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풍악발연수(關東楓岳鉢淵藪-금강산 발연寺) 石記
진표율사는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출가할 뜻을 가지니 아버지는 이를 허락했다. 율사는 금산수 순제법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순제는 사미계법을 전해 주고 공양차제비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2권을 주며 말했다.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 지장 두 聖前에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하여 친히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펴도록 하라."
가르침을 받은 율사는 작별하고 물러나와 명산을 두루 다녔는데 나이 이미 27세가 되었다. 상원 원년 경자(760)에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고 보안현에 가서 변산에 있는 불사의방(不思議房-절이름)으로 들어갔다. 쌀 다섯 홉으로 하루의 양식을 삼고 그 중 한 홉은 덜어서 쥐를 길렀다. 율사는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다. 그러나 3년이 되어도 授記(장래에 부처가 될 것을 알리는 일)를 얻지 못했다. 이에 발분하여 바위아래 몸을 던지니 문득 청의동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로 올려 놓았다. 율사는 다시 분발하여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하고 돌로 몸을 두 드리면서 참회했더니 3일만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7일이 되는 날 밤에 지장보살이 손에 金杖을 흔들면서 나타나 그를 도와주니 손과 팔뚝이 다시 전과 같이 되었다. 그에게 보살이 마침내 가사와 바리때를 주니 율사는 그 영응에 감동하여 더욱 더 정진했다. 21일이 다 되니 곧 天眼을 얻고 도솔천중(도率天衆)들이 오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이 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앞에 나타나더니 율사의 이마를 만지며 말했다.
"착하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기를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간절히 참회하는구나."
지장은 戒本을 주고, 미륵이 또 목간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다른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쓰여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했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니 곧 始와 本의 두 覺을 이르는 것이다. 또 아홉 번째 간자는 법이고, 여덟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鍾子)이다. 이것으로써 마땅히 果報(인과응보)를 알기가 어렵다고 할 것이니라. 너는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궁왕의 몸을 받아 뒤에 도솔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치자 두 보살은 곧 사라졌다. 때는 임인년 4월 27일이었다.
율사가 교법을 받은후에 금산사를 세우고자 하여 산에서 내려왔다. 도중에 대연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용왕이 나오더니 옥가사를 바치고 8만 眷屬(8만은 아주 많은 수를 말하고, 권속은 처자등을 말함)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해서 금산수로 가니 사람들 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며칠 내로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보살이 감동하여 도솔천으로 구름을 타고 내려오더니 율사에게 계법을 주었다. 이에 율사는 시주를 권하여 미륵장육상을 만들고 또한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는 모습을 금당 남쪽 벽에 그렸다. 像은 갑진(764) 6월 9일에 완성하여 병오 (766) 5월 1일에 금당에 모셔졌으니 이해가 대력 원년이다.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으로 향해 가다가 도중에서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그 소들이 율사의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수레에 탔던 사람이 내려와 물었다.
"무슨 이유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분입니까?"
"나는 금산수의 중 진표요, 나는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에 들어가서 미륵, 지장 보살 앞에서 계법진생(戒法眞생-증과 간자)을 받았으므로 절을 지어 오랫동안 불법을 지키고 길이 수도할 곳을 찾으려고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이 겉은 어리석은 듯하나 속은 현명하여 내가 계법받음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 듣고 난 그 사람이 말했다.
"짐승도 이러한 信心이 있는데 저는 사람으로서 어찌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즉시 손으로 낫을 쥐고 스스로 자기 머리칼을 잘라 버렸다. 율사는 자비한 마음으로 그의 머리를 다시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이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가 있는 곳을 보고 표를 해두었다. 그들이 명주 해변을 돌아 천천히 가는데, 물고기며 자라 등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의 앞으로 오더니 몸을 맞대어 육지처럼 만드니, 율사는 그들을 밟고 바다에 들어가서 계법을 염송하고 되돌아왔다. 고성군에 이르러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발연수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그 곳에 거주한지 7년만에 이 곳 명주지방에는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렸다. 율사는 이들을 위해서 계법을 설하니 사람들이 받들어 지켜 3보에 공경을 다했다.
이때 갑자기 고성 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죽어서 밀려왔다. 이것을 팔아다 사람 들은 먹을 것을 마련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율사는 발연수에서 나와 다시 불사의 방에 도착했다. 그 뒤에는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도 찾아뵙고 혹은 진문대덕의 방에 가서 살기도 했다. 이때 속리산의 대덕 영심 대덕 융종, 불타등이 율사를 찾아와 청했다.
"우리들은 불원천리 하고 와서 계법을 구하오니 법문을 주시기 원합니다." 율사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잠자코 있는지라, 세 사람은 복숭아 나무에 올라가 땅에 거꾸로 떨어지며 용맹스럽게 참회했다. 그러자 율사가 敎를 전하여 관정(灌頂)하고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와 공양차제비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2권과 간자 189개를 주었다. 다시 미륵진생 아홉째 간자와 여덟째 간자를 주면서 경계하기를, "아홉번째 간자는 법이요, 여덟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인데 내 이미 너희에게 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 길상초가 난 곳에 정사를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해서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들을 건지고, 후세에 널리 펴도록 하라."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속리산으로 돌아가 곧바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길상사라고 했다. 영심은 이 곳에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율사는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사에 이르러 도업을 닦으며 끝까지 효도했다. 율사는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입적했다.
제자들이 시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져 떨어지니 비로소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 이내 그 무덤에 푸른 소나무가 났는데 세울이 오래 지나자 말라 죽었다. 다시 한 그루 났는데 뿌리는 하나지만 지금은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대개 그를 공경하는 자가 있어 소나무 밑에서 뼈를 찾는데 혹은 얻는 자도 있으나 얻지 못한 자도 있었다. 이에 나는 율사의 뼈가 아예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정사(1197) 9월에 특별히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주워 통 속에 담았는데 세 홉 가량 되었다.
이에 큰 바위 위에 있는 두 그루 소나무 밑에 뼈를 모시고 돌을 세웠다고 했다.
이 기록에 실린 진표의 사적은 발연석기(鉢淵石記)와는 같지 않다. 때문에 영잠의 기록만 추려서 싣는다. 후세의 어진 이들은 마땅히 상고할 것이다.
무극이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