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대한적십자사 설립
1905년 10월 27일 '대한적십자사 규칙'이 칙령 제47호로 반포됨으로써 대한적십자사가 설립되었다. 1864년 성립된 '제네바 조약'의 정신에 의거하고 있으며 인도·공평·중립·독립·봉사·단일·보편의 이념을 기본원칙으로 한다. 1909년 한일합병으로 일본적십자사에 합병되었다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다시 '대한적십자회'가 설립되어 항일무력투쟁을 인도적 측면에서 지원하고 해외의 동포 환자를 도와주었다. 해방 후인 1947년 3월 조선적십자로 발족해 1949년 10월 지금의 대한적십자사로 재조직되었다. 1955년 5월 적십자국제위원회(ICRC)로부터 국제적 승인을 받았고 그해 9월 국제적십자연맹에 정식 가입했다. 1971년부터는 남북회담을 전담하는 총재 직속의 회담사무국을 설치해 남북 이산가족의 인도적 재회를 목적으로 여러 차례 협의를 했다. 전시에는 국군의 의료보조기관으로서 부상자에 대한 구휼사업을 기본임무로 하고 평시에는 각종 구호·봉사·친선협력·보건·혈액사업 등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국가의 구호업무에 대한 위탁을 받으며 보건복지부 장관의 감독과 국가·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는다./브리태니커
[2007년] ‘최후의 만찬’ 고해상 이미지로 재생 이탈리아서 16기가 화소 작업
언제 어디서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 <최후의 만찬>을 마음껏 꼼꼼히 감상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6기가 화소 고해상도인 작품의 사진이 27일부터 인터넷사이트(haltadefinizione.com)에 공개된 것이다.
최근 출시된 디지털카메라가 700만~1200만 화소임을 고려할 때, 16기가(160억) 화소의 이미지는 이보다 1600배 가량 선명하다는 의미다. 실제 공개된 사진을 확대해보면 △예수 뒤의 창 밖으로 파란 지붕의 교회가 보이고 △유다가 엎지른 것으로 묘사된 ‘쏟아진 소금그릇’의 소금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다. 물감이 떨어져나간 모습이나, 표면에 생긴 균열 등 그림의 손상 상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진은 작품의 상태 보존을 위해 몇달 동안 이탈리아 문화청과 관련기업들이 작성한 자료에 기초했다. 앞으로 필요할 수 있는 복원 작업에서의 기초자료로 이용할 뿐 아니라, 온라인 감상을 통한 관람객들의 ‘분산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성당에 전시된 <최후의 만찬> 원본은, 관광객들이 한달 전부터 예약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러나 먼지와 오염물에 의한 손상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됐다./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한겨레 2007-10-28
[1995년]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 조성을 시인하는 기자회견
노태우 전대통령이 1999년 10월 27일 자신이 재임중 5천억원의 통치자금을 조성, 퇴임 당시 1천7백억원이 남았다고 시인했다. 노씨는 이날 오전 연희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비자금 파문과 관련, 발표한 대국민사과성명에서 이같이 밝히고, 필요하면 당국에 출석해 조사도 받겠다고 했다.
노씨는 "비자금을 조성한 것도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를 유용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은 더더욱 큰 잘못"이라며 "국민 여러분이 내리는 어떠한 심판도 달게 받겠으며 어떠한 처벌과 돌팔매질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사과했다. 비자금 조성과 용도는 주로 기업인들로부터 성금을 받아 노씨의 책임하에 대부분 정당운영비등 정치활동에 사용됐다.
그러나 대통령선거 자금 지원 등 구체적인 용처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으며 기자회견후 여론은 솔직하지 못한 발언과 변명으로 일관한 노씨의 사법처리를 촉구했다. /조선
[1987년] 제9차 개헌안 국민투표 실시, 93.1% 찬성으로 통과. 제6공화국 성립
제5공화국 헌법을 고수하여 정권의 연장을 획책하려는 여권에 대항하여 대다수 시민들이 6월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이 포함된 6·29선언을 쟁취함으로써 제5공화국 종식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어 1987년 9월 12일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합의에 의하여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 5년 단임제, 국정감사권 부활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제9차 헌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10월 27일 개헌안이 국민투표로써 확정되었으며 1987년 10월 29일 공포된 대통령직선제의 제9차 개정헌법에 따라 제6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15년 만의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여권의 노태우(盧泰愚)가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야권의 3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총선거를 거쳐 제13대 국회가 개원됨으로써 제6공화국은 본격적으로 출범하였다.
[1980년] 제8차 개헌안(제5공화국 헌법) 공포
1980년 오늘 제8차 개헌안 즉 제5공화국 헌법이 제정 공포됐다.
전문 10장 131조와 부칙으로 이뤄진 제8차 개헌안은 대통령 간선제와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했다.
이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가 간접투표제로 치러지면서 다음해 3월 3일 전두환 대통령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미 전두환 대통령은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으로 유신 헌법에 따라 치러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투표로 11대 대통령에 당선돼 대통령직을 수행중이었다.
5공화국 헌법은 국회내 개헌특위와 정부내 헌법 개정 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마련됐다.
그러나 선거인단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대통령을 뽑는데 있어 국민의 직접적인 뜻을 표로 반영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어 이후 야당과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줄기찬 개헌 요구에 직면하게 됐다. /YTN
[1980년] 전국 조계종 사찰에 계엄군 진입
1980년 10월 27일 새벽 2시 조계종 총무원과 전국의 주요 사찰에 계엄군이 진입해 송월주 총무원장 등 46명을 연행하고 사찰의 재정 관련 서류를 압류한 사건이 일어났다. 계엄사령부는 이 사건에 대해 "상당한 기간이 경과해도 불교계 자체가 아무런 정화 움직임을 나타내지 않아 자력으로는 도저히 갱생의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 부득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철퇴를 가한 것이며 그 목적은 불교 내부의 분규 종식, 부정축재와 비리행위자 색출 및 종단 재산관리와 해외활동을 둘러싼 사기행위자·국위손상자 색출에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1980년 8월 5일 불교관계법 개정 5인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9월 16일 불교관계법 개정시안을 문화공보부에 제출했으며 10월 20일 조계종단의 자율정화 세부지침을 확정하는 등 불교계 내에 자율적 정화의지가 높았다는 사실을 들어 계엄사령부의 발표를 부정했다. 또한 계엄군이 10·27법난을 일으킨 것은 불교재산관리법의 철폐 및 시정을 요구하려는 조계종의 움직임에 불안을 느꼈으며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정치범의 색출 및 민주정의당의 정치자금 마련,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국민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밝혔다./브리태니커
[1979년] 최규하(崔圭夏) 총리, 대통령권한대행 취임
19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 그 해 외무부차관이 되었고,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이 되었으며, 1964년 말레이시아 대사, 1967년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었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다. 1975년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1979년 10·26사건 이후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그 해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0년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1981년 4월부터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활약하였다.
[1979년]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1979년 오늘 하루 전인 26일 밤에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사건이 '박정희 대통령 유고'라는 뉴스 제목으로 일반 국민에게 알려지면서 전국은 일시에 큰 충격에 빠졌다.
이에 앞서 정부는 박 대통령 사망 3시간 뒤인 밤 11시부터 청와대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대통령 궐위에 따른 비상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의 궐위 시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하도록 돼 있는 헌법 규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아 오늘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모든 방송과 신문 등 언론보도가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했으며 전국 대학들이 일제히 휴교에 들어갔다.
또 사전 허가없는 일체의 옥내외 집회가 금지됐으며 통행금지 시간도 밤 12시에서 밤 10로 앞당겨졌다. 정부는 오늘 오전 9시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사실을 공식 확인하면서 박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계엄사령부에 의해 구속조사를 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망으로 인한 유고 사태가 발생하면서 이제 정국은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비상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YTN
[1972년] 유신헌법안 공고
유신헌법(維新憲法)은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유신체제하에서 동년 12월 17일 국민투표로서 확정된 헌법으로, 한국 헌정사상 7차로 개정된 제4공화국의 헌법이다.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72년 10월 17일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동시에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10일 이내에 헌법개정안을 작성하여 국민투표로써 확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27일 평화적 통일지향,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2대특징으로 한 개헌안(改憲案)이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 ·공고되었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찬성(투표율 91.9 %, 찬성 91.5 %)으로 확정되었으며, 대통령 취임일인 12월 27일에 공포 ·시행되었다. 이 헌법은 형식적으로는 제7차 헌법 개정이나, 실질적으로는 구헌법을 폐지하고 새 헌법을 제정한 점에 특색이 있다.
개정 당시 유신헌법의 기본적 성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 지향, 민주주의 토착화, 실질적인 경제적 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자유경제질서확립, 자유와 평화수호의 재확인’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유신헌법은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었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 권력구조상에 있어 대통령 권한의 비대로 독재를 가능하게 한 헌법이었다.
[1950년] 정부, 서울 환도
6·25전쟁의 전세(戰勢)는 낙동강 도하 작전에서 연합군이 반격하여 승기를 잡고 남해안 도서들을 탈환하는 한편,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작전으로 9월 15일 유엔군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함으로써 반전되었다.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서울 환도는 1950년 10월 27일에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수도 서울을 이양하면서 이뤄졌다. 기념식을 거행할 때 맥아더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위대한 희망과 열망하는 믿음의 밑받침으로 이제 유엔군은 이 오래된 한국의 수도 서울을 해방시켰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고 기도하고 이양하는 뜻으로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었다. 이승만 대통령, ‘정부환도 평양탈환 경축 유엔군 국군 환영 국민대회’에서 치사
- 게재지명 서울신문
- 게재일자 1950년 10월 28일
- 날짜 1950년 10월 27일
- 내용 27일 정부 환도, 평양 탈환 경축 UN군 국군환영 국민대회 석상에서 이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치사를 보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 동포들이 이러한 모임을 열고 UN대표단과 UN군의 은공을 감사하기 위하여서 자발적으로 환영을 하니 기쁘다. 더욱이 의외에도 기념품 등을 증정하는 것은 나로서는 과만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우리는 아무 준비가 없어 가지고 서울을 떠나서 남으로 내려가게 되었던 것인데 이러한 공산침략군의 행패를 미국에서 알게 되자 세계 민주 각국이 24시간에 이 급보를 알게 되고 출동하였던 것이다. 1일 작전이 시작되자 배로는 그 속도가 늦음으로 비행기로 단축된 시간 내에 우리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공산군이 대구·부산을 점령하지 못하고 더욱 인적 정비가 갖추어지고 軍器·軍物이 늘어가서 전쟁은 파도를 돌리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아직 세계사상에 없었던 일이다. UN 각국 우방군인들이 자기 나라 일같이 열심히 싸워서 평양, 압록강에 이르는 것을 생각하건대 그 군인들의 무용을 세상에서 모두 認揚하고 있다.
또 우리의 파괴를 복구시켜주며 식량을 보내주고 있는 것은 무어라 감사의 설명을 할는지 모르겠다.
UN군과 미국 대통령, 미국 정부, 무쵸 대사와 모든 미 국민에게 만강의 열정으로 감사하여 마지않는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전쟁을 모르고 싸우던 각국 군인들이 한국 사람들이 공산당과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자기 나라의 투쟁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열렬하게 투쟁하여 준 것이다. 만약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굳은 지조가 없었더라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싸워주지도 않고 원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겁낼 것도 없고 지나간 3개월 동안의 결심을 가지고 가치 있는 백성으로 독립과 자유를 보호하고 다같이 일어나서 각자가 일하여 신생활을 하여야 한다. 남이 도와준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이며 부지런히 집과 도로를 청결하여서 복구작업에 총 진군하면 단시일 내로 새 세상을 만날 것이며 세계 각국에서도 모두 우리들의 힘에 놀랄 것이다.
우리나라를 새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일을 하여야 한다. 공산도배들은 과거에 소위 사상교역이라고 하여서 모략과 중상을 일삼아 국민과 국민을 이간시키며 또 정부와 국민을 서로 싸우게 하는 데에 몰두하였다. 만일 지금부터는 이러한 이간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나라에 큰 방해가 될 것이니 이런 자는 용서 없이 적발하여야 한다.
우리는 단군시조 이후 한 줄기의 피를 받은 백성이니 만큼 남도 없고 북도 없으니 함께 잘 살자는 것이 목적이다. 집이 없어서 떨고 있는 이재민들을 서로 돕고 집을 서로 나누어 살며 새 정신으로 신생활을 하면 도시나 가정이 새로워질 것이니 이것을 세계에 과시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목적이 이러한 것에 있다는 것을 각자가 자각하고 오늘의 의의를 나와 같이 약속하여 새로운 공훈을 세우기 바란다.”
[1938년] 듀폰사, 나일론 첫 상품화
← 나일론을 처음 상품화한 나일론 칫솔
20세기 섬유혁명은 시대를 앞선 듀폰사의 안목과 투자, 이에 부응한 월리스 캐러더스의 끈질긴 노력으로부터 시작됐다. 캐러더스는 합성고무 ‘네오프렌’을 발명하고 1935년 2월에는 최초의 합성섬유 ‘폴리머 66’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듀폰의 연구 책임자였다. 듀폰은 이 합성섬유가 자기 이름도 갖기 전인 1938년 2월에 첫 상품을 냈다. 칫솔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주로 돼지털로 된 칫솔을 사용했다. 15세기 말 중국 황실에서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돼지털이 실로 450여년 만에 인간의 이(齒)와 작별을 고한 것이다. 캐러더스는 1년 전에 자살하는 바람에 공치사를 들을 기회를 놓쳤지만 듀폰은 상품화에 박차를 가했다.
1938년 10월 27일 듀폰은 합성섬유의 이름(브랜드)을 ‘나일론(Nylon)’으로 하고 이를 이용한 본격적인 상품화 계획을 발표했다. 1년 뒤 나일론의 이름을 빛내준 여성용 스타킹이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첫선을 보인 데 이어 1940년 5월부터는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다”는 선전 문구와 함께 전국 주요 도시에서 팔려나갔다.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나일론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2차대전 때는 낙하산․텐트 등 군용으로도 쓰여 승전(勝戰)에도 크게 기여했다.
‘코오롱(KORLON)’은 이 회사의 뿌리 기업인 한국나이롱이 1963년에 처음 생산한 제품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국(Korea)’과 ‘나일론(Nylon)’을 합성한 단어다./조선
[1923년] 팝아트 거장 리히텐슈타인 탄생
인간의 손을 거친 모든 예술작품은 근본적으로 인위적(arti-ficial)이다. 그러나 예술가 스스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인위적이라는 단어엔 부자연스럽다는 뉘앙스도 깔려 있으니.
팝아트의 대표적 인물인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1997). 그는 “나의 작품은 가장 인위적이다”라고 스스로 공언했다.
리히텐슈타인이 오늘 태어났다. 1962년 뉴욕 맨해튼의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 그의 작품이 처음 전시됐을 때 관람객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맙소사, 이게 예술인가.”
‘미키마우스’와 ‘도널드덕’, ‘포파이(뽀빠이)’가 등장했고 만화처럼 말 풍선을 그려놓고 대사를 적어놓았다. 실제 인쇄한 것처럼 보이려 했는지 인쇄물을 확대했을 때 나타나는 점(dot)까지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전시회는 본격적인 팝아트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60년대를 전후해 영국에서 탄생한 팝아트는 미국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리히텐슈타인과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작가들은 상품 광고, 고속도로 빌보드, 교통표지판, 코카콜라를 미술에 끌어들였다. 산과 들, 강은 관심이 없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미덕이던 시절, 리히텐슈타인은 “오늘날 예술은 우리 주위에 있다”고 선언했다.
라이프 매거진은 1965년 리히텐슈타인을 다루면서 “그는 미국에서 최악의 예술가인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역설적으로, 미국에서 가장 주목 받는 예술가가 탄생했음을 의미했다.
무엇이 순수예술이고 무엇이 대중예술인가. 팝아트는 위계적이고 이분법적인 구조에 정면으로 반발했다. “팝콘을 먹으면서 감상할 수 있는 미술”이 그들의 모토였다.
당시 순수미술계에선 “팝아트 작가들이 미국 미술계가 성취한 것 전부를 창 밖으로 버리려 한다”고 반발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졌다. 애초에 팝아트를 배태하고 키운 것은 자본주의, 그중에서도 미국이었다.
오히려 좌파의 평가가 더 그럴듯하다. 피상적이고 퇴폐적이며 자본주의를 무분별하게 재현한 반동적 현실주의라는.
리히텐슈타인은 자본주의의 상징인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었고 그의 작품은 천문학적인 가격에 팔렸다. 누군가의 말처럼 ‘가장 미국적인 작가’였다.
[1923년] 시인․국문학자 정한모/鄭漢模 출생
1923. 10. 27 충남 부여~1991. 2. 23 서울.
호는 일모(一茅).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거쳐 1959년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에 서울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6~47년 〈시탑〉·〈주막〉 등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2년 공주사범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8년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1966~88년 서울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방송통신대학 학장,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문화공보부장관 등을 지냈다. 1955년 〈사상계〉 7월호에 시 〈음영 陰影〉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쳤다. 그의 시세계는 대체로 첫 시집 〈카오스의 사족(蛇足)〉(1958)에서 2번째 시집 〈여백(餘白)을 위한 서정〉(1959)에 실린 시를 초기시로, 3번째 시집 〈아가의 방〉(1970) 이후의 시를 후기시로 나누어볼 수 있다. 초기시는 밤과 어둠의 이미지로 시대에 대한 절망과 공포를 짙게 나타냈는데, 이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순수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려는 시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후기시에 와서 더욱 두드러졌으며 〈아가의 방〉에서는 아가의 이미지를 통해 불안한 시대의 어둠을 극복하고 재생의 신념을 획득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게 된다. 또한 1975년에 펴낸 4번째 시집 〈새벽〉에서는 아가의 이미지를 새벽과 어머니로 발전시켜 밝은 세계로 노래했다. 그밖에 시집으로 〈아가의 방 별사(別詞)〉(1983)·〈원점에 서서〉(1989) 등과 시선집으로 〈사랑시편〉(1983)·〈나비의 여행〉(1983)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바람과 함께 살아온 세월〉(1983)이 있다. 그는 또한 국문학자로서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한국 현대시 연구에 힘써서〈현대작가연구〉(1959)·〈현대시론〉(1973)·〈한국현대시문학사〉(1974)·〈한국현대시의 정수〉(1979)·〈한국현대시의 현장〉(1983) 등과, 공저로 〈문학개론〉(1964)·〈문학개설〉(1973)·〈한국현대시요람〉(1982)·〈한국대표시평설〉(1983) 등의 문학 이론서를 여러 권 냈다. 1972년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19년] 교육자 서명원(徐明源) 출생
1919. 10. 27 충남 논산 ~ 2006. 4. 14 서울
1946년 경성제국대학 심리학과를 거쳐 1953년 미국 조지피바디대학교에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 미국 웨스턴미시간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4년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및 학장서리를 역임했고 1955~7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60년 문교부차관을 지냈다. 1962년 서울대 교무처장을 지냈고, 1971년 동 대학 사범대학 학장, 1973년 동 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1977년에는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했고, 1977~85년 충남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1981~92년 학술원 회원(교육학 분야)으로 있으며, 1985년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장, 1985~92년 단국대학교 대우교수로 있었다. 1987~88년 문교부장관을 역임했고, 1989년 한국학원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2~93년 경원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했다. 1995년 세계교육협의회 한국지회장을 맡았다. 국민훈장 모란장, 무궁화장, 세종문화상을 수상했고, 주요저서로 〈교육원리〉 〈현대교육총서〉 〈교직과 교사〉 등이 있다.
[1907년] 명창 정득만(鄭得晩) 출생
1907. 10. 27 서울 ~ 1992. 10. 30.
어린시절부터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다가 본격적으로 음악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세 무렵이었다. 당시 조선가무연구회를 운영하던 최경식에게 경기민요를 비롯한 가사·시조·지름시조·12잡가 등을 배웠는데 이때 평생의 음악지기가 될 김태봉·이창배 등을 만났다. 한창 음악수업에 빠져 생업을 돌보지 않자 정득만의 아버지는 노래를 그만두게 하려고 다시 서빙고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여기서 과천 선소리패의 모갑이인 소완준을 만나 6, 7년 동안 〈선소리산타령〉을 배웠다. 8·15해방 이후 6·25전쟁 직전까지는 대한부인회와 공동으로 국악연예사를 조직하여 서울과 지방순회공연을 다녔으며 1950년대 중반부터는 이창배의 청구고전성악학원에서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김태봉·유개동·김순태·이창배 등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의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이후 국악협회, 사단법인 선소리산타령보존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상업·정원사 등의 생업이 따로 있었던 그는 음악을 생활수단으로 삼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며 노후에는 주로 후진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문하에서 황용주·박태여 등 수명의 〈선소리산타령〉 후계자와 경기민요 명창들이 배출되었다. 이창배·김태봉 등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보유자 1세대들과 함께 부른 〈선소리산타령〉, 동료 음악인들이 죽은 뒤 다음 세대 후계자들과 함께 부른 〈선소리산타령〉이 각각 음반으로 전한다.
[1905년] 소설가 박노갑(朴魯甲) 출생
1905. 10. 27 충남 논산 ~ 1951.
농촌과 도시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는 소설을 썼다. 호는 도촌(島村).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28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법문학부에 입학한 뒤 무산자사에 가입했으며, 1933년 호세이대학 문리대를 졸업했다. 이무렵 조선중앙일보사 등의 신문사, 출판사, 잡지사 기자를 지냈다. 8·15해방 뒤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해 중앙집행위원과 부위원장을 지냈다. 1946년 문학대중화운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1948년 휘문중학교·숙명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50년 9·28서울수복 때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 이후의 행적이 불분명하며 월북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51년 수복된 서울의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퇴근 귀가 도중 국군에게 쫓겨 도망중이던 인민군의 총에 사살되었다고도 전한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에 단편소설 〈안해〉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그뒤 농촌문제를 다룬 〈춘보의 득실〉(조선문학, 1936. 10)·〈꿈〉(여성, 1938. 4) 등을 발표했다. 〈무가 霧街〉(인문평론, 1940. 2)에서부터 작품세계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해 1948년에 발표한 〈사십년〉 등에서는 궁핍·범죄·매춘 등 도시 지식인의 현실인식을 다루었다. 소설집으로는 〈사십년〉(1948)이 있다.
[1904년] 뉴욕지하철 개통
← 개통식에 앞서 같은해 1월, 정재계 인사들을 초청해 미리 시주식을 가졌다.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 오늘 4년7개월에 걸친 공사를 끝내고 뉴욕 지하철이 개통됐다. 이날 시청 주변에는 6,000여명의 군중이 아침부터 모여들었다. 당시 뉴욕 시민들은 기차와 달리 매연하나 뿜어내지 않으며 몇시간이 소요되던 시청에서 할렘가까지를 15분에 주파하는 이 땅속 기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후 2시 26분, 군중의 환호 속에 말끔한 정장 차림의 시장과 관계자들이 지하철 역내에 나타났다. 플랫폼에는 8량의 특별열차 1호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예정대로 시장은 격식을 차리며 준비된 은색 열쇠로 스위치를 올렸지만, 이 희귀한 체험에 그는 103가 역에 도착할때까지 운전실에서 나가지 못했다. 오후 7시 영업개시 시간이 다가오자 축제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군중은 마치 대통령 선거 개표일인 거 마냥 북을 치고 피리를 불어댔다. 개통 당시 승차료는 1인당 5센트로, 어느 역에서는 5센트의 승차권에 25달러의 프리미엄이 붙기도 했다. 개통 첫날 지하철을 승차한 시민 수도 총 15만명 달했다. 그후 뉴욕시는 지하철 역세권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해 오늘날 세계 제1의 도시가 됐다./조선
[1902년] 춘사 나운규 출생
← 배우-작가-감독으로 분화되지 않는 전인적 영화인의 삶을 살았던 나운규씨.
영화 ‘아리랑’(사진)을 연출한 춘사 나운규가 1902년 10월 27일 태어났다. 춘사는 함북 회령태생으로 한국영화의 개척자이며 민족수난기의 항일투사로서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춘사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간도의 명동중학 재학시절 3.1운동에 참가하는 등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해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감후 1924년 부산에서 처음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은 ‘운영전(雲英傳)’에 단역으로 출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35세로 요절하기까지 약 13년동안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29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주연까지 맡은 ‘아리랑’ ‘풍운아’등이 있다. 1927년에는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1929년에는 국내최초의 문예영화인 ‘벙어리 삼룡’을 발표했다. 무질서한 사생활과 지병인 폐결핵 악화로 1937년 요절했다./조선
[1895년] 손문, 최초의 거병 시도 실패 (광주사건)
쑨원[孫文]은 14세 때 하와이의 형 쑨메이[孫眉]에게로 가서 호놀룰루의 신교계(新敎系)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세례를 받고 광저우[廣州]와 홍콩[香港]의 서의서원(西醫書院: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광저우 등에서 개업하였다. 외과에 능하였는데, 병원은 날로 번성하였다.
광저우 의학교에서 삼합회(三合會)의 수령인 정스량[鄭士良]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의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반청운동(反淸運動)에 가담했다. 중국을 서양과 같은 나라로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領地)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한 뒤 화교(華僑)들을 모아,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변발을 자르고 양복차림을 하기 시작하였다.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청국공사관에게 체포되고, 홍콩의 의학교 때 스승 J.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되어 영문으로 《런던 피난기》를 발표하여 그의 이름과 중국 사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하였다. /naver
[1858년]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출생
별칭은 Teddy Roosevelt.
1858. 10. 27. 미국 뉴욕 뉴욕 시~1919. 1. 6 뉴욕 오이스터 만.
미국의 제26대 대통령(1901~09),작가․탐험가․군인.
대기업과 노동조합 사이의 쟁의에 직면하여 대통령 및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전체 국민의 이익을 도모했으며 아시아와 유럽 문제에 개입하기도 했다. 1906년 러일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파나마 운하 건설(1904~14)을 추진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네덜란드계 중산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마사 불럭은 위그노(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인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혼혈로 조지아 주 출신이었다. 가정교사로부터 배우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천부적인 지적 호기심을 타고난 몇 안되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880년 컬럼비아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했지만 곧 역사와 정치에 매료되었으며, 바로 그해 보스턴 출신의 앨리스 해서웨이 리와 결혼했다. 1884년 앨리스가 사망하자 루스벨트는 에디스 커밋 캐로와 재혼했고 뉴욕 주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만에 정착하여 평생 같이 살았다.
[1553년] 에스파냐 신학자 세르베투스 화형
1553년 10월 27일 에스파냐의 신학자이며 의사인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뱅에 의해 산 채로 화형당했다. 의사로 심장의 작동 원리를 발견한 그는 무어인과 유대인에게 그리스도교를 믿게 하는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에 의해 방해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급진적인 신학을 주장하여, 정통적인 신학자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한때 의학에 흥미를 느껴 혈액 등을 연구한 일이 있었고, 또 지리학과 점성술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다시 신학으로 되돌아왔지만, 삼위일체론을 부정하였으므로 가톨릭측으로부터 고발당하여 빈과 리옹에서 심문받은 뒤, 이단(異端)으로 선고 받았다. 그는 달아났으나 붙잡혀 J. 칼뱅의 주장에 의해 제네바에서 프로테스탄트 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그가 처형된 후 프로테스탄트 교도들 사이에서는 이단자에게 사형을 부과하는 문제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고 장 칼뱅에게는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그의 처형은 칼뱅의 과오라는 점이 인정돼 1903년 처형지인 제네바 근교에 속죄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는 나발왕국 투델라에서 태어나 1528년부터 법률과 성서를 공부했고, 1530년에는 독일에서 루터와 함께 반(反)교황 입장에 섰다.
[1469년]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출생
← 에라스무스, Hans Holbein the Younger가 그린 유화(1523)
1469. 10. 27 네덜란드 로테르담 ~ 1536. 7. 12 스위스 바젤.
네덜란드 인문학자. 로테르담 출생. 어려서부터 성직자 교육을 받아 사제가 되었고 1488년 스테인의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만년에는 교황에게 청원하여 성직을 포기하였다. 94년 교회의 원조로 파리에 유학하여 고전라틴문예의 연구에 몰두하였고 99년 제자들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T. 모어․J. 콜릿 등의 인문학자와 사귀었다. 특히 콜릿의 바오로 서간 연구에 자극을 받아, 다음해 파리로 돌아와 그리스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성서연구에 전념하여 그 연구결과인 《그리스도교 전사필휴(戰士必携, 1504)》를 저술하였다. 또한 1506년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여행하던 중에 착상하여 영국의 모어에게 쓴 희문(戱文) 《우신예찬(愚神禮讚, 1511)》이 있다. 이것은 <어리석은 여신>이 세상에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 많은가를 열거하며 자랑하는 형식으로, 철학자․신학자의 공허한 논의와 성직자의 위선 등에 대해 예리하게 풍자한 것이다. 1516년에는 그리스도교 군주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적 평화가 체결된 것을 절망한 《그리스도교 군주의 교육》을 공간하였고, 또한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최초 인쇄교정본을 출판하고, 《히에로니무스저작집》을 공간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쳐 <인문학자의 왕>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 만년에는 조국으로 귀국한 뒤 스위스의 바젤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고 성서의 복음정신으로의 복귀를 설파하였는데, 제자들 중에서 많은 종교개혁자가 배출되었다. 그 자신도 처음에는 M.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였지만, 그 광적 행동에는 찬성하지 않아 《자유의지론(1524)》을 써서 그와 논쟁을 벌인 뒤 결별하였다. 그의 사상은 플라톤주의에 입각한 바오로의 그리스도교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보다 실천적이며 무엇보다도 사려와 절도를 중시하였다. 에라스무스는 W. 딜타이에 의해 <16세기의 볼테르>라고 칭해졌듯이 세계적 정신의 소유자로 근대자유주의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F. 라블레를 비롯한 프랑스 문예사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밖에
2005년 노충국씨, 군 오진(위궤양)으로 전역 한 달 뒤 암으로 사망
2000년 정현준-이경자씨, 동방금고-대신금고 불법대출과 로비혐의로 구속
1995년 프랑스, 남태평양 프랑스령 무루로아 환초에서 3번째 핵실험 강행
1983년 산악인 허영호 마나슬루봉 단독 등정 성공
1981년 소련 잠수함, 스웨덴 해군기지 근해에서 좌초
1981년 중요무형문화재 서울전수회관 준공
1981년 원효대교(1470m) 준공
1976년 안동 다목적댐 준공
1976년 워싱턴포스트(WP), 박동선의 로비활동(코리아스캔들) 폭로
1969년 디오리 하마니 니제르공화국 대통령 방한
1969년 서독 정부, 2개의 독일(서독-동독) 인정
1968년 유엔총회, 서남아프리카에 대한 남아공 위임통치 종식
1966년 중국, 핵미사일 실험 성공
1962년 태국, 태풍 하리에트 엄습으로 138명 사망
1961년 로마 사회주의 인터내셔날회의, 한국의 투옥된 민주사회주의자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결의안 채택
1955년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군사협정 조인
1955년 제네바서 미국-영국-프랑스-소련 외상회담
1944년 군수회사법 시행
1938년 일본군, 중국 무한 3진 점령
1934년 제1회 조선어도서전시회 개최
1924년 조선학생총연합회 창립
1919년 영화 ‘의리적 구투’ 첫 상영
1918년 인천항 갑문식 선거(船渠) 준공
1883년 한국-독일 수호통상조약 조인
1871년 영국,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 산지 병합
1870년 미국의 법학자 링컨 출생
1844년 스웨덴의 정치가 아놀드손 출생. 1908년 노벨평화상 수상
1811년 가정용 재봉틀 '싱거 미싱' 개발자 아이작 싱어 출생
1782년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출생
1728년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 출생
113년 트라야누스 로마 황제,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로마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