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91. 【여호재】(문화류씨)
위생매립장에 400년 세거지를 내어준 망향문중
글·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전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사무국장)
프롤로그
실향민 또는 망향민으로 불리는 이들이 있다. 글자 그대로 고향을 잃고 그리워하는 이들을 말한다. 북한 땅에 고향이 있거나 댐건설로 고향 땅이 물속에 잠겨버린 이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현실적으로 고향땅을 밟을 수가 없는 진짜 실향민이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당장 고향땅을 밟을 수는 있지만 이미 고향이 사라져버린 이들이 있다. 바로 각종 개발 등의 이유로 고향땅이 사라진 경우다. 우리 대구에도 이와 비슷한 예가 많이 있다. 오늘은 이중 하나인 대구위생매립장에 400년 세거지를 내어주고 고향을 떠난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의 망향문중 문화류씨와 그들의 재실인 여호재에 대해 알아보자.
시조 류차달과 2세 류효금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시조는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본래 황해도 유주[儒州·나중에 문화로 바뀜] 사람으로 고려개국에 큰 공을 세워 고려 태조로부터 대승의 관직과 삼한공신의 훈호를 받았다. 그의 외아들인 좌윤공(佐尹公) 류효금(柳孝金)은 호랑이와의 기이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1530년(중종 25)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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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효금이 구월산의 한 절에서 재(齋:불교의식)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큰 호랑이를 만났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호랑이는 입을 벌린 채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레 호랑이의 입안을 들여다보니 목구멍에 은비녀가 걸려 있었다. 그가 호랑이에게 이르기를 “네가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다면 네 목구멍에 걸린 것을 뽑아주겠다”고 말하니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호랑이의 목구멍에서 은비녀를 뽑아주었다. 그날 저녁 류효금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르기를 “목에 무엇인가가 걸려 괴롭던 차에 그대가 나를 구해주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대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고관대작이 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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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구월산 산신령의 영험이 있은 것일까. 실제로 문화류씨는 이후 수대에 걸쳐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해 명문으로서의 영광을 누렸다. 문간공(文簡公) 류공권(柳公權), 복야공(僕射公) 한림학사 대제학 류택(柳澤), 문정공(文正公) 류경(柳璥), 정신공(貞愼公) 류승(柳陞)등이 고려조에서 이름이 났다. 이후 조선조에 와서도 대과에 134인, 당상관 90여인, 시호를 받은 이가 22명인데, 이중에서 특별히 상신(相臣)이 9인, 호당(湖堂)이 5인, 청백리가 4인, 공신(功臣)이 11인에 이르렀다.
흔히 ‘구월산 호랑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구월산에 호랑이가 많이 살아서 생겨난 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구월산 호랑이의 영험함에 연유한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류효금의 전설에 등장하는 호랑이가 구월산 호랑이라는 점과 그의 본관인 문화가 황해도 구월산 인근이라는 점이 예사롭지가 않아 보인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알려진 문화류씨 영락보[1423년]는 현재 그 서문만이 전하는데 그 시작이 이러하다.
‘어떤 사람은 문화류씨의 후손이 번창한 것은 좌윤공이 호랑이를 살려준 것에 대한 음덕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구 방천리 입향조 류희상(柳希祥)
문화류씨 대구 방천리 입향조는 류희상(柳希祥)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문화류씨 19세로 자는 운여(雲汝)이다. 조선 태종조의 명신으로 이름난 충경공(忠景公) 류양(柳亮)이 그의 5대조다. 증조는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지낸 성곡(醒谷) 류약(柳約)으로 성종조에서 음사로 출사했으나, 연산군 때 간신들의 모함으로 무주(茂朱)의 금리(錦里)로 내려와 은거했다. 조(祖)는 절충장군행용양위대호군 류영간(柳榮幹), 아버지는 현신교위용양위부사직 류준(柳浚),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박일(朴逸)의 딸이다.
그는 1544년(중종 39)에 충북 보은의 구이목(九耳木)에서 3형제 중 셋째로 때어났다. 두 형은 모두 출세 길에 올랐지만 그는 고향에서 처사로서의 삶을 보냈다. 임진왜란 때 가족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나섰다가 대구 달성의 와룡산 아래 여호마을에 정착을 했으니, 이로써 문화류씨 대구 방천리 입향조가 되었다. 그의 묘는 처음에는 부인인 성주이씨와 함께 칠곡의 팔거현(八莒縣) 퇴천면(退川面) 곡전동(谷田洞)에 있었으나, 지금은 방천리 선영으로 옮겨 조성되어 있다. 슬하에 1남을 두었으니 증통훈대부군자감정 류전(柳佃)이다. 류전은 다시 3남을 두었는데 1남은 증통정대부 장예원판결사 류기상(柳起相), 2남은 류기중(柳起仲), 3남은 류기운(柳起運)이다. 안타깝게도 류희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은 전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그의 묘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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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 유사(遺事)를 상고하니 공은 세가(世家)의 자손으로 난리에 떠돌아다니는 운명이 되어 먼 타관 땅에서 가세가 영세(零細)하여 떨치지 못하고 유문(遺文)마저 대재(大災)에 남김없이 다 타버렸으니 아름다운 유적은 막연하여 징빙(徵憑)할 수 없고 지금 여호마을에 그대로 눌러 앉아 대대로 살면서 자손들이 오랜 세월을 이어오며 효도와 우애로 세상에 행세하고 농사와 독서로서 그 분수를 편안히 지켜 전형(典型)이 본래부터 있었음을 족히 볼 수 있으니 어질고 착한 증험이 여기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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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천리(坊川里) 망향비(望鄕碑)
방천리는 와룡산과 금호강에 둘러싸인 마을이다. 그런데 와룡산과 금호강에 둘러싸인 방천리의 형국이 독특하다. 와룡산은 그 모양이 꼭 말발굽을 닮았는데 터진 부분이 북쪽을 향해있다. 그리고 그 터진 부분은 금호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며 가로막고 있다. 마을의 4면이 3면은 산에 1면은 물에 가로 막힌 형국이다. 그래서일까. 말발굽 안쪽에 자리한 400년 내력의 방천리마을은 1989년 윗마을을 시작으로 2005년에는 아랫마을에 이르기까지 위생[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로써 방천리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이어온 고향땅을 떠났고 지도상에서 방천리라는 마을은 사라졌다.
방천리는 다른 말로 여호리(驪湖里), 방내리(坊內里), 이반마을 등으로도 불렸다. 와룡산 기슭의 밤나무와 금호강의 넓은 모래밭 덕분에 방천리 일대는 한때 대구시민들의 휴양지이기도 했다. 본래 방천리에는 밀양손씨가 먼저 터를 잡았고 이어 성주이씨, 진주강씨 순으로 터를 잡았는데, 나중에는 문화류씨와 진주강씨가 번성했다. 현재 방천리 대구환경자원사업소와 서재근린공원 사이에 방천리망향비와 망향정이 세워져 망향민들의 애환을 달래고 있다.
문화류씨 세천지와 여호재
여호재(驪湖齋)는 방천리에 있는 문화류씨의 재실이다. 문화류씨가 방천리에 터를 잡은 지 250년 만인 1838년(헌종 4), 비로소 방천리 윗마을 뒷산에 처음으로 문중재실을 세웠으니 여호재다. 이처럼 문중재실 건립이 늦었던 것은 방천리가 산과 물로 둘러싸인 오지인 탓에 방천리 류씨들의 삶이 풍족하지 않아서였다. 제 아무리 명문의 후손인 문화류씨라 해도 빠듯한 문중살림에 재실을 세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55년 뒤인 1993년, 방천리에 위생매립장이 들어서면서 여호재는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된다. 이때 처음에는 현대식 붉은 벽돌 단층양옥 형태로 지었다가, 2011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중창을 했다. 현재 여호재는 대구환경자원사업소 동편 와룡산 기슭에 조성된 문화류씨 세천지(世阡地) 내에 세워져 있다. 세천지라는 말은 세장지(世葬地)와 같은 ‘말로 대대로 이어온 선영’이라는 뜻이다. 여호재는 그 형태는 전통 재실의 형태를 갖췄지만 건축재료는 기와와 콘크리트를 주로 사용했다. 여호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머리에는 기와지붕을 이고 있지만 몸체는 콘크리트로 되어 있다. 세천지에 세워진 재실인 만큼 주변에는 입향조의 묘를 비롯한 많은 선조들의 묘와 함께 여러 기념비들이 조성되어 있다.
에필로그
10여 년 전, 금호강변을 따라 방천리 앞을 지날 때면 늘 방천리 입구에 세워져 있었던 문화류씨세천지(文化柳氏世阡地)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표지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심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그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금처럼 새롭게 조성된 선영 아래로 옮겨진 것이었다. 옮겨진 세천지 표지석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방천리 류씨들처럼 우리 대구에는 많은 망향문중이 있다. 동학농민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300년 세거지를 뒤로 하고 선대의 고향인 청송으로 이주한 함안조씨, 6.25한국전쟁 때 동촌 대구비행장에 세거지가 수용된 영양남씨, 최근 동구 신서혁신지구에 세거지가 편입이 된 성주배씨, 장수황씨 등이 있다. 특히 동구 단산지에 400년 세거지가 수몰된 성주배씨는 육지 속 수몰민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새롭게 단장된 지금의 방천리 문화류씨 입향조 묘소에서 정면을 바라보니 와룡산의 용머리와 금호강 그리고 멀리 가야산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참으로 절경이다.
2019년 4월 29일
砧山下 풍경산방에서
訥齋 송은석拜
☎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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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의 유교유적, 유교문화, 문중 등은 기존의 자료가 충분치 못한 관계로 내용 중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신 경우 전화 또는 댓글로 조언을 주시면 적극 경청하고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당부 드립니다.
여호재(驪湖齋) 중건기(重建記)
여호재(驪湖齋)는 대구시 서편에 위치한 와룡산으로 둘러싸인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에 소재한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재실이다. 조선 태종(太宗)때에 우의정을 지내신 충경공(忠景公) 휘 양(亮)의 오대손이신 휘(諱) 희상(希祥)께서 임진왜란을 당하여 충북 보은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이주한 후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방천리의 옛 이름인 여호리(驪湖里)의 지명을 재실(齋室)이름으로 한 것이다. 이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마을로 생활이 풍요하지 못하여 재실건립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오랜 훗날 문중어른들의 논의에 의하여 윗마을 뒤편 와룡산 자락에 좋은 터를 정하여 서기 1838년 음력 3월 3일 십여 칸의 화사한 전통양식의 양곡자형 기와집을 준공하게 되었다. 이는 조상을 추모하고 섬기는 정성을 나타냄이며 우천시에는 옥내에서 제사 집례와 귀한 손님의 영접 및 종중의 크고 작은 일들의 논의와 결정 그리고 후손들을 위한 배움의 학당으로도 활용되어 왔었다. 서기 1891년 7월 16일 철종 때에 대사헌을 지내신 지산(芝山) 류(豐山) 지영(芝榮)공께서 지으신 여호정사기(驪湖精舍記)의 현판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서기 1989년 대구시의 위생매립장 조성으로 윗마을 모두가 편입됨에 따라 재실마저도 이전하게 되었다. 서기 1991년에 종회 집행부를 새로이 구성하고 이곳 방천리 45번지의 세천지(世阡地) 역내로 재실을 이전하기로 결정을 하여 허가신청을 하였으나 이곳은 녹지지역이어서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서기 1993년 봄에 겨우 착공하여 동년 12월 18일 현대식 건물인 붉은 벽돌 단층양옥 30여 평을 남향으로 완공하여 조촐한 준공식을 가졌다. 서기 2005년 대구시의 2차 매립장 확장사업의 추진으로 매립시설의 증설과 체육시설 및 수목공원 조성 등으로 인하여 아랫마을과 농토까지 모두 편입되어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문중 재실만은 남게 되었으나 건물이 노후되고 선영 및 주변환경과의 상응하는 조화를 위하여 서기 2010년 5월 종회정기총회에서 재실을 새로이 건축하기로 결의가 되어 종회 임원들이 주축이 되고 여호재 개축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다른 문중의 재실답사와 관계 문헌의 참고 등 많은 자료의 수렴과 유능한 업자의 선정 등 제반사를 합의하고 주위 환경 등을 고려하여 금호강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서기 2010년 8월 기공하였다. 공사기간 중 폭염과 잦은 장마 그리고 혹심한 추위 등으로 인한 많은 어려운 난간을 극복하고 이어서 세천비를 세천지 역내로 옮기고 재실 담장과 대문건축 조경공사 그리고 여호재 기적비 주변 정비 등 추가공사로 인하여 공사기간이 연장되었다. 아울러 일가들로부터 많은 성금이 답지 되어 건축 재원에 충당하는 등 대역사가 드디어 완공이 되어 서기 2011년 5월 1일에 많은 내빈과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한 준공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간곡히 바라는 것은 화사한 재실의 중건은 곧 조상을 받들고 은혜에 보답하는 정성된 마음과 일가 간에 화목과 정의를 돈독히 할 뿐 아니라 세천지 묘역을 알뜰히 보살피는 효심과 재실을 영구히 보전하는 정성이 자손대대로 끊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종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바이다.
서기 2011년 2월 1일
문화류씨 충경공파 성곡공 대구종회회장 입향조 13대손 태관 쓰다
방천리망향비(坊川里望鄕碑)
대구광역시 서쪽 십여리의 와룡산 자락에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방천리라! 이곳의 옛 이름은 여호리(驪湖里) 또는 방내리(坊內里)라 하였으며 또 달리 이반마을이라고도 했다. 상·하 두 마을과 원(院)이라는 취락(聚落)으로 이루어진 고장이다. 와룡산을 감도는 금호강 맑은 물에는 고기들이 뛰어 놀고 넓은 모래밭과 밤나무 숲은 가히 장관을 이루어 상춘객들이 찾기도 하던 곳이었다. 이곳에 먼저 터를 잡았던 밀양손씨들은 일찍 타처로 떠나갔고 성주이씨들도 점차 떠나고 한두 집만 남았다. 다만 진주강씨는 벌족으로 번성하였다. 임진왜란 때 충청도 보은에서 이곳으로 입향 은거한 문화류씨도 번성 세거하며 집성촌을 이루었다. 훗날 청주한씨·함안조씨·금령김씨 등도 한두 집씩 있었다. 깊은 산골이라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으나 순박한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미풍양속을 지켜 이웃 간의 정이 돈독했으며, 숭조(崇祖)와 효(孝)를 실천했었다. 1980년에는 뜻밖에도 대구시에서 위생매립장 조성을 위한 주민 설득이 시작됨에 따라 주민들은 고향지킴에 심혈을 다하여 적극 반대했으나 1989년에는 마침내 윗마을 전역에 매립장이 조성되고 말았다. 이로 인한 많은 선영(先塋)도 이장해야하는 아픔을 겪었다. 2005년에는 대구시에서 아랫마을까지 포함한 매립장 확장안(擴張案) 발표로 주민들이 심한 반대저지가 있었으나 고향 전주민이 대구시의 공익사업에 협조함도 올바른 시민상(市民象)이라는 시대적 흐름의 설명과 권유를 받아들였다. 다행히 대구시의 배려로 문화류씨 입향조 묘역은 보전되기는 했으나 여타 많은 선영 중 350여기는 장지(葬地)가 없어 극히 일부 선영만 이장하고 대다수는 부득이 소산(燒散) 해야만 했다. 향내의 곳곳마다 조상님의 체취가 스며있고 형제들이 함께 뛰놀며 이웃이 정답게 살던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고향이란 떠날 수는 있어도 버릴 수는 없음이라 했으니 그간의 많은 사안은 모두 생략하고 극히 일부만이라도 후대에게 전해야 할 책무 또한 있다 하겠기에 여기 정 들었던 고향 터에 망향비를 세워 고향을 기리는 계기를 삼으려고 이 비를 세움으로써 지난날 정겨웠던 고향을 회상해 보는 상징물이 되게 함이다.
2010년 10월 류두열(柳斗烈) 서술(敍述)
처사문화류공휘희상지묘(處士文化柳公諱希祥之墓)
공의 성은 류씨요 휘는 희상(希祥)이며 자는 운여(雲汝)이고 본관은 문화이다. 고려개국벽상공신대승공 휘 차달(車達)이 그의 시조이다. 그 뒤에 금자광록대부정당문학참지정사 시(諡) 문간공(文簡公) 휘 공권(公權)과 복야공(僕射公) 한림학사 대제학 휘 택(澤) 및 추성위사일등공신수문전집정태학사감수국사세자사(推誠衛社一等功臣修文殿集政太學士監修國史世子師) 시(諡) 문정공(文正公) 휘 경(璥)과 광정대부지도첨의사사 시(諡) 정신공(貞愼公) 휘 승(陞)은 아울러 공훈과 덕행이 현혁하여 고려시대에 큰 문벌이 되었다. 태종 조에 추충익대동덕좌명공신예문관대제학의정부우의정문성부원군(推忠翊戴同德佐命功臣藝文館大提學議政府右議政文城府院君) 시(諡) 충경공(忠景公) 휘 양(亮)은 오대조이시며 증조는 증자헌대부이조판서행통훈대부 금산군수(錦山郡守) 휘 약(約)이시니 성종 조에 음사로 출사한바 조정에서 바른 말을 잘하며 을묘 1495년 연산정란 때 간인들의 모함과 배척을 받아 무주금리(茂朱錦里)로 은거하여 성곡(醒谷)이라 자호(自號)하다. 조(祖)는 절충장군행용양위대호군 휘 영간(榮幹)이시고 고(考)는 현신교위용양위부사직 휘 준(浚)이시니 건장한 체모와 굽힐 줄 모르는 의지가 뛰어났으나 불행히 일찍 돌아가시고 비(妣)는 공인(恭人) 밀양박씨로 휘 일(逸)의 따님이시다. 공은 중종 조 갑진 1544년에 충북 보은의 구이목(九耳木)에서 태어나시니 서열은 셋째이다. 타고나신 성품이 조용하시고 근독(謹篤)하시더니 벼슬집안에서 비범하게 태어나 백중(伯仲) 두 분 형은 함께 출세의 길에 올랐건만 오히려 영달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고 문을 닫고 들어 앉아 명성을 감추고 독서로 뜻을 구하시더니 불행히 임진왜란을 만나 난을 피하고자 가족을 거느리고 대구 달성의 와룡산 아래 여호마을에 이르러 머무르면서 주민들과 어울려 스스로 안정하여 몸과 가정을 보전하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병신 1596년에 향년 53세로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때는 아직 난이 끝나지 않아 통행이 불편하여 선영으로 가서 장례를 치룰 수 없어서 칠곡의 팔거현(八莒縣) 퇴천면(退川面) 곡전동(谷田洞) 자좌(子坐)의 둔덕에 안장하였다. 배위는 성주이씨이며 묘는 공과 같은 둔덕에 안장하여 상하분(上下墳)이다. 1남을 생하니 증통훈대부군자감정 휘 전(佃)이요, 휘 전이 3남을 생하니 장(長) 휘 기상(起相)은 증통정대부장예원판결사요, 차(次)는 휘 기중(起仲)과 휘 기운(起運)이다. 이하는 번성하여 모두 기록하지 아니한다! 지금 오랑케들의 병화가 재발하여 예속이 날로 쇠퇴할 때 공의 후손들이 아득한 유적을 추모하여 영원히 남기려고 방금석역(方今石役)을 시작하여 문내(門內)의 젊은 기춘(基春)을 나에게 보내 묘갈명을 부탁하니 먼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는 것은 옛날의 도리이다. 나 또한 고도(古道)를 아는 사람으로서 사양을 할 수 있겠는가! 이에 그 유사(遺事)를 상고하니 공은 세가(世家)의 자손으로 난리에 떠돌아다니는 운명이 되어 먼 타관 땅에서 가세가 영세(零細)하여 떨치지 못하고 유문(遺文)마저 대재(大災)에 남김없이 다 타버렸으니 아름다운 유적은 막연하여 징빙(徵憑)할 수 없고 지금 여호마을에 그대로 눌러 앉아 대대로 살면서 자손들이 오랜 세월을 이어오며 효도와 우애로 세상에 행세하고 농사와 독서로서 그 분수를 편안히 지켜 전형(典型)이 본래부터 있었음을 족히 볼 수 있으니 어질고 착한 증험이 여기 있지 않는가. 진실로 실상(實狀)에 지극하면 연릉(延陵)의 10자비문도 영세불멸(永世不滅)하니 그로서 만족하다. 어찌 또 많은 말을 필요로 하겠는가. 명(銘)을 지어 이르노니 혁혁한 그 세덕(世德)은 상세(上世)로 족히 증명되도다. 대인(大人)은 형통하여 후손에게 터전을 열었도다. 산 이름 와룡이라 하여 여기서 성명(性命)을 보전하였다. 남기신 업적 어찌 적으랴! 공론(公論)에 의하여 명(銘)을 지었도다. 비석에 새긴 문자는 영원히 묘역을 보호하며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을 복되게 영세에 무궁하리라!
기유 1909 중추 정축일
옥산 장승택 근찬, 창령 조병선 근서
훗날 읽기 쉬운 현대문으로 번역 개비하다.
기축 2009년 9월 길일
문화류씨충경공파성곡공대구문회(文化柳氏忠景公派醒谷公大邱門會) 근수(謹竪)
방천리 문화류씨세천지
방천리 망향정과 망향비
망향정
여호재 전경
문화류씨충경공파 성곡공 대구(여호)종회
인곡류인열공적비
여호재기적비
여호재 중건기
가헌선생문화류공현창비
방천리 입향조 류희상의 묘에서 바라본 전경
사진 중앙 멀리 아주 흐릿하게 보이는 산이 가야산이다
입향조 묘소에서 바라본 와룡산 용머리와 대구환경자원사업소
묘소 아래에 여호재가 보인다
여호재
입향조 처사문화류공휘희상지묘
입향조의 아들인 통훈대부 군자감정 문화류공휘전지묘
입향조 옛 비(좌), 입향조 신 비(우)
방천리 문화류씨 세천지
첫댓글 문화류씨 충경공파 성곡공 대구종회 회장 류성열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재실 내부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네...
회장님^^
베풀어 주신 호의 대단히 감사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송은석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