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정부는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깡패와 같은 집단을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진압하려고 하였다. 우선 마산상고 학생인 김주열 군이 4월 10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체로 물 위에 떠오르면서 마산을 중심으로 한 데모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3·15 부정선거 이전에 이미 대구에서는 후에 6·3 사태로 이름을 날린 김중태 등이 대구 경북고의 2·28 데모를 주도하였다. 마산에서 일어난 시민폭동은 부산으로 번지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물론 나중에는 동대문 시장의 상인과 서울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거기에 더해서 고등학생과 중학생, 심지어는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데모에 합세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당시 사회에서 가장 엘리트 그룹인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서 국가정치 변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어서 전 국민이 합세하여 국가를 전복시켰다는 의미에서 4·19 학생혁명은 국민혁명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발포명령을 내려 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서 죽음을 당하였다. 국민들은 국가의 강압과 폭력에 굴하지 않고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함과 동시에 하와이로 도주하였다. 부통령 당선자이자 가장 실세였던 이기붕은 이승만의 양자이자 자신의 맏아들인 이강석에게 죽고, 그의 가족들 역시 총으로 쏜 후 이강석 또한 자살하면서 혁명은 끝을 맺게 되었다.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은 누구인가? 이기붕은 충북 괴산 출신으로 보성학교와 연희대학을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오하이오의 데이버 주립대학을 졸업했다. 미국에 있으면서 과도정부의 수반을 맡은 허정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해방 후 우익계에 참여하고 이승만의 비서가 되었다. 서울시장과 국방장관을 거쳤고, 민의원 의장으로서 4사5입 개헌을 주도하였다. 1956년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서 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야당인 장면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자유당 정권의 2인자로서 1960년 3·15 부정선거에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 학생혁명으로 가족과 함께 자살하였다. 이강석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지시로 서울대 법대에 편입하여 다녔다. 그러자 서울대 법대생들의 입학거부 운동으로 인해서 자퇴하고 육사에 입학한다. 다른 학생들은 육사 안 기숙사에서 거주했는데 이강석은 집에서 통학한다. 어머니인 박마리아가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에게 부탁하여 이승만의 83회 생신인 1957년에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육사생도시절 육사교장을 비롯한 모두가 이강석을 황태자로 모셨다. 이강석은 서대문 집에서 태릉 화랑대 육사까지 큰 백마를 타고서 학교에 등교하였다. 이강석이 학교에 갈 때는 모든 경찰관들이 동원되어서 그의 등교길을 도왔다. 이처럼 이강석의 권한은 대단했다. 육사를 졸업한 이강석은 육군 소위로 임관한다. 그러나 4·19 혁명이 발생하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1960년 4월 28일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강욱을 권총으로 쏴서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였다. 가짜 이강석 사건 등 이강석 스캔들이 끊이지 않은 것은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의 권력이 얼마나 셌는지 입증하는 사건이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은 12년간 이승만 독재와 장기집권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학생혁명으로 인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혁명의 해부 』의 저자로 유명한 크레인 브린톤은 혁명의 원인은 ‘정부의 재정적자에서 시작된다 ’고 말했다. 사실상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대부분의 혁명은 정부의 재정적자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이면서 시작되었다. 루이 16세 때의 프랑스혁명을 비롯하여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 등은 모두가 다 국가의 재정적자에서 시작되었다. 이승만 독재에서 시작된 한국의 4·19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우리나라는 재정적으로 세계 최하위의 후진국으로 국민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특히 이승만은 80세가 넘은 고령으로 당시의 나이로서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유당 정부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노렸는가? 이는 당시 이승만을 둘러싼 이기붕 일당의 공작이었다. 고령의 이승만에게 아첨을 떨고 이승만을 허수아비로 만들어서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서였다. 국민들의 불만은 1954년 4사5입부터 시작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에서 4사5입 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이승만을 장기집권시키기 위해 1956년에 실시된 제3대 정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겨우 504만 표로서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이승만이 당선된 이유는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 후보가 유세 도중 갑자기 뇌일혈로 서거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익희에 대한 인기도는 한강 백사장 유세에서 백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또한 개표 결과 신익희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사람들이 대부분 무효표를 찍는 바람에 무효표가 185만 표가 넘었다. 더구나 서울에서는 이승만이 20만 표를 얻은데 비해서 무효표가 28만 표나 나왔다. 여기에 더해서 제3당의 후보로 나선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은 약 30%의 표를 얻어 돌풍을 일으켰다. 이러한 투표결과에 잔뜩 겁을 먹은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을 북한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누명을 씌워서 결국 1959년 7월 사형을 집행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에서 대통령 후보인 이승만이 당선되었으나 부통령 당선자는 야당인 민주당 장면 후보가 당선되었다. 장면 부통령은 그 후 갖은 고초를 겪게 되며 선거에서는 유세 도중 손에 관통상을 입는 테러를 당하게 된다. 1956년 국민들은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국민들의 경제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국민들의 슬로건은 ‘못살겠다 갈아 보자 ’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을 허수아비로 세운 이기붕 일당은 장기집권을 위해서 1960년 3·15 선거에서는 필승의 전략을 세웠다. 그 전에 이미 청년단체 등의 어용단체들과 정치깡패 등을 조직화하여 국민들에게 선거운동을 하고 다녔다. 정치깡패 중에서 임화수는 영화와 예술 등을 활용하여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는 정치깡패였다. 동대문 시장과 남대문 시장 등을 무대로 상인들을 위협하여 돈을 갈취하는 정치깡패들로서는 이정재와 유지광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임화수는 경무대의 경호과장이며 경찰총경인 곽영주가 가장 아끼는 정치깡패였다. 당시 곽영주의 권력은 부부통령이라는 말까지 나오면서 경기도 이천의 동향인 정치깡패 이정재와 유지광 등을 비호하였다. 이들은 깡패 조직을 동원하여 야당의원들의 선거유세 방해 등을 비롯하여 정치에 관여하였다. 대통령제 독재에 대한 폐단을 막기 위해서 1960년 6월 5일 내각제로 정치체제를 바꾸는 헌법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 통과되면서 제2공화국의 내각제 제도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7월 29일 양원제로 상원인 참의원과 하원인 민의원을 뽑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투표율은 84.7%의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내각제 실시의 제2공화국 탄생이라는 의미와 1960년대에 진입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60년대가 시작되면서 김영삼, 박정희, 김대중의 정치적 행보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김영삼은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부산에서 출마하여 무난히 당선되었다. 그리고 김영삼은 이제 초선이 아닌 2선의 중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다행히 자유당을 탈당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민주당 후보들은 국민들의 동정표를 받아서 당선이 되었다. 김대중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고향인 목포가 아닌 강원도 인제에서 제4대 민의원에 출마를 하였으나 낙선하고 이번 5대 민의원 선거에서 다시 인제에서 출마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선거에서 1번만 떨어져도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재기가 불가능한 시대였다. 김대중은 경제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를 맞게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잘나가는 성공한 사업가에서 정치가로 변신을 하면서 거듭된 낙선은 경제적으로 궁지로 몰아넣었다. 또한 그의 부인인 차용애와 사별하는 힘든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김대중은 1945년 목포에서 인쇄업을 하는 부잣집 장녀인 차용애와 결혼하여 1959년까지 14년간 결혼생활을 하면서 장남인 김홍일과 차남인 김홍업을 낳는다. 그 후 김대중의 거듭된 낙선으로 인해서 가족들에게는 엄청나게 힘든 생활의 연속이 계속되었다. 본인 스스로도 인생에서 가장 힘든 고비를 맞으면서 부인까지 낙선의 충격으로 사별하는 불운을 맞게 된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힘들고 팍팍한 현실 정치세계에서 김대중은 이번에도 낙선하였다. 김대중이 강원도 인제 토박이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낙선한 것은 아니고 상대방이 부정선거를 감행하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당선자가 당선무효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김대중의 정치입문은 김영삼과 비교하여 매우 힘들었다. 김영삼은 26세의 최연소 의원에다 벌써 2선의 중진으로 국회에서 자리매김하였다. 반면 김대중은 3대, 4대, 5대 모두 낙선의 고배를 마시면서 3번 연속 낙선하였다. 당시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우선 내각책임제이기 때문에 국무총리가 대통령보다 훨씬 실권이 강했다. 대통령은 명예직 비슷한 형식상 국가를 대표하는 힘없는 대통령에 불과했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형식상 대통령인 윤보선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집권당인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구파는 윤보선을 비롯하여 신익희와 조병옥 대통령 후보를 중심으로 유진산 등 거물급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반면 신파는 장면, 박순천을 중심으로 하는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허정 내각수반의 과도정부를 거쳐서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내각을 책임질 국무총리 지명전에서 1차적으로 윤보선은 자신과 같은 구파의 김도연을 지명하였다. 그런데 김도연은 국회의 동의를 얻지 못하였다. 2차로 윤보선은 자신과 다른 신파의 장면을 지명하면서 장면은 국회를 무난히 통과하였다. 곧 이어서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이 구성되었다. 처음 실시되는 내각제는 많은 잡음을 일으키게 되었다. 김영삼은 민주당의 구파에 속하였으며 특히 윤보선과 가까운 계열이었다. 곧 이어서 김영삼은 민주당 대변인을 맡았고 그 후 최연소 원내총무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처럼 김영삼의 정치행보는 탄탄대로를 걸어가게 되었고 당내에서 젊은 나이에 이미 상당한 비중이 있는 인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김영삼은 머지않은 날에 한국의 최고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하였다. 반면 김대중은 이미 세 번의 실패로 인해서 정치적인 좌절감을 맛보고 있었으며 아직도 원내에 진출을 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뛰어난 웅변과 논리적인 언변이 장면 총리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김대중은 가톨릭 신자로 같은 극진한 신자인 민주당의 장면을 중심으로 한 신파에 속해 있었다. 이때부터 김영삼과 김대중은 같은 민주당이지만 신파와 구파로서 서로 파가 갈렸다. 장면 내각에서 장면은 김대중을 당 대변인으로 발탁하였다. 김대중이 비록 원내진출은 못하였지만 뛰어난 웅변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1961년 김대중이 출마해서 낙선한 강원도 인제 지구의 국회의원이 부정선거로 인해서 당선이 무효처리되면서 인제 지역에서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김대중은 이미 민주당 대변인으로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보궐선거에서 쉽게 당선되었다. 이번 보궐선거에서 김대중은 4번의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처음으로 당선증을 받게 된 것이다. 훗날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서도 4번 만에 당선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김대중이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3일 만에 박정희에 의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가 원내에 진출한 지 3일 만에 국회가 해산되고 말았다. 5·16 군사정부는 모든 입법, 사법, 행정기관을 해산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비상위원회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모든 구정치인들은 자동케이스라는 정치정화법의 정치금지법에 묶여서 정치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후 박정희의 산업화 과정에서 거치는 인권유린 등과의 싸움에서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 사이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박정희는 이 기간 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박정희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 당시 참모총장 송요찬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군의 부정선거 동조 등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기를 들었다. 참모총장 송요찬은 박정희의 인품을 잘 알기 때문에 여순반란사건으로 인해서 고통을 겪은 박정희를 도왔다. 박정희도 6관구 사령관 등 중요한 보직을 거쳤다. 따라서 군의 최고 수뇌부도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하였다. 부정부패에 연루되거나 부정선거 등에 연루된 군인들을 숙청하자는 정풍운동을 박정희가 주도해 나갔다. 박정희의 강경한 정화운동에 박정희와 송요찬은 갈등상태에 있었다. 박정희가 육군본부에서 내려온 부정투표함을 군화발로 걷어 차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박정희의 강한 정풍운동과 관련되어 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 및 일본육사 동기인 이한림 당시 1군 사령관은 자서전에서 군이 4·19 이후에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는 설이 나돌았으며 대충 누가 쿠데타의 주역일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장면 정권은 4·19 이후 국정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다고 밝히고 있다. 이한림은 박정희와 남산에 올라가서 박정희가 동남아식 특히 태국식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과 거사 계획에 대해서 절대적인 반대를 하였다고 했다. 사실상 당시 장면 정권 9개월 동안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 그리고 그 주역들이 바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이라는 것까지 소문이 나돌 정도였으니 군에서는 만일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박정희 중심의 쿠데타일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송요찬은 박정희가 위험인물인 줄 알고서 예편시키려는 생각까지 가졌으나 국정이 혼란한 가운데 박정희와의 우정을 생각하고 박정희의 전력을 감싸줄 정도의 인연으로 인해서 그냥 넘어가버렸다. 송요찬 참모총장은 4·19 혁명 당시 군의 정치적인 개입을 반대하며 군사적 중립을 지켰다. 그 후 제2공화국의 허정 과도내각이 들어서면서 군에서 물러났다. 만일 군이 4·19 혁명에 개입하여 발포명령을 내렸더라면 더욱더 많은 희생자가 났을 것이다. [출처] : https://blog.naver.com/axes2024/221878595077 |
첫댓글 ㅎㅎ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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