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현재 부산의 중심은 동래였기에 이곳에는 관련유적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동래 곳곳에는 ‘동래문화유적지 관광안내도’, 혹은 ‘동래 문화유적지 탐방길’이라는 이름의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어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돌아보면 좋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렇게 여유 있는 답사를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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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동배롱나무에서 나와 유형문화재 제7호 충렬사(忠烈祠 동래구 충렬대로 345)로 향했다. 충렬사는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부산지방의 순국선열을 모신 곳이다.
전쟁이 끝난 뒤인 1605년(선조 38)에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동래읍성 남문 안에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위패를 모신 송공사(宋公祠)를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이 충렬사의 시초이다. 그 후 1624년(인조 2)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의 청으로 ‘충렬사’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송공사는 충렬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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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년(효종 32) 동래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사당이 좁고 성문 가까이에 있어 시끄럽다는 점과 송상현공의 충절과 학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안락리(지금의 충렬사 자리)로 이전하였다. 이때 강당과 동서재(東西齋)를 지어 안락서원(安樂書院)이라고 하여 사우와 서원으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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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709년(숙종 35)에 송상현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東萊敎授) 노개방(盧蓋邦)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別祠)를 옛 송공단 터에 건립하였다. 1736년(영조 12) 별사에 모셨던 분들을 충렬사에 함께 모셨고, 1772년에는 다대진첨사 윤흥신(尹興信)을 추배하고, 임진왜란 때 송상현, 정발을 따라 죽은 금섬(金蟾)과 애향(愛香)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 임진왜란 충신 3인, 효열(孝烈) 5인을 봉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무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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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부터 1978년까지 정화공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현재는 25,600평의 경내에 본전 외에 15채의 건물이 있으며,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매년 5월 25일에는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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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역시 ‘겉’을 볼 곳이 아니라 그 ‘뜻’을 새겨야 하는 곳이지만 나는 走馬看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영역 안에는 옮겨온 ‘유형문화재 제21호 군관청(軍官廳)’과 동래읍성, ‘민속문화재 제2호 다대첨사영갑주(多大僉使營甲胄)’ 등이 있지만 전자는 시간이 모자라, 후자는 정확한 소재지를 알아보지 않아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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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부산 유형문화재 제1호’ 동래부동헌[東萊府東軒 동래구 명륜로 112번길 61(수안동)]으로 향했다. 무척 복잡한 동네였고, 주변에는 시장, 상가 등이 들어차 있었으며 주차공간도 마땅치 않았는데 다행히 주변에 좁으나마 공영주차장이 있어서 차를 세울 수 있었다. 동헌은 일부 건물의 중건이 이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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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지방관[여기서는 동래부사]이 공적인 업무를 보던 곳인 동헌은 일명 아헌(衙軒)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동헌은 관아 건물 가운데서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동래부는 정3품 당상관인 부사가 재임하였는데, 관방으로서 대일 외교 시 중시되었다. 때문에 관아의 규모도 다른 고을에 비하여 규모가 크고 격식도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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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인조 14) 동래부사 정양필이 창건하였고, 1711년(숙종 36) 동래부사 이정신이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후 조선말기까지 동래부와 동래관찰사의 아헌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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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제8호’ 장관청(將官廳 동래구 명륜로94번길 36-6)이 근처에 있다기에 걸어서 찾아보았다. 조금 어려웠지만 결국 찾기는 했는데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이 건물은 조선후기 동래부 청사 건물의 하나로 이곳 군장관(軍將官)들의 집무소였다. 1669년(현종 10)에 동래부사 정석(鄭晳)이 창건한 후, 숙종 연간에 두 차례 중건되었다. 1706년(숙종 32) 동래부사 황일하(黃一夏)가 향청(鄕廳)이 있었던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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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양식은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ㄱ’자형으로 도리 끝에 접시받침을 한 집이다. 처마는 부연(浮椽)이 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八作)지붕이다. 부속된 행랑은 정면 7칸, 측면 1칸의 민도리집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구조의 개조와 무리한 맞춤으로 변형이 심하여 1998년 전면 해체, 복원하였다고 하며, 현재 동래기영회(東萊耆英會)에서 관리․사용하고 있다.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오던 길 동헌 앞에서 ‘독진대아문(獨鎭大衛門)터’ 표지석을 보았다. 유형문화재 제5호인 독진대아문은 원래 동헌의 입구에 있었으나 20세기 초에 시가지 정리에 따라 철거되어 현재의 위치인 금강공원(동래구 온천동 산20-4) 내에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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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에서 마지막으로 ‘유형문화재 제6호’ 동래향교(東萊鄕校 동래구 동래로103)를 만난다. 이곳 역시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제향공간까지 문을 열어놓아 반가웠다. 이 향교는 1392년(태조 원년)에 교육진흥책으로 전국에 향교를 세울 때 설립되었다. 2008년도 위성지도를 보면 뒤쪽이 야산에 낮은 단독주택 정도가 있었는데 지금은 바로 뒤쪽만 제외하고는 좌우에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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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건립은 동래읍성의 동문 밖(동래고등학교 주변)에 세웠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선조 38) 동래부사 홍준(洪遵)이 중건한 뒤, 여러 차례 장소를 옮기면서 중건되었으며, 1813년(순조 13) 동래부사 홍수만(洪秀晩)이 지금의 자리에 옮겼다. 지금 이곳의 지명인 명륜동은 향교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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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의 건축 구조는 유교의 성현을 모신 대성전(大聖殿)과 학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기거하는 동서재(東西齋), 그리고 성현의 위패를 모신 동서무(東西?), 제사의 기능을 돕는 전사청(典祀廳) 등의 부속건물이 복합되어 배치된다. 이것은 중앙의 성균관을 축소시켜 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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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향교의 건물배치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일직선상에 놓이는데 반해 동래향교는 외삼문(여기서는 반화루)-명륜당-내삼문-대성전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이 유지되지 못하고 있다. 향교는 전체적으로 서남향하고 있는데 강학공간의 중심축에 비해 제향공간의 중심축은 다소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아마도 지형적인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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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향교의 중심축은 강학공간의 축(노란색)보다 제향공간의 축(분홍색)이 동쪽으로 밀려나 있다. 향교나 서원을 다니다 보면 이렇게 축이 틀어지는 경우는 쉽사리 볼 수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지형적인 문제일 것이다. 이미지출처: 다음 스카이뷰]
동래향교의 정문은 솟을삼문 형태가 아닌 누문 형태이다. 2층 문루를 반화루(攀化樓)라고 한 것은 반룡부봉(攀龍附鳳), 즉 성인을 따라 덕을 이루고 임금을 받들어 공을 세우기를 원한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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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동래향교에는 종6품의 교수 1명이 있었고, 학생의 정원은 70명이었다. 또 향교의 유지와 관리를 위한 학전(學田) 7결(結)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학제가 시행됨에 따라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지금도 동래향교에서는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두 차례 유림에 의한 향사[釋奠大祭]가 받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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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에는 이밖에도 앞에서 언급한 유적 외에 온천동 일대에 망미루, 온정개건비 등이 있지만 오늘 걸음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다.
[인용 설명문 출처: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첫댓글 동래향교는 출입이 자유로운가 봅니다.
부산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흔들릴만큼 도로사정이 장난이 아니라서 저는 꿈도 못꾸고 있답니다.
만덕사지 당간지주도 봐야하는데~ㅎ
네, 항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내삼문까지 열어두었습니다. 부산에 회원분들 많습니다. 시간 맞추셔서 신세를 지시지요^^ 이번에 시간이 촉박해 만덕사지를 가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유일하게 대성전까지 가 본 곳이 부산 동래향교인데... 충렬사 뒤 동장대는 아직도 문을 잠궈둔 모양이군요.
거기까지는 올라가보지도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