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7)] 영조의 회한과 정조의 원망, 이곳에 함께 묻히다
한국아파트신문 2022.02.11
‘52년 최장수 재위’ 영조의 원릉
원릉의 겨울
눈 덮인 동구릉의 겨울바람이 차다. 원릉의 주인공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는 조선의 임금 중 가장 오래 살았다. 우리 나이 83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40대 중반에 불과한 조선 왕들 평균수명의 두 배에 가깝다. 가장 어린 나이 17살에 죽은 단종의 다섯 배다.
그는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왕위에 있었다. 무려 52년이다. 겨우 8개월 재위로 최단 기록을 가진 인종이야 말할 게 없고, 두 번째로 긴 숙종보다 6년을 더했다. 아버지 숙종이 왕위에 오래 있었던 데다 재위 4년이지만 이복형 경종까지 거치면서 영조는 서른한 살 늦깎이로 왕위에 올랐다. 훗날 8살이라는 최연소 기록으로 왕위에 오른 헌종과는 대조적이다.
이처럼 영조의 치세가 길었던 까닭에 그에 관한 얘기 또한 무궁무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다 소개하기엔 지루하고 지면도 턱없이 부족하다.
세자 아닌 세제로 왕위 오른 첫 사례
영조 어진(국립고궁박물관 소장/사진:국가문화유산포털)
영조는 숙종과 후궁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종이 그 유명한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아들(경종)은 그의 이복형이다. 최씨는 숙원, 숙의, 귀인을 거쳐 숙빈에 오르는 동안 아들 셋을 낳았다. 첫째와 셋째는 낳은 지 얼마 안 돼 죽었고, 숙의 때 낳은 둘째 아들이 영조다.
숙종은 최씨가 낳은 아들을 우리 나이 7살에 연잉군(延礽君)으로 봉했다. 숙종실록에는 6살(1699)에 봉해진 걸로 기록돼 있으나 영조실록에는 자신이 연잉군에 봉해진 건 6살이 아니라 7살 때라는 본인의 얘기가 있다. 그의 휘(諱, 임금의 이름)는 금(昑)이고, 호는 양성헌(養性軒)이었다.
연잉군 시절 잠저였던 창의궁 내 양성헌은 그가 사부 이현익으로부터 대학을 배우던 곳으로, 숙종이 그곳 이름을 연잉군에게 호로 내려준 것이다. 실록에는 그가 18살 때 마마(천연두)를 앓았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마마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으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영조는 세자가 아닌 세제(世弟)로 책봉돼 왕위를 이은 임금이란 특이한 이력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물론 효종처럼 형(소현세자)이 죽어 대신 세자로 책봉돼 왕이 된 예도 있지만 왕세제라는 이름으로 왕의 후계자가 된 건 영조가 유일하다. 이렇게 왕세제라는 특이한 지위는 그의 정통성에 취약점으로 작용해 왕위에 오른 후까지도 두고두고 당쟁거리가 된다.
그의 이복형 경종은 병약하긴 했으나 후사를 포기하기엔 이른 나이였음에도 노론의 압박에 의해 즉위 1년여 만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다. 세제 책봉에 성공한 노론은 한술 더 떠 세제의 대리청정을 추진한다. 그러나 소론의 반격으로 신축(1721)과 임인(1722) 두 해에 걸친 옥사를 치르면서 노론은 큰 타격을 입고, 연잉군까지도 역모 연루자로 몰릴 위기에 처한다. 경종의 배려로 가까스로 왕세제의 지위를 보존한 그는 1724년(경종 4)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영조는 노론과 소론 간 붕당의 폐해를 불식하고 양 당파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이른바 ‘탕평’을 천명한다. 그러나 앞서 경종조에 신임옥사로 숙청됐다가 영조 즉위 후 복귀한 노론 강경파의 소론 응징을 위한 반격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는 고육지책으로 노론 강경파를 축출하고 온건파로 교체한다. 결국 영조 초반의 탕평은 노론을 중심으로 정국의 안정을 꾀하면서 노론과 소론을 고루 기용하는 방식이었다.
탕평 이후 붕당…사도세자 목숨을 잃다
원릉의 가을 풍경
후반에 들어 노론계는 다시 분열된다.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정순왕후의 친정아버지 김한구를 각각 중심으로 한 척신세력의 등장 때문이다. 이들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소론과 남인 등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한다.
이처럼 얽히고설킨 세력다툼 가운데, 1749년 대리청정을 하게 된 세자에 대한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영조와 세자 간에는 틈이 생긴다. 1762년 김한구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허물을 고하며 그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글을 올린다. 영조는 대노해 세자에게 자결하라 명하나, 세자가 이를 따르지 않자 세자를 폐서한 후 뒤주에 가둬 죽인다. 임오화변의 비극이다. 그가 죽은 후에야 후회한 영조는 세자로서 그의 위호를 회복시키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영조는 세손(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이듬해인 1776년(영조 52) 3월 승하한다. 어느 드라마에서는 야사를 인용해 그가 죽기 전 매병(치매)을 앓았던 것으로 설정했으나 정사에서는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얘기다. 실록에 기록된 그의 마지막은 가래가 심하고 구토 증세를 보이는 등 병세가 악화한 끝에 숨을 거둔 것으로 돼 있다. 죽은 후 그의 묘호(廟號, 종묘에 모시는 신주의 이름)는 영종(英宗)이었고 당대 실록의 제목도 ‘영종대왕실록’이다. 1889년(고종 29) 영조(英祖)로 고쳤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인 11살 때(1704, 숙종 30) 당시 진사였던 달성 서씨 서종제의 딸을 첫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실록에 따르면 그 혼인은 ‘사치가 법도를 넘어 만금으로 헤아릴 정도’라고 했으니 그야말로 호화결혼식이었던 셈이다. 1721년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그녀는 세제빈이 됐으며, 세제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그녀는 조선의 왕비로서는 가장 긴 33년간을 왕비로 있었다.
오른쪽이 비어있는 정성왕후 능(서오릉 내 홍릉) 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홍릉에 홀로 남겨진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자녀가 없었던 그녀는 정빈 이씨가 낳은 영조의 첫아들 효장세자와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를 친아들처럼 아꼈다. 그녀는 1757년(영조 33) 64세로, 시어머니 인원왕후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정성왕후(貞聖王后)는 죽은 후에 올려진 시호다.
원비 정성왕후가 죽자 영조는 아버지 숙종의 명릉(明陵, 현 서오릉 내) 근처에 그녀의 능(홍릉·弘陵)을 조성했다. 그때 자신도 나중에 거기 묻히고자 오른쪽에 묏자리를 비워뒀다. 허우(虛右)라 한다. 그러나 영조가 죽자 손자 정조는 당시 대비였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를 의식해선지 할아버지의 유지와는 달리 현재의 자리에 원릉(元陵)을 조성했다. 이에 따라 정성왕후는 옆자리가 비워진 채 홍릉에 홀로 남게 됐다.
영조는 정성왕후가 죽은 지 2년 후 1759년(영조 35)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였다. 이때 영조 나이 66세, 계비는 15세였다. 문족(文族)으로 재야에 있던 그녀의 친족들은 국혼 이후 조정에 진출했다. 특히 오빠 김귀주는 노론계의 남당으로, 세력을 키워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북당과 맞서기도 했다.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여군(女君)이 되다
그녀는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한 후에는 왕대비로서, 노론 벽파를 비호하며 시파와 대립했다. 그러나 정조는 척신정치 청산을 위해 영조 후반기에 위세를 떨쳤던 척신들을 배척했다. 이때 김귀주 등 대비의 친족들도 조정에서 축출됐다.
1800년 정조가 죽고, 11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그녀는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한다. 수렴청정 당시 그녀는 자신을 여군(女君, 여자임금)이라 칭하며 국정을 주무른다. 드라마 속의 어린 계비 시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녀의 수렴청정과 함께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조가 추진하던 탕평의 원칙은 깨진다.
대비와 노론 벽파는 정조의 지지기반이자 자신들의 정적인 시파, 그중에서도 남인 시파에 많았던 천주교인들을 탄압한다. 시파 제거를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천주교 탄압이 확대되면서 희생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신유박해다.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내외 등 왕실 일족과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 등도 이때 목숨을 잃는다. 성종 때 한명회가 제안해 만든 오가작통법에 따라 다섯 집 중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인이 적발되면 모두 연좌해 처벌하면서 많은 사람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
효종 능 자리에 잠든 영조…정조는 왜?
3년 반에 걸친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난 그녀는 1805년(순조 5) 61세로 세상을 떴다. 영조가 이미 고령이던 때에 계비가 됐으니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정순왕후(貞純王后)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단종비였던 또 다른 정순왕후(定順王后)와 한글 이름이 같아 혼동하기 쉽다. 순조는 원릉의 영조 곁에, 합장하지 않고 쌍릉을 조성해 그녀를 장사지냈다.
원릉은 원래 제17대 임금 효종의 영릉(寧陵)이 있던 자리였다. 그런데 능의 석물이 기울고 봉분에 틈이 생겨 해마다 수리해도 문제가 계속되자 아들 현종은 여주 세종대왕의 영릉(英陵) 옆에 새 능을 조성해 옮기고 옛 능은 파묘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 영조가, 그리고 다시 30년 후에는 정순왕후가 그 자리로 들게 된 것이다.
정조가 유지를 무시하고 굳이 버려진 묏자리를 할아버지 능으로 재활용(?)한 건 정녕 정순왕후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에 스스로 실소한다. 원릉 주변 나뭇잎들이 흔들린다. 아들을 죽인 영조의 회한, 아버지 죽음의 집행자와 방조자였던 영조와 정순왕후에 대한 정조의 원망이 함께 묻혀 있을 원릉의 정자각 뒤로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