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의 미래상을 그려본다
제17회 수필문학 하계세미나 주제 발표이유식
Ⅰ. 들어가며
미래는 불확실하다. 미래의 예측이나 예단은 더욱 불확실하다. 바로 코앞의 내일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앞으로 다가올 막연한 미래라면 더더욱 그렇다.
인간의 활동에는 그것이 진화의 개념이건 진보나 발전의 개념이건 또 아니면 파행(跛行)이건 어느 시기가 되면 기존의 것에서 변화나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유행이나 어떤 사조 그리고 어떤 새로운 경향도 크게는 이런 패러다임에 속한다.
대체로 이런 현상에 대한 예측이란 그것이 예언이 아닌 이상 과거를 거울 삼으며 현재의 주어진 자료를 바탕하여 미래의 어떤 가능성을 어렴풋이 추측해 보거나 아니면 현재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어떤 가능성을 예표로 삼아 그런 것의 현현화를 예단하는 도리 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우리 수필문학의 미래상을 한번 그려보기로 하겠다. 나의 예측이나 예단이 반 아니 반의 반이라도 맞아 떨어진다면 다행한 일일 것이고 또 이것도 아니라면 미래의 새로운 변화를 미리 생각해 보고 고민해 보는 계기라도 되었으면 한다. 단, 기존의 활자매체로 발표되는 수필의 미래상에만 한정키로 하겠다.
Ⅱ. 두 가지 측면의 미래상
첫째, 장르론상으로 볼 때 ‘단형(短形)수필’, ‘퓨전수필’, ‘전문테마수필’이 대두되어 장르적 독립성을 가지리라 본다. 단수필이나 퓨전수필은 현 단계로 시도나 시험단계에 있는만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당당히 장르적 변별성이 정착될 것이고, 기존의 테마수필은 전문테마수필로 발전해 나가리라 본다.
둘째, 내용이나 주제적 측면에서 보면 ‘지식정보사회수필’, ‘환경생태수필’, ‘민족문화․생활수필’, ‘미래수필’이 본격적으로 대두될 것이다.
1) 단형수필
지금은 인터넷과 디지털 시대다. 긴 글 보다 짧은 글에 익숙되어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속도의 시대를 살며 어떤 것에 오래 매달리지 않는 ‘신 유목민’적 기질을 닮아가고 있기에 짧고 경쾌한 글을 선호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지난 시절과는 달리 독서층이 긴 글 가령 장편소설이나 창작집에 매달리려는 경향이 차츰 사라져가고 있는 시대다.
그래서 그 타개책의 하나로 2004년도에 국내의 시인, 소설가, 수필가등 30여명이 ‘미니 픽션’ 작가 모임을 만들어 어떤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일단 그 문학적 성패는 차치하고 왜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는가에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종래의 소설 길이로서는 독자들의 취향을 맞출 수 없기에 짧고 간결한 것을 선호하는 시대적 분위기에 맞추어 보려는 자구책이라 할 수 있다.
수필분야도 이에 예외일 수는 없지 않나 싶다. 단편소설에 비하면 12,3매 전후의 수필문학은 약 5분지 1에 머물지만 그것도 앞으로는 길다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근년에 수필작단에 더러 5매 수필이 선보이고 있고, 그 이론적 논의도 개론수준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앞으로는 짧은 수필이 크게 성행하리라 본다. 비유적으로 말해 맥시드레스나 미디스컷에서 미니스컷이나 핫팬츠의 유행이다. 이를 나는 ‘단형(短形)수필’의 대두라 말하고 싶다. 달리기 경주에서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란 말이 있듯 우선 편의상 현재의 12,3매의 수필을 ‘중형(中形)수필’이라 칭하고, 그 보다 아주 긴 수필을 ‘장형(長形)수필’이라 부른다면, 5매 전후는 ‘단형(短形)수필’이란 명칭이 바람직 하다. 최단형 칼럼인 신문의 5매 칼럼을 염두에 두고 해 보는 말이다.
그런데 5~6매를 썼다고 무조건 단형수필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馬)은 말이되 조랑말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거기엔 적절히 압축된 내용으로 완성미도 있어야 함은 물론 단거리 경주에서처럼 응분의 순발력과 기교가 최대로 동원되어 흥미 창출이나 새로운 의미부여, 새로운 해석 등으로 촌철살인의 읽는 재미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미래의 수필은 단형수필이 크게 유행하여 독자의 취향을 충족시켜 주리라 본다. 달리기에서 100m 단거리가 육상경기의 꽃이듯 크게 사랑도 받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이쯤에서는 하나의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2~3매의 단단(短短)형은 어쩔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이는 수필일 수는 없다. 인체공학적으로 달리기에서 최대기량 발휘의 최단거리가 100m이듯 5매 전후 이하로는 완성된 작품이 되지 않는다. 흉내일 뿐이다. 가령 정선 명구수필이라면 이런 논의는 해당이 없다. 어느 누가 달리기를 더 세분화해 50m 경주종목을 시험삼아 만들어 보았자 정식종목이 될 리는 없다.
2)퓨전수필
근년에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단어 중의 하나가 ‘퓨전’(Fusion)이다. 문화현상을 설명할 때는 약방 감초처럼 나온다. 음식, 음악, 영화, 기타 예술, 의상패션, 그리고 헤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문화전반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융합, 결합, 연합, 합병, 제휴, 연합체’ 등의 뜻이지만, 이제는 문화현상의 키워드로서 ‘서로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섞어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이란 뜻으로 확대되어 쓰인다.
수필의 경우라면 ‘혼합수필’, ‘혼성수필’, ‘결합수필’이라 이름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점은 그림과 수필의 만남, 음악과 수필의 만남, 영상과 수필의 만남 등속은 퓨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수필의 다른 매체의 이용이지 퓨전은 아니다. 수필의 퓨전현상은 어디까지나 수필의 형식이나 내용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2가지의 퓨전의 형식이 있을 수 있다.
첫째가 시, 소설, 평론이란 문학의 다른 장르와의 결합이나 혼합이다. 이런 이종퓨전은 수필의 태생적 속성이나 특징으로 보아 이미 이루어져 왔다. 수필과 시의 결합이 서정수필로, 수필과 소설의 결합이 서사수필이나 사건수필로, 수필과 평론의 결합이 비평수필로서 각각 그 영역과 영토가 확보되어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태생론적 측면이 아니라 인위론적 퓨전현상이 일어난다면 더욱 과감한 그리하여 문자그대로의 융합수필이 성행할 것이다. 가령 소설장르에 속하는 콩트와 수필의 결합이랄 수 있는 콩트수필도 그 한 예이다. 그렇다면 콩트와 콩트수필은 어떤 차이가 있어야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콩트나 콩트수필의 주인공은 ‘나’나 ‘그’일 수 있지만 이른바 ‘편집자적 논평(주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분할 수 밖에 없다. 콩트가 어떤 사건이나 일의 제시에 끝난다면, 콩트수필은 그것에 대한 편집자 논평으로서 ‘나’나 서술자의 감정이나 느낌을 말하는 경우라 하겠다.
둘째가 수필의 각 장르와 장르와의 자체적(내적) 동종 퓨전이다. 크게는 경수필과 중수필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시적 서사수필, 시적 비평수필, 서사적 서정수필 등으로 나타날 것이다.
수필의 이런 퓨전현상은 생명공학의 발달, 합성에 의한 신소재의 개발 기술 등과도 시대적으로 서로 맞물려 더욱 크게 유행하리라 본다.
특히 퓨전을 통한 새로운 수필형식이나 장르의 개발은 모험이요 많은 문제성도 제기될 수 있는 만큼 변화에 대한 개인취향의 호기심이 아니라면 각고의 노력도 필요할 것이고 또 비평가들의 이론적 밑받침도 필요하리라 본다.
3) 전문테마수필
비유적으로 말해 현재 수필가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종합음식점을 차려 놓고 있는 형국이다.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낀 것을 너도 나도 생산해 내고 있으니 비슷한 소재, 비슷한 내용으로 그것이 그것이다. 맛에 진력을 느끼고 있고 또 더욱 그러리라 본다.
그래서 사려깊고 개척적인 생각을 가진 수필가들은 앞으로 자기 환곡탈태의 시도에서 이른바 ‘전문테마수필’쪽에 관심을 가지리라 보고 있다. 바꾸어 말해 종합음식점 옆에다 자기나름의 브랜드를 개발해 전문음식점을 차릴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문화현상 전반에 관한 개인취향이나 전문지식 나름의 전문테마수필이 되리라 본다. 영화수필, 미술수필, 음악수필, 문학수필, 대중문화수필, 패션문화수필, 성경수필 등이 나오리라 본다.
가령 문학쪽으로만 보자. 시작품을 소재로 한 전문테마수필이 나올 수 있을 것이고 또 소설작품을 소재로 한 것도 나올 것이다. 상상컨대 소설작품의 경우를 보면 국내나 외국의 명작 소설에 대한 다양한 독서체험이 있다면 통시나 공시적으로 다양한 수필소재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연인들의 이별이나 만남의 풍속, 자살의 방법이나 그 장소선택의 공통성문제, 어느 시대의 전형적인 주인공의 직업문제 등등 참으로 재미나는 소재들이 있으리라 본다.
또 새로운 전문 테마기행수필이 나오리라 본다. 교통수단의 발달과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많은 수필가들이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있다. 그래서 여행견문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제는 독자들이 외형적인 견문에 식상해 있다.
따라서 그 타개책의 하나로 테마기행수필이 각광을 받으리라 본다. 가령 세계의 결혼풍속, 식습관이나 식풍속, 인사법이나 인사말, 성문화나 성풍속, 작명풍속, 복식문화, 나체문화, 세계 원주민의 생활풍속이나 관습, 세계 소수민족의 생활이나 관습등에 관한 전문테마수필이 그 내용이 되리라 본다.
4) 지식정보사회수필
지금 우리는 명실상부한 지식정보화사회에 살고 있다. 사회가 크게 변했고 변하고 있다면 응당 변동사회에 관한 사회수필이 자생으로 나올 것이다. 이것이 곧 ‘지식정보사회수필’이다.
지식정보사회는 인간생활에 편리성, 신속성, 효율성, 능률성을 제고시켜 주는 긍정적인 측면은 물론 많다. 그러나 문학은 인간생활의 어떤 문제성 발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만큼 이런 사회의 순기능 쪽보다는 부정적인 역기능에서 더 많은 소재를 찾을 것이다. 가령 비접촉형 문화패턴에서 파생되는 인간성 상실이나 인간관계의 단절문제, 모든 일을 컴퓨터나 정보통신기기에 의존해버리는 의존성의 팽배와 두뇌활동의 퇴화문제, 정보기기 사용에 따른 신체․성격의 변화문제, 인터넷의 이성교제 수단이용과 음란물에 의한 성의식의 변화와 모방범죄문제, 가족생활과 가족관계의 변화문제, 감각문화의 확산과 탐닉문제, 타인 배려나 공동체 의식의 감소문제, 사이버폭력이나 허위사실 및 유언비어 유포문제 등등 실로 많은 문제가 이미 대두되어 있고 또 크게 대두될 전망이다.
이런 문제점들이 곧 바로 지식정보사회수필의 소재나 주제로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리라 본다.
5) 환경생태수필
환경생태 문제는 21세기를 사는 인간들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인류의 생존문제와 바로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수필가들도 이런 심각한 환경생태 문제를 지성인으로서 대사회적 역할이나 책무의식에서 그냥 방기해서 안되겠다는 자생적 의식 변화가 크게 일어나리라 전망된다. 지금도 일부의 수필가들이 개인적으로나 또는 녹색문화운동 차원에서 이른바 환경생태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 더러는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더욱 큰 힘을 얻어 ‘환경생태수필’이란 장르가 본격적으로 대두할 것이다. 환경의식이나 윤리의식을 고취하는 수필, 환경사회학적 상상수필, 생태주의적 문명비평의 개인 작품들이 다발적으로 선보일 것이며 또 ‘환경생태수필가회’ 같은 것도 생겨나리라 본다. 지금 수필계를 둘러보면 출신 문예지 별로 단지 친목을 다지는 연고식 모임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명실상부한 어떤 이슈나 이념지향적 동인활동이 새로운 운동차원에서 많이 생겨나리라 볼 때 그 중 가장 시대요청적인 것이 바로 환경생태문제를 다루는 에꼴(유파)식 수필운동이 되리라 본다.
6) 민족문화 및 생활수필
가칭 ‘민족문화 및 생활수필’이라 해보았다. 한마디로 ‘우리것’의 재발견이나 재해석을 통해 ‘우리것’의 장점이나 가치성을 찾아보는 수필이다. ‘민족문학’이란 용어가 있듯 약칭해서 ‘민족수필’이라 해도 좋을 듯 싶다. 그 소재는 물론 우리의 정신문화, 생활문화, 관습이나 제도, 풍속, 생활의 지혜, 전통적인 생활도구나 용품 등등이 될 것이다.
국력과 ‘자기것’의 가치나 장점 찾기가 함수관계가 있다고 볼 때 앞으로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된다면 자기각성에서건 정체성 찾기에서건 ‘우리것’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많은 수필가들이 글을 쓸 것이다.
근래에 나는 우연히 북미 원주민 이른바 북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해 본 적이 있다. 백인들에 의해 야만인으로만 치부되었던 선입견이 완전히 수정되었다. 침략자인 백인사회에서 볼 수 없었던 너무나 많은 장점들을 발견하고 놀라고 놀랐다.
그렇다면 이른바 오천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인 만큼 그 동안 간과했거나 방기했던 많은 장점들이 새롭게 발견될 것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이나 새로운 의미부여를 해보면 얼마든지 많은 장점들이 발견될 것이고 또 이를 수필화 할 수 있을 것이다.
7) 미래수필
‘미래수필’이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 높은 미래의 일을 상상해 보거나 예단이나 예측해 보는 미래감각의 수필을 말한다. 더 나아가 미래 공상수필도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리라 본다.
이런 수필은 물론 시제(時制)상의 기준에서만 보면 과거형 수필이나 현재형 수필과는 대조되는 수필이다. 현재까지의 우리 수필은 추억일변도의 과거형수필, 현재의 일들이나 경험이 소재가 된 현재형 수필 아니면 과거의 일이나 현재의 일을 대비 또는 조합시켜 본 과거와 현재의 접속형 수필이 주류를 이루어 왔고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삼방(三方) 통행식 수필에서 탈피도 해보자는 자생적 노력으로 미래수필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소설에서는 일찍부터 과거소설(역사소설), 현재소설(시대소설), 미래소설(미래가상소설이나 공상과학소설)이 있어왔던 점을 참고삼아 지금껏 아무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미래수필들이 앞으로 많이 나오리라 예상된다.
Ⅲ. 나가며
지금까지 언급해 온 단형수필, 퓨전수필, 전문테마수필, 미래수필이 자생적 미래상이라 할 수 있다면, 지식정보사회수필, 민족문화․생활수필, 환경생태수필은 자생적인 동시에 시대적 소명의식에서 나올 수 있는 미래상이라 할 수 있다.
아시다시피 지난 시절에는 수필이 수적으로 열세 장르였지만 이제는 시 다음 주종 장르로 진입해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많은 수필가들이 탄생하여 명실상부한 수필의 시대를 맞게 되리라 본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런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각별한 결의를 다져야 할 때이다. 수필이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다. 낡은 수필관도 버려야 할 것이고, 진일보한 수필의 환골탈태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장르개발, 새로운 소재개발, 새로운 주제개발 그리고 이에 부응하는 새로운 작법개발을 통해 ‘산문문학의 꽃’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면 한다.
이 글이 다시 한번 더 말하건데 앞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필의 미래상 정립에 조그마한 도움이나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출처: https://jongkuk600.tistory.com/13761146 [작은 부엌 부뚜막: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