하인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자 그가 탈출을 암시하며 춘추에게 알려준 이야기라고 한다.
김유신(金庾信)
【출전】삼국유사 권1 ‘김유신조’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에 고구려 첩자 백석(白石)이라는 자의 꼬임에 빠졌는데, 낭자로 변한 호국신(護國神)들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는 내용의 이야기. 또 천관녀(天官女)라는 아름다운 여인의 꾐에 빠져 어머니께 꾸중을 들은 뒤로 그녀를 멀리 했는데, 어느날 술에 취했을 때 말이 평소의 습관대로 그녀의 집으로 가자 아끼던 명마(名馬)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유신과 기녀 천관을 비극을 소재로 하여 황순원은 <예술원보> 제 11호에 「차라리 내 목을」이라는 단편을 발표하였다.
김현감호(金現感虎)
【출전】고려 박인량이 지은 수이전(殊異傳)에 실려 있던 설화. 현재는 대동운부군옥 권15와 삼국유사권5 ‘김현감호’
신라 풍속에 음력 2월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청춘 남녀가 흥륜사의 탑을 돌면서 복을 비는 습관이 있었다. 원성왕 때 김현(金現)이란 청년이 밤늦게 탑을 돌다가 거기서 한 처녀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김현이 그 처녀의 뒤를 다라가 보니, 처녀는 뜻밖에 범의 변신이었다. 이 처녀에게는 성질이 사나운 세 오빠가 있었으므로, 마침 하늘이 징계차 한 마리를 죽이려던 차였다. 이에 처녀는 오라비를 대신하여 스스로 죽을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김현에게 “내가 내일 시장거리에 나타나 많은 사람을 해칠 터이니, 낭군은 나를 잡아 그 공으로 높은 벼슬에 오르십시오.”라고 했다. 김현이 그의 청을 거절하니 “천명이니 차라리 낭군 옆에서 죽고 싶다.”고 애원하였다. 이튿날 과연 범이 시장에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자 나라에서는 큰 상을 걸고 범을 잡게 하였다ㅏ. 김현에 이에 어제 저녁에 들은 대로 숲에 이르니, 과연 처녀가 나와 기꺼이 맞아주며 스스로 칼을 빼어 목을 찔러 죽는데, 몸둥이가 곧 범으로 화했다. 이에 김현이 그 공에 의하여 높은 벼슬을 하게 되매, 호원사란 절을 지어 범의 명복을 빌게 되었다.
도미의 처
【출전】삼국사기 권 48 열전 제 8 ‘도미(都彌)’
백제의 개루왕(蓋婁王) 때, 도ㅗ미라는 사람의 아내가 아름답고 품행이 얌전하여 사람들이 칭송을 받았다. 하루는 개루왕잉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비록 부인의 덕은 정결이 첫째라지만 만일 남이 모르는 곳에서 좋은 말로꾀인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자는 적을 것이다.” 하였다. 도미는 “사람의 마음은 측량하기 어려우나 저의 아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죽는다고 해도 딴 마음은 먹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 왕은 시험해 보고자 도미를 궁에 머무르게 하고 하인을 거느리고 밤중에 도미의 집으로 가서 하인으로 하여금 왕이 왔다는 것을 알리게 하고 들어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하여 내가 그대를 얻게 되었으니 내일부터는 궁궐에 들어와 궁인이 되라. 이제부터는 그대는 나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하였다. 개루왕이 도미의 처를 탐내어 난행하려고 하자, 도미의 처를 계집종을 잘 꾸며 대신 들여 보냈다. 이에 속은 줄 안 갸루앙은 도미에게 일부러 죄를 내려 그의 눈을 빼어 버리고 작은 배에 태워 강 위에 띄웠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탐ㅎ려 하자 도미의 처는 왕을 속이고 궁궐을 빠져 나와 남편을 찾아가 함께 고구려 산산(蒜山) 아래에 당도하여 구차한 생활을 하며 나그네로 생을 마쳤다.
박종화의 「아랑의 정조」는 이 설화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두견새(杜鵑)
촉(蜀:지금의 四川省) 나라에 이름이 두우(杜宇)요, 제호(帝號)를 망제(望帝)라고 하는 왕이 있었다. 어는 말 망제가 문산(汶山)이라는 산 밑을 흐르는 강가에 와 보니, 물에 바져 죽은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오더니 망제 앞에서 눈을 뜨고 살아났다. 망제는 이상히 생각하고 그를 데리고 돌아와 물으니 “저는 형주(刑州) 땅에 사는 별령(鱉靈)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강에 나왔다가 잘못해서 물에 빠져 죽었는데, 어떻게 해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것이다. 망제는 , 이는 하즐이 내린 사람이다. 하늘이 내게 어진 사람을 보내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별령에게 집을 주고 장가를 들게 하고, 그로 하여금 정승을 삼아 나라일을 맡기었다. 망제는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약한 사람이었다. 이것을 본 별령은 은연중 불측한 마음을 마음을 품고 망제의 좌우에 있는 대신이며 하인까지 모두 매수하여 자기의 심복으로 만들고 정권을 휘둘렀다. 그때에 별령에게는 얼굴이 천하의 절색인 딸 하나가 있었는데, 별령은 이 딸을 망제에게 바쳤다. 망제는 크게 기뻐하여 나라일을 모두 장인인 별령에게 맡겨 버리고 밤낮 미인을 끼고 앉아 바깥일은 전연 모르고 있었다. 이러는 중에 별령은 마음놓고 모든 공작을 다하여 여러 대신과 협력하여 망제를 국외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망제는 하루 아침에 나라를 빼았기고 쫒겨나와 그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어서 두견이라는 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를 부르짖어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뒷사람들은 그를 원조(怨鳥)라고도 하고 두우(杜宇)라고도 하며, 귀촉도(歸蜀途) 혹은 망제혼(望帝魂)이라 하여 망제의 죽은 넋이 화해서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귀촉도, 망제혼, 소쩍새, 불여귀, 자규
오영수의 「소쩍새」는 이 설화를 원용한 소설이다.
망부석(望夫石) 설화
【출전】삼국사기 권45, 삼국유사 권1 ‘내물왕 김제상’, 문헌비고, 동국통감, 일본서기 등에 각각 실려 있으나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신라 초기 내물왕이 즉위한지 36년 경인(庚寅, 390 A.D)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앞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표로 왕자 한 사람을 보내어 달라고 하므로, 셋째 아들 미해(美海)를 보냈더니 돌려 보내지 않았다. 또 눌지왕 때에 고구려가 화친한다는 이름 아래 왕자 보해(寶海)를 보내 달라고 하므로 부득이 하여 눈물을 머금고 보냈더니, 역시 돌려 보내지 않았다. 이에 눌지왕은 아우 둘을 남의 나라에 두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이를 안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구해냈다. 다시 일본으로 왕의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데리러 간 박제상(朴堤上)이 왕자를 구출했지만 자신은 돌아오지 못했다. 왜왕에게 환심을 산 후 미해를 신라로 귀국시킨 박제상은 붙잡혀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왜왕이 박제상에게 미해를 빼돌린 이유를 묻자 제상은 자신은 신라의 신하지 왜왕의 신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왜왕은 왜국의 신하라 한다면 상을 주겠다고 하자 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제상은 왜왕에게 다리 가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는 형벌, 뜨거운 쇠 위에 세워놓은 형벌 등을 받고, 결국은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아내가 자녀를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일본을 바라보며 박제상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 뒤에 사람들은 그녀를 치술령의 신모(神母)로 모시고, 이를 소재로 지은 노래가 ‘치술령곡’이다.
문전신(門前神) 본풀이
이 이야기는 재생설화(再生說話)의 일종으로 죽은 어머니를 환생꽃을 구해다가 살리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는 서사무가(敍事巫歌)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남선비가 식구는 많고 흉년은 들어 오동국으로 쌀을 사러 갔는데 삼년을 돌아오지 아니하니 그 부인이 남편을 찾아 오동국으로 간다. 그리하여 남편은 만났으나 노일저대귀의 딸을 첩을 삼아 살며 눈이 어두워 세상을 분별치 못하고 지내는 것을 안다. 그러나 노일저대귀는 남선비의 본부인이 온 것을 알고 샘터에 밀어 넣어 죽이고 본부인의 옷을 입고 남선비의 본집으로 간다. 한편, 남선비의 아들 칠형재는 어머니가 자기의 친어머니가 아닌 것을 알고 이상히 생각한다. 노일저대귀는 아들 칠형제를 죽이려고 거짓으로 병들 체하고 남편 보고 점을 쳐 보라고 하여 아들 칠형제의 간으 먹어야 자기 병이 낫는다는 것으로 알게 한다. 남선비가 아들들을 죽이려고 칼을 가니 막내 아들이 꾀를 내어 자기가 형님들의 간을 꺼내 오겠다 하고 산돼지 여섯 마리를 잡아 그 간 여섯 개를 내어다 주니 노일저대귀는 먹는 척하고 자리 밑에 넣어 버린다. 이것을 안 아들이 노일저대귀를 죽이겠다고 칼을 가니 노일저대귀는 겁이 나서 도망가다가 죽고 남선비도 겁이 나서 도망가다 역시 죽는다. 일곱 형제는 오동국에 들어가 자기 모친의 시신을 찾고 울고 있으려니 곽새가 날아와서 말하기를 쇠고지 포육을 열두 개를 떠 가지고 자기 들에 타고 있으면 서천 꽃밭에 가서 환생(還生)꽃을 구하여 올 수 있다고 하였다. 작은 동생이 포육을 떠 가지고 곽새 들을 타고 서천 꽃밭에 가서 환생꽃을 구해다가 죽은 모친을 살린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출전】삼국사기 권 45 열전 제 5 ‘온달(溫達)’에 수록된 실제 인물의 설화적 전승.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平原王) 때에 이름을 온달이라고 하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용모는 괴상했으나 속마음은 밝아 홀어머니를 걸식으로 봉양하며 살고 있었다. 그 때의 평강왕의 딸로서 평강공주가 있었는데 어려서 몹시 울어, 부왕이 자꾸 울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농담을 하곤 하였다. 시집갈 나이 28세가가 되어 부왕이 귀족인 상부 고씨 집에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는 부왕의 평소 말대로 온달에게 가겠ㄴ라고 우겼다. 부왕은 노하여 공주를 궁궐에서 내쫒자 공주는 그 길로 온달을 찾아가 결혼을 했다. 공주는 자기가 궁궐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패물로 의식을 해결하고, 왕실의 병약한 말을 사오게 하여 잘 먹이고 온달에게 무예와 학문을 닦게 하였다. 고구려는 매년 봄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수렵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온달이 실력을 발휘하여 이 소식이 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중국 후주의 무제가 쳐들어오자 온달이 선봉이 되어 무찌르니, 사위로 인정받아 그에게 대형(大兄)의 벼슬이 내려진다. 그러나 다음 왕 때에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출전했다가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生死)가 결정되었으니 한을 풀라 하니 관이 움직여 비로서 장사를 지냈다.
역사적 인물 온달은 590년 전사했는데 민간에서 이를 설화화하여 전승시켰다. 그것이 삼국사기에 수록된 듯한데, 이 글의 원문은 삼국사기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글이다. 이 글에는 당신 민중들의 애국심, 충성심, 무용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미천한 출신인 주인공이 시련을 겪은 후 숭고한 인물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잘 드러나 있다. 백제의 ‘무왕설화’도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이를 소재로 최인훈이 「온달」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그 소설은 소설과 희곡을 겸용한 특이한 형태이다.
박타는 처녀
몽고설화. 일설에 의하면, 원대(元代)에 몽고에 귀화한 고려 여성들을 통해 유입되었다고 한다. 옛날 어느 처녀가 바느질을 하다가 처마 끝에 집을 짓고 살던 제비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다리가 불져 날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실로 다리를 동여매 주었다. 이에 그 제비가 살아났다. 이듬해 그 제비는 강남에서 박씨 하나를 가져다가 뜰에 떨어뜨렸다. 그 처녀는 박씨를 심었더니 가을이 되어 커다란 박이 하나 열렸다. 그 박을 타 보니 온갖 보화가 쏟아져 나왔다. 이로 인하여 그 처녀는 매우 큰 부자가 되었다. 이웃집에 사는 심술궂은 처녀가 이 말을 들었다. 그 처녀는 자기 집에 가서 제비를 잡아다가 일부러 다리를 부러뜨려 실로 동여매 주었다. 그 제비는 이듬해 박씨를 갖ㄷ가 주었다. 그 처녀는 좋아라고 박씨를 심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 큰 박이 하나 열렸다. 따서 타 보니 수많은 독사(毒蛇)가 나와 그 처녀를 물어 죽였다.
방이설화
【출전】 당나라의 단성식(段成式)이 지은 유양잡조(酉陽雜俎) 권 1과 태평어람 권 481
일명 ‘금추설화(金錐說話)’라고도 한다. “내 코가 석자” 라는 속담도 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방이형제가 살았는데 형인 방이는 몹시 가난하여 구걸을 하며 살았고, 동생은 부자였다. 어느 해인가 방이가 동생에게 누에와 곡식 종자를 구걸했는데 심술이 사납고 포악한 아우는 누에알과 종자를 삶아서 주었다. 이를 모르는 형은 누에를 열심히 치고 씨앗도 뿌려 잘 가꾸었다. 알 중에서 누에 한 마리가 생겨나더니 황소만큼 커졌다. 질투가 난 동생이 와서 누에를 죽였지만 사방의 누에가 모두 모여 들어 실을 켜 주어서 형은 누에 왕이 되었다. 또한 종자에서도 이삭이 하나만 나와 한 자가 넘게 자랐는데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이삭을 물고 달아나자 방이는 새를 쫒아 산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밤을 맞은 방이는 난데 없는 아이들이 나타나 금방망이를 꺼내어 돌을 두드리니 원하는 대로 음식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숨어 있다가 아이들이 헤어진 후 놓고 간 방망이를 주워서 돌아와 아우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 심술이 난 아우도 형처럼 행동하여 새를 쫒아가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금방망이를 훔쳐간 도둑으로 몰려 연못을 파는 벌을 받고 코끼리처럼 코를 뽑힌 후에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그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속을 태우다가 죽고 말았다.(다른 책에 의하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방이가 이소식을 듣고 달려와 병 구완을 하여 병이 나았다.) 그리고 방망이는 후손에게 전해졌는데, 어느 후손이 “이리 똥 내놓아라.”고 희롱했더니 갑자기 벼락이 치며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신라 사람 방이에 대한 설화. 형과 동생 사이의 갈등을 통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보여 주고 있다.
물음1.이 설화가 바탕이된 고전소설은 무엇인가 ?
뱀신랑
어떤 늙은 부부가 아이를 낳았는데 뱀이었다. 그 아들은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김정승의 달과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정승의 딸들에게 의사를 물어보자 첫째와 둘째딸은 뱀이라서 싫다고 했다. 그러나 셋째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따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뱀신랑과 결혼을 했다. 혼인하던 날 신랑은 허물을 벗고 잘 생긴 선비가 되었다. 어느날 남편이 길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자기의 허물을 주면서 잘 보관하라고 하였다. 만약 없애면 다시는 마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도을 단단히 일렀다. 이 비밀을 알아챈 두 언니는 몰래 그 허물을 훔쳐다 태워 버려서 남편은 돌아 올 수 없게 되었다. 아내는 남편을 찾아 바위 속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이미 딴 부인이 있었다. 남편은 몇 가지 문제를 내어 통과하는 사람을 진짜 아내로 삼겠다고 하였는데 찾아간 아내(김정승의 딸)가 시험에 통과하였다.(오영진 시집가는 날과 관련)
뱀과 까치(혹은 꿩)의 설화
이 이야기는 흔히 ‘뱀이 미녀가 된 이야기[蛇化爲美女]’에 속하는데, 사원(寺院)의 종소리를 곁들인 것이다. 다음은 강원도 치악산 상원사의 전설을 소개하겠다.
강원도 치악산중에 어떤 젊은이(활을 잘 쏘는)가 두 마리의 꿩이 뱀에게 잡히어 고생하는 것을 보았다. 뱀은 곧 꿩을 잡아 먹으려고 했다. 젊은이는 활을 쏘아서 뱀을 죽이고 꿩을 구해 주었다. 해가 져서 젊은이는 산중의 작은 절에 들렀다. 예쁜 여자가 안내했다. 밤이 깊어서 잠을 깨니 큰 뱀이 젊은이를 잡아 먹으려고 한다. 처녀가 그 뱀인 것이다. 그 뱀은 “ 나는 아까 길가에서 너의 화살에 맞아 죽은 뱀의 아내”라고 말하며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 그 때 절의 종소리가 두 번 울려왔다. 그러자 뱀은 도망을 갔다. 날이 새자 절에 가보니 두 마리의 꿩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다. 그는 그곳에 절을 세우고 중이 되었다. 그 절이 상원사다. 그 뒤부터 적악산(赤岳山)을 치악산(雉岳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설하는 최인훈의 「온달」이라는 소설 제 1회에 변형되어 포함돼 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출전】삼국유사 권1 ‘선덕여왕지기삼사(善德女王知幾三事)’
선덕여왕이 당(唐)나라 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그 꽃에 향기가 없음을 미리 알았다. 그리고 그 때 함께 보내온 모란씨를 심어 꽃이 피었는데 과연 향기가 없었다. 신하들이 향기가 없음을 미리 안 이유를 묻자 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음을 보고 알았다고 하고, 그것이 홀로 사는 자신을 풍자한 거시이라 하였다. 또 겨울에 못[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삼사 일을 계속 울자, 그것이 적군이 어느 곳에 숨어 있다는 징조임을 알고 여왕은 군사들을 풀어 여근곡(女根谷)을 찾으라 했다. 과연 그곳에는 백제군들이 숨어 있어 그들을 모두 무찔렀다. 뒷날 신하들이 미리 안 이유를 물었다. 여왕은 대답하기를 개구리는 노(怒)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은 병화(兵火)를 의미하는 것이요, 옥문(玉門)이란 여성을, 그리고 음(陰)을 상징하는데, 빛깔로는 흰빛이고 흰빛은 서방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쪽에 병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죽을 때는 자기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라는 절이 창건(創建)될 것을 미리 알았다는 전설이다.
선도산 성모(仙桃山 聖母) 이야기
【출전】삼국유사 권 5 감통(感通) 제7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隋喜佛事)’
진평왕 시절에 한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 이름을 지혜(智惠)라 하였으며 어진 행실이 많았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안흥사(安興寺) 불전(佛殿)을 새로 수리하려고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 때 꿈에 모양이 예쁘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나는 선도산 성모인데,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는 것을 기뻐해서 금 10근을 주어 그 일을 돕고자 한다. 내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어 주불삼상(主佛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53불(觀樂王樂上二菩薩經에 나타나는 53분의 부처)과 6류성중(六類聖衆) 및 여러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을 ,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 두 계절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ㅁ아 널리 모든 중생을 위해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베풂으로서 일정한 규정을 삼아라.”고 말했다. 지혜는 졸라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선사(仙祠)의 자리 밑으로 가서황금 160량을 파내어 불전 수리를 이루었는데, 모두 성모가 한 말에 따랐던 것이다.
설씨녀 가실
【출전】삼국사기 열전
경주에 사는 설씨(薛氏)는 늙은 홀아비로 오직 딸 하나만 데리고 살았다. 설씨의 딸은 재색을 겸비하였다. 그런데 진평왕 때에 이 늙은 홀아비도 병역의 의무는 치르게 되었다. 국방 경비를 위한 소집 영장이 나왔다, 늙고 병든 아비를 보내느니 차라리 자기가 나가고 싶지만 여자의 몸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사량부(沙梁部)에 설씨의 딸을 좋아하느 가실(嘉實)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가실은 설씨의 집에 딱한 사정을 알고 뛰어 와서, 자기가 대신 군대에 나가겠다고 제의했다. 설씨 부녀는 이 기적같은 원조에 당황하기도 했으나 무척 반가웠다. 설씨는 가실에게 “나를 대신하여 군대에 나가겠다니 기쁘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네. 그대의 은혜를 갚을 생각이니 만약 그대가 내 어린 딸이 어리석다고 생각지 않으면 아내로 맞아주면 어떨지 ?”라고 운을 떠 보았다. 이것은 가실이 원하던 바였다. 딸은 거울 하나를 꺼내어 반을 갈라 한 조각은 가실에게, 마머지 한 조각은 자기의 품에 넣고 뒷날 혼인할 때의 신표(信票)로 삼았다. 가실은 설씨녀에게 말 한 필을 주며 “이것은 천상(天上)의 좋은 말이니 내가 없는 동안 맡아서 기르시오.” 하고 의젓이 전쟁터로 나갔다. 3년이면 돌아오게 되어 있는 가실은 기한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나이는 아흔에 가깝고 딸의 나이도 혼기(婚期)를 넘기게 되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다른 신랑감을 찾아서 가기를 강요한다. 그럴 때마다 딸은 “신의를 저버리고 언약(言約)을 어기면 어찌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 모르게 이웃 청년과 혼약을 맺었다. 딸은 항상 가실이 두고 간 말을 쓰다듬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 말과 함께 집을 떠나 버리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실이 돌아왔다. 그러나 몰골은 해골처럼 마르고 옷은 남루하여 집안 사람들은 그가 가실인 줄을 몰랐다. 배고픔과 싸움에 지친 가실은 전혀 딴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가실은 거울을 내던졌다. 딸이 그것을 주워 자기의 것과 맞추어 보니 꼭맞았다. 가실이 분명했다. 기뻐하며 그들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성조(成造)풀이-서사무가(敍事巫歌)
서천국(西天國) 천궁대왕(天宮大王)과 옥진 부인(玉眞夫人)은 나이 40이 가깝도록 혈육이 없어 불전(佛前)에 아이를 낳는 정성을 드리고 태몽을 얻은 후에 잉태한다. 옥진부인은 10개월이 찬 후에 옥동자를 낳아 이름을 성조(成造)라고 짓는다. 성조는 15세가 되어 옥황께 상소하여 솔씨 서말 닷 되 7홉 5작을 받아 지하궁 공산(地下宮空山)에 심는다. 성조가 18세 되었을 때 결혼하나 아내인 계화씨(桂花氏)를 박대하고 주색에 방탕하여 나라 일을 돌보지 않는다. 대왕이 성조를 황토섬에 귀양 보내니 고생이 막심하여 성조가 무인도에서의 곤경을 혈서(血書)로 써 보내니 대왕이 귀양을 푼다. 성조는 귀양에서 돌아와 부인과 정회(情懷)를 풀고 5남 5녀를 낳아 키운다. 성조가 나이 70에 열 자식을 데리고 자신이 심은 나무들을 돌아본 뒤 온갖 연장을 마련해 재목을 베어 국궁(國宮), 관사(官舍) 및 백성의 집을 짓는다. 집짓기를 마친 성조는 입주 성조신이 되고, 부인은 몸주 성조신이 되며 , 아들 다섯은 오토지신(五土之神)이, 딸 다섯은 오방부인(五方夫人)이 되었다.
무가(巫歌)의 문학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구조는 신화와 영웅소설의 구조를 매개하는 위치에 놓이는 것으로 중요하다.
손순매아(孫順埋兒)
【출전】삼국유사 권5, ‘손순매아’
손순(孫順)은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학산(鶴山)이라 했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다가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는 이름을 운오(運烏)라 했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어, 언제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손순은 이를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의논하기를,“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렵소. 이제 아이가 저렇게 어머니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의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겠소? 차라리 이 아이를 땅에 묻어버려서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드리는 것이 좋겠소.”했다.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북쪽 들로 가서 땅을 파니, 거기에서 갑자기 기이한 석종(石鐘)이 나왔다. 그들 내외는 놀라고 이상히 여겨 잠시 나무 위에 걸고 그 종을 쳐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고 고왔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이의 복인것 같으니 도로 데리고 갑시다.”하니, 남편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종을 들보에 달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다. 흥덕왕(興德王)이 그 종소리를 듣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더없이 맑고 멀리 들리니 속히 조사해 보라.”했다. 왕의 사자(使者)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옛날 곽거(郭巨- 손순과 같이 하다가 금솥을 얻는 중국사람)가 아들을 파 묻을 때 하늘이 금솥을 내렸다더니,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자 땅에서 석종이 솟아났으니 이 두 효도는 천지에 똑같은 본보기로다.”하고, 집 한 채와 해마다 곡식 50 석을 주어 그 지극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전에 살던 집을 내놓아 절을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안치했다. 진성왕 때에 후백제의 사나운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는데, 그 종을 얻은 곳을 완호평(完乎坪)이라 하나 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수삽석남(首揷石枏)
【출전】설화집 수이전에 수록되었던 것인데, 수이전은 지금 전하지 않고 이 설화는 대동운부군옥 제 8권에 전하여짐.
신라 최항(崔伉)은 자를 석남(石枏)이라 했다. 그가 사랑하는 첩을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 만나지 못하더니 몇 달 후 죽고 말았다. 8일 후에 최항의 혼이 첩의 집에 갔는데, 첩은 최항이 죽은 줄 모르고 반가이 맞았다. 항이 머리에 꽂은 석남가지를 나누어 첩에게 주며 말하기를 “부모가 그대와 살도록 허락하여 왔다.”고 하기에 첩은 항을 따라 그의 집까지 갔다. 그런데 은 담을 넘어 들어간 뒤로 새벽이 되어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그 집 사람이 그녀가 온 까닭을 물으매 그녀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그게 무슨 말이냐. 항이 죽은지 이미 8일이 지났으며 오늘이 장사날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 석남가지를 나누어 머리에 꽂았으니 가서 확인해 보라.” 하였다. 이에 관을 열고 보니 정말 항의 머리에 석남가지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옷은 이슬에 젖어 있었고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첩이 죽으려 하자, 항이 다시 살아나서 백년해로하였다.
아기 장수 이야기
옛날 어느 곳에 평민이 살았는데, 산의 정기를 받아서 겨드랑이에 날개(혹은 비늘)가 있고 태어나자 이내 날아다니고 힘도 센 장수 아들을 기적적으로 낳았다. 그런데 부모는 이 아이 장수가 크면 장차 역적이 되어서 집안을 망칠 것이라 해서 아기 장수를 돌로 눌러 죽였다. 아기 장수가 죽을 때에 유언으로 콩 닷섬과 팥 닷섬을 같이 묻어 달라고 하였다. 얼마 후 관군(官軍)이 와서 아기 장수를 내놓으라고 하여, 이미 부모가 죽였다고 하니 그들은 무덤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아기 장수의 무덤에 가 보니, 콩은 말이 되고 팥은 군사가 되어 아기 장수가 막 일어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군은 아기 장수를 다시 죽였다. 그런 후 아기 장수를 태울 용마(龍馬)가 근처의 용소(龍沼)에서 나와서 주인을 찾아 울며 헤매다가 용소에 빠져 죽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있다.
아랑각 전설
아랑의 성은 윤(尹), 이름은 정옥(貞玉)이었으며, 그는 부친이 영남(嶺南) 밀양태수(密陽太守)로 부임하였을 때에 수행하여 밀양에 갔다. 그 고을 통인(通引- 관리명)과 그의 유모 음모에 빠져서 아랑은 어떤 날 밤 영남루의 밤 경치를 보러 갔다가 통인 백가(白哥)에게 욕을 당하였다.그것은 아랑이 달 구경을 하고 영남루 위에 있을 때, 별안간 유모는 없어지고 기둥 뒤에 숨어있던 백가가 뛰어 나와서ㅏ 아랑에게 연모의 정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랑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백가는 아랑을 죽여 강가 대숲 속에 던져 버렸다. 다음 날 태수는 여러 조사를 하여 보았으나 아랑을 찾지 못하고 마침내는 자기 딸이 야간 도주한 것이라 믿고 양반 가문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 이상 근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벼슬을 하직하고 한양 본가로 갔다. 그 뒤로 신관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그 날 밤에 처녀귀신이 나타나서 신관은 비명횡사하고 만다. 이때문에 밀양태수를 원하는 사람이 없어 지원자를 구하게 되었는데 이 싱사(上舍- 지난날, 생원이나 진사를 가리키던 말)라는 사람이 지원하여 그 날 밤에 촛불을 키고 독서를 하고 있을 때 별안간 머리를 풀어 헤치고 목에 칼을 꽂은 여귀가 나타났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여귀는 그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날이 밝자 그는 통인 백가를 잡아 족쳐 자백을 받아내고 아랑의 원혼을 달래 주었다. 그 때부터 사또의 객사에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설화는 매우 많다.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동일 인물명을 사용한 박종화의 「아랑의 정조」라는 소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설화를 원용하여 변형시킨 소설로는 정한숙의 「해랑사의 경사」라는 소설이 있다.
야래자(夜來者) 전설
처녀(유부녀일 수도 있다.)가 밤마다 찾아오는 정체 불명의 남자와 함께 동침을 한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알 수도 없다(사랑의 감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처녀는 임신을 한다. 그 아버지가 이유를 캐 묻자 딸은 사실대로 고백한다. 아버지는 딸에게 바늘에 실을 꿰어 그의 옷에 찔러 두라고 이른다. 이튿날 그 실이 간 곳을 찾아가서 바늘이 꽂힌 주인공을 찾는다. 그것은 대체로 지렁이나 뱀(용이나 수달피도 있다.) 등이다. 처녀는 애기를 낳는다.그 아이는 견훤과 같이 비상한 능력을 가진다.
연권녀 혹은 효녀 지은
【출전】삼국사기 열전
‘설씨녀’ 바로 앞에 있는 설화. 주인공 지은이 연권(連權)의 딸리기 때문에 ‘연권녀’ 설화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삼국유사 권5에는 ‘빈녀양모(貧女養母)’라 하여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효녀 지은(知恩)은 연권의 딸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느라고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그는 품팔이 뿐만 아니라 걸인 노릇도 하면서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겼다, 그러나 어는 해 큰 흉년이 들어 동냥도 할 수 없게 되자 지은이 양곡 30석에 남의 집 종이 되었다. 종일 일하고는 밥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게 된 후로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밥맛을 잃었다. 어머니가 딸에게 따지자 지은은 종이 된 사실을 고백하고 모녀는 붙들고 울었다. 마침 화랑 효종랑(孝宗郞)이 집 앞을 지나다가 듣고는 들어가 사정을 묻고 조[粟] 100석과 의복을 보냈다. 후에 진성왕(眞聖王)이 알고 다시 조 500석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군사를 보내어 그 집을 호위하도록 했다. 그 동리를 표창하여 효양리(孝養里)라고 하게 하였다.
이 설화는 「심청전」의 근원설화가 된다.
연오랑 세오녀
【출전】삼국유사 권1, ‘기이(奇異)’ 편
해와 달의 생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설화는 일월신화(日月神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더구나 일본 측의 자료를 보면 이 설화가 일본의 건국신화와 관계 있음도 알 수 있다. 또 우리 나라의 영일(迎日)이란 지명도 이 이야기와 관계 있다.
신라 8대 임금 아달라(阿達羅) 왕 때의 일이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 위에 홀연히 바위 하나가 나타나자, 연오랑은 이것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바위를 타고 온 이 사람을 왕으로 모셨다. 한편 아내인 세오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궁금하여 바다에 나가 보았다.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자기도 그 바위에 올라탔다. 그리하여 세오녀도 일본으로 건너가 남편을 만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신라땅을 떠나 뒤부터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왕은 천문을 맡은 신하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구러자 그 신하는 “해와 달의 정(精)이 우리 나라에 있다가 이제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곧 사람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연오랑 부부을 귀국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오랑은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홀홀히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아내가 짠, 가는 명주를 줄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하면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요.” 라고 말하며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그 비단을 가지고 와서 하늘에 제사했더니 과연 해와 달이 옛날같이 빛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명주를 국보로 모시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고,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이라고 하였다.
예성강곡(禮成江曲)
【출전】고려사 악지(高麗史樂志) 속악조(俗樂條)의 ‘예성강곡’ 전편으로 추측하였는데 이 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당나라 상인인 하두강(賀頭綱)이라는 사람이 바둑을 잘 두었다. 그가 한 번은 예성강에 갔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는 탐나는 마음이 생겼다. 그는 그녀의 남편과 바둑을 두어 거짓으로 지고는 많은 물건을 건네 주었다.그리고 이번에는 아내를 걸고 바둑을 두자고 하였다. 남편은 이로운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상인은 실력을 다하여 단번에 이기고는 그의 아내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그의 아내를 배에 싣고 떠나가 버렸다. 이에 남편은 후외와 한(恨)에 차서는 이 노래를 불렀다. 세상에 전해지기는, 그 부인이 떠나갈 때에 몸을 매우 죄어 매서 하두강이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배가 ㅂ다 가운데에 이르자 뱅뱅 돌고 가지 않으므로 점을 쳤더니 지조가 굳은 여인에게 감동이 되었으니 그 여인을 돌려 보내지 않으면 배가 파선되리라 하였다. 그래서 뱃사공들이 두려워하며 하두강에게 이 일을 고하자 하두강은 그녀를 돌려보내 주었다고 한다. 그녀가 또한 노래를 불렀는데 이것이 후편이다.
오봉산(五峰山)의 불
옛날에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가서 재미있게 살았는데 남편이 문둥병에 걸려 헤어지게 되었다. 여인은 남편을 위해 약이란 약은 다 써보아도 효험이 없자 매일 남편의 병이 낫기만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 말 스님 한 분이 찾아와서 오봉산에 불을 놓고 남편을 찾아가면 낫는다고 하여 백 날 동안 오봉산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남편 옆에 가서 죽으려고 남편을 찾아가다가 도중에 쓰러지고 말았다. 서산으로 지는 해를 보고 제발 남편을 찾아갈 때까지 넘어가지 말라고 손을 휘젓다가 보니 자기 손이 오봉산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섯 손가락에 불을 켜서 붙이고 남편을 찾아갔는데, 남편은 이미 병이 다 나아서 둘은 동리로 내려와서 행복하게 살았다.
용원설화(龍猿說話)
【출전】인도의 불경 ‘자타가 본생경(本生經)’
바닷속에 용왕이 살았는데, 그의 왕비가 잉태하여 원숭이의 염통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용왕은 원숭이의 염통을 구하기 위하여 육지로 나와 나무 위에서 열매를 따 먹고 있는 원숭이를 만났다. 용왕은 “그대가 사는 이곳은 좋지 못하니 아름다운 수목이 있고 먹을 열매가 많은 바닷속으로 안내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솔깃한 원숭이는 기뻐하여 용왕의 등에 업혀 물 속으로 갔다. 도중에서 용왕은 그만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그 말을 듣고 놀란 원숭이는 용왕을 보고 “염통을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왔으니 어른 다시 가지러 가자.”고 하였다. 용왕은 원숭이의 말을 곧이 듣고 다시 육지로 업고 나왔다. 원숭이는 육지에 나오자마자 나무 위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고 용왕을 보고 조소만 하였다. → 구토지설
욱면설화(郁面說話)
【출전】삼국유사권5, ‘욱면비념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계집종인 욱면이 염불을 하다가 서쪽으로 하늘에 올라감)’
경덕왕 때 강주의 남자 신도 몇 10명이 뜻을 극락세계에 두고 고을 경계에 미타사를 세우고 1만일을 기한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이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욱면이라는 한 계집종이 그 주인을 따라 절에 가 뜰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했다. 주인은 그 종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을 항상 미워해서 곡식 두 섬을 내주면서 이것을 하루 저녁에 다 찧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곡식을 초저녁에 다 찧어놓고 절에 와서 염불하기(속담에 ‘내일 바빠 주인집 방아 바삐 찧는다’는 여기서 나온 말인 듯.)를 밤 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계집종은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에 매서 합장하고 좌우로 흔들면서 자기 자신을 격려했다. 그 때 공중에서 소리가 나기를, “욱면은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하니, 절 안의 중들이 이 소리를 듣고 그를 권하여 함께 법당에 들어가 염불했다. 얼마 안 되어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종은 몸을 솟구쳐 대들보를 뚫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서쪽으로 가다가 교외에 이르러 육신을 버리고 부처로 변하여 연의대(蓮衣臺)에 앉아서 큰 빛을 내뿜으면서 천천히 사라져가니, 이때 음악소리는 공중에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그 법당에 구멍이 뚫어진 곳이 지금도 있다.
일월산 황씨 부인당 설화(日月山黃氏夫人堂說話)
오랜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성을 가진 처녀는 동네 총각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워낙 아름다운 규수라 두 젊은이가 서로 탐내어 다투었었는데, 그 중 한 총각이 행운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혼 첫날밤이었다. 원앙금침에 들기 전, 뒷간에 갔다가 신방(新房) 문 앞에 선 신랑은 기겁을 하고 놀랐다. 신방 문 창호지에 칼날 그림자가 얼씬거린 것이다. 그 그림자가 분명 연적(戀敵- 다른 총각)의 것이라 여긴 신랑은 그 길로 아무 말없이 달아나버렸다. 칼날 그림자란 실은 문 앞에 있던 대마무잎의 그림자에 대한 착각이었지만, 신랑은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그 길로 영영 달아나버린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는 조바심을 내며 신랑을 기다리다가 몇 날, 몇 밤을 새웠는지 모른다. 침식을 전폐하고 오직 기다림에 몸을 바치던 신부는 마침내 한을 품고 구천(九天)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러난 그의 시신은 삭을 줄을 몰랐다. 살아 생전 꽂꽂했던 몸가짐도, 앉음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돌부처인 양 시신은 언제나 신방을 지키는 듯 보였다. 한편, 도망간 신랑은 외지에서 다른 색시를 만나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아이까지 낳았으나 아이는 낳는 대로 이내 죽곤 하는 것이었다. 점장이에게 알아보았더니 바로 황씨 규수의 원한 맺힌 원혼(寃魂)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괴로움에 빠진 신랑은 그를 일월 산정에 묻어주고, 그리고 그를 섬기도록 하여 보라는 어떤 승려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신랑은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지금의 부인당 자리에 시신을 옮기고 작으나마 사당(祠堂)을 지어바쳤다. 그 때야 시신은 홀연히 삭아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일월산은 조지훈의 고향 근처에 있는 산이다. 따라서 이 설화와 그의 「석문(石門)」이라는 시와 관련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석문은 1993년 11월 제2차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었다.한편 서정주의 「신부」라는 시도 이와 같은 소재를 가지고 있다.
장자못 전설
옛날 전북 옥구군 미면(米面) 지금의 미제지(米堤池)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욕심이 많고, 포악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중이와서 시주를 권하자 그는 심술궂게 시주 대신 소의 똥을 잔뜩 자루에 담아주었다. 때마침 그 광경을 보던 부인이 몰래 중을 불러 쌀을 주면서 남편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중은 그 부인에게 부처님의 심부름으로 남편을 벌주기 위해서 왔다 하고 내일 아침 그 집을 피해 뒷산으로 달아나되 무슨 소리가 나도 뒤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튿날 부인은 어린아이를 업고 뒷산으로 올라가던 중,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므로 금기(禁忌)를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더니 조금 전까지 있던 집은 간 곳이 없고 그곳에 물이 괴어 있었다. 여인은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어린아이와 함께 돌로 화하고 말았다 한다. 이후로부터 큰 부자집은 큰 못이 되어버렸다.
조신(調信)의 꿈
【출전】삼국유사 권 3 ‘조신조(調信條)’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주제로 한다. 그리고 아것은 조신이 나중에 깨달은 바 있어 정토사란 절을 세웠다고 하는 사원연기설화(寺院緣起說話)이기도 하다. 조신은 지금의 강릉 지방에 있는 세규사(世逵寺)의 중이었다. 그는 명주 날리군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좋아했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낙산대비(洛山大悲)라는 관음보살 부처님에게 그 소원을 하소연했다. 그러나 그런 보람도 없이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다. 조신은 절망 끝에, 어느 날 대비(大悲)의 앞에 가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원망하며 슬피 울다가 너무 지쳐서 얼풋 잠이 들었다. 홀연히 꿈에도 잊지 못하던 김소저가 나타나서 웃으며 “저는 마음 속으로 그대를 몹시 사랑했으나 부모님의 영으로 부득이 출가했다가 이제는 함께 살려고 왔습니다. 나를 용납하여 주시겠습니까? ” 하였다. 조신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서 40년을 함께 살았다.,그러나, 너무도 가난하여 입에 풀칠하기 위하여 십여 년을 문전 걸식을 하다가 15세 되는 큰 아들은 굶어서 죽었고, 조신과 그 아내는 늙고 병들어 누워 있고 열 살짜리 딸이 구걸하다가 개에게 물려서 쓰러졌다. 두 부부는 목이 메었다. 이 때에 그 아내는 의연히 단좌하여 남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가 처을 당신을 만났을 때, 우리는 나이도 젊었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그리고 사랑도 두터워서 헝겊 하나로, 또는 밥 한 그릇으로 나누어 먹으면서 살아 왔으나, 이제 50년을 살다 보니 몸은 늙어서 병들었고 아이들은 굶고 추워서 죽기도 하고, 마냥 구걸을 하려고 해도 집집이 문을 굳게 닫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느 여가에 부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홍안의 미소[紅顔微笑]는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의 약속[約束芝蘭- 친구 사이의 약속]은 광풍 앞에 버들꽃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으니 헤어지는 도리 밖에 없습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것도 다 운수가 아니겠습니까 ?” 이 말을 들은 조신도 옳게 여기고, 부부는 두 아이를 하나씩 맡아가지고 헤어지기로 했다. 서로 손을 잡고 이별하려고 할 때에 잠이 깨었다. 한바탕 꿈이었다. 대비 앞의 등불은 여전히 깜박거리고 밤은 고요히 깊어만 가고 있었다. 이튿날 깨어보니 머리가 하얗게 세어있었다. 조신은 열다섯 살 아들이 굶어 죽어간 언덕에 찾아가서 그 시체를 파묻은 곳을 파 보았다. 거기서 돌미륵이 나왔다고 한다. 조신은 인간의 일생이 물거품같이 허무함을 느끼고 다시는 인세(人世)에 뜻을 두지 않고 불도(佛道)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이광수의 「꿈」이라는 소설과 관련이 있다.
지귀설화(志鬼說話)
【출전】박인량의 수이전에 실려 있다가 지금은 대동운부군옥에 실려 있는 이야기.
이 이야기의 제목을 「심화요탑」이라고도 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활리역에 지귀(志鬼)라는 사람이 여왕을 사모하다가 미쳐버렸다. 어느 날 여왕이 분향을 위해 행차하는 길을 막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린 지귀는 여왕의 배려로 여왕의 행차를 뒤따르게 되었다. 여왕이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지귀는 탑 아래에서 지쳐 잠이 들고 만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여왕은 그 광경을 보고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에 놓고 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금팔찌를 보고서는 가슴이 타들어가 급기야 화신(火神)이 되고 만다. 지귀가 불귀신이 되어 온 세상에 떠돌아 다니자 사람들은 두려어 하게 되었다. 이에 선덕여왕이 백성들에게 주문을 지어 주어 대문에 붙이게 하니, 그 후 백성들은 화재를 면하게 되었다. 이 때 여왕이 지어주 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귀의 마음의 불이 제 몸을 태워 불귀신이 되었으매 마땅히 창해 밖에 추방하여 이제 다시 돌보지 않겠노라.”
지하국 대적 퇴치 설화(地下國大敵退治說話)
옛날 지하국에 사는 아귀(餓鬼)라는 도적이 지상 세계에 나타나 왕의 세 공주를 잡아갔다. 한 무사가 공주를 구출하겠다고 자진해 나섰다. 그러나 왕은 공주를 구하면 막내딸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몇 사람의 부하를 데리고 지하국의 입구를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꿈에 산신이 나타나서 지하국의 입구를 가르쳐 주었다. 입구에 다다른 무사는 부하들을 지상에 남겨두고 광주리를 타고 지하국에 이르렀다. 세 공주 중 하나가 물을 길러 왔다가 무사를 만난다. 무사는 수박으로 변하여 아귀의 집으로 들어갔다. 세 공주는 아귀에게 독주를 권하여 아귀를 잠들게 하고, 그의 힘의 근원이 되는 옆구리의 비늘 두 개를 제거하고 그 목을 잘라서 죽여버렸다. 무사는 세 공주를 지상으로 올려 보냈으나 부하들이 무사는 올리지 않고 그대로 궁으로 돌아갔다. 지하국에 남은 무사는 처음 나타났던 산신의 도움으로 말을 타고 무사히 지상으로 나온다. 한편, 궁궐에서는 부하들이 공주를 데리고 왕 앞에 나아가 자기들이 구한 양 거짓말을 하여 큰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공주들도 자신들이 살아오게 된 기쁨에 무사에 관한 일을 잊고 있었다.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는데 무사가 나타나 자초지종을 고하자 왕은 크게 노하여 부하들을 죽이고 막내딸과 무사를 결혼시켰다.
호동왕자(好童王子)
【출전】삼국사기권14, ‘고구려본기 제2(高句麗本紀第二) 대무신왕(大武神王)’
전설이라 할 수 있다. 호동(好童)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인 대무신왕의 차비(次妃)에게서 난 소생이다. 왕은 그를 심히 사랑하여 호동(好童)이라 이름하였다. 대무신왕 15년 4월에 왕자 호동이 옥저(沃沮)를 유람하였는데, 낙랑의 왕 최리(崔理)가 여기 나왔다가 호동을 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다. 그대야말로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 하며 호동을 데리고 돌아가 사위를 삼았다. 그 뒤, 호동이 고구려에 돌아와 낙랑(樂浪)에 있는 아내 최씨녀(崔氏女)에게 사람을 보내어 전하기를 ”그대의 나라 무구(武庫)에 들어가 고각(鼓角-북과 나팔)을 몰래 찢어버린다면 내가 그대를 아내로서 맞아들이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부부가 될 수 없으리라.“ 하였다. 그 이유는 낙랑에는 옛날부터 신기한 고각이 있어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리는지라, 그로써 침략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과연 최리의 딸(낙랑공주)은 몰래 무고에 들어가 예리한 칼로 그 고각을 찢어 버리고 호동이게 그 사실을 알렸다. 호동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여 낙랑을 공격했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있다가 고구려군이 성 밑에 이르러서야 깜짝 놀라 무고에 가보니 벌써 고각은 부서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최리는 마침내 딸을 죽이고 항복하고 말았다.
홍수설화(洪水說話)
옛날 이 세상에는 큰물이 져서 세계는 전부 바다로 변하고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게 되었다. 그 때에 어떤 남매 두 사람이 겨우 살게 되어 백두산같이 높은 산의 상상봉에 표착하였다. 물이 다 걷힌 뒤에 남매는 세상에 나와 보았으나 인적이라고는 구경할 수도 없었다. 만일 그대로 있다가는 사람의 씨가 끊어질 수밖에 없으나 그렇다고 남매간에 혼인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얼마 동안을 생각하다 못하여 남매가 각각 마주 서있는 두 봉우리에 올라가서 계집아이는 암망(구멍 뚫어진 편의 맷돌)을 굴려 내리고 사나이는 수망을 굴려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하느님에게 기도하였다. 암망과 수망은 이상하게도 산골 밑에서 마치 사람이 일부러 포개 놓은 것같이 합하였다. 남매는 여기서 하느님의 의사를 짐작하고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 사람의 씨는 이 남매의 결혼으로 인하여 계속하게 되었다. 지금 많은 인류의 조선(祖先)은 실로 옛날의 그 남매라고 한다.
전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이 이야기는 인류의 시조, 천지개벽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중국과 불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서양의 경우 구약에 나온다.
1.달팽이 각시(우렁 색시)
손진태,한국민족설화의 연구
한국구비문학대계
*해설 및 감상
이 이야기는 ‘우렁 색시’ 혹은 ‘우렁 각시’ 유형에 속하는 민담이다. 전국적으로 전승되는 이야기로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민담 가운데 하나이다. 손진태의 한국민족설화의 연구에는 ‘나중미부(螺中美婦)설화’라고도 되어 있다.
이 설화에는 여러 가지 화소(話素)들이 한 곳에 섞여 있다. ‘사람으로 변한 동물’, ‘평범한 남자와 고귀한 여자의 결합’, ‘지배자에 의한 서민 침탈’, ‘서민의 극적인 신분 상승’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 요소들을 통해 이 설화는 ‘예쁜 아내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꿈’을 드러내며, ‘그러한 소박한 꿈을 깨뜨리려는 험한 세상’을 확인하고, ‘그럼에도 행복한 삶이 결국은 성취될 수 있다는 기대’를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에는 비현실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사건 전개상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허구와 환상을 전제로 하여 전승되어 온 민담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전제하에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뜻을 읽어 내야 한다.
변신담(變身談)에 속하는 이 유형의 설화는 대체로 가난한 총각이 우렁이 속에서 나온 여자를 금기를 어기면서 혼인하였으나, 임금 혹은 관리가 색시를 빼앗아 파탄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큰 틀이다. 본문의 내용과는 다소 다르지만 대부분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가난한 노총각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이 농사를 지어 누구랑 먹고 살아.” 하자, “나랑 먹고 살지 누구랑 살아.”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다시 말하자, 대답도 역시 같았다. 총각이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가 보니, 우렁이 하나가 나왔다. 우렁이를 집에 가져와 물독 속에 넣어 두었는데, 그 뒤부터는 매일 들에 갔다 오면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상히 생각한 총각이 하루는 숨어서 살펴보았더니, 우렁이 속에서 예쁜 처녀가 나와서 밥을 지어 놓고는 도로 들어갔다. 총각이 처녀에게 같이 살자고 하자, 처녀는 아직 같이 살 때가 안 되었으니 좀더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총각은 억지로 함께 살았다. 하루는 우렁각시가 들일을 나갔는데, 지나가던 관리가 보고는 자기 처로 삼으려고 데려오게 하였다. 우렁각시는 자기를 데리러 온 관리의 하인에게 반지, 비녀, 옷고름, 겉옷을 차례로 내주면서 이것밖에 없더라고 말해 달라고 하였으나, 끝내 관리에게 붙잡혀 가게 되었다. 이를 안 총각은 애를 태우다가 마침내 죽어서 파랑새〔靑鳥〕가 되고, 우렁각시도 죽어 참빗이 되었다는 설화이다. 여기에서 나타난 파랑새는 자신의 정당한 배필을 빼앗긴 억울함을, 여자의 필수품인 참빗은 성취되지 못한 애정을, 우렁이는 여자의 성기를 각기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설화는 남녀의 만남조차도 쉽사리 이룰 수 없었던 하층민들의 운명적인 슬픔이나 현실적인 고난이 담겨 있다. 새가 된 총각이 우렁각시를 향하여 불렸다는 민요도 전해지고 있다.
이 설화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혹은 노총각)은 일상적인 인물로서,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신기한 능력을 지닌 사람은 아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거지 잔치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적선의식(積善意識)을 표방하여 총각과의 만남을 기원하는 매개적 수단으로 볼 수 있다. 고전소설 「심청전」에서 왕후가 된 심청이 맹인 잔치를 통해 아버지를 만나는 모티브와 같은 것이다.
*소재의 상징성
이 설화에서 크게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부분에 나타난 ‘용상(龍床)’을 이야기하기로 하자. 용은 권위와 조화에 초능력을 지닌 상상적 동물로서 수신(水神)으로서 지상계의 비를 관장한다. 그러므로 제왕의 다스림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농경 사회에서 왕과 용은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용이 기운을 토하여 구름을 만들었으므로 구름도 영괴(靈怪)하고, 용은 그 구름을 탐으로써 신묘함을 부린다.”고 하였다. 이러한 용은 임금과의 동질감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그 권위로써 임금을 나타내는 데에 많이 쓰였다. 즉, 임금의 얼굴은 용안(龍顔)으로, 임금의 평상은 용상(龍床)으로, 임금의 옷은 곤룡포(袞龍袍)로 나타낸 것이 그것이다. 특히 임금의 즉위를 용비(龍飛)라고 하는데, 「용비어천가」의 제목은 바로 이성계의 등극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해동 육룡’은 바로 조선 태조 이성계와 그의 조상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입신출세를 의미하는 ‘용문에 올랐다[登龍門]’라는 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른 작품과의 관련성
이 설화는 중국의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실려 있는 ‘백수소녀(白水素女)설화’나 ‘오감(吳堪)설화’와 비슷하다. 이들 문헌의 설화는 이 이야기처럼 여자가 떠나면서 남자를 부자가 되게 한다든지, 임금이나 관리를 요술로써 혼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우렁(조개, 소라) 색시 설화’의 변이형은 매우 많다. 관리에게 색시를 빼앗겼다가 속임수로 그 관리를 물리치고 색시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벼슬까지 하였다는 이야기는, 부당한 횡포는 받아들일 수 없고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조된 것이다. 임금이나 관리에게 잡혀가는 부분이 없고 기한이 안 되었는데도 혼인하였기 때문에 우렁각시가 완전한 사람이 될 수가 없어서 불행한 결말이 왔다는 경우도 있다. 혹은 시어머니가 우렁이를 거름통에 버려서 우렁각시가 죽게 되었다는 변이형도 있다. 또한 총각은 색시를 잃은 후에 혼자 쓸쓸히 지내다가 다른 여자와 혼인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요약정리
종류:민담
주제:고난 속에 찾아오는 행복
표현:서민적, 토속적
*연구문제
(1) 이 설화와 「나무꾼과 선녀」설화와 비교하여 인물과 구조, 주제면에서 유사성을 찾아보자.
*「나무꾼과 선녀」에서는 평범한 시골 총각이 신이하고 아름다운 여성과 짝을 맺는다는 내 용을 바탕으로 고난을 거쳐서 결국에는 행복을 되찾는다는 서사 구조, 행복에 대한 소박한 꿈 등이 나타난다.
(2) 이런 설화를 일컬어 ‘관탈민녀(官奪民女)형 설화’라고 한다. 그 근거가 무엇인가.
*임금이 민간의 아녀자인 우렁색시를 데려 갔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손진태(1982), 한국민족설화의 연구, 을유문화사.
편찬위원회(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현룡(1976), 한중소설설화의 비교연구, 일지사.
유증선(1972), 「조개색시 구혼민담 소고」, <한국민속학> 2, 한국민속학회.
2.단종의 혼령
*해설 및 감상
이 전설은 설화 가운데서 신빙성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이야기이다. 이 전설 또한 수양 대군에 의해 억울하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端宗)의 슬픈 사연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인 사건을 기초로 해서 전개되고 있다. 단종은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上王)으로 있다가 사육신의 사건 이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렇듯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혼령이 잠들지 못하고 사또 앞에 나타나는 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활줄을 목에 매고 죽은 단종의 혼령이 계속 나타나, 영월 지방에 부임해 오는 사또들의 죽음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총명한 한 사또에 의해 단종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단종은 한을 풀고 저승으로 돌아간다는 줄거리이다.
우리가 전설을 분류할 때, 우선 설명적 전설이라 하여 특이한 지형·자연 현상·풍습·동식물 등의 기원이나 성질이 이러이러한 사연으로 되었다는 식의 전설이 있다. 그리고 신앙적 전설이라 하여 민간 신앙을 기초로 한 종교적 이야기가 있으며, 역사적 전설이라 하여 실제의 역사적 사물과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민중들의 기억과 구연 행위를 거치는 동안 변형됨으로써 생겨난 이야기도 있다. 이 ‘단종의 혼령’은 역사적 전설에 해당된다. 이 전설이 영월 지방에서 구비 전승된 것은 실제로 이 지역은 단종이 유배되어 죽임을 당한 곳이라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리고 현명한 수령이 나타나 원혼의 한을 풀어 주는 것은 원귀 설화의 한 특징이다.
이 외에도 단종을 소재로 한 설화가 더 있다. 그 중 하나는 강원도 영월읍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에 안치되어 있는 단종의 영정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림에는 백마를 탄 단종과 그 앞에 머루 바구니를 들고 있는 추충신(秋忠臣)이 그려져 있다. 추충신의 이름은 익한(益漢)으로 한성부윤을 지냈던 사람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외롭게 지낼 때, 산머루를 따다가 드리고 자주 문안을 드렸다. 그날도 산머루를 따가지고 단종에게 바치려고 내려오는 길에 연하리 계사폭포에서 단종을 만났다. 단종은 곤룡포에 익선관으로 정장을 하고 백마를 타고 유유히 태백산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축익한이 단종에게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자 단종은 태박산으로 간다 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추익한은 급히 단종의 처소로 와 보니 단종은 이미 변을 당한 뒤였다. 추익한은 다시 단종을 만났던 계사폭포에 까지 와서 단종을 따라 죽었다. 이리하여 추익한도 단종과 함께 태백산 신령이 되었다. 또한 신령이 된 충신 엄흥도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이는 태백산 일대의 서낭당 뒤에 가시가 있는 엄나무가 많다는 사실을 전설화한 것이다. 즉, 엄충신이 죽어서도 단종을 지키기 위해 사후에 엄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정선군 여양리에 노산군(단종)을 모신 서낭당이 있는데 이것에도 전설이 전한다.
참고로 이 글의 출전인 금계필담은 조선의 역대 국왕과 대신들의 국사 처리에 관련된 고사 및 유명 인사들의 기이한 행적 등을 수록한 책으로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재의 상징성
귀신(鬼神)의 상징성을 보자. 귀신 혹은 사령신(死靈神)에는 국가나 촌락 공동체, 씨족의 시조령, 조상령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조상 숭배, 특히 조상 영혼 숭배가 귀신 신앙의 중요 부분임을 헤아리게 되면 귀신이 곧 조상령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다. 조상신이 흰빛의 선의의 귀신이라면, 검은빛의 악의의 귀신은 무속, 민속 신앙 현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통틀어서 원귀(怨鬼), 원령(怨靈)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잡귀, 객귀(客鬼)들은, 저주와 재앙, 질병의 원인으로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의 무속 신앙이 시베리아의 검은 샤머니즘과 유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 산과 들과 같은 자연 환경이 언제나 있듯이 귀신도 우리 주위에 늘 있다고들 말한다. 무당과 달리 보통 사람은 우연히, 피동적으로 귀신을 만나게 된다.
*다른 작품과의 관련성
이 글의 소재인 단종의 죽음을 중심으로 한 역사 소설이 있다. 이광수가 지은 장편 역사 소설 「단종 애사(端宗哀史)」가 그것이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단종이 그의 숙부 수양 대군 에게 쫓기어 영월에서 죽은 사실을 충실히 서술한 작품이다. 당시 문단은 민족주의 사상의 고조기로, 이 소설은 사실을 충실히 서술하여 충군(忠君) 사상을 고취한 것이다. 한편, 이 설화가 원귀를 소재로 했다는 면에서는 「장화홍련전」이나 밀양의 「아랑각 전설」 둥과도 관련이 깊다.
*요약정리
종류:원귀설화
성격:역사적, 전기적
주제: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신원(伸寃)
의의: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역사적 전설.
*연구문제
(1)이러한 이야기가 민간에서 구비 전승되는 이유를 주제와 관련시켜 말해 보자.
*이 전설이 영월 지방에서 구비 전승된 것은 실제로 이 지역은 단종이 유배되어 죽임을 당한 곳이라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리고 현명한 수령이 나타나 원혼의 한을 풀어 주는 것은 원귀 설화의 한 특징이다.
(2) 이 이야기의 구조는 설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원혼’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고, 어떠한 기능을 하는가?
*‘원혼’이란 원한을 품은 영혼을 말하여 이 이야기에서 단종의 원혼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소(話素)의 기능을 한다.
*참고문헌
편찬위원회(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0-1986), 한국구비문학대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어느 가난한 선비의 이야기
*해설 및 감상
민담은 흥미 본위로 된 이야기이다. 구전되기 위해서는 쉽고 기억하기 편리한 구조가 필요하다. 단순하면서도 밀도 있게 짜여진 구조 속에 흥미와 교훈성을 지닌 설화는 후대의 소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민담에는 구비 전승되는 동안에 삶의 지혜와 교훈을 주는 요소들이 많이 첨가되었다. 그 중에는 병든 사람을 돌봐 주고 나중에 복을 받는다는 내용의 민담이 많다. 우리가 잘 아는 「흥부전」에서 제비의 다리를 고쳐 주고 복을 받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결국 복을 받는다는 보은설화(報恩說話)이다. 우리의 구비문학 중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이야기 구조로 선한 삶을 추구하는 민족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묘미는 한밤중에 찾아온 걸인을 박대하지 않고 정성껏 그를 돌봐 준 어느 가난한 선비 부부의 선행에 있다. 자신은 먹을 것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걸인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또 문둥병에 걸려 고름이 나고 고약한 악취가 나는 걸인을 목욕까지 시켜 주는 선비 부부의 선행은 우리 민족이 공유한 인정의 참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민담의 주제인 권선 징악은 설화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 왔으며, 선행 속에 삶의 참다운 의미가 있다는 소박한 인생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은설화는 은혜에 보답하는 내용을 이야기하는 설화로 그 범주가 매우 넓다. 우선 개략적인 면에서 은혜에 보답하는 이야기지만, 그 주체, 즉 은혜에 보답하는 주인공의 다양성, 은혜를 입게 되는 동기, 그리고 은혜를 끼치는 주인공의 다양성 등에 따라서 다시 세분화될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이 설화는 동물들의 보은을 소재로 취하는 것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동물담에서 다루는 것이 보통이다. 보은 설화의 예로서는 산불이 일어나자, 멀리 떨어진 골짜기에서 몸을 적셔 와서 불을 꺼 주인을 구하고 자신은 죽어 버렸다는 충견의 이야기, 말이 싸움터에 나가 전사한 주인의 목을 물고 집에 돌아와 그 시신을 장사지내게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주인과 함께 꿩사냥을 나갔다가 목마른 주인이 마시고자 하는 샘물이 독이 든 것을 알고 그 물을 못 마시도록 훼방을 놓았다는 매의 이야기 등이 이에 해당된다. 또 사람을 잡아먹은 호랑이가 여인의 비녀가 못에 걸려 신음 중인 것을 지나던 행인이 빼어 주자 등에 업고 달리어 보물을 발견하게 한 호랑이 이야기,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고쳐 주고 이듬해 그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심어 열린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와 부자가 되게 한 이야기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보은설화는 ‘보은’이라는 관념이 우리 민족에게 오랫동안 인간사회의 현실적 도덕이었기 때문에 마침내는 현실 사회에 부응하는 그리고 살아 있는 설화의 주제로까지 자리잡아 최종적인 틀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소재의 상징성
겨울이다. 겨울의 문학적 상징화는 기본적으로 겨울의 두 가지 심상를 근간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추위에 견디기 힘든 고난의 심상과 만물의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는 정지의 심상이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 혹독한 고난이 겨울 추위의 혹독함 자체에 집중되어 상징화될 때에는 주로 ‘횡포’로 나타나고, 겨울 추위의 혹독함을 견뎌야 하는 인간 형성에 집중되어 상징화될 때에는 주로 ‘가난’으로 나타난다. 후자의 경우, 생명체의 정지 자체에 집중되어 상징화될 때에는 주로 ‘소멸’로 나타나고, 겨울 정경의 적막감을 중심으로 상징화될 때에는 주로 ‘폐색(閉塞)’으로 나타난다.
*다른 작품과의 관련성
앞서 설명한 대로 많은 보은 설화와 관련된다. 보은담은 교훈적인 기능을 주로 담당한다. 「까치와 구렁이」, 「구렁이의 복수」 등 동물담에 이러한 내용의 민담이 많다. 이들은 대개 동물의 효행이나 보은하는 것에 빗대어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이야기들인 것이다. 자기집 부엌 근처에 살고 있던 두꺼비에게 끼니마다 먹을 것을 던져 주던 처녀가 마을의 당신(堂神)인 지네를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는 이야기, 그밖에 「지네 죽인 닭」의 이야기나 「구렁이 죽인 개」의 이야기도 보은설화에 속한다. 이상과 같이 보은설화는 동물담에서 많이 발견되는 바, 이는 ‘보은’이라는 현실 사회의 가치판단에 기반을 두고 인간과 동물과의 현실적 유대에 연유하고 있음을 본다.
*요약정리
종류:민담, 보은설화.
표현:교훈적,
주제: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
*연구문제
(1) 이 민담의 주제는 무엇인가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
(2)이 민담에 반영된 민중의 정서를 이야기해 보자.
*이 민담은 선을 베풀면 복을 받는다는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선행 속에 인생의 참다운 의미가 있다는 소박한 인생관이 제시되어 있다.
참고문헌
장덕순(1970), 한국설화문학연구, 서울대출판부.
최운식(1980), 충청남도 민담, 집문당.
[출처] 설화(說話)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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