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8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마태 11,28-30)
Come to me, all you who labor and are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려 하시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파라오 아래서 노예 생활을 한 탓에 하느님을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염려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강한 확신으로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실 당신의 계획을 밝히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지친 사람들을 초대하시며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짐을 덜어 주시거나 그들 대신 짊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짐을 질 수 있게 하심으로써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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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내가 짊어지고 있는 짐들이 다 없어지게 된다.’는 식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이어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고, 당신에게서 짐을 지는 법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짐을 없애 주시겠다는 말씀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짐을 지고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대신 그 짐을 어떻게 지고 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분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분께서는 당신의 짐을 기꺼이 지셨고, 그 안에서 기쁘게 사셨습니다. 이것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짐이 더 가볍게 느껴지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의 짐을 기쁘게 지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비결은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때 겪는 고통은 고통이기에 앞서 기쁨입니다. 몸으로 느끼는 아픔보다도 막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고통을 이기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아버지의 뜻에 ‘자발적인 순종’을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께 배워야 할 점은 진심 어린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와 짐
-김권일 신부-
“우주가 곧 나의 마음이고 나의 마음이 곧 우주다.”라고 주장한 중국 송나라 시대의 철학자 육구연은 하늘이 부여해 준 ‘본래의 마음本心’을 체득하는 것을 학문의 종지로 삼았다. 그는 우주의 모든 이치가 마음 안에 있고 그러기에 우주가 곧 나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사물에 다가가 그 사물 안에 내재한 이치를 파악하는 과정을 축적하다 보면 세계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보는 활연관통豁然貫通의 체험에 이른다고 주장한 주자의 학설을 육구연은 너무 번잡하다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육구연은 자신이 내세우는 공부는 ‘본래의 마음’만 자각하면 되기에 간단하고 쉬운 공부라고 주장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복잡하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율법규정 대신에 간단하고 쉬운 계명을 제시하신다. 예수님 당시 유다교에는 613개의 율법규정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율법규정들을 지키려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들었겠는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613개 율법규정 아래 시달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실제로 율법학자들은 이러한 율법규정들을 가지고 민중의 삶을 힘들게 하고 억압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와 유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율법의 압제 아래 고생하며 힘들어하는 민중에게 예수님은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부과하신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란 곧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사랑의 계명(마태 22,34-40)이나 또는 황금률(7,12)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강조하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나와 함께해 주신다고 한다. 그분께서 나의 도반이 되어주신다고 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 보자! 그리고 참 사랑을 배워보자!
요즘 날씨가 정말로 좋지 않습니다. 계속되는 비로 인해서 아침마다 하는 운동도 하지 않다보니 몸도 너무나도 찌뿌듯합니다. 특히 이번 주 토요일까지 비가 계속된다고 하는데, 사람들도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렇게 나쁜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저녁마다 계속해서 반가운 사람들과의 모임이 있거든요.
지난달까지 인천교구 설립 50주년 행사와 각종 강의로 인해서 아는 분들과의 만남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는 요즘 계속해서 그분들과 만남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유학 갔다가 잠시 휴가차 한국에 들어 온 신부들, 초등학교 동창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지인들 등등……. 이러다보니 날씨가 좋지 않다고 짜증 날 일이 없습니다. 좋은 사람들, 그리운 사람들을 만남으로 인해 좋지 않은 날씨를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만남을 가지고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좋은 만남, 또 다시 보고 싶은 소중한 만남을 갖는다면 외적으로 나빠 보이는 여건조차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가게에 들어갔는데, 손님 대접도 하지 않고 오히려 손님에게 짜증과 화를 낸다면 어떠할까요? 이 가게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생각과 함께 화를 내며 가게 문을 박차고 나설 것입니다. 반대로 손님을 주인으로 생각하면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어떨까요? 그 가게에 대한 좋은 인상과 함께 다시 그 가게를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가득할 것입니다. 당연하겠지요?
우리 스스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즉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먼저 이렇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결코 내게 욕하면서 싸움을 걸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도 기분이 좋게 되어, 역시 좋은 모습으로 나를 대하게 될 것입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도 매일 매일 좋은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이러한 친절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시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먼저 최고의 서비스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의 환경 탓을 하며 스스로를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해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취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 잘못 하시지 않았습니다. 내 주변의 여건들도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변의 여건들과 함께 살아가는 내 마음의 옹졸함이 최악의 상황을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이 세상의 삶은 가장 편한 멍에이며, 가장 가벼운 짐입니다.
열 가지 중 아홉 가지가 떠나더라도 당신을 위한 한 가지가 남아 있다면 충분하다(루쉰).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이영춘 신부-
크기도 같고 무게도 같은 물건이 어느 때는 더 무겁기도 하고 어느 때는 더 가벼울 때가 있습니다. 무게가 같은데 더 무겁기도 더 가볍기도 하다니…. 왠 궤변인가! 하지만 이는 궤변이 아닌 사실입니다.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할 때에는 왜 그렇게 힘들고 시간도 더디게 가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힘들어도 신나고 또 시간은 어찌 그리 빨리 흘러 버리는지, 이게 다 마음의 시간이나 무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멍에는 그 자체로 부담이고 짐은 그 자체로 무게를 지닙니다. 하지만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의 멍에는 편하고 사랑의 짐은 가볍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짐 진 자 모두 당신께 오라고 하십니다. 삶의 짐을 어깨에 메고 혼자 고군분투하지 마세요. 주님을 찾으세요. 짐을 다 벗고 난 후에 주님을 찾겠다 하지 말고 짐을 지고 있을 때 찾아가세요. 그리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짐을 지는 법을 배우세요. 주님께로부터 ‘위하여’라는 법을 배우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듯이 누군가를 ‘위하여’ 짐을 지는 법을 배우세요. 주님을 찾고 주님께 배우는 동안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모든 멍에와 짐은 편하고 가볍게 될 것입니다.
삼촌
- 신재용-
저보다 세 살 많은 삼촌이 한 분 계십니다. 30년 넘게 정신장애를 앓고 계신, 저에게는 유일한 삼촌이십니다. 삼촌의 정신장애는 제가 대학생 때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하고 열흘째 되는 날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생을 달리하셨습니다. 삼촌이 가장 좋아하는 계란을 사 가지고 오시다가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할머니가 시내버스에서 내리실 때 뒤에서 오는 시외버스를 못 보신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충격이 컸습니다. 며칠 후 저는 광산촌의 학교에 발령을 받아 교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충격을 하느님께 기대어 잊어보려고 성당도 열심히 (?) 다니는 척했습니다. 성당에서 만난 아가씨와 결혼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직장생활을 하며 피곤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잊고 살았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삼촌도 잊고 주님도 잊고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아내는 부모님과 아이들과 남편인 저를 챙기느라 많은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결국 힘든 농사일과 삼촌한테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어머니가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깨달음을 주심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잊고 살아왔던,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던 저 자신을 깨닫는 데 너무나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냥 편하게 세상을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주님께서는 멍에도 얹어주시고 짐도 지워주심을 이제야 압니다. 긴 세월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보속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 30) 아멘.
영국에 살던 한 백인부부가 아프리카로 이민을 계획했습니다. 그들은 곧 전 재산을 처분하여 아프리카로 가서 큰 농장을 경영하였지요. 넓은 농토와 수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백인부부는 얼마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온지 삼 년도 채 못 되어 남편이 풍토병에 걸려 그만 죽고 말았어요. 더구나 그 해는 심한 가뭄으로 잘 되던 농사까지 망쳐 백인부인은 아주 난처한 지경에 이르렀지요. 부인은 남편도 잃은데다가 농사도 잘 되지 않자 결국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부인이 떠날 때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 하녀의 어린 딸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주인 여자에게 선물을 주었답니다. 그것은 소녀가 벌판에서 주워 가지고 놀던, 자신이 가장 아끼던 빛나는 돌이었지요.
고향으로 돌아간 부인은 소녀가 준 돌이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임이 밝혀져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흑인 소녀는 차차 부인에게서 잊혀 갔지요.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자신을 백만장자로 만들어 준 흑인소녀가 생각난 부인은 싸구려 인형을 하나 사서 아프리카로 보냈습니다. 흑인소녀는 그 인형을 받고 너무 좋아했어요. 날마다 인형과 함께 놀면서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대화하듯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지요. 그리고 소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가 걸어 다니고 말을 할 즈음 그녀는 그 인형을 자기 딸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 딸은 그의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인형과 더불어 행복하게 지냈지요.
한편 부인은 자신의 돈을 노리는 많은 사람들의 권모술수에 수없이 시달려야 했으며, 나이가 들어서는 상속 문제로 자식들과 불화가 생겨 집안이 둘로 갈라져 원수처럼 지내야만 했습니다. 결국 백인부인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양로원에서 쓸쓸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고 해요.
과연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세속적으로는 백인부인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것을 누릴 수가 있었지만,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에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흑인소녀는 자그마한 인형이지만 그를 통해서 누구보다도 행복해질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님께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서 안식을 찾기보다는 당신에게로 오라고, 그래야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만 참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쫓고 있는지요?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쫓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한 사람의 인간이 최고의 사랑을 성취한다면 그것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가진 미움을 해소시키는데 충분하다.(마하트마 간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양승국신부-
<환대의 주님>
형제들과 함께 강가로 소풍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본격적인 피서철이 가까워오니 벌써 어떤 분들, 이때다 하며 한몫 보시려고 마음 단단히 잡수신 분위기입니다. 웬만큼 쉴만한 물가는 사용료를 지불해야하는 평상으로 빼곡합니다.
평상을 빌릴 처지는 아니고, 사람들도 별로 없기에 평상 바로 밑에 깔개를 펴고 둘러앉았습니다. 카드 한판 끝나기도 전에 무섭게 생긴 관리인이 달려오시더니, 한철 장산데, 이러시면 어떡하냐며, 닭백숙을 시키든지, 아니면 사용료 3만원을 내든지, 아니면 당장 꺼지라고 하시네요.
할 수 없이 강줄기를 따라 더 올라가보니, 인적도 없고, 관리인도 없고, 꽤 괜찮은 물가가 있어서, 이게 웬 떡이냐며 즉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시 카드놀이를 시작하는데, 왠지 불안하다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호루라기까지 불며 달려와서 사유지라며 쫒아내는군요.
잠시였지만 이리저리 내쫒기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 천덕꾸러기가 되어 내몰린다는 것, 참으로 기분 씁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환대의 주님이십니다. 선인이든 죄인이든 그 누구도 상관하지 않고 기쁜 얼굴로 환영하시는 넉넉한 주님이십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그 누구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우리의 주님은 특별히 삶이 꼬이고 꼬여가는 사람들의 피난처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특별히 캄캄한 밤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위로자이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너무나 큰 고통에 짓눌려 울고 있는 사람들의 다정한 친구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사방이 넘지 못할 막다른 높은 담으로 꽉 막힌 사람들의 희망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주님, 너무나 감사하게도 사방이 꽉 막혀 꼼짝달싹 못하는 우리에게 또 다른 문 하나, 생명의 문 하나를 활짝 열어주시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혹시라도 지금 철저한 소외감에 휩싸여 계십니까? 혹시라도 지금 큰 걱정과 근심이 시달리고 계십니까? 혹시라도 지금 등 뒤에 지워진 십자가의 무게가 천근만근입니까? 혹시라도 사방이 꽉 막혀있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해결사이신 주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친정엄마 같으신 그분께로 나아가십시오. 그분께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저 짠한 얼굴로, 그저 환한 얼굴로 맞아주시는 환대의 주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보기만 봐도 안심이 되는 우리 삶의 등대이신 주님, 다가서면 너무나 가슴 훈훈해지는 벽난로 같은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때로 외롭고, 때로 슬프고, 때로 고달픈 순간도 많았지만,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오직 한 가지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힘든 사람들 무조건 다 내게 오라며 크게 손짓하시는 환대의 주님을 닮은 우리 교회, 생각만 해도 마음 푸근해지는 고향 같은 우리 교회, 남은 내 인생 완벽히 책임져줄 따뜻한 둥지 같은 우리 교회...
내 멍에를 메어라
-이훈 신부-
오늘 복음을 대하면서 내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질문이 있다면, 나는 고생하고 있는가? 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고생하고 있는가? 하고 되묻게 됩니다. 과연 이 고생이 주님을 위한 고생인가, 나를 위한 고생인가 계속되는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지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예수님을 마주해봅시다.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사랑의 멍에입니다. 사랑의 멍에는 그 무게를 느낄 수 없습니다. 어느 보이 스카우트 캠프에 들어오는 학생이 등에 어린아이를 업고 왔습니다. 지도자들은 그 학생에게 등에 업은 아이가 무겁지 않느냐고 물으면서, 그 아이를 받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겁지 않아요. 이 아이는 내 동생이거든요.” 어쩌면 주님의 멍에도 이러한 멍에인지 모릅니다. 메어도 무게를 느끼지 않는 사랑의 멍에. 우리가 메고 있는 멍에가 무겁다면, 그것은 의무의 멍에이거나 헛된 욕망의 멍에인지 모릅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멍에는 엄청난 무게로 우리의 삶을 짓누를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메고 있는 멍에는 어떤 멍에인지 돌아보도록 합시다.
밤하늘
- 임원지 수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할 때 만나를 주시면서 여섯 째 날에는 다음날 분량까지 내리시어 하루를 쉬게 하셨다. 그 안식일을 기념해 유다인들은 금요일 해 질 무렵부터 다음날 어두워질 때까지 휴식하며 거룩히 보낸다고 한다. 분가한 식구들이 모여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여 자존감을 높이며 즐겁게 지내는 일은 과연 선민답다. 가장들에게 하루의 짐이 가볍지 않다. 그런데도 당신 짐은 가볍다 하신다. 가볍게 사는 방법이 따로 있나 궁리를 좀 해보고 싶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건 어떨까? 오늘이 음력으로 윤 5월 24일, 그러면 별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의 방해꾼인 달님이 하현달로 이울어 느즈막히 나타나니, 오늘 밤은 별 보기에 딱이다. 구름만 없으면 앙증스런 돌고래도 볼수 있다. 연길에 갔을 때 푸르청청 탁 트인 밤하늘, 저 남쪽에 곱디고운 궁수가 아른아른 떠오르는 모습에 황홀했던 적이 있다. 벚꽃 철, 단풍 철 되면 매연 뿜어대며 고속도로를 메우며 찾아가기도 한다. 별은 반쪽 하루에 사철 피는 꽃이 아닐까. 오늘 같은 날, 구름 없는 때를 찾아 별을 보러 가족들과 함께 길을 나서는 일은 어떨까?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확인하고, 아크투루스, 왕관자리, 전갈의 안타레스도 두루 찾아 인사하며 밤하늘의 주인이 되어보면 주님 주시는 안식과 평화와 기쁨이 그리 멀리 있지도 않으리.
“전깃불이 가려지는 산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직녀별과 견우별은 서쪽으로 기울어 있고, 머리 위에는 페가수스의 사각형이 안드로메다의 별들을 긴 꼬리처럼 달고 하늘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다. ”(곽영직,「별자리 여행」)
평안함을 누리기 위해서
-전삼용신부-
얼마 전에 오랜만에 동기모임을 하였습니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동기들이어서 참 반가웠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 편안하고 즐거웠습니다. 동기 신부들도 본당이나 사목 현장에서는 근엄한 목자들이고 책임자들이지만 동기 신부 모임에서는 모두 신학교 때의 천진난만했던 모습으로 돌아가서 장난치며 뒹굴고 신자들 앞에서는 할 수 없었던 농담도 스스럼없이 해 가며 스트레스를 풉니다.
이렇게 동기모임이 편안하고 즐거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동기 신부들은 오래 전부터 함께 해 왔고 또 같은 신부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해도 이해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이 사실입니다.
이야기하는 것들을 들어보았더니 어떤 동기들은 신자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신자들 앞에서는 경직되고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 하다 보니 신자들을 대할 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부님은 술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는지 혼자서나 사제들과는 술자리를 자주 하지만 아예 신자들과는 거의 함께 술자리를 하지 않습니다.
저도 말도 몇 번 해 보지 않은 수녀님이 저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말을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 듣고는 다른 수녀님들 대할 때도 항상 조심하고 경직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만날 때 마음이 편한 사람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도 다 이해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휴식이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분입니다. 예수님께 달려가서 아무 이야기를 해도 그 분은 다 받아주십니다. 다만 그분께 달려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수님은 모든 투정까지 다 받아주십니다. 그분은 겸손하시고 온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힘들고 지친 모든 사람을 당신께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사람의 육체가 잠과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버티어 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휴식을 무시하고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영적으로 병들고 지쳐 쓰러지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영혼의 휴식을 우리는 ‘기도’라고 부릅니다.
어떤 자매님이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자신은 매일 정해놓은 시간대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안식을 찾으며 행복하게 살아왔는데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신경 써야 할 일도 많아지고 그래서 기도시간도 줄어들고 마음의 평화도 줄어드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제들도 동기모임이나 우리를 잘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휴식이고 에너지를 얻는 것이 되고, 신자들이나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되어야할까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만이 휴식이고 에너지를 얻는 것이고, 사람을 만나는 것은 휴식을 깨뜨리는 것이고 힘이 드는 것이 되어야할까요?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는 기도만이 안식이 되기를 원치는 않으십니다. 물론 기도가 절대적인 휴식의 원천이 되는 것은 맞지만 사람을 만나는 데에서도 스트레스를 덜 받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안식을 얻는 방법은 그 분과 함께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배우는 것에도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인정하고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기도 때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을 배운다면 그 때서야 비로소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성격 유형 검사에서 상담을 해 주신 분은 저를 내향적이라고 하셨고 그래서 저는 혼자 있을 때 힘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저는 기도에서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저를 아는 한 분은 제가 수백 명 앞에서 강의를 할 때도 전혀 떨지 않는 면을 말하며 외향적인 면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좋은 사람을 만나면 힘을 얻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 노래도 못 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커 가면서 사람이 두려워지는 이유는 바로 나의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 ‘나는 내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라고 몇 번이고 되새깁니다. 내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데 긴장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희한하게 정말 떨리는 마음이 사라지고 편안하게 강론이나 강의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도 하나의 겸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하셨기에 전혀 긴장함이 없으셨던 것처럼 내 영광을 포기하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해 할 때 뭐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겸손을 배우면 사람들 앞에서조차 평안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평안하고 힘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완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을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만이 필요합니다
가장 편한 멍에
-김찬선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무거운 짐 진 자는 모두 주님께 오라 하십니다. 오라 하시는 이유는 당신의 멍에를 메고 짐 지는 요령을 배우라 하심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멍에를 메면 우리가 지는 무거운 짐은 당신이 지는 가벼운 짐으로 바뀐다 하십니다.
요즘 제가 사는 정동 수도원은 안팎으로 공삽니다. 이번 여름을 기해 저희 수도원도 몇 년을 미뤄온 배관 공사를 하는데 직영으로 하기에 저희들이 허드렛일을 합니다. 무거운 짐을 밖으로 내는 일을 어제 했는데 제가 일하는 것을 보고 한 형제가 이렇게 하라고 요령을 가르쳐줬고 그렇게 하니 무거운 짐이 훨씬 가벼워졌습니다. 똑같은 무게인데 들것을 사용하는 요령을 바꾸니 가벼워집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멍에를 이용하여 짐 지는 법을 배우라 하심도 이와 같은 것 같습니다. 주님처럼 겸손과 온유의 멍에를 메고 짐을 지면 가벼워진다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하면 교만하고 고집 셀 때보다 짐이 가볍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하면 마땅히 짐을 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기에 가볍지만 교만하고 고집이 세면 당나귀처럼 버팅기기에 그만큼 무겁습니다. 지지 않으려는 짐을 지게 되면 스스로 지는 짐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그러나 짐을 가볍게 하는 가장 편한 멍에는 사랑일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보다도 더 스스로 짐을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빠 죽지는 마세요
-남상근 신부-
바쁜 날들입니다. 모두가 바쁘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죽을 만큼 바쁠까요? ‘바빠 죽겠다’고 말하니 말입니다. 힘든 날들입니다. 모두가 힘들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죽을 만큼 힘들까요?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니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바쁘십니까? 무엇 때문에 힘드십니까?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을 얻지 못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화롭지 못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빠 죽을 것 같고,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예수님께서도 멍에를 얹어주시고, 짐도 지워주신답니다. 그냥 있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편하긴 하지만 멍에를, 가볍긴 하지만 짐을 얹어주시고 지워주신답니다. 세상이 주는 멍에는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우리를 기도하게 하는 멍에입니다. 세상이 지워주는 짐은 나를 힘겹게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짐은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하는 짐입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사랑은 움직이는 것
-노성호 신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 살아가며 그분의 사랑을 받기 위해 율법 준수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365개 금령과 248개 명령으로 구성된 총 613개의 율법을 빠짐없이 지키면서 살았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만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야만 의인으로 인정받는다고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율법 준수에는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 율법이 사람을 얽매이게 만들고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서, 심지어 율법 조문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기는 사람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결국 사람이 법을 위해서 존재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수많은 율법 조문을 두 가지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를 통해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가 불편하고 무거웠던 율법의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당신의 편안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짊어짐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주님은 이렇게 율법의 멍에와 짐에 짓눌려 있는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면서 당신의 사랑을 전해 주셨다. 그것은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보면서 지시하거나 강요하는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눈높이를 맞추시며 어떠한 강박도 없이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랑이다. 그런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쪽으로 움직여서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이다. 그분의 사랑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어렵고 두렵고 저 멀리 계신 분으로만 생각하면서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곁에 찾아오셨고, 지금도 계속해서 당신 사랑을 세상 곳곳에 전해 주기 위해 어디론가 움직이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사랑을 따라 그분께서 계신 곳으로 조금씩 움직이면서 마땅한 사랑을 드릴 수 있어야겠다.
<독서> :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구하는 모세 -경규봉 신부 -
하느님으로부터 함께 계시며 힘이 되어주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여쭌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라고 답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파견하신 분은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이스라엘 선조들의 하느님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하느님이시라고 말하도록 하신다.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와 억압에서 해방시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시기로 하셨다고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장로들과 함께 이집트 왕을 찾아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이집트를 떠나야 하겠다고 말하도록 한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름은 그 사람의 기질과 성품, 지위와 생애를 반영한다. 특히 고대 세계에서 권력자들은 사신을 보낼 때 자신의 권위를 위임하는 뜻으로 자신의 이름이 담긴 도장이나 편지를 보내거나, 사신에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름 속에는 그의 권위와 힘이 담겨져 있다. 신약 시대의 사도들도 복음을 전파할 때,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4,7-12). 따라서 모세는 자신을 이집트에 파견하시는 절대자의 이름을 확인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이름이 무엇인지를 여쭌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라고 답하신다. 이는 스스로 있는 분, 시작과 끝이 없으시며 언제나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란 뜻이다. 창조된 존재들과는 달리 능동적으로 영원 이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묵시 1,4.8). 절대적으로 완전하시고, 독립적이시며 모든 인과법칙을 초월하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본질과 속성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더욱이 이 말씀 속에는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고 말씀하신 것을 꼭 이루신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이 이름이 곧 ‘야훼’이다. 히브리인들은 ‘야훼’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출애 20,7; 신명 5,11) 그 이름 대신 ‘아도나이’(주님)라고 불렀다. 그 까닭은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었다. 히브리인들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대사제가 지성소에 들어가서 조그마한 소리로 하느님의 이름을 한 번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백성은 대사제가 살아나올까를 염려하여 대사제가 성소 밖으로 나오기를 숨죽여 기다렸다고 한다.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바로 그처럼 스스로 계시는 하느님, 영원하시고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이 곧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데려오시고, 보호하시며 지켜주신 하느님, 그에게 약속의 땅과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 하느님, 이삭과 야곱과도 함께 계시며 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느님, 바로 그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당신의 이름으로 이집트에 가서 이스라엘을 구해오도록 하신다. 모세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힘과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도록 하신다. 이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40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 동안 모세를 천한 목자로 살도록 하셨다. 모세의 힘과 지혜, 능력 모두가 쇠하기를 기다리신 것이다. 모세가 자신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과 능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여 당신의 일을 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하느님의 일은 오직 하느님의 힘으로 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자신의 힘과 능력이 쇠할 때까지, 오직 하느님의 힘과 능력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리하여 모세와 함께 하시고 그에게 힘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신다...◆
어떻게 이 짐들을 지고 갈 것인가? -김형태 신부-
오늘의 복음에서 하느님의 사랑스런 고백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매번 가집니다. 고백성사를 드리거나 면담을 하다 보면 참으로 세상의 아픔과 어려움의 짐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는 체험들을 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의 삶에는 두 종류의 아픔과 어려움 짐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고생스러운 짐. 즉 사람이 스스로 사서 얻은 짐입니다. 자신의 실수, 게으름, 과욕 때문에 얻어진 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거운 짐. 즉 이 세상에 살면서 원하지 않더라도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짐들입니다.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사회와 가정에 태어났기 때문에 짊어질 수밖에 없는 짐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그 입장과 상황이 다를지 모르지만 성서에서 말씀하시듯이 '고생스럽고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생스럽고 무거운 짐들을 받아들이지도 않을뿐더러 당장이라도 벗어 던져버리고 싶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힘들어짐을 또 한번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짐들을 지고 갈 것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간혹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께서 '편히 쉬게 하신다'는 말씀 때문에 그 짐이 없어지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여기서 멍에는 무엇입니까? 두 마리 소가 보조를 맞추며, 함께 짐을 끌도록 고안된 도구이면서 동시에 소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즉 어느 한쪽이 앞서거나 처지면 서로가 힘들게 되어 있는 도구입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많은 어려움들과 아픔들을 겪으시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실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과 함께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주님과 함께 보조를 맞추면 그 짐들은 가벼울 것이라는 뜻이며 또한 이러한 가르침과 삶을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한 어린이가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가다가
-남을우 -
한 어린이가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가다가 문득 교회 앞에 써붙인 글에 눈이 번쩍 뜨였답니다.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공부도 하기 싫고, 성적표를 받았는데 부모님께 말씀드릴 면목도 없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던 차에 그 말씀을 읽고는 “좋아, 그럼 내 책가방과 성적표를 여기 놓고 가요” 하곤 막 뛰어가더라는 겁니다.
저는 그 어린이의 심정이 이해되었습니다. 저도 나이 들어 그런 경험을 하였답니다. 저는 삶의 뒤안길에 들어선 나이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직도 갓난아이랍니다. 이번 사순절 시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함께하는 시간을 꼭 가져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는데 토요일 밤부터 위경련이 일어나 통증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정말 이를 악물고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고통을 참으면서 저는 이것이 마치 좋지 않은 유혹(?)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꼭 참례하려는 의지를 가졌지요. 미사가 끝난 후 주님의 부르심과 나의 의지가 함께 승리하였다는 느낌, 그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 나와 밝은 천지를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통증도 사라져 갔습니다.
그날 저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고 하신 말씀에서 주님의 품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강호성 신부-
예수님께서 살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무거운 짐이 되고 있었습니다. 근본정신인 사랑과 자비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율법은 힘겨운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 23,4를 보면,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세이들에 대하여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세의 율법이나 아론의 제사법이 당시에 그만한 이유와 그 의의가 따로 있었겠지만 평범한 서민들에게는 크나큰 짐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무거운 짐 진자는 다 내게로 오라!” 하시며, 그 모든 무거운 짐을 당신이 우리에게서 치워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미로운 말입니까!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같이 점점 힘들어져 가는 세상살이 속에서 오늘의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희망을 안겨줍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삶의 무게들을 당신께서 함께 나누어지고 편하게 해 줄테니 당신께 와서 머물고 함께 하자는 초대이지 않습니까? 당신과 함께 하면 그 무거운 짐, 우리를 괴롭히는 갈등과 힘든 생활도 가벼워진다는 초대이지 않습니까?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억지로 지워주던 죄의 무게를 덜어주듯이 우리들의 죄의 무게도, 삶의 무게도 덜어 주신다는 말씀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느님과 함께 하면 현실의 이 어려움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날들만 계속됩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성당에 가서 기도하거나 수도자나 성직자와 면담을 하면 다 해결이 됩니까? 기도를 해도 응답이 바로바로 오던가요? 혹시 참고 기도하자에서부터 하느님의 뜻을 기다려보자는 답까지는 나오되 현실적인 대답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차라리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복채를 좀 내어놓으면 현실적인 예와 아니오가 나오기는 합니다. 때로는 부적까지도 나옵니다. 물론 그런 대답과 부적이 마음의 평안을 주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마지막까지 옳은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용하다는 점쟁이, 철학관의 점괘들 또한 우리의 현실을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그저 잠시간의 안정을 줄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당신의 짐은 가볍다는 그 말씀들이 지금 우리에게는 어쩌면 그냥 이상에 불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하나의 최면에 불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하느님 체험 없이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않고서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몸으로 살아내기 전에는 오늘 이 말씀들이 하나의 이상이나 최면에 불과할 수 도 있습니다. 용하다는 점잼이 집에서 나오는 말들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 배우라고 권고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상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이의 죄의 짐을 한 몸에 지니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 또한 당신과 당신을 닮은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으로 살아낼 수 있을 때 진정한 예수님의 멍에가 무엇인지를 알고, 느끼고, 배우고,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우리는 어디로 많이 기울어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에,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덕일 때, 그 힘든 상황을 이겨내기 위하여 하느님께 매달리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들에 기대고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다른 그 모든 것들 위에 하느님을 두고 하느님께 의지한다면 그 어떠한 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체득하고, 하느님을 따라 산다면 말입니다. 하느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저 손만 비비고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현실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넘지 못할 산은 없다 했습니다. 하물며 마지막까지 함께 해 주시는 그분이 계신데 이겨내지 못할 십자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스승 그리스도 예수의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습니다. 아멘.
내 멍애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김대성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멍애는 편하니 내 멍애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멍에라는 표현이 영 귀에 거슬립니다. 멍애가 무엇입니까? 달구지나 쟁기의 채를 잡아매기 위하여 소나 말의 목에 가로얹는 나무....라고 국어사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멍애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멍애는 부자유스럽게 하여 짐을 잘 지고가도록 강제로 얽어 매는 장치인데, 누가 그것을 스스로 원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멍애를 풀어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 멍애를 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어주는 멍애가 편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애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멍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멍애를 싫어하지만 멍애 없는 삶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어떤 형태로든 멍애를 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지워준 것일 수도 있으며,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의도했건 안 했건 간에 우리 모두는 멍애를 메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떤 멍애를 메고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좀 편해 보이고 수월해 보이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는... 이내 사라지고 말 그런 것들에 매달리는 멍애를 맬 것인가, 아니면 참 행복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그런 멍애를 맬 것인가....우리들은 매일매일 성찰해야 하고 또 선택해야 합니다.
내 멍애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애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이 주신 멍애를 기쁘게 매고 가겠다고 결단했으면서도, 어느새 저는 다른 멍애를 매고 가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때 저는 제자신이 소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고 고집스럽습니다.
예수님의 멍애를 팽개쳐버렸을 때,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멍에에 갇히고 마는 제자신을 봅니다. 멍애에서 벗어나는 길은 멍에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멍애 속에서 평안하게 머무르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내 멍애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애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묵상할수록 깊고 넓은 예수님의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진정으로 주님이 주신 멍애를 기쁘게 매고 갈 수 있는 은총을 다시 한번 간청해봅니다. 그 멍애 안에서 평안하게 머무르고, 안식을 얻을 수 있기를 마음모아 기도드립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양승국신부-
<그분과 나 둘만이 남아있는 감미로운 순간>
안식(安息)이란 무엇입니까? 말마디 그대로 ‘편히 쉼’을 의미합니다.
편안한 안락의자에 거의 몸을 파묻다시피 깊숙이 앉아 좋아하는 비디오 한편 보는 것도 좋은 안식이 될 것입니다.
시원한 계곡 흐르는 물 위에 차양을 친 다음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어도 엄청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쉬는 것도 한 두 시간이지 계속 그러고 있다 보면 슬슬 무료해집니다. 지루하고 심심해집니다.
더 의미 있는 휴식이 되려면 그 ‘누군가’ 필요합니다.
결국 가장 좋은 휴식, 그간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안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그 자체가 가장 효과적인 휴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경치나, 분위기, 주변 상황은 더 이상 그리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요, 다른 것 안 해도 괜찮습니다. 그의 옆에 있는 그 자체로, 그의 존재 자체로 가장 감미로운 휴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안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 결코 변치 않는 영원한 연인,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변하고, 다 떠나가는 반면 우리가 백발이 되더라도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시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사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 앉아있는 순간, 미사에 몰입하는 순간, 하느님을 찬미하는 순간, 영적독서에 깊이 심취하는 순간, 깊은 묵상에 잠기는 순간, 이 세상 모든 대상이 내 앞에서 사라지고 그분과 나 둘만이 남아있는 감미로운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참된 안식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지친 마음과 영혼의 치료소
-서울이기양 신부-
사람은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아갑니다. 어디가 아프냐에 따라서 병원도 여러 과목들로 나뉘어지지요. 이가 아프면 치과에, 눈이 아프면 안과에 가고 배가 아프면 내과를 찾는 등 신체 부위에 따라 다양한 진찰과 치료를 받습니다. 그런데 마음과 영혼이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여러분은 마음이 아프면 어디로 갑니까? 마음이 아플 때 어디를 찾아가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음의 병이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프게 되어 있지요. 간혹 이 병원 저 병원 아무리 쫓아 다녀보아도 의사는 별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본인은 아파서 죽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병이 난 것이지요.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은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정신과 영혼이 있지요. 그 정신과 영혼이 병들고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수시로 병원에 들락거리며 치료를 받지만 마음의 병은 치료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심란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미아리로 점을 보러 갑니다. 불안하고 어찌해야 될지 모른다며 길을 묻지요. 그런데 대부분 점쟁이들은 나쁜 것을 하나씩 지적하고 넘어갑니다. 불안해진 사람들을 더욱 의지하게 만들어 다시 찾게 해야 하니까요. 예를 들어 결혼을 앞둔 남녀 두 사람이 소위 말해서 궁합을 보러오면 안 맞는 것이 있어서 어느 한 쪽이 크게 다치니 결혼은 안 되겠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들은 당사자나 부모들은 쉽게 그 말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다시 가서 그 불운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하고 의탁하게 되지요. 결국 점치는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행위가 지금도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점쟁이를 만나서 해결이 되겠습니까? 한편 어떤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갑니다. 갈 수 있지요. 그러나 정신과 의사들이라고 불안한 마음을 다 치료해 주고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이처럼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정신과 영혼은 어디에서 어떻게 온전히 치유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8.29)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당신께로 오라고, 당신이 편히 쉬게 하겠다고, 우리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어하는지 다 알고 있으니 어서 와서 안식을 누리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엉뚱하게도 다른 곳으로 가서 헤매고 다니다가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우리는 이제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다 나에게로 오너라.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느님께로 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먼저 갈 터이니 ??죽음이여, 어서 오라.?‘ 이런 뜻일까요? 아니지요. 하느님께 간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생각하고 하느님 안에서 쉰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은 구약과 신약성경에 잘 나와 있지요. 바로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과 성현, 성인들은 조용한 공간에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세상의 모든 왕국 위에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2열왕19,15)
유다 왕 히즈키야가 아시리아의 공격 앞에서 하느님께 올린 기도입니다. 이런 고백은 구약성경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구절이지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확인하고 실행하실 때 외딴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다음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1,35)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안에서 쉬고 하느님 안에서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요. 제일 미개한 것이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이고, 가장 지혜로운 길이 참 진리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오너라.?“고 하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지요. 그 말씀의 힘은 지난 이천 년 동안 끊임없이 발휘되었고 지금도 한결같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쉬는 사람의 모습은 다릅니다. 편히 지내서 살이 붙고 성형으로 가꾼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리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에서 오는 편안하고 넉넉한 모습은 따로 있지요. 그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여유가 있습니다. 깊은 기도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은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지요.
우리는 성인 성녀들의 모습에서 안식을 얻은 사람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신부님, 저는 기도할 줄 모르는데요.?“
기도 얘기만 나오면 주눅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기도학교>를 통해 계속해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배우는 것은 시작입니다. 끊임없이 스스로 연습하고 실행해야 하지요. 제일 좋은 방법은 성체 조배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성체 조배실에 들어가면 금방 나올 수도 없고 숨도 쉴 수 없는 분위기가 편치 않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금방 나와도 괜찮습니다. 차츰차츰 익혀나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하다보면 자리잡기 시작할 것입니다.
조배실에서 기도하는 좋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성경과 노트, 펜을 가지고 들어가 천천히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나 구절이나 상황에서 뭔가 다른 느낌이 올 때 거기에 머무르십시오. 사람마다 느낌이 오는 부분은 다 다릅니다. 불안한 사람은 평화가 와닿고,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용서가 와닿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머무르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때의 느낌을 적을 수 있으면 그대로 솔직히 적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10, 20분 시간이 금방 지나가지요. 그 말씀이 좋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큰 분심 없이 들어온다면 계속 머무십시오. 이런 식으로 기도 생활을 서서히 준비해 가면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게 되고, 그것이 쌓이면 이제 밤이 늦어도 조배실을 떠나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머지 않아 그는 하느님 안에서의 안식과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좋은 성당이란 잘 지어진 건물이나 세상의 명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느님 안에서 쉬고 지혜를 찾는 개인과 공동체가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 있습니다.
몇 년 전 폴란드에 갔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유서 깊은 성당들을 둘러보는데 가는 곳마다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 신자들은 지나가는 길에 성당이 있으면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래서 ??공산 국가인 폴란드에서 교황님이 나셨구나.?‘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지요. 반면에 이태리에 들어서니 로마의 성당들은 화려한 예술품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 웅장함과 규모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며 찾고 있지요. 그러나 그 곳에는 신자는 없고 관광객들만 가득했습니다. 왜 그곳이 공동화되는지를 알 수 있었지요.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11,28)하시며 지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치료소가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고 찾아낼 수 없고 치료할 수 없는 모든 아픔을 예수님께서는 순식간에 어루만져 치료해 주십니다. 이는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시고 버림받은 과부와 고아를 치료해 주신 이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쉬는 사람이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기적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매번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천 년 전 옛날 이야기 속의 예수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참 쉼은 시골을 찾아가는 것도, 찜질방을 가는 것도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차원이 다르지요. 하느님 안에서 쉬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운 사람인지요?
예수님의 멍에는.....
-정 호 신부-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 어떤 식의 찬미가 어울릴지 몰라 지극 정성을 기울이지만 사실 예수님의 세상살이는 그렇게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지극히 높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가장 평범한 사람으로 오셔서 그 사람의 모습으로 사신 분, 사람답다는 표현의 중심에서 살아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셨고, 항상 놀림감이나 표적이 되곤 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 대해 말하면서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은총이나 축복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을 전하는 이가 항상 죄인들과 함께 지내고 그들과 말하는 것을 즐기고 생활도 항상 구차하기 짝이 없는 가난한 모습이었으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하느님의 사람'이라 인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오히려 당신은 그렇게 사실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당신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 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가난하고 죄인으로 낙인찍혀 평생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겹게 살 수 밖에 없다고 운명지워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 에서 제외된듯 여겨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늘 함께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면 왜 편히 쉬게 되는지 말씀은 이어집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과 함께 해서 얻게 되는 두 가지 선물. 그것은 온유함과 겸손함입니다. 무엇인가를 두고 마음에 품어 생각하고 참을 수 있는 온유함과 모든 것에 자만하지 않고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겸손함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할 때라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게 하는 참 사랑의 조건들입니다. 그러니 그 일이 멍에와 같다 하더라도 억울하거나 싫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시는 동안 우리와 함께 하셔서 한 순간이라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죄 많은 사람들 그 누구와 함께 하시더라도 그들을 품어 생각해주시고, 그들이 회개할 때를 기다려주시고, 당신의 최선을 다해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더 없이 어리석게만 보여 함께 할 수 없는 조건이지만 사실은 가장 하느님의 사랑에 충 실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난한 죄인들과의 삶은 사실 그분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을 그렇게 대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좋아합니까 ? 그래서 그분의 멍에를 맬려고 합니까 ? 이 질문이 우리에게 고통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지금 주님과의 거리, 그리고 사람답다는 말과 우리 자신의 거리를 재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 법의 멍에와 예수님의 멍에 -
박상대 신부 -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사회는 양심과 도덕, 풍습과 관습, 그리고 법률과 헌법의 조화로운 지배를 받는다. 올바른 양심과 도덕은 좋은 풍습과 관습을 만들어 주며, 이는 또다시 정감(情感)과 평화(平和)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준다.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이 개인적인 차등(差等)을 보이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법률과 헌법이 등장한다.
법(法)이란 몇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또는 모든 사람들의 뜻을 모아 제정되는 것이기에 다같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준법정신(遵法精神)은 법을 실제로 지키려는 의지(意志)이며, 그 나라 국민들의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한다. 선진(先進) 국민일수록 준법정신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문화수준이 높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화수준을 높이자고 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법 이전에 사람은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을 먼저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법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로는 우리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인간적이고 보편적이지 못한 현실을 폭로하는 것과도 같다. 법을 제정해야만 하는 현실을 한편으로는 통탄해야 하겠지만, 이왕에 제정된 법은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준수해야할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다.
법(法)이란 무릇 한자어가 뜻하듯이 ‘물(水)이 가는(去) 것’이다. 절대 거꾸로 가지 않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가며, 막히면 머물고, 넘치면 다시 가는 물의 흐름이 곧 법이요, 법은 극히 자연스런 이치(理致)라는 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자연스럽게 법의 이치를 꿰뚫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법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따른 자연스러움을 제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법은 어떠한가? 어느 변호사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법은 다 모아 놓았다고 한다. 독일, 미국, 일본의 좋은 법은 다 갔다 놓았다는 것이다. 법이 좋다는 말은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법 이전에 사람은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양심과 도덕, 올바른 양심과 보편적인 도덕에 따라 행동한 사람이 법(法)을 잘 몰라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유린(蹂躪)당하고, 경제적 손해를 보며, 사회적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국민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법은 이 국민 앞에 잘못을 빌어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비현실적인 법조문 하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이로 인해 심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강한 자에게는 법을 피할 길을 가르쳐주고 약한 자에게는 이 법, 저 법으로 올가미를 씌워 길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그런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613 가지의 율법을 짊어지고 살았다.(금령 365개, 명령 248개) 이런 율법 때문에 고생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당신께로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 편히 쉬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법의 멍에를 벗겨주시고, 당신의 멍에를 지워주시고자 하신다. 예수님의 멍에는 법이 아니라 가르침이며, 최종적으로는 사랑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올바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이며, 훈훈하고 정이 넘치는 관습과 풍습이다. 이는 자기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황금률: 마태 7,12)이며, 하느님과 이웃을 동시에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사랑의 이중계명: 마태 22,34-40)이다. 물론 이 사랑은 나중에 십자가의 신비로 그 알맹이를 채우게 된다. 누구든지 사람은 법의 멍에든 십자가의 멍에든 하나를 지고 가며 살아야 한다.
법의 멍에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지만, 예수님의 멍에는 사람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든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예수님께 배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유광수 신부 -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단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한 분도 안 계실 것이다. 한결같이 우리 모두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럼 언제부터 왜 이렇게 인간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기 시작하였는가?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죄를 지어 에덴동산을 떠나면서부터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가 바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모습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인간을 구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곧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시다.
"구원하다." 라는 말은 라틴어로 Salvare라고 하는데 이 말은 " 구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 생명을 구하다, 구제하다, 위험으로부터 지키다. 보호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인간을 구조한다, 구출한다, 해방시킨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고통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나를 구해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가.
우리 모두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는데 누가 우리를 이런 고통에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가? 구해 줄 수 있는가? 대통령이 할 수 있는가? 학교 선생님이 구해 줄 수 있는가? 아니면 부모님이 구출해 낼 수 있는가?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도 내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거운 짐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고 고통에서 나를 건져 줄 수 있는 분은 단 한분 뿐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분 이외에는 그 누구도 내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해 줄 수 없다. 그래서 그분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의 이 초대에 응해야 한다. 이 초대는 바로 나를 위한 초대요, 나에게 안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초대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대이기 때문에 이 초대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사실 우리 모두의 간절한 원의는 바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이런 원의가 있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우리는 일하고 공부하고 있다.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간절한 원의는 있으면서도 어디에서 어떻게 하면 이 고통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거기에서 헤메이고 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것은 허무요, 무기력함이요, 절망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은 참으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는 복음이다.
조용히 이 말씀을 음미해보자. 누가 우리에게 이런 초대를 하겠는가? 나의 아버지가 아니면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우리들에게 구원은 무엇인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벗어버리는 것이다. 오늘 나의 구원은 그동안 나를 얽메어 놓고 있는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구원은 무엇인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원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만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누려야 한다. 예수님이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받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은 우리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벗어버리고 해방되어야 한다.
정녕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받는 은혜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이런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간단하다. 즉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기 위한 방법이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제시되었다. 먼저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대로 배워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여 예수님께 가기는 하면서 그 다음에 배우는 일을 소홀히 한다. 그냥 에수님께 가서 청하기만하면 되는 줄 안다. 물론 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을 수 있는지 모른다. 그 방법을 모른다.
~ 집회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아, 나에게로 와서 내 학교에 들어오라. 어찌하여 지혜를 갖지 못한 채 불평만 하고 너희 영혼의 갈증을 풀 생각을 하지 않느냐! 나 이제 결론삼아 말한다. 지혜를 돈으로 살 생각은 말아라. 네 목에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라. 지혜는 바로 네 곁에 있다. 눈을 바로 뜨고 보아라. 내가 얼마나 적은 노력으로 큰 평화를 얻었는가를!"(집회 51, 23-27)
내가 아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이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어떤 강의를 하든 어떻게 알고 나타나시는지 그 자리에 반드시 와 계신다. 이 할머니와의 인연은 99년도 마르코 복음 강의를 사당동에서 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부터 이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강의를 하든 줄기차게 쫓아다니신다. 지난번 논현동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남보다 항상 일찍 오시는데 하루는 저에게 다가 오셔서 "신부님, 저는 요즈음 생기가 납니다. 이 노인네가 생기가 나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 다 신부님 덕분이예요. 신부님의 강의를 통해서 복음에 눈을 뜨니가 모든 것이 신비롭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어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할머니가 편안하게 지낼 형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 할머니는 소대변을 다 받아내야 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계신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할아버지 병 간호를 해야 하는 어려운 형편에서 생활하신다. 그런 형편이지만 그것을 고생이라거나 아니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하고 가벼운 짐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예수님한테 그 멍에를 메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고 음미해보자. 감사로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참된 음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참된 아버지로 알고 우리는 그분의 참된 자녀라는 것을 올바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사는 법을 배우고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참된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늘 우리를 당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행은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그 재산을 갖고 아버지를 떠나 멀리 다른 지방으로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마침내 거지가 되어 온갖 고생과 굶주림을 겪고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할만큼 아버지 아들의 자격을 상실하여 마치 돼지처럼 살아가는 비참한 모습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항상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듯이 오늘도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애타게 기다리신다. †♡†♡†♡†♡†♡†♡†♡†♡†♡†♡†♡†♡†♡†♡†♡†♡†♡†♡†♡†♡†♡†♡†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사는 조지 이스트먼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남의 집 파출부 일을 하면서 조지와 두 여동생을 힘들게 키웠지요. 따라서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었겠지요. 일을 하러 갈 때에도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어서 늘 데리고 다니면서 파출부 일을 해야만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모습을 곁에서 늘 바라보던 조지의 기억에, 어머니는 언제나 열심히 일하며 불평 없이 삼 남매를 키우신 성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어머니는 어린 조지에게 늘 이렇게 당부했었다고 합니다.
“나는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을 위해 일한단다. 너도 크면 너 자신을 위해 일하지 말고 남을 위해 일해라.”
조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한시도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은 사진관에 취직해 성실하게 일하면서 기술을 익혔지요. 얼마 뒤 단골손님이 제법 많아진 조지는 독립해 필름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곧 그는 간편한 휴대용 필름을 만들어 특허를 받았고 1888년에는 새로운 카메라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조지 이스트먼이 바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닥 필름’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지요. 그러나 재산의 대부분을 대학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이는 어린 시절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머니의 모범이 결국은 자녀에게 옮아갔고, 그 자녀의 실천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한 사람의 모범이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 이렇게 전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바로 우리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모범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범을 우리가 배우고 따를 것을 명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이러한 안식을 얻어야 할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이 그 안식을 얻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베풂은 당신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단순히 나에게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곳곳에 울려 퍼지는 사랑, 변하지 않고 영원한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바로 나에게서 끝내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을 어떻게 하십니까? 안식을 주신다는 그 모범은 내 사랑의 또 다른 모범을 통해서 더욱 더 완성됩니다.
주님의 모범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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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
- 기정희 수녀-
최근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중에 「시크릿」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오프라 윈프리 쇼 홈페이지를 마비시키고 해리포터 시리즈를 묶어버린, 세계인이 경탄한 책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이 책을 이렇게 유명하게 했을까? 제목 그대로 비밀의 문을 열면 과연 인생을 뒤바꿀 마법 같은 법칙이 존재할까? 우리 내면에 잠재된 숨겨진 힘을 이해하고 모든 측면에서 기쁨을 발견하게 될까? 자신의 삶에서 이 법칙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멋진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책은 이렇게 주장한다. 1단계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구하라. 2단계로 믿어라,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미 받았다고. 3단계는 받아라! 그리고 이미 받았을 때 느낀 감정을 느껴라. 이 원리는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열망하라, 믿어라. 우주의 원리, 끌어당김의 법칙,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구심점으로 그분께서 끌어당김의 중심에 계신 분이심을 우리는 믿는다. 이 책을 통해 배운 행복, 성공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긍정의 힘’이다. 죄는 죄를 낳고, 유혹은 유혹을 낳고, 거짓은 거짓을 낳듯이 부정은 늘 부정을 낳는다. 그러나 긍정해 보라. 내가 달라지고 주변이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진다. 되는 일이 없다고 짜증내기보다는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기대와 희망과 호기심을 발동해 보라. 모든 시간이 기적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기적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될 것이다. 긍정의 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님의 삶은 실패의 삶이며 십자가는 치욕이요 실패의 상징이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라. 십자가는 역설적인 긍정의 힘을 내포하고 있다. 전폭적인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의 상징이요, 인류에 대한 사랑의 절절한 응답인 십자가야말로 비밀 문의 열쇠가 아닐까? 목숨을 건 사랑의 힘은 우주의 어떤 끌어당김의 법칙보다 강력하다. 주님께서 주신 그 강렬한 사랑으로 오늘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삶의 짐을 어떻게 지고 있는가? 어떤 마음이 내 안에 있는지 들여다보자. 긍정의 힘이 나를 움직이는지, 부정의 아우라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지 살펴보라. 예수님은 철저한 긍정의 힘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날이 지치고 긴장하며 삶의 무게를 진 우리를 당신께 오도록 초대하신다. 당신 안에서 위안과 휴식을 얻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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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의 기쁨
- 조성숙 수녀-
멍에’라는 말은 유다교에서 일반적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율법에 대한 복종의 상징으로 쓰여왔습니다. 율법(613가지 계율)의 멍에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멋진 제안을 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계율들을 짧고 단순하게 바꿔놓으셨습니다. 바로 황금률(7,12)과 사랑의 이중 계명(22,34-40)입니다. 의무의 짐을 사랑의 짐으로 바꿔 놓으신 것입니다. 사랑 앞에서 짐은 더 이상 짐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은 멍에 자체를 악으로 여기시거나 아예 없애주시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온유하고 겸손하신 목자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몸소 멍에를 지십니다. 사랑이 그런 거라는 것을 보여주시듯 먼저 멍에를 지셨습니다. 수도생활의 규칙들을 멍에로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외를 좋아하고,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 장상 수녀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구속들이 오히려 예수님께로 나아가도록 자유를 주었음을 깨달아갑니다. 의무기도 시간들이 내가 일에 끌려 다니지 않도록 도와주고, 봉쇄구역이 마음의 고요를 지켜주고, 장상에게 순명하는 일이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욕망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멍에가 주는 기쁨을 체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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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양승국신부-
<잠자리 날개보다 더 가벼운>
멍에란 소나 말의 목에 얹는 구식 농기구입니다. 요즘도 시골에 가면 소의 힘을 빌려 밭을 가는데, 그때 꼭 필요한 것이 멍에입니다.
우선 멍에를 소의 목에 걸고, 거기에 쟁기를 연결해서 밭을 가는데, 기계보다야 못하지만, 사람이 하는 것보다는 수십 배의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멍에란 것, 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말만 들어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져오는 물건입니다. 멍에를 메야하는 소 측에서 보면 멍에는 ‘쌩고생’의 원인입니다. 주인이 멍에를 얹는 순간, ‘오늘도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내 멍에는 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속박, 불편함, 고생의 대명사인 멍에를 보고 편하다고 하시니 어찌된 말씀입니까?
이런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백성들의 목 위에는 엄청난 무게의 멍에가 하나씩 얹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지상주의였습니다. 위선적 신앙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율법을 통해 백성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기보다는 율법으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지나치게 세부적인 율법조항들을 끝도 없이 제정해서 백성들의 어깨위에 얹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뒤에서 채찍질까지 해댔습니다. 견디다 못해 터져 나오는 백성들이 신음소리가 하늘까지 닿았습니다.
종교를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율법이나 계명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하느님께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보다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종교로 인해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로,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런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백성들의 목 위에 걸쳐져 있던 형식적이고도 위선적인, 철저하게도 이중적이면서도 그야말로 ‘웃기는’ 율법주의라는 멍에를 끌러주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무거웠던 멍에로 인해 상처 난 목 부위를 어루만져주십니다. 치료제를 발라주십니다.
그리고 잠자리 날개보다 더 가볍고, 솜털보다 더 부드러운, 착용감이 너무 좋은 새로운 멍에, ‘사랑의 멍에’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토록 우리의 예수님은 정녕 참된 해방자 주님이셨습니다. 참 위로자요, 참 치유자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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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히 시비하지 마라
-김찬선신부-
오늘의 복음은 이미 여러 차례 말씀 나누기를 하였기에 오늘은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볼까 합니다.
안식. 이 말에는 평화, 평안, 쉼이 내포된 듯합니다.
요즘 저는 시달리고 있습니다. 모기에 시달리고 더위에 시달리고 소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특히 소리에 민감한 저인데 옆 집 공사로 새벽부터 시끄러워 창문을 다 닫아놓고 있으니 더위가 견디기 힘듭니다. 대야에 발을 담그고 부채로 더위를 식혀도 감당키 어려워 마침내 선풍기를 틀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기와 더위와 소음이 아닙니다. 여름에 더울 수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더운 거야?” 공사를 하는 한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하고 거부하고 따지는 저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미 그러한데 왜 그런 거야, 앞으로도 그럴 건데 왜 그런 거야 하고 한심스럽게 따지고 있으니, 이것이 문제입니다.
가만있으면 될 것을 제가 공연히 시비를 걸어 마음의 안식이 없습니다. 모기와 더위와 싸우고 소음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런 쓸 데 없는 고단한 싸움을 그만 두고 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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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주시는 멍에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하시면서 결론으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러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이란 어떠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가? 그런 사람들이란 무엇보다 하느님을 찾으며 가까이 하고자 노력하다가 어려워서 자포자기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생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절망해 버린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또한 자신의 약함과 죄의 짐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시는 말씀이다.
이러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유대 스승들은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심판하시고 벌주시며 수백 가지의 율법을 매일의 생활 속에서 강요하시는 그런 모습이셨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참다운 모습을 찾기도 힘들고 따르기에도 크나큰 짐이 되었던 것이다(마태 23,4). 율법은 백성들로 하여금 죄의식만 느끼게 하였고, 율법에 매인 삶을 살게 되었다. 더욱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죄인으로 취급되었고 얼굴도 들지 못하던 처지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내 멍에는 편하다"고 하신다. 이것은 그리스어의 Chrestos인데 "몸에 잘 맞는다"라는 의미가 있다. 팔레스티나에서는 소가 메는 멍에를 나무로 만들었는데, 소에게 멍에를 메우고자 할 때는 목공소로 데리고 가서 치수를 정확히 재고 멍에가 만들어지면 다시 소를 데리고 가서 멍에를 소에 잘 맞게 지웠던 것이다. 그래야 목과 덜미가 스쳐서 벗겨지거나 아프지 않았던 것이다. 즉 소에게 편하고 잘 맞게 만들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며 가까이 가고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예수께서 우리의 짐을 덜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 몸에 잘 맞는 짐을 지도록 살펴 주신다는 것이다. 그 짐은 바로 사랑의 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소년이 절름발이 소녀를 업고 가는 것을 보고 지나가는 어른이 그 모습이 하도 기특해서 "얘야, 아이를 업고 가니 퍽 무겁겠구나!" 하니까, 그 소년이 대답을 하는데, "아닙니다. 무겁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제 동생인 걸요!" 하였단다. 이와 같이 사랑의 마음으로 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운반하는 짐은 언제나 가벼운 것이고 기쁨과 보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짐을 지게 하시며 그것을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는 힘도 주시는 분이다. 그것을 우리의 능력 밖에서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기에 이 소년과 같이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천국의 짐을 지도록 해야 하겠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그러한 삶을 주시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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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 신부
요즈음 well-being을 지배하고 있는 종합이미지는 “부드러움” 곧 “온유” 입니다. 많은 이들이 부드러운 음식, 색상, 느낌, 배경, 구조 등을 선호하고, 심지어 술까지 순한 것을 즐겨 마시고, 사람마저 부드러운 꽃미남 꽃미녀가 인기입니다.
부드럽고 순함은 많은 매력이 있습니다.
1) 포용력이 높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감싸주고, 안아주고, 품어줍니다. 2) 따뜻합니다. 무엇이나 녹여주고, 풀어주고, 데워줍니다. 3) 생명을 줍니다. 생명체를 싹트게 하고, 자라게 하고, 뿌리내리게 합니다. 4) 느낌이 좋습니다. 언제나 감미롭고, 편안하고, 여유롭습니다.
이런 부드러움과 순함은 예수님의 전유물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병든 자, 굶주린 자, 고통받는 자에게 더욱 온유하셨습니다.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성내거나, 분노하거나, 역정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누구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거나, 억압하거나, 강제하거나, 공포스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버이처럼, 친구처럼, 누이처럼, 언제나 온유하고 친절하셨습니다. 부드럽고 자상하셨습니다.
이런 “부드러움”은 “겸손”에서 나옵니다. 겸손이란 무작정 남 앞에 자신을 숙이는 비굴함이나 아첨이 아닙니다.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을 포기하거나, 진리를 외면하는 실패나 무능도 아닙니다.
겸손은 진리를 진리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신감이고, 당당함입니다. 용기이고 힘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겸손하셨습니다. 기쁨과 행복의 순간은 물론,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도 그랬습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아버지께 단 한번도 시기나 질투하지 않았고, 거짓이나 위선, 꾸밈이나 가식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까지 그랬습니다. 부모 앞에, 동료 앞에, 이웃 앞에 한번도 거들먹거리거나,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틈나는 대로 섬기고 봉사했습니다.
너나없이 잘나고, 높이 오르고, 큰 자리 잡고, 많이 차지하고 그래서 마음껏 누리려는 세상입니다. 닥치는대로 이기고, 앞지르고, 뭉개고, 누르려는 세상입니다.
참으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드럽게 살아야합니다. 하느님 앞에 더 겸손해지고, 사람들 앞에 더 온유해져야 합니다. 특히 가족, 동료, 이웃에게 더 부드럽고 순해져야 합니다. 겸손하고 온유할 때 이사야 말씀처럼 “정의 알게 되고, 인생길 환하게 트여, 만사형통하게 되고, 잘 살게 될 것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할 때, 무겁고 허덕이는 인생짐 덜어지고, 그 짐 가벼워 질 것입니다.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 앞에는 겸손하고 사람들 앞에는 부드러웠습니다. 그래서 강해지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에게 그 길을 배우고 익혀, 내 인생길을 바로 합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도다.” 아멘.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백남국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성경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씀이고,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잘 아는 성경 구절입니다. 이 힘들고 피곤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안식을 준다는 말에 혹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꼭 사기당하는 기분이 드는 것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주님을 믿으면 만사가 다 잘 풀리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께 다가가도 고통은 있기 마련이죠. 예수님을 알고 하느님의 사랑을 알았다 하여 이 세상의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괜한 기대감만 지녔다가 계속되는 고단한 삶에 실망만 더 크게 찾아오기도 합니다. 사실 주님 말씀의 강조점은 그뒤에 나오는 구절이겠지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주님께 다가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당신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주님의 멍에는 무엇일까요? 사랑의 멍에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그 사랑이 당신의 멍에겠지요. 그렇습니다. 똑같은 삶의 무게라 하더라도 당신의 사랑 안에서 그것을 지고 간다면 그 짐이 한결 가볍게 느껴지고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저는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보다는 이런저런 번뇌에 흔들리는 것을 보니 당신의 멍에를 메는 법을 한참이나 더 터득해야 하나 봅니다. 더 깎이고 깨져서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더 배워야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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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