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 (오성 대감으로 더 알려짐)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의 두터운 우정
위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개구쟁이에 장난이 심했고
기지와 해학에 뛰어 났으며
이항복이 다섯 살 위여서 지금으로 보면 선후배 사이에 가깝지만,
10대 후반부터 그들은 나이를 잊고 두텁게 사귀었다. 그 우정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수많은 일화를 낳았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함께 왜란을 극복하고 당쟁을 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임진난을 당해서는 명나라 지원군을 파병케 하는데
둘은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고 병조판서를 번갈아 하면서
격동의 시기에 8도의 병력 모으기와 권율, 이순신의 전투력
뒷받침에도 선조임금께 좋은 조언을 많이 했다.
최고 관직인 영의정까지 두 사람은 모두 역임했다.
아무튼 임진, 정유 국난 시기에 이항복, 이 덕형, 유성룡,
이순신, 권율 같은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는 건 그나마
우리 역사에 행운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이하 두 인물의 개별적인 출생배경, 활약상을 소개한다.
백사, 오성대감 이 항복 약사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영의정을 역임한 문신이다.
나이는 이항복이 5살 위였으며 이덕형과 같은 해에
과거 문과에 합격했고 영의정은 이항복이 2년 먼저 되었다.
[개설]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어
이항복이나 백사(白沙)보다는 ‘오성 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동강(東岡).
고려의 대학자 이제현(李齊賢)의 방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이성무(李成茂)이며, 할아버지는 이예신(李禮臣)이다. 아버지는
참찬 이몽량(李夢亮)이며, 어머니는 결성 현감 최윤(崔崙)의 딸인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다. 부인은 권율(權慄)의 딸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활동 사항]
이항복은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소년 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열중하였다. 1571년(선조 4)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1575년(선조 8) 진사 초시에 오르고, 1580년(선조 1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이듬 해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이이(李珥)가 천거하여 이덕형 등과 함께 한림에 들어갔으며,
1583년(선조 16) 사가독서 하였다.
그 뒤 옥당의 정자·저작·박사, 예문관 봉교, 성균관 전적,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 홍문관 수찬,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예조 정랑 때 발생한 역모 사건에
문사낭청(問事郎廳)으로 친국에 참여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대사간 이발(李潑)을 공박하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을
청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게 한 적도 있다.
그 뒤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선조 23)
호조 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이듬해 정철(鄭澈)에 대한 논죄가 있자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항복은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찾아가 담화를 계속해 정철 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하였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때 대간의 공격이 심하였지만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의
적극적인 비호로 진정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동안 이조
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 판서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다.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 제학,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 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였고,
바닷길로 윤승훈(尹承勳)을 호남 지방에 보내 근왕병을 일으켰다.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며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조사 차 황응양(黃應暘)을 보냈다. 이에 이항복이 일본이
보내 온 문서를 내보여 의혹이 풀려서 마침내 구원병이 파견되었다.
당시 만주 주둔군 조승훈(祖承訓)·사유(史儒)의 3,000여 병력이 왔으나 패전하자, 다시 중국에 사신을 보내 대병력으로 구원해 줄 것을 청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여송(李如松)의 대병력이 들어와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서울 도성을 탈환하여 환도하였다. 다음 해 선조가 세자를 남쪽에 보내 분조(分朝)를 설치해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 보게 하였을 때 대사마(大司馬)로서 세자를 보필하였다.
1594년(선조 27) 봄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가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반란군 진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상소해 이를 중단시키고 반란을 곧 진압하였다. 병조 판서와 이조 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여 능란한 외교술을 발휘하였다.
1598년(선조 31)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올랐다. 이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동료 사신인 경략(經略) 양호(楊鎬)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우의정으로 진주 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 뒤 문홍도(文弘道)가 휴전을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자, 자신도 함께 휴전에 동조하였다고 자진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 수습하고 안민 방해책(安民防海策) 16조를 지어 올렸다.
1600년(선조 33) 영의정 겸 춘추관 영사, 세자사(世子師) 등에 임명되고 다음 해 호종 1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1602년(선조 35) 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 등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 살해하려고 한 장본인이 성혼(成渾)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 성혼을 공격하였다. 이에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 사임하였다.
1608년(선조 41)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 해 광해군이 즉위해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항복은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 음모에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하였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 유생들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배향을 반대한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하였다가 도리어 구금되어 권당(捲堂)하는 사태가 생기자, 광해군을 설득하여 사건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정인홍 일당의 원한과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다.
곧이어 북인 세력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의 멸문과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살해 등을 자행하자 이항복이 이를 맹렬하게 성토하여 원망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 인재 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 망우리에 별장 동강 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 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다.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 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 옮기게 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인목 대비(仁穆大妃) 김씨(金氏)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는데, 이어 폐위해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광해군 10)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정구가 평하기를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면서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1622년(광해군 14) 간행된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과 『주소계의(奏疏啓議)』 각 2권,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李舜臣) 충렬 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분은 쌍분(雙墳)으로 부인 안동 권씨와 합장묘이다. 쌍분 중앙을 중심으로 전면에는 묘비와 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있으며, 그 앞 좌우에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각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그 해 8월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포천과 북청(유배지)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는데, 1659년(효종 10) 화산 서원(花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746년(영조 22) 승지 이종적(李宗迪)을 보내 영당(影堂)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직에 등용시키는 은전이 있었다. 1832년(순조 32) 임진왜란 발발 네 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1838년(헌종 4)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의 요청으로 봉사손(奉祀孫)의 관리 등용이 결정되었다.
이항복 선생 묘 앞쪽 비탈 아래 약 20m즘 되는 곳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영당(影堂)이 있고 영당 우측 약 30m 지점에 1652년(효종 3) 건립된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김집(金集)이 썼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북청의 노덕 서원(老德書院)에도 배향되었다.
한음 이덕형 약사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신이다. 두 사람은 능력과 경력도 뛰어났지만, 널리 알려져 있듯이, 막역한 친구였다. 이항복이 다섯 살 위여서 지금으로 보면 선후배 사이에 가깝지만, 10대 후반부터 그들은 나이를 잊고 사귀었다. 그 우정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수많은 일화를 낳았다. 이덕형은 왜란을 극복하고 당쟁을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가문과 출세
이덕형의 본관은 광주(廣州)로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정2품) 이민성(李民聖)이고 어머니는 문화 유씨(유예선(柳禮善)의 딸)였다.
그는 1561년(명종 16) 2월 12일 서울 남부(南部) 성명방(誠明坊- 지금의 을지로·충무로·남대문로 일대)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도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듯이, 당시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일정 기간 사는 혼인 풍습)의 영향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는데, 이덕형도 그런 사례였다.
의 가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그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사위였다는 것이다. 이덕형은 16세 때인 1577년(선조 10) 이산해의 삼촌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추천으로 영의정의 사위가 되었다.
흥미롭게 오성 이항복도 도원수 권율의 사위였다. 절친했던 두 사람은 당대의 명사를 장인으로 모시는 영광도 공유한 것이다. 늘 그렇듯이 결혼에는 가문이나 그 밖의 조건도 무시할 수 없지만, 사람 자체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한 시대를 대표한 중신답게 이산해와 권율은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다.
이덕형과 이항복은 기지와 해학으로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일화들을 양산했다. 주로 구전설화로 전해지는 그 이야기들 중에는 스승을 놀린 것이 재미있다. 두 소년이 서당에서 같이 공부할 때 스승이 졸자 불이 났다고 외쳐 놀라게 해 깨웠다. 무안해진 스승은 "잔 것이 아니라 공자님을 만나고 온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소년이 졸기 시작했다. 스승이 꾸짖으려고 하자 두 소년은 자신들도 공자님을 뵙고 왔다고 말했다. 스승이 "그럼 공자님이 뭐라고 하셨느냐"고 묻자 그들은 "공자님은 스승님을 뵌 적이 없답니다"라고 대꾸해 스승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한음 이덕형 선생의 초상화로, 현재 ‘한음영당’에 보존되어 있다. 충남 당진시 송악면 소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8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그뒤 이덕형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1580년(선조 13) 19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그 시험에서는 이항복, 그리고 뒤에 병조참판을 지낸
이정립(李廷立, 1556~1595)도 함께 급제했는데, 그 해의 간지(干支)를
따서 그들을 ‘경진삼이(庚辰三李)’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덕형은 순조롭고 화려한
출세를 구가했다. 그는 이조정랑(정5품)·직제학·부제학·대사간(이상 정3품)·
대사헌(종2품)·대제학(정2품)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 시기의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항이지만,
이덕형의 삶에서도 주요한 분수령은 임진왜란과 당쟁이었다.
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덕형은
31세의 이조참판 겸 대제학이었다(1591년 12월 25일에 임명됨)
외교적 활약
임진왜란에서 이덕형이 세운 주요한 공로는 외교 분야에 집중되었다.
왜란 발발 직후 그는 명에 청원사(請援使)로 가서 그 사행의 이름대로
원군을 요청하는데 성공했다. 이듬해(1593) 1월 이덕형은
이여송(李如松)의 명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했다.
이덕형은 임란 동안 형조·병조(3회)·이조판서(2회)의 요직을 역임했다.
특히 군무를 총괄하는 병조판서를 세 번이나 맡았다는 사실은
전란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그의 능력을 보여준다.
특기할만한 다른 일로는 1597년 2월 이순신(李舜臣)이 하옥되자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했다는 사실이다.
임란이 종결될 때까지도 이덕형은 아직 37세의 젊은 대신이었다.
당쟁의 여파와 사망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당쟁은 격화되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광해군을 지지한 북인
(北人)은 왕위계승과 관련된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켰다.
무리수에 가까운 이런 조처는 당연히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신하들은
당파에 따라 찬반의 양론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덕형은 남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광해군의 즉위에 중요한 공로를 세웠다. 임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세워 국본(國本)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광해군이 후사로 책봉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뒤 1608년 선조가 붕어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에 파견되어 책봉 칙서를 받아온 것도 중
요한 성과였다. 다섯 달이나 걸린 사행이었다는 사실은 그 임무의
지난함을 알려준다.
이덕형 묘소.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소재. 경기도 기념물 제89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북인과 밀접하게 보이는 이런 행보는 장인이 북인의
거두인 이산해였다는 사실과도 무관치 않지만, 그
보다는 이덕형이, 당파를 초월하지는 않았지만, 당색
에서 상당히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서인인 이항복과의 우정도 그런 자세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덕형은 불과 37세의 나이로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1598년(선조 31) 4월 우의정, 같은 해 10월 좌의정)
4년 뒤 41세에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1602년).
그동안에도 훈련도감 도제조(1600년)와 충청·전라·경상·강원 4도
의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역임했다(1601년). 41세의
영의정은 조선 역사 전체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그
뒤에도 이덕형은 두 번이나 더 영의정을 역임했고
(1609년(광해군 1) 9월, 1612년 9월) 익사형난공신
(翼社亨難功臣)과 한원(漢原)부원군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덕형은 당쟁의 여파 속에서 최후를 맞았다.
1613년(광해군 5) 여름 인목대비를 폐출하려는 시도
가 일어나자 그는 이항복과 함께 강력히 반대했고, 탄
핵을 받자 즉시 용진(龍津, 지금의 양평군)으로 낙향
했다. 그때 이항복도 같은 사건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망우리에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짓고 동강노인(東岡
老人)이라고 자칭하면서 지냈다.
9월에는 삭탈관직의 명령이 떨어졌다. 한 달 뒤인 10월 9일 그는
용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52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그 날 [광해군일기]의 졸기는 그의 타계를 이렇게 기렸다.
이항복은 먼저 별세한 죽마고우 이덕형에게 예를 다하고 묘비명도
손수 지어주었다.
전 영의정 이덕형이 세상을 떠났다. …… 이덕형은 일찍부터
재상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문학(文學)과 덕기(德器)는
이항복과 대등했지만,
관직은 이덕형이 가장 앞서 38세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영의정은 이항복 보다 2년 뒤에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두드러진 공로를 많이 세워 중국과
일본 사람 모두 그의 명성에 복종했다.
두 사람의 외교적 성과는 눈부셨다.
사람됨이 솔직하고 까다롭지 않았으며 부드러우면서도 곧았다.
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았다.
……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 했다
(1613년(광해군 5) 10월 9일).
실록의 평가대로 이덕형은 30대의 나이에 재상에 올라 영의정을
세 번이나 역임하는 화려한 경력을 성취했다.
인재는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나듯이, 그것은 임란과 당쟁의
격동 속에서 이룬 성취였다.
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어떤 갈등이나 분쟁은 없을 수 없고 없는
것이 반드시 좋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발전은 평온과 안정 속에서도
이뤄지지만, 갈등과 대립을 거치면서 형성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의 당쟁도 그런 시각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의 많은 인물들이 당쟁에 자신의 재능을 소모하고,
그런 과정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안타까운 일이다.
이덕형과 그의 벗 이항복은 국난을
극복하고 당쟁의 초기 국면을 통과하면서 많은 업적과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대표적인 명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