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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SFRY)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 정부를 지지한 크로아티아인 세력과 세르비아인 다수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및 1992년 JNA의 철수 이후 이어진 세르비아계 세력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이다. 크로아티아 내에서는 보통 조국전쟁(크로아티아어: Domovinski rat) 또는 대세르비아 침공(크로아티아어: Velikosrpska agresija)이라 부른다.[25][26] 세르비아에선 크로아티아 전쟁(세르비아어: Рат у Хрватској / Rat u Hrvatskoj) 또는 크라이나 전쟁(세르비아어: Рат у Крајини / Rat u Krajini)이라고 부른다.[27]
크로아티아의 대다수는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해 주권국이 되기를 원했으나,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은[28][29]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은 유고슬라비아 탈퇴에 반대해 세르비아가 주장한 영토가 세르비아와 같은 통일된 국가에 있기를 원했다. 대부분의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하거나 제1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는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를 포함한 지역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 신세르비아국을 건국하길 원했으며[30][31] 가능한 한 크로아티아 전역을 점령하려 했다.[32][33][34]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는 독립을 선포했으나 브리유니 협정에 따라 보류되었고 1991년 10월 8일 유고슬라비아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크로아티아 전역을 장악하여 크로아티아를 유고슬라비아 내에 남아있게 하도록 시도했다.[35][36] 이 시도가 실패하자 세르비아군은 크로아티아 영토 내에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의 독립을 선포했다. 1992년 1월 휴전 협정으로 크로아티아 공화국이 주권국으로 국제사회에 인정받으면서[37][38] 전선이 확고하게 자리잡았고 유엔 보호군(UNPROFOR)이 배치되었으며[39] 이후 3년간 전투가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 크라이나 공화국은 크로아티아 영토의 1/4에 해당하는 13,913km2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40] 1995년, 크로아티아는 플래시 작전과 폭풍 작전이라는 2번의 대공세를 통해[7][41] 전쟁을 끝낼 쐐기를 박았다. 남은 영토는 유엔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및 서시르미움 잠정통치기구(UNTAES)로 1998년까지 유엔 과도정부로 남아 있다가 크로아티아로 평화롭게 넘어갔다.[8][9]
전쟁이 시작될 때 크로아티아가 선언한 독립, 국경 보존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며 독립전쟁은 크로아티아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7][8] 크로아티아 경제의 21-25% 가량이 증발하였으며 인프라 파괴, 생산량 감소, 난민 관련 비용 등으로 경제적 비용이 370억 달러 이상 들었다.[42] 전쟁으로 양측 모두 합쳐 총 2만 명이 사망하거나[43] 집을 잃어 난민이 되었다. 세르비아 정부와 크로아티아 정부는 점진적으로 서로 협력하기 시작했지만 ICTY의 재판이나 양국이 제기한 국제형사재판소 재판 등의 평결 문제로 여전히 긴장 관계가 남아 있다.[44][45]
2007년,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지도자인 밀란 마르티치에 대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등 다른 사람들과 "통일된 세르비아 국가"를 만들기 위해 공모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46] 2008년에서 2012년 사이엔 폭풍 작전 기간 일어난 전쟁 범죄에 가담한 혐의로 크로아티아 장군인 안테 고토비나, 믈라덴 마르카치, 이반 체르마크를 기소했다. 체르마크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고토비나와 마르카치는 ICTY 항소심에서 뒤집혔다.[47][48] 2015년엔 국제사법재판소가 세르비아 및 크로아티아가 서로 대량학살을 했다는 것에 대한 상호청구심을 기각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양국에서 민간인에 대한 전쟁범죄가 일어난 것은 맞으나, 이는 특정 집단을 학살할 의도가 보인다고 하기엔 어렵다고 판결했다.[49]
배경[편집]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및 크로아티아의 독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적 변화[편집]
1970년대 이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정권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게 더 많은 자치권을 주는 지방분권화된 연방을 지지하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자유주의 민주정 민족주의자 세력과, 유고 내에서 가장 큰 민족세력인 세르비아인에게 유고슬라비아 전역의 세르비아 이권을 보장하는 중앙집중형 연방을 지지하는 세르비아의 보수주의적 중앙집중제 민족주의자 세력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50] 1967년부터 1972년까지 크로아티아에서, 1968년과 1981년 코소보에서 일어난 일련의 시위 등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내에 부는 민족주의 사상과 행동이 유고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민족 갈등을 야기했다.[51] 국가 내 민족주의자에 대한 강력한 억압은 민족주의를 공산주의의 가장 강력한 대안이라 인식하게 만들었으며 지하 운동이 강해졌다.[52]
유고슬라비아 내 위기는 1989년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냉전이 끝나가며 점차 무너지고 그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악화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라고 부르는 전국가적 공산당은 이데올로기적 힘을 잃었다.[53][54]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중앙집중화가 해체되는 방향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었다.[55] 반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는 중앙집중화와 1당 통치 체제에 순응하여 1989년 3월 코소보 및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직에 투표할 수 있는 자치권을 없애버렸다.[29][54][56][57] 민족주의 사상은 밀로셰비치가 1989년 "일련의 언쟁들"로, 모든 권력이 베오그라드로 중앙집중되어 통일된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지속해 나가도록 지지할 것이라는 가지메스탄 연설을 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지배당인 공산주의 연맹 내에서도 퍼져나가기 시작했다.[29][58][59]
1989년 가을이 되면 세르비아 정부는 크로아티아 정부에게 세르비아 민족주의 시위를 허용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세르비아 내 언론과 여러 지식인들은 크로아티아 지도층을 우스타샤라 언급하기 시작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우스타샤에 대한 범죄를 집중적으로 파해치기 시작했다. 이 수사법은 세르비아 정치 지도층이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크로아티아 지도부의 반발은 "맹목적인 민족주의의 발로"라고 비난했다.[60]
1991년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이도디나, 코소보에서 일련의 반관료제적 혁명을 일으켜 대통령직 투표권 8장 중 4장을 얻어내며[58] 기타 공화국의 반대 운동과 연방 개혁의 촉구를 막으며 세르비아의 의도대로만 연방 정부를 뒤흔들어 연방 정부 기관을 비효율적으로 만들었다.[61] 1989년엔 여러 정당을 설립할 수 있는 다당제를 허용하면서 이후 크로아티아의 초대 대통령이 될 프라뇨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을 포함한 여러 정당이 창당된다.[62]
1990년 1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동맹은 슬로베니아 및 크로아티아 파벌이 제14회 임시 총회에서 연방을 더 지방분권적으로 만들 것을 요구하며 민족 단위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 총회에선 세르비아 대표단이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대표단에게 "코소보에서 분리주의를 조장하고 테러와 학살을 하러 한다"고 비난했다.[63]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대표단은 세르비아인을 포함한 세르비아 대표단이 제안한 모든 수정안을 거부한 데 이어 결국에는 항의의 성격으로 대표단이 퇴장하였다.[58][64]
또한 1990년 1월에는 유고슬라비아 헌법재판소에서 연방 탈퇴 문제에 관한 여러 법률심판 소송이 시작되었다.[65] 첫 소송은 슬로베니아가 주권에 따라 일방적인 연방 탈퇴를 주장하자 일어난 슬로베니아 수정헌법안 사건이었다.[65] 헌법재판소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 모든 공화국 및 자치주 사이 만장일치 합의가 있을 때에만 연방 탈퇴가 허용된다는 결론을 내렸다.[65] 헌법재판소는 1974년 연방헌법의 헌법기본법 제1절에서 탈퇴를 포함한 모든 자결권은 "유고슬라비아 인민 및 모든 사회주의 공화국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65] 1991년 5월 일어난 코소보 분리독립 문제에서는 "유고슬라비아인만이 탈퇴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알바니아인은 유고슬라비아인이라 할 수 없으며 유고슬라비아 내의 소수민족 중 하나라고 판결했다.[65]
1990년 2월, 요반 라시코비치는 크닌에서 크로아티아 지역분단 문제에서 세르비아계 민족의 입장을 지지하며 세르비아 민주당(SDS)을 창설했는데,[66] 밀란 바비치나 밀란 마르티치와 같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정부 인물을 포함한 당 수립인원은 나중에 베오그라드에서 지시한 "크로아티아 다수민족이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을 위협하고 집단살해를 하러 한다"는 선전활동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했다.[67] 1990년 3월 4일, 페트로바고라에서 세르비아인 5만명이 모여 시위를 열어 투지만 대통령을 비난하고[66] "이것이 세르비아다"라고 소리치며,[66] 밀로셰비치를 지지하였다.[68][69]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 열릴 첫 자유 선거는 당시 수 개월 후로 예정되어 있었다.[70] 크로아티아의 첫 총선거는 4월 22일, 2차 선거는 5월 6일로 예정되었다.[71]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은 크로아티아에 더 큰 주권(최종적으로는 독립)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오직 민주연합만 대세르비아로 향하는 밀로셰비치의 야옥을 막을 수 있다"고 선전하여 크로아티아인의 정서를 자극했다. 선거 결과 1위가 크로아티아 민주연합, 2위가 개혁 공산주의자인 이비차 라찬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이 되면서 새 크로아티아 정부에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되었다.[71]
긴장된 분위기 속 1990년 5월 13일 자그레브의 스타디온 막시미르에서 디나모 자그레브와 츠르베나 즈베즈다와의 경기 중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하면서 양 민족 간 긴장이 폭력사태로 폭발하였다. 경기는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경찰들과의 몸싸움으로 엉망이 되었다.[72]
1990년 5월 30일 새로 수립된 크로아티아 의회 첫 회기가 열렸다. 투지만 대통령은 (연말에 비준될) 신헌법 및 소수인권(주로 세르비아계)를 어느 정도 보장하는 수많은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에 관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세르비아계 정치인들은 신헌법에 대해 반대하였다. 1991년 크로아티아 내에서는 크로아티아인이 78.1%, 세르비아인이 12.2%를 차지했으나[73] 세르비아인 같은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이 공무원이었다. 경찰을 포함한 크로아티아 내 공무원 중 세르비아인은 17.7%를 차지했다. 이보다 훨씬 많은 세르비아인 사람들이 이전부터 크로아티아 내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이는 세르비아가 공산정권의 수호인이라는 인식을 심어버렸다.[74] 이는 실제 SR 크로아티아가 크로아티아인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 지배력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과는 다르게 크로아티아인 사이에 자신이 피지배 민족인 것으로 느껴지게 되는 역할을 하였다.[53] 민주연합이 정권을 장악한 후 공무원으로 채용된 많은 세르비아인, 특히 경찰은 대량으로 해고되고 이 자리를 거의 대부분 크로아티아인이 대체하였다.[75] 투지만 대통령의 "그들은 내 아내(대통령 아내인 안키차 투지만)이 세르비아인이거나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아내는 둘 어떤 것도 아니다"[76]이라는 발언을 왜곡하여 밀로셰비치가 장악한 언론은 어떠한 형태의 독립된 크로아티아든 이것이 우스타샤 국가가 될 것이라는 공포를 조장하였다. 일례로 TV 베오그라드는 투지만 대통령이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세계 최초로 인정한 국가원수)와 악수하고 있는 사진에 대해서 둘이 "제4제국"을 계획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77][78]
시민 소요 및 자치 요구[편집]
로그 혁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90년 4월과 5월 각각 슬로베니아 총선 및 크로아티아 총선이 끝난 직후, 유고 인민군은 티토 시기 수립되었던 "인민방위군"과 같은 각 공화국의 영토방위군(Teritorijalna obrana, TO)을 해체한 후 연방 중앙 방위 체계로 바꿀 것이라고 발표했다. 국방 문제에서 각 공화국의 자주권은 사라지고 각 영토방위군은 해체된 후 베오그라드의 유고 인민군 본부 산하로 다시 재편성할 예정이었으나, 새로 수립된 슬로베니아 정부는 다시 국방 자주권을 되찾고자 했다.[79] 1990년 5월 14일, 크로아티아가 슬로베니아와 마찬가지로 자체 무장을 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80][81]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대다수 지역의 영토방위군 무기를 압수했다.[82] 연방 대통령직 세르비아 대표단이자 밀로셰비치 파였던 보리사프 요비치는 세르비아의 뒷배로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83]
요비치는 1990년 6월 27일 유고슬라비아의 국방부 장관인 벨코 카디예비치와 만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와 관련하여 "국경을 그린 후 그들 스스로 자기의 결정을 통해 선언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에서 강제로 쫓아내자고 제안하는 데 동의하였다고 밝혔다. 다음날 요비치는 밀로셰비치한테도 이에 대해 허가를 받았다고 말했다.[84] 하지만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혼혈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었던 카디예비치는 유고슬라비아에 충성했지 대세르비아에 찬동하진 않았다. 카디예비치는 만약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나간다면 유고슬라비아는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요비치와는 혹시 모를 국가 붕괴를 막기 위해 슬로베니아에 계엄령을 내리고 유고 인민군을 동원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한 것이며 탈퇴를 막기 위해선 탈퇴한 공화국과 기꺼이 전쟁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85] 카디예비치는 유고슬라비아 내에 일어난 정치위기와 민족갈등은 해외 정부가 조장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특히 독일이 발칸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일부로 유고슬라비아를 붕괴시키러 한다고 생각했다.[86] 카디예비치는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정부가 파시스트적이라고 주장했으며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의 "무장세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86]
투지만의 HDZ가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 1990년 7월 25일 크닌 북쪽의 스르브에서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의 정치적 주장을 대표하는 '세르비아계 의회'를 수립하였다. 세르비아계 의회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의 주권과 자치권을 선언하였다.[87]
1990년 8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서부 국경에 접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등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에서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주권 및 자치" 문제에 대한 독단적인 단일민족 주민투표가 열렸다.[88] 이는 개헌 시도에 대한 전면적인 대항 시도였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의 무기를 빼내기 위해 각 경찰서에 경찰관들을 파견했다. 이 과정에서 크닌을 중심으로 하는 크로아티아 남부 배후지방의 세르비아계 다수지역이 달타미아 관광지로 가는 주요 도로를 봉쇄하였다. 이 봉쇄 사건들을 로그 혁명이라고 한다.[89][90] 수 년 후 열린 마르티치 재판에서 바비치는 마르티치가 로그 혁명을 일으키도록 꼬셔서 속였으며, 크로아티아 내의 전체적인 전쟁의 책임은 마르티치에게 있으며 이 모든 과정은 베오그라드가 주도했다고 주장했다.[91] 이 주장은 1991년 마르티치가 한 인터뷰를 통해 입증되었다.[92] 바비치는 1991년 7월이 되면 마르티치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을 알았다.[93] 크로아티아 정부는 도로 봉쇄에 헬리콥터가 딸린 특수경찰부대를 보내 대응했으나 유고슬라비아 공군 전투기의 개입으로 이들은 자그레브로 되돌아갔다. 세르비아계는 소나무를 쓰러뜨리거나 불도저를 동원해 아드리아해 연안의 크닌이나 벤코바츠 같은 도시로 향하는 도로를 봉쇄했다. 1990년 8월 18일, 세르비아 신문 베체르녜 노보스티는 "2백만의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로 가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헤드라인을 싣었다.[89]
1990년 12월 21일, 크로아티아 서남부의 달마티아 및 리카 주를 중심으로 하는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이 SAO 크라이나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SAO 크라이나 법령 제1조는 SAO 크라이나 스스로를 크로아티아 공화국 헌법, 법령, SAO 크라이나 법령이 적용되는 "크로아티아 공화국 내 자치령"으로 선포하였다.[87][94]
1990년 12월 22일, 크로아티아 의회에 새 헌법이 비준되었다.[95] 세르비아계는 이 개정된 헌법을 사회주의 헌법에서 부여되었던 권리를 빼앗은 것이라고 주장했다.[96] 신 헌법에서는 크로아티아를 "크로아티아 국민과, 다른 국가의 국민과, 크로아티아 국민과 사회적 평등이 보장된 세르비아계 같은 소수민족이 이루는 크로아티아 국민국가"라고 정의했다.[87]
투지만 대통령의 선거 승리와 신헌법 수립으로[95] 위협을 받은 크닌스카 크라이나 지역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크로아티아 정부에 대해 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세르비아계 지역에 있던 크로아티아 정부 재산은 지역 내 세르비아 자치세력이나 새로 수립된 "세르비아 국가의회"가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세를 불린 세르비아계 자치세력은 후에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가 되었다.[87]
크로아티아의 국방부 장관인 마르틴 슈페겔이 1991년 1월 암시장을 통해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불법으로 무장한 크로아티아군 무장 해제 및 해체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97][98] 크로아티아는 이 최후통첩을 거부했으며, 유고슬라비아군은 6개월 후 최후통첩을 철회했다.[99][100]
1991년 3월 12일, 육군 수뇌부는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을 만나 군부가 국가를 장악할 수 있도록 하는 비상사태를 선포해 달라고 설득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육군 사령관인 벨코 카디예비치는 아래와 같이 말하면서 국가를 파괴하려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말했다.
1991년 3월 요비치는 카디예비치와 육군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을 모색했다가 4일 만에 마음을 바꿨다고 말했다.[102] 카디예비치는 이에 대해 "요비치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답했다.[102] 카디예비치는 1991년 3월 만남은 부크 드라슈코비치가 일으킨 베오그라드의 거대 시위가 일어난 지 이틀 후에 요비치 집무실에 만난 것이며 밀로셰비치가 카디예비치를 초청하여 온 것인데, 그 자리에서 밀로셰비치가 카디예비치한테 군사 쿠데타를 통해 군대가 나라 전역을 장악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102] 카디예비치는 밀로셰비치에게 단호하게 자기 혼자서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없으며, 군 수뇌부와 이 요청을 논의한 후 나중에 요비치 집무실에 최종 결정을 알리겠다고 답했다고 말했다.[102] 이후 카디예비치는 논의 끝에 정부를 전복하겠다는 시도는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으며 이 결정을 서면으로 요비치 집무실에 통보했다고 하였다.[102] 여기에 대하여 요비치는 그러한 서면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02]
안테 마르코비치는 대통령직 회의가 원하는데로 이우러지지 못하자 카디예비치의 육군은 마르코비치를 만나 분리주의를 행하는 공화국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제안했다고 말했다.[103] 마르코비치는 회의 도중 카디예비치에게 "밀로셰비치를 체포하는데 실패"하였다고 말했다.[103] 카디예비치는 "유고슬라비아를 위해 싸우는 사람은 그(밀로셰비치) 혼자이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런 제안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르코비치는 군사 동원 계획을 거부하면서 이후 카디예비치와 마르코비치가 결렬하게 되었다.[103]
양국의 군사[편집]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작성한 1991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의 전략공세작전 지도.
세르비아계 및 유고슬라비아 인민군[편집]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및 크라이나 세르비아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추축국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하기 위해 처음으로 결성된 군사 집단이었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성공을 바탕으로 유고 인민군은 작전 전략의 기반을 게릴라전으로 잡았는데, 통상적인 전략으로는 NATO나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의 전쟁을 할 경우 유고슬라비아가 꽤나 밀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고슬라비아 특유의 국토방위대 군사 교리가 자리잡혔다.[104]
서류상 유고 인민군은 전차 2,000여대와 제트기 300기(대부분은 소련이나 국내 생산기)를 보유하고 있는 등 강력한 군대로 보였다. 하지만 1991년 기준 유고 인민군이 가지고 있는 장비 대다수는 T-54/55 전차와 MiG-21 항공기 등 30년이 넘은 오래된 장비들이었다.[105] 그래도 유고 인민군은 M-84(소련의 T-72를 유고슬라비아에서 개량한 버전) 전차 300대와 AGM-65 메버릭 미사일로 무장한 소코 G-4 슈퍼 갤럽, 소코 J-22 오라오 등 다수의 공격기 비행대를 갖추고 있었다.[106] 반면 값싼 대전차 미사일(AT-5)나 대공미사일(SA-14)는 많은 수를 가지고 있었고 더 비싼 무기들을 공격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무기로 이용하였다. 전쟁 전 유고 인민군은 장교 7만명을 포함해 총 169,000명이 복무하고 있었다. 슬로베니아 전쟁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탈영하였고 이에 유고 인민군은 세르비아 예비군을 동원하여 부족한 병력을 메꿨다. 하지만 대략 10만 명되는 사람들이 징병을 회피하였고 신병들의 전투력은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결국 유고 인민군은 준군사 민병대 조직에 의존하였다.[107] 이러면서 세르비아군 및 유고 인민군은 흰 독수리, 세르비아 방위군, 두샨 실니, 세르비아 의용방위군과 같은 준군사 민병대를 점점 더 많이 이용했고 크로아티아 및 세르비아계가 아닌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108][109] 또한 러시아 쪽에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지원하는 해외 전투병도 많았다.[110] 1992년 유고 인민군의 퇴각과 함께 인민군 부대는 크라이나 세르비아군으로 재편성되었는데 유고 인민군을 사실상 직계로 이어받은 조직으로 바뀐 것 자체가 별로 없었다.[2][111]
1991년 기준 유고 인민군 장교단은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의 비율이 압도적이였으며 유고슬라비아 연방 기관, 특히 군부는 대부분 세르비아인이 사실상 장악하였다.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세르브인이 36.3%를 차지했으나 유고 인민준 장교 중 57.1%가 세르브인이었다.[74] 이와 비슷한 경향은 1981년 초부터 나오기 시작했다.[112] 세르브인(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을 합치면 유고슬라비아 전체 인구에서 38.8%를 차지했으나 유고 인민군 장교와 부사관 중 70%가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이 차지했다.[113] 이마저도 1991년, 유고 인민군은 "군 내에서 슬로베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를 완전히 제거해라"라는 명령을 받았다.[114]
크로아티아군[편집]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및 크로아티아의 군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크로아티아 군사는 막사 전투를 통해 유고 인민군의 병영을 점령하면서 장비 부족 문제를 완화하였다.
크로아티아군의 상태는 세르비아계보다 훨씬 심각했다. 전쟁 초기에는 군부대 부족으로 크로아티아 경찰이 전투에 대신 나가 싸워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991년 4월 11일 크로아티아의 신 군부 조직인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크로아티아어: Zbor narodne garde)이 수립되었으며 이 조직은 1993년까지 점차적으로 크로아티아 육군(크로아티아어: Hrvatska vojska)로 발전하였다. 무기는 보급이 부족했고, 많은 부대가 비무장 상태였거나 구식인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크로아티아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전차였던 T-34마저도 수 대만 보유하고 있었으며 공군의 상황은 매우 심각해 간이 폭탄을 투하할 수 있도록 개조된 안토노프 An-2 복엽기 농업용 비행기로 무장하였다.[115][116]
1991년 8월 기준 크로아티아군은 20개 여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0월 일반 동원령이 내려진 후 1991년 연말까지 60개 여단, 37개 독립대대 수준으로 규모가 커졌다.[117][118] 1991년에서 1992년 사이 크로아티아군은 영국인 139명, 프랑스인 69명, 독일인 55명 등 총 456명의 해외인 자원병을 받아들였다.[119] 또한 9월에서 12월 사이 있었던 유고 인민군 막사 점령으로 크로아티아군의 장비 부족 문제가 상당 부분 완화되었다.[120][121] 1995년에는 힘의 균형이 크게 바뀌었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군사는 대략 13만명이었는데, 크로아티아 육군 및 크로아티아 국방위원회(크로아티아어: Hrvatsko vijeće obrane),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을 전부 합치면 25만명이 넘었고 전차도 570대를 가지고 있었다.[122][123]
전쟁 경과[편집]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연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91년: 적대행위의 시작[편집]최초의 군사 충돌[편집]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첫 크로아티아측 사망자로 기록된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 당시 사망한 요시프 요비치 추모비.
양 측에서 선전 기술과 언론의 프로파간다가 각종 사건에 불을 붙이면서 유고슬라비아 내 민족 간 민족 혐오가 커져갔다. ICTY 이전 증언에서 크라이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인 밀란 마트리치는 세르비아측이 먼저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124]
세르비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서 분쟁이 무장 충돌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3월 초 세르비아계가 파크라츠에서 크로아티아 경찰을 공격하였으며,[5][125] 1991년 3월 말에는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으로 전쟁 기간 세르비아계에게 사살당한 최초의 경찰관인 요시프 요비치가 나오면서 유혈 충돌로 변했다.[6][126]
1991년 3월에서 4월에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영토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하러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움직임이 현지에서 어느 정도나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정부가 어느 정도로 깊게 관여하였는지는 논쟁이 되는 사항이다. 한편 이런 분리주의 움직임으로 크로아티아 내에서 세르비아계가 다수인 지역은 SAO 크라이나라는 국가를 선언하였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반란으로 규정하였다.[87][127][128]
로그 혁명 초기부터 1991년 4월 말까지 폭발물 관련 사건 200여건 이상 및 크로아티아 경찰에 대한 공격 89건 이상이 기록되었다.[29] 크로아티아 내무부는 특수경찰 부대의 수를 늘려 무장시키기 시작했고, 이 병력은 사실상 군부대로 활동하였다. 1991년 4월 9일 크로아티아의 대통령 투지만은 특수경찰부대를 "국가방위대(Zbor Narodne Garde)로 개칭할 것을 명령했고 이는 크로아티아가 독립적인 군사 병력을 가진다고 선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129]
이 시기부터 달마티아 내륙의 천여 명이 거주하는 마을인 키예보가 포위되는 키예보 포위전이나 슬라보니아 동부의 마을인 보로보에서 크로아티아 경찰과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교전하여 12명의 사상자를 낸 보로보셀로 충돌이 일어나는 등 충돌이 격화되었다.[130] 슬라보니아 동부에서는 폭력 행위가 빈발했는데 5월 2일 토바르니크에서는 세르비아계 반군의 공격으로 크로아티아 경찰관이 사망했으며, 5월 5일 소틴에서는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 사이 교전에 휘말린 세르비아계 시민 1명이 사망하였다.[130] 5월 6일에는 스플리트 해군 사령부의 키예보 포위작전을 반대하여 일어난 스플리트 시위에서 일어난 충돌로 유고 인민군 병사 1명이 사망하였다.
5월 15일에는 크로아티아인 스체판 메시치가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통령의 다음 순번으로 될 예정이었다. 코소보, 몬테네그로, 보이도디나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 임명 선거를 완전히 자기 통제 하로 만든 세르비아는 지금까지 관례로 여겨졌던 대통령직 자동 임명을 반대하였다. 이 작전으로 유고슬라비아는 국가원수와 총사령관이 부재한 상황이 되었다.[131][132] 이틀 뒤 다시 열린 문제의 투표에서도 임명에 실패하였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총리직에 있었던 안테 마르코비치는 대통령 권한을 행사할 위원회 위원을 임명하자고 제안하였다.[133] 하지만 이 위원회에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벨코 카디예비치를 제외하고 누가 위원이 될 것인지, 누가 유고 인민군의 총사령관직에 올라갈 지 확실한 것이 없었다. 위원회 방안은 크로아티아가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취소되었다.[134] 이 위기는 6주 간의 교착 상태 끝에 해결되어 메시치가 대통령직에 선출되었고 이는 수십 년 만에 유고슬라비아에서 최초로 국가원수에 비공산당원이 선출된 사례었다.[135]
이 기간 내내 연방군, 유고 인민군, 지방 영토방위군은 계속해서 밀로셰비치가 주도하는 연방 통제하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편 헬싱키 워치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가 크로아티아 관리들과 협력하고 숙소를 제공해주는 세르비아인들을 처형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29]
독립 선언[편집]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국민투표 및 10일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3.24% | 6.76% | |
찬성 | 반대 |
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 정부는 독립할 지,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더 느슨한 연합체로 잔류할 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136] 세르비아 지역 정부는 국민투표에 보이콧을 선언하였고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 다수가 이에 동참했다. 국민투표는 독립에 94% 가량 찬성하는 것으로 나왔다.[137]
새로 편성된 크로아티아 군대는 1991년 5월 28일 자그레브에 있는 스타디온 크란체비체바에서 열병식과 사열식을 가졌다.[138]
크로아티아 의회는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선언하고 유고슬라비아와의 연합을 해산하기로 결의하였다.[11][139] 크로아티아 의회 결의안은 의회 내 일부 좌파 의원이 거부하였다.[140] 이 결정에 대해 유럽 경제 공동체와 유럽안보협력회의는 크로아티아 정부에게 3개월 간 독립 결정을 일시적으로 효력을 정지시켜 달라고 요구하였다.[141]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독립 선언에 대해 격하게 반대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총리 안테 마르코비치는 독립 선언은 불법이며 유고슬라비아 헌법에 반하는 이적행위라고 선언, 유고 인민군에게 유고슬라비아의 일체 단결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하였다.[142]
1991년 6월에서 7월 사이 짧막하게 일어난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은 금방 막을 내렸는데, 그 중에는 슬로베니아에서 슬로베니아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족 동질성이라는 이유도 있었다.[139] 슬로베니아에 대한 군사 공격에 이은 계획적 철수도 후일에는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대통령직을 맡았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보리사브 요비치가 계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요비치는 이 정보가 담긴 자서전을 공개하였고 ICTY의 밀로셰비치 재판정에서도 같은 내용을 증언하였다.[114]
크로아티아 정부는 유고슬라비아와 3개월 간 독립 선언을 일시 동결한다는 내용의 브리유니 협정을 체결하면서 긴장 상황이 다소 완화되었다.[12]
유혈 분쟁으로의 심화[편집]
부코바르 전투, 두브로브니크 포위전, 오시예크 전투, 막사 전투, 고스피치 전투, 허리케인-91 작전 및 달마티아 해협 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동슬라보니아 지역 돌파 작전 지도.
전쟁 첫 시기,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도시에 대해서 광범위한 포격을 가했다. 두브로브니크의 포격 피해가 가장 심했다. 포격으로 불타오르는 스트라둔의 두브로브니크 성벽(왼쪽)과 포격 피해를 입은 성벽 내 구시가지 지점을 표시한 지도(오른쪽) 사진이 있다.
우리는 페트리냐, 카를로바츠, 자다르를 곧 장악할 것이다. 이런 큰 거점들은 우리의 이익이자 우리 군대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 밀란 마르티치, 1991년 8월 19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크로아티아로의 확장에 관하여[92]
7월에는 유고슬라비아에 공화국들을 잔존시키기 위해 유고 인민군이 크로아티아 지역에 집중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7월 세르비아 주도의 영토방위군은 달마티아 해안 지역으로 진격하는 코스트-91 작전을 시작했다.[143] 8월 초가 되면 바노비나 지역은 세르비아군이 압도하여 모조리 점령하는 상태에 있었다.[144]
크로아티아 내에서 군사 작전이 시작되면서 슬로베니아에서 있었던 일과 유사하게 유고 인민군 내 크로아티아인 및 다수의 세르비아인 징집병이 탈영하기 시작했다.[143][145] 알바니아인과 마케도니아인들도 합법적으로 유고 인민군에서 빠져나가거나 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복무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으며 이런 움직임으로 크로아티아 근방에 있는 유고 인민군 부대의 민족비율이 거의 세르비아계로 동질화되었다.[146]
크로아티아 독립 선언 1달 후 유고 인민군과 기타 세르비아군은 크로아티아의 국토 1/3 가까이를 장악한 상태였고[144] 장악 영토 대부분은 세르비아인 민족이 대부분 거주하는 지역이었다.[147][148] 여기에 유고 인민군의 군사 전략은 민간인이 있든 없든 광범위하게 포탄을 날려 포격한다는 방식이었다.[149] 전쟁이 진행되면서 두브로브니크, 고스피치, 시베니크, 자다르, 카를로바츠, 시사크, 슬라본스키브로드, 오시예크, 빈코브치, 부코바르 등의 도시에 유고슬라비아 군대가 공격하였다.[150][151][152][153] 유엔은 이들 국가에 무기 엠바고를 부과했는데 유고 인민군이 지원하는 세르비아군은 유고 인민군의 무기고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어서 큰 문제가 없었던 반면 새로 결성된 크로아티아군은 무기 수급에 큰 문제를 겪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국경 너머로 무기를 밀수하기 시작하였다.[154][155]
1991년 8월, 부코바르 전투가 시작되었다.[156][157] 1991년 8월 달 학살을 시작으로 동슬라보니아 전역이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158] 오시예크에서 빈코브치를 중심으로 전선이 형성되었고 부코바르는 포위되었다.[159][160][161][162]
9월 들자 세르비아군은 부코바르를 완전히 포위하였다. 제204 부코바르 여단을 포함한 크로아티아 부대는 시내에 주둔하면서 유고 인민군의 기갑여단 및 기계화 여단, 그리고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상대로 도시를 방어하였다.[163][164] 부코바르는 전투로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총 15,000채의 집이 파괴되었다.[165] 일부 크로아티아계 민간인들은 도시 안으로 피난하였다. 그 외 다른 민간인들은 집단으로 부코바르 밖으로 피난을 나섰다. 부코바르 포위전으로 총 사망자는 1,798명에서 5,000명에 달한다.[109] 여기에 도시 점령 이후 22,000명이 부코바르에서 쫓겨났다.[165][166]
크로아티아 전쟁 기간 크로아티아 내에서 국내실향민이 대략 크로아티아인 22만명, 세르비아인 30만명 이상이라는 통계도 있다.[22] 많은 지역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군대에게 쫓겨났다. 크로아티아 전쟁으로 처음으로 추방에서부터 살해에까지 달하는 일련의 민족에 대한 전쟁범죄를 민족 청소(ethnic cleansing)이라고 부르며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이 때가 처음이었다.[167]
10월 3일, 유고슬라비아 해군은 크로아티아의 주요 항구에 대한 봉쇄 작전을 재개하였다. 달마티아와 기타 지역에서 유고 인민군 부대를 공격하는 막사 전투가 수 개월간 진행되자 나온 조치였다. 또한 이는 달마티아를 크로아티아 본토로부터 아에 포위시켜 차단시키겠다는 의도로 진행한 유고 인민군의 해안선 점령 작전인 코스트-91 작전이 실패하고 작전을 끝낸 직후 시작된 봉쇄 작전이기도 하였다.[168]
10월 5일,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대통령은 연설에서 세르비아 주도 하의 유고 인민군, 세르비아 민병대, 세르비아계 반군이 작당하는 "대세르비아 제국주의"에 대항해 온 국민이 총동원해서 이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118] 10월 7일에는 유고슬라비아 공군이 자그레브에 있는 정부중앙청사를 공격했는데 이를 반스키드보리 폭격 사건이라고 부른다.[169][170] 다음 날, 앞서 합의했던 독립 선언 유예 기간 3개월이 지남에 따라 크로아티아 의회는 유고슬라비아의 남은 모든 관계 단절을 선포하였다. 10월 8일이 공식적인 크로아티아 독립기념일이 되었다.[13] 정부청사 폭격과 함께 10월 들어 두브로브니크 포위전이 시작되면서[171] 유럽연합(EU)가 세르비아에 대해 국제 제재를 시작하였다.[172][173] 10월 15일 유고 인민군이 차브타트를 점령하면서 아초 아폴로니오를 대두로 한 세르비아계 지역 정치인들은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을 선언하였다.[174] 국제 언론은 두브로브니크의 문화유산 피해에만 초점을 맞췄는데, 민간인 사상자 및 부코바르 전투와 같은 주요 전투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대중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포격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두브로브니크 성벽 내 구시가지가 650회의 포격으로 건물 56%가 피해를 입는 등 문화유산의 피해도 심각했다.[175]
정점을 찍은 전쟁[편집]
크로아티아는 나라 자체가 실향민이 되었다.
— 미르코 코바치, 2005년 크로아티아 전쟁 종전 10주년 기념 연설에서[176]
1991년 12월, 크로아티아의 난민.
유고 인민군 제5군단이 사바강을 도하해 파크라츠와 북쪽의 서슬라보니아로 진격하는 것에 대항해[177] 크로아티아 육군도 1991년 11월 초 역습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첫 대규모 작전이 시작되었다.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있었던 옥토스 10 작전으로 크로아티아가 빌로고라에서 파푸크산 사이 고지대를 수복하였다.[178][179] 옥토스 10 작전으로 크로아티아군이 점령한 영토는 대략 270 km2 지역에 달한다.[179]
11월에는 부코바르 학살이 일어났다.[180][181]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오브차라 수용소나 벨레프로메트 수용소와 같은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가 나중에는 스렘스카미트로비차 감옥으로 이송되었다.[182] 부코바르에 대한 지속적인 포위공격은 국제 언론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끌었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 시기 국무장관였던 유엔 평화중개인 사이러스 밴스와 같은 수많은 국제 저널리스트들이 부코바르 인근에 있었다.[183]
동슬라보니아에서는 부코바르 함락 전후로 1991년 10월 로바스 학살,[108][184] 11월 에르두트 학살이 있었다.[185] 같은 시기 달마티아 고지 북부에서는 슈카브르냐 학살 사건이 일어났는데 부코바르에서의 사건들로 당시에는 학살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186]
11월 14일, 달마티아 항구들에 대한 해군 봉쇄에 대항해 민간 선박들이 우회하기 시작했다. 이 대결은 달마티아 해협 해전에서 최고조에 달했는데, 크로아티아의 해안선과 섬 등지에 있던 해안포들이 무코스 PČ 176(이후 PB 62 숄타로 개명)과 같은 유고슬라비아 해군 함정들 수 척을 침몰, 손상, 나포하였다.[187] 해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해군은 사실상 아드리아해 남부에서만 작전이 가능할 정도로 축소되었다.[188]
로바스 학살 당시 피해자들의 사진.
크로아티아 육군은 12월 중순부터 오르칸 91 작전을 포함해 수 차례의 작전으로 진격하였다. 오르칸 91 작전으로 크로아티아군은 대략 1,440 km2의 영역을 점령했다.[179] 이 작전은 6개월 가까이 지속된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했는데, 작전 동안 1만명이 사망하였으며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집을 잃어 난민이 되었고 수만채의 집들이 파괴되었다.[189]
전투가 격화되면서 12월 19일 처음으로 크로아티아는 서구국가에서는 최초로 아이슬란드에게서 국가승인을 받았으며 크라이나와 서슬라보니아의 세르브인 자치 지역(SAO)가 모여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32] 4일 후, 독일이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승인하였다.[37] 1991년 12월 26일, 세르비아인이 사실상 장악한 연방 대통령직은 전쟁 기간 점령한 크로아티아 지역을 포함시킨 "더 작은 유고슬라비아" 계획을 발표하였다.[33]
1991년 12월 21일 전쟁 중 처음으로 이스트라반도가 공격을 받았다.[190] 세르비아군은 포레치와 로빈 사이에 있는 반도 서남부의 브르사르 근방의 공항을 공격했다. 이 공항에는 미코얀-구레비치 MiG-21 2기와 소코 G-2 갤렙 2기가 배치되어 있었다.[191] 이후 유고슬라비아가 브르사르의 치를렌카 공항을 융단폭격하면서 2명이 사망하였다.[192] 이 당시 해외 외교관들이 중재한 휴전 협의는 서명되었다 깨지기를 반복하였다. 크로아티아는 많은 영토를 잃었으나 크로아티아 육군은 1차 정전 당시 7개 여단에서 1991년 12월 31일 기준 60개 여단과 37개 독립대대로 급속하게 확장되었다.[117]
1992년, 카를로바츠에서 파괴된 T-34-85 전차.
1991년 8월 27일에는 유럽 경제 공동체의 유럽 연합 이사회 산하로 유고슬라비아 관련 회담에 법률적 자문을 주는 바댕테르 평화중재위원회라고도 불리는 유고슬라비아 평화 회담 중재위원회가 세워졌다. 5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EEC 구성국 헌법법원의 재판소장이 위원으로 소임되었다. 1991년 11월 말부터 중재위원회는 10개 의견을 제시하였다. 위원회는 무엇보다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SFR 유고슬라비아)은 해체 과정에 있으며 유고슬라비아 내의 공화국 국경은 자유롭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바뀔 수 없다는 입장을 표력하였다.[10]
국제사회가 크로아티아의 전쟁 전 국경 보존에 찬성한 이유는 1971년 유고슬라비아 헌법개정안과 1974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헌법 조문 때문이었다. 1971년 헌법개정안에서는 주권이 연방 단위에서 발휘된다는 개념을 도입하였고 연방만 헌법에 따른 특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명시하였다. 1974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에서는 1971년 도입한 원칙을 확인하고 이를 강화하였다.[193][194] 이 당시 각 공화국 간 국경은 1943년과 1945년 유고슬라비아 국민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가 세운 유고슬라비아 연방조직에 대한 결정을 따라 1947년 국경협의위원회에서 합의하여 그어졌다.[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