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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및 작품 스크랩 보리피리-한하운 詩-백창우 박곡- 정태춘 노래
시인학교 추천 0 조회 56 08.03.05 16: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김선규_보리피리_컬러인화_2005

 

보리피리

 

詩     : 한하운

작곡 : 백창우, 노래 : 정태춘

작곡 : 조념, 노래 : 양은정, 김진원, 진용섭, 엄정행, 황병덕, 김문자

작곡 : 김진균, 노래 : 문학봉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ㅡ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ㅡ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ㅡ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ㅡ ㄹ 닐니리

 

한하운의 詩 '보리피리'는 다양한 곡들이 있다. 백창우가 만들고 정태춘이 부른곡, 가장 많이 알려진 조념 선생의 곡(양은정의 곡은 조념 선생의 곡을 국악가요 형태로 편곡한 곡), 김진균의 곡 까지. 밑에는 가장 많이 알려진 조념 선생의 '보리피리'에 대한 글이다. 참고로 조념 선생의 곡 중에 70년대 민중가요의 대표적인 곡 '녹두꽃'이 유명하다.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한 조념의 대표작 <보리피리>는 단순히 ‘닐리리 닐리리’라고 흥얼거리는 피에로적인 노래는 결코 아니다. 시인 한하운의 한 맺힌 인생의 총정리라고 할 수 있는 시에, 조념의 철학적 인생관에 입각하여 작곡한 수작 중에 수작이다. 단순한 선율과 향토적인 춤곡조의 선율, 단순한 화음과 리듬으로 처리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관현악 편곡으로 세밀히 분석하면 깊이 있는 선율과 부가화음, 리듬, 전개법 등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하운 詩 '보리피리' 전곡듣기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백창우, 노래 : 정태춘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조념, 노래 : 양은정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조념, 노래 : 테너 김진원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김진균, 노래 : 바리톤 문학봉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조념, 노래 : 베이스 진용섭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조념, 노래 : 테너 엄정행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조념, 노래 : 바리톤 황병덕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조념, 노래 : 메조소프라노 김문자

 


▲ 보육원 직원들과 함께한 모습(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이 한하운).

 

한하운 시비를 찾아서

 

김구림(시인, 사진작가)

 

장능공원묘지

 

한하운 묘지 앞에 세워진 시비를 찾아가려면 경기도 김포시내로 진입하면서 이정표를 주시하면 장능으로 가는 표시가 나타난다. 장능 가는 길을 따라가면 고개를 넘어서면서 바로 우측엔 장능, 좌측엔 장능공원묘지가 있다.

 

이곳에 유택을 마련한 한하운의 본명은 태영. 함남 함주 출생으로 중국 북경대학을 졸업하여 함남·경기도 도청 등에 근무중 시 「전라도 길」 외 12편이 이병철 선(選)으로 발표, 나병의 병고에서 오는 저주와 비통을 읊어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시집 『한하운 시초』 『보리피리』 『한하운 시선집』 『나의 슬픈 반생기』 등이 있다.

 

…중략…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철저히 외로운 시인

 

묘지 관리인은 약속대로 오후 두시에 만나게 되었다. 60세쯤 되어 보이는 관리인은 몸은 튼튼하게 보였으나 수척한 얼굴에 어머님을 잃은 아픔의 흔적들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나도 2년 전에 어머님을 여의고 그 슬픔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하필 경황중에 누를 끼치게 되어 그분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분은 한하운 묘지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묘지를 보는 순간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시비가 세워져 있을 정도에서 벌초가 안 되어 있거나 초라하게 보인 묘지는 내 일찍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묘지 앞에 세워진 몇 그루의 상록수는 20여년동안 한번도 손질한 적이 없어 보였고 묘지에는 잔디와 잡초가 반반 이었다. 나는 관리인에게 한하운의 유택이 왜 이곳에 마련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20여년 전 일이라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전해 듣기로는 김포에서 부천으로 가는 길가에서 죽었기에 가까운 이곳에 유택을 마련하게 된 줄로 알고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10년여 전부터 찾아온 사람은 거의 없으며 벌초도 매년 관리인이 해주고 있으나 금년에는 바쁜 탓으로 아직 손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 보아도 음식 한번 차린 흔적이나 꽂 한송이 놓은 흔적이 없었다. 시비도 너비 30cm 높이 83cm로 지금까지 내가 확인한 시비 중에는 가장 작은 시비에 전면은 ‘詩人人韓何雲永泰之墓’ 후면에는 시 「보리피리」전문과 ‘1975.4 미망인 유임수 세움’이라는 글귀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보리피리 불며 봄언덕
고향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욕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전문

 


▲ 소록도 중앙공원에 세워진 한하운 시비./사진 가져온 곳 : 오마이뉴스 조호진

 

한하운은 생시에 별 탈없이 사회활동을 한 것처럼 알려져 있으며 그와 관련된 기록에도 나병은 완치되었는데 간장염으로 사망했다고 대부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병은 완치되는 것이 아니라 나으면 음성환자가 된다고 한다. 그는 월남하여 한때 방랑생활을 했다. 천형인 나병의 병고에서 오는 비통을 인내하면서 강인한 정신력으로 사회참여 내지 나병환자 시인으로서 큰 화제를 일으켜 한때 많은 시 독자를 얻기도 했다. 1950년 후에도 세 번이나 나병이 재발하여 남모를 고통을 느끼며 살다가 마침내 나병과 간장염의 합병으로 눈을 감았다고 국립소록도 병원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이렇듯 생시에는 나환자로서 정신적 갈등과 실향의 아픔까지 겹친 불운의 한 시인, 그 시인의 초라한 묘지에서는 매운 연기가 침묵으로 솟아 순례자들의 눈시울을 적시운다. 눈물의 언덕을 지나 다시 눈물의 언덕에 누워 지금도 보리피리를 부는지, 장능공원묘지는 김포비행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이륙하고 착륙하려는 비행기마다 독수리 발톱처럼 사납게 바퀴를 내밀고 그 폭음은 봉분의 늙은 잡초들을 흔들며 하늘을 찢는다.

 

이처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철저히 외로운 한 시인의 묘지 앞에서 나는 무심히 돌아설 수 없었다. 꽃이라도 몇 송이 놓아드리고 싶었다. 시내로 내려가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하얀 국화 한 묶음을 사가지고 왔다. 하루라도 더 오래 피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상석 위에 놓지않고 시비 앞에 땅속 깊이 꽂아 놓았다.

 

묘지 아래 차길을 따라가면 세한기계회사 곁에 큰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다. 버드나무 전면 도랑길을 따라가면 우측으로 아래서부터 아홉째줄 세번째 묘가 한하운 묘다.

소록도를 찾아서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속으로 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千里 먼 전라도 길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에> 전반부 생략

옛날 일제시대에 나환자들이 타고 다닐 차가 어디 있었겠는가. 걸어서 걸어서 순천 벌교를 지나 황톳길을 따라 고흥군 녹동에 도착, 배를 타고 소록도로 건너가야만 했다. 그것도 영하의 날씨 또는 여름 무더운 날씨에 환자의 몸으로 걸어서 가야 했던 그 고통스런 장면을 한하운은 시로써 잘 나타내주었다. 또한 하운은 나환자 구제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소록도 관계자에 의하면 “한하운은 소록도를 여러 번 다녀 갔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입원한 기록은 없으며 다른 나환자들을 위하여 다각적으로 동분서주하였다”고 말한다.

너들의 이름은 문둥이였다.
(중략)
굽신거리던 허리는 이제
대지를 굽어 하늘을 향하는
일하는 허리가 되었다.
어서 욕된 얼굴을 쳐들어라…(중략)
여기 정착지에 서서 이제 한없이
눈감고 죽어도 좋은
살아보는 나의 세월에 서 있다
꿈에라도 생각치 못한 나의 세월이여

―<어느 정착지>에서

위 시에서 나타나듯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빌어먹는 나환자들이나 얼굴이 험하여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환자들, 인간대접을 제대로 받지못한 수 많은 나환자들을 위하여 한하운은 노심초사하며 살았다. 그는 소록도 정착지를 돌아보며 ‘이제 한없이 눈감고 죽어도 좋은/살아보는 나의 세월에 서 있다.’라고 읊은 그분이 만일 지하에서 평화롭고 풍요로운 현재의 소록도를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워 할까

 

소록도는 전남 고흥군 도양읍 녹동항으로부터 해상 6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150만평 면적에 국립 소록도 병원을 중심으로 7개 마을이 있다. 국립 소록도 병원은 원래 1916년 소록도 자해원이라 칭하여 일본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당시는 19만 9천평에 나환자 100명을 수용하였으나 1943년 말에는 5,575명의 많은 환자를 수용하였으며 1945년 해방 후 일부 불량 환자들의 폭동으로 80여 명의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1982년 국립 소록도 병원으로 개칭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종 시설물은 물론 운영 제도면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고 한 관계자는 말한다.

 

한하운 시비는 공원 내 구라탑(救邏塔) 좌측에 있다. 시가 새겨진 빗돌은 1939년 소록도병원 제4대 원장 주방정계(周防正季)의 재직시 환자들이 바닷가에서 가로 370㎝, 너비 185㎝, 두께 60㎝의 돌을 목도해서 끌어다 놓고 망배석으로 사용해 오던 것을, 1972년 5월 17일 병원 개원 56주년 기념사업으로 시 「보리피리」 전문을 새겼다고 한다.

 

소록도 하면 우선 불결한 느낌을 갖게 된다. 한때는 나환자를 천형의 죄수처럼 사갈시 여겨왔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소록도를 한번이라도 방문한 사람이면 천형적 나병은 불치의 병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병은 낫는다’라는 공원 탑에 새겨 놓은 푯말과 음성환자들이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모습 아래서 잘못된 선입감은 사라지게 된다.

 

현재 소록도는 유독(有毒)지대와 무독(無毒)지대로 이원화하고 있으며 유독지대(환자지대)의 경작지는 각 부락 공동으로 경작하고, 경작지 일부는 환자 개인별로 분할 배당하여 주로 채소를 재배토록 하고 있다. 앞으로는 경노동 수익사업을 연구 개발하여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면서 소득증대를 기할 수 있는 사업을 연구 개발하여야 할 것이라고 한 관계자는 말했다.

 

지금은 옛날 그 어렵던 시절을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직 오염되지 않은 바다와 깨끗한 해수욕장 흰 구라탑을 중심으로 융단처럼 잘 손질된 잔디밭과 아름다운 상록수로 이루어진 병원 주변의 공원은 사철 변함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또한 섬 대부분에 송림이 울창하며 갑만 굴곡이 수려하고 흰 모래밭과 푸른 소나무가 이어져 풍경이 아름답다. 일면 토질도 비옥하고 도처에 백화소차(白花蔬茶)가 무성하며 생활용수도 풍부하고 기후도 온화하다. 나환자 요양소가 아니라 낙원같은 느낌이 든다.

한하운 시비는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광명 2리 제주조각공원 신천지미술관에도 시 「보리피리」와 <파랑새>가 새겨진 시비 2기가 `세워져 있다.

나는/나는/죽어서/파랑새되어
푸른하늘/푸른들/날러 다니며
푸른노래/푸른울음/울어 예으리
나는/나는/죽어서/파랑새 되리/

 

―<파랑새>

 

원, 진용섭, 엄정행, 황병덕, 김문자

작곡 : 김진균, 노래 : 문학봉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ㅡ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ㅡ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ㅡ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ㅡ ㄹ 닐니리

 

한하운의 詩 '보리피리'는 다양한 곡들이 있다. 백창우가 만들고 정태춘이 부른곡, 가장 많이 알려진 조념 선생의 곡(양은정의 곡은 조념 선생의 곡을 국악가요 형태로 편곡한 곡), 김진균의 곡 까지. 밑에는 가장 많이 알려진 조념 선생의 '보리피리'에 대한 글이다. 참고로 조념 선생의 곡 중에 70년대 민중가요의 대표적인 곡 '녹두꽃'이 유명하다.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한 조념의 대표작 <보리피리>는 단순히 ‘닐리리 닐리리’라고 흥얼거리는 피에로적인 노래는 결코 아니다. 시인 한하운의 한 맺힌 인생의 총정리라고 할 수 있는 시에, 조념의 철학적 인생관에 입각하여 작곡한 수작 중에 수작이다. 단순한 선율과 향토적인 춤곡조의 선율, 단순한 화음과 리듬으로 처리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관현악 편곡으로 세밀히 분석하면 깊이 있는 선율과 부가화음, 리듬, 전개법 등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하운 詩 '보리피리' 전곡듣기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백창우, 노래 : 정태춘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조념, 노래 : 양은정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조념, 노래 : 테너 김진원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김진균, 노래 : 바리톤 문학봉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조념, 노래 : 베이스 진용섭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조념, 노래 : 테너 엄정행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조념, 노래 : 바리톤 황병덕

 

 

보리피리 - 詩 : 한하운, 곡 : 조념, 노래 : 메조소프라노 김문자

 


▲ 보육원 직원들과 함께한 모습(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이 한하운).

 

한하운 시비를 찾아서

 

김구림(시인, 사진작가)

 

장능공원묘지

 

한하운 묘지 앞에 세워진 시비를 찾아가려면 경기도 김포시내로 진입하면서 이정표를 주시하면 장능으로 가는 표시가 나타난다. 장능 가는 길을 따라가면 고개를 넘어서면서 바로 우측엔 장능, 좌측엔 장능공원묘지가 있다.

 

이곳에 유택을 마련한 한하운의 본명은 태영. 함남 함주 출생으로 중국 북경대학을 졸업하여 함남·경기도 도청 등에 근무중 시 「전라도 길」 외 12편이 이병철 선(選)으로 발표, 나병의 병고에서 오는 저주와 비통을 읊어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시집 『한하운 시초』 『보리피리』 『한하운 시선집』 『나의 슬픈 반생기』 등이 있다.

 

…중략…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철저히 외로운 시인

 

묘지 관리인은 약속대로 오후 두시에 만나게 되었다. 60세쯤 되어 보이는 관리인은 몸은 튼튼하게 보였으나 수척한 얼굴에 어머님을 잃은 아픔의 흔적들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나도 2년 전에 어머님을 여의고 그 슬픔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하필 경황중에 누를 끼치게 되어 그분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분은 한하운 묘지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묘지를 보는 순간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시비가 세워져 있을 정도에서 벌초가 안 되어 있거나 초라하게 보인 묘지는 내 일찍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묘지 앞에 세워진 몇 그루의 상록수는 20여년동안 한번도 손질한 적이 없어 보였고 묘지에는 잔디와 잡초가 반반 이었다. 나는 관리인에게 한하운의 유택이 왜 이곳에 마련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20여년 전 일이라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전해 듣기로는 김포에서 부천으로 가는 길가에서 죽었기에 가까운 이곳에 유택을 마련하게 된 줄로 알고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10년여 전부터 찾아온 사람은 거의 없으며 벌초도 매년 관리인이 해주고 있으나 금년에는 바쁜 탓으로 아직 손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 보아도 음식 한번 차린 흔적이나 꽂 한송이 놓은 흔적이 없었다. 시비도 너비 30cm 높이 83cm로 지금까지 내가 확인한 시비 중에는 가장 작은 시비에 전면은 ‘詩人人韓何雲永泰之墓’ 후면에는 시 「보리피리」전문과 ‘1975.4 미망인 유임수 세움’이라는 글귀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보리피리 불며 봄언덕
고향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욕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전문

 


▲ 소록도 중앙공원에 세워진 한하운 시비./사진 가져온 곳 : 오마이뉴스 조호진

 

한하운은 생시에 별 탈없이 사회활동을 한 것처럼 알려져 있으며 그와 관련된 기록에도 나병은 완치되었는데 간장염으로 사망했다고 대부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병은 완치되는 것이 아니라 나으면 음성환자가 된다고 한다. 그는 월남하여 한때 방랑생활을 했다. 천형인 나병의 병고에서 오는 비통을 인내하면서 강인한 정신력으로 사회참여 내지 나병환자 시인으로서 큰 화제를 일으켜 한때 많은 시 독자를 얻기도 했다. 1950년 후에도 세 번이나 나병이 재발하여 남모를 고통을 느끼며 살다가 마침내 나병과 간장염의 합병으로 눈을 감았다고 국립소록도 병원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이렇듯 생시에는 나환자로서 정신적 갈등과 실향의 아픔까지 겹친 불운의 한 시인, 그 시인의 초라한 묘지에서는 매운 연기가 침묵으로 솟아 순례자들의 눈시울을 적시운다. 눈물의 언덕을 지나 다시 눈물의 언덕에 누워 지금도 보리피리를 부는지, 장능공원묘지는 김포비행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이륙하고 착륙하려는 비행기마다 독수리 발톱처럼 사납게 바퀴를 내밀고 그 폭음은 봉분의 늙은 잡초들을 흔들며 하늘을 찢는다.

 

이처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철저히 외로운 한 시인의 묘지 앞에서 나는 무심히 돌아설 수 없었다. 꽃이라도 몇 송이 놓아드리고 싶었다. 시내로 내려가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하얀 국화 한 묶음을 사가지고 왔다. 하루라도 더 오래 피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상석 위에 놓지않고 시비 앞에 땅속 깊이 꽂아 놓았다.

 

묘지 아래 차길을 따라가면 세한기계회사 곁에 큰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다. 버드나무 전면 도랑길을 따라가면 우측으로 아래서부터 아홉째줄 세번째 묘가 한하운 묘다.

소록도를 찾아서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속으로 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千里 먼 전라도 길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에> 전반부 생략

옛날 일제시대에 나환자들이 타고 다닐 차가 어디 있었겠는가. 걸어서 걸어서 순천 벌교를 지나 황톳길을 따라 고흥군 녹동에 도착, 배를 타고 소록도로 건너가야만 했다. 그것도 영하의 날씨 또는 여름 무더운 날씨에 환자의 몸으로 걸어서 가야 했던 그 고통스런 장면을 한하운은 시로써 잘 나타내주었다. 또한 하운은 나환자 구제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소록도 관계자에 의하면 “한하운은 소록도를 여러 번 다녀 갔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입원한 기록은 없으며 다른 나환자들을 위하여 다각적으로 동분서주하였다”고 말한다.

너들의 이름은 문둥이였다.
(중략)
굽신거리던 허리는 이제
대지를 굽어 하늘을 향하는
일하는 허리가 되었다.
어서 욕된 얼굴을 쳐들어라…(중략)
여기 정착지에 서서 이제 한없이
눈감고 죽어도 좋은
살아보는 나의 세월에 서 있다
꿈에라도 생각치 못한 나의 세월이여

―<어느 정착지>에서

자들이나 얼굴이 험하여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환자들, 인간대접을 제대로 받지못한 수 많은 나환자들을 위하여 한하운은 노심초사하며 살았다. 그는 소록도 정착지를 돌아보며 ‘이제 한없이 눈감고 죽어도 좋은/살아보는 나의 세월에 서 있다.’라고 읊은 그분이 만일 지하에서 평화롭고 풍요로운 현재의 소록도를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워 할까

 

소록도는 전남 고흥군 도양읍 녹동항으로부터 해상 6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150만평 면적에 국립 소록도 병원을 중심으로 7개 마을이 있다. 국립 소록도 병원은 원래 1916년 소록도 자해원이라 칭하여 일본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당시는 19만 9천평에 나환자 100명을 수용하였으나 1943년 말에는 5,575명의 많은 환자를 수용하였으며 1945년 해방 후 일부 불량 환자들의 폭동으로 80여 명의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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