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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과 시 스크랩 초기 기독교 부흥사 김익두 목사
가을무지개 추천 0 조회 31 12.05.20 11: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초기 기독교 부흥사 김익두 목사

길선주가 말씀을 통해 영적 각성과 성령의 은혜를 주도한 한국의 바울이라면, 김익두는 이적과 치유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한 한국의 베드로였다. 그는 1874년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신 가정을 일찍부터 돌봐 왔던 그가 사기를 당해 모든 재산을 잃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타락의 생활을 하게 된 계기였다. 그는 날마다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했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량배가 되었다. 그가 얼마나 악행하였는지 사람들이 '오늘 호랑이 익두인지 억두인지 만나지 않게 해 줍소서'라고 성황당(城隍堂)에 빌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강제로 돈을 빼앗아 "김내라"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회심한 후에는 그가 과거를 뉘우치고 사람을 때린 장소마다 찾아다니며 방성대곡으로 울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인가 장에 나갔다가 서양 여자가 전도하며 전해준 전도지 사건을 계기로 회심하게 되었다. 전도지를 받은 김익두는 '뭐 나더러 양귀신을 믿으라고' 하며 전도지로 코를 풀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여자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자기보다 개화되어 있는 서양 여자가 멀리 이국 땅에 와서 저러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때 친구인 박태후의 전도를 받아 교회엘 나가게 된 것이다.

그는 순 한문 신약성서를 100번 읽으며 신앙에 심취했고 그 과정에서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세례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가 삼일간 금식을 하고 산에서 내려 올 때 큰 불덩어리가 가슴에 떨어져 화끈거리는 체험을 하였고 하늘에서 "김익두야! 김익두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임을 깨달았고 하염없이 울며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그의 사역에서는 특히 치병의 역사가 많이 나타났는데 심지어 임택권 목사는 '이적증명회'를 만들어 김익두 목사의 집회 현장에서 이적이 일어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그것을 증명했는데 약 일만명 가량의 치병자를 추측하고 있다.
그의 최초의 이적은 1919년 12월 25일 달성군 현풍읍내 현풍교회에서였다. 거지 행각을 하며 살던 박수진이란 자가 있었다. 10년전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음식도 누워서 먹던 자였다. 김익두목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박수진의 아래 턱이 올라가 붙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에 감격한 박수진이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며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여 온 동네가 놀라게 되었다. 그의 신유의 역사는 이후 계속 되었고 곱사등이 소녀가 펴지기도 하고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가 계속 되었는데, 이런 사건들을 동아일보 58호에서는 '김익두의 이적'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김익두목사의 신유의 사역은 병자 자신의 회개와 간구가 함께 역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요 순결한 삶으로 요구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구 집회에서 김경애라는 기생이 1년 남짓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김익두목사의 간절한 기도와 자신의 간절한 회개로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다시 기생의 생활로 돌아가는 바람에 병이 재발하고 말았다. 또 안악군 동문면에 최석황이라는 자는 30년이나 고생하던 종기를 치료받았는데 후에 타락하여 병이 재발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이 응한 사건이었다.

그의 집회 역시도 철저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임하는 집회였다. 1920년 10월 11일부터 열린 평양집회에는 일만여명이 모여 통회와 자복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새벽기도에는 수천명이 마당에 멍석을 깔고 통회의 눈물로 아침을 밝히는 영적 각성이 있기도 했다.

김익두목사는 원칙을 세우고 생활을 하였는데 오늘의 목회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새벽에 은밀히 기도할 것, 신구약 2장씩 숙독할 것, 냉수마찰, 하루 세 번 가정예배 드릴 것 등이다. 그는 또한 철저히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믿는 생활을 몸소 실천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이적의 사역자로 삼으신 것은 이런 믿음의 그릇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150여 곳에 교회를 세웠고, 설교횟수 이만팔천번, 새신자 28만명, 치병자 일만여명이였고,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이 있는데 그 중에 이성봉, 주기철, 김재준 등 한국교회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사경에 이르도록 고문을 당했고,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광복 후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었지만 한국동란 때 교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 공산당에 의해 교인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날이 1950년 10월 14일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 이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함으로 환란과 핍박 가운데 고통하는 이 민족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부흥 집회를 통해 이 땅에 능력으로 복음을 전한 하나님의 종이였던 것이다.

 

 

 

 

죽지 않는 순교자 김익두 

 

책이름 : "죽지 않는 순교자 김익두"
저   자 : 한춘근 박사
출판사 : 성서신학서원

 김익두 목사님은 성령이 충만한 치유와 능력의 사역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불과같은 성령의 역사하면 김익두, 길선주, 이성봉 목사님을 꼽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이 책에 나타난 모습은 그것만은 아닌것 같다.

 첫째로 김익두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에 끝까지 항거한 중심있는 목회자이다. 일제는 이런 그를 1938년 12월28일 강제로 목사직을 박탈하고 고문으로 참혹해진 그와 일가를 쫓아내었다. 그는 이곳에서 1945년 해방이 될때까지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 하루 세번씩 기도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해방후 고향 신천에 남아서 성도들을 공산치하에서 보호한 사랑의 목회자이다. 그는 월남하지 않았다. 대신 교계의 지도자로서 남아 공산당의 탄압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는 깡패출신의 목회자 답게(?) 복음전하기에 겁이 없었다. 그는 김일성이 초청한 노동절 경축회장에서 김일성에게 복음을 전했다. '예수님만 믿으면 참 좋겠는데' 그가 빙긋이 웃으며 말하자, 김일성이 대답했다. '예' 이뿐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김일성을 만날 기회가 오자 그는 또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김일성이 약간은 자신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예 믿어야디요.' 그러자 김익두 목사가 말했다. '예수 믿지 않으면 반드시 망합니다.' 이 강권에 김일성은 고백했다. '예, 믿갔습네다.' 김일성에게 이렇게 복음을 전한 사람은 아마도 그가 유일한 것 같다. 이 내용들은 그가 신천에서 공산당에 의해서 순교할 때까지 동행했던 저자 한춘근 박사의 기록들이다.
 

 둘째로 김익두 목사님은 기도와 말씀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가 일평생 가장 소중히 여긴것은 다름아닌 성경이었다. 그는 평생에 신약을 1000번을 정독했고, 구약은 100번을 독파했다. 평상시 암송하는 구절은 100구절 정도. 그는 매일 6시부터 2시간 정도를 기도했고, 8시부터 1시간 30분 정도를 성경읽기에 할애했다. 언젠가 김익두 목사가 성경을 읽다가 눈물을 닦으면서 흐느껴 우는 것을 필자 한춘근 박사가 보았다. 그는 물었다. '목사님...(중략)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4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한번도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우리 예수님께서...(중략)'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기사와 이적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는 왜 설교의 결론이 늘 성경을 읽으라는 것으로 끝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였다. '내가 수십년 동안을 ...(중략) 금식도 많이 해보고 이적도 많이 체험해보고 부흥집회도 많이 해보았으나 성경을 읽어 얻은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없음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의 일원으로 있는 나는 과연 얼마나 성경을 읽고 있는가? 활화산과 같이 복음을 증거했던 김익두 목사님의 삶을 통해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초기 기독교 부흥사

 

장로교 목사이자 유명한 부흥사였던 김익두(金益斗)는 1874년(고종 11년) 11월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아버지 응선(應善)과 어머니 전익선(田益善)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으며 16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김익두는 한때 상업에 종사했으나 실패했으며,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 유산을 탕진하는 등 어려움을 겪자 삶에 회의를 느꼈다.

20세 이후 청년시절에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싸움과 술주정을 일삼아, 인근 고을에서 '개망나니 김익두'로 불릴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27세 되던 1900년 봄에 김익두는 친구 박태환(朴泰煥)의 전도로 안악군에 있던 금산교회에 갔다. 여기서 그는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Swallen, W.L.)의 '영생'(永生)이라는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신약성서를 1년에 100번이나 독파하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변모하였다. 그후 1901년 7월에 김익두는 부인, 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스왈렌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친구의 강권에 못이겨 술을 마시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뛰쳐나온 김익두는, 산에 들어가 대성통곡하며 회개기도를 하는 가운데 큰 불덩이가 몸에 떨어지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이 때 '가슴을 칼로 찢는'것 같은 성령의 내적 임재(臨在)를 경험한 그는 다시는 약해지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김익두는 1901년 10월 재령(載寧)교회 전도를 위해 헌신하라는 스왈렌의 권유를 받고 교역사업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스왈렌으로부터 전도실력과 신앙을 인정받은 그는 1903년에는 신천(信川)지역의 개척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신천에서도 그는 새벽기도, 신약과 구약을 하루에 각각 2장씩 숙독, 냉수마찰, 가정에서 하루 3번 예배 등 스스로의 원칙을 굳게 지켰다. 그리고 항상 손에 성경을 들고 틈 나는대로 읽었으며, 길을 걸을 때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습관이 생길 정도로 열중하였다. 김익두는 1906년 3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한 다음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1년 어느 날 김익두는 마가복음 9장 23절의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는 말에 홀연히 확신을 얻고, 신유(神癒)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힘써 기도하다 마침내 신유의 기적을 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는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보혈에 의한 속죄, 회개에 따른 중생(重生) 체험, 부활과 천국의 영생복락 등이 중심이었는데, 설교에 나타나는 신비스런 능력과 매력에 청중들이 도취되었다.

1919년 가을부터 김익두는 서울의 남문밖교회에서 이재형과 함께 시무하였다. 이곳에서 김익두의 겸손한 태도와 기도생활, 능력있는 설교, 성경사랑과 해박한 지식 등이 믿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그는 여러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1919년 10월 강동(江東) 염파교회의 사경회에서 본격적인 신유의 능력을 갖춘 그는 그뒤 많은 난치병을 고쳤다. 기록상에 나타난 최초의 이적은 1919년 12월 경북 달성군 현풍교회 사경회 때 턱이 떨어진 박수진(朴守眞)이라는 걸인을 낫게 한 일이다. 이후 1920년 4월 영남지방 집회 때에는 많은 병자들이 치유받는 집단적 기적현상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그는 '권능(權能)의 사자(使者)'로서 전국에서 부흥회를 열면서, 도처에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을 일으켰다.

 

1920년 6월 31일 평양의 연합부흥회에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6,000여명이나 몰려 들었다. 이후 그가 제 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된 후 그 해 10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2주일간 열린 연합부흥회에는 연인원 1만여명이 참석하여 철야기도를 올리며 통회자복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김익두는 '신유와 기적을 수반한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걷고, 17년 된 혈류증 환자가 쾌유되며, 소경이 눈을 뜨는' 이적을 일으킨 인물로 소문났다.

한편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수족이요 자본주의의 주구로서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반기독교운동을 벌이던 사회주의자들은 김익두 등의 부흥사들을 '고등무당'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922년 5월 9일자 동아일보는 김익두의 부흥회가 십자가의 정신을 체현하는 것보다 미설(迷說) 기적을 추구한다고 비판하는 사설을 썼다. 한편 황해노회에서는 1919년부터 임택권(林澤權) 목사가 중심이 되어 '김익두 목사 이적증명회'를 구성하고 3년동안 그를 통해 치유받은 자들의 신상과 기록을 사진과 함께 정리하여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1921.7)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를 근거로 황해노회는 1923년 총회에서 "금일에는 이적(異蹟)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라고 규정된 장로교 헌법 3장1조를 수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 건의는 1924년 총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이 총회를 계기로 김익두의 부흥회는 고비를 맞았다. 총회의 '이적 불인정'은 그가 여는 부흥회의 의미를 감소시켰고 당시 교회내 지식계층이나 일반 사회주의계층의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하는 반기독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김익두의 부흥운동은 급격히 냉각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사태를 주시한 그는 이후로는 병을 고치는 이적을 삼갔다.

 

1940년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김익두는 일본경찰에 강제로 연행되어 교인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를 기독교인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선전자료로 삼았다. 그러나 1942년에는 신사참배에 적극 반대하다 종로경찰서에서 15일간 극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일제는 함구령을 내려 그를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직전리에 있는 과수원에 가두고 목사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했다.

광복후 북한에서는 1946년 11월에 어용기구로 기독교도연맹이 만들어졌다. 당시 김익두는 이 단체에 강제로 가입되었고 1949년에는 그를 기독교도연맹 총회장에 임명하였다. 이는 그의 제자이자 김일성의 이종사촌인 전 목사 강양욱(康良煜)의 강권과 감언이설에 의한 것이었다.

 

1950년 10월14일 새벽 김익두가 신천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 후퇴하던 인민군이 난입하였다. 인민군들은 쫓기는 화풀이로 그를 총살시켰으며, 이 때 이를 말리던 신도 5명도 함께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교회정원에 가매장되었다가, 그해 11월 29일 신천군 제직회 주최로 신천지역 50여개 교회가 모여 서부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무려 50여년 동안 김익두는 국내,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총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150여 곳에 새로 교회당을 세웠다. 또한 2만 8000여회의 감동적인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을 뿐만아니라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아울러 그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에 이르렀다.

그가 남긴 저작으로는 부흥회 설교 13편을 모은 '부흥회설교집'(1940년)이 있다. 김익두는 초월적 신비주의 운동가로서 한국교회의 부흥회를 대표하는 '이적의 부흥사'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3·1운동 뒤 민족적 좌절을 겪고 사회변화와 각종 이데올로기의 대두로 인해 의기소침해 있던 폐허의 한국교회에 영적인 재각성을 도모하여 위로와 희망을 주었으며, 신유의 신앙운동으로 재기의 에너지와 열기를 주었던 목사였다.

아울러 그는 19세기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Moody, D.L.)에 비견하여 '한국의 무디'로 평가되었다. 또 안수기도로 병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여 '과학을 초월한 불가사의를 행한 자' '신비의 잠을 깨운 자' 등으로 불리며 이후 한국교회의 독특한 부흥회의 전범을 마련한 영적 능력을 지닌 목사로 기억되고 있다.


/ 김 탁 <철학박사>

<자료: 청소년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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