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문화의 중심 종가집인 중구권 답사~
답사국장 : 박경자
답사일정
10:00~울주군청
10:40~산전샘과 어련당
11:00~병영성과 외솔기념관
12:00~병영1동사무소
12:30~중식(함월루 정자)
13:30~백양사 부도
14:00~학성도호부(동헌및 내아)
14:40~유곡동 공용발자국
15:30~수운최재우 유허지
16:00~웅촌신토불이 가든(총회)
1.자연환경
1)위치
울산은 지리적 위치를 보면 한반도의 동남단 태화강하류와 울산만주변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중구는 최하류의 이북지역인 동시에 동천강을 중심으로 북구와 경계하고 있다.
2)면적과 인구
2015년 6월 30일 현재 면적은37.0 ㎢이며, 행정 동수는 13개동으로 인구는 483,490명이다.
(학성, 반구1,2, 복산1,2, 성안, 중앙, 우정, 태화, 다운, 약사, 병영1,2,)
3)지형
동남해안선 연안부와 태화강 이북의 중구지역은 평균 고도 100 - 150m 내외의 해안
저구릉(低丘陵)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산으로는 다운동과 유곡동 뒤쪽의 걸쳐있는 입화산(立火山:203m), 울산의 주산(主山)인 함월산(含月山:200m), 그리고 장현동과 약사동에 걸쳐 있는 황방산(黃坊山:142m)등의 저산성(低山性) 산지(山地)를 이루고 있다.
역사가 깊은 태화강(太和江)은 멀리 울주군 서북부인 상북면 가지산 옥류동(玉流洞:45.4㎢)과 두서면 백운산(白雲山: 47.5㎢)탑골샘에서 발원하여 동남으로 흐르는 강이다. 그리고 울산만의 맨동쪽인 동천강(東川江:27.1㎢)은 경주 외동읍 토함산 남쪽기슭 괘릉리 부근에서 발원하여 외동읍을 관통하여 남류(南流)하다가 북구와 경계를 이루다 하류인 명촌동과 반구동의 끝자락 내황마을의 내황진(內隍津)에서 서북으로 흘러오는 태화강과 합류하여 울산만으로 흘러간다.
2.중구의 역사
⦁삼한시대
⦁ 진한에 속하였으며, 굴아화촌(지금의 범서와 다운동)읍락 형성
• 삼국시대
• 신라 제5대 파사왕 때 굴아화현 설치
• 고려시대
• 태조 하곡, 동진, 우풍의 3현을 합하여 흥례부로 승격
• 성종14년(995년) 별호를 학성이라 칭함
• 조선시대
• 태종13년(1413년) 울산군으로 개칭
• 선조31년(1598년) 울산도호부로 승격
• 고종32년(1895년) 울산군으로 개칭
• 근대
• 1910. 10. 1 면제실시에 따라 울산군 울산면이 됨
• 1914. 언양군을 울산군으로 병합
• 1931. 11. 1 울산면이 울산읍으로 승격 칭
• 현대
• 1962. 1. 27 울산특정공업지구로 결정 공포
• 1962. 6. 1 울산시 승격, 울산군은 울주군으로 개칭
• 1982. 9. 1 학성동을 학성동, 반구동으로 분동(15개동)
• 1985. 7. 15 울산시 구제 실시 (중구청 개청 - 15개동)
• 1990.10.20 중구청 소재지를 중구 학산동 123번지에서 중구 복산동 180-1번지로 이전
• 1992. 1. 20 반구동을 반구 1동, 반구 2동으로 분동 (16개동)
• 1992. 9. 20 병영동을 병영 1동, 병영 2동으로 분동 (17개동)
• 1995. 1. 1 울산시·군 통합 울산시 발족
• 1995. 3. 2 복산동을 복산1동, 복산2동으로, 태화동을 태화동과 다운동으로 분동 (19개동)
• 1997. 7. 15 울산광역시 중구 설치 종전의 중구 중 송정동, 효문동, 진장동, 양정동을 북구로, 염포동을 동구로 이관 (14개동)
• 2009. 1. 1 옥교동, 성남동을 중앙동으로 통합 (13개동)
• 2014. 9. 1 북정동 폐지, 성안동 신설(13개동)
3.문화재
1) 울산향교(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7호: 97년 10월 9일 지정) : 교동 171-1
조선시대 공식적인 교육기관으로, 창건연대나 초기연역은 임진왜란에 의한 기록 멸실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一邑一校" 체제가 완성된 15세기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당시 신학성 북쪽인 반구동 구교마을에 세워졌는데, 임란 때 불탄 후 그곳에 다시 세워졌다가 효종3년(1652)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1800년 이후 26번 고쳤으나 기본 틀은 변함이 없었다. 건물은 전학후묘(前學後廟)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학공간인 명륜당은 정면5칸 측면2칸의 홑처마 익공양식의 팔짝 지붕이며, 문묘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의 사성과 이현, 우리나라 18현으로 총25분의 제사를 모시는 대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 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정문인 청원루도 정면5칸 측면2칸의 겹처마 익공양식의 팔짝 지붕이다.
2)동헌 및 내아(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호: 97년 10월 9일 지정) : 북정동 349
옛 읍성 안의 중심 건물로 울산도호부의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였던 곳이고 살았던 살림집이다. 숙종7년(1681) 울산부사 김수오가 처음 지었고, 영조39년(1763) 울산부사 홍익대가 다시지어 반학헌(半鶴軒)으로 불렀다. 일제강점기 이후 군청회의실로 사용되었다. 1981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나, 원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동헌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겹처마 익공양식의 팔짝지붕으로 좌우에 2칸씩의 방을 두고, 가운데에는 대청을 두었다. 왼쪽 방주위에는 계자(鷄子)난간을 둘렀다.
내아는 8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로 온돌방3칸, 대청2칸, 부엌과 누마루 각 1칸씩을
두었다. 살림집인데 마당도 없고, 동헌과 담이 없어 어색하다.
3)역대 수관들의 선정비 와 효자송도 정려비
①울산도호부 동헌(북정동 349)안의 비석군 31기
동헌내 오송정 아래에 동서로 길게 도열(堵列)해 있는 비림(碑林)이 있다. 원래는 울산향교 청원루 좌우에 있었으나 1980년대 초반 동헌 및 내아를 중수할 때 모두 이곳으로 이건(移建)하여 현제 31기의 선정비가 있다. 한기 한기의 조사는 향토사보 21집 <선정비를 찾아서>에 울산소재 비석 61기를 찾아 자세하게 조사하여 번역한 바 있는데, 이중에 포함되어 있다.
②병영1동사무소 소재 비석군 17기
병영1동사무소(병영3길 8)경내 화단에는 17기의 선정비가 있다. 이비도 향토사보 21집 <선정비를 찾아서>에 울산소재 비석 61기를 찾아 자세하게 조사하여 번역한 바 있는데, 이중에 포함되어 있다.
③울산동강병원 담장의 마애석 1기
윤지태(1700-1750)는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1742년 10월부터 1744년 10월까지 약25개월간 울산부사로 재임하였다. 이비는 그가 이임 후 6년 뒤에 건립된 것으로 현제 태화동 동강병원 담장에 마애비 형태로 남아 있다. 이비도 <향토사보> 21집에 실려 있다.
④학성공원 북쪽기슭 마애석 2기와 비석 1기
⦁병상국 이윤겸(1748-1810) 불망석
이비도 <향토사보> 21집에 실려 있다.
⦁부사 조재선(1713-1769) 영세불망비
이비도 <향토사보> 21집에 실려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선정의 내용이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어려우나, <울산부선생안>에 따르면 6년 동안 부사직을 수행하면서 많은 선정을 남겼기 때문에 이곳과 운흥사지가는 산 언덕길과 북구 정자동 달골 마을, 이렇게 3기가 확인 되었다.
⦁고 김홍조 (1868-1922) 공덕비
이비도 <향토사보> 21집에 실려 있다.
독립 운동가이자 개화 운동가다. 1913년 신학성주변의 땅 7천 평을 사들여 공원조성 후 울산군에 바쳤다.
⦁동헌안의 정려비(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0호 : 98년 10월 지정) : 북정동 349
효자송도선생의 정려비가 동헌 내 중부도서관 담장 쪽에 있다. 세종 때 효문동에 세웠다가 임란 때 파괴되어 우정삼거리 북편으로 옮겨 세웠는데 다시2006년 이곳으로 옮겨 왔다. 향토사보 25집 <울산 송도선생의 효행을 조명하다> 에 상세하게 조명되어있다.
4)백양사 (울산광역시 중구 성안동 819-2번지)
⦁백양사 석조 아미타삼존불좌상(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25호 : 2013년 8월 지정)
가운데 아미타부처님이고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재질로는 경주 옥돌혹은 불석으로 제작되었다. 영조43년(1767)에 중수되었다는 기문이 협시보살 몸속에서 나왔다. 조선후기 경상도지역의 불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불석재(佛石製)일뿐 아니라 불교조각의 다양성과 지역성연구에도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백양사 아미타삼존불후불흥탱(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26호 : 2013년 8월 지정)
조선말기 고종15년(1878)에 제작되었고 그 규격은 166cm☓176.1cm로 면 본채색이다. 그림 가장자리에는 목재로 표구되었고 바탕에는 붉은색을 칠한뒤 백색으로 윤곽선을 그린 선묘불화(線描佛畵)로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백양사 신중탱(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27호 : 2013년 8월 지정)
조선말기 고종15년(1878)에 제작되었고 그 규격은 142.5cm☓149.5cm로 면 본채색이다. 신중도(神衆圖)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을 그린불화다.
⦁백양사 석조부도(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28호 : 2013년 8월 지정)
조선후기에 제작된 부도로 전체높이 215cm의 석조 화강암으로 되어있다.
堂號나 法號가 새겨져있지 않아서 塔主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이정의 창건주인 백양선사(신라말 932년 창건)의 부도라고 전해지나 양식적으로는 맞지 않다.
이 부도는 하대 ⦁중대⦁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부에 구형(球形)의 탑신과 팔각의 옥개석을 지닌 편구형(偏球形) 탑의 양삭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양식은 조선말기 경상도일대에 유행했으며 전체적으로 대형부도에 속한다.
5)해남사 신중도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21호 : 2010년 12월 지정) 북정동118
광무8년(1904)에 금어, 환월 상휴를 비롯한 5인의 수화승(首畵僧)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해남사 신중탱은 통도사 비로암에 남아 있는 구품탱, 신중탱, 칠성탱, 산신탱등과 동시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화승 상휴는 합천해인사, 문경대승사, 부산범어사등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인물 형태와 화면구성, 색채면에서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 갑옷과 무기를 갖춘 금강과 신장이 조합된 구성으로 복식이 정교하게 시문된 다양한 문양을 통해 20세기 초 불화의 문양과 색채의 양식을 볼 수 있다.
6)외솔기념관( 최현배 : 1894 10월 19일 - 1970년 3월 23일 )
⦁외솔최현배 선생상(동상)
외솔기념관은 외솔선생이 살았던 생가 터에 외솔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여 2010년 3월23일에 개관되었다. 이듬해 2011년 10월19일에는 외솔의 생일날을 기념으로 외솔의 동상도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말과 글을 지킨 독립운동가요. 한글보급과 기계화, 정보화를 위해 평생 한길을 걸은 한글학자이며, 철학가인 동시에 교육자이다. 울산이 낳은 위대한 인물외솔은 나라사라의 사상을 실천한 선각자이다.
⦁외솔내의 무덤비와 푯돌
이 비석과 푯돌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외솔의 무덤에 있던 묘비와 우리 말본 한글갈 기념푯돌은 2009년 9월23일 선생님의 유해가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지게 됨에
따라 유가족들이 기증함으로써 이곳으로 2009년 9월 25일에 생가 터 뒤뜰로 옮겨왔다.
⦁외솔최현배 선생상(흉상)
병영초등학교 교정에 한복차림으로 흉상이 남향으로 서 있다. 흉상은 병영교 46회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기증했다.
7)산전셈 과 어련당(語連堂) 동동 385번지
⦁산전샘
약400년 전에 조성된 샘은 병영성 안 팍 주민들과 병사들에게 식수로 제공 될 만큼 물맛이 좋을 뿐 아니라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김이 모락모락 날정도로 따뜻했으며, 석양이 지는 산전샘에는 머리 땋은 아가씨들이 물동이를 이고 줄을 지어 성내를 오갔다. 해방 후에는 미군들도 식수로 사용하여 멀리 부산, 대구까지도 실어갔다. <울산읍지>에는 한 시간에 솟는 물은 80섬이요 하루에 솟는 물은 1820섬이니 능히 1000호가 사용한들 줄지 않는다 하였다.
⦁어련당(語連堂)
울산 최초의 한옥 숙박 체험관으로 2014년 8월에 개관되었다. 어련당은 동천의 옛 이름인 어련천에서 유래되었으며, 어원을 찾자면 아름다운 말이 흐르는 집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각방의 명칭은 조선시대의 정부조직인 6부의 첫 음을 빌려 좋은 의미의 한자를 사용해 정했다. 6부(⦁이(怡)⦁호(好)⦁예(睿)⦁병(幷)⦁형(馨)⦁공(恭))
8)경상좌도 병영성(사적320호 1987년 7월18일 지정) 서동 149-8, 동동, 남외동 일원
병영성은 태종 17년(1427)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존속한 慶尙左道 兵馬節度使의 營城으로 1417년에 쌓았다. 《與地圖書》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9,316척, 높이는 12척이었다. 이 성은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包谷式) 성으로 구릉 정상부에 석축을 쌓은 것이다. 사방으로 3칸의 문루를 갖춘 성문을 두었고, 서문과 북문 주위에는 옹성(甕城)을 쌓았으며 성벽 곳곳에 치성(雉城)을 두었다. 성의 둘레에는 해자(垓字)를 팠다. 성 안에는 병마절도사 공관이 체오헌(掣鰲軒), 객사인 선위각(宣威閣), 객사 정문인 진해루(鎭海樓), 우후(虞侯) 공관인 찬주헌(贊籌軒) 등의 주요 건물이 있었다. 부속 건물로 무기와 군수물자를 보관한 창고 등이 있었고, 연못 3개와 우물 7개가 있었다. 울산 경상좌도 병영성 서문지 일원은 2012년 6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약 400m 구간, 19,796m²의 면적에 대하여 시굴·발굴조사를 시행하였다. 조사결과 시기별로 성벽의 축조 방법이 다르고, 여러 차례 축조가 이루어진 것이 확인되었다. 또 치성, 옹성, 3개소, 해자수혈 주거지, 긴 도랑(구상 유구)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9)수운최제우유허지(水雲崔濟愚遺墟址)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2호
조선 후기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1824∼1864)가 수도생활을 하던 중 큰 깨우침을
얻은 곳으로 ‘여시바윗골’이라 한다. 몰락한 양반가 출신인 선생은 봉건적 체제에 대한 모순을 느끼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 가르치는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은 우리민족의 근대화에 결정적인 분수령을 형성하며, 당시의 도탄에 빠져있던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민중들 속에서 동학의 교세가 확산되자, 당시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해 그릇된 말로 정국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1864년 처형했다. 그러나 그의 순교 이후 교세가 더욱 커져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여시바윗골은 선생이 수도생활을 하던 중, 금강산 유정사에서 왔다는 한 스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주신 글을 받고 큰 깨우침을 얻은 곳으로, 옛부터 ‘예수바우골’이라 하여 동학의 성스러운 땅으로 여겨왔다. 최제우는 순조 24년(1824)에서 고종 1년 (1864) 조선조 말 동학(東學)의 창시자이다. 호는 수운(水雲), 아명은 복술(福述),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양반출신으로 철종 5년에 양산 내원암에서 수도생활 시작하여 천주강림(天主降臨)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설하였다. 수운 선생이 31세되던 해 유곡동 여시바위골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이듬해에 천서를 받고 크게 깨친 곳으로, 그 천서를 을묘천서(乙卯天書)라한다. 수운선생은 시천주(侍天主)의 진리에 따라 천도를 펴시다가 포덕 5년(1864) 3월 10일 좌도난정의 누명을 쓰고 대구장대에서 참형을 당하여 순도하였다.
10)유곡동 공룡 발자국화석(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12호 2000년11월 지정)유곡동 53공룡발자국 화석은 약 1억년 전의 전기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공룡들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공룡들은 아열대 기후 아래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고 열대 무역풍이 영향을 미치는 사바나 지역의 하천평야 일대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공룡발자국은 약 91㎡ 넓이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초식공룡인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발자국과 육식공룡에 속하는 발자국 등 80여 개가 된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듯한 모양으로 남아 있어서 육식 마니랖토라공룡 한마리가 초식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고성룡 아홉마리를 추격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곳의 공룡발자국 화석은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지질시대 울산지역에 대한 자연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11)울산왜성(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1997년 10월 30일)
일명 ‘증성(甑城)’ 또는 ‘시루성’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울산시의 동남으로 흐르는 태화강(太和江)의 삼각주에 있는 높이 50m인 학성산(鶴城山)을 이용하여 산정에 터를 만들고 본성으로 삼았다. 성곽은 산꼭대기에 동서 90m, 남북 35m의 장방형 아성(牙城 : 主將이 있는 내성)을 쌓고 서쪽 산 중턱에 한층 낮게 동서 50m, 남북 25m의 외성을 두고 아성의 주변 산 중턱에는 참호와 토루(土壘)를 둘렀으며, 동쪽으로 1㎞의 거리에 있는 반구동 강변에는 소규모의 토성을 배치하였다.
성벽은 화강암과 잡석으로 일정한 경사를 주면서 3∼8m의 높이로 쌓아올리고 아성에 두 개, 외성에 한 개의 성문을 북향으로 설치하였다. 석축의 방식이나 성문의 양쪽, 성벽의 네 귀에 모난 축대를 돌출시킨 것은 다른 왜성의 구조와 같다.
아성의 성벽은 비교적 완전한 편이나 외성은 거의 허물어져서 그 기초부만 남아 있다. 성내는 공원으로 되어 있고 주위는 주택지로 변하여 선창의 위치도 잘 알 수 없게 되었다. 울산왜성은 1597년(선조 30) 남해안까지 쫓긴 왜군이 방위선을 보강하기 위하여 가토(加藤淸正)와 아사노(淺野幸長)군이 축성한 것인데, 석재는 대부분 울산읍성과 병영성(兵營城)을 헐어서 사용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