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8월 원효로 1가의 한 고급 주택에서 살인 사건이 발견됐다., 그 집에 살고 있었던 건 일흔 한 살의 윤씨 노파와 열 아홉의 가정부, 그리고 여섯 살의 양딸. 그 셋은 망치에머리를 맞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현장이 발견된 것은 이미 그들이 죽은 뒤 여러 날이 지난 뒤인지라 시신은 푹푹 썩어들어가고 있었고 그 시신들에는 구더기들이 드글거리고 있었다. 한 형사의 회고에 따르면 시체에서 썩은 물이 흘러나와 종아리를 덮을 지경이었다니 그 참상이야 더 말할 것이 없을 것 같다.
경찰은 수사 끝에 윤 노파의 조카며느리 고숙종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아파트를 사는데 돈을 보태 달라는 고숙종의 청을 윤 노파가 매몰차게 거절하자 “차라리 죽여 버리고 자신도 죽어 유산이나 받게 하자는 마음으로” 망치를 휘둘렀고 현장을 목격한 가정부와 양딸까지 죽여 버렸다는 것이다. 자백이 증거의 여왕이던 시절이었다. 고숙종은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으며 자신도 죽고 싶다며 울먹였다. 자신이 다 저지른 범죄이고 빨리 자신도 죽고 싶다는 자백을 신문에서 읽은 사람들은 참 모진 여자도 다 있다 싶었지만, 당시 자랑스럽게 인터뷰를 한 용산경찰서장의 인터뷰에서부터 좀 기이한 부분이 있었다.
“고씨가 그동안 알리바이를 12번이나 번복하고 결정적인 증거확보가 안돼 수사에 애로가 많았다. (즉 알리바이 번복이 주요한 혐의였으며) 고씨가 범행 당시 입었던 원피스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자백내용과 정황 증거등이 공소유지에 충분할 것으로 확신한다” 망치로 수십 번을 내리쳐 세 사람을 죽인 이의 옷에서 혈흔은 나오지 않았지만 자백과 정황이 공소유지에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어이가 없어도 분수가 없게 없는 경찰서장의 인터뷰였다.
더 황당한 것은 죽은 윤 노파의 예금 증서를 담당 형사가 빼돌렸다가 발각된 일이었다. ‘하 형사’로 기억에 남는 그는 현장감식반으로 투입되어 수사를 하다가 통장을 훔쳐 덜미를 잡혔다. 범인의 행적으로 보고 열심히 수사하던 경찰은 자신의 수족에 의해 뒤통수를 걸판지게 얻어맞은 꼴이 됐다. 줄줄이 사표를 내고 경찰 총수의 코가 땅에 닿았으며 뼈를 깎는 반성이 뒤이었으나 여전히 범인은 고숙종이었다.
1심에 등장한 고숙종은 거의 허리를 쓰지 못했다. 고숙종은 고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경찰은 터무니없다며 원래 고숙종이 허리 디스크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허리 디스크가 있는 여성이 세 명의 머리를 망치로 두들기고 그것도 모자라 그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건 아무리 봐도 어거지였다. 이때 검사는 정상명. 동명이인인지는 모르나 노무현 대통령의 동기였고 참으로 팔자 센 검찰총장이었던 그 사람과 이름이 같다. 그리고 그 검사의 팔자도 기구했다.
1심 재판부 김헌무 판사는 사형을 구형한 검사의 논고를 거부하고 무죄 선고를 내린다. “피고인이 검찰에서 한 자백의 임의성은 인정되나 현장에서의 객관적 상황과 모순된다......” 나는 그 다음날 신문을 장식한 고숙종 무죄 뉴스를 선명히 기억한다. 그때 그녀의 남편과 딸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던 것은 물론, 그의 친정 아버지는 “대한민국에 명판사가 나왔다.”며 감격에 겨웠다. 실제로 김헌무 판사는 ‘자백이면 장땡’이라는 관행에 제동을 걸고 증거 없는 자백은 허섭 쓰레기일 수도 있음을 판결로 선언했다. 고숙종 여인은 이후 대법원까지 진행된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경찰을 상대로 고문에 대한 피해보상 소송까지 제기하여 이긴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단은 무죄였고 고숙종 여인은 경찰에서 당했던 그 무지막지한 나날들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그런데 하나 의아한 것은 민사소송에서는 승리했지만 고숙종을 고문했던 경찰들은 아무런 형사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 기억이 틀리길 바란다) 고문받지 아니할 권리가 있는 대한민국 국민을 ‘고문’하여 ‘자백’케 하고 사형 선고까지 받게 만든 고문의 주체들은 그 서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더 당황스러운 것은 ‘명판사’ 김헌무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그는 고숙종 사건 외에도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 혐의자에게 무죄 판결을 내릴 정도로 합리적인 면모를 과시한 것이 분명하지만 고숙종 여인 사건 석 달 전, 말도 안되는 증거로 ‘진도 간첩단’ 사건에 휘말린 박동운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도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노무현 정권 하의 과거사 진상 규명위원회에서 국정원이 초기 수사 기록 재검토만으로 조작이라고 인정한 유일한 사건”이었다. 거기서 김헌무 판사는 고문을 받았다는 피고인의 바지를 올려서 보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검찰이 대한민국의 권력을 혼자서 거머쥔 거 같지만 5공화국은 경찰 공화국이었다. 검찰의 지휘를 받는 절차야 유구하다 해도 “몇 천명의 검찰이 12만 (전경 포함) 경찰에게 덤빌 것인가?” 하는 으름장이 현실적으로 힘을 발휘하던 시절이었다. 그러기에 무죄 판결이 난 뒤에도 고숙종의 허리를 못 쓰게 만들 정도로 힘을 썼던 경찰들은 온전할 수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 고문으로 고숙종을 범인으로 만들었다가 이른바 개쪽을 판 뒤에도 경찰은 오늘날의 경기도 지사와 그 친구들에게 짐승 같은 고문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 버릇을 개 주지 못하고 결국 1987년 신년 벽두에는 박종철을 죽이고 말았다. 그것은 ‘무죄’에 열광하면서도 무죄의 이유에 민감하지 못했던, 그리고 무죄를 선고한 판사 자신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었고 자업자득이었다.
가끔은 궁금하다., 평균수명대로라면 아직은 돌아갈 나이는 아니니 고숙종 여인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크고 피해자의 예금 증서를 훔친 뒤 발각됐을 때 “형사도 살아야 한다.”며 그 불우한 처지를 호소했던 하 형사도 어딘가에서 일상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들이 의심한 누군가가 범인이라면 또는 범인이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