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각배치
절의 독특한 공간 구성
넓은 산간분지에 자리잡은 대흥사는 좀 특이한 가람 배치를 보이고 있다. 절을 가로 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당우들을 배치하였는데, 다른 절에서 보이는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당우들을 자유롭게 배치하는 독특한 공간구성이 특 징이다.
『대둔사지』에서는 이 같은 절의 공간 구성을 크게 북원(北院)과 남원(南院) 의 2구역으로 구분하였다.
현재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청운당, 대향각 등의 전각과 요사채들이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동국선원, 그리고 종무소 등의 전각과 요사채들이 또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여 배치되어 있다.
또 남원의 오른편에는 서산대사의 사우인 표충사와 그 부속건물인 비각, 조사전, 의중당, 강례제, 명의제, 그리고 최근에 증 개축한
성보박물관이 있으며, 표충사 뒤편에는 대광명전과 보련각, 그리고 요사채로 이루어진 대광명전이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대둔사의 가람 배치는 크게 남원과 북원으로 나눌 수 있으며, 남원의 구역에 위치한 표충사와 대광명전 일원을 다시 세분하면 북원과 남원, 그리고 표충사, 대광명 전의 네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중 표충사와 대광명전 일원은 후대에 조성된 별원(別院)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 로 보아, 대둔사의 옛 모습은 침계루 앞 계곡을 중심으로 남원, 북원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원구역]침계루를 지나 북원 안마당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대웅보전, 그 좌우에 명부전과 범종각,응진전이 나란히 있다.
응진전 앞 3층석탑은 이 절의 유물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 320호로 지정되어 있다.
[ 남원구역] 법당으로 천불전과 동국선원이나 용화당 등 강원과 승방 몇채가 각각 돌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천불전의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매우 경쾌하며 정면3칸 분합문전체가 아름다운 꽃창살이다. 내부에는 경주에서 실어온 옥돌 불상 천개가 빽빽 하다.
[표 충 사]절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교형식의 사당으로,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 스님의 화상을 봉안하고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병풍 등이 보관돼 있다.
[대광명전구역] 표충사 뒤편으로 300미터쯤 들어간 곳에 호젓하게 자리한 대광명전은 현재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 8칸짜리 일자집인 보현각, 요사채도 있다. 이밖에 경내 당우들에 걸려 있는 현판글씨들은 당대 명필들이 쓴 조선시대 서예의 진면 목을 보여준다. 표충사는 정조대왕, 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루는 원교이광사, 백설당 지붕밑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 가허루는 전주에서 활약하던 호남의 명필가 창암 이삼만의 글씨이다.
일주문 [一柱門]
사역으로 들어가는 첫번째문으로서 대흥사 성역(聖域)의 문지방에 해당된다.
유선여관을 지나 구림리 숲길 끝자락에 있으며, 어칸에는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이라 편액하였다.
부도전
부도전은 일주문을 막 지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나지막한 담장 안에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부도(浮屠)와 탑비(塔碑)가 모두 80여기(부도 54기와 탑비 27기 )에 이르고 있다. 부도의 배치는 일정한 간격을 두지 않고 3~4열을 이루고 있어 무질서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질서 속에서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의 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이다.
부도와 탑비의 주인공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키고 크게 빛낸 스님들로서,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풍담(楓潭)ㆍ취여(醉如)ㆍ월저(月渚)ㆍ설암(雪巖)ㆍ환성(喚惺)ㆍ호암(虎巖)ㆍ설봉(雪峯)ㆍ연담(蓮潭)ㆍ초의(草衣) 등의 대종사와, 만화(萬化)ㆍ연해(燕海)ㆍ영파(影波)ㆍ운담(雲潭)ㆍ벽담(碧潭)ㆍ완호(琓虎) 등의 대강사, 그밖에 고승대덕들의 부도이다.
부도와 비의 주인공들이 조선 중기 이후의 인물들인 만큼 부도와 비의 양식 또한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작품들처럼 세련되고 섬세함을 느낄 수는 없지만 정성을 들여 기품 있게 만들어져 있다.
특히 팔각원당형의 서산대사부도(西山大師浮屠)는 기단부와 상륜부의 독특한 장식과 옥개의 낙수면, 처마의 목조건물 모각은 이 시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수법으로 고려시대의 양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보물 제1347호로 지정된 서산대사 부도가 위치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담장 밖으로 우뚝 솟아 있는 사적비는 그 크기와 규모만큼이나 당시 대흥사의 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해탈문[解脫門]
부도밭을 지나 대흥사에 들어서면 천왕문 대신 해탈문이 나타난다.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수미산 정상에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그곳에 불이문(不二門) 즉 속계를 벗어나 법계에 들어가는 해탈문이 서 있다고 한다.
2002년에 건립된 대흥사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내부에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있으며, 현판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와 ‘해탈문(解脫門)’의 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 쓴 것이다.
외부에는 협칸 3면에 도륜(道倫) 박태석(朴泰錫)이 그린 ‘부모은중(父母恩重)’ㆍ‘염화신중(拈花神衆)’ㆍ‘점성가제도(占星家濟度)’ 등이 주제별로 장엄되어 있으며, 2002년 해탈문 건립 당시 단청과 함께 조성되었다.
대흥사 해탈문에는 특이하게 사천왕상이 없다.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는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남으로는 송지 달마산, 동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로는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
무염지(無染池)
초의선사가 조성한 무염지(無染池) '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의 연못, 실용면에서는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 는풍수에 근거하고 있으며 실제로 화재시 물공급지의 역할도 가능하다고 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대흥사의 중심법전으로 대흥사 가람 북원에 자리한다.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보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여기서 직교하여 좌측에 대향각과 우측에 백설당이 중정을 형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여 평방을 얹었다.
공포는 다포로 내삼출목(內三出目)ㆍ외이출목(外二出目)을 주간마다 2구씩 공간포를 놓았으며, 건물 안팎으로 화려한 조각솜씨를 뽐내듯 처마 아래 촘촘히 배열되어 있다. 포의 형상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외부로 뻗은 쇠서 위에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내부는 모양을 판형으로 만들어 운봉형(雲峰形)으로 단장하였다.
건물 전면은 주간 모두 2분합의 두툼한 빗살문을 달고 하부 2단을 구획하여 화려하게 수장된 안상문양과 태극문을 궁방에 치장하였다. 측면과 배면에는 중인방까지 막돌을 쌓아, 상부에 팔상도와 법당을 수호하는 사천왕도를 벽화로 장엄하고 있다.
특히 이 건물의 외부장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 건물 계단석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자머리 한 쌍이 주목을 끄는데,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귀신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전 축대 앞에는 괘불을 고정한 용두를 조각하여 불전을 수호하는 벽사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이단층의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그 내부에 반자와 운궁형 닫집을 형성한 화려한 불전으로, 대들보 사이에 용두와 칠보문양을 단장하고 있다. 대들보는 자연목을 그대로 이용한 투박한 수법이지만, 대들보 위를 넘어서 뽑아낸 충량의 용두는 불전의 신성함을 더하며 다소 과장된 장엄의 극치를 보여준다.
후불벽 앞에 가설된 수미단 상부에는 목조 삼세불을 비롯하여 육봉선사(六峯禪師)가 화주한 삼불회도가 헌괘되어 있으며, 중앙 불단 좌우로 20세기 초 대흥사 불화 조성에 참여한 명응환감(明應幻鑑)ㆍ예운상규(禮芸尙奎)와 그의 권속들이 그린 삼장탱ㆍ신중탱ㆍ칠성탱ㆍ감로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외 대웅보전에는 영단을 비롯하여 수미단 우측에 근래 조성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천수천안관음탱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 상부에 서수를 탄 동자들이 비천하는 목조각이 장엄되어 있다.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대흥사 산신각과 청운당 사이에 서 있는 탑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아래·위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만큼 큰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측된다.
대둔산 정상부근에 세워진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서남단 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응진당· 산신각(應眞堂·山神閣)
북원 일곽의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응진당ㆍ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 건립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사지에 의하면 북원 일대에 나한전이 있었고, 침계루 현판 중 ‘나한전급사리탑축장의록(羅漢殿及舍利塔築墻○義錄)’이라는 현판이 1917년 헌괘되어 있음을 살필 때 그렇게 오래전에 지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맞배건물로 2벌대의 장대석을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2익공으로 건물 전면에 1ㆍ2분합의 빗살문을 단장하고 측ㆍ배면에 막돌과 흰줄눈친 담장과 단청으로 장엄하였다.
건물은 응진당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획되고 산신각이 정면 2칸, 측면 3칸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사이 판장으로 담을 쌓고 출입에 용이하도록 쪽문을 달아 놓았다. 그 어칸에는 흑지에 백서로 양각한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으며, 그 중 응진당 편액은 명부전과 백설당의 편액을 쓴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연등천장을 가설하고 불단을 설치한 모습으로, 천장 상부에는 구름 위를 비천하는 청룡과 황룡도가 장엄되어 있다.
응진당은 목조석가삼존과 16나한ㆍ판관ㆍ사자ㆍ인왕을 권속으로 모시고, 그 후면에 1901년 금어 석옹철유(石翁喆侑) 외 5인이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과 16나한탱ㆍ 사자탱을 봉안하고 있으며, 불단 상부에는 관음과 세지의 보살패를 두고 있다. 산신각은 연등천장 상부에 황룡과 청룡도를 단청하고, 불단 위에 1901년 조성된 산신탱과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청운당(靑雲堂)
북원 일곽의 산신각 좌측에 자리한 청운당(靑雲堂)은 스님 및 재가 종무원들의 대중방으로, 현재 요사체 및 스님들 후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민도리집 맞배건물로 건물 전후에 툇마루를 가설하였다. 건물 외부는 2ㆍ3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하고 외부 단청으로 장엄하였으며, 어칸 상부에는 흑지에 백서로 양각된 ‘청운당(靑雲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내부는 감실형의 불단 위에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석가모니후불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선방으로서의 내부시설을 갖추고 있다. 청운당 일곽에는 대중들이 이용할 수 있는 세면실과 휴게실이 갖추어져 있다.
명부전(冥府殿)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는 명부전은 대웅보전의 북서쪽에 남향하고 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낮은 기단 위에 초석 없이 두리기둥을 세워서 정면 3칸, 측면 2칸을 구획하고, 상부 맞배지붕을 얹혀 세운 건물이다.
건물은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뒤 20세기 다시 건립된 것으로, 1901년 지장탱의 봉안과 함께 시왕과 명부권속들이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외부는 1ㆍ2분합의 빗살문으로 단장하고 단청으로 장엄하였으며, 공포는 주심포의 2익공 양식이다. 특히 어칸 상부에 걸려 있는 ‘명부전(冥府殿)’ 편액은 구한말 미불체의 대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로,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일 때 대흥사와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건물 내부는 5량가로 우물마루 상부에 연등천장을 수장하고, 지장보살과 무독귀왕ㆍ도명존자의 삼존을 중앙 불단에 봉안하고 있다. 그 외 좌우로 ‘ㄷ’자형의 불단을 만들어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과 판관ㆍ녹사ㆍ사자 등 여러 명부의 권속들을 정렬하게 배치하고 있으며, 지장보살 뒷면에는 1901년 금어 경선응석(慶船應釋)이 그린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건축 양식상 주심포식 맞배집으로 특별한 특징은 없으나 20세기 초의 명부전 양식의 한 예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불화로는 1901년에 조성된 지장후불탱화가 있다. 그 밖에 1906년(광무 10)에 쓴 <두륜산대흥사명부전헌답기> 현판이 걸려 있다
백설당(白雪堂)
북원 일곽의 침계루 우측에 자리잡은 승방으로 대흥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요사채이다.
원래 북원에는 여러 채의 승방과 선당, 중료(衆寮)들이 있었음을 사지를 통해 알 수 있는데, 현재 백설당의 규모를 보아 여러 채의 승방들이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백설당 동편 처마 아래에는 제주도 유배 중에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편액과 구한말 명신으로 미불체를 구사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백설당(白雪堂)’이라는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침계루(枕溪樓)
북원의 출입문으로 남ㆍ북원을 가로지르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자리한 2층 누각건물이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으로 출입하며,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다.
주심포식 겹처마 맞배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그 몸체를 구획지었다. 중층 누각건물로 하층은 돌담과 판장문으로 마감한 광으로 구성되며, 상층은 평면에 널마루를 깐 홀로 이루어진 강당류의 평면을 구성한다. 건물 외부는 대웅전을 향한 내벽을 제외하고 삼면을 판벽과 판문으로 처리하였으며, 어칸에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골기있는 필법의 ‘침계루(枕溪樓)’ 편액과 그 배면에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내부기둥이 없는 오량가구를 구성하여 상부 서까래 사이로 회골이 드러나는 연등천장을 단장하고 있으며, 상하의 기둥을 서로 분리하여 상하층의 쓰임새를 구분짓고 있다. 건물은 30평의 규모로 상층에는 법고와 1587년명 범종ㆍ목어ㆍ운판 등 사물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 측벽으로 감실형 틀 속에 금어 현암(玄菴)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걸려 있다. 이외 대흥사의 사적과 내력을 알 수 있는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樑文)’과 ‘중조성천불기(重造成天佛記)’ 등 24기의 현판과 시액이 침계루 사면에 걸려 있다.
천불전 기도 영험 유래 (千佛殿 祈禱 靈驗 由來)
이곳 千佛殿에 봉안된 천불상은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윤우선사(玩湖尹佑禪師)께서 千佛殿을 중건하시고 和順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로 경주 불석산에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10명의 대둔사(현대흥사)스님들께서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한 千佛로서 그 조각 자체가 서로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정교함과 신비스러움이 더한 천분의 부처님 입니다.
千佛殿 중앙 삼존불은 목불로써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보처에는 문수. 보현 보살상을 모셨으며 千佛이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거쳐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부처님으로 화장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며 경주에서 조성된 千佛을 2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순조 17년(1817년) 정축(丁丑)11월 18일 경주 장진포를 출발하여 울산을 거쳐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향하여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의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에 표착 하였다 이 배에는 768여구의 옥 불을 실고 있었다.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 하려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현감 꿈에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현몽하자 현감은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확인한 후 그 다음 해 7월14일 대둔사(대흥사)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옥 불을 돌려보내기 아쉬워 불상 밑면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일본표해록”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千佛殿에 봉안된 옥 불상은 근세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처음에는 가사(袈裟: 부처님과 스님들께서 입는 옷을 칭함)를 입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경상도 신도님 꿈에 여러 차례 가사 불사를 해 줄 것을 현몽 하여 서둘러서 가사를 만들어 입혀 드리게 되었다.
千佛께서 입으셨던 가사는 가사불사에 동참한 신도들 가정에 소장 하게 되면 온갖 근심과 걱정 장애가 없어지고 지극 정성으로 염원하는 마음속의 소원이 꼭 성취되는 영험이 있어 그 이후 유명한 기도처로 널리 알려진 千佛 기도 도량입니다. 이글을 접하시는 여러분들께서도 千佛殿 기도를 통한 영험을 성취 하시 바랍니다.
千佛殿 懸板 (천불전 현판, 조선후기 원교 이광사 친필)
(世尊坐道場) 세존이 앉으신 이 도량에
(淸淨大光明) 청정한 대광명 빛나니
(比如千日出) 마치 천개의 해가 떠서
(照耀大千界)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이듯 하네
千佛殿 으로 들어서는 門인 가허루(駕虛樓, 懸板 글씨는 全州出身 蒼岩 李三晩先生 親筆 )문지방은 U자 형으로 마치 소의 멍에와 같이 생겼으며, 千佛殿 앞산의 悟道재 능선과 千佛殿 뒷산의 悟心재 능선으로 연결되어 이어지는 허공 가운데 다리를 의미하며, 또한 인간세상(此岸)과 부처님의 세계(彼岸)로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을 이르는 뜻이다.
[천불전(千佛殿)_시도유형문화재 52호, 1974년 9월24일 지정 ]
천불전은 높이 쌓은 석축단(石築壇) 위에 낮은 기단(基壇)에 세운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다포계(多包系)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자연석(自然石) 기초(基礎) 위에 일부 괴목(槐木)으로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견고하게 보이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놓고 내4출목(內四出目), 외3출목(外三出目)의 다포작(多包作)을 꾸몄다.
건물 앞면에는 궁창판에 안상(眼象)을하였고 정교(精巧)한 국화무늬(菊花紋)·연화무늬(蓮華紋)의 꽃살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는데 중앙칸은 3짝, 좌우협칸(左右夾間)은2짝이다.
내부 중앙에 목조(木造)의 본존불(本尊佛)을 봉안(奉安)하였으며 주위에 옥석(玉石)으로 조각한 천(千)의 작은 불상을배열(配列)한 것이 특이(特異)하다. 기록에는 순조(純祖) 11년(1811) 불탄 것을 동(同) 13년(1813)에 중건(重建)하였다고 한다.
순조 11년(1811)에 불에 탄 뒤 2년 뒤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의 중앙에는 목조 본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6년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천 개의 불상이 배열되어 있다.
석조천불상(石造千佛像)
1813년에 중건된 천불전에는 중앙에 목조석가삼존상과 그 주위로 1,000구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계단식 불단 위에 봉안된 천불은 천불전 중창주인 완호(玩虎) 대사의 제자인 풍계(楓溪) 대사의 발원으로 경주지역 옥석으로 조성되었으며, 현재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불에 전하는 전설은 1821년 풍계대사가 쓴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등장한다.
풍계대사의 지휘로 천불전에 봉안할 천불이 6년에 걸쳐 완성된 후, 몇 척의 배에다 싣고 바닷길을 통해 대흥사로 향하던 중 풍계대사가 탄 배가 울산진(蔚山津)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표류한 배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닿았는데, 배에 실린 천불을 본 일본인들이 이를 봉안하기 위해 급히 절을 지으려 하자 불상들이 그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의 불상으로서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된다”고 현몽하였다. 그들은 천불의 영험을 신비로이 여겨 대둔사로 천불을 돌려보냈으며, 그곳에 왔던 옥불상들 밑바닥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전한다.
천불은 19세기 불상으로 모두 불신(佛身)에 회칠로 장엄되어 있으며, 일률적인 자세로 신체에 비해 상호가 큼직한 모습이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아한 모습이며, 귀를 특히 크게 표현하였다. 나발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모두 표현된 소형불상과 중앙계주가 큼직히 솟은 중형불상으로 구분된다.
불상은 높이 25㎝ 안팎의 소형불상이며, 중앙 목조삼존상 뒤쪽으로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조 석가여래삼존상이 천불의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래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경상도 불자들의 꿈속에 현몽하여 ‘가사를 입혀 달라’는 요구에 따라 4년마다 한번씩 가사를 입히고 있으며, 갈아입은 헌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고 전해진다.
용화당(龍華堂)
대흥사 천불전 서쪽에 있는 요사로 정면 8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익공양식으로 매우 단조로운 건물이다. 승려의 교육학당인 강당 겸 선방(禪房)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가 1811년(순조 11)에서 1813년에 준공하였다. 그뒤 이용에 편리하도록 증축된 부분이 있다.
건물의 남쪽은 ‘ㄱ’자로 꺾여 돌출시킨 부분이 있어 맞배지붕을 얹어 연결시켰고, 다른 쪽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남쪽에는 온돌방 3개와 부엌을 놓고 건물의 가운데에는 큰 선방과 그 북쪽으로 작은 방 2개가 있다. 이 선방의 동서면에는 큰 퇴와 작은 툇마루를 두었고, 부엌 쪽에는 넓은 다락방을 위쪽에 두어 부엌 한쪽에서 오르내리는 계단을 두었다.
건물 외벽에는 세살문, 붙박이 살창, 판벽 등을 만들었다. 기둥 일부의 주두(柱頭) 위에는 연화(蓮華)를 조각한 주심포작(柱心包作)을 꾸몄다. 전면 외부포작의 공법이 초익공인데 그 초각이 매우 간략하여 좌로부터 다섯번째까지만 익공양식이다.
자연석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나 왼쪽에서 여섯번째 기둥만이 네모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두리기둥에는 배흘림을 두었다. 전면 처마도리는 각을 둥글린 납도리인데 받침장혀를 대고 덧장혀로 받쳤으며 소로를 끼워 창방을 보냈다.
종도리도 역시 각을 죽인 납도리로 장혀만 받쳤으며 동자주대공으로 지지되었다. 대들보는 자연목을 사용하였다. 후면 처마도리는 모접이 납도리를 장혀가 받치도록 한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일로향실(一爐香室)
천불전 뒤쪽 축대 언덕에 자리한 일로향실(一爐香室)은 현재 주지스님의 요사채로 막돌과 힌줄눈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낮은 기단 위에 ‘ㄷ자형’ 건물로서, 자연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정면 7칸, 측면 6칸의 맞배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이기도 한 이 곳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데, 전면 좌측에 조선 제일의 명필인 추사(秋史)의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편액은 초의선사와 인연이 있는 추사가 이곳에 들러 써준 글씨로, 예서(隸書)로 쓴 힘찬 필획과 자유로운 짜임새를 통해 추사체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이곳의 ‘일로향실’이라는 편액은 양산 통도사를 비롯하여 구례 천은사 등 많은 대찰에 그 모각본이 전해지며, 추사의 글씨를 흠모하는 이들에게 대흥사는 그 진본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표충사 (表忠詞)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
표충사는 서산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액사우(賜額寺宇)로서,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1669년(현종 10)에 건립되었다.
표충사 일곽의 풍제문인 내삼문 정면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건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자리한다.
건물 외부는 자연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전면에 2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하였으며, 측면과 배면은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어칸 상부에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대왕이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이란 편액 두 기가 있으며, 단조로운 채색의 단청으로 사당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특히 표충사 사액(賜額)은 1788년 천묵(天?)ㆍ계홍(戒洪) 스님이 서산과 유정ㆍ처영의 영정을 모실 사우의 건립을 모색하면서,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802)이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우건립의 정당성을 왕에게 주청하여 건립허가와 함께 ‘표충사’이라는 사액을 받게 된 것이다.
건물은 전반적으로 조선후기의 건축기법을 살펴볼 수 있으며, 건물 내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동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ㆍ처영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이곳은 부처의 삼보도량 가운데 승보(僧寶)를 존중하고 받들어 불가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도량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예제문(禮齊門)
이 건물은 조선 정조12년(1778년)에 대사의 높은 공을 기리기 위해 왕이 친히 사액을 내리고, 직접 정조대왕이 표충사라는 현판 끌씨까지 썼으며, 나라에서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혜를 받았다.
이후 관아의 보호를 받으면서 선암사, 송광사와 견줄만한 지위로 향상되었다.
조사전[祖師殿]
천불전 일곽의 돌담길을 따라 표충사 영역에 들어서면 표충사당 좌측편에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조사전은 3단의 바른층쌓기 방식의 장대한 기단 위에 단촐하게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계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외부는 다듬어진 2단의 원형 초석 상부에 두리기둥을 세워 전면 1ㆍ2분합의 격자창호로 장엄하고 있으며, 건물 내부는 3폭의 조사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진영은 창건주 아도조사(阿度祖師)를 비롯하여 대흥사 13 대종사와 13 대강사의 진영을 모신 3폭으로 구분되는데, 6명(1폭)ㆍ5명(2폭)으로 2단 구성 아래 진영을 배치하고 있다.
표충비각(표충사)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 격퇴에 앞장선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되었다
서산대사는 어려서 고아로 자란 후, 출가하여 선가의 법을 체득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도 16조 도총섭이 되어 유정, 처영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보련각(표충사)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 격퇴에 앞장선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되었다
서산대사는 어려서 고아로 자란 후, 출가하여 선가의 법을 체득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도 16조 도총섭이 되어 유정, 처영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대광명전(大光明殿)
대광명전은 헌종 7년(1841)에 초의선사가 건립한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갖는 익공양식으로 매우 단아한 건물이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한 기단상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민흘림 원주를 세웠으며, 가구는 5량구조로 되어 있다. 공포는 행공첨차가 외목도리의 장설을 받고 있는 주심포계의 익공형식으로 익공의 형상은 기둥머리로부터 둥근 판형으로 되어 있고 그 단부에는 복잡하게 조각된 쇠서 2개를 내었다.
건물 정면의 창호는 어간에는 3짝, 양 협간에는 2짝의 빗살창을 달았다. 천장은 종량 위로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고 그 외에는 판자를 댄 빗천장으로 되어 있다. 법당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천장의 반자 단청문양과 공포 사이에 예스러운 벽화들이 은은한 고풍을 보여주고 있다. 본 전각에 특히 주목되어지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중앙부분이 위로 굽은 동형의 대들보 2개로 그 형상이 몹시 자연스러우면서도 특이하다.
여기 대광명전 일원에서 초의선사가 머물면서 다선 일매의 선생활을 하며 쇠미해 가던 대흥사를 다시 한번 중흥케 하였다고 전한다.
성보박물관
해탈문을 들어서면 대흥사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해탈문 우측길을 따라 걷다보면 방문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무염지가 반기고 정면에는 은은한 차향이 느껴지는 동다실이 있습니다. 동다실을 조금만 걸어가면 우측에 성보박물관이 보입니다.
지붕은 기와로 되어 있지만 어쩐지 현대식 건물 같은 느낌이 드는 성보박물관. 이곳은 3개관으로 분류됩니다.여러분이 박물관 입구로 들어서서 바로 보이는 것이 본관이며 우측이 서산관, 좌측이 초의관입니다.
대흥사 성보박물관은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서산대사 유물관’으로 건립되었습니다. 그 이후 1998년 좌우측에 각각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 2동을 지어 대흥사 성보박물관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현재 성보박물관에는 금란가사(金?袈裟)ㆍ옥발(玉鉢)ㆍ신발ㆍ수저(匙箸)ㆍ교지(敎旨) 등 서산대사의 유품류와, 대둔사지ㆍ대둔사사적ㆍ만일암지 등의 사적류,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과 진불암대종 등의 범종류, 준제관음도ㆍ11면40비관음보살도ㆍ대양문 범왕탱 등의 불화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 개장시간 : 오전 8:00 ~ 오후 6:00
점심시간 : 오전 11:30 ~ 오후 12:30
매월 둘째주, 넷째주 월요일 휴관
남미륵암(南彌勒庵)
남미륵암은 창건연대를 알 수 없고, 다만 전훤선사(典煊禪師)가 중수했다는 사실만『대둔사지』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스님들의 수도처로 이용되는 조그마한 건물과 음각의 마애불상이 남아 있다.
『대둔사지』에는 '두륜봉 아래 남미륵암에 있는데, 미륵불은 전실이 없어 이끼가 끼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내용으로 보아 남미륵은 조성 당시부터 보호 전각이 없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이 남미륵은 전실이 없이 밖으로 노출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서 미륵불을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남미륵암 불상의 조각 수법은 음각의 형태를 취했는데, 북미륵이 양각임에 비해 남미륵이 음각이란 점에서 아마도 이들 미륵불은 음양의 조화를 고려하여 조성한 듯 하다.
현재 남미륵암에는 스님들이 수행했던 조그마한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 고려시대 양식으로 보이는 납석여래좌상 1구가 발굴된 바 있다.
북미륵암(北彌勒庵)
이들 암자는 만일암의 북쪽과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북암, 남미륵암이라 불렀다. 이 두 암자는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둔사지』에는 '건륭갑술에 온곡영탁(溫谷永鐸) 대사가 북암을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암은 1754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세에 연담 유일(蓮潭有一) 벽담행인(碧潭幸仁) 아암혜장(兒庵惠藏) 같은 고승들이 바로 이곳에서 강학(講學)을 열었다.
일지암
대웅전에서 700m가량 정상 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조선 후기 대표적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 나라의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초의 선사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인 일지암이 나온다.
초의 선사는 일지암을 39세 때인 1824년(순조24)에 중건하여, 이곳에서 독처지관(獨處止觀)을 한 유서 깊은 암자이다.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수도하기 위해서 지은 암자로, 초의 스님이 열반에 들자 폐허가 되었다. 이곳은 초의선사가 지은 암자라 해서 '초암터'라 불리웠다. 수 십 년 전부터 차에 대한 일반인들의 기호가 높아지면서 차의 중흥조 초의선사의 유적지를 찾게 되면서 일지암이 중건되었다.
일지암터는 40여년 전에 응송 스님과 낭월 스님이 그 터를 확인하여 그곳에 건물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터가 있는 곳은 샘에서 물이 흘러나와 늘 질척거렸다고 한다. 물이나오고 양지바른 곳이라서 이곳에는 산돼지나 노루가 다니는 길목이었고, 그래서 숯꾼이나 초군들이 짐승 덫을 설치하던 곳이라고 한다.
초의 선사는 이곳에서 유명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선다일여의 가풍을 드날리며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같은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쇠퇴해 가는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해 일지암은 한국 차의 성지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곳에는 옛 정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선다를 음미했던 다정(茶亭)이 있으며, 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나무 대롱에 연결된 돌물확에 담겨져 흐른다. 이 다천(茶泉)과 돌물확, 차를 끓이던 다조(茶, 돌부), 그리고 위아래의 연못과 좌선석(坐禪石) 등은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일지암'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는 1980년 한국다인회 회원들이 다도의 중흥조 초의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이 초정(草亭)은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이다. 그리고 일지암 본당은 윗연못에 평석을 쌓아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치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게 한다.
윗 연못에서 잉어가 한가로이 노니는 등 누마루에서 구름 낀 산경을 멀리 내려다보는 다회(茶會)와 선유(仙遊)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음미하게 할 만하다. 그래서 초의의 시(詩).선(禪).다(茶)의 경지가 한데 어우러진 차문화의 산실이 됐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초정과 연못 사이에 축조된 석축에는 '다감(茶龕)'이라 새겨진 평평한 면이 끼여 있고 그 앞에는 이보다 넓은 판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 돌 평상을 차를 마시며 선을 하던 좌선석으로 보기도 한다.
초의 선사는 대둔사의 13대종사로 일찍이 이곳에 기거하며 다도를 중흥시킨다. 그는 「동다송」이라는 우리 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차를 재배하여 널리 펴는 등 다도의 이론적인 면이나 실제적인 면을 크게 정리하고 닦음으로서 다도의 중흥조로 추앙 받고 있다.
당시 대흥사(대둔사) 가까이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다인(茶人)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초의와 차를 통하여 더욱 두텁게 교유하였다. 다산은 이곳과 가까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대흥사(대둔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추사 또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 까닭에 대둔사와의 관계를 맺게 되고 초의와도 남다른 친교를 가졌다. 이런 까닭으로 19세기초 대둔사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다도는 다시 한번 중흥을 이루게 된다.
진불암과 고진불암
「대둔사지」에는 1630년(인조8)에 수월극현(水月克玄)대사와 덕호(德浩)가 함께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보다 훨씬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693년(숙종19)에 이홍록(李弘錄)이 덕탄(德坦)과 함께 중건했고, 1750년(영조26)에는 북미륵암을 중수한 바 있는 온곡대사(溫谷大師)와 함께 우일(宇一)장로가 진불암을 중수했다. 또한 채미대사(採薇 大師)의 글에는 영곡(靈谷) 영파(影波).만화(萬化).운담(雲潭).아암(兒庵) 등의 승려가 이 암자에 거쳐 했다는 기록이 있다.이처럼 진불암은 조선중기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현재 진불암은 응진당, 향적당,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응진당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안에는 불상으로 석가 부처님과 28나한상, 문관상이 있다.
그리고 1987년 봉안된 범종과, 1972년의 진불암 중수 불사 당시의 시주자 이름이 적힌 현판도 있다. 불화로는 삼세후불탱화를 비롯해서 칠성탱화.신중탱화.산신탱화가 있다. 이들 탱화는 낭월 고재석스님이 그렸다.
진불암에서 북암으로 넘어가는 삼거리에 토굴이 있는데, 진불암의 옛주인 청화스님의 수도처이다. 진불암은 대흥사의 암자중 신도들이 많은 탓인지, 크고 작은 옹기들이 장독대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한편 「대둔사지」에는 고진불암과 16나한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진불암은 현재의 진불암 근처에 있다. 옛날 기록에 말하기를 강진의 백도방(白道坊)에 서씨라는 어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바다 한 가운데서 고기를 잡다가 서쪽 나라의 배를 만났다고 한다. 배 안에는 16대 아라한상이 실려 있어 '그것을 두륜산방(頭輪山房)에 봉안하고 편액을 진불(眞佛)이라 한다' 했다. 진불은 곧 응진(應眞)으로서 나한을 뜻하는 것이다. 그 후에 정사(精舍)를 산방(山房) 곁에 건립하여 이름을 진불이라 했으며, 또 달리 고진불(古眞佛)이라 했다. 1740년에 위일장로(位 一長老)가 중건했으며, 또 1791년에 정능선로(定能禪老)가 중건했으니 전후 다섯번을 중건했다.'
고진불암은 진불암 바로 위에 있는 암자로, 지붕은 스레트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 암자는 스님들의 수도처로 사용되고 있다.
상원암(上院庵)
상원암은 진불암에서 약 500여m 남쪽에 자리잡은 암자이다. 이곳은 예전부터 대중을 모아놓고 불경을 강론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암자로 부르지 않고 원(院)으로 불리웠던 것 같다.『대둔사지』에도 이곳을 분명 암자로 분류해 놓고, 상원암으로 기록하지 않고 '상원(上院)'으로 기록한 사실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상원은 언제 창건되었는지 그 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강희년간(康熙年間ː1662∼1722)에 화악대사(華岳大師)가 중건하였다'는 『대둔사지』의 기록으로 보아, 18세기 초 에 중건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악대사가 암자를 중건하기 이전에도 이곳은 누각을 갖출 정도로 규모가 큰 암자였던 것 같다.
'취여삼우가 대중을 모아놓고 화엄종지를 강론하고 있었다. 상원루의 담장 밑에 있던 화악은 강의를 엿듣다가 깨달은 바 있어 팔러 다니던 농기구를 함께 하던 사람들 에게 주어버리고 마루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배움의 과정을 요청하였다.'
대흥사의 제2대 대종사인 취여의 강론을 엿듣고, 이에 깨달음을 얻은 화악대사가 불가에 입문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내용인데, 여기에 상원루(上院樓)라는 누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상원은 대둔사의 대종사와 대강사들이 거처하면서 법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곳에서는 취여, 월저, 화악, 설봉, 설암, 벽하, 호암, 상월, 연담 등의 대종사와 만화, 연해, 정암, 완호 등의 대강사들이 거처하면서 강론(講論)을 펼쳤다고 하니, 당시 상원의 규모와 사세를 짐작할만 하다.
상원에서는 도솔봉이 정면으로 바라다 보인다. 그런데 도솔봉에서 작전도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이곳을 보면 마치 함박지 지형처럼 보인다.
남암(南庵)
남암(南庵)은 관음암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암자이다. 이 암자는 가경2년(嘉慶二年ː1797)에 전훤선사(典煊禪師)가 중수하였으며, 절의 회주인 보선스님이 최근에 복원하였다.
대숲을 지나 약 50여미터 내려가면 관음암이다. 암자 앞마당에는 꽤 큼지막한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연화봉 아래쪽에 자리잡은 남암은 요사채의 좌향이 가련봉과 두륜봉을 마주 보고 세워졌다. 건물이 동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전에는 햇볕이 잘 드는 편이나, 오후에는 뒤편을 가로막고 있는 연화봉 때문에 해가 짧다. 산의 음지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에 겨울 바람이 거세고, 습기가 매우 많은 편이다.
이곳에 바라보는 풍광은 가련봉과 두륜봉에서 솟구치는 암봉과 여기서 완만하게 펼쳐진 산자락, 그리고 그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암자들이 한데 어울려서 아름다운 자연의 조화를 한껏 뽐내고 있다.
청신암(淸神庵)
청신암은 대흥사 산내 암자 가운데 큰절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암자로 대웅전과 청신암이 갈라지는 반야교의 오른편 계곡 옆에 자리잡고 있다. 청심암은 법당과 요사를 함께 겸하고 있는 건물 형태로 되어 있다. 지금의 법당은 1997년 새로 중수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두륜봉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한 눈에 보이는데, 이 산줄기를 남근(男根)으로 비유하여 이곳이 비구니들의 수도처인 까닭을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이곳에는 아미타불상과 관음 대세지보살의 삼존상이 있고, 아미타 탱화 칠성탱화 신중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신중탱화로서 본래 1868년(고종5)에 도선암(道仙庵)에서 조성한 것이다.
화면 중앙에 새의 날개 깃이 꽂힌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위태천(韋太天)이서 있으며, 그 옆에는 칼을 든 무장들이 서 있다. 위쪽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합장을 하고 있으며, 그 옆에 천부중(天部衆)이 시립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간략한 구성을 보이는 불화로서 기연(錡衍) 등의 금어가 그렸다.
또한 후불 탱화인 아미타 탱화는 화기에 의하면, 1870년 천여(天如) 등의 금어가 그려서 무량전(無量殿)에 봉안하였다. 그림의 구성은 연화대좌에 앉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정병을 든 관음보살과 석장을 짚은 지장보살이 대칭으로 시립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가섭과 아난이 합장하고 서 있다. 전체적으로 구성은 단순하지만 인물 주위의 바탕을 붉게 채색하고 금니(金泥)로 화염과 구름을 복잡하게 그려 놓고 있다. 그밖에 칠성탱화는 1966년, 산신탱화는 1935년에 봉안되었다.
한편 이곳에는 전에 진불암에 봉안되었던 범종이 있다. 어느 때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명문(銘文)에 '강희사십팔년기축사월일진불암대종(康熙 四十八年己丑四月日眞佛庵大鐘)'이라 씌어 있어 1709년(숙종35)에 주조되었음을알 수 있다. 또한 범종 조성에 참여한 화주 수성(守晟)을 비롯 주공(鑄工).각공(刻工) 등의이름이 새겨져 있다. 크기는 높 70cm, 입지름 50cm로 정상부에는 용뉴와 용통을 두었으며, 상부에는 뾰쪽한 앙련(仰蓮)과 그 아래에는 평범한 연화문을 나타냈다.
그 아래에 유두와 4좌의 유곽, 그리고 보살상을 교차하여 배치하였다. 유곽 위에 마련한 원 안에는 범자(梵字)가 쓰여 있다.
만일암(挽日庵)
만일암은 두륜산의 가련봉 아래에 있는 암자로 대둔사의 여러 암자 중에서 지세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옛날 기록과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만일암 이 비록 암자에 속하지만, 대둔사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하여 다산은 『만일암지』에서 '유송(劉宋) 때 정관존자가 창건하고, 소량(簫梁) 때 선행대덕이 중건하였다'고 기록하면서, 이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강희 14년(1675)에 융신선사(融信禪師)가 중건하고, 현기화상(玄己和尙)이 강희 말년에 중수하였으며, 응명두타(應明頭陀)가 건륭년간(1736-1795년)에 중수하였다. 이후 가경 14년(1809)에 자암전평(慈菴)과 은봉두예(隱峰斗芸)가 또 다시 중건하였는데, 이것은 믿을만한 사실이다. 지금 암자는 무너져 없고 그 터만 남아 있다.
만일암에서는 만화원오(萬化圓悟), 연해광열(燕海廣悅), 금하우한(錦河優閒), 금봉희영(禽峰僖永), 백화찬영(白花贊英), 지월정희(智月鼎熙), 응성민훈(應星旻訓) 등의 여러 고승들이 머물렀다.
암자터 주변에는 오층석탑, 연자맷돌, 석등, 샘터 등이 남아 있다.
『만일암지』에는" 7층석탑이 있으며, 그 탑은 아육왕이 세웠기 때문에 아육왕탑이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오층의 석탑은 석등의 옥개석을 상륜부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7층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할 때 암자보다 탑을 먼저 세웠다고 한다. 탑을 완성한 후에 암자를 지으려니까,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해가 지지 못하게 탑에 묶어 놓고 암자 세우는 작업을 계속했는데, 암자를 완공 한 후에 암자명을 잡을 만(挽)자와 해 일(日)를 써서 만일암(挽日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석탑 앞에 있는 샘터는 배수가 잘되지 않아서 물맛은 좋지 않다. 이 샘은 원래 음양의 조화를 고려하여 음 양수 샘을 만들었다고 한다. 암자터 아래쪽에 암 수의 괘목 나무가 서 있는데, 이것을 고려하여 음 양수 샘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도솔암(兜率庵)
『대둔사지』에는 '도솔봉(兜率峰)에 상(上), 중(中), 하(下) 3개의 암자(庵子)가 있는데, 상암(上庵)이 절경(絶景)이고, 샘물이 청렬(淸洌)하다.'는 기록이 있다.
도솔봉은 불교의 천상 세계인 도솔천에서 유래한 듯 하다. 도솔천(兜率天)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분류되는 천(天)의 하나로, 미륵보살이 머무르고 있는 천상(天上)의 정토 (淨土)이다. 범어 듀스타(Tusta)의 음역으로서, 의역하여 지족천(知足天)이라고 한다.
즉 이곳에 사는 무리들은 오욕(五欲)을 만족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고, 그 산의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 에 있는 욕계(欲界) 6천중 네 번째 천(天)을 도솔천(兜率天)이라 부른다.
도솔천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외원은 수많은 천인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곳이고,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로서 내원궁(內院宮)이라고 부른다.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태어나기 직전까지 이 내원궁에 머무르면서 중생교화를 위한 하생의 때를 기다 렸다고 한다.
두륜산의 도솔봉과 도솔암, 그리고 내원은 바로 이같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의미를 취하여 붙여진 이름들이다.
작전도로를 오르다보면 서편제 촬영장소인 소리재가 나오는데, 그 고개 못 미쳐 왼쪽 산기슭에 도솔암(兜率庵)과 내원(內院)이 있다. 소리재 아래쪽에 무선중계소에서 사용하는 샘이 있고, 그 샘에서 산기슭의 측면을 타고 약 300m 정도 오르다보면 커다란 바위가 나타난다. 그 바위 위쪽에 암자터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상도솔암이다.
여기에는 암자터와 다듬어진 돌로 잘 짜여진 샘이 있다. 암자터 앞에 있는 커다란바위에 올라서면, 향로봉, 고계봉, 가련봉, 두륜봉, 투구봉, 위봉 등의 두륜산의 주요 봉우리가 마주 보이고, 두륜산 동쪽으로 펼쳐진 암자들을 굽어보듯 살필 수 있다.
상도솔암의 샘터에서 약간 위쪽으로 오르면 양수장 같은 건물이 있고, 여기서 100m 내려가면 암자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가 중도솔암이다. 작전도로를 만들면서 암자터의 훼손이 심해서 주변에 흩어진 기와장으로 암자터의 규모만 짐작할 수 있다.
하도솔암은 중도솔암에서 약 50m 정도 내려가면 구작전도로와 만나고, 여기서 다시 신작전도로를 건너 약 50m 정도 내려가면,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지계곡을 만나는데, 지계곡의 왼쪽이 하도솔암터이다.
이들 암자도 1823년경에 이미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자료출처 : 대둔사의 역사와 문화]
미륵불조성설화
『죽미기』에는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이 동남녀(童男女) 두 사람을 산 속에 내려보내서, 여자가 만든 것을 북미륵이라 하고 남자가 만든 것을 남미륵이라 이르렀다'는 미륵불 조성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천상에서 옥황상제의 아들과 딸이 천상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불경죄를 지었 다. 중신(重臣)들이 모여서 의논하기를 남매의 죄가 너무 커서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원로 중신 한 분이 '태자와 공주를 사형시켜 버리면, 누가 천상세상의 후예가 되겠는가? 그러니 천상에서 인간세상으로 귀양을 보내자. 인간 세상에 가서 속죄하고 잘 근신하면 다시 죄를 풀어주고 천상의 세상으로 돌아오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모든 중신들이 그 제안에 찬성해서, 남매의 죄를 사형에서 귀양으로 감형시켜주었다. 남매가 귀양을 떠나기 전날 어머니는 오누이를 불러다놓고, 이런 당부를 하였다. '너희가 인간 세상으로 귀양을 가서 천상에서 지은 죄를 진심으로 속죄를 하여라. 그 죄를 속죄하려면, 인간 세상에 가서 그 죄를 면할 만한 좋은 일을 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다시는 천상의 세상에 올라 올 수 없다.'
'그러면 어떤 일을 해야 되겠습니까?'
'인간 세상에 가서 불교가 전파되지 않은 곳이라면, 너희들이 그곳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여라.'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남매는 지금의 만일암으로 내려왔다. 그곳은 아직 불교가 전파 되지 않은 곳이라 이곳에서 '불교를 전파'하기로 맹세하였다.
그런데 공주가 태자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나는 여자인데, 남자인 너와 같겠냐? 부처님을 조성하고 나는 목재로 법당을 지을테이니, 너는 돌로 법당을 지어라.'
그래서 공주는 북쭉에서, 태자는 남쪽에서 각자 미륵불을 조성하기로 했다.
바위에다 미륵불의 형태만 조각한 태자는 돌로 법당을 짓기 위해서 내원암 너머에서 돌을 자르고 다듬어서 쭉 세워 놓았다. 그런데 공주는 나무로 법당을 지었기 때문에 태 자보다 먼저 미륵불과 법당을 완성하였다.
천상에서는 공주와 태자가 불상을 완성한 것을 보고 그들의 죄를 속죄해 주었다. 죄를 용서받은 태자와 공주는 구름을 타고 다시 천상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태자가 조성하다 그만 둔 남미륵은 불상의 윤곽선만 그려놓은 채 미완성에 그치고 말았고, 공주가 조성한 북암의 불상은 완성상태로 아름다운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자료출처 : 대둔사의 역사와 문화]
마지막 의병 항쟁지
전남의 해남, 강진, 완도 등지는 1908∼1909년 사이에 의병항쟁의 중심지였다. 처음에는 함평, 나주, 장성, 광주 등 주로 내륙지방에서 전개되던 의병항쟁은 그후 점차 확산되어 1908년 말에서 1909년 초에는 전남의 도서지방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의병 봉기가 도서지방으로 확산된 배경에는 당시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한 전국적인 저항운동과 함께 「완도삼림문제」와 「어업법」시행이라는 지역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 두 문제는 일본이 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침탈을 강화 한 것으로 삼림과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해 가던 연안과 도서지방 주민들의 반일 감정 을 표출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비슷한 시기에 이 지역으로 유배 온 의병관련자들이 탈출하여 의병활동에 가담함으로써 이 지역 의병 활동은 더욱 활기차게 전개되었다. 특히 심남일 부대의 의병활동은 완도 진도 일대에 정배된 의병관련 유배수들에게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1908∼1909년 당시 전라남도 내륙 지방에서는 심남일, 안규홍, 전해산 등이 주도하는 의병부대가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심남일은 전라남도의 중남부 지역, 안규홍은 중동부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전해산은 주로 중서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 가운데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8년 후반에 활동 영역을 해남까지 넓혔다.
이들은 재류일본인(在留日本人)을 축출하는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때 해남에서의 반일 투쟁을 주도한 인물은 이덕삼인 듯하다. 그가 1909년 중반까지 해남·완도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보아 그러하다. 그런데 이덕삼은 심남일의 기군장(起軍將)으로서 출신지역은 영암, 본명은 김덕중으로 알려져 있다.
1909년 봄 이후 의병부대를 지도한 사람들은 유배수들과 토착주민들이었다. 유배수인 황준성, 추기엽, 강성택, 그리고 해남 출신인 황두일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대다수 일반의병들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다가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참가한 도서 연안 주민들이었다. 결국 해안 및 도서지방에서는 의병출신 유배수들의 지도력과 도서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 호응에 힘입어 의병 봉기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심적암전투
음력 7월 8일 심적암에 도착한 황준성 의병부대는 일본 수비대에 선전포고를 한 후 에 의병 30명을 풀어 보초를 세우는 등 일본헌병수비대의 기습에 대비하였다. 선전포고를 받은 일본수비대 요시하라 대위는 수비대 22명, 경찰관 3명, 헌병 4명을 이끌고 대둔사로 출동했다. 황준성 대장이 병법에 밝은 군인 출신이란 점을 간파한 요시하라 대위는 대둔사에 정찰대만 파견하는 잔꾀를 부린다. 그리고 초조와 긴장으로 지키던 의병들이 새벽녘에 철수하자 철수하는 의병 뒤를 따라간 일본수비대가 새벽 4시경에 심적암을 포위하여 공격을 퍼부었다.
일본수비대의 공격으로 황준성 의병부대는 전사자 24명, 포로 8명과 화승총 47정, 군도 5개를 빼앗기는 피해를 입은 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당시 전투 현장에 참가 했던 응송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침허스님 등 심적암의 스님 다섯 분도 이곳 에서 일본 수비대의 총에 맞고 죽었다고 한다.
심적암에서 일본수비대의 포위공격을 뚥고 무사히 빠져 나온 황준성 대장은 현산면 읍호리 이 참판댁으로 피신한 후에 보성, 순천 등지로 피해 다니다가, 그해 12월 7일에 해남경찰서에 자수하여 1910년 4월 22일에 대구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추기엽은 대둔사 패전의 책임을 물어 부하들에게 피살되었다. 의병 지휘자 중 유일한 해남 출신이었던 황두일은「대토벌작전」실시 직전에 부하 일부와 같이 자수하였 는데, 이에 따라 그의 부하들이 대거 자수한 듯 하다. 다만 주도 인물 가운데 강성택 만이 유일하게 체포를 면하였던 것 같다. 생포된 8명의 의병도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심적암에서 살상된 24명의 의병과 5명 의 스님은 현무교 부근, 지금의 매표소 뒷편에 집단으로 매장되었다고 한다. 주민들 에 의하며, 1930년대만 해도 이곳 메주바위 밑에는 사람의 뼈를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