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李蘭影, 1916 ~ 1965)
전라남도 목포 출생이다. 본명은 이옥례(李玉禮)이나 호적에는 이옥순(李玉順)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3년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을 하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자랐다. 15세 시절인 1930년에 여배우를 지망하여 태양극단에 입단했고, 이때 박승희가 그에게 이난영이란 예명을 붙여 주었으나 무대에 주연으로 서지는 못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에서 사는 중에 막간 가수로 활동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1932년 16세가 되던 해 삼천리 가극 단장의 권유로 특별 단원으로 채용되었고 우연히 레코드 사장의 눈에 띄고 작곡가 손목인과 인연이 닿아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되었고, 그녀는 ‘노래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얻을 수 있었다.
1936년에는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음반을 발표하였고, 1937년에 첫사랑 남인수를 곁에 두고 가수 겸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였다. 이난영은 천재적 음악인이었던 김해송과의 결혼 이후 남편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도 김해송의 지도를 받아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에는 무대 활동에 주력하면서 김해송이 이끄는 KPK악극단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실종되어 혼자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1958년 동료 가수 남인수가 이혼한 뒤로는 사실혼 관계로 지내다가 1962년 남인수가 사망하여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63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딸들이 결성한 그룹 김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하였고, 1965년 삼일절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심장마비로 인하여 사망했다.
사망하기 1년 전인 1964년에 이난영의 일생을 극화한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아》가 제작되었다. 목포를 상징하는 가수로서 목포에서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이난영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있기도 하다.
일제 치하 아래 활동을 했던 많은 가수들처럼, 이난영 또한 친일 여부에 대한 논란이 펼쳐지고 있다. 이난영은 <신춘 엽서>, <이천오백만 감격>과 같은 친일 가요를 두세 곡 정도 불렀으며, 특히 <이천오백만 감격>을 같이 부른 남인수와 김해송은 전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것에 반해, 이난영은 이름조차 올라가 있지 않다. 이유인 즉,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기준인 지속성, 반복성, 적극성이 없었기 때문. 확실히, 지속적으로 수많은 친일 가요에 참여한 남인수와는 달리, 이난영의 친일 가요는 그 숫자도 눈에 띄게 적고, 친일 가요에 참여한 적극성을 증명할 증거도 딱히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이난영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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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그는 식민지 시대 최초이자 최고의 가왕(가왕)이었다. 1935년 오케레코드사의 음반 <목포의 눈물>이 히트하면서 그는 가왕이 되었다. 남자가수로 1938년 ‘애수의 소야곡’을 부른 남인수가 또 다른 가왕으로 나타나기 전까지, 이난영은 유일한 가왕이었다.
세 가지 트로트 창법의 첫주인
식민지 시대의 대중가요를 대표하는 양식인 트로트는 당시 유행가, 유행 소곡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엥카(演歌) 양식의 노래였다. 일본 엥카의 번역곡만 존재하던 1920년대를 지나 조선인의 손에 의해 작곡된 트로트가 등장한 것은 1928년경이었고 1935년의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에서 2박자 단조 5 음계 트로트의 완성된 형태를 보인다.
바로 이 노래의 주인공이 이난영이었다. 목포 출신의 가수가 부른 ‘목포의 눈물’은 단숨에 히트하여 그 이전까지 왕수복이나 이애리수가 최고로 꼽혔던 가수 인기 판도를 단숨에 뒤엎었고, 이로써 손목인 작곡의 ‘짝사랑’ 등으로 이어지는 2박자 트로트의 시대가 열렸다.
이난영은 트로트의 여가수의 창법을 완성시킨 가수였다. 그는, 그 이전의 여가수들이 지니고 있던 진성(眞聲, 생소리) 중심의 소박한 창법을 크게 벗어나 중음의 진성과 고음의 가성을 무리 없이 오르내리면서 꾸밈 음이나 꺾은 목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트로트의 가창 관행을 완성했다. 특히 그는 고음에서 코 위로 소리를 띄워 올려 매혹적인 질감을 만들어내었다. ‘울어라 문풍지’의 후반부는 이난영의 가늘고 화려한 고음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가 이 트로트 창법을 완성함으로써, 이후 등장한 장세정 등의 여가수들은 모두 이난영 창법으로 노래를 불렀고 제2의 이난영을 꿈꾸었다. 이난영의 이러한 창법은 (약간의 변형을 거치기는 했지만) 1950년대의 백설희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는데, 1960년대 이미자가 보여준 꺾음 목, 꾸밈 음을 모두 제거한 담백한 트로트 창법이 정립되기 전까지 트로트 여가수의 창법은 오로지 이난영의 그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로트 창법은 1980년대에, 기교적인 꺾음 목에 쿨하고 경쾌한 질감을 특징으로 하는 주현미의 창법으로 새로운 유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난영은 이렇게 변모하는 한국 대중가요사의 세 가지 트로트 창법의 첫 주인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그가 트로트에만 능했던 것은 아니다. ‘오대강 타령’ 등 신민요를 가성을 중심으로 한 이난영식 창법으로 소화하였고 특히 ‘다방의 푸른 꿈’ 같은 식민지시대에 가장 블루지한 작품을 부를 때에는, 블루스 분위기를 내는 중저음으로 바운스 있는 3 분박의 리듬을 구사하며 화려한 ‘모던 경성’의 커피 향 넘치는 카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난영 최고의 대중음악 가족의 중심
이난영은 이 시대 최고의 대중음악 가족의 중심이었다. 남편 김해송(김송규)은, 이난영의 ‘울어라 문풍지’, 이화자의 ‘낙화유수’는 물론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나 이난영의 ‘다방의 푸른 꿈’ 등 트로트로부터 재즈와 블루스에 이르는 음악을 구사하는 놀라운 작곡가이자 고가 마사오의 ‘도쿄 랩소디’의 번안인 ‘꽃 서울’과 자작곡인 재즈 송 ‘나무아미타불’, ‘청춘 삘딩’ 등을 부른 뛰어난 가수이기도 했다. 오빠 이봉룡은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를 지은 작곡가였고, 해방 후 남편이 KPK 악극단에서 <카르멘> 등 몇 편의 야심 찬 음악극을 시도하다 전쟁 중 실종된 이후, 어린 자녀들을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로 키워 미국으로 보냈고 김시스터즈는 한국인 최초로 빌보드 차트에 오르내리며 인기 TV 쇼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에 종종 출연하는 가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남편과 자녀가 모두 곁을 떠난 이후 그는 매우 외로웠고, 말년에 동거하던 남인수마저 1962년 타계한 이후 힘들게 외로운 몇 년을 버티다 1965년에 세상을 떴다.
이영미|음악평론가
첫댓글 특히
세 가지 트로트 창법의 첫 주인이란 대목에 주목했답니다.
이난영여사님에 대해 잘 축약한 글이라 하겠어요.
여자 중에 제일가수라 믿어요!
정영주 님!
옥고(玉稿) 댓글에 공감(共感)하옵는 바가
크디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