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창시절때 어른들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바뻐 산에 다닐수 있을만큼 여유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도시의 상인들은 공휴일도 없이 저녁 늦게까지 일하는 것이 일상생활이었으며, 소득도 미미해 하루 하루 버거운 삶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산에 갈 수 있었던 사람은 대부분 학생들 뿐 이었다. 그 시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산악부가 있었다. 학교산악회 외에도 학생들이 주로 접할 수 있는 산악회는 종로5가 등산 용품가게와 남대문시장 등산 용품을 파는 가게등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산악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전문인들과 함께 등반을 다녔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곳에서 산악회를 운영하시는 사장님들은 대게 산을 좋아하시는 분들로서 등산용품 가게와 산악회 운영을 같이하셨다. 회원 또한 지금처럼 많은게 아니라, 대부분 몇 십명에 불과했다. 그렇치만 그곳 산악인들의 부단한 활동으로 현재의 산악발전에 초석(礎石)이 되었을 것이다. 그시절 나는 학교에서 방과후 운동하는 선무반에서 매일 활동하던 시절이라 학교 산악부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산을 좋아해 친구들과 가까운 근교 산을 돌아다녔다. 정확히 말하면 그저 친구들과 놀기 좋아해서 산에 쏘 다녔다. 또래들과 어울려 가격이 저렴한 알콜 버너나 고체 연료를 이용해 산에서 쌀 씻어 밥하고 찌게 끓여 점심 먹으며 쏘 다니며 뛰 노는 재미에 산을 다녔다. 학생들이 주로 가지고 다녔던 버너는 구조가 간단한 알미늄으로 만든 알콜 버너를 주로 사용했었다. 연료는 약국에서 파는 공업용 메칠 알콜을 사서 사용했는데, 소리도 전혀 안나고 불꽃도 낮엔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불을 붙이고 화력이 세게 올라올때 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는데, 마음이 급한 친구들은 알콜이 없어 그런줄알고 알콜을 보충하려다 불이 확하고 옮겨붙어 그만 화상을 입는 사례도 많았다. 그래도 열 받으면 화력은 그럭저럭 사용 할만해서 오랜기간 사용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나마 알콜 버너도 없는 친구들은 조그만 깡통에 담긴 일회용 고체 연료를 화력으로 사용했다. 간혹가다가 아주 드물게 대학생들이 미제 휘발유 버너나 스웨덴제 "스베아" 석유 버너를 가져와 사용하곤 했었는데, 우리 학생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스베아" 석유 버너에서 쉐~~하는 에어소리와 함께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우리들의 마음을 부럽게 만들었으며, 우린 버너 구경이라도 해볼 참으로 버너 주위로 모여들곤 했었다. 1970년대 중반무렵 국내에선 처음으로 "시나브로" 라는 상표로 석유 버너가 처음 나왔다. "스베아" 석유버너를 본따 만들었는데, "스베아" 석유버너에 비해서 가격도 비교가 안 될만큼 굉장히 싸고 성능은 거의 같았다. "시나브로" 석유버너는 아주 잘 만들어졌으며, 사용해보니 참 좋았었다. 그시절은 등산가면 산에서 밥해 먹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 이었는데, 밥할 때 힘차게 솟구쳐 들리는 버너소리는 기분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마력(魔力)을 지니고있었다.` 각자 찬거리를 조금씩 싸와 친구들이랑 밥짓고 찌게 끓여 먹는다는 것은 또 다른 등산의 즐거움이었다. 경치 감상은 뒷전이고, 그 맛에 산에 자주 갔었다. 그때 배운 취사 솜씨가 오늘날까지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좋은 면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점도 있는법, 산에 오는 거의 모든이들이 약수터 근처에서 쌀 씻어 밥짓고 조리하니 약수터 근처엔 늘 쌀알이나 다듬다 떨어진 야채 부수러기로 주위가 늘 지저분했었다. 그러나 그후 자연보호와 등산객들의 수준높은 의식 수준으로 산은 정말 많이 깨끗해졌다. 아쉬운게 있다면, 그동안 인공 구조물이 너무 많이 생겨 오히려 예전에 쌀알 흘리던 시절보다 더 자연미(自然美)를 잃어버린 것은 우리가 앞으로 크게 고민해야할 부분이다. 산은 앞으로도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돈 주고도 못사는 커다란 값진 유산이니 아껴야된다. 지키는것이 어렵지 개발은 언제든 마음 먹으면 할수있는 일이기에 서두르면 후세에게 줄것이 없어진다.
그시절 고 2때 "하얀거미"란 제목의 "아이거 북벽"을 등반하는 과정을 생생히 쓴 책을 친구에게 빌려보았다. "겉표지에는 " 하얀거미"란 제목과 작가이름 그리고 분지같이 생긴 곳에 거미 모양으로 눈이 쌓여있는 실제 사진으로 표지가 장식되어 있었다. 하얀거미"는 "아이거북벽"을 가르키는 애칭이며, 만년설 눈 쌓인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그 모습이 마치 하얀 거미 모습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이거 북벽"은 해발 고도 3970m로 등반시작 지점부터 수직으로 1800m 에 이르는 거대한 빙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일년 내내 햇빛이 들지않아 등반에 어려움이 크고, 수직 빙벽인만큼 자연재해 발생시 몸을 피할만한 틈 조차도 없는 극한의 자연지형을 갖추고있다 한다. 읽은지 너무 오래되어 작가의 이름도 생각 안 나고, 내용중에서도 딱히 마음에 남아있는 글귀는 안 떠오르지만, 다음 내용이 궁금해 쉬지않고 줄줄이 읽어 내려 갔었던 기억은 난다. 특히 갑자기 떨어지는 우박 폭포와 눈사태 속에서 사투(死鬪)를 벌이며 등반하는 모습은, 마치 옛날에 본 멋진 영화속의 한 장면 처럼 지금도 생각하면 눈앞에 어른거린다. 가보지도 않았는데도, 마치 내가 그곳에서 본것 모양 아직도 머리속에 그려진다. 작가는 등반주위 환경도 세밀히 표현 했었는데, "아이거북벽"은 날씨가 변화무쌍한 곳 이어서 기후를 예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한다. 해가 쨍하고 나왔다가도 어느새 얼음 우박이 쏟아지고, 눈사태가 갑자기 일어나는 등 기후를 예측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한다. 그래서 등반 자체도 얼어붙은 수직 등반이라 무척 힘 들지만, 악천후 날씨는 더욱 더 힘들게해서 많은 사투를 벌여야했고 그곳에서많은 이들이 고귀하게 희생되었다. 작가는 이런 악천후를 이겨내며 등반하는 도전정신의 진한 감동을 독자에게 전해주고 싶어 글을 썼을 것이다. 내가 그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도전정신과 산은 단지 밥해먹고 노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우쳤다. 그리고 기왕이면 이 다음에 내 친구는 산사람이면 좋겠다는걸 그때 생각했었다. 당시 사회는 클럽도 많았으며, 남자들엔 의리심이 많이 부각되던 때라 그런 사회적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이거 북벽"이 나에게 얼마나 강렬히 와닿었는지 수석(壽石)으로 까지 만들어 놓았다. 1980년대초 수석(壽石)수집이 취미 생활로 한참 유행일 때가 있었다. 나도 그때 3년정도 휴가도 안가고 수석(壽石) 수집활동에 푹 빠졌었다. 그리곤 남들이 볼 땐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한강 돌에 "아이거북벽"이라는 근사한 제목을 붙이고 향나무로 좌대까지 직접 깎아 만들었다. 자연스레 그 돌을 자주 보게되면서 마음 한 구석엔 언젠가는 나도 암벽등반을 경험해 봐야지하는 아련한 생각을 갖게되었다. 그러던중 2009년 어느날 일간신문에 성동구청에서 "저녁17시부터 19시까지 2시간씩 2주간을 무료로 가르쳐준다"는 글을 보고 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망설임없이 즉시 등록했다.응봉암장에서 저녁시간에 가르켜주니 자영업 일 하는 나로서는 시간 부담이 없어 좋았다. 신청한 30여명이 같이 배웠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날 또 비슷한 기사가 실렸다. 성동구청에서 "2010년 06.07~06.18일 2주간 무료로 가르쳐준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1년전 이곳에서 기본을 배웠지만, 처도 배워두면 손해날 것 같지도 않고, 또한 클라이밍은 최소한 2명 이상이 해야하는 등반이니 나는 둘이 같이 등반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처를 설득해 입학시켰다. 배우러 가기 전에는 시어머니에게 암벽등반을 배우라한다고 일러 바치기도했지만, 배우기로 등록하고 며칠 지나고 부터는 재미를 느끼며 의욕적으로 배운것 같다. 어느날은 응봉암장에서 교육을 받고 와서는 자랑하기를 "자기들을 가르키는 분이 손정준"선생님이신데, 대한민국에서 "클라이밍 1인자시래 그리고 연구소도 운영하시며, 스포츠 클라이밍 대회땐 심사도 보시는 아주 유명하신 분이래" 하며 놀라움과 즐거움을 보였다. 나도 실은 그분에 대해 잘 몰랐다. 그때까지는 실전을 해 보지도 않았고 ,나를 가르켜주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한 마디로 대단하신 분이었다. 난이도 5.14b설악산 적벽을 최초로 자유등반하신 분 이라는 것을 후에 알았다. 요즈음은 가끔 T.V에 나오시거나 유튜브 동영상에서 보면 마치 스승님처럼 반가운 얼굴로 보게된다. 그렇게 유명하신 선생님이 자상하게 가르키시니 처는 즐겁게 잘 배웠다한다. 그후 나는 운좋게 좋은 친구를 알게되어 나와 처는 그에게서 등반 기술을 배워가며 4년동안을 셋이서 암벽등반을 할 수 있었다. 미뤘던 숙제를 다한 기분이랄까? 나와 처는 등반을 하며 행복함을 만끽했다. 처는 나보다 더 행복해했었다. 나는 앞으로도 크게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으로 처와 같이 등반을 즐길 것이다. 암벽등반은 정상을 밟는 것도 좋지만, 사실 정상(頂上)은 큰 의미가 없다. 왜냐면 정상(頂上) 밟는게 목적이라면 인수봉도 40여개나 되는 루트중에 어려운 코스 가지않고 초보자도 할수있는 난이도 제일 쉬운 코스로 올라가면 되지 않겠는가? 초보자도 2시간이면 올라갈수있는 2피치 짜리 코스도있고, 초보자도 마음만 먹으면 따라 올라갈수있는 중급 코스도있다. 암벽등반은 정상을 밟는게 목적이 아니라, 등반 과정을 배우며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각 코스는 등반 인파로 넘쳐난다. 암벽등반은 위에다 줄 걸고 안전하게 탑로핑 등반만 해도 등반기술을 배우가며 오를 수있어 성취감을 느낄 수 있으며 , 산행 후 마운틴 오르가즘도 1주일 내내 지속돼 1주일 동안이 기다려지며 행복해진다.
1858년 아일랜드 등반가 "찰스 배링턴"이 아이거 북벽 정복에 처음으로 성공한 이후 많은 산악인들이 아이거 북벽에 도전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산악인들이 목숨을 잃어 한때 스위스 정부는 "아이거 북벽" 등반을 금지하기도 했으나 그럴수록 "아이거 북벽"은 오히려 더욱 신비로운 이미지를 갖게 됐다. 현재 "푸른산악회" 회장님이신 고태우 회장님이 쓰신 "알프스 등반사"에서 사고사를 간략히 발췌해봤다. 1981년 한국 산악 연맹에서 파견한 아이거 등반대가 갑자기 변화된 날씨로 3개조로 나누어 비박에 들어갔다가 2개조가 낙롸를 맞아 2명이 사망한 사고를 비롯해 1986년에는 배종순 대장과 김윤겸 대원이 등반도중 10여일 동안 계속된 눈폭풍과 기온의 급강하로 조난 당하여 베이스에 조난신호를 보내왔고, 그후 구조대가 도착했을땐, 대장은 사망하였고, 배윤성 대원은 실종되었다 한다. 1988년 여름 동국대 산악회는 허종행 과 김진성 대원을 먼저 "아이거북벽"에 붙게했다 하얀거미 지점으로 하강중 먼저 김진성 대원을 내려 보낸후 허대원은 박아놓은 4개의 하겐중(하겐은 긴 삼각형 모양의 쇠로 만든 쐐기로서 갈라진 바위틈에 망치로 박고 하겐에 뚫린 구멍에 비너를 채워 추락시 확보용으로 씁니다.) 2개를 회수했는데 이는 가지고 간 하겐이 부족해서 였다한다. 그러나 하강도중 하겐 2개가 뽑히면서 추락해 사망헀고, 5m아래 매달려있던 김진성 대원은 헬기로 구조되었다 한다. 그렇치만 사고 닷새후에는 김진성과 안진섭 두 후배가 등반을 다시 시작해 마침내 선배가 못다 이루고 간 "아이거북벽" 등반을 끝 맺었다 한다. 보편적(普編的)으로 사고(事苦)후에는 자심감도 떨어지고, 맥도 풀리고, 트라우마도 있어 대부분 등반을 포기하는데, 끝내 다른 대원과 등반을 성공했다 하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아마 허종행 선배대원을 생각해서 힘을 냈으리라 생각하니 숙연해집니다. 1995년에는 성남 푸른 산악회 김준수씨가 하산하다 700m를 추락해 사망했다 한다. 이사고(事苦)는 다른 대원이 확보 보는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 충격이 컸다 합니다. 이렇둣 자일 등반은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의지하고 하는 것이기에 정신차려 확인에 확인을 늘 습관처럼 해야한다. 왜냐하면 사람이기에 실수할 수 있기에 실수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할수있기에 그런걸 방지하기 위해선 내가 늘 하는 행동도, 상대방이 하는 행동도, 항상 지켜보며 확인에 확인을 해야한다. 그래서 암벽등반은 아무하구나 함부로 같이 하지않는다.
2006년 컴퓨터도 할줄 모르던 나는 친구의 소개로 카페 띠동갑 산악회에 들어갔다. 회원들은 내가 안 가본 산에도 많이 갔으며, 내가 가보지않은 멋진 코스에도 많이 가서 나는 너무 좋았다. 많은 친구들과 즐겁게 활동하며, 많은 산행정보와 지식을 얻었다. 그때 좋은 산행과 멋진산행 참으로 많이 했었다. 여느 산악회도 마찬가지겠지만, 회원중에는 사진 찍는것이 취미 혹은 그 이상인 회원들도 꽤 여러분이 계셨다. 그들은 개인 사진과 단체사진등 많은 사진들은 회원들에게 찍어 주며 사진봉사 했었다. 사진이 올라오면 회원들은 고맙다는 글 남기고 복사해서 가져오면 된다. 그런데 나는 사실 그때 까지만 해도 사진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시절 찍은 사진은 현재 내겐 한장도 없다. 단체사진 말고는 거의 찍지도 않았지만, 혹여 찍혔어도 내가 사진을 모으질 않았다. 그렇게 6년이 지난 2011년 어느날이었다. 여느때처럼 산행을 갔었다. 그때 어떤 친구가 산에서 내사진을 20여장 찍어 주었다. 사진을 보니 그날은 내눈(目)에 괜찮아 보였다. 특히 가까이서 찍으면 더 싫어했었는데, 그날은 가까이서 찍어준 사진이 사진 실력이 좋아 그런지 난 그 사진에 대해 만족했다. 그후 그는 몇번 더 함께 산에 가 사진을 찍어 주었다. 사진은 잘 나왔고 마음에도 들었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그 친구는 사진에 대해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렇게해서 사진이 몇십장 모이게 되니 자연스레 보관할 장소가 필요해졌다. 딸에게 블로그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곤 그곳에다 자연스레 나의 사진을 모았다. 사진을 모으고보니 안 모을땐 몰랐는데,모으고 보니 남이 찍어준 사진만으론 만족할 수가 없었다. 뎌욱이 시간이 지나고보니, 어느날 많은 사진들이 배꼽만 남고 지워져있었다. 원래 찍어서 보낸 사람이 올린 사진을 삭제하면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동으로 삭제 되었던 것이다. 허탈했지만, 돈 내고 찍은게 아니니 뭐라 할수도 없었다. 그때부터 아! 내가 찍고 싶은거 직접 찍어서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똑닥이 디카를 장만했다. 찍는것도 너무 간편하고 쉬웠다. 이런 세상에~ 샷다속도, 거리, 조리개를 안 맞춰도 되는 전자동이다. 우아~샸다 누를 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때부터 똑닥이 디카와 친한 친구가 되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후에는 사진밑에 설명이 있으면, 그곳에 처음 찿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또한 먼 훗날 내가 블로그 사진을 꺼내 봤을때 생각이 안나 긴가? 민가?할때 설명이 있으면 추억(追憶)이 더 빨리 떠 오르고 오랫동안 생각나지 않을까? 해서 설명도 달아놓기 시작했다. 어떤땐 가끔씩 가슴벅찬 멋진산행을 하고나면 마운틴 오르가즘이 생기는데,그 감정을 글로 써놓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러나 글쓰는 것 이라고는 초등학교 방학숙제인 개학 닷새전에 모아 쓴 5~6줄 짜리 일기가 다다. 그런 내가 느낀 감정을 글을 써 놓는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 이었지만, 그렇다고 글을 써 놓지 않으면, 그 감정 며칠 지나지 않아서 사라질것이고, 나중에는 후회를 할 것 같은 생각에 못 쓰는 글이지만, 어설프게라도 쓰기 시작했다. 주로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써야하기에 새벽에 나가는 나로서는 잠이 부족할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작은 산행기라도 쓰고나면 어려운 숙제를 마친듯 가슴속이 뿌득했다. 나에게 블로그란? 남에게 보여주기 보다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내 인생의 책갈피이며, 인생을 배우는 복습서이다. 내가 행복하게 잘 살고있다는 자존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봐주지 않아도 좋다. 처음 부터 그들을 위해 만든게 아니고, 그건 나를 위해 만든 추억의 총 집합소(集合所)이다. 내 그림자를 길게 남길수 있도록 해준 그 친구가 새삼 고마워진다.
산은 변하면서도 늘 변하지않고 늘 거기에 있지만, 항상 다른 모습으로 우릴 맞이합니다. 따뜻한 봄날이면 겨우내 얼었던 동토를 뚫고 나오는 파릇한 연녹색의 어린 새싹은 우리의 눈(目)을 아주 평온하게 해줍니다. 인류의 조상은 푸른 밀림속에서 벌거벗고 수렵생활하며 지내온 동물이었기에, 지금도 푸르름을 보면 눈(目)이 시원해지고 좋아지며 평온함을 느끼는 것은 수렵생활 때의 DNA가 우리 몸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랍니다. 회색빛 나무 줄기에도 생명의 물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올라옵니다. 봄이 왔슴을 제일 먼저 눈치채고 노란 꽃을 피운다는 복수초. 나도 언젠간 복수초를 만날 수 있는날을 기약해 봅니다.
녹음이 짙어진 여름이면, 도시에서 콘크리트색만 보던 우리의 눈을 시원하게 호강 시켜줍니다. 무거운 등짐지고 올라오는 이들에게 산들바람이 수고한 댓가로 등줄기를 시원하게 긁어줍니다. 건너편 숲속에선 새들이 지저귀고, 골자기에선 맑은 물이 쉴세없이 등산객들에게 쉬어가라고 소리칩니다. 아주 가끔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소낙비라도 한차례 쏟아졌다 그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운무(雲霧)가 몰려와 살아있는 산수수묵화(山水秀墨畵)를 보게되는 커다란 행운도 얻습니다.
노랗고 빨간색으로 덮이면, 등산객의 옷은 형형색색으로 단풍이 듭니다. 평소 자주 산에 안 찿아오던 사람도 많이 찿아옵니다. 말간 하늘과 빨간 고추 잠자리 간간이 떠있는 가을 산속의 암봉(巖峰)들은 찿아오는 이들에게 눈맞춤을 쉴세없이 해줍니다. 눈맞춤 해주는 암봉(巖峰)옆에는 하얀 구절초 꽃이 친구로 곁에서 응원해주니 가을이 호강합니다.
바위도 얼고 땅도 얼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볼것도 하나 없을것 같은 말라빠진 겨울. 산 폭포도 얼어붙었고, 시간도 얼어붙은 겨울이다. 온 세상에 하얀 눈(雪)이라도 내리면, 겨울산행의 백미(白眉)를 볼수있어 더욱 좋다. 상고대 피고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있는 소나무는 동화속의 나라로 안내합니다. 겨울 산엔 커다란 매력이 숨어있다. 그매력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품은 사람은 더 매력적이다.
다른 운동들은 대부분 남을 이기기 위해서한다. 남을 이겨서 쾌감을 느낀다. 남을 이겨서 승리감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산은 반대로 모든 이들에게 쾌감을 줍니다. 산은 남을 이기기 위해서 하는건 없다. 산은 등반을 잘하는 사람이나, 잘 못하는 사람이나, 암벽을하는 사람이나,지팽이를 짚고오는 나이 든 사람이나,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 모두를 어머니 품속처럼 감싸줄 뿐 아니라, 건전한 정신과 든든한 체력을 공정하게 보상으로 안겨준다. 어떤이는 산에 가서 무릎 다 망거졌다 한다. 그럼 산에 안 다닌 사람은 무릎아픈 사람 없습니까? 주위에 보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 몸은 어느 부위나 안 쓰면 굳어지게 되어있다 합니다. 멀쩡한 팔도 한달동안 기부스 해 놓으면 뻐정 팔이 됩니다. 운동을 안 하는 것보다 운동을 해서 뼈 주위에 근육을 키우는것이 뼈를 보호 지탱해주는 역활을 해 결과적으로 무릎이 덜 아프다한다. 자기 체력에 맞춰 등반하고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아주 조금씩 늘려가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보통은 친구들이랑 가고 가끔은 혼자서도 가보고,또 아주 가끔은 가족이 같이 가면 좋습니다. 취미 생활 중에서 평생 부부가 꾸준히 같이 하기에 적합한 운동은 많지않다. 그중에서도 등산은 오랜 시간을 같이 걷는다. 걸으면서 대화(對話)를 자연스레 많이 나눌수있어 서로 이해심을 가질수 있다. 잠재돼있던 스트레스는 시나부로 풀린다
매력이 듬뿍 숨어있는 산, 산은 우리가 관심을 보이며 귀를 기우리면 많은 얘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그 얘기는 귀를 기우리고 대화(對話)를 하고픈 사람에게만 들려준다. 가만이 귀를 기우려보세요?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고요? 아무소리도 안 들리는 것도 안 들리는 것을 들을 수 있기에 들리는 거 랍니다. 우리는 살아 가면서 자질구레한 일을 걸러가며 살아가야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정을 못내리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큰일 같으면 스승님이나, 웃사람에게 의논해 해결 하겠지만, 사소한 걱정거리는 그렇게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런 사소한 걱정 거리가 있을때 걱정 봇따리를 같이 싸들고 혼자 이름없는 산을 주로 갑니다. 그럴땐 사람 별로없는 한적한 산도 좋습니다. 그덕에 안 가본 그 산에도 가볼 수 도 있지요. 혼자 점심 먹으며 걱정 봇따리를 꺼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봅니다. 저울질을 해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산은 어떤 보편적(普偏的)인 생각을 할까? 막걸리 한잔을 먹으며 대답을 기다려봅니다. 마침내 한가지 결정을 내립니다. 추후 번복은 없을거라며 다짐하고 남은 막걸리로 자축(自祝)까지 합니다. 그렇게 나는 가끔 보따리를 산에 두고 내려옵니다. 30여년을 등산에 취미를 가졌던 나는 큰 축복이라 생각하며, 산이 내게 베풀어준 것에 대해 기억했다가 훗날 손자들에게 옛날 얘기처럼 들려줄 겁니다. 걸을수 있다면 큰 축복입니다. 앞으로도 걸을 수만 있다면 만나러갈 것 입니다.
첫댓글 대순이가 산에 대한 긴글을 썻구나 우리 어린시절만 하여도 산에는 나무꾼이나 다니는 곳이라고 생각하였지? 설날 덕 쌓는날 되길
한갑 넘기기전에 내 지나온 길 뒤돌아보고싶었다오 고마워
오랜 시간이 빛바랜 사진처럼 파노라마로 아련하네 작가님 잘 보았습니다
ㅋㅋ 뭐하고 지내남
대단한 대순님!!
본인하고 싶은걸 한다는건 대단한 "행운"이지요 그것도 아내와 함께라니 더없는 "행복"이겠네요~~장문또한 대단합니다 찬사를보냅니다
뜨거운박수를보냄니다
세월의 흔적~한편의 영화로
잘보고 갑니다~~~
삻의 이야기 잘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