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레방아( 물래방아라고도 쓰임)는 언제부터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였을까?.
오늘처럼 기술이 발달하여 모타 펌프가 있다면 논 아래의 물을 위로 퍼 올리는
수고로움이 적었을 것이다. 또한 곡식을 도정하는데 오늘처럼의 도정기계가
있었다면 무연 동력으로 곡식을 찧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방아는 곡물을 절구에 넣고 탈각(脫殼) ·정곡(精穀)하거나 제분하는 데 이용
되던 농기구이다. 방아의 사용시기는 석기시대 이래로 갈돌 - 맷돌 - 방아의
순서로 조선조 말 까지 사용 되어 왔다.
그 종류는 지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발로 디디어 찧는 디딜방아, 물의 힘을
이용하는 물레방아, 그리고 소 ·말 등의 축력(畜力)을 이용하는 연자(硏子)방아
등이 있다. 이러한 탈각 ·제분 등에 이용된 기구는 석기시대에 석명(石皿)과
석봉(石棒) 한쌍으로 알이 작은 곡식을 탈각하고 제분하는 데 사용하였던
갈돌[磨殼石:碣石]에서부터 맷돌로 발전하였다. 이 때까지 인력(人力)을 유일한
동력으로 쓰던 단계에서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아, 축력을 이용하는 연자방아로
발전하는 단계에 이르러 능률에 큰 진전을 보게 되었다.
물레방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조선조 말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에 의하여 중국에서 그 기술이 들어와 처음으로 지리산 자락 마천 골,
즉 오늘의 함양군 마천면 마천골 지리산 칠선계곡 초입에 설치 운행되었다.
연암 박지원은 1777년(정조1) 권신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
요동, 열하, 북경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
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
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내게 되었는데, 안의현은 오늘의 함양군
안의면이다. 이때, 즉 1792년에 지리산 마천골에 이용후생의 한가지인 물레방아를
제작하게 하여 처음으로 운용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기념 하고자 하여, 함양군에서는 마천면 마천골 금대봉 입구에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사시사철 돌아가게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물레방아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강원도 도계道溪에 몇 개의 재래식
물레방아가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