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와 개항기 광명의 문신인 정기세(鄭基世)가 과거에 급제한 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공사(公私)의 일들을 기록한 일기.
편찬/발간경위
정기세[1814~1884]는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큰아들로 태어나 1837년(헌종 3) 정시 병과 제1인으로 급제하였다. 『정기세일록(鄭基世日錄)』은 정기세가 과거에 급제한 1831년(순조 31)부터 사망하기 전인 1883년(고종 20)까지 공사의 일들을 날마다 기록한 종환(從宦) 일기다. 정기세의 후손인 국학자 정인보(鄭寅普)[1893~1950]가 증조할아버지 정원용과 할아버지 정기세 등과 관련하여 집 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기록들을 연세대학교 도서관[현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에 기증함으로써 빛을 보게 되었다.
형태
15권 15책의 초고본(草稿本)으로, 표제는 ‘정기세일록(鄭基世日錄)’이다. 책의 크기는 일정치 않으며, 행수는 10행, 한 행의 자수는 22자 안팎이다.
구성/내용
일제강점기 책을 옮기면서 편제가 뒤섞였다. 1책 앞에는 후손 정인보의 서문이 실려 있고, 1책부터 15책에 정기세의 『일록(日錄)』, 아들 정범조의 계, 손자 정인승(鄭寅昇)의 일기, 정기세의 연보가 섞여 있다.
의의와 평가
『정기세일록』은 조선 후기와 개항기 양반의 종환 일기로서 반세기에 걸친 19세기의 정계와 당시 생활상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아버지 정원용 시대와 아들 정범조 시대를 이어 주는 자료이자 조선 후기의 정치 문화를 두루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참고문헌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네이버 지식백과] 『정기세일록』 [鄭基世日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임하필기 서
임하필기 서(林下筆記序) [정기세(鄭基世)]
[DCI]ITKC_BT_1432A_0010_000_0010_2007_001_XML DCI복사 URL복사
귤산(橘山) 이 상국(李相國)이 저술한 《임하필기(林下筆記)》가 완성되고 보니, 모두 항목은 11항, 편수는 34편이었다. 내가 일찍이 논의한 바 있거니와, 옛날에 학문을 하는 요체는 다 자기 몸에다 근본을 두고서 사물에서 징험하는 것이었다. 《대학(大學)》의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와 공자(孔子) 문하의 제자가 몸소 통달한 육예(六藝)는 그 조목은 비록 다르지만 실용면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후세에는 이름만을 좋아하여, 처음에는 학술이었던 것이 여러 분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리학이라는 것이 있게 되었고 경제학(經濟學)이라는 것이 있게 되었다. 또 그 아래로 내려와서는 공령(功令)과 사장(詞章)이란 학문이 있게 됨으로써 관직에 나아가는 것과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이 판이하게 둘로 구분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의료(宜僚)의 구슬 놀이와 혁추(奕秋)의 바둑 솜씨가 각각 그 기능이야 다르지만, 정력을 다하고 공부를 다하는 면에 있어서는 이치가 같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나누어진 학술을 누가 하나로 통일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하늘과 사람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고 예와 지금에 대하여 환하게 통달하여 스스로 자부하는 것이 가볍지가 않다. 자신이 직접 재상이 되어서 한 시대를 태평한 시대로 만들어 삼대(三代)의 시절로 돌이키려고 생각한다면 선비가 하는 공부는 바로 재상이 되는 도구이다. 그러나 선비가 재상에 이르는 것만을 온 천하가 다 추구하고 있으니, 재상이 되었다가 선비가 되는 것을 꺼리지 않는 자는 마땅히 옛사람 중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다.
지금 귤산 상공은 탁월한 자질을 가진 데다 해박한 지식을 겸비하여 젊은 나이에 이름이 났고, 중외(中外)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는 20여 년 동안 재상의 반열에 올라 영의정을 맡기도 하였는데, 그의 인품이나 문장은 사람들에게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지위가 이미 높고 그의 학문이 이미 알려졌으니, 마땅히 우뚝하게 스스로를 높이고 다시는 글 쓰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을 듯한데, 매번 한가한 시간이 나면 마음을 가다듬어 글 쓰는 일에 종사하니, 산방(山房)에 쌓아 둔 책 상자가 업후(鄴侯) 이필(李泌)의 서가보다 많았다.
이에 경전(經典)을 근본으로 하고 역사서를 참고한 데다 시문(詩文)도 두루 섭렵하고 고인의 언행도 충분히 갖추었으며, 국조(國朝)의 전장(典章), 항간에 떠도는 패설(稗說), 병가(兵家)의 학설(學說), 명물(名物)의 수효에 이르기까지 탁론(卓論)으로 입증하고 자기의 의견을 덧붙여 모든 사리를 다 갖추고 조그만 장점도 다 바쳤다. 이 책을 보는 자는 마치 많은 옥을 보관하는 창고에 들어갔을 때처럼 현란하게 빛나는 옥들을 구경하기에 겨를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그 귀결점을 요약해 보면 다 일용 행사(日用行事)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벼리를 들면 그물이 펼쳐지듯 조리가 정연하고 학술은 나뉘었으나 근원은 하나이니 들어와서는 선비가 하는 공부가 되고 나가서는 재상이 하는 일이 되거니와, 이것이 실로 옛사람이 학문을 하는 법이며 팔조(八條)와 육예(六藝)가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는 까닭이다.
아, 공이 어찌 문장으로 자처하고자 한 것이겠는가. 자신이 막중한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항상 산림(山林)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상소를 올려 돌아가기를 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때마다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공은 ‘내 몸은 비록 물러가지 못하였지만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라고 여기고서 매번 이 글을 가지고 시주(詩酒)를 즐기는 백낙천(白樂天)에 붙이고 황제의 조서를 작성하는 구양수(歐陽脩)에 견주면서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고 붓 가는 대로 기록해서 그 세월이 오래된 것도 알지 못하고 책의 분량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도 느끼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이 글을 쓰고서 《임하필기(林下筆記)》라는 이름을 붙인 뜻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말로 서문을 쓴다.
임신년(1872, 고종9) 5월에 동래(東萊) 정기세(鄭基世)는 서문을 쓰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동영 (역) | 1999
첫댓글 용흥궁은 오래전에 한번 가본듯한데 기억이 아련합니다
임하필기 잘봤읍니다
서문을 쓴 鄭基世 집안에 큰인물이 많이 배출되었지요
용흥궁의 창건한 용흥궁과 중건 한 모습과 그리고 임하필기 서문까지 지으신 정기세(鄭基世) 공에 대한 글 감사하고 잘 읽었습니다.
군태님의 좋은 정보글 잘공유하고 흔적남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