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가치판단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다. 요즘 시대의 최고가치는 뭐니뭐니 해도 역시 돈이다. 이런 상황에 돈이 아니라 사후세계를 외치며 죽은 후 인생에 가치를 두라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따돌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같은 결로 공자 또한 그 시절에서 따돌림에 대상이었을 것이다.
“어질구나 안회여! 한 통의 대나무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거리를 가지고 누추한 골목에 살면서도, 다른 이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려 하지 않으니, 어질구나 회여!(옹야편 9장)”
당시에도 가치판단의 최고 기준은 역시 돈, 부유함일 것이다. 하지만 공자가 제일 아낀 제자라 할 수 있는 안회를 공자가 높게 평가한 이유는 그가 돈과 부유함에 가치를 두지 않고 오로지 배우기에 가치를 두었다. 옹야편 2장에서 공자가 안회를 제자들 중 가장 또 유일하게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어찌 생각해 보면 사상은 가치판단의 기준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상들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여러 세계관이 생겼는데 이 여러 사상은 여러 가치판단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은 하나님에게 가치를 두라고 말하고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으로 연결이 된다. 마르크스는 생산가치와 평등에 가치를 두자고 말했고, 프로이트는 무의식속 욕망 해결에 가치를 두자고 한다. 코란은 알라에게, 힌두교는 시바에게 가치를 두자고 말한다. 불교는 득도하는 것에 가치를 두기 원하고 포스트 모던은 내 마음에 가치를 두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은 돈과 성공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니 자연스레 세상은 돈과 성공에 가치를 두게 된다.
이때 공자는 배움과 인에 가치를 두자고 말한다. 논어의 첫 문장부터 배움을 강조하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안회를 제자들 중 제일 아끼고 평가를 높인다. 이 배움은 인과 연결된다. 인의 터득은 배움에서 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배움과 인에 가치를 두는 것이 특별한 이유는 배움과 인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인편 6장 공자는 인을 행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또한 옹야 10장 “선생님의 도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 아닌 능력이 부족합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중도에 그만둔다. 지금 너는 미리 선 긋고 한계를 짓고 있다” 이에 대해 요쌍봉은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데, 걸음이 중도에 이르러 기운이 다하고 힘이 빠져 갈 수 없는 것과 애초에 가기를 포기하는 것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분명 이상적인 군자를 말하고 그 군자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군자가 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그렇기에 나도 처음 논어를 읽기 시작했을 때 공자는 군자라는 이상에 가치를 두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공자의 사상에서 이상적 군자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절대적 기준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군자를 군자 답게 만드는 기반은 배움과 인이 절대적 가치이다. 이 배움과 인의 가치를 극한으로 높인 자가 군자라 평가받을 뿐이다. 이런 배움과 인은 결코 이상적이고 환상적인 것이 아니다. 공자는 모든 사람이 인할 수 잇는 능력이 있고 또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말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목적지까지 가기 힘들 수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무거운 짐을 지고 걸음을 옮길 힘은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다.
옹야 6장 계강자가 공자의 제자들이 정사에 종사할 수 있냐고 묻는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공야장편에서 그토록 냉담하게 대했던 자공 또한 정사에 종사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냐며 높이 평가한다. 또 옹야 14장에서는 축타 같은 말재간, 송조 같은 미모를 가지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재난을 피하기 어렵겠다고 설명한다. 이 구절을 공자가 말재간과 미모를 높이 평가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중요한 점은 공자가 사람을 판단하고 인정함에 있어 그 기준이 높지 않고 오히려 낮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확실하다. 군자답지 않아도 사람은 사람 답게 살수 있고 사람 답게 사는 것, 이것이 공자가 제일 중요하게 가치를 둔 배우고,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절대 모든 사람을 군자로 만들려고 하지는 않는다.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아서 일수도 있고 애초에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기 때문 일수도 있다. 대신 적어도 군자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옹야 11편 공자는 자신의 제자 자하에게 이리 말한다. “너는 군자다운 학자가 되어야지 소인 같은 학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 수는 없다. 효하고, 인하고, 공경하고, 예하며 동시에 높은 위치에서 통치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적어도 내가 학자라면 군자다운 학자가 되어야 하고, 가장이라면 군자다운 가장이 되어야 하며, 아들이라면 군자다운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다운’은 곧 공자의 최고의 가치 배움과 인을 자신의 최고 가치로 두는 사람이다. 배움은 때때로 익히는 것이고, 인은 자기보다 남이 바라는 바, 천명이 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군자다운 학자는 도를 밝히려고 하는 학자이고, 소인 같은 학자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고 하는 학자라고 공안국은 풀이한다.
내가 군자일 수는 없다. 그 시대상 군자가 되는 것은 현대에서는 불가능 하고, 그 시대에도 극 소수 말고는 군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러니 공자는 자신이 맡은 부분에서 적어도 군자다운 삶을 살기를 바랬다. 학자라면 군자다운 학자가, 아들이라면 군자다운 아들이 되어 덕을 찾기에 힘쓰고 부모를 섬기기에 힘쓰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군자는 군자다운 군자 되어야 한다.
오히려 요즘사람들의 가치 기준이 너무 높다고 생각된다. “성공” 얼마나 높고 이상적인 것인가? “돈” 얼만큼의 돈이 있어야지 만족할 것인가?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가치로 두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하나님을 내 삶의 가치로 둔다.”의 허들이 너무 높다. 애초에 기독교 사상에서 인간은 죄인일 진데 조금 더 자신이 무언가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해 헌금을 내고 억지로 선교를 추진한다. 조금 더 내가 하나님에게 가치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포스트 모던 사회인 현재도 소확행이다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그 작은 부분을 얻으면 만족하는 듯싶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복되고 무료한 너무 소소한 행복은 자신이 바라는 이상에 못 미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무언가 다른 행복을 찾으려 오늘도 인터넷을 켜 유튜브를 돌아다니고 수도 없이 인스타 릴스를 내리며 새로운 게임을 찾는 이들이 무슨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에 만족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가? 그런 부분에서 논어는 따뜻하다. 모두가 할 수 있는 배움과 인함의 길이 바로 이상적인 군자다움의 길로 내가 당장도 할 수 있는 확실한 가치를 보여주니 않는가?
누군가는 배움과 인의 가치가 뭐가 당장 할 수 있냐고 물어 볼 수 있다. 특히 인에 대해서 논어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전혀 쉽게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자는 완벽한 인을 원하지 않는다. 배움도 마찬가지이다. 공야장 8장에서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자신(자공)은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이라 하는 자공에게 공자는 그보다 못하다며 자공의 말을 인정한다. 배움에 있어서 자공은 안회만 못하다. 그렇기에 공자는 자공보다는 안회를 훨씬 인정하고 아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공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계강자와의 대화에서는 자공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안회는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고, 나머지 제자들은 하루나 한 달에 인에 이를 뿐이다(옹야 5).” 안회와 다른 제자들은 다르다. 인에 실천이 다르다, 고로 공자가 인정하는 정도도 다르다. 그렇지만 공자는 다른 제자들도 인정하고, 충고하며, 칭찬한다. 배움과 인은 실천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쉽기도 하다. 쉽게 설명하면 단계가 있다. 누구가 시도하면 실천할 수 있는 배움과 인이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즉 천명에 뜻에 따른 재능의 영역도 있다. 그러기에 논어가 최고로 두는 가치는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소확생이자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성공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현대인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가치로 다가 올 수 있다.
누구나 접할 수 있지만 그 고점은 높은 가치인 배움과 인. 정말 이 가치는 진실된 가치일까? 이 가치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 가치를 인생의 최고 가치로 삶은 공자의 인생은 지금 현재 자신들의 마음을 최고 가치를 둔 사람들보다 즐거웠을까? 자신을 최고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나를 내려 놓고 타인을 인정하는 배움과 나의 마음보다 상대의 뜻을 따르는 인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올까? 옹야 다음 편인 술이편은 배움과 인을 최고 가치로 둔 공자의 일상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 공자의 설득을 들어보자 배움과 인을 최고 가치를 두어 주어진 자리에서 군자처럼 산 사람에게 어떤 덕과 즐거움이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