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응민은 강산제 보성소리의 큰스승이다. 강산제 보성소리는 오늘날 전해지는 소리 유파중, 가장 왕성하게 보급되고 있으며, 판소리의 최고봉을 이루고 있는 유파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다. 송계 정응민은 강산제 보성소리의 계승자이면서 유일한 교육자였다. 그의 문하에 수많은 명창들이 몰려와 소리를 배웠으며 오늘날, 보성소리는 판소리의 큰 맥을 이루고 있다. 많은 판소리 학자들은 송계 정응민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고제(故制) 판소리는 제대로 전승되지 않았을거라고 입을 모은다. 따라서 정응민은 보성소리의 살아 있는 신화이며 판소리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주지 하다시피, 판소리의 유파는 일반적으로 서편제와 동편제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유파의 구분은 편의상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판소리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유파이기 때문에 서편제는 이날치, 김채만, 박동실, 한애순으로 이어지는 이날치 계열 서편소리와, 박유전, 정재근, 정응민에 이어서 정권진,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으로 이어지는 강산제 서편소리로 나뉜다. 강산제로 불리는 서편소리는 흔히 보성소리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박유전, 정재근에 이어지는 강산제 서편소리가 정응민에 이르러, 김세종, 김찬업으로 이어지는 세종판 춘향가를 받아들임으로써 보성소리라는 독특한 유파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럼 보성소리를 오늘날에 있게 한 정응민은 어떤 사람인가. 정응민은 1896년 6월 10일 전라남도 나주에서 출생했다. 그리고 일곱살 어린나이에 역시 소릿꾼인 큰아버지 정재근을 따라서 서울에 올라가 소리공부를 하게 되면서 소리의 길을 걷게 된다. 정응민은 당시에 대원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국창 박유전에게서 소리를 배운 큰아버지 정재근에게서 소리를 배우게 되는데, 당시 어영대장을 지내던 윤판서댁 사랑채에 기숙을 하면서 소릿꾼으로써의 기량을 닦았다. 그러나, 우선 정응민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큰아버지 정재근과 또 정재근의 스승인 국창 박유전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강산제 보성소리는 바로 국창 박유전과 정재근, 그리고 정응민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정응민은 당대 국창이자 명창이었던 박유전의 문하에서 소리공부를 한 큰아버지 정재근에게서 소리를 배웠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박유전은 대원군의 총애를 받은 명창이었다. 박유전은 1834년 전라남도 보성군 강산면 출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망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박유전은 대원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무과벼슬까지 제수 받았고 국창의 칭호를 얻었는데, 특히 적벽가를 잘하였다고 한다. 박유전은 대원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국창으로 활동했지만, 그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임오군란과 함께 청나라에게 연금이 된 대원군의 실각으로 말미암아, 박유전은 민비 일파의 보 복을 피해 남으로 내려오다가 나주에서 판소리를 하던 정재근(1853∼1914.정응민 백부)을 만나 그의 집에 머무르면서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정재근은 박유전으로부터 [심청가][춘향가][적벽가][수궁가]를 배운다. 3~4년 후, 대원군이 다시 세력을 잡게 되자 박유전은 한양으로 올라간다. 그때 정재근은 일곱살 된 조카 정응민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한다. 빼앗긴 나라는 국창의 꿈을 꺽고... 기록이 확실치는 않으나, 이때 정재근은 일곱살짜리 코흘리개 정응민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대별로 비교해 볼때, 정응민이 일곱살때 큰아버지 정재근을 따라서 서울로 상경했다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다만, 대원군 실각과 죽음 이후, 정재근과 함께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박유전과 정재근의 소리를 배웠고, 정응민은 소리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한일합방이 되자, 그에게 소리를 가르쳐 준 큰아버지 정재근과, 또 정재근의 스승인 박유전은"나라를 잃어버린 명창 가객이 살아서 뭐하느냐."며 고향으로 내려가 버리게 된다. 홀로 서울에 남게 된 정응민은 나름대로 명창들의 기예를 익히면서 명창의 꿈을 키웠고, 원각사에서 무대 활동도 해보지만, 암울했던 일제 시대에 소릿꾼으로써의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정응민은 앞서 말했듯이 윤판서라고만 알려진 어영대장 사랑채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밤에는 대원군 사랑채에서 소리를 연마한다. 그리고 여러 명창들과 교우하며 나름대로의 실력을 다진다. 이 무렵 정응민은 대스승인 박유전이 전라도 어느 땅에서 한겨울에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일설에 의하면 박유전은 대원군이 삼아하자 식음을 끊고 스스로의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때 정응민의 나이는 스물한살. 정응민은 이에 충격을 받아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다. 나라 잃고 스승마저 잃은 송계는 [귀거래사]를 읊으며 낙향하던 중 전라도 부안에서 명창 김찬업을 만나 김세종판 [춘향가]를 배운다. 이것이 송계의 보성소리가 서편제에 속하면서도 동편제의 [춘향가]를 별도로 보존하는 계기가 된다. 이때 그의 나이는 스무살 무렵, 보통 사람같으면 명창의 꿈을 키우면서 의욕적으로 활동할 나이인데, 갑자기 귀향한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을 법하다. 우리 판소리는 한일합방과 함께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래문화 속에서 극도의 변환기를 갖게 된다. 많은 소리꾼들은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판소리를 상업화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판소리의 창극화 경향은, 판소리 본래의 예술적 가치를 상실하게 하였다. 제자들의 말을 빌리면 정응민은 고제 판소리가 퇴색일로를 걷고, 판소리가 상업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깊이 낙담하면서 고향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보성소리의 탄생 정응민이 평생을 살았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향리 보성 회촌 도강재 마을로 향하는 전라도 들판은 5월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면서 푸르게 익어가고 있는 보리대가 제각기 머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 도강재 마을. 보성 읍내에서 차로 30여분을 가다보면, 세칭 여우재라는 고개가 나온다. 고개 마루에 서면, 멀리 남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차를 만드는 보성 다원으로 유명해진 이 여우재를 새큼한 차 향기를 맡으면서 구비 구비 돌아서 넘어가면, 정응민이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들을 키워내던 회천면 도강재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고향에 내려온 정응민은 한동안 향리에 묻혀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히 세월을 보내게 된다. 물론 당시만 해도 정응민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아는 이는 별로 없었다. 정응민은 당대를 주름잡던 명창들에 비해서 목구성이 뛰어난 명창도 아니었고, 중앙무대서 활동했다는 이렇다 할 기록도 별로 가지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를 찾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귀향을 한 정응민은 농사를 지으면서 도강재 마을에서 소리 세계와 한동안 인연을 끊고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던 어느날, 한 젊은이가 그를 찾아온다. 명창 정광수의 소개로 찾아왔다는 박춘성이라는 젊은이는 정응민에게서 소리 수업 받기를 간청했고, 정응민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박춘성은 보성 득량 출신으로 협률사 공연을 보고 소리의 길로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박춘성은 목포와 광주의 유명하다는 소리 선생들을 찾아 다니던 중, 우연히 명창 정광수를 만나게 되었고, 정광수는 그에게 정응민을 소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박춘성은 정응민의 문하에서 소리 공부를 하게 되는데 당시에 전남 능주 출신의 박기채라는 명창과 함께 정응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박기채는 불행히도 요절하고 말았다. 박춘성은 스승인 정응민의 귀여움을 받으면서 소리 공부에 전념했는데, 6년여의 교습을 받은 후, 전주에서 열린 대사습에 나가 영예의 장원을 차지하게 되면서 소릿꾼으로써의 명성을 얻게 된다. 이와 함께, 박춘성을 통해 정응민의 독특한 보성소리는 비로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박춘성의 소리가 이렇게 인정받게 되자, 정응민의 보성소리를 배우기 위해서 많은 소릿꾼들이 보성 회천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당대 명창이고 창극에도 뛰어났던 김연수를 비롯해서 쑥대머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임방울, 그리고 현재 판소리 인간문화재인 정광수에 이르기까지 강산제 보성소리의 심오한 세계에 빠져 극찬을 하기에 이른다. 조용했던 회천면 영천리 도강재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소리꾼들로 인해 마을을 들끓게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명창들과 명창 지망생들이 정응민에게서 소리공부를 했지만, 보성소리를 제대로 공부한 제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날, 정응민의 보성소리를 잇고 있는 제자들은 먼저 박춘성과, 성우향, 그리고 조상현과 성창순씨를 꼽을 수 있다. 박춘성은 이곳 도강재 마을에서 결혼하여 고향을 떠나지 않고 강산제 보성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배웠던 사람이고, 성우향의 경우는 보성소리를 가장 충실하게 이어 받은 사람으로 평한다. 명창 조상현은 열두살 어린 나이부터 정응민 문하에 들어가 7년여 가량 수업을 받았고, 역시 명창 성창순도 정응민이 말년에 가르쳤던 마지막 제자이기도 하다. 절제된 품격과 기품, 보성소리 국창 박유전과 정재근의 영향을 받았을까. 정응민은 소리꾼들이 천대받고 질시 받는 당시의 사회 속에서도 자신이 지켜 온 강산제 보성소리를 품격 있는 소리로 가꿔 나가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독특한 자존심을 자존심을 지켜왔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무릎을 베고서 소리를 했다는 대스승 국창 박유전, 그리고 그의 수제자인 큰아버지 정재근, 그리고 정재근의 손에 이끌려 일곱살 어린 나이부터 계통있는 어전 소리를 배운 정응민은 나름대로 소릿꾼으로써의 자존심과, 명예가 대단했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정응민은 자신에게 소리 공부를 하러 온 제자들을 무척이나 엄격하게 다뤘다. 보성소리는 무엇보다도 일반 유파와는 달리 신선하고 품격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특히 강산제 보성소리의 사설은 고상하고 점잖으며 도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다른 판소리 유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육담이나 음담패설, 욕설같은 것은 천박한 것으로 여기고 쓰지 못하게 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극히 절제해서 사용하였다. 또한 인물 묘사도 우아하고 장중함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 예컨데, 판소리 적벽가에 나오는 조조의 경우, 다른 유파에서는 조조를 간사하고 교활하게 묘사한 인물로 그려져 있지만, 강산제 보성소리에서는 위엄있는 장수로 그려져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강산제 보성소리는 다른 판소리 유파와는 달리 품격있는 소리를 지향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렇다면, 왜 강산제 보성 소리는 품격있는 소리를 지향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앞서 말했듯이 보성소리의 뿌리인 강산제를 만든 명창 박유전은 다른 소릿꾼과 달리 어전에서 소리를 했야 했던 [어전 광대]였다. 따라서 어전에서 소리를 해야했던 소릿꾼들은 귀족들의 취향에 맞게 사설을 고쳐야 했고,음담패설이나, 욕설들은 최대한 자제하거나, 고쳐야 했다. 바로 박유전, 정재근, 정응민으로 이어지는 강산제 판소리는 이런 이유로 품격과 위엄이 있는 판소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보성소리는 오늘날 많은 명창들을 배출하였다. 정응민은 제자들을 어떻게 교육 시켰을까. 오늘날 많은 명창들은 그의 문하에서 배출한 것은 아무래도 교육 방법이 남달랐으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처럼 녹음기 같은 문명의 이기가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만 해도 많은 소릿꾼들은 구전심수로 소리를 익혀왔다. 이른바 선생이 한구절을 불러주면, 제자들은 그것을 따라 부르는 교육법이 바로 구전심수법이었다. 정응민은 자신의 제자들을 구전심수법으로 교육시키면서도 한구절 한구절 자신의 양이 찰때까지, 수십 수백번씩 반복해서 부르게 했다고 한다. 특히 정응민은제자들을 교육 시키면서 버려야 할 네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노랑목을 쓰지 말것, 두번째는 함성을 쓰지 말것, 그리고 세번째는 전성, 즉 발발성을 쓰지 말것, 마지막으로 비성을 쓰지 말것이다. 정응민은 당대 사람들이 알아주는 대명창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원각사에서 잠시 활동을 했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경력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렇다고 많은 스승들에게서 소리 공부를 수십년씩 연마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명창 박유전과, 정재근에게서 소리 공부를 했고, 이동백 명창에게서 공부를 했다는 사실 외에는 특별하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일곱살 무렵에 큰아버지 정재근의 손에 이끌려 서울에 올라와, 국창들 사이에서 공부를 했다는 점에서 볼때는 그가 소리와 인연을 맺고 공부한 기간은 10여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응민은 소릿꾼으로써는 짧은 음악적 연륜을 지닌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제자들을 오늘날 시대를 풍미하는 명창들로 훌륭하게 키워냈다. 알려진 바로는 정응민은 천재적이다고 할만큼 음악성이 탁월했다고 한다. 단지 그가 중앙 무대와 인연을 끊고 향리에 은거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그의 이름이 알려져지 않았을 뿐이지, 그의 소리 세계는 보통 사람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불행하게도 정응민은 생전에 자신의 목소리를 음반에 남기질 않았다. 다행히도 그의 제자인 명창 성창순이 스승인 정응민의 소리를 테이프로 녹음해 둔 것을 최근에 발견했을 뿐이다. 흔히 박유전과 정재근, 그리고 정응민으로 이어지는 소리의 계보를 강산제라고도 하고 보성소리라고 말하며, 강산제 보성소리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강산제 소리는 무엇이고, 보성소리는 무엇이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가지 명칭이 붙었을까. 강산제는 국창 박유전의 호인 강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박유전 정재근으로 이어지는 판소리의 맥을 강산제라고 말한다. 보성소리는, 박유전이 전한 강산제 판소리에 조선 시대 명창 김세종이 불렀다는 세종판 춘향가를 유입시키면서 생겨난 명칭이다. 김세종판 춘향가는 정응민이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명창 김찬업을 만나서 전수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늘날 세종판 춘향가의 명맥을 완벽하게 이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거기에 정응민의 음악성이 가미되어 나름대로 독특한 바디를 형성해, 오늘날의 보성소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보성 소리에서 지나칠 수 없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정응민은 그의 제자들에게 판소리 다섯바탕 중에서 유일하게 흥보가를 전수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때문에 춘향가, 적벽가, 수궁가, 심청가, 흥보가로 불리는 판소리 다섯마당 중에서 유독 흥보가만을 제자들에게 전수해 주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알려진 바로는 판소리 다섯마당의 음악적 특징을 분석해보면, 흥보가는 다른 마당과 달리, 아니리가 유독많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따라서 정응민은 아니리가 많은 흥보가를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제자들이 소리를 쉽게 배우려는 생각을 애초부터 갖지 못하게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오늘날, 소위 판소리 인간문화재나, 중견 명창들은 많은 제자들에게 보성소리를 가르키면서 보성 소리의 맥을 잇고 있다. 그렇다면, 보성소리가 오늘날에 있어서 많은 판소리 명창들이 즐겨 부르고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판소리는 2백여년 이상 이어오면서 가장 완벽하게 다듬어진 음악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전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판소리 바탕들은 소리의 짜임새가 더이상 손볼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보성소리는 전해지는 판소리 중에서도, 음악적으로나, 문학적인 구조가 가장 잘짜여진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3대로 이어지는 소릿꾼집안 젊은 시절, 명창으로써의 영화를 미련없이 던져 버리고 향리로 내려온 정응민은 장흥에서 살고 있던 한의사 딸인 김대임과 혼인도 하게 되었고, 그 밑으로 아들 하나와 딸 다섯을 낳았다. 그의 아들은 강산제 판소리 중요 무형 문화재로 활약하다가 지난 1985년 세상을 타계한 인간문화재, 명창 정권진이 있다. 그러나 정응민은 젊은 시절, 그의 아들 정권진(심청가.무형문화재.86년 59세로 작고)에게 소리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정응민은 대우도 못받고 천대 받는 판소리를 자식에게 물려 주고 싶지 않았던 까닭에 자식들이 판소리를 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명창의 핏줄은 속이질 못했을까. 아들 정권진은 소리에 빠져서 이곳 저곳을 헤메고 다녔으며,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아버지 정응민은 그의 나이 열다섯에 비로소 허락하게 된다. 그러나, 정권진은 아버지에게서 소리를 배울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권진은 아버지의 수제자인 박기채에게서 소리를 배울 수 있었지만, 1년 쯤 지났을까. 박기채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그러나, 그동안 어깨 너머로 배운 아버지의 소리를 배운 정권진은 혼자서 독공을 하면서 아버지의 소리를 습득하게 되었고, 훗날 강산제 심청가 판소리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다. 정응민의 아들 정권진은 뛰어난 명창으로 평가받고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정권진은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정회천은 전북대학교 국악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선대가 이루어 놓은 판소리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또한 그는 중학시절부터 명고수 김명환(인간문화재.89년 작고)으로부터 고법을 배워 현재 무형문화재 59호(김명환 고법) 전수조교로 등록되어 있으며 명인 함동정월로부터 가야금 산조도 배웠다. 가야금을 전공한 그의 부인 안희정씨(서울대 국악과졸)도 전주도립국악원 교수로 있다. 둘째 아들 정희완(전남대 국악과졸)와 부인 최미애(전남대 무용과졸)는 전남도립국악원에서 대금연주자와 한국무용을 각각 맡고 있다. 한편 국립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부르고 있는 막내아들 정회석(서울대 국악과졸) 은 KBS 국악관현악단 해금주자인 그의 부인 정수년(서울대 국악과졸)등과 함께 모두가 부부 국악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송계 정응민은 그의 나이 예순 아홉에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우리시대의 판소리를 있게 한 송계 정응민. 그는 보성 소리의 살아있는 신화로 우리 판소리사에 기록되고 있다. 많은 명창들이 당대를 풍미하고 사라져갔다. 송계 정응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정응민은 그의 예술과 제자들을 세상에 남겼다. 정응민은 지난 1996년 탄신 100주기를 맞으면서 판소리를 연구하는 학자들 뿐만 아니고, 많은 국악계 인사들에게서 우리 판소리사에서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재조명을 받았다. 명창은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예술 세계는 보성소리라는 유파로 면면히 이어져 가고 있고 그가 남긴 예술 세계는 이렇게 살아있음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명창들이 창극의 영향으로 상업화에 빠지면서 판소리 본래의 멋을 잃어가고 있을때, 정응민은 향리에 묻혀 판소리 고제를 지켜왔고, 또 제자들에게 온전히 전수 시켰다. 뛰어난 명창은 아니었지만, 지조를 지닌 판소리 교육자로써, 혹은 탁월한 음악 이론가로써, 소리의 멋과 맛을 후학들에게 완벽하게 가르쳤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즈음 보성소리는 우리시대의 최고봉으로 우뚝 서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