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30
5월19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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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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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z5SKNEZpOY&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요일 매일미사 ㅣ 배한욱 요한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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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록 작은 목소리라 할지라도 기도 안에서 서로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오늘날 너나 할 것 없이 가장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공동체로 우러러보며 닮기를 원하는 공동체가 있으니, 곧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도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열심한 유다교 신자로서 율법학자요 바리사이로 살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가입한 이후, 자신들의 눈으로 볼 때 정말이지 납득하기 힘든 일을 목격했습니다.
새로운 신자들 가운데, 특히 이방인이었다가 그리스도교인이 된 사람들 가운데, 끝까지 할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통 유다인들은 강경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사도행전 15장 1절)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식습관이 달랐던 관계로 유다 전통과는 상반되는 음식들, 예를 들면 제사상에 올라갔던 음식들, 유다 관습과는 다른 방식으로 도축을 한 짐승의 고기를 먹는 문제는 정통 유다인들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는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서의 갈등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문제가 거듭 거론되고, 논쟁이 되다 보니 사도들은 이른바 예루살렘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의 사도로서 먼 곳에 파견 나가 있던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옮겼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그간 돌출된 다양한 문제점들과 현안들에 대한 신랄하고 솔직한 대화가 계속되었습니다.
오랜 토론 끝에 수제자 베드로 사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임의 결론을 발표합니다. 수제자로서의 고민과 지혜가 돋보이는 발표문입니다.
강경파인 정통 유다인들의 견해도 적극 경청해서 반영하고,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의견에도 마찬가지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일종의 중재안이랄까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사도행전 15장 19~20절)
비록 작은 목소리라 할지라도 기도 안에서 서로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적절한 중재안을 찾기 위해 공의회도 개최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는 초기 교회 공동체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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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1UeeVAZ3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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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지옥일까, 혼자가 지옥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당신도 제자들을 사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관계를 제자들과도 이루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공동체에는 ‘법’이 있습니다. 이 법에 따라 그 공동체가 하느님 삼위일체 모습을 닮던지, 아니면 모기떼와 같은 모습을 닮든지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수준에 따라 그 구성원들이 느끼는 기쁨도 다릅니다.
하느님 삼위일체 공동체의 행복은 완전한 사랑에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이란 상대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교회도 당신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법을 따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그 공동체에 속해서 오는 기쁨이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제자들도 똑같아 느끼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행복을 공동체에서 느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느끼는 행복보다 그 의무를 수행하는 고통이 더 크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더 랍스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한 주인공이 이혼을 통보받습니다. 이런 경우 그런 사람들은 한 호텔로 끌려갑니다. 그 호텔 안에서 일정 기간 안에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각자 살아남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혼인합니다.
이런 것이 싫은 주인공은 그 호텔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몰래 숨어 혼자 살아가는 사람 중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이 사실을 안 독신자 대장은 여자의 눈을 잃게 만듭니다. 이 사회는 결혼해서 살려면 공통점이 있어야 합니다. 단지 난시라는 것만이 공통점이었는데 이제 둘은 공통점이 없어진 것입니다. 남자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자신도 눈을 잃어 눈이 보이지 않게 되던가, 아니면 랍스터가 되어 동물처럼 100년을 살던가.
이제 우리의 선택이 남았습니다.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에 참여하든지, 아니면 솔로의 삶을 지향하여 고생 안 하고 솔로 지옥에 갇힐 것인지.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이유는 관계를 맺음이 혼자 있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닮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관계 맺으시는 것처럼 타인은 지옥이라면 혼자 지내는 것보다 관계를 맺어감이 더 행복합니다. 1997년 허난성, 당시 나이 50의 노총각 장 솽치 씨는 쓰레기를 주워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겨울 짚 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4개월 된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자신도 고아로 자란 장 씨는 가족이 없는 슬픔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아기의 아빠가 되어주기로 결심합니다. 하얀 비둘기란 뜻의 ‘장 백기’로 딸의 이름을 짓고 혹시 친부모가 백기를 찾을지 몰라 재산의 절반을 털어 딸의 증명사진도 찍어둡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딸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먹을 것도 없으면서 지극정성으로 백기를 돌봤지만 늘 부족했습니다. 사춘기가 된 백기는 아빠를 원망했고 아빠는 그때마다 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하지만 백기가 상처받을까 봐 여전히 버려졌던 아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백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커가면서 아빠와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을 한 백기는 결국 아빠가 버려졌던 자신을 거둬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준 아빠에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백기는 도시로 나가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리고 올해 스물넷이 된 백기는 놀랍게도 연 매출 190억에 달하는 한 회사의 CEO가 됩니다. 이제 백기는 74세가 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큰 세상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소망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자랐습니다. 베이징에서 창업하여 7년 만에 사장이 되었는데 지금은 회사가 1억 위안(약 190억) 정도의 가치가 됩니다.”
그녀는 아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예 캠핑카를 사서 아빠와 함께 세계를 일주하고 있습니다. 또 연애 한 번 못하고 평생 혼자 산 아빠를 위해 결혼도 시켜드렸습니다. [출처: ‘버려졌던 갓난아기의 보은... 노총각 아빠에게 일어난 기적’, 유튜브 채널, ‘엠빅뉴스’]
장 백기 씨를 예수님이라 가정하고 장 솽치 씨를 하느님 아버지라 가정해 봅시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람의 아들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행복을 모르고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드님을 부르셔서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세례 때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은 장 씨가 딸 백기에게 준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공동체는 법이 있습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합니다. 그만한 사랑을 받았으면 그만한 사랑을 주어야 하는 게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그 보답을 하기 싫으면 그냥 공동체에서 오는 소속감의 행복을 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아버지의 법을 따랐습니다. 백기 씨도 아버지께 받은 것을 보답하기 위해 피땀을 흘려 회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드립니다.
이 가운데 한 여인이 또 이 공동체의 행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백기 씨가 아빠에게 소개한 여인입니다. 그 여인도 이 공동체의 행복에 참여하려면 분명 백기 씨가 자신에게 베푼 대로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의 행복은 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사랑에 보답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 공동체의 행복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참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우리가 성당 공동체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가족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도록 사랑의 법으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그 공동체에 들어오고 싶어서 줄을 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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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9-11: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처럼,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아들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 그러한 사랑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신 분이시다.아버지의 말씀을,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써, 우리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참여하라고 하신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며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라는 초대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표지라면, 사랑이 없을 때는, 우리를 완전하게 하는 믿음과 계명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이 없다면 계명을 지키고 의로운 행위를 하더라도 또한 은총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더라도 그 일들은 단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으며,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을 닮으려 노력하는 사람은 교만도 자랑도 없이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서 참된 영광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순명을 변함없이 드리며 항상 감사한다. 이런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더 큰 영광을 받을 것이다. 당신이 가시는 것은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그들과 결합되어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게을러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축복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8절)고 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이 말씀은 당신께 힘이 되는 기쁨이 우리에게도 힘을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때문에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그리고 충만하게 하시려 한다는 것은 이 기쁨이 그분과 우리의 나눔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기쁨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분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즉 “세상 창조 이전에 우리를 선택”(에페 1,4)하실 때에도 이 기쁨을 두고 즐거워 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당신의 지혜로 우리를 보고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당신의 예지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즐거움이었고 그 기쁨은 이미 충만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언제나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기쁨을 차지하고 충만히 누리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끝까지 해야 얻을 수 있다.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나 자신과 끊임없는 싸움을 하여야 한다. 언제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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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세 신부님<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말씀은, ‘사랑’이란 무엇인지, 또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랑입니다.(요한 3,35) 그처럼 ‘사랑’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 마음 그대로 모든 것을 내주는 일입니다. <지금 말하는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일치하려는 ‘의지’이고, 일치를 이루는 ‘힘’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주시고 예수님께서도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바치심으로써, 아버지와 예수님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 일치가 바로 완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에 인간들을 참여시키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또는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현재 진행 중인 사랑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똑같이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는 말은, 구원이 완성된 상태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요한 17,24),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한데(요한 15,4), 여기서는 ‘노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원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나를 사랑하여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또 이 말씀과 앞의 4절에 있는 “내 안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에 들어 있는 ‘머물러라.’라는 말만 보고서, 사람들이 당신 곁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붙들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부활 소식을 알리라고 마리아를 사도들에게 보내셨습니다.(요한 20,16-18) 예수님만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또는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인가? 10절의 말씀이 그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계명’은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가리킵니다.(요한 15,12)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이라는 말씀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또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신다는 말씀은, 오직 ‘아버지의 뜻’의 실현을 위해서만 사시고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인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되어 있고, 그것은 곧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나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첫 번째로 할 일은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 즉 ‘사랑 실천’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첫 번째로 할 일인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믿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사랑 실천’이 첫 번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체조배나 묵상이나 묵주기도 같은 것은 하지 말고 사랑 실천만 열심히 하라는 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미사 전례도, 성체조배도, 묵상도, 묵주기도도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도만’ 하고 사랑 실천을 안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새 힘을 얻고, 그 힘으로 살고, 그 힘으로 일합니다. 기도만 하고 일을 안 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도는 하지 않고 일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받지 않고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실패의 지름길이 됩니다.> 여기서 ‘서로’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함께 믿고, 함께 사랑을 실천해서, 함께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서로’라는 말을 ‘내가 먼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사랑은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일의 결과, 또는 그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쁨’은 ‘구원이 완성된 사람’이 누리게 되는 기쁨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구원의 완성 자체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요한 17,13)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이 완성될 때 그 기쁨을 누리겠지만, 그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지금의 신앙생활에서도 그 기쁨을 체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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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건강한 세포들은 자신들의 영양분을 이웃의 세포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병든 세포들은 자신들의 영양분을 나누어 주지 않고, 이웃 세포들의 영양분을 받아들이기만 한다고 합니다. 비대해진 세포는 결국 슬픈 종말을 맞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지체들은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대와 나눔은 건강한 몸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위대한 제국이 망하는 과정은 외부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문을 열고, 다른 문화와 다른 민족들을 수용하고, 받아드릴 때는 더욱 발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을 닫고, 외부의 문화를 거부하고, 다른 민족을 탄압할 때는 고인 물이 상하듯이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동생 수녀님은 참 여러 곳에서 소임을 하였습니다. 서울교구, 춘천교구, 인천교구, 부산교구, 수원교구, 마산교구에서 있었고 지금은 다시 서울교구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문득 사제들도 그렇게 인사이동을 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어떤 교구는 사제가 많아서 인사적체가 심각하고, 어떤 교구는 사제가 적어서 사목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사이동을 할 수 있다면 한국교회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 같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조건에는 필요조건이 있고, 충분조건이 있고, 필요충분조건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필요한 조건입니다.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본당에서 주최하는 행사와 전례에 참석하는 것은 충분한 조건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 미사에도 참석하는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에서 신앙이 먼저입니다. 이런 분들이 많은 본당은 활력이 넘치고, 사목자에게도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 성녀는 예수님께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한다면, 건강보다 아픔을 택한다면, 장수보다 단명을 택한다면 이는 신앙생활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입니다. 순교자들은 바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성인 성녀들 또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여러분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입니다.” 행복에 대한 지침서도 많습니다. 건강에 대한 지침서도 많습니다. 재물에 대한 지침서도 많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는 행복해지기 어렵습니다. 건강해지기 어렵습니다. 재물을 늘리거나 지키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책의 내용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신앙 안에서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권고나 부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겸손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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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인간(人間)’이란 한자어에는 서로 의지한 ‘두 사람(人)’이 서로의 사이, 곧 ‘차이(間)’를 존중해 준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 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평화롭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초기 교회의 유다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에는, 할례 전통을 지키려는 이들과 이방인들이 체험한 복음의 기쁨 사이에 생겨난 대화와 타협을 통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의를 찾아가는 여정이 엿보입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이 옳다고 받아들이는 ‘합의’를 통해서 드러나기도 합니다. ‘합의’야말로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공동선을 찾아가는 지혜의 여정인 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예수님의 사랑 법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아드님을 향한 사랑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금수저 같은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자식에 대한 편애와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우리 시대의 부모들과 달리, 하느님께서는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께서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죄와 죽음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신 ‘참된 자유’를 그대로 받아 주신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랑은 거짓 타협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공감입니다.
교회의 사목이 하느님의 차별 없는 사랑을 오랜 전통과 관습,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로막아 분열을 일으키고, 공동체의 기쁨이 되지 못한다면, 교회 또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바리사이의 분신이 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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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이웃에게 생활로써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상대방에게 관심을 두고 그를 인정해 주는 자세가 먼저 필요하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나보다 더 훌륭해서도 아니고, 더욱이 그를 사귐으로써 어떠한 이익이 있어서도 아니지요. 우리 모두를 참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의 약점과 결점을 그 사람만의 약점이나 결점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의 약점을 나의 약점으로 받아들이는 넓은 포용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 상대방을 이해하며, 부족한 점은 서로 보완해 나가야만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남을 인정하고 섬기는, 그러한 사랑이 없는 곳에는 미움과 무관심만 있게 마련이지요. 무관심과 미움은 우리를 서로 갈라놓고, 끝내 영적으로 눈멀게 합니다.
그러므로 한 번쯤, 나의 가정과 직장, 이웃을 살펴보고, 그들에게 어떠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사랑을 적극적으로 나누지 않을 때, 하느님의 사랑도 우리와 함께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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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세형 유스티노 신부님]
오늘 아침에 가족들과 축복기도를 하셨나요?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벗어 던지고 축복기도를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이 기도가 우리 가족을 얼마나 사랑의 일치로 이끄는지 그 실례를 들려 들이겠습니다.
어느 날, 한 형제님과 미사 후에 대화를 나누다가 저에게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 시킨 대로 저는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아내와 자녀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간혹 잊어버릴 때는 문자로 축복을 꼭 보냅니다.
3개월 정도 했는데 우리 가정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선 내 자신입니다. 아주 짧은 축복기도이지만 그 기도를 통해서 내가 주님께 축복받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집안 분위기입니다. 아침마다 전쟁터처럼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따뜻해 졌습니다. 며칠 전에는 감동으로 울었습니다.”
“아니, 왜요?” 그 형제님은 지금도 벅찬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그게 말입니다. 며칠 전에 회사에서 언짢은 일이 있어서 술을 한 잔하고 들어왔습니다. 전에는 제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인사만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화가 더 납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녀석들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막 잠이 들려고 했는데, 녀석들이 제 방에 들어오는 겁니다. 아마 제가 자나보다 하고 생각했겠지요. 저는 눈감은 채 모른 척했지요.
그런데 첫째는 제 오른손을, 둘째는 제 왼손을 살포시 잡고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데 꾹 참았어요.
아이들이 나가고 난 뒤 감동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아! 이것이 가족의 사랑이구나. 그래! 내일 아침에도 기쁘게 하루를 맞이해야지. 주님 감사합니다.”
그 형제는 신명나게 가족자랑을 했습니다. 저도 물론 형제처럼 기뻤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은 표현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도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표현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예수님의 사랑과 가족의 사랑입니다. 항상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기쁨의 충만으로 가족을 향한 사랑을 축복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일터로 확장시키십시오. 특히 지금 나와 불목의 관계에 있는 형제를 향해서 축복의 기도를 행하십시오.
“주님께 노래하여라, 영광으로 가득 차신 분!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셨도다.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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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 사랑 안에 머물다>
요한 15,9-11 (나는 참포도나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물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때로 너무나도 아픈 까닭은
오직 그분처럼 사랑하여야만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너무나도 아프더라도
그분 사랑 안에 머물고픈 까닭은
오직 그분 사랑 안에서만
그분처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물며
그분처럼 사랑하고픈 까닭은
그분과 함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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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받은 사랑을 기억하라>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이미 받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머물게 되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간에 사랑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13,35)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사랑 안에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머무르도록 성모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쁨은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눔으로써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혹 사랑이 순수하지 못하고, 어떤 기대심리나 보상심리가 포함되어있다면 사랑이 말라버릴 것이고, 또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아버지를 향할 때 결코 사랑이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 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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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시고 하느님 아버지께 마지막 기도를 올리시려고 올리브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함께 간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태 26,38) 하고 말씀하신 뒤,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루카 22,41)에 혼자 가시어 근심과 번민에 휩싸여 기도하십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그렇게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는 곳에는 ‘겟세마니 대성당’이 자리해 있고, 예수님의 당부에도 눈이 무겁게 감겨 제자들이 잠들어 버렸다는 곳은 ‘사도들의 동굴’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무를 때, 사도들의 동굴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성지 순례객이 아니어서 여유 있게 그곳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제 나름대로 그렇게나마 실천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용히 앉아 기도하던 제 눈에 한쪽 벽에 새겨진 작은 글씨가 들어왔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리스 말로 “내 안에 머물러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곳을 다녀간 수많은 순례객 가운데 누군가가 동굴 한편에 새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잠들어 버린 제자들의 마음에, 아니 제자들처럼 여전히 잠들어 있는 자신의 마음에 예수님의 그 말씀을 새기고자 하였던 그이의 마음에 제 마음도 가 닿았습니다.
어제부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 15,4)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저 그분 앞에 앉아 있는 것만이 그분 안에,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우선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많은 일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흘러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잠시 그분 앞에 멈추는 것! 그렇게 멈추어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으로 말입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 주시는 기쁨이 솟아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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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15,9)
오늘 복음(요한15,9-11)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5,9.11)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궁극적인 이유이며,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갖추고 있어야 할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첫째요 먼저입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이 그분의 육화(성탄)와 땀(공생활)과 십자가 수난과 죽음으로 드러났는데, 이 큰사랑 안에 머물러야 믿음의 결실인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서, 그 머뭄의 결실인 성령과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미사에 자주 참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하고, 묵상을 하고, 복음을 가까이 하면서 사랑을 실천합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가? 얼마나 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기 위해 나의 소중한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가? 그래서 얼마나 나의 삶이 기쁜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내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먼저 너에게 손을 내밀 수 있고, 너를 용서할 수 있고, 너와 화해할 수 있습니다. 그 영적 신앙행위의 결실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오늘 저녁에는 배둔공동체가 미사와 함께하는 성모의 밤을 갖습니다. 신앙의 충실한 모범이신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삶을 좀 더 닮을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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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피츠버그 대학 학자들은 관심과 외로움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은 건강 악화와 조기 사망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상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사회적 접촉을 장려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 관심 기울이기 운동을 제시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관한 관심과 배려를 하루 20분씩 하는 것입니다. 2주 후, 성실히 이 운동을 따른 사람은 외로움을 덜 느끼고, 외롭다는 느낌이 1/4 정도 줄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외롭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외로움은 자신의 감정입니다. 실제 혼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자기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날 배려해주고 관심을 주면 좋겠지만, 어지간해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먹고 살기에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이에게 관심과 배려를 베푸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자신을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나’를 스스로 살리는 것입니다. 관심과 배려라는 사랑은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느끼는 것은 내 편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진정한 내 편은 ‘나’뿐입니다. 부모, 형제 역시도 따지고 보면 ‘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가정 안에서도 외로움과 고립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우리 편이 되어서 사랑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외로움과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머물 수가 있을까요? 우리도 사랑을 실천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주님과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 받기만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랑이 아닌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당연히 상대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그 사랑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의 외로움과 고립에서 벗어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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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분별의 잣대>
-사랑은 은총, 선택, 공부, 훈련이다-
아마 사랑만큼 많이 쓰이는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제 평생 강론중 가장 많이 사용한 주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서 사람입니다. 사랑-삶-사람, 흡사 한 어원에서 기인한듯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은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은 사랑 결핍에서 시작됩니다. 사랑받고 사랑할수록 정체성 또렷한 삶에 자존감 높은 삶일 것입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라는 제 졸저의 책명입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공부에는 끝이 없어 사랑에는 우리 모두는 언제나 초보자라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 코린토 1서 13장 앞 몇구절입니다.
“내가 인간의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가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13,1-3)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공허하고 허무할 인생일 것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이니 사랑은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성사, 사랑의 관상, 사랑의 기적, 사랑의 찬미, 사랑의 순종, 사랑의 분별, 사랑의 침묵, 사랑의 신비등 사랑이 붙는 단어도 참 많습니다.
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희망의 원리>라는 책에서 희망에 대해 다섯으로 정리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희망대신 사랑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사랑으로 바꿔 읽어 봅니다.
1.인간은 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사랑을 먹고 산다.
2.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미 삶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3.사랑이 힘이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도 삶을 포기하지만 사랑이 있는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극복하게 된다.
4.사랑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5.사랑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행복을 약속해 준다.
사랑과 깊은 결속 관계에 있는 희망입니다. 참으로 희망이 있을 때 사랑도 싱싱할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하는 바 사랑도 희망처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생 배워야 하는 사랑이요 평생 훈련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특히 우리 믿는 이들은 사랑에 있어 평생학인이요 평생훈련병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바치는 사랑의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시편성무일도 공동전례기도시간은 그대로 사랑의 공부시간이자 훈련시간입니다. 그러니 사랑은 은총이자 선택이요, 공부이자 훈련입니다. 평생 사랑을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사랑의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도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회자되는 말도 있듯이 정말 날마다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사랑이요, 사랑에는 예외없이 평생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 아닙니다. 눈먼 맹목적 사랑, 이기적 사랑, 광신적 사랑도 많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아가페 사랑으로, 즉 집착없는 초연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으로 정화되어야 할 우리의 육적, 이기적 사랑입니다.
이래서 사랑 공부요 훈련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사랑은 바로 이런 아가페 사랑입니다. 어제의 참포도나무 비유에 곧장 이어지는 사랑 안에 머무르라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 공동체를 이루는 결정적 요소가 바로 이런 아가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사랑의 기준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의 순수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 안에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고요히 머무르는 시간은 바로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른다 믿고 머무름의 훈련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대문호이자 시성이라 칭하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고백도 참 감동적입니다. 파우스트의 고백이지만 괴테의 고백입니다.
“순간이여 머물러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
순간의 머무름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한 괴테같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의 순간에 머무를 때 우리 역시 아름다워집니다. 모든 관상기도 시간이 바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치유 받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저절로가 아닌 계명을 지키는 수행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때 비로소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게 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사랑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이니 참으로 사랑밖에 길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사랑의 기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충만입니다.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의 기쁨으로 바꾸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맑고 깨끗한 순수한 사랑은 자체가 지혜입니다. 바로 사랑에서 분별의 지혜도 나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대가, 분별력의 지혜의 대가가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두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입니다. 두분의 분별력의 지혜가 참 통쾌하고 고맙습니다. 불필요한 짐을 덜어 가볍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눈밝은 지혜로운 사랑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대적 공감을 갖게 하는 두 사도의 사랑의 판단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 다고 믿습니다.”
사랑의 대가, 베드로 사도의 권위있는 말씀에 온 회중은 쥐죽은 듯이 잠잠해졌다 합니다. 이어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통해 일으키신 표징과 이적들에 대해 증언하자 지체없이 분별의 대가 야고보 사도가 상황을 깔끔히 정리합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의 부담을 최소화한 아주 적절한 절충의 타협안입니다.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
두 사도의 분별의 사랑이, 분별의 지혜가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지요! 두분 사도는 바로 늘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았기에 이런 멋진 판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살게 하시며 참 좋은 분별력의 지혜도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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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T-dCwrRd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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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 11)
머무름은
사랑의 참된
관계이며
관계는
사랑의 참된
기쁨이다.
애타게 찾던
사랑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다.
충만한 기쁨에
이르는 길을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통해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에게
충만한
기쁨이 있다.
머무름은
참기쁨으로
채워지는
참된 사랑의
새로운
방식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머무름의
주님이시다.
머무름은
관계맺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관계맺음은
받아들임의
참기쁨이다.
참된 기쁨은
과거의 기쁨에
갇혀있지 않다.
살아계신
하느님에게서
얻기에
기쁨은
언제나
살아있는
기쁨이 된다.
사랑은
가장 좋은
머무름이며
가장 좋은
기쁨이다.
온 마음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
머무름의 복음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쁨이다.
우리의 기쁨을
곱씹어 보는
성모님의 달이다.
지극한 사랑
지극한 기쁨
지극한
머무름의
선물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서로를
받아들이는
머무름을
선물로 주신다.
최고의 기쁨은
함께하는
머무름의
참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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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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