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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 '누구와 동행하는가?'
師問 僧 從什麽處來 云 南方來 師云 基什麽人爲伴 云 水牯牛好箇 師云 師僧因什麽與畜生爲 伴云 不異故 師云 好箇畜生云 爭肯 師云 不肯且從 還我伴來
조주선사가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남방(南方)에서 왔습니다."
"누구하고 짝을 했느냐?"
"물소(水牯牛)하고 짝을 했습니다."
"훌륭한 스님이 무엇 때문에 축생하고 짝을 하는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不異故)."
"좋은 짐승이로구나."
"어찌 긍정할 수 있습니까(爭肯)?"
"긍정치 않는 건 그렇다치고 나에게 그 짝을 돌려다오."
이 선문답도 참 재미있는 화두이다. 오늘도 조주선사는 조주원을 찾아온 한 스님과 대면하고 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남쪽에서 왔다고 한다. 조주가 다시 묻는다. "누구하고 짝을 했느냐?" 먼 길을 오는데 동행한 단짝, 도반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실제로 어느 누구와 함께 왔는지는 모를 노릇이다.
"수고우(水牯牛)하고 짝을 했습니다."
수고우(水牯牛)는 중국에 사는 물소인데, 선(禪)에서는 우리 마음을 물소에 많이 비유한다. 만약 제대로 안다면 이 스님은 오직 마음과 짝이 되어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주는 슬쩍 이 스님을 건드려 본다. "훌륭하신 스님이 어째서 축생하고 짝을 하는가?"
실제로 물소는 짐승이니 왜 축생하고 같이 동행해 왔느냐고 물었는데,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조금 애매하고, 아리송하게 대답한다. 무엇과 다르지 않다는 말인가. 제대로 깨쳤다면 축생도 불성이 있어 본래 부처이니 우리와 한 몸이요, 또한 물소가 마음이요, 마음이 물소임을 의심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딘가 구린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듯하다.
조주는 무심한 듯 "좋은 짐승이로구나." 하고 응답한다. 만약에 수고우를 모양(色)으로서의 물소로 본다면, '물소란 참 좋은 짐승이로다' 라고 다시 그 스님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자성(마음)의 근원을 밝혔으면 좋은 축생과 짝이 된 네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 보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저 고향일 뿐입니다.' 나라면 이렇게 그냥 마무리를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스님은 어쩐 일인지, "어째서 긍정합니까(爭肯)?" 하고 지금까지의 대화 과정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리는 소리를 한다. '큰스님께서 어째서 제 말을 긍정하시는 겁니까?' 여기서 이 스님의 본색이 드러난다.
"긍정치 않는 것은 그렇다치고 나에게 그 도반이나 돌려다오."
처음에 속은 것을 생각하면 뺨이라도 세차게 때리면서 고함을 지를만도 한데, 조주는 그래도 점잖게 침(針) 한대를 가한다. '긍정한다, 긍정하지 않는단 소리는 집어치우고 내가 빌려준 도반(道伴)이나 돌려줘!' 끝마무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잘 나가다가 지금은 없어진 삼천포로 빠진 격이다. 알았으면 이것을 그냥 드러내면 되는데, '어째서 긍정합니까?' 라니 이런 순 엉터리 수행자가 어디에 있을까? '도반(道伴)'이란 함께 도를 닦는 친구, 벗을 말하는데, 조주는 또 그 스님에게 빌려준 게 뭐가 있기에 도반을 돌려달라고 하는가?
내가 수고우는 종종 마음에 비유된다고 했는데, 이 말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정답을 바로 가르쳐만 드리면 너무 재미가 없다. 한번 이 선문답의 전후 문맥을 잘 짚어보기 바란다. 선사들이 항상 알음알이(知識)를 버리라고 강조하는데, 이 스님은 어디선가 주워들은 수고우 이야기를 가지고 조주선사를 능멸한 것이다. 이렇게 강설하는 것도 깨달아가는 과정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지 직접 알려드릴 수는 없다.
선문답 몇 개 정답(정답도 없지만)을 알았다 한들 깨달음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그냥 의심나는 것은 모르더라도 전혀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오직 마음으로만 반복해서 읽어 보라. 그래야 마음에 차츰 차츰 금이 가서 조그만 구멍 하나가 드러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482. '승당 안의 조사'
師問 僧 堂中還有祖師 也無 云 有 師云 喚來與老僧洗脚
조주선사가 한 스님에게 물었다.
"승당 안에 조사가 있느냐?"
"있습니다."
"불러 와서 내 발이나 씻게 하여라."
조주는 운문처럼 매일 매일 좋은 날이 아니라 매일 매일 바쁜 날이다. 물론 조주도 좋은 날이 아닐 리야 없겠지만 보이는 모든 중생들마다 눈을 뜨게 해주려고 불철주야로 노력하다 보니 조용히 열반적멸의 맛을 음미하기가 쉽지 않은 붓다이다. 스승인 남전선사가 입적하자 3년 상을 치르고선 환갑이 지난 나이에 “7살 먹은 어린애라도 나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배울 것이요, 백 살의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하면 가르칠 것이다”는 각오를 피력하고 천하를 20년 동안이나 고생하며 행각한 조주선사이다.
오늘도 한 스님을 대하여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여기 법당 안에 조사가 있느냐?"
너와 조주 나, 그리고 많은 수행자들이 사는 이 절 안에 달마대사와 같은 선(禪)의 종지(宗旨)를 펼치는 스승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스님은 당장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이 스님은 누구를 조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기서 조사라고 할 만한 사람은 바로 질문을 하는 조주선사 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 있게 바로 '있다'고 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머리로 한참 궁리하지 않았을까.
조주인들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다. 아마도 그 스님은 '저 대견하지요?' 하는 표정으로 조주를 바라봤을 것이다. 그런데 조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불러 와서 노승의 발이나 씻게 하여라." 라니, 그 스님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조주는 일격에 적진을 무찔렀다. 선(禪)에서는 번뇌와 허망한 생각(煩惱妄想), 가려 취하고 분별하는 마음과 싸우는 것을 전쟁에 비유한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주는 것은 헛된 의식, 생각과의 전쟁에 불을 붙인다는 뜻이다.
조주의 위 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를 불러서 내 발이나 씻게 하라." 이 법당 안에 조사라고 할 사람은 조주 밖에 없다고 확신했는데, 다른 누구를 불러 조주의 발을 씻긴단 말인가. 이건 속된 말로 골을 때려서 한번 팍 돌아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때 갑자기 머리가 하얀 백지 상태가 되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되면 퍼뜩 눈을 뜨기에 가장 적절하다. 조주도 그것을 노려 그 스님의 마음을 쇠망치로 쾅 내려쳤다.
그 뒤의 이야기가 없는 게 조금 아쉽다. 하지만 조주는 그 스님만 내려친 게 아니다. 바로 여러분의 마음을 뾰족한 송곳으로 콱 찔러버렸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조주는 누구를 불러서 자기 발을 씻게 하라고 말한 것인가? 바로 여러분이다. 여러분의 마음이다. 알아들으시겠는가? 아직 도대체 무슨 소린지, 에이! 순 엉터리 야바위꾼! 하고 나를 욕한다면 순순히 지옥으로 웃으며 들어가겠다. 마음으로 의심해 보라.
483. '제 1좌는 계향, 정향'
堂中 有二僧 相推不肯作 第一座主 事白和尙 師云 總敎他作 第二座 云 敎誰作 第一座 師云 裝香著 云 裝香了也 師云 戒香定香
승당의 두 스님이 서로 미루며 제 1좌(一座)를 맡으려 하지 않자, 소임자가 조주선사에게 알리니 선사가 말했다.
"두 사람을 모두 제 2좌(二座)로 삼아라."
"제1좌는 누가 합니까?"
"향을 올려라."
"향을 올렸습니다."
"계향, 정향(戒香 定香)....."
오늘은 아마도 조주선사가 주석하는 관음원에서 동, 서쪽 2 선방(禪房)의 양 수좌(首座)를 지명하는 날인 것 같다. 절에서 참선하는 방을 동, 서로 나누어 세우고, 각 방을 감독하는 우두머리 스님(우리나라에선 보통 맏상좌라고 하는 것 같은데 맡은 역할은 다를 것이다)을 절 안의 모든 스님과 함께 의논하여 큰스님이 뽑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일 첫째(第一座), 둘째 수좌(第二座)로 서열을 매긴다.
그런데 두 명의 명망있는 스님을 뽑아서 그 중 한 사람에게 제 1좌를 맡기려 하는데, 두 분이 서로 양보하면서 1좌를 맡을 수 없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조주가 결정을 내리기를, "두 사람을 모두 제2좌(二座)로 삼아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사회를 맡은 스님이 "그러면 제1좌는 누가 합니까?" 물으니, 조주는 법당에 향을 피우라고 말한다. 스님이 향을 다 올렸다고 하니까, 조주는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곧 오분향(五分香) 예불을 한다. 제 1좌는 이것이다 라는 듯이..
그렇다. 마음 공부하는 사람에게 첫째 자리는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이지, 속세든 탈세속의 지위, 명예, 재물 등은 모두 둘째 자리 아래로 내려 보내야 한다. 조주는 우리의 자성(自性)을 제 1좌로 세우고선 이 2명의 유능한 스님을 실질적인 절의 제 1좌로 임명하여 매우 지혜롭게 처신한 것이다. 조주가 마지막에 읊은 오분향(五分香) 예불은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이라고도 하며, 새벽과 저녁에 자신의 법신불(法身佛)에게 예배를 할 때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르고 오분향(五分香)을 염송한다.
참고적으로, 오분향에 대한 보충설명을 위해 조금 길지만 글을 빌려 왔다. 먼저, 오분향(五分香)이란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다. 이 오분향 예배는 중국선종의 제6대 조사인 혜능대사가 대중들의 마음에 과거의 모든 허물을 참회하도록 한 뒤, 꿇어앉은 대중들에게 향을 사름에 5가지 의미를 마음에 새기도록 했다고 한다.
“첫째는 계향이니, 곧 자기 마음 가운데 잘못이 없고, 악이 없으며, 질투가 없고, 탐욕과 성냄이 없으며, 겁해(劫害)가 없는 것을 계향이라 한다. 둘째는 정향이니, 즉 모든 좋고 나쁜 경계를 보더라도 스스로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을 정향이라 한다. 셋째는 혜향이니, 즉 스스로의 마음이 걸림이 없이 항상 지혜로써 자기의 성품을 관조하여 모든 악을 짓지 않으며, 비록 많은 선을 닦더라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며 위를 공경하고 아래를 염려하며, 외롭고 가난한 이를 불쌍하게 여김을 혜향이라 한다.
넷째는 해탈향이니, 즉 스스로의 마음에 반연(攀緣)이 없어서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않으며, 자유자재하여 걸림 없음을 해탈향이라 한다. 다섯째는 해탈지견향이니, 즉 스스로의 마음이 이미 걸림이 없으나 공(空)에 빠져서 고요함만 지키면 옳지 않으니 모름지기 널리 배우고 많이 듣되 스스로 본심을 알고 부처님의 이치를 통달하며, 빛을 화(和)하여 사물을 접(接)하되 나와 남의 구별이 없으면 바로 깨달음의 진여 성품에 그대로 이르는 것을 해탈지견향이라 한다.
선지식이여! 이 향은 각기 스스로의 마음 안에서 피울 것이요, 밖에서 달리 찾을 것이 아니니라.” (육조단경 참회품)
484. '동관을 지나서 오라'
師問僧 離什麽處 云 離京中 師云 你還從潼關過麽 云 不歷 師云 今日 捉得者販私鹽漢
조주선사가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떠나 왔느냐?"
"서울(京中)에서 왔습니다."
"동관(潼關)을 지나왔느냐?"
"지나오지 않았습니다(不歷)."
"오늘 이 소금 암거래하는 놈을 붙잡았다(今日捉得者販私鹽漢)."
오늘은 또 한 스님이 어디서 왔는가? 내가 어디서 왔는가? 라고 물으면 떠나온 출처(出處)를 대면 되겠지만, 조주선사가 이렇게 물을 때는 출처를 대면 안될 것이다. 괜히 처음부터 헷갈리게 만드는가. 이 스님은 "서울(京中)에서 왔습니다." 라고 한다. 이때가 당나라 시절이니 수도인 장안(지금의 시안)을 떠나 온 것이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까 조주는 "동관(潼關)을 지나왔느냐?"고 그 스님에게 다시 묻는다. 동관(潼關)은 중국 중서부 지역에 있는 산시성(陝西省, 섬서성) 웨이난(渭南)에 있는 현(縣)인데, 장안에서 조주로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지나야 할 지역인 것 같다. 현재는 시안에서 동관까지 고속도로가 나 있는데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스님은 "(동관을) 지나오지 않았다(不歷)."고 대답한다.
반드시 거쳐야 할 동관을 지나오지 않았다 하니, 조주는 "이 소금을 암거래 하는 놈아!" 하고 그 스님을 꾸짖었다. 이 말은 겉보기로는 동관을 거치지 않고 조주에 왔다 하니 도둑질한 놈이 검문소를 피해 도망쳐온 것이 아니냐고 나무라는 뜻으로 보인다만, 어찌 수행자를 정말로 도둑으로 몰겠는가. 조주가 바로 마음을 가리킨 것을 그 스님은 알아듣지 못하니 충격을 준 것이다. 그러면 몇 마디 되지 않는 이 내용에서 어느 것이 조주가 직접 마음을 가리킨 부분인가?
핵심적인 내용은 "동관(潼關)을 지나왔느냐?"는 조주의 물음이다. 왜 이 말이 마음을 직접 가리키는 핵심 부분이라고 할까? 이것만 알아채면 1700 화두 다 풀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에 잡아채라. '산길엔 풀이 많이 돋아나 있다만 이곳으로 오는 길에는 풀 한포기 없다.'
485. '죽은 사람, 산 사람'
因送亡僧 師云 只是一箇死人 得無量人送 又云 許多死漢 送一箇生漢時 有僧問 是心生是身生 師云 身心俱不生 云 者箇作麽生 師云 死漢
한번은 죽은 스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조주선사가 말했다.
"이 죽은 사람 하나를 수많은 사람들이 보내는구나." 하고는, 다시 "수많은 죽은 자들이 산 사람 하나를 보내는구나(許多死漢 送一個生漢)." 하였다.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마음이 살았습니까? 몸이 살았습니까(是心生 是身生)?"
"몸과 마음 모두 다 살아 있지 않다(身心俱不生)."
"이것은 어떻습니까(者個作麽生)?"
"죽은 놈이다(死漢)."
조주 관음원의 스님 한 분이 천화(遷化)한 모양이다. 삶이 죽음이요, 죽음이 삶이라서 그런지 선가(禪家)에서는 스승이 죽더라도 그렇게 슬퍼하지 않는다. 육조혜능도 입적할 즈음 제자들이 슬피 우니까 '내가 갈 곳을 모르는 줄 아느냐?' 하고 꾸짖으며 의연한 어린 사미 신회를 칭찬한다. 일반 스님이라면 다시 천상에 태어나도록 빌어주고 장례 의식 동안에도 선문답을 벌이곤 한다. 결국 깨달음 하나를 위해 평생 동안 도를 닦았으니 선(禪) 밖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오늘은 제(祭)를 올리면서 조주가 스님들을 점검해 보려고 한다.
"죽은 한 사람을 무수한 사람들이 보내는구나." 하고는 다시 "수많은 죽은 자들이 한 명의 산 사람을 보내는구나!" 하고 뒤집어서 말했다. 그러자, 조주의 이 말을 들은 스님 가운데 한 명이 질문을 한다. 수많은 죽은 사람들, 즉 우리 대중스님들이 한 명의 산 사람을 전송한다고 말씀하니, "(이 한 명의 산 사람은) 마음이 살았습니까, 몸이 살았습니까?" 분명히 스님 한 분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는데 조주는 산 사람을 보낸다고 하니 그러면 그 산 것은 사람의 오온(五蘊) 중에서 몸(色, 身)인지, 아니면 수상행식(受想行識)의 마음인지, 그 어느 것인지 물어보고 있다.
이 스님은 이제 그 스님이 살았다고 하니까 본래 모든 법은 공(空)하여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불생불멸임을 잊어버리고 산 것(生)에 대한 집착에 휩싸여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조주는 그 스님의 혼미함을 혹시라도 깨뜨려 보기 위해 더욱 더 충격을 가해 본다. "몸과 마음 모두 다 살아 있지 않다." 몸도 마음도 살아 있지 않다니 둘 다 죽었다는 말 아닌가. 아니 산 사람을 전송한다고 해서 몸과 마음 중에서 무엇이 산 것인지 물었는데 또 다시 몸과 마음 모두 죽었다고 하니 이렇게도 볼 수 없고 저렇게도 볼 수 없으니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스님은 "이것은 어떻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여기서 이것(者個)은 무엇이기에 이것은 어떠냐고 물었는가? 대화 중에 이것이라고 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는데 갑자기 이것을 물으니 조금 수상하다. 원래 이것은 ‘시십마(是什麽)’의 '이것(是)'처럼 우리 마음, 자성을 말하는데 그 스님은 한쪽 눈을 뜬 수행자인가.
조주는 곧 바로 "죽은 놈이다."고 대답했는데, 일반적으로 보면 조주는 그 스님뿐만 아니라, 말귀를 못 알아듣는 모든 대중들을 질타하고 있다. 만약 돌아가신 그 스님도 자성(自性)을 보지 못했다면 역시 죽은 현상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면으로서도 죽은 사람, 즉 송장일 뿐이다. 다시 6도 윤회에 빠져들어 생사를 계속 오갈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보면 마음도 없는 것이다. 안팎이고, 중간이고 아무리 찾아봐도 헛고생이다. 결국 산 자, 죽은 자를 구별할 수 없다. 산 것(有)도 아니고 죽은 것(無)도 아니라는 말씀이다. 만일 이 스님이 실눈을 뜬 자라면 조주는 또 그렇게 본래 근원을 밝혀준 것이다만 이 대화상으로는 이 스님이 확실히 깨달았다는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본문을 살펴보면, 조주는 왜 처음에는 산 사람을 보낸다고 했다가 뒤에는 몸도 마음도 함께 죽었다. 바로 송장이라고 말했는가? 분명히 말씀이 오락가락하고, 앞과 뒤의 말에 서로 모순이 있다. 지혜가 얕은 대중들은 삶과 죽음(生死)가 있다고 집착하거나(이런 견해를 상견常見이라고 함), 또는 생사가 없다고 집착한다(이는 단견斷見). 그러나 조주선사 같이 중도(中道)의 이치를 깨달은 분들은 생사가 있고 없음을 초월한다. 삶과 죽음이 있다고 보지도 않고, 또한 없다고도 보지 않아 긍정(常), 부정(斷)의 상대적인 양변(兩邊)을 떠났다.
그래서 조주는 그 스님이 살았느니 죽었느니 하는 한 쪽에 치우치는 대중들의 생각을 끊어주기 위해서 앞에서는 살았다고 했다가 뒤에는 다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경전의 말씀으로 해석하면, 생사(生死)도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결국 삶과 죽음이란 것도 본질은 허공처럼 텅 비어서(空) 원래 생겨나지도 않으니 죽지도 않는다는 말씀이다. 아마도 이 공(空)의 이치를 확실히 체득해야 제대로 이해가 될 것이다.
1,700개의 화두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송장을 끌고 다니는 이 놈이 누구인가(拖尸者誰, 타시자수)?' 라는 화두가 있다. 눈을 뜨지 못하고 허깨비 같은 몸과 번뇌망상의 마음을 자기라고 여긴다면 선가(禪家)에서는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라고 부른다. 조주는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몸과 마음 둘 다 살아 있기도 하고 죽었기도 하고, 또는 둘 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는 말의 뜻도 모르면 산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고 경책하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죽은 자들이 한 명의 산 사람을 보낸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 그 '한 명의 산 사람'은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니 영원히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이전에 양산 통도사의 큰스님이었던 경봉선사도 이 '타시자수(拖尸者誰)'를 소재로 법을 설하면서 게송을 읊은 게 있는데, 한번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해보라. '가을물 하늘까지 맞닿아 푸른데, 흰 갈대꽃에 밝은 달이 오가니 온통 비로자나요 화장세계로다.'
486. '그대가 고양이라 했다'
有僧見猫兒問 云 某甲 喚作猫兒未審 和尙 喚作什麽 師云 是你喚作猫兒
한 스님이 고양이를 보고 물었다.
"저는 고양이라고 부릅니다만 큰스님께서는 뭐라고 부르십니까?"
"고양이라고 부르는 건 그대다(是你喚作貓兒)."
이 문답은 짧으면서도 또 다른 선(禪)의 맛을 담고 있다. 이 대화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사실 선사의 단 한 마디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해하기 어렵다만 우주의 근원(根源), 그 자체란 말이다.
수많은 대중을 모아 놓고 불법을 설하는 자리에서 석가는 아무 말 없이 다만 꽃 한 송이를 들은 적이 있고(염화시중), 많은 선사들이 설법하는 자리에 올라 주장자(柱杖子)만 한번 탁 때리고 가르침을 끝냈다고 내려오는 경우도 많다. 8만권이나 되는 대장경은 '마음' 한 마디에 모두 담겨진다고 하니 무슨 여러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화두도 하나만 확실하게 체득하면 수만 개의 화두를 대더라도 모두 알게 되어 있다. 물론 조주록의 선문답 중에서 하나라도 확실히 통하면 달리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여기 강설하는 이 문답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깨치면 소위 고향의 봄을 찾은 것이다. 자기의 본 고향에 이르면 할 일이 끝난다.
오늘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선문답의 소재이다. 참으로 우리 주변에는 무궁무진한 선(禪)의 이야깃거리가 있다. 이 우주가 바로 선(禪)이다. 한 스님이 고양이 새끼를 보고, "큰스님, 저는 이것을 고양이라고 부릅니다. 선사께서는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하고 조주에게 당돌하게 법(法)으로 도전을 해 온다. 이것이 법거량(法擧揚)으로서 태권도 대회에서 선수끼리 대련하듯이 서로 법(法)으로 겨루는 것이다.
이 스님은 조금 반칙을 써서 먼저 자물쇠를 채워 놓고 시작을 했다. '이것은 고양이입니다' 란 말과 '저는 이것을 고양이라고 부릅니다' 라는 말은 서로 같은 뜻으로 볼 수 없다는 말씀이다. 괜히 말장난할 필요는 없지만, 앞쪽은 단정적이고, 뒷쪽은 여운을 남긴 것으로 조주의 응수에 따라 자유자재하게 대처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여기서 만약 조주가 '나도 고양이라고 부르겠다' 라고 하면 '어찌 큰스님께서 현상과 본질도 구분하지 못합니까? 하고 구박할 것이고, '나는 고양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하거나 다른 것을 댄다면, '어찌 큰스님이 되어 가지고 고양이도 모르십니까?' 하고 바보 취급할게 뻔하다.
그러나 조주가 누구인가. 이같이 섣부른 도전에 그냥 나가떨어질 조주가 아니다. 그 스님의 입을 원천 봉쇄해 버리는 한 마디가 나온다. "고양이라고 부르는 건 그대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리는 응답이다. 그 스님은 조주선사의 응수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말해야지 하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대가 고양이라고 불렀으니 나도 그렇게 부른들 어찌 하겠는가? 라는 식으로 대답을 해오니 입이 다물어졌다. 여러분은 조주의 말씀에 어떻게 달리 응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 조주의 뜻은 또한 여기에도 있지 않다. 그 스님이 이렇게 물어오니 다만 반야의 지혜로서 응수한 것이지 그 숨은 뜻은 달리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그 뜻은 어디에 있을까? 현상에 집착하는 그 스님을 호되게 혼내 줄 한 마디는 무엇일까? '그대는 고양이 얼굴을 본 적이 있느냐?'
487. '복 받는 대왕'
因鎭州大王來 訪師侍者 來報師 云 大王來 師云 大王萬福 侍者 云 未在方到三門下 師云 又道大王來也
하루는 진주(鎭州)의 대왕(大王)이 조주선사를 뵈러 오자, 시자가 와서 "대왕이 오십니다." 하고 알리니 조주선사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만복하소서(大王萬福)!"
"아직 오시지 않았고, 방금 절 문(三門) 아래 도착했습니다."
"대왕이 또 오시냐?"
오늘은 중국의 진주(鎭州)에 사는 왕이 조주선사를 방문하려고 오는 길이다. 시중드는 스님이 미리 와서 알리기를, "대왕이 지금 오고 있습니다." 라 말하니, 조주가 미리 말했다. "대왕만복(大王萬福)", 대왕이여, 만복을 받으소서! 이 말이다. 그러자, 시자가 아주 당황하여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직 도착하신 게 아니고, 방금 저 삼문(三門) 아래 도착했는데요."
왕이 이제 절 앞에 도착하여 아직 여기까지 오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벌써 대왕만복이라고 인사드릴 때가 아니라는 시자의 조언이다. 그러자 조주는 다시 시자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말씀을 한다. "대왕이 또 오시느냐?"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제 절 앞까지 와서 조금 더 있어야 이곳에 도착할 거라고 말했는데, '또 온다고 하느냐?' 라니 시자의 혼을 쏙 빼어 버린다.
하하! 조주는 왜 이렇게 말하는가. 왕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이렇게 말했을 리는 없다. 뭔가 속셈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그것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 속속들이 말하기는 어렵다만 조주는 왕이 절을 찾아오는 때를 이용하여 시자를 점검해 보는 기회로 삼고 있다. 세속의 왕만 왕이 아니다. 마음의 왕을 여러분도 지금 찾고 있다. 시자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꼭 찾으라. 너무 쉽지 않은가?
488. '변소에서 말할 수 없는 불법'
因上東司召文遠 文遠應諾 師云 東司上不可與你說佛法也
조주선사가 변소(東司) 위에서 사미 문원(文遠)을 부르자 문원이 "예" 하고 대답하니 선사가 말했다.
"변소에서는 너에게 불법을 말할 수 없다."
조주는 지금 용변을 보려고 뒷간에 가 있다. 우리나라 절에서는 해우소(解憂所), 근심을 푸는 곳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동사(東司)라고 하는 모양이다. 거기서 어린 사미인 문원(文遠)을 부른다. "문원아!" 하고 외치니, 문원스님이 "예" 하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미 문원은 조주선사가 매우 귀여워한 스님인 것 같은데, 원래 전생에 조주와 함께 마음 공부하다가 일찍 병으로 죽어, 다시 태어나서는 조주선사의 제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분명히 나중에 훌륭하게 도를 깨쳐 큰 일가를 이룬 것 같은데 다른 기록이 없어 매우 아쉽다.
사미 문원이 대답을 하자 변소에서 또 조주선사의 음성이 들려온다. "변소에서는 너에게 불법을 가르칠 수가 없구나." 조주도 이렇게 싱겁게 보일 때가 있다. 화장실에서 어린 사미를 희롱하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조주의 가르침이 없었다고 하면 큰일난다. 왜 그러한가? 이것을 알아채면 옛 속된 말처럼 이제 그만 하산해도 되겠다고 하겠다. 내가 지금까지 조주록을 강설해온 것을 더듬어보면 조주는 아직 헛된 말이라곤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 정말로 철저한 선승(禪僧)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장면에서 조주는 문원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가? 숙제로 남긴다. 어느 때라도 알게 되어 댓글로 남겨주시면 조주의 허물을 알아차릴 것이고, 저와 진정 동행하는 도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대합니다.
489. '불전의 공덕'
因在殿上過乃喚侍者 侍者應諾 師云 好一殿功德 侍者無對
조주선사가 한번은 불전(佛殿)을 지나다가 시자를 부르니 시자가 "예" 하자 선사는 "훌륭한 불전의 공덕이다(一殿功德)." 했는데 시자는 대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어떤 스님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옆에서 시중드는 시자(侍者)를 또 한번 점검해 보고 있다. 사미든, 시자든, 찾아오는 수행자든, 10년 같이 사는 스님이든, 조주는 쉴 틈이 없다. 항상 법(法)과 함께 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을 하든, 침묵을 지키든, 움직이든, 멈춰 있든 법을 떠나 있지 않다. 그러니 역대 수많은 선사들 중에서 가장 많은 선문답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물론 기록으로 남지 못하고 도중에 소실된 것도 더 많을 테지만, 정말로 선(禪)의 역사상 가장 큰 별이다.
조주가 오늘은 법당을 지나오다가 불상을 보았던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시자를 부른다. "시자야!" "예" 위 문답의 사미 문원처럼 똑 같이 대답을 한다. 시자가 응답하자마자 말씀한다. "훌륭한 불전의 공덕이다(一殿功德)." '일전공덕(一殿功德)'이라, 전(殿)은 절을 말함이니 한 절의 공덕이라 하면 뜻이 통하지 않고 절에는 부처님이 계시니 부처의 공덕이라 해야 말이 되겠다. 그런데 시자가 "예" 하고 대답하자 '부처님의 공덕'이라고 말씀했으니 누구에게 한 말인가?
시자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아 결국 아무 대답도 못했다. 조주의 뜻은 "예" 라고 대답한 그 사람을 파헤쳐보란 말이다. 여기에 그 누가 있는가. 진흙으로 혹은 청동에 금박을 입힌 불상을 놓고 공덕 이야기를 할 조주인가? '예!' 라고 응답하는 그 물건의 정체만 밝히면 마음의 근원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490. '주석을 잘못 내리다'
師因到臨濟方始洗脚 臨濟便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正値洗脚 臨濟乃近前側聆 師云 若會便會 若不會更莫啗啄作 臨濟拂袖去 師云 三十年行脚 今日爲人錯下注脚
조주선사가 임제원에 이르러 막 발을 씻는데 임제(臨濟)선사가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마침 발을 씻고 있었소."
임제선사가 가까이 와서 귀를 기울여 듣는 시늉을 하자 조주선사가 말했다.
"알았으면 아는 것이요, 몰랐거든 다시 입을 놀리지 않는 것이 어떻겠소?"
임제가 소매를 떨치고 가버리자 조주가 말했다.
"30년 동안 행각하다가 오늘은 남에게 주석을 잘못 내렸구나."
이 선문답은 과거 행각(行脚)시절 중에 조주, 임제선사간의 법거량 이야기이다. 조주는 관음원에 정착하는 시기인 80살이 될 때까지 20여 년간 중국 천하를 돌아다니며 많은 조사, 선사들과 법담(法談)을 나누었다. 오늘은 중국 5대 가문의 하나인 임제종(臨濟宗)의 문을 활짝 연 임제선사가 사는 임제원을 방문한 모양이다. 먼 길을 걸어왔으니 약수물 가에 앉아 발을 씻고 있는데, 임제선사가 먼저 도전을 해 온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임제선사도 아마 조주선사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말 하지도 않고, 선문답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즉 달마가 서방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뜻에 대하여 물어 본다. "마침 발을 씻고 있었소." 두 거장(巨匠)의 결투라고 보기에는 너무 싱겁게 칼날을 쓴다. 임제가 가까이 가서 귀를 기울여 듣는 시늉을 했다. 임제는 달마가 온 뜻을 찾으려는 듯이 그냥 약수물을 뿌리는 조주의 발에다 귀를 기울인다. 이것은 임제로선 다시 두 번째 칼을 뽑아 본 것이다. 발 씻는 도(道) 밖에 없습니까?
그러자 조주는 툭 내뱉는다. "알았으면 됐고, 몰랐거든 다시 입을 놀리지 않는 것이 어떻겠소?" 한문으로 '若會便會 若不會 更莫啖啄作麽' 라고 써져 있는데, 풀어보면, 약회편회(若會便會)는 만약 이해하면 이해하는 것이고, 약불회(若不會), 만약 이해하지 못하면, 갱막담탁자마(更莫啖啄作麽), 다시 왜 씹고 쪼고 하지 말라! 어려운 한자어로 씹을 담(啖), 쫄 탁(啄), 왜, 어째서 등의 의문사인 자마(作麽, 자마로 읽음)가 있다.
이를 전체적으로 보면, '알면 됐고, 모르면 주둥이 놀리지 말라'로 줄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 그대가 조사의 뜻을 내가 발 씻는 것을 통해 알았으면 그만이지, 다른 것은 없으니 입으로 딴 소리 하지 마라!' 이 의미로 볼 수 있겠다.
그 말을 듣고 임제는 옷소매에 묻은 먼지를 툭 털고서 가버렸다고 한다. 조주의 도(道)는 이 정도이군요 하듯이 말이다. 그러자 조주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30년 동안 행각을 했는데 오늘은 남에게 주석을 잘못 달아줬구나(今日爲人錯下注脚)." 이 말은 조주가 지금까지 30년 동안 행각을 하면서 본분(本分)의 일을 잊은 적이 없는데, '알면 됐고, 모르면 주둥이 놀리지 말라'는 말은 스스로도 조금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이 말은 곧바로 마음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감정이 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만 꼭 그렇게 보아서도 안된다. '주석을 잘못 달았구나'란 말로 앞의 실수 아닌 실수를 갈무리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게 선이기 때문이다. 아는 작가끼리 대결하다 보면 서로 속일 수가 없다 보니 재미가 반감되는 경우가 많다. 깨닫고 보면 사실 깨닫기 이전하고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남이 전혀 모르는걸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대화는 사실 임제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조주선사가 임제선사를 찾아간 것은 맞는데 그 내용은 조주록과 반대로 되어 있다. 임제록에는 발을 씻는 사람이 임제이고, '조사서래의'를 물은 사람은 임제가 아닌 조주이며, 오간 대화는 다음과 같다.
‘조주선사가 행각할 때 임제선사를 찾아뵈었다. 마침 임제선사가 발을 씻고 있었는데 조주선사가 물었다.
“조사께서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마침 내가 발을 씻고 있는 중이오.”
조주선사가 앞으로 다가가서 귀 기울여 듣는 시늉을 하자 임제선사가 말했다.
“두 번째 구정물 세례를 퍼부어야겠군요.”
그러자 조주선사는 내려가 버렸다.‘
여기서는 조주록과 반대로 조주가 발을 씻고 있는 임제에게 귀를 기울여 듣는 시늉을 했는데, “두 번째 구정물 세례를 퍼부어야겠군요.” 라는 말에 조주는 선문답을 마치고 내려가 버렸다. 아는 식구끼리 대화하니 조주록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금 싱겁게 끝났다. ‘조사서래의’를 묻는 질문에 ‘내가 발을 씻고 있는 중이오’란 말이 첫 번째 구정물이었고, 두 번째 구정물 세례도 그 뜻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면 같은 식구가 될 날은 10만 8천리이다.
481. '누구와 동행하는가?'
조주선사가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남방(南方)에서 왔습니다."
"누구하고 짝을 했느냐?"
"물소(水牯牛)하고 짝을 했습니다."
"훌륭한 스님이 무엇 때문에 축생하고 짝을 하는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不異故)."
"좋은 짐승이로구나."
"어찌 긍정할 수 있습니까(爭肯)?"
"긍정치 않는 건 그렇다치고 나에게 그 짝을 돌려다오."
이 선문답도 참 재미있는 화두이다. 오늘도 조주선사는 조주원을 찾아온 한 스님과 대면하고 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남쪽에서 왔다고 한다. 조주가 다시 묻는다. "누구하고 짝을 했느냐?" 먼 길을 오는데 동행한 단짝, 도반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실제로 어느 누구와 함께 왔는지는 모를 노릇이다.
"수고우(水牯牛)하고 짝을 했습니다."
수고우(水牯牛)는 중국에 사는 물소인데, 선(禪)에서는 우리 마음을 물소에 많이 비유한다. 만약 제대로 안다면 이 스님은 오직 마음과 짝이 되어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주는 슬쩍 이 스님을 건드려 본다. "훌륭하신 스님이 어째서 축생하고 짝을 하는가?"
실제로 물소는 짐승이니 왜 축생하고 같이 동행해 왔느냐고 물었는데,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조금 애매하고, 아리송하게 대답한다. 무엇과 다르지 않다는 말인가. 제대로 깨쳤다면 축생도 불성이 있어 본래 부처이니 우리와 한 몸이요, 또한 물소가 마음이요, 마음이 물소임을 의심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딘가 구린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듯하다.
조주는 무심한 듯 "좋은 짐승이로구나." 하고 응답한다. 만약에 수고우를 모양(色)으로서의 물소로 본다면, '물소란 참 좋은 짐승이로다' 라고 다시 그 스님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자성(마음)의 근원을 밝혔으면 좋은 축생과 짝이 된 네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 보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저 고향일 뿐입니다.' 나라면 이렇게 그냥 마무리를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스님은 어쩐 일인지, "어째서 긍정합니까(爭肯)?" 하고 지금까지의 대화 과정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리는 소리를 한다. '큰스님께서 어째서 제 말을 긍정하시는 겁니까?' 여기서 이 스님의 본색이 드러난다.
"긍정치 않는 것은 그렇다치고 나에게 그 도반이나 돌려다오."
처음에 속은 것을 생각하면 뺨이라도 세차게 때리면서 고함을 지를만도 한데, 조주는 그래도 점잖게 침(針) 한대를 가한다. '긍정한다, 긍정하지 않는단 소리는 집어치우고 내가 빌려준 도반(道伴)이나 돌려줘!' 끝마무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잘 나가다가 지금은 없어진 삼천포로 빠진 격이다. 알았으면 이것을 그냥 드러내면 되는데, '어째서 긍정합니까?' 라니 이런 순 엉터리 수행자가 어디에 있을까? '도반(道伴)'이란 함께 도를 닦는 친구, 벗을 말하는데, 조주는 또 그 스님에게 빌려준 게 뭐가 있기에 도반을 돌려달라고 하는가?
내가 수고우는 종종 마음에 비유된다고 했는데, 이 말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정답을 바로 가르쳐만 드리면 너무 재미가 없다. 한번 이 선문답의 전후 문맥을 잘 짚어보기 바란다. 선사들이 항상 알음알이(知識)를 버리라고 강조하는데, 이 스님은 어디선가 주워들은 수고우 이야기를 가지고 조주선사를 능멸한 것이다. 이렇게 강설하는 것도 깨달아가는 과정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지 직접 알려드릴 수는 없다.
선문답 몇 개 정답(정답도 없지만)을 알았다 한들 깨달음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그냥 의심나는 것은 모르더라도 전혀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오직 마음으로만 반복해서 읽어 보라. 그래야 마음에 차츰 차츰 금이 가서 조그만 구멍 하나가 드러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482. '승당 안의 조사'
조주선사가 한 스님에게 물었다.
"승당 안에 조사가 있느냐?"
"있습니다."
"불러 와서 내 발이나 씻게 하여라."
조주는 운문처럼 매일 매일 좋은 날이 아니라 매일 매일 바쁜 날이다. 물론 조주도 좋은 날이 아닐 리야 없겠지만 보이는 모든 중생들마다 눈을 뜨게 해주려고 불철주야로 노력하다 보니 조용히 열반적멸의 맛을 음미하기가 쉽지 않은 붓다이다. 스승인 남전선사가 입적하자 3년 상을 치르고선 환갑이 지난 나이에 “7살 먹은 어린애라도 나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배울 것이요, 백 살의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하면 가르칠 것이다”는 각오를 피력하고 천하를 20년 동안이나 고생하며 행각한 조주선사이다.
오늘도 한 스님을 대하여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여기 법당 안에 조사가 있느냐?"
너와 조주 나, 그리고 많은 수행자들이 사는 이 절 안에 달마대사와 같은 선(禪)의 종지(宗旨)를 펼치는 스승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스님은 당장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이 스님은 누구를 조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기서 조사라고 할 만한 사람은 바로 질문을 하는 조주선사 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 있게 바로 '있다'고 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머리로 한참 궁리하지 않았을까.
조주인들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다. 아마도 그 스님은 '저 대견하지요?' 하는 표정으로 조주를 바라봤을 것이다. 그런데 조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불러 와서 노승의 발이나 씻게 하여라." 라니, 그 스님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조주는 일격에 적진을 무찔렀다. 선(禪)에서는 번뇌와 허망한 생각(煩惱妄想), 가려 취하고 분별하는 마음과 싸우는 것을 전쟁에 비유한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주는 것은 헛된 의식, 생각과의 전쟁에 불을 붙인다는 뜻이다.
조주의 위 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를 불러서 내 발이나 씻게 하라." 이 법당 안에 조사라고 할 사람은 조주 밖에 없다고 확신했는데, 다른 누구를 불러 조주의 발을 씻긴단 말인가. 이건 속된 말로 골을 때려서 한번 팍 돌아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때 갑자기 머리가 하얀 백지 상태가 되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되면 퍼뜩 눈을 뜨기에 가장 적절하다. 조주도 그것을 노려 그 스님의 마음을 쇠망치로 쾅 내려쳤다.
그 뒤의 이야기가 없는 게 조금 아쉽다. 하지만 조주는 그 스님만 내려친 게 아니다. 바로 여러분의 마음을 뾰족한 송곳으로 콱 찔러버렸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조주는 누구를 불러서 자기 발을 씻게 하라고 말한 것인가? 바로 여러분이다. 여러분의 마음이다. 알아들으시겠는가? 아직 도대체 무슨 소린지, 에이! 순 엉터리 야바위꾼! 하고 나를 욕한다면 순순히 지옥으로 웃으며 들어가겠다. 마음으로 의심해 보라.
483. '제 1좌는 계향, 정향'
승당의 두 스님이 서로 미루며 제 1좌(一座)를 맡으려 하지 않자, 소임자가 조주선사에게 알리니 선사가 말했다.
"두 사람을 모두 제 2좌(二座)로 삼아라."
"제1좌는 누가 합니까?"
"향을 올려라."
"향을 올렸습니다."
"계향, 정향(戒香 定香)....."
오늘은 아마도 조주선사가 주석하는 관음원에서 동, 서쪽 2 선방(禪房)의 양 수좌(首座)를 지명하는 날인 것 같다. 절에서 참선하는 방을 동, 서로 나누어 세우고, 각 방을 감독하는 우두머리 스님(우리나라에선 보통 맏상좌라고 하는 것 같은데 맡은 역할은 다를 것이다)을 절 안의 모든 스님과 함께 의논하여 큰스님이 뽑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일 첫째(第一座), 둘째 수좌(第二座)로 서열을 매긴다.
그런데 두 명의 명망있는 스님을 뽑아서 그 중 한 사람에게 제 1좌를 맡기려 하는데, 두 분이 서로 양보하면서 1좌를 맡을 수 없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조주가 결정을 내리기를, "두 사람을 모두 제2좌(二座)로 삼아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사회를 맡은 스님이 "그러면 제1좌는 누가 합니까?" 물으니, 조주는 법당에 향을 피우라고 말한다. 스님이 향을 다 올렸다고 하니까, 조주는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곧 오분향(五分香) 예불을 한다. 제 1좌는 이것이다 라는 듯이..
그렇다. 마음 공부하는 사람에게 첫째 자리는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이지, 속세든 탈세속의 지위, 명예, 재물 등은 모두 둘째 자리 아래로 내려 보내야 한다. 조주는 우리의 자성(自性)을 제 1좌로 세우고선 이 2명의 유능한 스님을 실질적인 절의 제 1좌로 임명하여 매우 지혜롭게 처신한 것이다. 조주가 마지막에 읊은 오분향(五分香) 예불은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이라고도 하며, 새벽과 저녁에 자신의 법신불(法身佛)에게 예배를 할 때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르고 오분향(五分香)을 염송한다.
참고적으로, 오분향에 대한 보충설명을 위해 조금 길지만 글을 빌려 왔다. 먼저, 오분향(五分香)이란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다. 이 오분향 예배는 중국선종의 제6대 조사인 혜능대사가 대중들의 마음에 과거의 모든 허물을 참회하도록 한 뒤, 꿇어앉은 대중들에게 향을 사름에 5가지 의미를 마음에 새기도록 했다고 한다.
“첫째는 계향이니, 곧 자기 마음 가운데 잘못이 없고, 악이 없으며, 질투가 없고, 탐욕과 성냄이 없으며, 겁해(劫害)가 없는 것을 계향이라 한다. 둘째는 정향이니, 즉 모든 좋고 나쁜 경계를 보더라도 스스로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을 정향이라 한다. 셋째는 혜향이니, 즉 스스로의 마음이 걸림이 없이 항상 지혜로써 자기의 성품을 관조하여 모든 악을 짓지 않으며, 비록 많은 선을 닦더라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며 위를 공경하고 아래를 염려하며, 외롭고 가난한 이를 불쌍하게 여김을 혜향이라 한다.
넷째는 해탈향이니, 즉 스스로의 마음에 반연(攀緣)이 없어서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않으며, 자유자재하여 걸림 없음을 해탈향이라 한다. 다섯째는 해탈지견향이니, 즉 스스로의 마음이 이미 걸림이 없으나 공(空)에 빠져서 고요함만 지키면 옳지 않으니 모름지기 널리 배우고 많이 듣되 스스로 본심을 알고 부처님의 이치를 통달하며, 빛을 화(和)하여 사물을 접(接)하되 나와 남의 구별이 없으면 바로 깨달음의 진여 성품에 그대로 이르는 것을 해탈지견향이라 한다.
선지식이여! 이 향은 각기 스스로의 마음 안에서 피울 것이요, 밖에서 달리 찾을 것이 아니니라.” (육조단경 참회품)
484. '동관을 지나서 오라'
조주선사가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떠나 왔느냐?"
"서울(京中)에서 왔습니다."
"동관(潼關)을 지나왔느냐?"
"지나오지 않았습니다(不歷)."
"오늘 이 소금 암거래하는 놈을 붙잡았다(今日捉得者販私鹽漢)."
오늘은 또 한 스님이 어디서 왔는가? 내가 어디서 왔는가? 라고 물으면 떠나온 출처(出處)를 대면 되겠지만, 조주선사가 이렇게 물을 때는 출처를 대면 안될 것이다. 괜히 처음부터 헷갈리게 만드는가. 이 스님은 "서울(京中)에서 왔습니다." 라고 한다. 이때가 당나라 시절이니 수도인 장안(지금의 시안)을 떠나 온 것이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까 조주는 "동관(潼關)을 지나왔느냐?"고 그 스님에게 다시 묻는다. 동관(潼關)은 중국 중서부 지역에 있는 산시성(陝西省, 섬서성) 웨이난(渭南)에 있는 현(縣)인데, 장안에서 조주로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지나야 할 지역인 것 같다. 현재는 시안에서 동관까지 고속도로가 나 있는데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스님은 "(동관을) 지나오지 않았다(不歷)."고 대답한다.
반드시 거쳐야 할 동관을 지나오지 않았다 하니, 조주는 "이 소금을 암거래 하는 놈아!" 하고 그 스님을 꾸짖었다. 이 말은 겉보기로는 동관을 거치지 않고 조주에 왔다 하니 도둑질한 놈이 검문소를 피해 도망쳐온 것이 아니냐고 나무라는 뜻으로 보인다만, 어찌 수행자를 정말로 도둑으로 몰겠는가. 조주가 바로 마음을 가리킨 것을 그 스님은 알아듣지 못하니 충격을 준 것이다. 그러면 몇 마디 되지 않는 이 내용에서 어느 것이 조주가 직접 마음을 가리킨 부분인가?
핵심적인 내용은 "동관(潼關)을 지나왔느냐?"는 조주의 물음이다. 왜 이 말이 마음을 직접 가리키는 핵심 부분이라고 할까? 이것만 알아채면 1700 화두 다 풀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에 잡아채라. '산길엔 풀이 많이 돋아나 있다만 이곳으로 오는 길에는 풀 한포기 없다.'
485. '죽은 사람, 산 사람'
한번은 죽은 스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조주선사가 말했다.
"이 죽은 사람 하나를 수많은 사람들이 보내는구나." 하고는, 다시 "수많은 죽은 자들이 산 사람 하나를 보내는구나(許多死漢 送一個生漢)." 하였다.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마음이 살았습니까? 몸이 살았습니까(是心生 是身生)?"
"몸과 마음 모두 다 살아 있지 않다(身心俱不生)."
"이것은 어떻습니까(者個作麽生)?"
"죽은 놈이다(死漢)."
조주 관음원의 스님 한 분이 천화(遷化)한 모양이다. 삶이 죽음이요, 죽음이 삶이라서 그런지 선가(禪家)에서는 스승이 죽더라도 그렇게 슬퍼하지 않는다. 육조혜능도 입적할 즈음 제자들이 슬피 우니까 '내가 갈 곳을 모르는 줄 아느냐?' 하고 꾸짖으며 의연한 어린 사미 신회를 칭찬한다. 일반 스님이라면 다시 천상에 태어나도록 빌어주고 장례 의식 동안에도 선문답을 벌이곤 한다. 결국 깨달음 하나를 위해 평생 동안 도를 닦았으니 선(禪) 밖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오늘은 제(祭)를 올리면서 조주가 스님들을 점검해 보려고 한다.
"죽은 한 사람을 무수한 사람들이 보내는구나." 하고는 다시 "수많은 죽은 자들이 한 명의 산 사람을 보내는구나!" 하고 뒤집어서 말했다. 그러자, 조주의 이 말을 들은 스님 가운데 한 명이 질문을 한다. 수많은 죽은 사람들, 즉 우리 대중스님들이 한 명의 산 사람을 전송한다고 말씀하니, "(이 한 명의 산 사람은) 마음이 살았습니까, 몸이 살았습니까?" 분명히 스님 한 분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는데 조주는 산 사람을 보낸다고 하니 그러면 그 산 것은 사람의 오온(五蘊) 중에서 몸(色, 身)인지, 아니면 수상행식(受想行識)의 마음인지, 그 어느 것인지 물어보고 있다.
이 스님은 이제 그 스님이 살았다고 하니까 본래 모든 법은 공(空)하여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불생불멸임을 잊어버리고 산 것(生)에 대한 집착에 휩싸여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조주는 그 스님의 혼미함을 혹시라도 깨뜨려 보기 위해 더욱 더 충격을 가해 본다. "몸과 마음 모두 다 살아 있지 않다." 몸도 마음도 살아 있지 않다니 둘 다 죽었다는 말 아닌가. 아니 산 사람을 전송한다고 해서 몸과 마음 중에서 무엇이 산 것인지 물었는데 또 다시 몸과 마음 모두 죽었다고 하니 이렇게도 볼 수 없고 저렇게도 볼 수 없으니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스님은 "이것은 어떻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여기서 이것(者個)은 무엇이기에 이것은 어떠냐고 물었는가? 대화 중에 이것이라고 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는데 갑자기 이것을 물으니 조금 수상하다. 원래 이것은 ‘시십마(是什麽)’의 '이것(是)'처럼 우리 마음, 자성을 말하는데 그 스님은 한쪽 눈을 뜬 수행자인가.
조주는 곧 바로 "죽은 놈이다."고 대답했는데, 일반적으로 보면 조주는 그 스님뿐만 아니라, 말귀를 못 알아듣는 모든 대중들을 질타하고 있다. 만약 돌아가신 그 스님도 자성(自性)을 보지 못했다면 역시 죽은 현상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면으로서도 죽은 사람, 즉 송장일 뿐이다. 다시 6도 윤회에 빠져들어 생사를 계속 오갈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보면 마음도 없는 것이다. 안팎이고, 중간이고 아무리 찾아봐도 헛고생이다. 결국 산 자, 죽은 자를 구별할 수 없다. 산 것(有)도 아니고 죽은 것(無)도 아니라는 말씀이다. 만일 이 스님이 실눈을 뜬 자라면 조주는 또 그렇게 본래 근원을 밝혀준 것이다만 이 대화상으로는 이 스님이 확실히 깨달았다는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본문을 살펴보면, 조주는 왜 처음에는 산 사람을 보낸다고 했다가 뒤에는 몸도 마음도 함께 죽었다. 바로 송장이라고 말했는가? 분명히 말씀이 오락가락하고, 앞과 뒤의 말에 서로 모순이 있다. 지혜가 얕은 대중들은 삶과 죽음(生死)가 있다고 집착하거나(이런 견해를 상견常見이라고 함), 또는 생사가 없다고 집착한다(이는 단견斷見). 그러나 조주선사 같이 중도(中道)의 이치를 깨달은 분들은 생사가 있고 없음을 초월한다. 삶과 죽음이 있다고 보지도 않고, 또한 없다고도 보지 않아 긍정(常), 부정(斷)의 상대적인 양변(兩邊)을 떠났다.
그래서 조주는 그 스님이 살았느니 죽었느니 하는 한 쪽에 치우치는 대중들의 생각을 끊어주기 위해서 앞에서는 살았다고 했다가 뒤에는 다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경전의 말씀으로 해석하면, 생사(生死)도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결국 삶과 죽음이란 것도 본질은 허공처럼 텅 비어서(空) 원래 생겨나지도 않으니 죽지도 않는다는 말씀이다. 아마도 이 공(空)의 이치를 확실히 체득해야 제대로 이해가 될 것이다.
1,700개의 화두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송장을 끌고 다니는 이 놈이 누구인가(拖尸者誰, 타시자수)?' 라는 화두가 있다. 눈을 뜨지 못하고 허깨비 같은 몸과 번뇌망상의 마음을 자기라고 여긴다면 선가(禪家)에서는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라고 부른다. 조주는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몸과 마음 둘 다 살아 있기도 하고 죽었기도 하고, 또는 둘 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는 말의 뜻도 모르면 산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고 경책하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죽은 자들이 한 명의 산 사람을 보낸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 그 '한 명의 산 사람'은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니 영원히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이전에 양산 통도사의 큰스님이었던 경봉선사도 이 '타시자수(拖尸者誰)'를 소재로 법을 설하면서 게송을 읊은 게 있는데, 한번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해보라. '가을물 하늘까지 맞닿아 푸른데, 흰 갈대꽃에 밝은 달이 오가니 온통 비로자나요 화장세계로다.'
486. '그대가 고양이라 했다'
한 스님이 고양이를 보고 물었다.
"저는 고양이라고 부릅니다만 큰스님께서는 뭐라고 부르십니까?"
"고양이라고 부르는 건 그대다(是你喚作貓兒)."
이 문답은 짧으면서도 또 다른 선(禪)의 맛을 담고 있다. 이 대화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사실 선사의 단 한 마디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해하기 어렵다만 우주의 근원(根源), 그 자체란 말이다.
수많은 대중을 모아 놓고 불법을 설하는 자리에서 석가는 아무 말 없이 다만 꽃 한 송이를 들은 적이 있고(염화시중), 많은 선사들이 설법하는 자리에 올라 주장자(柱杖子)만 한번 탁 때리고 가르침을 끝냈다고 내려오는 경우도 많다. 8만권이나 되는 대장경은 '마음' 한 마디에 모두 담겨진다고 하니 무슨 여러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화두도 하나만 확실하게 체득하면 수만 개의 화두를 대더라도 모두 알게 되어 있다. 물론 조주록의 선문답 중에서 하나라도 확실히 통하면 달리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여기 강설하는 이 문답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깨치면 소위 고향의 봄을 찾은 것이다. 자기의 본 고향에 이르면 할 일이 끝난다.
오늘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선문답의 소재이다. 참으로 우리 주변에는 무궁무진한 선(禪)의 이야깃거리가 있다. 이 우주가 바로 선(禪)이다. 한 스님이 고양이 새끼를 보고, "큰스님, 저는 이것을 고양이라고 부릅니다. 선사께서는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하고 조주에게 당돌하게 법(法)으로 도전을 해 온다. 이것이 법거량(法擧揚)으로서 태권도 대회에서 선수끼리 대련하듯이 서로 법(法)으로 겨루는 것이다.
이 스님은 조금 반칙을 써서 먼저 자물쇠를 채워 놓고 시작을 했다. '이것은 고양이입니다' 란 말과 '저는 이것을 고양이라고 부릅니다' 라는 말은 서로 같은 뜻으로 볼 수 없다는 말씀이다. 괜히 말장난할 필요는 없지만, 앞쪽은 단정적이고, 뒷쪽은 여운을 남긴 것으로 조주의 응수에 따라 자유자재하게 대처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여기서 만약 조주가 '나도 고양이라고 부르겠다' 라고 하면 '어찌 큰스님께서 현상과 본질도 구분하지 못합니까? 하고 구박할 것이고, '나는 고양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하거나 다른 것을 댄다면, '어찌 큰스님이 되어 가지고 고양이도 모르십니까?' 하고 바보 취급할게 뻔하다.
그러나 조주가 누구인가. 이같이 섣부른 도전에 그냥 나가떨어질 조주가 아니다. 그 스님의 입을 원천 봉쇄해 버리는 한 마디가 나온다. "고양이라고 부르는 건 그대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리는 응답이다. 그 스님은 조주선사의 응수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말해야지 하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대가 고양이라고 불렀으니 나도 그렇게 부른들 어찌 하겠는가? 라는 식으로 대답을 해오니 입이 다물어졌다. 여러분은 조주의 말씀에 어떻게 달리 응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 조주의 뜻은 또한 여기에도 있지 않다. 그 스님이 이렇게 물어오니 다만 반야의 지혜로서 응수한 것이지 그 숨은 뜻은 달리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그 뜻은 어디에 있을까? 현상에 집착하는 그 스님을 호되게 혼내 줄 한 마디는 무엇일까? '그대는 고양이 얼굴을 본 적이 있느냐?'
487. '복 받는 대왕'
하루는 진주(鎭州)의 대왕(大王)이 조주선사를 뵈러 오자, 시자가 와서 "대왕이 오십니다." 하고 알리니 조주선사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만복하소서(大王萬福)!"
"아직 오시지 않았고, 방금 절 문(三門) 아래 도착했습니다."
"대왕이 또 오시냐?"
오늘은 중국의 진주(鎭州)에 사는 왕이 조주선사를 방문하려고 오는 길이다. 시중드는 스님이 미리 와서 알리기를, "대왕이 지금 오고 있습니다." 라 말하니, 조주가 미리 말했다. "대왕만복(大王萬福)", 대왕이여, 만복을 받으소서! 이 말이다. 그러자, 시자가 아주 당황하여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직 도착하신 게 아니고, 방금 저 삼문(三門) 아래 도착했는데요."
왕이 이제 절 앞에 도착하여 아직 여기까지 오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벌써 대왕만복이라고 인사드릴 때가 아니라는 시자의 조언이다. 그러자 조주는 다시 시자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말씀을 한다. "대왕이 또 오시느냐?"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제 절 앞까지 와서 조금 더 있어야 이곳에 도착할 거라고 말했는데, '또 온다고 하느냐?' 라니 시자의 혼을 쏙 빼어 버린다.
하하! 조주는 왜 이렇게 말하는가. 왕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이렇게 말했을 리는 없다. 뭔가 속셈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그것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 속속들이 말하기는 어렵다만 조주는 왕이 절을 찾아오는 때를 이용하여 시자를 점검해 보는 기회로 삼고 있다. 세속의 왕만 왕이 아니다. 마음의 왕을 여러분도 지금 찾고 있다. 시자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꼭 찾으라. 너무 쉽지 않은가?
488. '변소에서 말할 수 없는 불법'
조주선사가 변소(東司) 위에서 사미 문원(文遠)을 부르자 문원이 "예" 하고 대답하니 선사가 말했다.
"변소에서는 너에게 불법을 말할 수 없다."
조주는 지금 용변을 보려고 뒷간에 가 있다. 우리나라 절에서는 해우소(解憂所), 근심을 푸는 곳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동사(東司)라고 하는 모양이다. 거기서 어린 사미인 문원(文遠)을 부른다. "문원아!" 하고 외치니, 문원스님이 "예" 하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미 문원은 조주선사가 매우 귀여워한 스님인 것 같은데, 원래 전생에 조주와 함께 마음 공부하다가 일찍 병으로 죽어, 다시 태어나서는 조주선사의 제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분명히 나중에 훌륭하게 도를 깨쳐 큰 일가를 이룬 것 같은데 다른 기록이 없어 매우 아쉽다.
사미 문원이 대답을 하자 변소에서 또 조주선사의 음성이 들려온다. "변소에서는 너에게 불법을 가르칠 수가 없구나." 조주도 이렇게 싱겁게 보일 때가 있다. 화장실에서 어린 사미를 희롱하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조주의 가르침이 없었다고 하면 큰일난다. 왜 그러한가? 이것을 알아채면 옛 속된 말처럼 이제 그만 하산해도 되겠다고 하겠다. 내가 지금까지 조주록을 강설해온 것을 더듬어보면 조주는 아직 헛된 말이라곤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 정말로 철저한 선승(禪僧)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장면에서 조주는 문원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가? 숙제로 남긴다. 어느 때라도 알게 되어 댓글로 남겨주시면 조주의 허물을 알아차릴 것이고, 저와 진정 동행하는 도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대합니다.
489. '불전의 공덕'
조주선사가 한번은 불전(佛殿)을 지나다가 시자를 부르니 시자가 "예" 하자 선사는 "훌륭한 불전의 공덕이다(一殿功德)." 했는데 시자는 대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어떤 스님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옆에서 시중드는 시자(侍者)를 또 한번 점검해 보고 있다. 사미든, 시자든, 찾아오는 수행자든, 10년 같이 사는 스님이든, 조주는 쉴 틈이 없다. 항상 법(法)과 함께 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을 하든, 침묵을 지키든, 움직이든, 멈춰 있든 법을 떠나 있지 않다. 그러니 역대 수많은 선사들 중에서 가장 많은 선문답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물론 기록으로 남지 못하고 도중에 소실된 것도 더 많을 테지만, 정말로 선(禪)의 역사상 가장 큰 별이다.
조주가 오늘은 법당을 지나오다가 불상을 보았던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시자를 부른다. "시자야!" "예" 위 문답의 사미 문원처럼 똑 같이 대답을 한다. 시자가 응답하자마자 말씀한다. "훌륭한 불전의 공덕이다(一殿功德)." '일전공덕(一殿功德)'이라, 전(殿)은 절을 말함이니 한 절의 공덕이라 하면 뜻이 통하지 않고 절에는 부처님이 계시니 부처의 공덕이라 해야 말이 되겠다. 그런데 시자가 "예" 하고 대답하자 '부처님의 공덕'이라고 말씀했으니 누구에게 한 말인가?
시자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아 결국 아무 대답도 못했다. 조주의 뜻은 "예" 라고 대답한 그 사람을 파헤쳐보란 말이다. 여기에 그 누가 있는가. 진흙으로 혹은 청동에 금박을 입힌 불상을 놓고 공덕 이야기를 할 조주인가? '예!' 라고 응답하는 그 물건의 정체만 밝히면 마음의 근원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490. '주석을 잘못 내리다'
조주선사가 임제원에 이르러 막 발을 씻는데 임제(臨濟)선사가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마침 발을 씻고 있었소."
임제선사가 가까이 와서 귀를 기울여 듣는 시늉을 하자 조주선사가 말했다.
"알았으면 아는 것이요, 몰랐거든 다시 입을 놀리지 않는 것이 어떻겠소?"
임제가 소매를 떨치고 가버리자 조주가 말했다.
"30년 동안 행각하다가 오늘은 남에게 주석을 잘못 내렸구나."
이 선문답은 과거 행각(行脚)시절 중에 조주, 임제선사간의 법거량 이야기이다. 조주는 관음원에 정착하는 시기인 80살이 될 때까지 20여 년간 중국 천하를 돌아다니며 많은 조사, 선사들과 법담(法談)을 나누었다. 오늘은 중국 5대 가문의 하나인 임제종(臨濟宗)의 문을 활짝 연 임제선사가 사는 임제원을 방문한 모양이다. 먼 길을 걸어왔으니 약수물 가에 앉아 발을 씻고 있는데, 임제선사가 먼저 도전을 해 온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임제선사도 아마 조주선사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말 하지도 않고, 선문답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즉 달마가 서방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뜻에 대하여 물어 본다. "마침 발을 씻고 있었소." 두 거장(巨匠)의 결투라고 보기에는 너무 싱겁게 칼날을 쓴다. 임제가 가까이 가서 귀를 기울여 듣는 시늉을 했다. 임제는 달마가 온 뜻을 찾으려는 듯이 그냥 약수물을 뿌리는 조주의 발에다 귀를 기울인다. 이것은 임제로선 다시 두 번째 칼을 뽑아 본 것이다. 발 씻는 도(道) 밖에 없습니까?
그러자 조주는 툭 내뱉는다. "알았으면 됐고, 몰랐거든 다시 입을 놀리지 않는 것이 어떻겠소?" 한문으로 '若會便會 若不會 更莫啖啄作麽' 라고 써져 있는데, 풀어보면, 약회편회(若會便會)는 만약 이해하면 이해하는 것이고, 약불회(若不會), 만약 이해하지 못하면, 갱막담탁자마(更莫啖啄作麽), 다시 왜 씹고 쪼고 하지 말라! 어려운 한자어로 씹을 담(啖), 쫄 탁(啄), 왜, 어째서 등의 의문사인 자마(作麽, 자마로 읽음)가 있다.
이를 전체적으로 보면, '알면 됐고, 모르면 주둥이 놀리지 말라'로 줄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 그대가 조사의 뜻을 내가 발 씻는 것을 통해 알았으면 그만이지, 다른 것은 없으니 입으로 딴 소리 하지 마라!' 이 의미로 볼 수 있겠다.
그 말을 듣고 임제는 옷소매에 묻은 먼지를 툭 털고서 가버렸다고 한다. 조주의 도(道)는 이 정도이군요 하듯이 말이다. 그러자 조주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30년 동안 행각을 했는데 오늘은 남에게 주석을 잘못 달아줬구나(今日爲人錯下注脚)." 이 말은 조주가 지금까지 30년 동안 행각을 하면서 본분(本分)의 일을 잊은 적이 없는데, '알면 됐고, 모르면 주둥이 놀리지 말라'는 말은 스스로도 조금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이 말은 곧바로 마음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감정이 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만 꼭 그렇게 보아서도 안된다. '주석을 잘못 달았구나'란 말로 앞의 실수 아닌 실수를 갈무리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게 선이기 때문이다. 아는 작가끼리 대결하다 보면 서로 속일 수가 없다 보니 재미가 반감되는 경우가 많다. 깨닫고 보면 사실 깨닫기 이전하고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남이 전혀 모르는걸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대화는 사실 임제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조주선사가 임제선사를 찾아간 것은 맞는데 그 내용은 조주록과 반대로 되어 있다. 임제록에는 발을 씻는 사람이 임제이고, '조사서래의'를 물은 사람은 임제가 아닌 조주이며, 오간 대화는 다음과 같다.
‘조주선사가 행각할 때 임제선사를 찾아뵈었다. 마침 임제선사가 발을 씻고 있었는데 조주선사가 물었다.
“조사께서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마침 내가 발을 씻고 있는 중이오.”
조주선사가 앞으로 다가가서 귀 기울여 듣는 시늉을 하자 임제선사가 말했다.
“두 번째 구정물 세례를 퍼부어야겠군요.”
그러자 조주선사는 내려가 버렸다.‘
여기서는 조주록과 반대로 조주가 발을 씻고 있는 임제에게 귀를 기울여 듣는 시늉을 했는데, “두 번째 구정물 세례를 퍼부어야겠군요.” 라는 말에 조주는 선문답을 마치고 내려가 버렸다. 아는 식구끼리 대화하니 조주록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금 싱겁게 끝났다. ‘조사서래의’를 묻는 질문에 ‘내가 발을 씻고 있는 중이오’란 말이 첫 번째 구정물이었고, 두 번째 구정물 세례도 그 뜻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면 같은 식구가 될 날은 10만 8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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