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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전(禹性傳) 신도비문>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 지제교 시 문강 우공 신도비명 병서.
성조께서 천명을 받들고 인문을 계도한 지 꼭 일백여년만에 사문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때로는 퇴도 이선생(이황) 같은 분이 계셔 나라의 동남방에서 학문을 창도하시니 그 문인 고제가 빈빈하게 많았으나 진심으로 전수한 적결을 이어받아 훌륭하게 사과 가운데에 들어갈 수 있었던 분들 중에서는 자는 경선이신 추연 우성전 같은 분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의 본관은 단양이다. 이선생 보다 41세가 아래로 약관에 도산에 집지하여 성명의 근원에 대하여 들었으며 난의 강증한 서찰이 고리에 가득하였고 이선생이 자주 칭허하였는데, 그 상세한 내용은 ‘퇴계집’에 실려 있다.
신유년 성균진사가 되어 갑자년 제생을 이끌고 요승 보우를 베기를 청하였으며 무진년 등제하여 한원에 뽑혀 들어가 검열과 봉교를 역임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가 검상이 되었고 9번이나 사인을 지냈다. 병자년에는 봉양을 위하여 수원을 맡아 나왔는데 수원은 폐막만이 쌓여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선생이 이르자 이민이 감히 속이는 자가 없었고 이내 교화가 크게 행해지니 그 후 고을 사람들이 큰 비를 세워 추사하였다. 조정에 들어와서 경악에서 수찬부터 전한을 거쳤고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모두 아장을 지냈으며, 국자감에서는 사성에 이르고 사도시와 사옹원에서는 모두 판사에 이르렀다. 또 외직으로 나와서는 강화와 연안을 맡아 모두 성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 이력의 대개이다.
계미년 이래로 조정 진신이 궤열하여 사류가 위태롭게 되니 선생은 조정하는 논의를 주장하였으며, 신묘년에 이르러서는 대간에서 정철의 죄를 논하고 옥당에서도 곧 차자를 올리게 되었는데 부제학 김수가 선생을 찾게 되자 선생이 만류하기를, “일을 논함에 있어서 이처럼 확대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사간 홍여순이 마침내 간교한 정철에게 아부한다고 하여 선생을 탄핵, 사직을 청하니 선생이 수원의 향리로 물러나와 살게 되었다.
임진년 왜구가 창궐하자 임금은 서쪽으로 파천하고 도성은 함락되었다. 선생은 조정에서 쫓겨난 몸이라 말의에도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에 의군을 일으켜 추의라고 명칭하니 한수 이남의 사민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병세가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포의 바닷가에 채를 만들고 주둔하면서 바닷물을 다려 소금을 만들고 군량을 마련하니 유민도 또한 이에 힘입은 바 많았고 체찰부에서는 이를 본받아 제도화하였다. 이때 창의사 김천일이 강도로 들어오자 선생이 함께 관애를 지켜 남북의 통로를 확보하니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특명으로 성균관대사성에 올렸으며 인장을 내려 포장하고 바다를 건너 관서의 적을 치게 하였다. 이에 선생은 병사를 점검하고 곧 기병하려 하였는데 천장이 이미 평양을 수복하여 적들이 서울로 도망쳐 오니, 선생이 왕래하며 유격하여 천장과 호응하였고 다시 용산의 주사 김천일 이빈 등과 합력하여 서울을 수복하는데 성원을 이루고 도망치는 적을 섬멸하면서 의령까지 추격하였다. 하지만 병이 날로 더하여 수레에 몸을 싣고 돌아오다가 부평에서 생을 마치니 계사년 7월 19일이었다. 홍여순이 선생에게 오래 쌓인 노여움이 있어 중도에서 머뭇거렸다고 거짓 아뢰고 이를 죄로 삼아 추탈관직을 청하였으나 윤상 두수가 연중에서 신구하여 무사하였으니 시론이 옳게 여겼다.
아! 선생께서는 특이한 바탕으로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온정을 맞춤에 극히 공경스러웠고 일찍부터 문행과 가예가 있어 허초당의 집안에 위금하게 되었다. 그 부제 허균이 어려서부터 출중한 재주가 있어 남들은 원대하게 기대하였으나 선생은 탄식하기를, “허씨 집안을 뒤엎을 사람은 틀림없이 이 아이다.”라 하였는데, 허균이 과연 패하기를 선생의 말과 같이 되었다. 선생은 어진 스승을 만나 거기에 의귀하였고 그 가르침에 따라 오묘한 이치를 탐구하되 아무리 수응할 일이 번잡하다 하더라도 하루도 일과를 거르지 않았고 집안을 다스림에도 법도가 있어 등위가 확립되었으며 식견이 해박하고 언론이 통창하였으므로 동료들이 이의없이 추중하였다. 또 조정에 서서 차자라도 올리게 되면 사람들이 너나없이 부러워하고 탄복하였다. 사람을 대함에는 허여하는 바가 적었고 마음에 옳지 못하다고 여기면 한 자리에 앉아서도 말을 주고받지 않았으며 항상 문을 닫고 교우를 끊으면서 뜻을 지킴이 담박하였다.
승지 강서는 양광으로 세상을 숨어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가 조감이 있다고 일컬었는데, 한번은 크게 취하여 맨발로 들어와 공의 두 눈을 쉴 사이 없이 문질러 내렸다. 공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두 눈이 너무나 높아 낮추려는 것이다.”고 하였다. 공은 벼슬길에 나간 이래로 진취를 즐겨하지 않고 사류를 부식하기에 힘써 크고 작고 오고 가는 기미에 대해서도 마음을 쏟아 흘연히 유림의 영수가 되었으니 공을 깊이 아는 사람들은 심지어 “경선이 뜻을 얻으면 사람들이 모두 천성을 다 이루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시기하고 질시하는 자가 날마다 곁에서 엿보고 있어 마침내 경륜을 빼앗긴 채 펴보지도 못하고 뜻을 구원까지 싸가지고 가게 되었으니 어찌 명이 아니었겠는가? 선생은 평일에 본말을 두루 가졌으나 애석하게도 후손이 고단하고 한미하여 건상이 병선에 타버려 그 존심의 진밀함과 역량의 굉대함, 훈업의 위대함과 환적의 수미를 고신할 길 없게 되고 마침내는 순유와 신신으로 하여금 완전히 묻혀버려 조금도 볼 수 없게 하니 이는 후학들이 길이 차탄을 품게 되는 까닭이며 또 사문의 경중을 점쳐보는 척도가 되기도 한 대목이라 하겠다. 그러나 혹 선배들의 잡록에 의하여 그 만에 하나를 상상하게 되고 거기에서 수집하고 찬차를 꼽아 대충 기실을 엮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그 숨겨진 광채를 드러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선생은 가정 21년 임인년 8월 16일에 태어나 향년 52세로 수원의 처서 신좌원에 장사지내졌다. 우씨가 현달한 것은 고려 때 부터인데 하공진사 현이 그 시조이다. 대대로 맏아들로 이어 8대 인열이 본조에 들어와 좌정승이 되니 이름이 국사에 실려 있다. 그의 아들은 고성군사 양수요, 또 그 아들은 보문각 직제학 효강이며 그 아들이 평양판관 기요, 그 아들이 전함제검 환이요, 그 아들이 승사랑 성윤이요, 그의 아들이 의빈부 경력에 증 좌승지 언겸인데, 이가 선생의 아버님이다. 비 연안김씨는 사포 석린의 따님이다. 승사공은 아우인데 상의원 별좌 성훈과 함께 한훤당 김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내행이 잘 갖추어져 당세에 현저하게 일컬어졌으며 경력공 또한 서봉선생 유우를 스승으로 모셔 집안명성을 잘 계승하였는데, 선생에 이르러서는 대대로 대현의 문하에 종유하여 연원의 내려옴이 있었기 때문에 배양하고 성취한 바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제검공의 백형 연안부사 휘 수가 후사가 없어 승사공의 아우 별좌공으로 후사를 이었고, 그분이 또 후사가 없어, 경력공의 아우 사옹원봉사가 준겸으로 뒤를 이었는데, 또 후사가 없어 선생으로 후사를 삼았으니, 이것이 선계이고 선생이 또 후사가 없어, 상께서 종자인 승사랑 영길로 뒤를 삼도록 명하셨다. 영길은 3남을 두었으니 맏이 원남은 의금부 경력이고 다음은 형남 예남인데 지금 그 후손이 약간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퇴계수는 헤아릴 수 없이 가득하여,
적시기도 하고 뜰 수도 있어 모두가 마셔도 배를 채웠으며,
여기 추연에까지 쏟아 진맥과 접하게 하였는데,
이용도 소나기처럼 하여 선생의 법측이 되었다네.
명석한 선생은 행실이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고,
자신을 돌아보고 모두를 발휘하니 바로 교구이고 척도여서,
이로서 자신을 잡아매어 혼탁에 꺾이지 않게 하였다네.
혹 나가서 임금을 섬기면 옥돌이 오직 옥이 되고,
편히 쉬면서 깊이 잠기면 계합 있어 묵묵했으며,
일을 만나 분발하면 절충도 하고 입곡도 했으니,
이 마음의 청명함은 귀신에 다짐해도 부끄러움 없었다네.
심력을 다하여 죽어야 그만두려는데 왕사는 어려웠으니,
예에 가자가 합당하거늘 죄는 어찌 무거웠던가?
저 피리를 불고 북을 치고 한 자들만 유독 천성이 없었더란 말이던가?
유감이 있으면 반드시 풀어 게도 되고 도둑도 되었다네.
소시에 굴했으나 끝내는 폈으니 초고를 발간도 할만 하였고,
두었다가 후래를 기다리면 경행이 더욱 빛이 나기도 했으련만,
선생의 행적을 이제는 어디에서 우러르며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그러나 억억한 높은 산에 엄연한 유택 있나니,
만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정석을 보아라.
후학 선공감가감역 여흥 이익은 글을 짓다.
증 이조판서 성호 이익이 선생의 비문을 지은 것은 증자 사시가 있기 전의 일이었다. 정조조에 좌의정 채제공이 선생의 시장을 지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퇴계선생께서 서울에 들어오면 많이 공의 집에 주인을 정하여 일시의 사류가 서로 밀어 영수로 삼았다.”고 하였고 유문충공의 일록후서에 이르기는, “눈이 일세에 높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에 원망을 많이 사 출세에 애로가 많았고 궁곤하게 지냈으나 변함이 없이 죽었다.”고 하였다. 아! 이선생이 공을 대한 바를 보면 공에게만 전한 학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겠고 유문충공이 공을 슬퍼함을 보면 정직한 천성을 품수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공의 평생을 다 알 수 있다 하겠는데, 하물며 천성을 발휘하여 의에 일어서 전복을 막는 소용으로 쓰임이 저토록 특출하고 천지간에 빛이 남에 있어서랴?
배위 증정부인 양천허씨는 초당 엽의 따님인데 공보다 8년 뒤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아!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수백년이 지나도록 자손이 단약한 탓으로 영증이 아직껏 없다가 금상 12년에 경기유생이 연로에서 상언함으로 말미암아 상께서 특별히 판부를 내리셨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우성전은 학행과 절의가 두루 탁연하였는데 아직까지 영증을 베풀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흠전이라 하겠다. 삼품에 시호를 내리는 것은 전례가 없으나 품계를 높이고 증직을 더한다면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랴? 특별히 증시의 은전을 베풀어 사림의 소망에 부응하게 하라.”고 하고 이내 이조참판에 증직하였고 2년 후에는 정신의 상소로 인연한 묘당의 복계에서 가증과 사시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이조판서를 가증하였다. 이에 법으로도 시호를 내리게 되었으니 도학을 높이고 절의를 드러냄은 비단 사림의 영광일 뿐만이 아니고 왕언을 밝게 천양하고 궐전을 수거하는 것은 이 어찌 사책을 빛낼 일이 아니던가? 이에 공의 7대손 군수 하영의 부탁으로 눈 어둡고 귀 먼 것도 잊고 실적을 서술하여 태상씨에게 올리는 바이다.
전 수반판사 겸 총영사 이상천은 글씨를 쓰고 전액을 하다.
[출처] <우성전禹性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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