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동지>(10회)
2008년 5월 31일, 그날 밤의 재희는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한 채 말이 없었다.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동지와 둘이 있게 되면 그녀답지 않게 막무가내로 수다스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의 재희는 평소와는 달랐다. 재희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동지를 바라보며 ‘저 남자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꽂혀 있었고, 그 생각이 그녀를 침묵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그녀의 안에서 생겨난 일종의 갈증 같은 것이었는데, 그날 유독 재희는 그 갈증에 휘둘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연인 사이란 걸 뒷받침할만한 밖으로 드러나는 증거는 그들이 헤어질 때 나누는 입맞춤 정도였다. 재희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면 동지도 따라 일어서고, 방문을 열기 전에 둘은 가볍지만 진지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둘은 아이스크림을 아껴 먹듯 성의를 들인 키스를 나누었고 그 작은 행위로 연인과의 만남을 완성한다는 데 은연중 합의를 본 듯했다. 다만 재희는 그 키스가 조금은 이성적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연인과 헤어지는 순간이 자연스럽기를 바라는 심리적인 고려가 알게 모르게 작용하였으리란 생각에 기인했는데, 그런 생각은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짙어졌다. 갈증은 점차 선명한 지향점을 향해 부풀어 올랐다. 재희는 눈을 감은 채 물이 제 길을 찾아가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갈증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남자의 멋진 가슴을 쓰다듬었고, 남자가 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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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는 손길을 느꼈다. 평소와 다른 격렬한 키스를 나누었고 마침내 미친 듯이 남자를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보았다. 저 남자는 나를 갖고 싶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앞에서 정신없이 수다를 떨고 있을 때나 조용히 한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길 때, 혹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함께 얘기할 때, 자주는 아니지만 그의 눈에서 강한 욕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는 언제나 뭔지 모를 초조한 기색과 함께 무척 복잡한 심사를 드러냈었다. 그리고 저 특별한 남자는 늘 욕구를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언젠가는 나와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며?” 눈을 감은 채로 재희가 물었다. “어머니들끼리 전화하셨구나.” 재희는 천천히 일어나 동지의 곁으로 건너가 앉았다. 짧은 망설임 끝에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꼬대처럼 말했다. “오빠, 나 좀 안아주지 않을래?” 동지는 천정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하는 듯했지만, 결국은 재희를 안지 않았다. 대신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재희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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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야, 사실은 말이야.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은···· 미국에 계시는 이성학 박사, 그분 재희를 많이 좋아하잖아? 훌륭한 분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분에 비해 내가 재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말 두 번째란 건 기억해?” 호흡과 말이 함께 흔들렸다. “·····” 세계 물리학계에서 성학의 박사학위 논문을 주목하기 시작한 후 언젠가 동지는 재희를 떠나보내는 편이 옳지 않을까를 깊이 고심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티끌만큼의 이기적 고려도 없는, 오직 재희만을 위한 생각이었다. 동지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른 채 말을 만들었다.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말의 진의가 재희의 미래를 위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지, 또는 그 걸출한 과학자에 대한 재희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인지 스스로도 모호한 말이었다. “무슨 뜻?” 재희가 물었다. “재희를 위해서도, 또 그분을 위해서도, 모두에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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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뭣 때문에 그분을 위해?” 동지는 지금껏 재희에게서 그토록 복잡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서운함, 원망, 미움, 질책, 심지어는 한심하다는 표정까지 뒤섞인 얼굴이었다. 재희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듯했다. 침묵하는 동안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촘촘하게 짜인 망으로 걸러내는 것 같았다. “진심이야?” 복잡한 감정의 덩어리가 망을 통과하는 동안 모두 걸러지고 슬픔만이 남은 듯, 진심이냐고 묻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 미안해! 미안하다, 재희야!” 동지는 급히 사과했다. 재희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미끄러져 내리고,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재희야!”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의 등을 향해 동지가 이름을 불렀다. 재희는 문을 열어놓고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그러다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침묵이 무겁게 자리를 잡는 동안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농밀한 시선은 두 사람 사이 어느 공간에 정지해 있었다. 그런 상태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뭔가를 작정한 듯 동지의 등 뒤로 돌아가 그의 허리를 껴안았고, 등에 얼굴을 붙인 채로 말했다. ‘또 한 번 그딴 소리 했단 봐라?’ 그 사이에 재희의 목소리는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본래의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첫 번째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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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빠는 그만큼이었구나!”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와 좁은 마당을 건너고, 서예학원 중앙 통로를 지나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망설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동지는 일어나지 않았고, ‘재희야, 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어. 그건 피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고, 이미 난 그 길을 되돌아올 수가 없어. 그리고 너도 그분 좋아하잖아? 어쩌면 나보다 더. 그런 거 아니니?’ 동지는 앉은 그대로 자신을 설득하듯 중얼거렸다. 재희가 동지의 방에서 나와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인기척에 두 사람이 귀를 세웠다. 한 사람은 일 층 거실의 지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들국화 다실의 표창수였다. 창수는 어디선가 시간을 보내다가 조금 전 여기로 왔다. 이 층 동지의 방에 불이 켜진 걸 확인하고 현관문을 밀었는데, 예상한 대로 문은 열려있었다. 늘 그렇듯이 동지와 재희는 지금 함께 있을 것이다. 창호는 들국화 다실로 들어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TV 리모컨을 눌렀다. 걸그룹 ‘쥬얼리’가 'One More Time'을 불렀다. 쫄바지를 입은 여자 넷이 몸을 비틀며 손가락을 위아래로 마주 대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노래의 끝 장면이었다. 창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여기저기 채널을 돌렸다. 그때 탁탁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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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밟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발자국 소리가 들국화 다실 앞을 지나갔다. 잠시 후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을 때 창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10:30분, 연인과 헤어지는 시간으로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현관문을 나간 뒤에 조금 시간을 두고 그도 현관문을 열었다. 저만치 앞서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조금 전에 연인과 사랑을 나눈 여자는 아니란 생각을 했다. 그동안 두 사람을 지켜본 창수는, 둘 사이에는 뭔가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인 사이라면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주체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끊임없이 노출되어야 한다. 그런 건 알려고 애쓰지 않아도 절로 읽혀진다. 동지는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인지 깨닫지 못하는 걸까? 내가 모르는, 여자를 피하는 마음의 병이라도 있는 걸까? 창수는 포도 씨를 뱉어내듯이 우물거렸다. ‘차라리 화끈하게 사랑이라도 해버리면 좋겠어. 무슨 이유로 저런 여자를 구경만 하는 거야!’ 인사동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는 초저녁보다 줄어 있었다. 창수는 재희의 뒤를 따라가는 자신이 역겨웠다. ‘내가 뭐 하자고 이러는 걸까?’ 생각했다. 그는 한없는 지질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순서로 오래 묵은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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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재장착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늘 자신을 무시한 채 돌아갔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걸 얻어본 적이 없다. 자신은 ‘아웃사이더’이자 루저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연코 자신의 책임만은 아니다. 늘 수재 소리를 들었고 서울의 알아주는 대학을 졸업한 그가 사회로부터 여러 차례 외면당한 이유는 공정하지 못한 사회 때문이었다. 그는 H일보 사회부 기자 인양 행세하지만, 이 년 전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로 기자증을 회수당한 뒤 한동안 백수로 빈둥대다가 대학 선배의 소개로 어느 시민단체의 정보수집 파트를 맡고 있다. 그는 명함 두 개를 갖고 다니며 필요에 따라 기자와 시민단체 간부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의 결핍감은 일묵서예를 드나든 후에 더욱 송곳처럼 그를 찔러왔다. 평소의 재희라면 북인사마당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안국역에서 전철을 타야 한다. 그런데 오늘은 북인사마당에서 왼쪽으로 꺾어 광화문 쪽을 향해 간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목적지가 없는 사람처럼 쓸쓸하다. 창수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하늘을 쳐다보며 ‘왜 광화문 쪽이지?’라고 중얼거리고는 재희의 뒤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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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재 주기도 빨라지고, 사건도 조금 빠르게 전개되고 있군요. 소설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사고의 심화가 필수라는 생각을 해암의 글을 읽으면서 느껴봅니다. 때론 수필도 소설적 서사화와 시적 정서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8회부터 9회 10회 읽습니다. 점차 사랑의 사각관계가 시작되는군요. 아! 재희@!
올려놓고 보면 영 아니라서 여러 차례 고치고 또 고칩니다. 이 번이 더 심하군요. 양해바랍니다.
재밌게 전개되는군요. 말초신경 자극제가 있어야....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